동군연합/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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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인적·물적 동군연합
2.1.1. 스페인+저지대[1]+부르고뉴+나폴리 왕국
2.10. 영국+하노버 선제후국[2] (후에 하노버 왕국으로 격상)
2.24. 프랑스 공화국+안도라(부분적, 현재)
2.29. 영연방 왕국[3]
3. 부부 동군연합
4. 공화국 동군연합
5. 동재상 연합
6. 실제로는 동군연합이 아닌 경우
7. 대중매체에서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동군연합의 주요 사례를 정리한 글.

역사적으로 발생한 대표적인 동군연합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이외에도 수많은 동군연합들이 있었으며 여기 있는 게 다가 아니다. 단순히 왕위(제위)가 아니라 ''공후백자남' 등 다양한 격의 작위를 겸하는 식이면 정말 조합이 굉장히 많다.

동군연합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럽 국가 및 유럽 국가의 속령이었다가 독립한 나라들에서 주로 나타난다. 전근대 유럽에서는 각 나라/지역의 영지와 거기에 사는 신민들이 군주/영주의 상속 재산이라는 관념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각 군주/영주 간 정략결혼이 많았다. 따라서 주로 유럽 국가와 유럽 국가에서 독립한 나라에서만 동군연합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왕위 계승의 법칙이 수틀리면 왕좌의 게임 왕위계승전으로 왕위 계승 전쟁이 흔히 벌어지곤 했다.[4]

2. 인적·물적 동군연합[편집]



2.1. 합스부르크 제국[편집]


가장 유명한 동군연합이자 동군연합의 대표적 제국.


2.1.1. 스페인+저지대[5]+부르고뉴+나폴리 왕국[편집]


선대의 결혼동맹 후광+막강한 조력자들+5개 국어를 구사하던 국제적 감각의 엄친아 버프를 보유한 카를 5세가 구축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고 판도. 카를 5세는 재위 중에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프랑스령을 포함하는 밀라노 공국의 영토까지 손에 넣지만, 대신 부르고뉴 일부와 명목상 가지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위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 카를 5세는 1555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나폴리+시칠리아+밀라노+저지대를, 1521년에 이미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주었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제위까지 물려주어[6] 두 합스부르크 통치령은 각각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및 시칠리아 왕국은 1714년까지 스페인에 귀속되었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갔다.[7]


2.1.2.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편집]


1526년 성립된, 역사에서 부르는 합스부르크 제국은 바로 이 오스트리아 중심의 동군연합이다. 근원은 보헤미아-헝가리 동군연합으로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14세기 룩셈부르크 왕조지기스문트 아래 동군연합을 이루지만, 동군연합 1대 만에 룩셈부르크 왕조가 단절된 이후 넘겨받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알브레히트 2세의 급사와 어린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즉위로 정착하지 못하고 각국의 섭정들이 득세하면서 동군연합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라디슬라우스마저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동군연합은 끊겼으나, 귀족들 간의 갈등 끝에 두 나라 모두 합스부르크 여인이 시집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야기에우워 왕조를 왕으로 모시면서 1490년부터 헝가리 왕국이 보헤미아 왕국과의 동군연합이 됐다. 하마터면 폴란드-리투아니아-보헤미아-헝가리 동군연합이 탄생할 수도 있었으나, 보헤미아-헝가리 왕이 폴란드-리투아니아까지 이어받지 못해 두 동군연합이 통합되지는 않았다.[8] 1526년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가 후사 없이 오스만 제국과의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러요시의 매부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면서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 동군연합, 즉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ermonarchie)이 만들어졌다. 한편 헝가리 왕국은 1102년 칼만 왕부터 크로아티아 왕위를 겸하고 있었고, 모하치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자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페르디난트를 왕으로 옹립해 크로아티아 역시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들은 몇 번의 해체 위기는 있긴 했지만[9]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중분해될 때까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아래에 놓였다.


2.2. 카스티야+아라곤[편집]


중세 말 15세기 이베리아 반도는 과거 이슬람 무슬림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잔해는 남쪽 끝자락에 있던 그라나다밖에 안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기독교 포르투갈,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던 상태였다. 이 와중 1469년, 당시 이베리아 반도 중부 지방과 북부 해안, 안달루시아레콘키스타 정복지를 다스리던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 제도,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라곤 왕실 영지를 다스리던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며 양국을 함께 다스림으로써 현대 스페인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1492년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레콘키스타를 완수하고, 또 아라곤 왕국이 별개로 나바라 왕국을 공격해 상 나바라를 손에 얻으면서 현대 스페인의 영토가 완성 되었다.[10]. 즉, 현대 스페인이란 나라의 기원도 원래는 동군연합에 있었던 셈이다.


2.3. 스페인 왕국+포르투갈 왕국+저지대[편집]


펠리페 2세가 아버지 카를 5세 뒤를 이어 스페인의 국왕이 된 후, 공석이 된 포르투갈의 왕위를 계승하면서(어머니, 즉 카를 5세의 황후인 이사벨라가 포르투갈의 공주였다.)[11] 형성된 동군연합. 이른바 이베리아 연합. 하지만 펠리페 2세 재위 중에 저지대 북부의 네덜란드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스페인에서 이탈했고, 포르투갈도 흡수된지 60년 만에 다시 독립했다.

펠리페 2세의 최초 병합 당시만 해도 포르투갈은 어느 정도의 독자적인 체제를 인정한 상태에서 국왕만 스페인 국왕을 같이 모시는 것에 가까웠는데, 펠리페 3세펠리페 4세 및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의 중앙집권 정책에 따라 포르투갈을 억압하자 결국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을 통해 다시 독립국이 되었다.


2.4. 헝가리 왕국+폴란드 왕국[편집]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지미에시 3세가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1370년에 죽자 그의 조카인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루드비크 1세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국왕 자리를 물려받으며 생긴 동군연합이다. 하지만 러요시 1세도 아들 없이 죽었고 헝가리와 폴란드는 그의 딸들인 마리어야드비가에게 분할 상속되면서 동군연합이 해체되었다.


