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정치사/전기/이탈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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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랑고바르드족 도래 이전
1.2.1. 건국
1.2.2. 대공위 시대와 아우타리의 치세
1.2.3. 아길루프의 치세
1.2.4.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을 택하다
1.2.5. 혼란기
1.2.6. 리우프란트의 치세
1.2.7. 라벤나 총독부 점령
1.2.8. 멸망
1.2.8.1. 스플레토 공국
1.2.8.2. 베네벤토 공국
1.2.8.3. 기타 공국들
1.3. 동로마 제국령
1.3.1. 라벤나 총독부
1.3.1.1. 로마 공국 ⇒ 교황령
1.3.1.2. 동로마 제국 통치하의 베네치아
1.3.1.3. 나폴리 공국
1.3.1.4. 리구리아
1.3.1.5. 칼라브리아 공국
1.3.1.6. 페루자 공국
1.3.1.7. 펜타폴리스 공국
1.3.2. 테마 시켈리아스
1.3.3. 아프리카 총독 관할 하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1.4.1. 카롤링거 왕조 통치기
1.4.2. 혼란기
1.4.3. 독일 왕국에 복속되다
1.4.4. 교황령
1.4.4.1. 프랑크 왕국의 예속기
1.4.4.2. 혼란기
1.4.4.3. 신성 로마 제국(독일 왕국)에 편입되다.
1.4.5. 토스카나 변경백령
1.4.5.1. 토스카나 변경백령 코르시카
1.5. 랑고바르드 왕국의 잔여 세력들
1.5.1. 스폴레토 공국
1.5.2. 베네벤토 공국
1.5.3. 살레르노 공국
1.6. 동로마 제국령
1.6.1. 베네치아 공화국
1.6.2. 나폴리 공국
1.6.3. 가에타 공국
1.6.4. 시칠리아 테마
1.6.5. 사르데냐
1.6.6. 아말피 공화국


1. 개요[편집]


서로마 제국의 붕괴후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반도오도아케르 왕국과 오도아케르 왕국을 정복한 동고트 왕국이 반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후 554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높여졌지만 568년 랑고바르드족들이 북쪽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해 575년 현 리구리아라벤나 일대와 베네치아 석호 일대, 로마 일대와 라벤나와 연결하는 페루자가 포함된 옴브리아 회랑과 나폴리와 아말피 일대와 레지오 일대 및 코르시카사르데냐, 시칠리아를 제외하면 전부 랑고바르드 왕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라벤나 총독부가 창설되지만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에 멸망하게 되며 이때 로마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실상 독립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랑고바르드 왕국의 확장 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로마 공국의 실질적 통치자가 된 로마 총대주교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해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은 프랑크 왕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고, 남쪽으로 랑고바르드 왕국의 잔여 세력인 베네벤토 공국과 해안 일대를 간신히 점유 중인 동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북부와 중부가 프랑크 왕국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셋으로 나눠지면서 이탈리아의 북부와 중부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다가 855년 다시 셋으로 분열되면서 이탈리아 왕국으로 떨어져 나오게 되지만 이탈리아 국왕 자리를 두고 대귀족들 간의 권력 암투로 내부 정세가 혼란속에 있다가 962년 독일 국왕이었던 오토 1세에 의해 정복되다가 오토 1세의 사망 후 다시 독립하다가 재정복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1.1. 랑고바르드족 도래 이전[편집]


서로마 제국오도아케르에 의해 봉괴된 후 오도아케르는 왕위에 오르면서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동로마 제국으로 보내 봉신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밖의 남은 서로마의 잔당 세력들은 그의 집권에 반발해 따로 독립하면서 오도아케르가 지배하는 곳은 이탈리아 반도 밖에 없었다.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제국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동로마의 황제 제노가 수여한 '파트리키우스'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이후 북이탈리아를 본거지로 삼으면서 그곳을 병사들에게 봉토로 지급하고 군대를 재건하여 네포스가 살해된 후 혼란에 빠진 달마티아와 시칠리아를 수복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존 지배 계급의 특권을 계속 보장하고 그들에게 행정을 맡겨 나라를 안정화시켰다. 하지만 그는 로마인과 적극 동화되지는 않았고 이민족들의 침략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으며 피해를 방치하는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동로마 제국과도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오도아케르가 멋대로 서로마 제국을 붕괴시킨데다가 그가 군사적 성과를 거두면서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동로마 제국의 제노 황제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견제 세력을 찾고 있던 제노는 동고트족의 지도자였던 테오도리크와 협약을 맺고 그를 동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받아들이며 오도아케르의 축출을 명령했다. 드디어 489년에 테오도리크는 알프스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로 침공해 들어갔다. 오도아케르는 그와 맞붙었으나 연전연패했으며 여기에 서고트 왕국알라리크 2세까지 테오도리크를 지원하자 오도아케르는 난공불락의 도시인 라벤나에 은신하게 되었다.[1]

테오도리크의 공성에 맞서서 3년간 라벤나에서 버티던 오도아케르는 라벤나의 주교 요한의 주선으로 테오도리크와 협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오도아케르는 안전을 보장받고 테오도리크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테오도리크는 라벤나 입성 10일 후 오도아케르와의 연합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다가 흥이 오를 때쯤 갑자기 오도아케르를 검으로 목 아래쪽으로부터 옆구리까지 단칼에 세게 베어내려 죽여 버렸고, 그의 세력들도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오도아케르가 몰락하면서 동로마는 한시름을 덜었으나 테오도리크 또한 만만찮은 야심가로 바로 동고트 왕국을 세워 동로마와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만다.

파일:qFK2or5.png

테오도리크는 군사적인 능력도 뛰어났지만 일단 이탈리아의 패권을 잡은 후 진짜로 빛났던 것은 바로 통치력과 외교력이었다. 동로마에서 장기간 교육을 받고 문명 사회의 경험을 쌓은 덕분인지 칼만 잘 휘두르고 무식한 야만족 족장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테오도리크는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황제의 신하였지만 실제로는 오도아케르와 마찬가지로 동로마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된 세력을 구축했다. 다만 오도아케르와 달랐던 것은 로마인들의 법과 권리를 그대로 인정해서 기존에 살던 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이민족의 침입이나 약탈을 막아주어 토착 로마인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웠다.

한편으로 라벤나를 중심으로 한 북이탈리아에 자신의 동고트족이 머물러 살도록 했으며 로마인들과 동고트인들을 구분하여 그들이 각자의 법률과 생활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했다. 쉽게 말하면 1국 2체제를 구축한 것. 종교적으로도 관용을 베풀었는데, 테오도리크 본인과 동고트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였으나 로마인들의 칼케돈파(카톨릭)신앙을 억압하지는 않았으며 기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과 종교적으로 융합되지 못하였다.

이는 말년에 의심병이 생기면서 불안요소로 변하고 말았고, 또한 그의 결혼 동맹으로 동맹관계를 맺었던 세력인 서고트 왕국알라리크 2세프랑크 왕국클로비스 1세와의 전쟁에서 패사하여 서고트 왕국의 위세가 약해졌고, 부르군트 왕국은 클로비스 1세의 네아들들이 침공해 부르군트의 왕이자 사위인 지기스문트와 그 일가 전체가 살해되자 테오도리크는 부르군트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더욱이 같은 시기에 반달족의 왕 트라사문드가 죽고 힐데리크가 즉위하였는데, 이 힐데리크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아리우스파를 믿는 반달족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테오도리크의 딸이자 트라사문드의 아내였던 아말라프리다를 선봉에 세웠는데, 결국 반란은 실패하고 아말라프리다는 감옥에 갇혔다가 죽었으며 아말라프리다의 호위를 맡았던 고트족 병사 상당수도 살해당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출병을 계획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계획에 차질을 빚었으며 결국 반달족 정벌에 나서지 못하였고, 이는 말년의 폭정을 심화시켜 그간 남아 있던 서로마 제국의 원로원의원들을 모아놓고 몰살해 버렸다. 이런 만행은 그의 사후에 벌어진 고트 전쟁에서 동고트 왕국의 로마인들이 고트인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

테오도리크 사후 그의 왕위는 외손자인 아탈라리쿠스에게 넘어갔지만 불과 8년만에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고, 섭정이었던 그의 어머니인 아말라순타가 여왕으로 즉위하였고, 여왕의 존재에 회의적이던 귀족들을 무마하려고 사촌 테오다하두스를 공동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말라순타의 친로마 성향에 불만을 느낀 테오다하두스는 반란을 일으켜 그녀를 유폐시킨 후 이듬해인 535년에 살해했다. 친로마 성향의 아말라순타가 살해당하자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를 구실로 벨리사리우스를 총지휘관으로 내세워 동고트 왕국을 침공하였다.

