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춘추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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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왕조





[1]
파일:초나라와 주변국.jpg
기원전 260년 초나라의 영토(녹색 지역)
존속기간
기원전 9세기 이전 ~ 기원전 223년[2]
별칭
형초(荊楚)
위치
후베이 성 등 남중국 일대
수도
(郢)[3], 수춘
국성
미성 웅씨(羋姓熊氏)
국가원수
자작[4] → (황제)
주요 군주
장왕 웅려
혜왕 웅장
회왕 웅심
주요 재상
오기
언어
초어, 상고 중국어
문자
금문전서 (대전체)
종교
초나라 토속 종교[5]
종족
초족
통화
영원(郢爰),[6] 의비전(蟻鼻錢)
멸망 후
진(秦)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
2. 역사
3. 역사적 평가
4. 언어
5. 역대 군주
6. 춘추전국시대 이후 초나라 왕



1. 개요[편집]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로 춘추시대에는 진(晉)과 함께 양대 강대국이었으며 전국시대에도 진(秦) 다음가는 강국이었지만, 결국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장강 유역의 국가로 이민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중원의 다른 국가들로부터 무시를 받긴 했지만 국력은 중원의 열강 중 한둘 정도는 가뿐히 능가하였고 문화 면에서는 초사와 같은 남방문학을 남기는 등 국력과 문화 양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국가다.

2. 역사[편집]



2.1. 춘추시대[편집]


주나라 성왕웅역이 자남(子男)의 작위와 영토를 하사받아 제후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원의 국가와는 다른 기원의 국가일 확률이 높다. 당시 장강 이남은 밀림으로 뒤덮인 이민족의 영역이었으며, 고고학적 발굴로도 초기 초나라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묘족의 나라임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애초에 楚라는 글자에 숲을 뜻하는 林이 들어가 있는 것도 당대의 이 지역의 환경을 짐작케 한다.

중원에 위치한 국가들로부터 남방의 오랑캐로 불려 무시를 당하여 형만(荊蠻, 형나라 야만인들)이라 하였으며 각종 사서의 기록을 보면 이들을 멸시하는 의미로 형(荊)나라, 형초(荊楚) 등으로 쓰였다. 원래부터 중원으로부터 파생된 국가가 아니라,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화 문명이 전파됨에 따라 중화 문명권에 편입된 국가로 보인다.

주나라 소왕 때는 초나라를 정벌하러 가다가 배가 침몰해서 물에 빠져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7]

무왕 대부터 왕을 칭하여[8]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이 강성해졌고 서서히 북으로 진출한다.

성왕 대에는 제(齊)나라, 진(晉)나라가 이끄는 중원의 연합군과 대립했으나 끝내 진(晉)을 이기지는 못하였고, 시간이 흘러 초장왕 대에 진나라를 꺾고 전성기를 누린다. 춘추시대는 대체로 중원의 맹주인 진과 북진하는 남방의 초의 대립으로 압축된다.[9]

그러나 춘추시대 후기에 이르러 초 장왕의 아들인 초공왕 때부터 패권이 기울기 시작하더니[10] 초영왕의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이 기울고 초 공왕의 막내 아들인 초평왕 대에는 오(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불안불안하다가[11] 평왕의 아들인 초소왕 대에는 (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점령당할 정도로 쇠퇴하였다.[12]

기사회생한 소왕은 약(若)으로 천도해 나라를 재건해나갔으며, 초혜왕채나라진(陳)나라를 합병하고 초간왕 대에 이르러서는 거나라를 점령하며 초나라가 건재함을 천하에 과시했다.


2.2. 전국시대[편집]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초도왕오기(吳起)를 영윤으로 임명해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으나 오기의 든든한 지원자인 초도왕이 죽고, 오기도 개혁 때문에 손해를 입은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래도 오기의 부국강병책이 성과는 있었는지 초위왕 대에는 (越)을 멸망시키고 세력을 회복하지만 이것은 초나라의 마지막 불꽃이었다.[13] 진(秦)나라, 제(齊)나라의 국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진(秦)의 압박을 받아 수도를 진으로 옮겼다가 그 후에는 거양으로 천도하고 또다시 수춘으로 천도하였다.[14] 이처럼 형주 서쪽(단양 일대)에서 시작한 초나라는 나라가 망할 때쯤에는 수도가 동쪽(수춘 일대)으로 옮겨가 있는 상태였다. 기원전 223년에 진(秦)나라의 공격으로 초왕 부추가 생포당하면서 멸망했다. 그 후에 항전 등이 난릉성에서 항전했지만 이 또한 진(秦)에게 격파됐다.

