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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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제18대 선제후
프로이센 제5대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파일:Frans_Luycx_-_Frederick_William,_Elector_of_Brandenburg,_at_three-quarter-length.jpg

출생
1620년 2월 16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베를린 베를린 왕궁
사망
1688년 4월 29일 (향년 68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포츠담 포츠담 궁전[1]
재위기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프로이센 공작
1640년 12월 1일 ~ 1688년 4월 29일
(47년 4개월 4주 1일, 17,316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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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게오르크 빌헬름
어머니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배우자
나사우의 루이제 헨리에테 (1646년 결혼 / 1667년 사망)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 (1668년 결혼)
자녀
카를 에밀, 프리드리히 1세, 필리프 빌헬름, 마리 아멜리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카를 필리프, 엘리자베트 조피, 크리스티안 루트비히
형제자매
루이즈 샤를로테, 헤드비그 조피
가문
호엔촐레른 가문
종교
칼뱅파
별칭
대선제후(Große Kurfürst)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1. 개요[편집]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의 선제후. 흔히 "대(大) 선제후(Der Große Kurfürst)"라고 불린다. 상비군 제도와 중상주의, 절대왕정을 기반으로 미래의 프로이센 왕국 발전 기반을 닦았다.


2. 생애[편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시기가 독일 전역을 초토화 시킨 30년 전쟁이 벌어질때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도 황폐화 되었다. 수도 베를린을 떠나 퀴스트린[2] 요새에서 지냈고 그곳에서 칼뱅교식 교리에 따라 교육받았다.[3]

이후 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네덜란드빌럼 1세 판 오라녀이었던 인연으로 14세부터 18세까지 네덜란드 유학을 떠나서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했고, 미래의 장인 어른이 되는 '오라녜 공 프레데리크 헨드리크[4]의 도움으로 헤이그 궁정에서 생활했다. 이시기 당연히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던 네덜란드의 발전상을 목격했고 해상 무역, 농업, 건축, 군사 분야 등 여러 분야의 신기술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도입했다.

1640년, 20세의 나이로 선제후로 즉위하였는데 치세의 전반기에는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선제후로 즉위하기 이전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신교도 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돈이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5]를 적극 편들지도 않았고 가톨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황제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역시 즉위 초에는 전쟁 막바지에 각진영의 압력과 러브콜(?)을 사절하려 전쟁으로 박살난 브란덴부르크의 베를린이 아닌 프로이센 공국쾨니히스베르크도망가서 3년동안 신중한 처신을 보였다. 이는 계산된 행동으로 1644년까지 제국군으로 기울었던 기존의 군대를 해산하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여 선제후 개인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상비군을 조직하여 절대 군주제의 발판을 만들었다. 1646년 네덜란드 통치자의 딸 "오라녜의 루이제 헨리에타"와 결혼하였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기대만큼 처가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지참금으로 한보따리 싸온 것이 상비군 군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어쨌든 전황이 신교도편으로 기운 전쟁 후기에는 신교도편으로 참여하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토를 확보했으나 무역을 위해 필수적인 항구는 확보하지 못했는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가장 원했던 오데르강 하구의 항구 슈테틴스웨덴이 차지해버리고 민덴, 마그데부르크, 힌터포메른 정도의 보상으로 끝났다.[6]

이후 7년간 황폐화된 영토를 재정비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중앙집권화에 착수해 독일 지역 내 드문드문 떨어져 있던 영토를 묶어서 각 지역마다 있던 신분제 의회와 행정 기구를 통폐합하고 세금을 걷었는데 말 안듣는 귀족들은 잡아다가 재판없이 코렁탕을 먹였다.[7] 귀족들의 자제들을 전부 강제로 군대에 편성하고 영지의 거주민들은 병사로 편성하는 프로이센 특유의 방식으로 후에 강력한 군대의 기반이 되었다. 프로이센독일 제국군국주의 전통은 튜튼 기사단과 그 후신인 프로이센 공국이 아니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본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클레베, 라벤스베르크, 마르크 등의 라인란트 월경지를 지키기 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정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8]

이후 주변의 두 강호, 스웨덴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의 교묘한 외교 전략으로 처음엔 명목상 프로이센 공국의 종주권을 가진 폴란드 왕에게 충성을 보내는 척 하다가 폴란드가 봉기를 일으킨 우크라이나 카자크와 이를 지원한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사이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폴란드를 침공하자 봉신국의 의무를 어기고 군사적으로 중립을 지켰다. 이후 전황이 스웨덴에게 기울자 참전하여 바르샤바를 같이 터는데 일조하고, 스웨덴이 힘이 빠지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협상해 1657년 벨라우 조약을 체결하여 1466년에 튜튼 기사단이 13년 전쟁으로 폴란드에 굴복하여 넘어간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폴란드 왕의 종주권을 완전히 청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웨덴에 넘어간 포어포메른을 점령했으나 스웨덴의 동맹이었던 프랑스의 개입으로 1660년 올리바 조약에서 포어포메른은 뱉어냈다.