2.5.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이전 동군연합[편집]


1385년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튜튼 기사단을 격파하기 위해 크레보에서 체결한 동군 연합. 이후 1386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12]의 결혼으로 야기에우워 왕조가 설립되었다. 이후 1562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루블린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 발전하였으며 야기에우워 왕조 시기에는 유럽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강대국이었다. 왕위계승을 놓고 내분 중이던 루스 차르국도 공격하고 오스만 제국의 공세를 좌절시키는 등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이 전쟁들에서 활약한 것이 그 유명한 윙드 후사르. 하지만 과두정 의회의 태생적인 한계 탓에 우크라이나 코사크 대반란이나 대홍수, 대북방전쟁 같은 여러 사건에 휘말려 비틀대다가 결국 망했다. 여담으로 결혼 당시 두 부부는 한국 나이로 각각 요가일라는 36살, 야드비가는 14살이었다. 또한 당시 리투아니아는 토속 다신교를 믿고 있었기에 야드비가는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개종을 결혼 조건으로 내세웠으나, 야드비가가 마음에 들었는지 요가일라는 이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주변국들은 이들의 거짓 개종을 의심하였으나,[13] 리투아니아는 그 후부터 전통 가톨릭 국가로 거듭났고 연합왕국(혹은 연합공화국)은 중유럽의 패권국이 된다.


2.6.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편집]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의 장남 시기스문드는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지그문트 1세의 막내딸이었기 때문에 연방의 군주로 선출될 자격이 충분했고, 이모부 스테판 바토리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이모 안나 야기엘론카와 스테판 바토리의 재상 얀 자모이스키의 지지를 얻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로 선출되었다. 1592년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자연스럽게 스웨덴 왕위도 계승했으나 어머니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로 자란 시기스문드는 종교개혁 이래 루터파로 개종한 스웨덴 귀족들 및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충돌했다. 결국 왕위에 욕심을 내 반란을 일으킨 칼 공작에게 패배해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당하며 7년 만에 이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2.7.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편집]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아일랜드 섬을 정복하고 명목상의 왕국인 아일랜드 왕국을 세운 후 잉글랜드 왕이 아일랜드 국왕을 겸했다. 다른 동군연합과 달리 아일랜드 왕국은 이름뿐이고 이 시기부터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땅이나 다름없었다.


2.8.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편집]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엘리자베스 1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발생했다. 이 사건 이래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사실상 한 국가가 되지만, 법적으로도 한 나라가 된 것은 앤 여왕 때다.


2.9. 프랑스 왕국+나바라 왕국[편집]


이 동군연합은 역사상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308년 프랑스 카페 왕조필리프 4세가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와 결혼하여 성립하였는데 1328년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4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여 동군연합이 단절되었다. 뒤이어 발루아 왕조를 연 필리프 6세는 나바라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는데[14] 프랑스와 달리 나바르는 살리카법이 없어서 필리프 4세의 장남 루이 10세의 딸 잔느가 후아나 2세로 즉위했다.

두 번째 동군연합은 이로부터 261년 후인 1589년 카페 왕조의 방계 후손인 방돔 공작 앙투안과 나바르의 여왕 잔 달브레(Jeanne d'Albret)의 차남이었던 나바라 왕 앙리 4세가 발루아 왕조의 단절 후 아버지의 혈통으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면서 발생하였다. 사실 나바라는 당시엔 이미 스페인에 의해 영토 대부분을 잃고 프랑스의 일부나 마찬가지인 상태였고 부르봉 가문 이전에도 1234년부터 프랑스 대귀족 가문[15]이 나바라 왕위를 겸하고 있었다.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 때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어 프랑스 대혁명 까지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라는 부가적인 호칭으로만 남게 된다.


2.10. 영국+하노버 선제후국[16] (후에 하노버 왕국으로 격상)[편집]


앤 여왕 사후 왕위 계승법에 따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가 영국의 조지 1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하노버는 살리카법에 의해 여성계승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후에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고, 하노버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즉위하면서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이러한 점 덕에 프레드릭 윌리엄 허셜·캐롤라인 허셜 남매가 영국으로 넘어와 천왕성을 발견하게 되고, 발견한 나라가 영국이 되게 하였다.


2.11.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편집]


프로이센은 튜튼기사단의 정복지로 튜튼기사단이 폴란드 왕국에 굴복하면서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후 독일 기사단국으로 이어지다가 16세기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525년 마지막 튜튼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루터파로 개종하면서 영지를 세습군주정으로 변경했고, 1619년 프로이센 공작의 대가 끊기자 마지막 공작의 맏사위자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17]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폴란드의 봉신이 된다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이로써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결성되었다.

17세기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시절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리투아니아대홍수를 틈타 벨라우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프로이센 공국에서 종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실제 중심지였던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십수개의 영지내 의회와 정부들을 통합해서 사실상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18]의 허가를 받아 제국 밖의 독립영지인 프로이센의 명칭을 사용하여 왕국의 이름으로 삼았다. 이때 브란덴부르크 왕국이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이라는 국호를 쓴 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왕의 칭호를 쓸 수 있는 건 오로지 차기 황제 후계자인 '로마왕'과 제국 내 선제후이자 1526년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속 쥐고 있었던 '보헤미아'뿐이었기 때문이었고, 여전히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었으며 왕령 프로이센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왕국을 표방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König in Preußen(프로이센 내에서의 왕)"이라는 외왕내제 식 칭호를 써야 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7년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를 쟁취하고 폴란드 분할을 통해 왕령 프로이센을 차지하고 나서야 "König von Preußen(프로이센 왕)"이라는 군주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2.12. 프로이센+스위스뇌샤텔 공국[편집]


뇌샤텔은 비록 스위스에 가맹해 있었으나, 다른 주와는 달리 영주가 지배하는 공국이었다. 원래는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의 방계가 뇌샤텔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1707년에 그 대가 끊기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뇌샤텔 공위를 이어받았다. 나폴레옹에게 털리기도 하는 등 몇 차례 곡절을 겪으며 내려오다가,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뇌샤텔에서는 스위스의 다른 주들처럼 사실상 공화제가 시행되었다. 결국 1857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식으로 퇴위하였다.


2.13. 바이에른 공국+라인 궁정백령[편집]


바이에른 공국의 비텔스바흐 가문라인 궁정백령까지 상속받았으나 이내 라인 궁정백령 및 상바이에른계와 하바이에른계로 갈라졌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루트비히 4세에 의해 통합되나 루트비히 4세는 생전에 라인 궁정백령을 형 루돌프의 아들들에게 주었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바이에른을 분할상속하면서 갈라지고 말았다. 이 가운데 라인 궁정백령이 1356년의 금인칙서를 통해 팔츠 선제후가 되었고, 바이에른은 1356년 금인칙서 당시 룩셈부르크 왕조카를 4세의 견제 때문에 선제후 자리를 박탈당했다가 30년 전쟁으로 선제후가 될 수 있었다. 팔츠계와 바이에른계로 갈라진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팔츠 선제후였던 카를 4세 테오도르가 황제 선거에서 1표만을 행사하는 조건으로 바이에른을 상속받아 재통합했다.[19]


2.14. 포르투갈+알가르브 왕국[편집]


포르투갈의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처럼 포르투갈-알가르브 연합왕국이었다. 원래 포르투갈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만 가리키는 지명이었으며 알가르브는 현재 포르투갈의 남부지방의 지명이다. 포르투갈 역시 동군연합으로 역사를 시작한 나라인 것이다.