536년,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뒤이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한 뒤, 나폴리를 잇달아 공략했다. 이때 그는 적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벨리사리우스를 두려워하여 나폴리가 함락되는 걸 방치했다. 이에 비티게스 등 동고트 귀족들이 반발하여 그를 폐위시켰고, 비타게스는 동고트의 왕으로서 사산 왕조호스로 1세에게 사신을 급파해 동로마를 쳐달라고 부탁하는 등 어떻게든 동로마군에게 저항하려 했으나 결국 벨리사리우스에게 붙잡혀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간다. 이때 로마를 중심으로 라티움 일대에 로마 공국이 세워졌는데, 로마 공국은 로마 총대주교들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들로 교황령이 성립되기 전까지 로마 총대주교들은 로마 공국을 발판으로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이고 서유럽 각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쨌든 동고트 왕국은 멸망할 것처럼 보였지만 하지만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 전선에 참여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비운 동안 동고트는 541년 토틸라를 새로운 왕으로 뽑은 후 다시 독립을 선언하고 동로마가 차지했던 이탈리아 반도를 유린했고, 전염병 등으로 인해 이탈리아 정복은 잠시 유보되었다.

하지만 제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551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나르세스를 앞세워서 다시 이탈리아 점령을 개시했다. 나르세스는 552년에 일어난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의 동고트군을 격파하였고, 토틸라를 전사시켰다. 동고트의 귀족들은 다음 왕으로 테이아를 내세우지만 다음해인 553년, 베수비오 화산 인근인 몬스 락타리우스에서 그가 이끄는 동고트군이 무참하게 패배하고 18년에 걸친 고트 전쟁이 동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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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동고트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바닥을 드러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이탈리아인들에게 과중한 과세를 매기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민심을 장악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1.2. 랑고바르드 왕국[편집]



1.2.1. 건국[편집]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랑고바르드족은 4세기 후반부터 훈족의 침략과 기근을 피하고자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다. 그들은 주변 종족들과 전쟁을 벌여가며 차츰 남하하다가 540년대에 아우도인 왕의 인도하에 다뉴브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판노니아에 먼저 자리잡은 게피드 왕국(Gepid)의 왕 튀리신드는 이들을 몰아내려 했고, 랑고바르드족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항쟁을 벌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고자 그들의 봉신이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때 대규모 보조군을 보내 나르세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이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석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게피드 왕국의 세력확장을 고깝게 보던 동로마 제국과 연합해 552년에 게피드 왕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560년경 아우도인의 뒤를 이어 랑고바르드족의 군주가 된 알보인은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부족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발판을 마련하고자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타르 1세의 딸 클로신드와 결혼했다. 그 후 게피드족을 꺾기 위해 당시 판노니아로의 진출을 꾀하던 아바르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도와준다면 게피드족의 땅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족의 군주 바얀 1세는 흔쾌히 수락하고, 랑고바르드족과 연합하여 게피드족을 대적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567년 쿠니문드 왕이 이끄는 게피드족이 랑고바르드족을 선제 공격했지만 아바르족의 원군에 힘입은 랑고바르드족이 완승을 거두었고, 알보인은 쿠니문드를 주살한 뒤 수급을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와인 잔으로 만든 후 허리띠에 착용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바얀 1세가 쿠니문드를 죽이고 수급을 벤 뒤 알보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또한 알보인은 쿠니문드의 딸 로자문드를 아내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하녀처럼 대우했고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바르족을 끌여들인 것이 큰 실책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바얀 1세는 게피드족의 영역을 빼앗은 뒤 랑고바르드족까지 몰아내려했다. 그는 결국 아바르족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설득에 의해 이탈리아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동고트 왕국동로마 제국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 여파로 피폐해졌고, 동고트 왕국을 꺾고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된 동로마 제국은 바닥을 드러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이탈리아인들에게 과중한 과세를 매기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게다가 사산 왕조와 아바르족의 침략으로 정신없던 터라 이탈리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한편 랑고바르드족은 지난날 나르세스 장군 휘하의 동로마군에 고용되어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적이 있었기에, 이탈리아의 땅이 비옥하고 기후는 온화하다는 걸 잘 알았다. 알보인이 이탈리아로 진출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전후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파일:Alboin's_Italy-it.svg.png
575년 이탈리아 반도의 모습
주황
동로마 제국
회색
랑고바르드 왕국

568년, 알보인은 부족 전체를 이끌고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여 포룸 줄리(Forum Julii. 오늘날 프헤쥬스) 마을에 무혈 입성했다. 이후 아퀼레이아로 진군하여 역시 무혈 입성한 뒤 569년 밀라노를 공략하고 북부 이탈리아 각지로 진군했다.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파비아를 3년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것을 제외하고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 북부를 순조롭게 공략했다.

하지만 랑고바르드족은 공성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로마군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라벤나 주변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다.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거점을 삼고 36개의 공국을 점령지 곳곳에 신설했다. 공작들은 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전시에 왕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합류할 의무를 준수하는 한 자기 영지에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알보인의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스폴레토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다만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동로마군이 주둔한 해안 도시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알보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희소하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의 치하에서 어떠한 폭력이나 부당한 억압이 없었고, 아무도 약탈하지 않고 도둑도 없고 강도도 없었으며, 모두가 안전하고 두려움없이 원하는 곳으로 갔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묘사를 과장된 것으로 여기지만, 그의 통치가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비해 지극히 온건한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가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은 로마인들의 선진 문화에 깊이 감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현지 주민들과 통혼하고 언어와 문화를 배웠으며, 침략 과정에서 이렇다할 약탈이나 파괴를 자행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군림하는 로마 황제의 혹독한 통치를 받는 것보다는 이민족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을 정중하게 대하는 그들의 통치를 받는 편이 나았다.

알보인은 이렇듯 민심을 얻고 나라를 순조롭게 다스렸지만, 사생활은 엉망이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베로나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허리에 차고 있던 쿠니문드의 해골에 술을 담은 뒤 쿠니문드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로자문드에게 이를 마시라고 요구했다. 로자문드는 억지로 술을 마신 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굴욕과 분노를 느꼈고, 남편에게 복수하고자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그녀는 알보인의 양형제인 헬메치스와 남몰래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헬메치스는 로자문드의 설득을 받아들여 근위대원 페레도를 포섭해 알보인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파일:알보인 암살.jpg

572년 6월 어느 날, 알보인이 점심 식사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헬메치스와 페레도가 공격했고, 로자문드는 알보인의 검을 사전에 숨겼다. 알보인은 검이 없자 발판을 뜯어서 저항했지만 끝내 두 사람에게 피살당했다. 페레도는 알보인의 어린 딸 알부이다와 함께 라벤나로 이동해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토대로 알보인 암살 사건의 배후에 동로마 제국이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1.2.2. 대공위 시대와 아우타리의 치세[편집]

헬메치스는 알보인을 죽인 뒤 왕을 칭했다. 그러나 공작들은 헬메치스의 통치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파비아 공작 클레프를 왕으로 옹립했다. 클레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헬메치스가 있는 베로나로 토벌대를 보냈고, 헬메치스는 로자문드와 함께 동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는 라벤나로 도피했다. 클레프는 이탈리아의 미점령지를 마저 공략하고 동로마 제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했다. 그는 라벤나와 투시아를 압박하면서 라틴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를 랑고바르드 귀족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정복 전쟁 및 숙청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574년, 그는 아내 마사네와 함께 부하 또는 노예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공작들은 왕을 세우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575년 프랑크 왕 군트람이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트렌트를 공략하고 동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가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는 등 외세의 압박이 거세지자, 공작들은 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584년 클레프의 아들 아우타리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아우타리는 라틴 선주민과 랑고바르드족의 통합을 꾀했다. 서로마 제국 황제들이 줄곧 써 왔던 '플라비우스'라는 칭호를 채용해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으며, 개인적으로 아리우스파를 신봉했지만 칼케돈파와 가급적 잘 지내고자 노력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성인들의 유물을 교황 펠라지오 2세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칼케돈파를 신봉하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압박에 대항하려는 랑고바르드족의 의식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칼케돈파에 온정적인 정책을 지속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그는 로마(즉 카톨릭) 의식에 따른 세례를 금지하는 정책을 반포해야 했다.

한편,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지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전체 영지의 1/3을 랑고바르드 귀족이 점유하고 나머지 2/3은 로마인이 소유하는 정책을 반포했다. 이와 함께 라틴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랑고바르드 영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이 제도가 반포되면서 라틴계 지주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지배는 공고해졌다.

아우타리는 통치 기간 내내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신설한 라벤나 총독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트렌트를 탈환한 뒤 에윈을 그곳의 공작으로 세웠다. 585년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스마라그두스는 프랑크,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두 종족이 그다지 협조하지 않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588년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시스를 탈환하는 소소한 성과를 거두었다. 589년 새 총독으로 부임한 로마누스는 프랑크 왕 킬데베르 2세에게 전리품을 전부 줄 테니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헀고, 킬데베르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크군을 파견했다.

