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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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발루아 왕조 초대 국왕
필리프 6세
Philippe VI

파일:Philippe_VI_de_Valois.jpg
출생
1293년
프랑스 왕국 파리 퐁텐블로
사망
1350년 8월 22일 (향년 56~57세)
프랑스 왕국 외르에루아르 노장르후와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328년 4월 1일 ~ 1350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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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발루아 가문
아버지
발루아 백작 샤를
어머니
앙주 여백작 마르그리트
형제자매
이자벨, 잔, 마르그리트, 샤를 2세
배우자
부르고뉴의 잔 (1313년 결혼 / 1349년 사망)
나바라의 블랑슈 (1350년 결혼)
자녀
장 2세, 필리프, 잔, 잔(사생아), 토마(사생아)


1. 개요
2. 생애
2.1. 재위기간



1. 개요[편집]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초대 국왕.

아버지는 샤를 드 발루아로 필리프 4세의 친동생이다.


2. 생애[편집]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이 차례로 즉위했지만 모두 단명하여 후계자가 없게 되자, 필리프 드 발루아가 이전의 왕위계승에서 사용되었던 《살리카법》에 의해 필리프 6세로 즉위하게 되어 발루아 왕조를 개창했다.

사실 그는 《살리카법》이 아니었다면 왕위와는 거의 연관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우선 루이 10세의 장녀인 잔느가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 번의 왕위 계승 투쟁에서 모두 숙부들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거기서 잔느의 왕위계승을 막으면서 이유로 댄 것이 《살리카법》이었다.[1] 결국 잔느는 숙부들이 모두 사망한 다음에야 나바라 왕국의 여왕 호아나 2세로 즉위할 수 있었다.

샤를 4세 사후 프랑스 왕위에 근접했던 사람은 필리프 6세 말고도 그의 사촌이자 잔느의 남편이었던 나바라의 공동왕 필리페 3세[2], 그리고 필리프 4세의 외손자가 되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있었다. 《살리카법》을 적용하면 외손자인 에드워드 3세 역시 제외되었고, 사촌 필리프의 아버지 루이 되브레는 필리프 3세의 6남으로 서열 자체가 밀렸다.[3] 그런 의미에서 그가 프랑스 왕실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 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전왕인 샤를 4세와는 가장 사이가 멀었다. 당장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의 외조카가 되며[4], 나바라의 필리페 3세는 샤를 4세의 조카사위이자 처남이었다.[5] 하지만 필리프 드 발루아는 필리프 4세의 조카이자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의 사촌에 해당했다. 즉, 전왕과의 사이가 가장 멀었지만 《살리카법》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 다시 왕위 계승에서 밀린 잔느는 여성 승계를 허용했던 나바라 왕국을 얻게 되었고(호아나 2세), 이로 인해 프랑스 왕국나바라 왕국과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초기에 필리프 6세의 즉위를 인정하다가, 이후 의견을 번복하며 백년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2.1. 재위기간[편집]


재위 초창기에는 안정적인 운영을 했다. 플랑드르 지방의 반란도 진압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복종도 받아냈다. 하지만 1332년 에드워드 3세와 대립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브루스 왕조의 제2대 국왕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해오고, 이에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를 방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기에 에드워드 3세가 반기를 들며, 1336년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자칭 프랑스 왕>이라는 공개도전장을 보냈고, 이에 필리프 6세가 1337년아키텐을 몰수하자 결국 백년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백년전쟁은 초기부터 프랑스에 상당히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패배하면서 도버해협제해권이 잉글랜드로 넘어갔고, 이로 인해 전쟁은 프랑스 영토 내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345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직접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이끌고 온 잉글랜드의 장궁부대가 프랑스 기사군을 크레시에서 격퇴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1347년 잉글랜드와 가까운 항구칼레함락당하고,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중 흑사병까지 번지게 되었으며 그야말로 프랑스 전체가 혼란에 빠진 상황이던 1350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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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잔느의 어머니가 간통죄루이 10세에 감금당했다가 처형당한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라는 모계의 약점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잔느는 평생을 루이 10세의 딸이 아니라, 마르그리트의 내연남 필리프 드 오네이의 사생아라는 의혹을 받아야 했다.[2] 필리프 3세의 아들 루이 되브레의 아들로, 필리페 3세와 필리프 6세 모두 필리프 3세의 손자였다.[3] 서자(1번 항목)가 아니다. 루이 되브레는 필리프 3세와 그의 두번째 왕비 브라반트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엄연한 적통 왕자였다. 일부일처제가 확고했던 유럽 왕실에서는 두 번째 왕비도 왕의 정식부인이라면, 왕비로 인정받고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도 모두 적자로서 정당한 계승권을 공인받는다. 이런 식으로 했으면 카스티야의 펠리페 3세(4번째 왕비의 아들. 심지어 장자도 아니다.)는 절대 왕이 되지 못했다. 6남인 건 형제들 중 요절하거나 사산된 아이들까지 포함이고, 루이 되브레는 1~5남과 그 남계 후손(서계 제외하고)이 전멸해야 프랑스 왕위를 받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되브레 가가 발루아 가보다 오래 못 가는 바람에 가문에서 프랑스 왕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결국 카페 왕조발루아 왕조(직계와 방계 둘 다 포함됨), 되브레, 그리고 부르봉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우월한 유전자 앙리 4세가 왕이 되었다.[4] 여동생 이사벨라의 아들.[5] 필리페 3세의 아내 잔느는 샤를 4세의 조카였고, 필리페 3세의 누나 잔 되브레는 샤를 4세의 두번째 왕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