2.15. 포르투갈 왕국+브라질 제국[편집]


포르투갈의 왕태자였던 동 페드루 왕자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을 독립시킨 뒤 자기가 페드루 1세라는 이름으로 브라질황제에 오르고, 부왕인 주앙 6세가 죽자 페드루 4세라는 이름으로 포르투갈에 오르면서 잠시 형성된 2개월짜리 동군연합.[20] 당시 브라간사 왕실은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임시 수도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길 정도로 허약해졌기 때문에 브라질을 동군연합으로 계속 유지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페드루1세 & 4세는 브라질 황제는 아들인 페드루 2세에게, 포르투갈 왕은 딸인 마리아 2세에게 물려주면서 동군연합은 2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다만 브라간사 왕실이 브라질로 피난가던 시절을 동군연합으로 친다면 이 동군연합은 10년이 넘는 꽤 오래된 동군연합이다.본토가 탈탈 털리던 시기에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국력이 커지면서 식민지가 본토보다 더 힘이 셌던 주객전도 시기가 있었기 때문.


2.16. 네덜란드 왕국+룩셈부르크 대공국[편집]


1815년 빈 회의에 의해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면서 프랑스가 점령했던 룩셈부르크 지역에 대한 처분 과정에서 룩셈부르크를 공작령에서 대공국으로 승격시키고, 네덜란드의 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동군 연합. 이때 네덜란드의 왕가인 오라녀나사우 왕조 전체에서 협약을 맺었는데, 룩셈부르크는 살리카법을 적용해서 남계후손이 끊기면 나사우 가문의 방계로 대공위가 넘어가게 하는 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빌럼 3세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고 외동딸 빌헬미나가 유일한 자녀가 되면서 빌럼 3세 사후 동군연합은 해체되고 네덜란드 왕위는 빌헬미나가 계승하고 룩셈부르크 대공위는 남계로 먼 친척인 아돌프[21]가 계승하였다.


2.17. 러시아 제국+폴란드 입헌왕국[편집]


얼마 없는 제위+왕위 동군연합. 1815년 빈 회의에 결과 바르샤바 공국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세 나라에게 분할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폴란드 지역에 폴란드 입헌왕국을 수립하고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게 하는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이후 폴란드 입헌왕국이 러시아의 직할령이 되면서 동군연합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2.18. 러시아 제국+핀란드 대공국[편집]


1809년에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을 꺾은 후 핀란드는 스웨덴령에서 러시아령으로 바뀌었으며 이때부터 러시아 황제가 '핀란드 대공' 이라는 칭호를 새롭게 사용하면서 핀란드 대공국이 성립되었다. 핀란드인들의 자치권은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의 제정이 무너지고 핀란드가 독립하는 순간까지 공식적으로 폐지되지 않았지만, 초창기에는 비교적 유화적으로 자치를 허용하던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그에 따른 반동으로 소수민족에 대해 강경하게 돌아선 알렉산드르 3세니콜라이 2세 때부터 핀란드인들을 극심하게 탄압하여 핀란드인들의 반러감정이 높아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고 러시아의 군주제도 폐지되자 핀란드 의회도 이를 기회로 삼아 핀란드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후 독일계 단명왕조인 핀란드 왕국을 거쳐 오늘날의 핀란드 공화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되찾으려 했고 겨울전쟁, 계속전쟁 등이 이어졌다.


2.19. 북해 제국[편집]


북해 제국은 이름 그대로 북해를 자신들의 지중해로 삼는 크고 아름다운 권역을 자랑했던 바이킹 제국이었다.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의 일부를 통일했으며 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크누트 대왕이 통치한 1016년부터 1035년까지 존재했다.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Anglo-Scandinavian Empire)이라고도 한다.


2.20. 칼마르 동맹[편집]


1397년에 결성되는데,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1세가 이미 덴마크, 노르웨이에 이어 스웨덴 왕위까지 차지했었기 때문이다.[22] 하지만 1521년 구스타브 바사가 이끄는 스웨덴 독립군에 의해 스웨덴을 상실하면서 해체되고 그 다음은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이 되었다.


2.21.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노르웨이[편집]


칼마르 동맹에서 스웨덴이 떨어져 나간 후 덴마크-노르웨이로 바뀌어 지내고 있었지만,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와중 줄을 잘못서 스웨덴에게 대패한 후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했다.[23] 이후 성립된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은 1905년 해체했다.


2.22.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인도 제국[편집]


세포이 항쟁 이후 인도는 완전히 영국령으로 병합되었는데 그 와중에 인도의 황제자리를 만들어 영국 왕이 겸임하게 했다. 물론 말이 좋아 동군연합이지 실제로는 식민지나 다름없다. 인도 제국의 군대인 인도 제국군도 인도 제국의 자체적인 군사조직이라기보다 사실상 영국군에 소속된 인도인들의 부대에 가까웠다.


2.23. 프랑스 제국+이탈리아 왕국[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황제가 되었을때 이탈리아 북부에 괴뢰국인 이탈리아 왕국을 세워 이탈리아의 왕도 겸임했었다. 다만 실질적인 통치는 부왕인 그의 의붓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가 했다.


2.24. 프랑스 공화국+안도라(부분적, 현재)[편집]


안도라는 두 명의 공동 공작을 두고 있는 양두제(diarchy) 국가이다. 안도라의 공동 공작 중 한 명은 로마 가톨릭 우르헬(Urgell) 교구(스페인 안에 위치함)의 교구장 주교가, 다른 한 명은 프랑스의 국가원수(현재는 대통령)가 자동으로 맡게 되어 있다.

사실 이 사례는 personal union을 동'군' 연합으로 번역한 것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프랑스 대통령은 군주는 아니지만 국가원수이고, 그가 동시에 맡는 안도라 공동 공작은 군주이면서 국가원수이다. 영어권에서 personal union은 '군주'로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와 안도라는 부분적인 personal union 상태에 있다고 분류된다. '부분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안도라의 국가원수가 2명인데 그중 한 명만 프랑스와 공유하기 때문이다.


2.25.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편집]


1859년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가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를 공동 군주로 선출해 연합하여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이 탄생했다. 이 공국이 발전하여 마침내 루마니아 왕국으로 되었고 1878년 오스만 제국으로 독립했다.