그리고 진나라에서 상국을 지낸 창평군이신의 뒤통수를 쳐서 오월 지방에서 초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맞섰으나 결국 패하여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해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는다.


2.3. 진승·오광의 난[편집]


진승오광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선포한 나라를 초나라라고 하였다.

장초(張楚)라고도 하는데, '장대한 초나라(張大楚國)'라는 뜻이다.


2.4. 초한쟁패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서초(초한쟁패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팽성.png

진나라 말기에 세워진 나라로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 명장이었던 항연의 후손인 항량항우가 초나라의 부흥 기치를 내걸고 세운 나라로 범증의 진언에 따라 초나라 왕의 후손인 웅심을 찾아내 황제로 옹립해 세운 나라다. 이 황제가 바로 초나라 의제다. 의제를 모실 동안에 한하여 후초(後楚)라고도 한다.

일단 진(秦)나라에 저항해서 일어난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실제로 이를 바탕으로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지만, 애초에 항우가 세운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했으므로 유방을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항우가 의제를 살해함으로써[15] 붕괴되었다.

의제를 추대한 항씨 세력을 이끄는 항우는 명목상 황제인 의제를 모시면서 자신은 서초(西楚)[16]라는 제후국의 패왕을 맡는 형식을 취했다. 수도는 원래 우이(盱眙)에 있었으나,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의제를 소외시킨 항우가 침(郴)으로 몰아냈다. 의제가 항우에게 살해당한 뒤에는 항우의 서초가 명실상부한 초나라로 행세한다. 서초의 수도는 팽성(彭城)이었다.

항우는 서초패왕이 되어 자립하였으나(서초, 항초) 초한전쟁에서 한태조 유방에게 패배하고 자결하여 초나라는 멸망했다.


3. 역사적 평가[편집]


영토 자체는 넓었으나 당시 장강 이남 지역은 이민족이 많았으며 밀림코뿔소, 코끼리 등이 공존하던 미개척지임을 유의해야 한다.[17] 제나라, 한나라(韓) 같은 국가들은 영토는 작았지만 대부분이 농토로 개발되고 인구가 거주할 수 있는, 당시 중국 대륙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18] 초는 (陳), 영(郢), 오월을 포함한 넓은 영토를 살리지 못하고 몇몇 대도시 위주의 거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장 수백년 후인 후한-삼국지 시대에도 장강의 오나라는 장강 유역 남쪽은 미개척지라 이민족이랑 싸우고 늪지를 메우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삼국지대의 혼란으로 중원 인구가 남하하고, 오호의 남하에 다시 떠밀려 남하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송나라 시기에 접어든 이후다.

파일:qvTDkZn.png
서기 2년경의 전한 인구 밀도

이렇듯 초나라는 인구 밀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 전국칠웅 중 가장 작은 영토를 가졌던 한나라는 면적 자체만 놓고 보면 초나라에 훨씬 못 미쳤지만, 동원 가능 병력 숫자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물론 단점만 있던 건 아니었고 장점도 있었다. 장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육조시대 이후라고 하지만 그 전에도 사람은 꾸준히 살고 있었고, 특히 벼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하기에 유리했다. 특히 장강 하류인 양주 일대는 비옥한 삼각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촘촘한 국경을 서로 맞대고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리던 중원의 다른 나라보다는 전란이 적어 좀 더 안정적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인구밀도는 매우 낮았지만 병력 동원 숫자는 많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진나라가 통일전쟁을 치를 때에도 초나라의 역량을 알 수 있는데, 경험이 많은 왕전은 초나라를 정벌하려면 60만 병력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신몽염이 20만이면 충분하다 하여 기각하였지만 초나라의 역공에 털리고 말았고 결국 60만, 사실상 진나라 전 병력을 총동원하고 그마저도 우주방어로 초군의 오른 사기를 빼고 기습작전을 한 후에야 겨우 멸망시킬 수 있었다. 즉, 군사적 역량으로 치자면 전국시대 최강국이었던 진나라도 함부로 하기는 어려운 상대였다는 것이다. 모수가 말했듯 한때 왕호를 빠르게 사용할 정도로 강했으나 맨날 진나라에게 털리는 신세가 된데다가 소양왕이 천하를 굴복시킨 그 시점에서조차 말이다.[19]