프랑크군은 3개 대열로 이탈리아에 진입했고, 아우타리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 회전은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파비아에서 농성했다. 한편 로마누스는 동로마군을 이끌고 모데나, 알티나, 만토바를 공략하였고, 파비아로 가서 프랑크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크군은 로마누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아우타리와 10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철수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질이 돌면서 많은 프랑크 병사가 죽어나가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누스는 개의치 않고 작전을 이어갔다. 그는 랑고바르드계 소국인 파르마, 레지오, 피아첸차 등의 복종을 받아내고 공작의 자녀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냈다. 이후 라벤나로 철수한 후 베네치아로 가서 충성 맹세를 받아냈으며, 별동대를 이스트리아로 파견해 여러 마을을 탈환하였다. 또한 프랑크 왕국에 사절을 보내 제멋대로 후퇴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킬데베르 2세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렇듯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동맹을 찾기로 마음먹은 아우타리는 589년 5월 15일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이우바리족의 지도자 발데르아다의 딸 테오도리다와 결혼하고 테오도리다의 남자 형제인 군도랄드를 아스트리 공작으로 선임했다. 또한 테오도리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 형제가 트렌트 공작 에윈과 결혼했다. 이때 아우타리의 누이와 결혼했던 귀족 안술루스가 결혼 축하 행사 중에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1.2.3. 아길루프의 치세[편집]

590년 9월 5일, 아우타리 왕이 파비아에서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결혼 1년 만에 미망인이 된 테오도린다 왕비는 공작들로부터 차기 왕을 선택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녀는 지난날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한 뒤 랑고바르드족에 망명한 튀링겐족의 지도자이자 토리노 공작인 아길루프와 결혼하고 왕으로 세웠다. 테오도린다는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며 강대한 영향력을 주변 지역에 행사한 바이우바리족의 일원이었고, 아길루프는 그녀에게 왕으로 지명되었기 때문에 향후 통치에서 그녀의 의사를 가급적 존중했다.그래서 당대 역사가들은 아길루프와 테오도린다가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렸다고 기술했다.

일부 공작들은 아길루프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크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의 진영에 합세했다. 이에 아길루프는 무력으로 그들을 복종시키기로 했다. 베르가모와 가둘루프가 이끄는 반란이 특히 거셌지만, 594년 아길루프에게 패배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리하여 공작들을 복속시킨 뒤, 그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프랑크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는 동시에 판노니아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어 북방과 동방 전선을 안정시켰다. 그 후 남방의 라벤나 총독부와 로마 시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길루프는 로마와 라벤나를 연결하는 움브리아 회랑의 여러 도시를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했다. 한편 베네벤토 공국의 랑고바르드군은 나폴리를 포위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라벤나 총독 로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로마누스는 섣불리 로마나 나폴리를 구하러 갔다간 라벤나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592년 그레고리오 1세가 아길루프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누스는 협상이 이뤄지게 내버려뒀다간 움브리아 회랑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로 했다. 그는 그해 7월 라벤나에서 출진하여 해로를 따라 로마로 이동한 뒤, 움브리아 회랑의 도시들을 재정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깨지자, 아길루프는 분노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였고, 로마누스는 이번에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3년 교황청의 재산을 털어서 랑고바르드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고, 아길루프는 이에 만족하여 물러갔다. 그레고리오 1세는 평화를 갈망하여 로마누스에게 랑고바르드 왕국과 휴전을 맺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로마누스는 절대로 협상에 응하지 말라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 간의 사이는 멀어졌다.

그러다가 596년 로마누스가 사망한 뒤 새 라벤나 총독으로 부임한 칼리니쿠스는 전임 총독과는 달리 교황의 요청에 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601년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휴전 협약이 끝나고 전쟁이 재개되자, 칼리니쿠스는 601~602년에 파르마를 공략하고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포로로 잡았다. 이 소식에 분노한 아길루프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북부의 일부 공작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한 뒤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파도바를 공략하여 학살을 자행했으며, 뒤이어 에스테, 아바노, 몬첼리체를 공략했다.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에 오른 포카스는 칼라니쿠스를 해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하고, 과거 라벤나 총독을 역임했던 스마라그두스를 라벤나 총독으로 복귀시켰다. 스마라그두스는 칼리니쿠스가 주도하던 랑고바르드족과의 전쟁을 이어받았고, 아길루프가 포로로 잡힌 딸과 사위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걸 거부했다. 그러자 아길루프는 603년 크레모나를 포위하였고 605년 8월 21일 크레모나를 함락한 뒤 철저하게 파괴했다. 뒤이어 9월 1일 마토바를 점령했으며, 불투르나 요새를 포위하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고, 여세를 몰아 브레셀로를 공략했다. 결국 스마라그두스는 아길루프에게 사죄하고 605년 4월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석방했다. 이리하여 라벤나 총독부와 랑고바르드 왕국간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파일:아길루프의 왕관.jpg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그는 아들 아달랄트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며 이탈리아 왕을 자처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때 제작된 왕관이 현재에도 전해지는데, 거기에는 'Gratia Dei rex totius Italiae(하느님의 은총으로, 온 이탈리아의 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는 자신이 온 이탈리아의 통치자이자 랑고바르드족과 라틴인의 군주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었으며, 신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한다는 왕권신수설이 가미된 것이기도 했다.

그는 통치 말년에 프랑크 왕국과 아바르족과의 평화 조약을 갱신하여 평화를 이어갔고, 랑고바르드인과 라틴인의 통합 정책을 이어갔다. 611년 프리울리 공작 기술프 2세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의 사주를 받은 아바르족의 침공으로 무너졌다.


1.2.4.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을 택하다[편집]

616년 4월 아길루프 왕이 25년간의 통치 끝에 밀라노에서 사망한 뒤, 아들 아달랄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아직 14살이었기에 어머니 테오도린다가 섭정을 맡았고, 아길루프의 사령관 순다리트가 군사 지휘권을 맡았다. 순다리트는 아달랄트 즉위 직후 라벤나로 쳐들어가 위협을 가한 끝에 라벤나 총독 엘레우테리우스로부터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테오도린다는 아리우스파였던 남편 아길루프를 설득해 갓 태어난 아달랄트에게 가톨릭 방식에 따른 세례성사를 받게 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는 교황 호노리오 1세가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의 권유에 따라 단의론를 정식 교리로 삼은 것에 반발한 아퀼레리아 주교의 뜻에 따르면서도 랑고바르드 왕국을 장차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가톨릭 신앙이 투철했던 서고트 왕국의 군주 시세부트는 아달랄트에게 편지를 보내 테오도리다의 이같은 행적에 찬사를 보내면서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아달랄트는 성인이 되었을 때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고, 친 가톨릭 정책에 반감을 품고 있던 아리우스파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반기를 들기로 했다. 626년,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아달랄트와 테오도리다를 라벤나로 쫓아내고 토리노 공작 아리알트를 새 왕으로 세웠다. 이에 교황 호노리오 1세는 라벤나 총독 이사키오스에게 아달랄트를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는 라벤나 시가 전임 총독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건 무리라고 보고, 아리알트의 즉위를 인정했다.

630년 프리울리 공작 타소네가 군데베르가 왕비의 후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다. 아리알트는 타소네 공작이 일으킨 반란에 고전하다가 이사키오스에게 사람을 보내 타소네 공작을 대신 죽여준다면 매년 바쳐야 하는 공물을 300 두카트에서 200 두카트로 줄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사키오스는 이에 동의하여 타소네에게 서신을 보내 동맹을 맺고 싶으니 라벤나로 와달라고 청했다. 타소네는 이에 동의해 라벤나로 갔다가 이사키오스의 병사들에게 습격을 받아 죽었다. 아리알트는 이에 만족하여 공물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또한 군데베르가를 파비아에서 멀리 유배보냈다가 나중에 궁정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직위를 돌려줬다.

아리알트는 수도를 밀라노에서 파비아로 되돌린 뒤 프리울리로 쳐들어온 아바르족을 격퇴했다. 그 외에는 이렇다할 대외 전쟁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 636년 사망했다. 사후 브레시아 공작 난딩의 아들 로타리가 왕위에 올랐다.

로타리는 그동안 동로마 제국과 평화롭게 지내는 걸 추구했던 전 왕들과는 달리 그들을 몰아내고 북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군사 활동을 개시한 그는 639년 오데르초와 알티노 시를 공격해 격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베네치아 석초로 도주했다.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 이사키오스는 토르첼로의 산타 마리아 마드레 디 디오 성당을 새로 세우고 로타리 왕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알티노 주교를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642년, 로타리는 수도 제노아와 루니 시를 포함한 리구니아를 정복했다.

643년, 로마 공국의 공작을 맡던 요안니스 차르툴라리오스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사망 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로마 공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이사키오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로마 시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성 마리아 아드 프라세페 성당에 숨었지만, 곧 끌려나와 사슬에 묶인 채 라벤나로 보내져 참수당했다. 로타리는 동로마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틈을 타 라벤나로 진격했고, 643년 스쿨테나 전투에서 동로마군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군 8천 명이 전사했다고 하며, 이사키오스는 이때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타리는 여세를 몰아 라벤나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본국에 돌아갔다.