2.26. 크로아트 왕국+헝가리 왕국[편집]


1091년에 스트예판 2세(Stjepan II, 재위 1089~1091)의 사망으로 트르피미로비치 왕가(Trpimirovići)의 대가 끊기자, 크로아티아의 전 왕이었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Dmitar Zvonimir, 재위 1075~1089)의 왕비 옐레나 리예파(Jelena Lijepa, ?~1091)의 제안으로 즈보니미르의 처남이자 그녀의 오빠였던 헝가리 왕국의 왕 라슬로 1세(László I, 재위 1077~1095)에게 크로아티아 왕위를 제안했다. 제안을 수락한 라슬로 1세는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슬라보니아(Slavonia)[24]의 반(Ban) 페타르 스나치치(Petar Snačić, 재위 1093~1097)를 왕으로 추대한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반발에 크로아티아의 왕위를 얻지 못했다. 그 후 1097년 라슬로 1세의 뒤를 이은 칼만 1세(Kálmán I, 재위 1095~1116)가 스나치치를 살해하고 슬라보니아 점령에 성공하지만, 달마티아 지역 귀족들의 저항에 못이겨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주되 칼만 1세가 크로아티아 왕위를 겸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이로써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동군연합이 성립했다.

이후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다가, 트리아농 조약으로 세르비아 왕국에 편입되어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왕국이 탄생했다.


2.27. 이탈리아 왕국+알바니아 왕국+에티오피아 제국[편집]


이쪽은 이탈리아가 일방적으로 침공하여 보호령/식민지로 삼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알바니아 국왕 및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했다.


2.28. 벨기에 왕국+콩고 자유국[편집]


법적으로 콩고 자유국은 벨기에와는 같은 왕만을 모실 뿐, 벨기에 정부는 내정에 개입할 수 없는 독립적인 자유국가였다. 이는 베를린 회담에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벨기에와 콩고의 국왕인 레오폴드 2세는 자유국의 설립 및 운영 전반에 독점적인 위치를 누릴 수 있었다. 콩고 인민들은 정치참여에서 배제되었고, 자유국의 지배층인 백인들은 전부 레오폴드 휘하의 위원회와 회사 소속이었기 때문. 그래서 독립과 자유는 명목일 뿐, 실질적으로 콩고는 레오폴드 왕 개인의 식민지로 운영되었다. 그는 근대적인 군사-경제력을 바탕으로 전제군주로 군림하며 콩고의 부를 빨아먹었고, 콩고 사람들은 온갖 학대와 착취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이 연합은 1908년 국제사회의 온갖 압력을 받은 벨기에 정부가 왕으로부터 콩고를 빼앗고 벨기에 정부가 관할하는 식민지로 개편하면서 사라진다.


2.29. 영연방 왕국[25][편집]


영연방 왕국(Commonwealth realm)은 영국의 찰스 3세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총 15개의 나라들이다.[26]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가 한 나라를 이루는 영국과 달리, 이들 15개국은 평등한 주권국가들이다. 단, 영국 이외의 나라들에서는 왕을 대리해 총독이 국가원수대리 역할을 한다.[27]

그 명칭에 '영역' 혹은 '군주령'(realm)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영연방 왕국이 (물적) 동군연합체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일단은 동군연합 자체가 단순히 군주가 같을 뿐 공동정부 없이 각자 살림을 하는 인적 연합(Personal Union)과 주권은 유지하되 공동정부로써 단일한 정치체처럼 행동하는 물적 연합(Real Union)으로 나뉘므로, 영연방 왕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군연합 중 인적 연합이 맞다. 영연방 왕국은 그 시작부터 별개 주권국가 간 인적 동군연합체였으며, 영국은 물론 그 어떠한 구성국도 다른 구성국에 간섭할 수 없고 당사국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탈퇴할 수 있다.

다만, 최근에는 그나마 명목상 군주라는 개념도 별 의미가 없다보니 이들을 동군연합체도 아닌 그저 역사적·관습적 상징을 지닌 국제기구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자세한 내용은 영연방영연방 왕국 문서 참고.


3. 부부 동군연합[편집]


부부가 각각 별개의 왕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략결혼을 통하여 연합체가 형성된 예. 편의상 동군연합의 일종으로 취급하지만, 엄밀히 동군연합이란 동일인을 매개로 성립하는 것이고, 이 경우는 각자의 나라에서 각기 다른 왕과 여왕을 섬기되 두 사람 간 인적 관계를 매개로 성립하므로 동군연합이 아니라 결혼동맹이라 정의하는 게 정확하다. 합의를 통해 다른 한쪽까지 왕으로 인정해주든가, 더 나아가 이 부부왕들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홀로 부모의 왕위 각각을 모두 상속하면 그때서야 진정한 동군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부싸움나면 전쟁이다

해당 문서에서는 인간관계에 의한 정치체 간 연합이라는 공통점과 동군연합의 원 개념 간 연관성을 고려하여 별도 항목을 두어 함께 기술하고 있다.


3.1. 나바르+프랑스[편집]


상술했듯이 1308년 나바르 여왕 호아나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결혼으로 성립되었으나, 1328년 샤를 4세 사망 후 카페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고 발루아 왕조로 교체되면서 해체되었다.


3.2. 오스트리아+부르고뉴 공국[편집]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인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과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 드 부르고뉴의 결혼으로 성립된 부부 동군연합. 부르고뉴뿐 아니라 훗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되는 저지대 영토 거의 전부가 마리 1세의 영지였기 때문에 그녀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저지대 영토를 상속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3.3.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연합 왕국[편집]


현대 스페인의 기초가 된다.


3.4. 프랑스 왕국+스코틀랜드 왕국[편집]


프랑스 왕 프랑수아 2세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의 결혼으로 생겨난 동맹. 하지만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고 후계자가 없어서 1년 남짓 만에 소멸하였다. 메리 스튜어트가 두 번째 남편 단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 왕국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한 것을 보면 만약 프랑수아 2세와 자손을 낳았더라면 다아시 경 시리즈 영불제국의 축소판인 잉글랜드+스코틀랜드+프랑스 동군연합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3.5. 잉글랜드 왕국+스페인 왕국[편집]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잉글랜드의 메리 1세의 결혼으로 발생한 동맹. 이 때문에 1598년은 잉글랜드+스페인의 결혼 동맹과 프랑스+스코틀랜드의 결혼 동맹이 대립하는 상태였다. 둘 사이에서 후계자가 없어서 메리 1세 사망 후 소멸되었다.


3.6.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네덜란드[편집]


명예 혁명 이후, 메리 2세가 남편인 네덜란드의 빌럼(윌리엄) 3세와 공동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발생했다. 하지만 이 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1대 만에 메리 2세의 동생 앤 여왕이 계승하면서 네덜란드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소멸되었다.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오라녀 공작의 자리는 윌리엄 3세의 방계 조상인 요한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빌럼 1세의 동생)의 후손이 이었다.

