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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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 제15대 국왕
샤를 4세
Charles IV le Bel


파일:charles le bel.jpg

출생
1294년
프랑스 왕국 클레르몽
사망
1328년 2월 1일 (향년 33세)
프랑스 왕국 뱅센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322년 1월 3일 ~ 1328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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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필리프 4세
어머니
호아나 1세
형제자매
마르그리트, 루이 10세, 블랑슈, 필리프 5세, 이자벨, 로베르
배우자
블랑슈 드 부르고뉴[1]
(1307년 결혼 / 1322년 무효화)
마리아 폰 룩셈부르크
(1322년 결혼 / 1324년 사망)
잔 데브뢰
(1324년 결혼)
종교
가톨릭
별칭
미남왕(Le Bel/The Fair)


1. 개요
2. 생애
3. 사후의 왕위 계승 분쟁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제1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


2. 생애[편집]


필리프 4세의 3남으로 루이 10세필리프 5세의 동생이었다. 프랑스 왕으로는 '샤를 4세', 나바르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카페 왕조 본가의 대가 끊기고, 필리프 6세에 의해 방계인 발루아 왕조가 이으면서 혈연이 끊어진 나바르의 왕위는 프랑스에서 분리되었다.

형 필리프 5세가 상속자없이 죽게 되자 왕위에 올랐으며, 아버지 필리프 4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전제정치를 펼쳤다. 1326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와 결혼했던 그의 여동생 이사벨라가 일으킨 반란에 참가하여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외조카이자 이사벨라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즉위시키는 데 공헌했다. 물론 이것이 자기 사후에 일어난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에 있어서 심각하게 작용할지는 예측하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1328년 즉위 6년 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상속자를 남기지 못했다. 필리프 4세의 아들 중 생존자는 그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카페 왕조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원래는 왕위에 오르기 전인 1307년 이브레아 가문의 부르고뉴 백작 오토 4세의 딸 블랑슈 드 부르고뉴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1314년 필리프 4세에 의해 블랑슈는 간통 혐의가 발각되어[1] 지하감옥에 유폐되었고, 1322년 샤를 4세가 즉위한 후에도 구속되어 있다가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결혼의 무효화가 선언되기에 이르렀다.

그해 샤를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딸 마리아 폰 룩셈부르크를 아내로 맞이했다.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1323년 딸 마리가 태어났으나, 요절했고 1324년 마리아가 임신한 상태에서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 이때 마리아로부터 급히 제왕절개로 아들 샤를을 출생시켰지만 마리아와 샤를 모두 사망했다. 여전히 후계자가 없었던 샤를 4세는 에브뢰 백작 루이 데브뢰[2]의 딸로 자신의 사촌인 잔 데브뢰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잔은 1326년 잔, 1327년 마리, 1328년 블랑슈 등 3명의 딸을 연달아 낳았지만 끝내 아들을 두지 못했다. 이 중 블랑슈는 발루아 왕조의 초대 왕 필리프 6세의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으나 후손을 두지 못했다.


3. 사후의 왕위 계승 분쟁[편집]


원래대로라면 카페 왕조의 유일한 정통 계승자였던 루이 10세의 장녀 잔느가 왕위를 이어받았어야 했으나, 그녀는 이미 두 번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살리카법》에 의해 숙부들에게 왕위를 넘겨준 상황이었다. 더불어 샤를 4세 이후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는 나바르의 여왕 '호아나 2세'로 즉위했다. 그래서 남은 계승자는 세 명으로 압축되었다.

우선 샤를 4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린 에드워드 3세가 있었다. 그는 필리프 4세의 딸이었던 이사벨라의 아들로 샤를 4세에게는 외조카가 되었다.

두 번째로는 필리프 4세의 이복동생인 루이 데브뢰의 아들 필리프가 있었다. 필리프는 위에서 언급한 카페 왕조의 마지막 남은 정통 계승자인 잔느와 결혼한 남자였다. 참고로 그의 누나 잔 데브뢰가 샤를 4세의 왕비였기 때문에 그는 샤를 4세의 사촌이자 조카사위에 처남까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리프 4세의 동생인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드 발루아가 있었다. 그는 샤를 4세의 사촌이었다.

이렇듯 세 사람이 왕위 계승 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살리카법》에 의하여 필리프 드 발루아가 '필리프 6세'로 즉위하게 되었고, 그가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한편 필리프는 아내였던 잔느가 여계 상속이 가능했던 나바라 왕국을 상속받아 '호아나 2세'가 됨에 따라 역시 나바라 왕국의 공동왕 '필리페 3세'가 되었다. 그렇게 각각 왕을 달리하며 샤를 4세의 죽음과 함께 나바라와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3]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원래 필리프 6세의 왕위 계승을 승인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꿔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이렇듯 샤를 4세가 적통 왕자없이 공주만 남긴 채 사망함에 따라 필리프 4세의 혈통을 잇는 카페 직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필리프 4세의 고명딸이자 샤를 4세의 여동생으로, 특히나 부친의 외모를 빼닮은 프랑스의 이자벨이 플랜태저넷 왕가로 시집가게 되어 모계를 통해 플랜태저넷 왕조의 에드워드 3세에게 필리프 4세의 피가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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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티에 드 오네이란 기사와 불륜 관계였는데 문제는 동서인 루이 10세의 부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도 고티에의 형제 필리프 드 오네이와 불륜 관계였다는 것. 당연히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블랑슈와 마르그리트 모두 재판에 회부되어 간통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삭발당한 뒤 감옥에 수감되었고 마르그리트는 결국 남편 루이 10세에게 암살당했고 블랑슈도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 사람이 오네이 형제와 밀회를 가지던 장소가 넬탑이어서 이 사건을 통칭 넬탑 사건이라고 부른다.[2]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아들로 필리프 4세의 이복동생이자 샤를 4세의 숙부였다.[3] 이는 261년 후인 1589년 나바라 왕 엔리케 3세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다시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