643년 11월 22일, 로타리는 사적 복수를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하고 사형 집행을 엄격히 제한하는 등 일련의 법령을 반포했다. 또한 자신에게 거역한 공작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어느 공작도 왕의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풀리아와 살레르노 시를 정복하면서 영토를 크게 늘린 베네벤토 공국조차도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작 아레치스 1세는 아들 아이울프 1세를 파도바 궁정으로 보냈다.

652년 로타리 왕이 사망한 후 아들 로달트가 새 왕으로 등극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로타리의 왕비 군데베르가가 섭정을 맡았다.[2] 군데베르가는 파비아에 구세주 성전 교회를 세우는 등 종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로달트는 653년에 돌연 피살되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어느 여인을 강간하던 중 현장을 습격한 그녀의 남편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로달트 사후 바이우바리족의 일원이자 가톨릭 신자인 아리페르트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국 전역에 가톨릭을 전파하고자 선교사들을 보냈으며, 파비아에 구세주 교회를 세웠다. 이는 라틴인들이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고, 교황과 동로마 황제간의 대립이 갈수록 격화되는 것을 보고, 이탈리아 전역을 복종시키려면 가톨릭을 내세우는 편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교황 마르티노 1세가 동로마군에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는 등 교황청과 동로마 제국의 대립은 심각했지만, 그럼에도 교황들은 랑고바르드 왕국에 복종하는 대신 동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을 택했다.


1.2.5. 혼란기[편집]

661년, 아리페르트 1세는 숨을 거두면서 두 아들 페르타리트고데페르트를 공동 왕으로 세우고 나라를 양분했다. 고데페르트는 파비아에서 군림하며 아리우스파의 지지를 받았고, 페르타리트는 밀라노에서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두 왕은 곧 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벌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고데페르트는 베네벤토 공작 그리말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말트는 장남 로무알트 1세에게 베네벤토를 맡긴 뒤 파비아로 진군했다. 그는 즉시 성문을 열고 그리말트를 환대했다. 그러나 그리말트는 진작에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얼마 후, 고데페르트는 그리말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그리말트는 밀라노에 군림하던 페르타리트를 축출한 뒤 고데페르트의 누이 테오도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대다수 공작들은 그리말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아스티와 토리노에서는 그에 대항하여 봉기하기로 마음먹고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는 두 도시의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한편, 페르타리트를 보호해주고 있던 아바르족에게 당장 자신에게 넘기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아바르족이 이탈리아로 돌려보내려 하자, 페르타리트는 프랑크 네우스트리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663년, 그리말트는 아스티로 침입한 프랑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페르타리트를 프랑크 왕국에서 끌어내거나 제거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663년, 콘스탄스 2세는 이탈리아 전역을 재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강력한 군대를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했다. 그는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를 받는 풀리아로 진군해 로무알트 1세를 격파하고 베네벤토를 포위했다. 그는 즉시 아들을 구하고자 출격했고, 콘스탄스 2세는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폴리로 후퇴했다. 이 승리는 여전히 위태로웠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들 로무알드는 나중에 반격에 나서 오트란토를 제외한 풀리아 전역을 탈환했다. 한편, 그는 동로마군에서 이탈한 불가리아 분견대를 고용해 세피노, 보이아노, 이세르니아 등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이탈리아 중남부의 통제를 강화했다.

여기에 카푸아 백작을 맡던 사위 트라스몬드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승진시켰고, 로타리의 칙령에 새로운 법률을 추가했으며, 파비아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 종교 활동에서 힘을 기울였다. 이렇듯 안정적인 통치를 선보이던 그는 671년 사망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활을 쏴서 비둘기를 맞히려 했다가 팔의 정맥이 끊어졌고, 의사들이 이를 봉합하려 했다가 합병증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의사들이 상처를 봉합할 때 독에 적신 거즈를 발랐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불확실하다.

그리말트 사후 아들 가리발트가 즉위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3] 귀족들은 그를 왕으로 모시는 것보다는 성인을 세우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지난날 그리말트에게 축출된 뒤 프랑크 왕국에 망명했던 페르타리트가 복위했다. 그 후 베네벤토 공작이자 그리말트의 장남인 로무알트와 협의한 끝에 그가 무제한의 자치권을 누리는 걸 허용하는 대신 자신의 아내 로델린다와 아들 쿠닝페르트를 파비아로 돌려보내게 했다.

페르타리트는 랑고바르드족이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사력을 다했다. 가톨릭 주교들에게 각자 교구를 맡아서 백성들을 설복시키도록 독려했으며, 왕국 전역에 교호와 수도원을 세웠으며, 밀라노 대주교가 대규모 공의회를 개최하는 걸 허용했다. 678년 아들 쿠닝페르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680년에는 동로마 제국과 "영원한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이탈리아 분할을 비준했다. 이 협약은 680~6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단성론을 비난한 공의회에 참여한 랑고바르드 사절단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랑고바르드 왕국은 라벤나 총독부, 로마, 나폴리 등 동로마 제국의 주권 아래 남아있는 영토를 공격하지 않는 대신 이탈리아 대부분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아리우스파 세력이 강성했던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의 반감을 샀으며, 랑고바르드 귀족들은 쓸데없는 협약을 맺는 바람에 영지를 늘릴 기회가 사라졌다며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트렌토 공작 알라히스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680년 알라히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바이우바리족의 지원에 힘입어 이를 진압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이 두려웠기에 다시는 왕위를 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사면했다.

688년, 페르타리트는 파비아에서 사망했다. 이에 알라히스가 즉시 반란을 일으켜 왕위 계승자 쿠닝페르트를 코모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섬에 세워진 성에 유폐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알라히스는 즉위 후 폭압적인 정치를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다. 689년, 코모 호수에서 탈출한 쿠닝페르트는 피에몽트에서 병력을 모았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베네치아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출진했다. 양측은 로디 마을 인근의 코르나 테 다다에서 맞붙었다. 오랫동안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격전이 이어지다가 쿠닝페르트가 마침내 승기를 잡았고, 알라히스는 전사했다.

이리하여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쿠닝페르트는 왕위에 오른 뒤 알라히스를 무찌른 전장에 성 게오르기우스 수도원을 세웠고, 전쟁 중 파괴된 도시인 모데나를 재건했다. 하지만 전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90년, 레우니아의 안스프리트가 프리울리 공국을 침공해 그 땅을 차지한 뒤 왕을 자처한 것이다. 하지만 안스프리트는 파비아로 진군하던 중 베로나에서 매복 공격을 당해 사로잡힌 뒤 왕 앞으로 끌려갔다. 쿠닝페르트는 안스프린트를 실명형에 처한 뒤 추방했고, 프리울리 공국을 왕실 소유지로 삼고 아도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 후 랑고바르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공작들을 설득하여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했고, 교회와 수도원을 잇따라 설립해 민중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했다. 또한 698년 오랫동안 이탈리아 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던 단성론 논쟁을 끝내고자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정통 가톨릭과 단성론 추종자들의 화합을 도모했다.

700년 쿠닝페르트가 사망한 뒤 아들 리우페르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아스티 공작 안스프란트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토리노 공작이자 바이우바리족의 일원인 라긴페르트가 반란을 일으켜 파비아로 진격했다. 701년 초, 라긴페르트는 노바라 인근에서 안스프란트와 베르가모 공작 로타리트를 격파하고 파비아에 입성한 뒤 리우페르트를 폐위했다. 그러나 701년 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고, 라긴페르트의 아들 아리페르트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리우페르트는 갑작스러운 국왕 교체로 인해 궁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감옥에서 탈출한 뒤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되찾았다.

아리페르트 2세는 코모 섬으로 탈출한 뒤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고, 파비아에서 리우페르트의 추종자들을 물리치고 리우페르트를 감옥에 수감한 후 왕위에 복귀했다. 그러나 리우페르트의 지지자인 베르가모 공작 로타리트는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702년 왕을 자칭했다. 이에 베르가모로 진격한 그는 격렬한 공방전 끝에 베르가모를 함락시키고 로타리트를 체포한 뒤 노예와 전쟁 포로에게 실시하는 행위인 머리와 수염을 깎는 조치를 내린 후 토리노로 이송시킨 후 곧 죽였다. 리우페르트 역시 억류되어 있다가 목욕 중에 익사했다. 리우페르트의 후견인이었던 인스프란트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신체 절단형을 받았다. 다만 막내아들 리우프란트만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바이에른에서 아버지와 합류했다.