메리 2세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네덜란드와 부분적 동군연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메리 2세가 지배자가 아니었기 때문. 메리 2세가 죽고 윌리엄이 단독 군주가 된 뒤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가 완전한 동군연합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윌리엄은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는 빌럼/윌리엄 3세였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윌리엄 2세라고 썼다. 잉글랜드는 이전까지 윌리엄이란 이름을 쓴 왕이 윌리엄 1세 이래로 2명뿐이었고(노르만 왕조 이전은 안 따짐), 아일랜드 국왕 칭호는 잉글랜드 국왕의 이름과 똑같이 썼으니 달라질 수 없었다. 네덜란드는 그전에 빌럼이 2명 있었기 때문에 빌럼 3세이므로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대수가 일치했다. 하지만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 중에 윌리엄은 이전에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따로 윌리엄 2세라고 표기해야 했다. 메리의 경우, 잉글랜드(더불어 아일랜드도)와 스코틀랜드 모두 여태까지 메리가 한 명씩(블러디 메리메리 스튜어트) 있었으므로 자연히 잉글랜드·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메리 2세로 일치했다.

일반적으로 두 나라의 군주가 결혼을 하면서 공동군주가 되어 성립되는 동군연합의 경우, 부부의 후계자가 동군연합을 계승하던가 중 원래의 계승자가 죽으면 배우자도 자동으로 공동 군주 지위를 잃게 되거나 다음 후계자와 공동군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시기에는 예외였다. 윌리엄-메리 부부는 자식이 없어 윌리엄이 잉글랜드 의회가 주도한 명예혁명을 수락할 당시 요구했던 게 "만약 아내가 나보다 먼저 뜨면 내가 단독 군주로 남게 해달라"는 것이어서 잉글랜드의 의원들이 이에 동의했고 혁명 성공 뒤 이 내용을 담은 법을 만들었기 때문. 이 조치가 없었다면 메리 2세가 사망한 직후 윌리엄 3세는 즉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왕위를 잃고 처제 앤이 단독 군주로 즉위하게 되거나, 윌리엄 3세와 앤 여왕의 공동 군주 체제가 들어서게 됐을 것이다. 이러면 권력의 안정성에 문제가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근데 어차피 명예혁명 이후로 왕권이 약화된 건 함정 메리가 먼저 죽으면 윌리엄이 계속 단독 군주로 남게 조치한 것이다. 그래서 메리 2세가 사망한 뒤 윌리엄 3세가 단독 군주로 남아 있다가 그도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처제인 앤 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

한편 잉글랜드 국왕은 백년전쟁 이래로 오랫동안 프랑스 왕을 사칭하고 있었고,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자들은 명목상 프랑스 남부 오랑주(오라녀, 오렌지) 공의 칭호를 쓰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명목상의 칭호까지 따지면 이 시기 동군연합의 양상이 훨씬 복잡해진다(...). 아래의 목록과 같이, 실제로 통치하지 않고 단순히 칭호만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동군연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4. 공화국 동군연합[편집]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론상으로는 한 나라의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에 다른 나라의 대통령으로 선출된다면 공화국들도 동대통령 연합(?)이 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대통령 등의 국가원수의 피선거권은 해당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만 제한되어 있으므로 동대통령 연합이 현실적으로 나오기는 어렵다. 물론 이중국적자라면 여러 나라의 대통령을 겸임하는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대통령 선거의 피선거권을 해당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부모까지 해당국 국적인 사람으로 제한해놓은 나라들도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한 사람이 여러 나라의 대통령을 겸임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다만 몇몇 특수한 사례는 소수 있었다. 전술한 안도라의 경우는 한쪽이 공화국이 아닌 군주국이므로 포함되지 않는다.


4.1. 네덜란드 공화국[편집]


네덜란드 공화국은 저지대 국가의 7개국의 국가원수를 한 사람의 통령이 겸임하는 형태로, 오라녀나사우 가문의 세습이 이어졌고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에게 점령되었다가 해방되었을 때 오라녀나사우 가문이 군주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4.2. 그란콜롬비아+볼리비아+페루[편집]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 당시 시몬 볼리바르그란콜롬비아 초대 대통령(1819년-1830년), 페루 6대 대통령(1825년), 볼리비아 초대 대통령(1824년-1827년)을 지냈으며 3개국 대통령직들을 겸임한 시기가 서로 겹친다.


4.3.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편집]


1860년 마르티누스 베셀 프레토리우스트란스발 공화국 초대 대통령과 오라녜 자유국 대통령을 같은 시기에 겸임하였다.


5. 동재상 연합[편집]


각 나라마다 군주는 따로따로 존재하지만 한사람이 여러 나라의 재상(총리)직을 동시에 겸임하는 형태의 연합. 중국 전국시대합종연횡책을 제시한 정치가 소진(전국시대)조나라,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 이 6개 나라들의 재상을 동시에 겸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 경우 여러 나라가 공동의 군주를 모시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 동시에 한 사람의 동일 인물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인적 연합(personal union)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동군연합 자체가 의역이고 원래 개념은 한 개인(person)을 매개로 형성되는 연합체(union)이기에 드물게라도 가능한 현상이다.

6. 실제로는 동군연합이 아닌 경우[편집]



6.1. 칭호 추가인 경우[편집]


유럽 외 지역에서 한 군주가 여러 왕위를 가지는 경우는 대부분 이 유형으로, 대상 국가가 군주 국가의 직할령으로 완전히 합병되었거나 일방적 세력투사로 속국화된 것이라, 2개국 이상이 동일인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고 단일국이 동일인에게 둘 이상의 칭호를 주는 구조이다. 따라서 엄연히 분류하면 서양사학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personal union' 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6.1.1. 상이집트+하이집트[편집]


고대 이집트나일강을 따라 상류 지역인 상이집트와 하류의 삼각주 지역인 하이집트를 나누었는데 이는 두 지역이 문화적, 환경적으로 차이점도 있었으며 상, 하이집트는 분열되기도 하고 지역 갈등도 있었다.[28]

그래서 파라오는 두 지역을 통일하기 위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왕'이란 뜻의 네수트-비티(nswt-bjtj) 또는 '두 땅의 주인'이란 뜻의 네브타위(nb-nswt-tꜣwj)란 칭호를 이명으로 사용했는데 네수트-비티는 신성문자로는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꿀벌과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로 표현되었다.

그외에도 파라오는 두 지역의 결합을 상징하기 위해 하이집트의 붉은 관 데슈레트(Deshret)와 상이집트의 흰색 관 헤제트(Hedjet)를 결합한 이중관인 프쉔트(Pschent)를 착용하기도 하였는데 분열기를 제외하고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기원에서 유래한 형식적인 흔적일 뿐이었다.