이런 면면을 살펴보면 초나라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힘을 바탕으로 해서 독자적으로 주변 이민족들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과 그 밑의 운남 지역이 중국의 문화권에 최초로 들어갔다. 특히 운남 지역의 경우 정벌을 위해 쳐들어간 초의 병력과 장군 '장교'(莊蹻)가 진나라의 촉 지역 점령에 따라 돌아갈 길이 막히자 현지에서 자립해서 전나라(滇)를 수립하여 사실상 운남 지역에서 최초로 국가를 수립한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전나라는 한나라(전한) 무제 때까지 독립 왕국으로 존속했다.

이 시기에는 초나라를 '오랑캐 나라' 취급한 비하적 표현들이 많이 전한다. 《맹자(孟子)》에서 위(魏)나라 혜왕(惠王)[20]맹자에게 주변국에 털린 것을 거론하며 하소연을 할 때 "남쪽으로는 초나라에게 욕을 당했다(南辱於楚)"[21]고 했다든지, 항우원숭이에 비유했다든지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22] 고사 각주구검의 배경이 초나라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가 오래되면서 현실에 맞지 않는 각종 구습들이 존재했고,[23] 무엇보다 귀족의 힘이 너무 강성했다는 것이다. 중앙 집권을 원하지 않던 귀족들이 거대한 사병을 거느리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을 지배하는 등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국가운영을 방해했다. 또한 오기가 초나라의 왕실 종친과 귀족들의 전횡을 뿌리 뽑고, 가산을 압류하여 군사비와 유민들의 정착비로 사용하자 단 몇 년만에 초나라가 크게 일어나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오기도 자신의 뒤를 봐주던 초도왕이 죽자 바로 귀족들의 견제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상을 지내던 이가 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족들에게 살해당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귀족의 힘이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관직에서 내쫓기고 결국 죽음까지 맞이한 충신 굴원의 사례 역시 초나라가 얼마나 귀족의 힘이 막강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초 회왕의 치명적 실수도 쇠퇴에 한몫했다. 짧은 식견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장의의 상어육백리라는 성어에서 드러난다. 초 회왕은 진나라의 600리의 땅과 진나라 공주를 초나라에 바칠테니 제나라와 연을 끊으라는 장의의 말에 그것들을 받을지 안받을지도 확인 안하고 일방적으로 제나라와의 연을 끊었으며 장의가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면서 정말 제나라와 연을 끊었는지 의심쩍다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까지 보내 제나라를 모욕하기까지 해서 제나라가 진나라와 손을 잡게 만들었고, 나중에 장의에게 땅을 줄지 안줄지 추궁하자 장의는 '그거 내 땅 6리 주겠다는 얘기였음 ㅋ' 라며 입을 싹 씻어버렸다. 귀가 얇았던 초 회왕은 나중에 진나라가 땅을 줄테니 화친하자는 말에 땅은 필요 없으니 장의를 내놓으라 했고, 장의는 주저없이 적지로 들어가서는 언변으로 주변을 설득해서 피 한방울 안흘리고 돌아왔다. 후에 진나라가 혼인으로 연을 맺자면서 회왕에게 진나라로 방문할 것을 요구했는데,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갔다가 인질만 되고 초나라에 돌아가지도 못한채 죽고 만다. 이처럼 진나라와의 장기간의 소모전에서 진의 심장부로 원정을 갔다가 군대를 말아먹는 등 정예 병력의 손실이 커서 이걸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는 곧 초나라의 국력 손실로 이어졌다.