아리페르트 2세는 베르가모 공국의 권한을 축소하고 믿을 수 있는 측근을 관리인으로 삼았다. 얼마 후 프리울리 공작 코르볼로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가차없이 물리친 뒤 코르불로을 실명형에 처하고 페르모네를 프리울리 공작으로 세웠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을 계속해서 수행했으며, 교황 요한 6세에게 본래 교회의 영토였다가 랑고바르드 왕국이 접수했던 코티엔느 산맥을 반환하는 등 교황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했으며, 잦은 내란으로 흔들리는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초기에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뒤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다른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인간 불신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는 비밀 요원들을 왕국 전역에 보내 반란을 꾸미는 자가 있는지 철저하게 감시하게 했다. 또한 보물을 가능한 한 챙기면서도, 외국 사절을 맞이할 때 거칠고 바느질을 잔뜩 한 옷을 입고 맞이해, 그들이 자기가 자긴 보물을 탐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712년 초, 안스프란트가 바이에른에서 군대를 모집한 뒤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즉시 이에 맞섰고, 양자는 그해 3월에 맞붙어서 해질녘까지 이어졌다. 전세는 어느 한쪽으로 쉽사리 기울어지지 않았고, 안스프란트가 동원한 바이에른 용병대는 막대한 손실에 동요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런데 그는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았는데도 파비아로 철수해 버렸고, 이를 비겁한 행동이라고 여긴 병사들이 그를 등져버렸다. 아리페르트 2세는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하고자 파비아에서 달아났지만, 티키누스 강을 건너던 중 등에 짊어지던 보물에 짓눌리는 바람에 익사했다. 이후 안스프란트가 왕위에 올랐지만 3개월만에 병사했고, 아들 리우프란트가 왕위를 계승했다.


1.2.6. 리우프란트의 치세[편집]

리우프란트는 즉위 후 잦은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왕국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총리에게 왕국의 운영 전반을 맡을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 문서 관리관, 왕실 종자, 재무관 및 행정을 맡은 궁전 집사를 신설하거나 개편하여 궁전의 기능을 강화했다. 그리고 오직 수도 파비아에서만 궁정 예법에 기반한 행사와 연례 국민 회의를 개최하게 하면서 이에 적합한 건물들을 잇따라 세웠다. 여기에 보다 공평한 사법 행정 및 완전한 병역 부과, 안정적인 내부 보안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 관리기구를 재구성하고 위계와 기능을 정했다. 스쿨다키오(sculdascio)는 마을에서 판결과 집행을 담당했으며, 살리타리(saltarii)는 농촌 지역의 행정을 담당했으며, 프살테리(psalteries)는 도시를 다스렸다. 이들은 주교가 거주하는 도시 및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주교와 공작의 통제를 받았고, 공작과 주교들은 왕에게 연례 보고를 올리고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는 왕실과 국가 행정에서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국고를 충당하고자 이 공물 확보에 열을 올렸다.

한편, 그는 로타리 왕이 반포했던 랑고바르드 법률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편하고 새로운 법률을 추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즉위 첫 해에 로타리 법령에 6가지 법률을 추가로 반포했으며, 713년부터 735년까지 로마법에 기반한 153개의 법률을 반포했다. 그는 법령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나님을 받드는 군주가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지혜로 제정하고 반포하기로 한 법은 하나님의 의지와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새 법률의 초안을 작성하고 공포하는 활동은 매년 3월 1일에 파비아에서 열리는 연례 국민 회의에서 시행되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구성원들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협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결속력을 강화했다. 그는 특히 가정법, 토지 및 주택 매매, 계약서의 유효성 등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분야에 초점을 맞췄다. 신속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판사의 순행을 장려했고, 자유인을 이탈리아 외부에서 노예로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하층 계급간의 결혼을 보호하는 등 약자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한 가톨릭국교로 확정하고 수녀들을 보호했으며, 이교식 관습을 금지하고 교회법에 따른 결혼법을 도입했다. 그 외에도 강도나 살인에 대한 보상으로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돈을 늘리고 이를 마련하기 위해 가해자의 재산을 몰수하게 하는 등 여러 조치를 내렸다.

그는 처음에 동로마 제국교황과 평화롭게 지내려 했다. 스폴레토 공작 파로알트 2세에게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세를 라벤나 총독부에 돌려주도록 명령했다. 여기에 새 교황 그레고리오 2세에 대한 우정의 표시로 아리페르트 2세가 돌려줬다가 나중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도로 빼앗아갔던 코티엔느 산맥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귀족 내부에서 영지를 확장하고 싶어하는 기류가 갈수록 거세지자, 그는 마음을 바꿔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717년, 리우프란트는 일전에 라벤나에 돌려줬던 클라세 항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와 동시에, 스폴레토 공작은 나르니를 점령헀고 베네벤토 공작 로무알트 2세는 쿠마에를 점령했다. 리우프란트는 곧 북쪽으로 철수했고,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장군이 쿠마에를 재탈환했다.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성상 파괴 정책으로 인해 제국이 혼란에 빠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성상 파괴를 밀어붙이는 동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고 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잡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기로 했다. 레온 3세는 이를 저지하고자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에게 그레고리오 2세를 죽이거나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라벤나 주둔 동로마군은 로마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민병대에게 패퇴했다. 그 후 727년 라벤나에서 폭동이 일어나 파울로스가 살해당하면서, 라벤나 총독부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그는 이때를 틈타 공세를 개시해 포 강을 건너 볼로냐를 점령하고 727년에서 728년 사이에 프리가노, 몬테베글리오, 부세토, 산 조반니, 오시모, 그리고 펜타폴리스를 잇따라 공략하며 라벤나 총독부를 압박했다. 레온 3세는 에우티키오스를 파견해 라벤나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에우티키오스는 나폴리로 상륙한 뒤 일부 관리들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29년, 에우티키오스는 리우프란트에게 뇌물을 줘서 그레고리오 2세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무효로 하도록 유도했다. 이에 리우프란트는 최근에 교황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자신의 통제로부터 독립하려 하는 스폴레토, 베네벤토 공국을 응징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라벤나 총독부와 손을 잡겠다고 밝혔고, 에우티키오스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한 뒤, 그는 로마로 진군하여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인근에 진영을 세웠다. 그레고리오 2세가 교회 재산을 바치며 협상을 청하자, 그는 자신이 신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교황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밝힌 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고 알려진 베드로 대성당에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 이후 교황과 라벤나 총독간의 화해를 중재하면서, 랑고바르드 왕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권위가 높은 군주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732년, 리우프란트는 통제에 따르지 않은 베네벤토 공국을 응징하고자 베네벤토로 쳐들어갔다. 그 사이, 리우프란트의 조카 힐데프란트가 라벤나를 급습했고, 라벤나는 얼마 안가 함락되었다. 라벤나 총독 에우티키오스는 베네치아 석호로 피신한 뒤 당시 총독의 암살로 혼란에 빠져 있던 베네치아를 수습하고 도제를 선출할 수 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5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리우프란트에 대항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공작을 지원해 두 공작이 힘을 합쳐 리우프란트와 맞서게 했다. 이리하여 리우프란트가 베네벤토에서 발목이 묶인 사이, 발칸 반도에서 파견된 동로마 함대가 베네치아 함대와 손을 잡고 739년 라벤나로 진격해 힐데프란트를 생포하고 라벤나를 탈환했다. 동로마 제국을 따르는 페루자 공작 아가토네는 여세를 몰아 볼로냐를 탈환하려 했으나 랑고바르드군에게 대패했다.

한편, 리우프란트는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연합군을 격파했다. 스폴레토 공작 트라사문트 2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적대적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3세에게 귀순했다. 리우프란트는 로마를 포위하고 시골 지역을 약탈하고 로마 귀족들을 랑고바르드 관습에 따라 면도하고 랑고바르드 옷을 입히면서 트라사문트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이 끝까지 응하지 않자, 움브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약탈을 자행한 뒤 파비아로 돌아갔다. 리우프란트가 떠나자, 트라사문트는 교황의 지원에 힘입어 739년 12월 스폴레토를 되찾았다.

741년, 리우프란트는 재차 남하하여 로마 공국과 라벤나 총독부에 타격을 입히고 로마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그레고리오 3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에 즉위한 자카리아가 협상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743년 테르니에서 만났다. 그는 움브리아 도시들을 교황청에 돌려주는 대신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을 직할령으로 삼는 것을 용인받았다. 그렇게 교황과 합의한 뒤 남쪽으로 진군해 동로마-스폴레토 연합군과 맞붙어 완승을 거두고 스폴레토를 장악한 뒤 트라사문트를 수도원에 가두었다. 이후 라벤나로 진격하여 공성전을 벌이자, 에우티키오스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라벤나 대주교 요한 5세와 시민 대표들을 교황 자카리아에게 보내 중재를 요청했다. 리우프란트는 교황의 설득에 넘어가 라벤나를 정복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이렇듯 내치와 외정 모두 성공을 거뒀으나, 여러 공작은 절대 왕권을 휘두르는 그에게 반감을 품고 반란을 도모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친척인 로타리의 암살 시도를 가까스로 모면했으며, 베네벤토와 스폴레토 공국의 잦은 반항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프리올리 공작 페모가 왕의 통제에 불응하다가 해임되고 그의 조카인 라치스가 그 자리를 꿰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저항을 분쇄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탈리아의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교회의 협조를 받아내려 했다. 이를 위해 시에나와 아르조, 루카와 투스카니 시 주교들간의 갈등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았으며, 왕국 전역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여기에 로마 공국의 북부에 있는 수트라 요새를 점령한 뒤 그곳을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기증하겠다며 로마 교황의 영지로 삼게 했다.