6.1.2.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이집트[편집]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한 것은 총 두 차례였는데, 이집트의 왕조로서는 각각 제27왕조와 제31왕조다. 해당 시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샤한샤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했다. 훗날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아케메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를 점령함에 따라 이러한 통치는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6.1.3. 헬레니즘 제국[편집]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차례대로 정복한 후 각각 이집트의 파라오와 페르시아의 샤한샤를 겸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헬레니즘 제국이 혼란에 빠졌다가 이내 아르게아스 왕조가 단절되고 그리스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페르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로 분열되면서 끝났다.


6.1.4. 오스만 제국+수니파 칼리파+로마 제국[편집]


오스만 제국아랍권과 발칸 반도를 정복한 후 황제 1명이 오스만 제국 파디샤, 수니파 칼리파, 로마 제국 황제를 모두 겸하는 나라가 되었다. 다만, 과거 칼리파국을 칭한 맘루크 왕조를 정복해 아바스 왕조 칼리파를 간접적으로 계승함으로서 어느 정도의 정통성이 있는 칼리파 칭호와 달리 로마 황제 칭호는 신성 로마 제국러시아 제국으로 대표되는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1547년의 아드리아노플 조약비롯해 몇몇 대외적인 외교 문서에서 사용된 흔적이 보인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는 칭호이다. 동시대 다른 유럽 국가들의 동군연합보다는 아래의 청나라와 더 비슷했던 유형이다.


6.1.5. 당나라+돌궐[편집]


당의 황제는 동돌궐을 무너뜨리고 그 지배하에 있던 북방 유목민족까지 복속한 것을 기념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곧이어 이민족 군장들이 입궐하여 당의 황제에게 천하을 뜻하는 텡그리 칸(천가한)으로 등극하길 청하였다. 황제가 “나는 중국의 천자인데, 칸의 일까지 맡아도 되는가.”라며 수용의 뜻을 내비치자,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텡그리 칸으로 추대하였다. 당나라를 이루는 지배집단이 선비족 혼혈 계열이라 저항이 적었던 면도 있었다.

당태종동돌궐, 이어 서돌궐 복속에 성공하여 중국 황제와 이민족의 가한을 겸했다. 후대의 청나라와 더불어 중국사상 둘뿐인 중국 황제 겸 유목제국의 황제로 당나라의 동돌궐 지배는 형식적으로 덕종대까지 지속되었다.


6.1.6. 청나라+몽골[편집]


후금이 몽골 차하르부를 정복하고 대원제국 옥새를 얻자,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제국으로 바꾼 뒤 천자에 오르고, 이후로 선통제에 이르기까지까지 청나라 황제들은 사실상 몽골의 대칸으로서도 군림하게 된다.[29] 이러한 체제는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몽골이 독립하면서 끝나게 된다.

사실, 청나라의 통치 체제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정부가 청나라라는 울타리 내의 여러 세력들을 통치하는 다중 지배 체제였는데, 청나라의 황제는 공식적인 지위와 비공식적이지만 실질적인 지위를 포함하여 만주와 몽골의 대칸, 중원 한족들의 천자, 티베트티베트 불교의 보호자,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를 겸하여 청나라의 모든 강역을 통치했다.

각 지위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매우 정교하면서 유기적이고 다원적으로 작동되는 통치 체제로 운영되었다.

  1. 만주와 몽골의 대칸 자리를 통해 청나라 황실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만주와 몽골에서 최고의 무력집단인 팔기군[30]을 제공 받았는데, 이는 홍타이지 때 얻은 원나라의 옥새와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이 많이 믿는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와 최왼(chöyön) 관계를 맺음으로써 부여받은 티베트와 티벳 불교의 보호자 자리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다.

  1. 중원 한족들의 천자 자리를 통해 청나라의 재정적 기반을 제공받았는데, 중원에서 징수하는 세금을 통해 경제력이 빈약한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함과 동시에 그들이 제공하는 무력으로 중원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을 통제했다.

  1. 티베트와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 자리는 제정일치 체제인 티베트의 상징적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최왼 관계[31]를 맺어 중원에서 비롯되는 경제력과 물량, 만주와 몽골에서 제공되는 정예 전력으로 티베트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대신, 티베트의 실질적인 통치권,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만주-몽골의 귀족들에 대한 통치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부여받았다.

  1.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 자리는 한족의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의 무력으로 서남지역의 토착 소수민족들을 통제하여 반란 세력을 통제함과 동시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경제의 혈액과 같은 화폐, 그것도 실물 경제에서 절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동전[32] 주조의 원료인 구리를 안정적으로 수급[33]했다.[34]

황제와 중앙정부가 무능하면 절대로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청의 황제들은 중국의 역대 다른 왕조의 군주들보다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글을 모르는 황제가 나올 정도였던 망조가 들 때의 명나라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황자 시절부터 문무를 아우르는 혹독한 제왕학 교육이 이뤄졌으며[35], (공식화해봤자 분란만 조장하는) 황태자를 공개적으로 정해놓지는 않는 '택현'의 원리로 가장 유능한 황자에게로 제위가 계승되며 이 감당해내기도 힘든 전제권력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유조에서 신하란 작자들 제갈량 떠받들면서도 정작 제갈량만큼 열일하는 작자는 하나도 없더라며 혀를 차다가도 늙었다고 사직서 내는 신하들이 부러워서 눈물이 난다는 진심을 털어놓았고, 옹정제는 13년 치세 내내 맘 놓고 여행 한번 못 가보고 식소사번이란 말이 다시 떠오를 만큼 일만 하다 죽었다.

이렇게 청나라라는 이름으로 묶인 지역들은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분리되는 데 실패했다. 한화된 만주족을 제외한(한화되지 않은 만주족들은 학살당했다) 위구르, 티베트, 몽골은 중화민국에 반발해 독립하려고 했지만, 실제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한 (외)몽골 뿐이었다.