초나라가 진나라의 연횡책에 넘어가지 않고 합종책에 보다 치중했더라면[24] 진나라가 통일하지 못했을거라는 주장도 있을만큼 초나라의 입지가 막강했다.[25] 국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정치가 한계가 있어서 진나라의 간계에 번번히 넘어가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신의 없는 나라로 낙인찍혀버렸다. 춘추 시대에도 신의가 없다는 평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초나라가 오나라의 침입을 받아서 수도가 함락되자 초의 장군 신포서가 진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할 때 7일 동안 쉬지도 않고 울어서 겨우 원군을 받아낼 정도였다. 사실 초나라가 오나라에게 수도를 관광당하는 것까지도 그 과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어지는데 원래 진나라의 공주 맹영과 초의 태자 건이 혼인을 맺기로 되어 있었던 것을 초평왕이 날치기해서 자기 후궁으로 삼아버린 데다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 정나라로 도망친 태자 건은 망명을 받아준 정나라를 통수치고 자기가 정나라를 집어삼키려다 들통나 죽고 태자 건을 따르던 오자서가 가족들을 죽인 초의 왕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로 망명해 초를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수에 통수. 덤으로 이때 진나라 왕이 한 말이 뭔고하니 "초나라는 의리가 없는데 신하가 너무 충직해서 도와주겠음"이라니 말 다 했다.

물론 장강 이남의 개발이 미진하여 영토에 비해 국력이 낮았으나, 광활한 영토 덕분에 진나라에게 밀리기 시작할 때도 타국과 달리 수도를 계속 이전하면서 상당 기간 버틸 수 있었으며, 진나라는 국운을 걸고 주력군을 모아 초나라와 결전을 한 것도 모자라서 장기간의 토벌전 끝에 초나라를 완전히 멸하고서야 사실상 전국 시대를 마감짓고 최초의 통일 중화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진나라(秦)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내건 대의 명분 중 하나가 초나라를 재건하자였을 정도로[26] 통일 왕조인 진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의 사상적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진 시황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던 시대에는 단 세 가구[27]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는 사람은 반드시 초나라 사람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실제로 초나라 사람이었던 항우가 초나라의 기치를 내걸고 진을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또, 실질적으로 진을 멸망시킨 한고제 유방 역시 초나라 패현 출신이었다.


4. 언어[편집]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 중에서는 언어학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을 받는 곳이 바로 이 초나라다. 초나라에서 쓰인 초어가 원시 몽몐어[28]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런 설도 있고, 몽몐어족이 아니라 타이카다이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어떤 언어를 기반으로 한 크리올어라는 설도 있다.

그 밖에 소멸한 상고 중국어의 방언이라는 설과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비(非)중국어 계열 언어라는 설도 상당히 유력한 설이다. 실제로 초나라 시대에 쓰여진 한시의 종류인 초사상고한어로 된 것들만 현존하고 있다. 이게 초나라가 세월이 지나면서 중국 왕조들에게 동화된 탓인지, 단순히 중국어중화권링구아 프랑카라서 중국어로 작문을 한 것인지[30], 원래 초어가 중국어의 방언이라서였는지는 알려져있지않은 상황이다.


5. 역대 군주[편집]