한편, 그는 대외 외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717년 바이에른에서의 내부 분쟁에 개입하여 아내 군트루드의 형제인 우베르토를 지원했으며, 아디게 강에 있는 바이에른의 여러 성들을 공략했다. 또한 명목상으로는 메로빙거 왕조가 다스리지만 실제로는 카롤링거 궁재들이 통치하는 프랑크 왕국과 가급적 잘 지내려 노력했다. 725년 카롤루스 마르텔이 군트루드의 조카와 결혼한 뒤 양자간의 서신 교류가 이어졌고, 730년경 양국은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737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아들 피핀을 파비아로 보내 리우프란트가 양자로 삼게 했다. 리우프란트는 피핀을 정성껏 대접하며 랑고바르드족의 관습에 따라 면도하게 한 뒤 풍성한 선물과 함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돌려보냈다. 738년, 리우프란트는 작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원군을 보내 카롤루스의 승리에 일조했다. 739년 리우프란트가 로마 공국을 약탈하고 로마 시를 압박해오자,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프랑크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전에 리우프란트에게 도움을 받은 바 있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탈리아 전역을 프랑크 왕국이 가지게 해줄 테니 도와달라는 교황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1.2.7. 라벤나 총독부 점령[편집]

744년 1월, 랑고바르드 왕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군림하며(32년)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리우프란트 왕이 사망했다. 사후 조카 힐데프란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 교황에 대한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프리올리 공작 라치스를 앞세운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었다. 라치스는 자신을 리우프란트 왕의 진정한 상속자이자 정책을 이어받을 계승자라고 내세웠다. 또한 왕실과 공작에 해를 끼치는 불복종과 간첩 행위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판사를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하는 등 일련의 법을 제정해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이들의 봉기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또한 라틴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라틴 여인 타시아와 결혼했고, 전통적인 랑고바르드 의식이 아닌 로마 의식에 따라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746년부터 랑고바르드 왕의 칭호 대신 '프린켑스' 칭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같은 친로마 정책에 많은 랑고바르드 귀족들이 반감을 품었고, 왕이 로마 교황과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평화 정책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749년 펜타폴리스를 침공하고 로마와 라벤나 총독부를 연결하는 도로의 요충지인 페루자를 포위했다. 이때 교황 자카리아가 포위를 풀어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파비아로 철수했다. 749년 7월, 밀라노에 모인 랑고바르드 공작들은 라치스가 교황에게 매수되었으니 더 이상 따를 수 없다며 아이스툴프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라치스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곧 온 가족과 함께 로마로 피신했다.

라치스를 몰아내고 새 왕에 옹립된 아이스툴프는 이탈리아 전체를 자신의 통치하에 두려는 야망을 품고, 이를 위한 군대의 재편과 강화에 전념했다. 모든 자유인은 군 복무 대상이 되었으며, 징병 대상자들의 경제적 자원에 상응하는 의무를 준수해야 했다. 대지주와 부유한 상인들은 흉갑과 말을 착용해야 하고, 보통 지주와 일반 상인들은 말, 방패, 창을 들고 나와야 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나무 방패, 활, 화살을 장비해야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고자 알프스 산맥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물류 흐름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여기에 피핀 3세의 형이며 당시 수도원에서 은퇴 생활을 하던 카를로만과 손을 잡아 피핀을 견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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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모습
회색
랑고바르드 왕국
주황
동로마 제국

750년, 라벤나 총독부를 침공한 그는 코마치오와 페레라를 공략했다. 이후 751년 여름 이스트리아를 공략한 뒤 라벤나를 포위 공격했다. 에우티키오스 총독은 사력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고, 라벤나의 총독 궁전은 아이스툴프의 또다른 궁전이 되었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동로마 제국의 양식에 기반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752년,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로마 공국의 각 주민과 영토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는 분견대를 잇따라 파견해 로마를 괴롭혔고 753년 체사노 요새를 함락했다. 다만 로마 시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가톨릭 군주의 입장상 부담이 컸기에 쉽사리 감행하지 않았다. 한편 751년 라치스에게 충성하던 스폴레토 공작 루푸스를 제거하고 스폴레토 공국을 직할령으로 삼았으며, 베네벤토 공국에게도 충성 서약을 다시 한 번 확보했다.

753년 10월 스테파노 2세는 아이스툴프에게 사절을 보내 빼앗아간 요새를 돌려준다면 보상금을 바치겠다고 제안했지만, 아이스툴프는 무조건 복종하라며 거부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스테파노 2세는 754년 1월 6일 프랑크 왕국으로 찾아가서 피핀 3세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일전에 교황이 메로빙거 왕조를 밀어내고 자신이 프랑크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적이 있는 데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가신이 되는 걸 막고 싶었기에, 피핀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로 했다. 4월 14일, 피핀은 프랑크 귀족들을 소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전쟁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카를로만은 지난해에 사망했기에, 프랑크 왕국 내에서 피핀을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755년 봄, 피핀 3세는 알프스 산맥으로 진입해 수사 계곡 요새에서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아이스툴프는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프랑크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어진 평화 협상 끝에, 755년 6월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이스툴프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인질을 넘기며, 자신이 빼앗았던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피핀 3세가 철수한 후, 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756년 1월부터 3월까지 로마 공방전을 전개했다. 알프스 산맥을 겨울에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프랑크군이 산맥을 넘지 못하는 사이에 로마 시를 함락시켜서 모든 걸 끝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지하며 끝까지 저항한 수비대와 시민들 때문에 함락되지 않았고, 아이스툴프는 4월 초 포위를 풀고 파비아로 돌아갔다. 한편 피핀 3세는 아이스툴프가 약속을 어겼다는 소식을 듣고 4월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아이스툴프를 또다시 격파하고 파비아에서 포위 공격했다. 아이스툴프는 결국 756년 6월 항복하고 훨씬 가혹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번에는 일전에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이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로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인질을 프랑크 왕국에 보내야 했으며, 상당한 배상금을 프랑크 왕국에 지불해야 했다. 이리하여 교황청이 피핀 3세로부터 라벤나 총독부 등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기증받으면서 교황령이 탄생했다.


1.2.8. 멸망[편집]

756년 12월, 아이스툴프는 사냥 도중 낙마한 여파로 사망하고 파비아의 성 마리아 교회에 안장되었다. 당시 로마에서 수도자로 지내던 라치스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비아로 달려가서 왕이 되려 했다. 그러나 토스카나 공작 데시데리우스가 피핀 3세의 지원에 힘입어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데시데리우스가 새 왕으로 등극했다. 757년 4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바오로 1세가 반대자들의 거센 도전으로 곤욕을 치르자, 데시데리우스는 이 때를 틈타 아이스툴프 왕의 패전으로 흔들리던 왕국의 권위를 되살리려 했다. 758년 펜타폴리스를 통해 스폴레토 공국으로 진군하여 로마 교황과 연계하여 독립을 꾀하던 알보인 공작을 체포해 지지자들과 함께 처형했고, 베네벤토 공작 리우프란트를 몰아낸 뒤 자신의 사위인 아리치스 2세를 새 공작으로 앉혔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에 반항하던 두 공국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이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데시데리우스는 753년 고향인 브레시아에 성 살바토레 수도원을 세우고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게 했으며, 딸 안셀페르가를 수녀원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롬바르디아, 에밀리아, 투스카니 일대의 모든 수도원이 이 성 살바토레 수도원의 관할하에 종속되었다. 758년에는 바디아 레오넨세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수용했다. 또한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힘에 의존해 자신들을 또다시 치도록 유도할 것을 우려해 페라라, 피엔차, 펜타폴리스 등의 소유권을 교황에게 넘기고 로마로 가서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 등 교황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767년 6월 바오로 1세가 선종하자, 차기 교황을 놓고 여러 후보가 각축전을 벌였다. 그는 이에 개입해 친 랑고바르드 성향을 가진 인물을 교황으로 세우려 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을 따르는 귀족들의 대표였던 토토 공작이 동생 콘스탄티노를 교황에 세우려 했다. 이에 로마 교회의 공증인이었던 크리스토포로와 아들 세르지오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세르지오에게 군대를 내주었고, 세르지오는 토토 공작을 살해하고 콘스탄티노를 축출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은 새로운 교황 후보로 수사 필립보를 내세웠으나 크리스토포로는 이를 무효화하고, 다시금 선거를 열어 스테파노 3세를 정통 교황으로 내세웠다. 스테파노 3세는 768년 8월 7일 교황좌에 공식 착좌했다. 이후 알라트리에서 콘스탄티노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내 진압되었다.