6.1.7. 고려+심양[편집]


원 간섭기에 고려국왕 충선왕심양왕에 봉해졌고 두 작위를 합쳐 고려심왕이라고도 한다. 심양왕은 후에 심왕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동군연합은 별개의 두 나라가 먼저 존재하고, 그 후 두 나라의 군주를 한 사람이 겸하게 되어 탄생하는 데 반해 고려심왕의 경우, 심왕은 작위로서의 왕일 뿐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작위가 아니었으므로 이를 동군연합이라 볼 수는 없다. 참고로 충선왕 이후에는 고려국왕과 심왕의 작위가 각기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으므로 이를 함께 겸한 것도 충선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즉, 위에서 설명한 내용들과 같이 심왕 작위는 사실상 실권은 없었고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원나라는 이 자리를 주로 동방 삼왕가를 견제하고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이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사에 있는 제후왕들의 서열에서 고려왕을 39위에 두었고, 심양왕을 37위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반지의 제왕에서 아르노르는 세 국가로 분열되었다가 모두 앙그마르에게 멸망하고 같은 누메노르의 후계국인 곤도르마저 왕위가 단절되었으나, 적법한 왕위 요구자아라고른 2세가 곤도르의 왕위에 오르고 아르노르까지 재건하여 곤도르-아르노르 통합 왕국이 세워지게 되었다.

대항해시대 4에서는 포르투갈스페인이 동군연합을 이뤘다는 소식에 라파엘 카스톨이 발끈해서 스페인 타도를 외치지만 실제 역사대로라면 "본국에서 그런 일도 있었네?" 수준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게임상의 흔한 고증오류다. 더욱이 레콘키스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옛날만 해도 스페인포르투갈은 서로 동류의식이 매우 강했고[36], 그래서 16세기 무렵에는 결혼동맹을 이용하거나, 19세기경에는 심지어 포르투갈 수상을 스페인 왕으로 추대해서라도 동군연합을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만일 대항해시대 4의 스토리가 실제 역사를 따라갔으면 라파엘 카스톨은 자기 나라인 포르투갈스페인에 합병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베리아 반도 통일이 완수됐다고 격하게 기뻐했어야 한다...[37]. 서구권의 국가관을 억지로 동북아시아식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려해서 생긴 고증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사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인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와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를 해보면 동군연합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수 있고, 그와 동시에 서로 다른 동군연합 구현 시스템으로써 각 게임의 시대적 정치환경 차이도 알 수 있다.

중세시대인 크킹은 봉건제통치귀족 개인 시점에서 진행하는 까닭에 좀 더 세부적이고 인간관계를 잘 구현하고 있는데, 기본적인 플레이 단위인 "영역(realm)" 자체가 (백작령 1개 플레이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소유에 의한) 강력한 물적 동군연합체"이다.[38] 그래서 규범권역(de jure) 통합이나 계승법 변경으로 법적 단일국가로 만들지 않는 한 분할이 가능하며, 그 결과 외국의 왕위를 동군연합으로 물려받기 위해 친척들을 암살하거나 동군연합 상태에서 두 왕위의 계승법이 달라 플레이 캐릭터 사후에 다시 별개 국가로 쪼개지는 등 다양한 중세의 난장판을 겪어볼 수 있다.

반면 근대국민국가 형성기를 시작점으로 삼아 국가 시점에서 진행하는 유로파는 동군연합 주도권을 쥔 쪽이 종주국이 되고 다른 구성국이 속국으로 구현되며, 서로 내정 상 구분되므로 기본적인 재정(세금, 개발), 군사 등은 각자 살림을 꾸린다.[39] 동군연합은 서로 왕조가 갈리거나 종주국이 흡수통합해서 청산되거나, 그대로 재주껏 이어갈 수 있다.

거유 판타지 외전 2에서 에델란트의 국왕이자 주인공 류트 헨데는 히로인들과의 결혼으로 왕비로 맞아들여서 힐즈랜드의 왕, 노르드란트의 왕, 그리고 루트에 따라서는 이베리아 왕까지 즉위한다. 여기에 작중 나오는 강국 프론스까지 우호국으로 확보하여 엔딩에서는 대제국 취급.[40] 물론 야겜인 본작 특성상 진지하게 나오기보단 한 나라의 여왕/공주였던 히로인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하렘 엔딩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긴 하다.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에서 하렘왕 티글블무드 보른브륀 왕국지스터트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브륀과 지스터트의 동군연합이 이루어진다.

현실주의 용사의 왕국 재건기에서는 웹연재판 기준으로 소마 카즈야가 그란 케이오스 제국이 해체되고 나서 세워진 유포리아 왕국과 프리도니아 왕국의 군주가 되면서 동군연합이 이루어지며 그란 프리도니아 제국을 건립한다.

더 위쳐 시리즈북부 왕국 중 리비아와 리리아는 서로 다른 나라였으나 결혼으로 동군연합이 되었고 코비어와 포비스도 동군연합 국가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쿠엘탈라스의 지도자 로르테마르 테론과 수라마르 나이트본의 지도자 첫 번째 비전술사 탈리스라가 결혼함에 따라 블러드 엘프나이트본은 동군연합이 되었다. 이전에도 두 진영은 우호적인 관계였는데 지도자들의 혼인으로 아예 동군연합이 된 셈.


8. 관련 문서[편집]