초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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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웅(鬻熊): 초나라의 시조.
  • 웅려(熊麗): 육웅의 아들.
  • 웅광: 웅려의 아들.
  • 웅역: 웅광의 아들. 주나라로부터 자작의 지위와 봉지를 하사받는다.
  • 웅애: 웅역의 애들.
  • 웅달: 웅애의 아들.
  • 웅승: 웅달의 아들.
  • 웅양: 웅달의 아들. 웅승의 동생
  • 웅거: 웅양의 아들.
  • 웅지홍: 웅거의 아들.
  • 웅연: ? ~ 기원전 848년, 웅거의 아들.
  • 웅용: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웅연의 아들. 이때부터 재위 기간이 나오기 시작한다.
  • 웅엄: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웅용의 아들.
  • 웅상: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웅엄의 아들.
  • 웅순: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웅엄의 아들. 웅상의 동생.
  • 웅악: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웅순의 아들.
  • 약오: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웅악의 아들. 이 사람의 자식으로부터 춘추 시대 초나라의 주요 귀족 가문인 약오씨[31] 가문이 갈라져 나왔다. 투백비의 아버지.
  • 소오: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약오의 아들.
  • 분모: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소오의 아들. 이 사람이 화씨지벽 고사에 등장한 초 여왕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초나라는 칭왕하지 않았다.
  • 초무왕: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소오의 아들. 이때부터 초나라가 칭왕하기 시작했으며, 시호인 무답게, 무력으로 주위를 제압하며 중원 진출의 야욕을 노골화 한다. 무왕의 아들 굴하로부터 굴씨 가문이 갈라져 나왔다.
  • 초문왕: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초 무왕의 아들.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후의 아내인 식규를 차지해 초 성왕을 낳았다.
  • 장오: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초 문왕의 아들. 놀고 먹기만 하다가 동생인 초 성왕에게 죽었다.
  • 초성왕: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초 문왕의 아들. 형인 장오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송나라를 물리치는 등의 활약을 하지만 성복 전투에서 진문공에게 패한 오점을 남겼다.[32] 그 자신도 아들인 초 목왕에게 죽는다.
  • 초목왕: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초 성왕의 아들. 강나라, 육나라, 요나라[33]를 멸망시키는 활약을 했다.
  • 초장왕: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초 목왕의 아들. 춘추오패 중 한명으로 손꼽히며 진(陳)나라의 대부 하징서를 죽이고 진나라를 멸한 뒤 진나라를 되일으켜 주었다. 필 전투에서 진(晉)군을 대파하며 초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절영지연의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초공왕: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초 장왕의 아들. 아버지에 비해 능력이 떨어져 아버지 때의 위용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언릉 전투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애꾸가 되어버렸다.
  • 초강왕: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초 공왕의 장남.
  • 겹오: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초 강왕의 아들. 숙부인 초 영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 초영왕: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초 공왕의 차남. 조카인 겹오를 죽이고 왕이 된다. 치세에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멸하는 정복 사업을 펼친다. 하지만 사치를 일삼으며 백성들의 원망을 사 동생 웅기질에게 쫓겨난다.
  • 자오: 기원전 529년, 초 공왕의 삼남. 초 영왕이 쫓겨난 공백에 즉위한 왕. 초 평왕의 계략으로 초 영왕이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말에 속아 자결했다.
  • 초평왕: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초 공왕의 오남.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간신 비무극의 말에 넘어가 오자서 부자를 해치는 일을 하는 등 초나라의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다.
  • 초소왕: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초 평왕의 아들. 이때 초나라가 오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신포서가 진(秦)에 원병을 청해준 덕분에 초나라를 다시 되일으켰다.
  • 초혜왕: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초소왕의 아들. 이때 진(陳), 채, 기나라를 멸망시킨다.
  • 초간왕: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초 혜왕의 아들. 거나라를 멸망시킨다.
  • 초성왕[34]: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초 간왕의 아들. 도적에게 살해당한다.
  • 초도왕: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초 성왕의 아들. 오기를 등용해 부국 강병을 이룬다.
  • 초숙왕: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초 도왕의 아들.
  • 초선왕: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초 도왕의 아들. 형인 초 숙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했다.
  • 초위왕: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초 선왕의 아들. 월나라를 멸망시킨다.
  • 초회왕: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초 위왕의 아들. 장의에게 질질 끌려다닌 바로 그 암군이다.
  • 초경양왕: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초 회왕의 아들. 진나라의 침략으로 재위 20년째에 400년 고도 영도(강릉)를 잃고 진현으로 천도
  • 초고열왕: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초 경양왕의 아들. 그가 후계자 선정을 바로 하지 못하여, 갈등의 불씨를 낳아 춘신군 황헐이 이원에게 죽었다.
  • 초유왕: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춘신군의 아들이란 설이 있지만[35] 공식적으로는 초 고열왕의 아들. 이원이 이 당시 때 권력을 휘둘렀다.
  • 초애왕: 기원전 228년, 초 고열왕의 아들. 초 유왕과는 달리 아버지가 초 고열왕이 맞다. 웅부추에게 죽었다.
  • 초왕 부추: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초 고열왕의 아들. 초 애왕과 그를 끼고 행패를 부리던 이원을 죽여 초나라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진나라에게 밀려 수춘이 함락당하고 진 시황에게 붙잡혀 서민으로 강등된다. 그 명분은 초 애왕을 죽인 죄.
  • 창평군: 기원전 223년, 사실상 전국시대 초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초 고열왕의 아들. 다만 초나라 측에는 왕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기록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창평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원래는 진나라의 상국까지 했던 사람이었으나 초의 장수 항연의 추대를 받아 초나라의 왕이 되어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진나라에 저항하다가 결국 전쟁에서 패해 죽었다. 진나라에서 왕 다음의 권위를 가졌던 상국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진나라의 통일 전쟁 막바지에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 초나라를 택했다는 점이 특기할 부분. 다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인지 그에 대한 기록이 기록말살형 수준으로 적다. 사실 창평군은 본명이 아니고, 본명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평군의 본명은 어느 정도 간접적인 기록과 유물로 추측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초나라 측에 기록이 없는 것은 초나라가 멸망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지만, 진나라 측에도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역사상 얼마 없었던 상국의 위치에 올랐던 사람임을 고려하면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