768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사망하자, 두 아들 카롤루스와 카를로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왕국이 두 패로 나뉘었다. 스테파노 3세는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잘 먹히지 않자 데시데리우스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딸 데시데르타를 카를로만과 결혼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이 랑고바르드 왕국에 간섭할 여지가 크게 줄어들자,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로마를 장악하기로 마음먹었다.

769년,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순례를 핑계로 군대를 거느리고 교황령에 들어섰다. 산 피에트로 성당 인근 평원에 진영을 세운 그는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포함한 친 랑고바르드 세력을 지원했다. 그 결과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고, 크리스토포로는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3일만에 사망했다. 772년 교황 스테파노 3세가 중병에 걸리자, 아피아르타는 로마 교회의 권력을 장악해 유력한 귀족과 성직자들을 내쫓고, 1월 24일에는 소경이 된 채 라테라노 궁전의 독방에 수감된 세르지오를 교살해 후환을 없앴다.

이 무렵 카를로만이 사망했다. 데시데르타의 요청을 받은 그는 딸이 남편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게 해주려 했다. 이에 분노한 카롤루스는 공세를 개시해 카를로만의 영토를 접수했다. 데시데르타와 두 아들은 카롤루스의 공세를 피해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적대했다. 그는 이 상황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를 조속히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겼다.

772년 2월 1일, 스테파노 3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이 된 하드리아노 1세가 새 교황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프랑크 왕국이 반 랑고바르드 정서로 돌아선 걸 눈치채고 친 랑고바르드파의 수장인 아파아르타를 해임하고 아파아르타에게 축출되었던 인사들을 복귀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교황이 "피핀 왕과 아이스툴프 왕이 맺었던 조약 대로 모든 점령지를 교황청에 넘겨라"라고 요구하면서 결렬되었다. 이에 데시데리우스는 공세에 나서 피엔차, 페라라, 코마키오를 점령하고 라벤나를 위협했다. 그러면서 카를로만의 아들들을 프랑크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로마를 치겠다고 위협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친 랑고바르드파 인사들을 계속 해임했다.

772년 말,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인근의 여러 마을을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그를 파문하고 카롤루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카롤루스는 작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교황의 요청에 응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돌렸다. 773년 봄, 카롤루스는 제네바 인근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두 부대로 나눴다. 한 부대는 카롤루스의 삼촌 베르나르도의 인솔하에 발레다오스타로 진군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이끌고 이끌고 몬체니시오를 가로질러 남하했다. 그는 프랑크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마 포위를 풀고 북상해 수사 계곡 인근의 키우세에서 카롤루스를 막아섰다. 그러나 발레다오스타로 가 있던 아들 아델치스는 베르나르도의 군대에게 참패한 뒤 남이탈리아로 달아났다.

패전 소식을 접한 그는 파비아로 도주한 뒤 수비에 전념했다. 그러나 여러 공작들이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파악하고 프랑크 왕국으로 돌아섰고, 스폴레토, 페르모, 오소모, 안코나는 로마 교황에 복종하기로 했다. 카롤루스는 원정을 이어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카를로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파비아는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774년 초 함락되었고, 데시데리우스와 그의 아내는 프랑크군에 사로잡혔다. 카롤루스는 데시데리우스를 프랑스 북부의 코르비 수도원으로 추방하고 랑고바르드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고 랑고바르드 공작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조건하에 자치를 누릴 수 있게 해줬다. 데시데리우스는 코르비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786년에 사망했다.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델치스는 남이탈리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의 공작들마저 프랑크 왕국에 복종하기로 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한 뒤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의 영접을 받고 귀족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올 기회를 노렸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반감이 생긴 일부 랑고바르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788년 말 동로마군이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아델치스를 랑고바르드 왕에 복위시키려 했지만, 스폴레토 공작 힐데프란트와 베네벤토 공작 그리말트 3세, 그리고 위니게스 휘하의 프랑크군이 결성한 연합군에게 패퇴했다. 결국 아델치스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1.2.8.1. 스플레토 공국[편집]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를 순조롭게 공략한 뒤 파도바를 수도로 삼아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했다. 알보인 휘하 귀족들은 여세를 몰아 여러 독립 공국들을 세웠는데, 그 중엔 파로알트 1세라는 인물도 있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를 집필한 8세기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파울 부제에 따르면, 본래 라벤나 총독부가 관할하는 로마군에 복무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577년 또는 579년에 로마 황제를 배신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에 귀순해 스폴레토 초대 공작이 되었다고 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동로마 장군 바두아리우스가 576년 이탈리아를 수복하기 위해 랑고바르드군과 맞붙었다가 참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뒤 파로알트가 랑고바르드 왕국에 귀순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579년경 라벤나 시의 항구인 클라세(Classe)를 공격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584년에서 588년 사이에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수에비 또는 알레만니 출신인 동로마 장성 드록툴프(Droctulf)가 클라세를 탈환했다. 이후 드룩툴프가 랑고바르드 국왕 아우타리와 전쟁을 벌였을 때, 파로알트는 아우타리와 함께 드룩툴프를 대적해 라벤나로 후퇴하도록 강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91년 또는 592년 파로알트 1세가 사망한 뒤 '''아리울프가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했다. 591년 여름, 아리울프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라벤나 총독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라벤나 총독 로마누스는 섣불리 로마를 구원하러 갔다간 랑고바르드군이 라벤나를 급습할 거라 여기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레고리오 1세는 아리울프와 협상해 공물을 바침으로써 그가 철수하게 했다. 이때 랑고바르드군에 전염병이 돌자 그레고리오 1세가 우유를 주식으로 삼으라고 권했고, 이에 따르자 전염병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레고리오 1세는 라벤나의 조반니 대주교에게 "총독이 랑고바르드족에게 공물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아리울프는 제국과 평화를 맺거나 제국에 충성할 것이다"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로 볼 때, 그레고리오 1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로마 제국의 편에 붙는 선택지를 고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592년 그레고리오 1세가 랑고바르드 국왕 아길루프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누스는 협상이 이뤄지게 내버려뒀다간 움브리아 회랑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로 했다. 그는 그해 7월 라벤나에서 출진하여 해로를 따라 로마로 이동한 뒤, 움브리아 회랑의 도시들을 재정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깨지자, 아길루프는 분노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였고, 로마누스는 이번에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청의 재산을 털어서 랑고바르드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고, 아길루프는 이에 만족하여 물러갔다. 이때 아리울프도 아길루프 왕의 원정에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98년, 오시모를 정복하고 나폴리를 포위 공격하는 베네벤토 공국아레치스 1세를 지원했다. 나폴리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환길에 올랐다가 카메리노 인근에서 '황실 공작(dux imperiale)' 바한의 급습을 받았지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를 집필한 8세기 수도자이자 역사가 파울 부제에 따르면, 스폴레토의 순교자인 성 사비누스가 카메라노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아리울프를 도와줬고, 그는 이에 감화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601년 아리울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뒤 파로알트 1세의 아들들간의 내전이 벌어졌다가 테오델라피우스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스폴레토 공작에 올랐다.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랑고바르드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면서도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650년 또는 653년 테오델라피우스의 뒤를 이어 공작에 오른 아토 역시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663년 랑고바르드 국왕 그리말트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온 콘스탄스 2세 황제의 동로마군을 격파했을 때 큰 공을 세운 트라사문트 1세는 그리말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하고 그리말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과 결혼했다. 파울 부제는 트라사문트 1세가 40년간 통치했다고 기술했지만 별다른 행적을 전하지 않는다.

703년 트라사문트 1세 사후 공작에 선임된 파로알트 2세는 폐허가 된 파르파 수도원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기부금을 제공했으며, 파르파 수도원의 초대 대수도원장으로 토마소를 선임했고, 교황청이 이 수도원을 관리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교황청과 사이가 나빠져서 사바나의 교회 영지 일부를 강점했다. 712년 라벤나 총독부의 중심지인 라벤나 시의 클라세 항구를 공략했다. 그러나 당시 랑고바르드 국왕 리우프란트동로마 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싶어했기에 그에게 항구를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717년 리우프란트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을 때, 그는 이에 가담하여 나르니 시를 점령했다.

720년, 파로알트 2세의 아들 트라사문트 2세가 아버지가 리우프란트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라며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켜 축출한 후 공작에 선임되었다. 737년 또는 738년 갈레세를 공략해 로마와 라벤나 총독부와의 연락망을 단절한 뒤, 교황 그레고리오 3세와 협상해 갈레세를 돌려주고 평화 협약을 맺는 대가로 막대한 공물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리우프란트는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평화 협약을 맺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739년 6월 스폴레토를 무력으로 공략한 뒤 힐데리크를 새 공작으로 세웠다.