[1] 당시 이 지역은 여러 공국과 백국들이 카를 5세라는 한 명의 군주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다.[2]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3]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하마,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 루시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벨리즈,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 키츠 네비스.[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바이에른 계승 전쟁 등.[5] 당시 이 지역은 여러 공국과 백국들이 카를 5세라는 한 명의 군주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다.[6] 물론 슈말칼덴 전쟁 승리 후 신성 로마 제국 제위까지 펠리페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의 반발과 무려 카를 5세가 새로 임명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일으킨 반란으로 독일에서 쫓겨나듯 패퇴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돌아갔다.[7] 나폴리 및 시칠리아 왕국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 부르봉 왕조가 다시 가져갔다.[8]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는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헝가리어로는 울라슬로, 체코어로는 블라디슬라프)가 물려받았지만 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4세의 3남 얀 1세 올브라흐트를,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4세의 4남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를 선택했고 얀 1세가 먼저 죽자 알렉산데르가 폴란드까지 상속받았다가 알렉산데르가 죽자 막내동생인 지그문트 1세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군주로 즉위했다.[9] 1618년 30년 전쟁 당시 보헤미아 귀족들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국왕 옹립이나 제2차 빈 공방전을 촉발시킨 퇴쾨이 임레의 상헝가리 봉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터진 라코치 페렌츠 2세의 헝가리 독립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보헤미아 귀족들의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 옹립, 1848~49년의 헝가리 혁명 등.[10] 이 와중 피레네 산맥 위로 삐져나와있던 로세요(프랑스어로 루시용), 세르다냐(프랑스어로 세르다뉴) 같은 카탈루냐의 일부는 훗날 17세기 중반에 프랑스에게 빼앗긴다[11] 정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나, 펠리페 2세는 애초에 포르투갈 왕국의 제1왕위계승권자였다. 다만 펠리페 2세를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포르투갈인 귀족들이 무력투쟁을 일으키자 군대를 보내 진압하고 즉위하긴 했다.[12] 폴란드어: 야기에우워[13] 사실 리투아니아는 이미 주변 나라들(주로 기사단국들)을 낚기 위해 가톨릭, 정교회 여러 번 거짓 개종을 해왔던 전적이 있었다.[14] 필리프 6세는 필리프 4세의 조카로 나바라의 핏줄이 전혀 없었다. 다만 필리프 6세는 후아나 2세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였던 잔느와 결혼했다.[15] 상파뉴, 카페, 에브뢰, 알브레 가문[16]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17] 거슬러 올라가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가 같은 조상이다.[18]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제국 내 영방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프로이센의 국왕 칭호 사용 허용이나, 두 아들 요제프 1세카를 6세루터교회 신교도 가문인 브라운슈바이크의 벨프 가문과 결혼시키는 등등 제국 내 여러 영방국가에게 많은 양보를 했다.[19] 중간에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전투는 거의 없었다.[20] 정확한 국명은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왕국이었다.[21] 하지만 여계를 따지면 빌럼 3세의 조카뻘[22] 아버지 발데마르 4세로 이어지는 부계로 덴마크 왕위를, 남편 호콘 6세와 아들 올루프 2세로 노르웨이 왕위를, 시아버지 망누스 4세로 스웨덴 왕위를 확보했다.[23] 이때 노르웨이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그린란드는 덴마크령으로 남았다.[24] 현 크로아티아의 동부 지방.[25]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하마,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 루시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벨리즈,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 키츠 네비스.[26]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의 경우 회원국 중에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모시지 않는 나라도 많으므로 영연방과 영연방 왕국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27] 그래서 내각제의 특성상 의회해산도 형식상으로는 총리가 의회해산을 제청하면 영국 왕 또는 그의 대리자 총독이 이를 재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총독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실질적인 권력은 그 나라에서 뽑은 총리에게 있다.[28] 이 갈등은 징하게도 이어져서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29] 다만 이것이 몽골 제국이 근현대까지 존속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몽골 제국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의미. 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을 자칭한 것과 비슷하다.[30] 만주 팔기군과 몽골 팔기군[31] 티베트어로 chöyön, 한자로는 단월(檀越). 시주(施主)와 같은 뜻이다. 초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무력과 경제력을 제공하는 대신 로마 교황이 통치 정당성을 부여하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32] 은은 어디까지나 납세나 대규모 거래를 위한 고액권이었기 때문에 은과 동전 간의 환율은 그때 그때 변동되었다.[33] 쓰촨성운남, 귀주, 광서는 당시에 청나라 내에서 구리를 비롯한 각종 광물들이 풍부한 지역이었다.[34] 청나라 황제들 중 중앙집권 체제 확립에 골몰했던 옹정제 때에는 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제압하고는 아예 토사들의 세습적 군사&행정&사법 자치권을 회수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유관들과 중앙군이 이를 대체하게끔 하는 개토귀류 정책을 시행했다.[35] 국가 통치를 위해 익혀야 하는 언어만도 만몽한 3개나 익혀야 했다. 몽골어야 말할 것도 없고, 한어 구사능력 역시 강건성세부터의 국가 통치에 필요한 주요 공용어로서가 아니라 입관 이전부터도 후일 팔기한군으로 증편되는 투항병 출신 한인 포병대와 해군력, 그리고 입관 이전부터 조금씩이나마 관료사회에 진출하던 요동 한족 세력을 휘어잡기 위해 필요한 소양이었다. 소현세자봉림대군을 위시한 조선 출신 볼모들의 심양일기, 심양장계에는 청나라에서의 첫 해부터 한인 관료들이랑 모인 자리에서 한어 역관이 없어서 힘들었다며 본국에 한어 역관을 보내달라 청한 기록이 전해지고, 그렇게 역관 수요가 매우 늘어서 청이 아닌 조선이 기용하여 심양일기, 심양장계에 기록된 역관만 해도 54명이나 기록되었을 정도로 역관 수요가 늘었다.(희빈 장씨의 당숙인 장현처럼 심양 기록에서는 누락되었으나 통문관지에서는 확인되는 역관도 있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이것저것 배우면서 라틴어 고전까지도 배운 강희제위구르 출신 후궁을 둔 건륭제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티베트어위구르어 등 다른 언어를 필요한대로 추가로 익히기도 했다. 황제들의 능력이 이전 세대보다 못한데다 급기야는 이 정도로 다방면에 걸쳐 체계적인 교육을 아예 받지도 못한채 갓난아기 시절부터 남들의 꼭두각시로만 살아야 했던 19세기 후반에 이러한 동군연합 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36] 같은 이베리아 반도 국가에 같은 뿌리를 두고서 이슬람 세력의 지배에서 힙겹게 벗어났다는 데서 동질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양국의 통일을 간절하게 원하는 여론이 강했다. 그래서 16세기에 결혼동맹을 이용해서 동군연합을 만들려던 계획이 좌초됐을 때, 스페인포르투갈 양쪽의 국민들이 못내 원통하게 여겼을 정도다.[37] 실제로도 포르투갈 왕국펠리페 2세 때에 스페인 왕국과의 동군연합을 이루는 식으로 합병이 되긴 했다. 근데 왜 도로 두 나라가 분리되었느냐면, 기껏 합병했더니 스페인 측에서 리스본으로 천도 간언도 거절하고 포르투갈을 아시아 국가와의 무역으로 돈을 벌어다주는 돈셔틀로만 취급한데다(...), 브라질, 마카오 등의 몇몇 돈되는 식민지를 탐내서 착취하고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공격에서 보호해주지 못했을뿐더러 심지어 포르투갈까지 속령 취급하며 간섭 개입하는 것에 포르투갈인들이 격분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베리아 통일의 대업이 파탄나서 포르투갈 독립 전쟁으로 다시 독립국을 차려버린게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 당시의 포르투갈 독립운동은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지의 독립운동같은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라, 오늘날의 카탈루냐 독립운동마냥 분리주의에 더 가까운 편이었다.[38] 부부관계에 의한 동군연합은 동맹관계로 구현. 사실 스페인처럼 장기간 해소되지 아니하고 특별히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통합적으로 상속된 게 아니라면 이게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39] 종주국에 일정량 세금이 넘어가고 개발딸 같은 것도 시켜줄 수 있지만, 군대 메커니즘은 동맹국과 똑같아 종주국이 속국을 쌩까고 직접 군대를 움직이거나 할 수 없다. 종속국 AI의 행동양상 중 하나를 구현하거나 '특정 부대를 따라가도록' 하는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을 뿐, 종주국이 손을 댈 만한 구석이 굉장히 적다.[40] 작중 나오는 유로디아 대륙 자체가 현실의 유럽을 모델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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