6. 춘추전국시대 이후 초나라 왕[편집]



  • 초은왕(진승): 기원전 210년 ~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 때 진승이 스스로를 장초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 초가왕(경구):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진승이 죽은 후 추대되었던 왕. 하지만 항량에게 패배해 처형되었다.
  • 초회왕/초의제: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6년, 회왕의 후손 혹은 부추의 아들. 진 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실정으로 진나라는 곧 붕괴했고 초한 쟁패기 반진 세력의 상징적 맹주로서 항우에 의해 초나라(후초)의 천자로 옹립되었다. 실권은 없었고, 유방을 중용하려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에 불만을 품은 항우에 의해 피살당할 위기에 처하여 스스로 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고 한다. 초나라 최초이자 최후의 황제이다.
  • 서초패왕(항우): 기원전 206 ~ 기원전 202년, 항연의 방계 후손으로 반진 세력의 실질적 맹주로서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당시 황제에 버금가는 패왕의 지위를 만들고 서초(西楚)가 초나라의 제후국임을 주창하며 본인을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자칭하고 초나라의 실질적인 군주 역할을 하였다. 이후 마찰이 생긴 의제를 자결하게끔 내몰고 명목상으로도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나, 유방한나라에 패배하여 자결했다. 이후 서초와 초나라는 자연스럽게 멸망했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S-r̥a/. 현대 발음은 Chǔ. 楚는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2] 항량, 항우의 서초까지 합하면 기원전 202년.[3] 한자 뜻 자체가 초나라 서울이다.[4] 기원전 704년부터.[5] 태양신과 불의 신을 섬겼다.[6] 현존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화이다. 대략 기원전 5세기경 등장한것으로 보여진다.[7] 소왕은 재위중에 몇번이고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전부 실패한 것은 물론 국력까지 갉아먹어 성강지치는 소왕을 끝으로 기울게 된다.[8] 춘추시대 중원의 나라들은 주나라를 업신여기더라도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는데 남방의 '오랑캐' 나라인 초나라·오나라·월나라는 그에 구애받지 않아서 당당하게 왕을 칭했다. 이때 문정(問鼎)의 고사가 나오기도 했다.[9] 춘추시대 후기의 오월의 대립도 결국 진초의 대리전이다.[10] 언릉 전투에서 패배하며 진나라가 패권을 되찾았다.[11] 초평왕은 비록 후계자 문제로 일을 그르치고 오나라의 공격으로 국력을 깎아먹었지만 월나라와 결맹을 맺어 후일을 도모할 기반을 만들었다.[12] 이때 오자서의 친구로 알려진 신포서가 진(秦)나라의 병사를 빌려 오나라 군대를 물러나게 한다. 그 덕에 멸망은 피할 수 있었다.[13] 사실 초나라의 쇠퇴는 초회왕의 실책이 매우 크다. 30년이나 재위했지만 그 30년간 진나라에게 농락당하기만 했기 때문.[14] 이 시기에 초고열왕은 노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초나라가 최강국인 진나라와 더불어 강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15] 이 일화를 가져다 세조를 비판했다고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 의제를 조문한다는 뜻으로 단종을 의제로 비유하고 세조를 항우로 비유했다고 참소되어 이것이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다.[16] 회수 이북의 초나라 영토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17] 이민족의 반복되는 침략에도 항상 대비해야 했다.[18] 제나라는 악의가 이끄는 합종군에게 크게 패한 후 국력이 급격히 줄어들긴 했으나, 단기간에 이를 회복하고 전국 시대 중반까지 동제를 칭할 정도로 번성했다.(東帝를 칭하던 때는 악의에게 공격하기 바로 직전일이다. 