프랑스에 뒤통수 맞은 영향으로 한동안 반프랑스 행보를 보였다. 처가인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적국인데다가 루이 14세가 유럽의 깡패질로 전유럽의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 1675년,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웨덴이 브란덴부르크로 침입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페르벨린(Fehrbellin)에서 격파[9]하여 신민들로부터 '대 선제후'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기세로 포어포메른도 탈환했으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또 다시 돌려주었다.

1679년부터는 그동안 발목 잡았던 프랑스와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게 되는데 프랑스가 포어포메른과 군대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자격으로 프랑스가 지지하는 후보를 뽑는 것과 폴란드 국왕 선거에서 프랑스측 인사를 민다는 조건. 그러나 루이 14세가 약속을 순순히 지킬 인간은 아니었고 뒤통수를 또 한번 맞게 되자, 1685년 다시 친조카인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빌럼과 동맹을 맺었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신교들이 프랑스에서 탄압을 받자 루이 14세에게 코렁탕을 먹고 쫓겨난 위그노들을 받아들여서 베를린의 인구가 6천명에서 2만명으로 늘었다. 위그노중에는 상공업자들이 많았고 프랑스의 선진문물을 전수해 왔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국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재위 후반까지 중상주의 정책과 절대왕권을 바탕으로 재임중에 상비군을 4만 명까지 늘렸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도운 공로로 레오폴트 1세에게 프로이센 왕국으로 국명을 바꾸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증손자 프리드리히 2세 대에 이르러 프로이센은 북부 독일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3. 가족관계[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627_louise_Henriette.jpg
첫 아내 나사우의 헨리에테(1627년 12월 7일 ~ 1667년 6월 18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orothea_von_Schleswig-Holstein-Sonderburg-Gl%C3%BCcksburg.jpg
후처 조피아 도로테아(1636년 9월 28일 ~ 1689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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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otsdamer Stadtschloss.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완파되었다가 2013년 재건되어 현재는 브란덴부르크주 의회의사당으로 사용중이다.[2] 현재는 독일 브란덴부르크주와 폴란드 루부스키에주로 갈라졌다. 요새는 폴란드 영토인 코스트신나트오드롱(Kostrzyn nad Odrą)에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때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3] 원래 브란덴부르크는 루터파 국가였으나 할아버지 요한 지기스문트가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 상속을 위해 네덜란드의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개종했다.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었다보니 신민들이 계속 루터파를 믿도록 내버려두었고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았다.[4] 빌럼 1세 판 오라녀와 그의 네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빌럼의 마지막 자식이다. 나사우의 마우리츠의 이복동생으로 그의 뒤를 이은 네덜란드의 지도자로서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이끌었다.[5]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고모 마리아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다.[6] 원래 스웨덴이 포메른을 다 집어먹으려했는데 브란덴부르크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이 포메른에 상륙할 당시 지원을 해주는 조건으로 포메른 공작의 작위 계승권을 내세우자(당시 포메른 공작 보기슬라프 14세는 후사도 없었고 친척도 없었는데, 포메른 공작 가문의 후사가 끊길 경우 브란덴부르크가 상속받기로 한 조약이 16세기에 체결되었다.)사실 얼마 도와주지도 않았지만 스웨덴이 동부 포메른은 내주겠다고 동의했다. 문제는 포메른의 경우 스웨덴이 가져간 포어포메른이 그나마 건질만한 땅이고 브란덴부르크가 가져간 힌터포메른은 콜베르크(현재 폴란드 코워브제크) 정도만 제외하면 백사장만 있는 황량한 해안가여서 영토 확장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7] 옛날이니 코렁탕이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이 시대에도 귀족들은 반역이 아니면 가혹한 처벌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 현대로 올수록 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계층이 넓어진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앙 집권화 정책은 향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프로이센 왕국의 행정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는데 더이상 프로이센 공국 통치를 위해 쾨니히스베르크까지 갈 필요 없이 베를린에 앉아서 영토 전체를 관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8] 애초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에 이르러서는 튜튼 기사단에 관심도 없었다.[9] 당시 강력한 육군을 자랑했던 스웨덴군을 꺾었다는것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스웨덴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후 육군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프로이센은 이후 군사 강국으로 거듭났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으로 민족주의가 고조되자 호엔촐레른 왕조는 페르벨린 전투를 미화하였고, 전투가 벌어진 6월 18일은 1914년까지 독일 제국의 기념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