그리고 이후 제나라는 전국 초기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일단 바다와 접해 있었기에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고, 제환공과 관중의 시대에서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일찍이 부국 강병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 면도 크다.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화폐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19] 이 시기의 초나라 신세는 말이 아니라서 초회왕의 실책으로 인해 이 시점부터 꾸준히 국력이 기울기 시작해 경양왕 대에는 본래 수도였던 영이 함락당한다. 고열왕 시기에는 맨날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진건 덤. 근데 그렇게 털릴대로 털린 초나라도 진나라가 총력전을 벌여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만만찮다는 얘기다.[20] 《맹자》에서는 양혜왕(梁惠王)이라고 표기돼 있다. 당시 위나라의 수도가 대량(大梁)이었기 때문.[21] 초나라에 비하적 태도가 자리 잡고 있으니까 이렇게 욕을 당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작 '오랑캐' 따위한테 지다니 정말 치욕스러워 미치겠다!" 이 정도의 뉘앙스인 셈.[22] 춘추·전국 ~ 진 - 한 교체기에는 특정 국가에 대한 당대인들의 비하적 인식들이 녹아 있는 기록들이 굉장히 많다. 당시 초나라 외에 자주 비하됐던 국가로는 망국 하나라의 후예 기(杞)나라, 역시 망국인 상(은)나라의 후예 송나라가 있다. 기우(杞憂) 같은 기나라의 고사나, 송양지인(宋襄之仁)이나 수주대토(守株待兎) 같은 송나라의 고사들은 하나같이 덤 앤 더머급 고사인데 이것은 당시 중원에서 '바보 동네' 취급을 당해 유독 저런 이야기들이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23]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나라도 구습이 많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쪽은 상앙의 변법으로 퇴치했다. 귀족 역시도 변법 이후 문제가 해결되었다.[24] 물론 나머지 6국의 이해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진나라의 외교력도 감안해야 하지만.[25] 물론 또 그렇다고 나머지 5국의 입지도 약한건 아닌게 우선 조나라는 진의 공격에 대한 방패막이였고(천하통일때도 가장 먼저 타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조나라를 몇번이고 공격해도 막혀서 한나라가 먼저 먹혔지만) 제나라는 한때 진나라에서 서제, 동제 칭호를 만들어 진나라는 서제 제나라는 동제라고 하는게 어떻겠냐고 할 정도였고 심지어 전국칠웅 최약체인 한나라는 전성기에는 진나라와 맞먹는 국력을 가질 정도였으니 초나라 외에는 쩌리였던 것도 아니다.[26] 실제로 초한전쟁의 서막을 올린 진승도 나라이름을 초로 내걸었다.[27] 이 세 가구는 수사적으로 초나라 왕족 방계의 유력한 귀족 가문들인 굴씨, 경씨, 소씨 세 집안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28] 몽몐어족조어다.[29] 의 말을 그대로 받아적은 문서라서 라틴어로 기록할 수 없었다. 허나, 이쪽은 조약의 각 조항은 라틴어로 표기하고, 군주들 각자의 서약서만 현지어로 했다.[30] 이런 사례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게 서유럽 국가들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스트라스부르 서약[29] 같은 특수한 문서들 외에는 공문서나 학술 논문을 자국어 대신 라틴어로 작성하는 관습을 수백년 동안 유지했고, 오스만 제국시인들은 근대에 내셔널리즘이 확산되기 이전까지 자국어 대신 페르시아어로만 시를 짓는 관습이 있었다.[31] 투씨, 성씨[32] 다만 성복 전투는 성왕이 성득신한테 싸우지 말라 했으나 성득신이 독단적으로 싸운 것이여서 성왕의 오점이라기엔 애매하다.[33] 거란족요나라가 아니다.[34] 위의 초 성왕과 다른 인물이다. 위의 초 성왕은 시호가 成(이룰 성)이고 이 초 성왕은 시호가 聲(소리 성)이다.[35] 역사적으로 고증하면 초 고열왕의 아들이 맞다. 진시황의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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