트라사문트 2세가 로마로 망명하자, 리우프란트는 그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며 교황청으로부터 아메리아, 오르테, 보마르초, 비에르다를 공략했다. 그레고리오 3세는 트라사문트 2세를 넘겨주길 거부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740년 12월, 트라사문트 2세는 교황과 베네벤토 공작 고데스칼의 지원에 힘입어 스폴레토 공국을 되찾고 힐데리크를 참수했다. 그러나 리우프란트가 빼앗았던 교청의 도시들을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청과의 동맹이 깨졌다. 742년 리우프란트가 재차 공세를 개시해 트라사문트를 체포하고 수도원에 감금한 뒤 자신의 조카 아지프란트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세웠다. 이후 교황청과 화해하기 위해 앞서 빼앗았던 도시들을 돌려줬으며, 그를 도와줬던 베네벤토 공작 고데스칼을 축출하고 기술프 2세를 새 베네벤토 공작으로 세웠다.

744년 리우프란트가 사망한 뒤, 트라사문트 2세는 지지자들 덕분에 수도원에서 빠져나온 뒤 아지프란트를 축출하고 스폴레토 공작에 복위했지만 1년 만인 745년에 사망했다. 이후 스폴레토 귀족들은 차기 공작 선출을 놓고 논의한 끝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 중에서 루푸스를 새 공작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747년 6월 루푸스가 아내 에르멜린트와 함께 파르파 수도원과 성 게오르기우스 수도원에 기부한 사실이 두 수도원 문서에서 확인된다.

751년경 라치스를 몰아내고 랑고바르드 왕국 새 국왕이 된 아이스툴프는 라치스의 지지자였던 루푸스를 폐위시키고 스폴레토 공국을 왕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756년 아이스툴프가 사망한 뒤 아이스툴프에 의해 축출되었던 전임 국왕 라치스가 복위를 꾀했다가 757년 토스카나 공작 데시데리우스의 공세에 패해 수도원에 억류되었고, 데시데리우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의 새 국왕이 되었다. 스폴레토 귀족 알보인은 왕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해 스폴레토 공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758년 데시데리우스의 대대적인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사로잡힌 뒤 지지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 후 스폴레토 공국은 다시 한 번 랑고바르드 왕국의 직할령이 되었다가 759년 4월 데시데리우스가 측근인 기술프를 새 공작으로 세우면서 부활했다. 데시데리우스는 761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기술프를 경질하고 스폴레토 공국을 2년간 직할 통치하다가 763년 또다른 측근인 테오디키우스를 새 공작으로 세웠다. 768년, 크리스토퍼와 세르지오 추기경이 로마에서 스폴레토로 망명한 뒤 대립 교황 콘스탄티노 2세를 폐위시키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테오디키우스는 이들을 파비아 궁정에 보냈고, 데시데리우스는 이들을 도와줌으로써 교황청에 대한 통제권을 얻고자 했다. 그 해 7월 29일, 스폴레토 공국의 두 도시 리에티와 푸르토나의 분견대가 포함된 랑고바르드 군대가 로마에 입성한 뒤 대립 교황 콘스탄티노 2세를 폐위시켰다.

772년 새 교황에 선출된 하드리아노 1세프랑크 왕국이 반 랑고바르드 정서로 돌아선 걸 눈치채고 친 랑고바르드파의 수장인 아파아르타를 해임하고 아파아르타에게 축출되었던 인사들을 복귀시켰다. 데시데리우스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스폴레토 공작 테오디키우스와 이브레아 공작 툰노, 왕실군 사령관 프란둘라로 구성된 사절단을 교황청에 보냈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1세는 "피핀 왕아이스툴프 왕이 맺었던 조약 대로 모든 점령지를 교황청에 넘겨라"라고 요구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테오디키우스는 이후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774년 파비아로 쳐들어온 프랑크 왕국군으로부터 데시데리우스를 지키기 위해 항전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공작에 선임된 힐데프란트는 즉시 카롤루스 대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교황청에도 복종할 의사를 밝혔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크 왕국교황령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775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힐데프란트가 프리울리 공작 흐로드가우트, 베네벤토 공작 아레치스 2세와 연합해 프랑크 왕국에 반역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즉시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흐로드가우트를 제압하고 프랑크 백작을 세웠다. 하지만힐데프란트가 프랑크 왕국에 반역을 꾀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에, 힐데프란트는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후 힐데프란트는 교황청의 강력한 적대자가 되었다.

779년 비르시니쿰(Virciniacum)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고 있던 카롤루스 대제에게 막대한 선물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면서, 프랑크 국왕이 교황과 대립할 때 그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788년 시칠리아의 파트리키우스인 테오도로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델치스를 앞세워 칼라브리아에 상륙했다. 이에 베네벤토 대공 그리말트 3세위니게스 휘하의 프랑크군과 함께 이들을 협공해 대파했다. 이듬해인 789년에 사망하면서 랑고바르드족이 스폴레토 공국을 다스리던 역사는 막을 내렸고, 프랑크 귀족 위니게스가 카롤루스 대제의 선택을 받고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면서 프랑크족이 스폴레토 공국을 이끌었다.

1.2.8.2. 베네벤토 공국[편집]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를 순조롭게 공략한 뒤 파도바를 수도로 삼아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했다. 알보인 휘하 귀족들은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해 독립 공국들을 세웠는데, 그 중엔 조토라는 인물도 있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를 집필한 8세기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파울 부제에 따르면, 조토는 570년 8월 캄파니아에 침투하여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베네벤토에 거점을 삼고 공작(Duke)으로서 주변 지역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나폴리 공략에 착수했지만 수 년간의 공방전 끝에 581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파비아에 정착한 알보인의 랑고바르드 왕실에 겉으로나마 충성을 맹세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584년 왕위에 오른 아우타리에게는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다가 588년 아우타리가 프랑크 왕국의 침공을 무사히 막아내고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이우바리족의 지도자 발데르아다의 딸 테오도리다와 결혼해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자 589년 파비아에 공물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591년 조토가 사망한 뒤, 그의 인척이었던 아레치스 1세가 랑고바르드 국왕 아길루프에 의해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594년 테라 디 나보로(Terra di Lavoro)와 바실리카타, 칼라브리아 지역의 카푸아를 공략하고 595년 베나프로(Venafro)를 정복했으며, 여세를 이어가 나폴리를 포위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파견한 트리뷴 콘스탄티노에게 패배해 공략에 실패했다. 596년 놀라를 공략하고 아말피를 위협했으며, 크로토네를 한때 공략했지만 동로마 함대의 반격으로 패배했다. 5986년 라벤나 총독부 총독 칼리니쿠스와 아길루프가 휴전 협약을 맺었을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601년 휴전이 파기된 후 공세를 지속해 620년 무렵에 살레르노를 장악했다.

이후 파비아의 랑고바르드 왕실이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느라 베네벤토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로마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636년 집권한 로타리가 자신에게 거역한 공작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어느 공작도 왕의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자,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들 아이울프 1세를 파도바 궁정에 인질로 보냈다. 그런데 아이울프는 파비아에 가던 중 라벤나에 들러 술을 진창 마셨다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다. 이에 아들의 앞날을 근심한 아레치스는 641년 사망하기 직전에 아들에게 공작위를 물려주는 대신 양자인 라도알트그리말트에게 섭정을 맡겼다.

642년 슬라브인들이 아드리아 해를 건너 시폰토에 상륙해 약탈을 자행했다. 아이울프는 두 섭정이 마침 자리를 비웠을 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입자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말이 적진 주변에 슬라브인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버렸고, 그는 다른 부하들과 함께 구덩이에 갇힌 채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라도알트는 군대를 이끌고 슬라브족에게 접근했다. 라도알트는 슬라브어를 할 줄 알았기에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슬라브인들은 그가 자신들을 좋은 말로 달래는 것에 안심하여 경계를 풀었다. 이때 라도알트가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이 그들을 덮쳐 마구잡이로 쳐죽였고, 몇몇 슬라브인 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헤 랑고바르드 국왕 로타리에 의해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어 5년간 통치하다가 647년에 사망했다.

라고알트 사후 동생 그리말트가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가르가노 산에 있는 몬테 산탄젤로 성역을 약탈하려 한 '그리스인'을 격퇴했다고 한다. 그러던 662년, 랑고바르드 왕위를 놓고 형제 페르타리트와 한창 내전을 벌이던 고데페르트가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장남 로무알트 1세에게 베네벤토를 맡긴 뒤 파비아로 진군했다. 고데페르트는 즉시 성문을 열고 그를 환대했다. 그러나 그는 진작에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얼마 후, 고데페르트는 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그는 밀라노에 군림하던 페르타리트를 축출한 뒤 고데페르트의 누이 테오도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663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이탈리아 전역을 재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강력한 군대를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했다. 그는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를 받는 풀리아로 진군해 로무알트를 격파하고 베네벤토를 포위했다. 그리말트는 즉시 아들을 구하고자 출격했고, 콘스탄스 2세는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폴리로 후퇴했다.

671년 그리말트가 사망한 뒤 그리말트와 고데페르트의 누이 테오도타의 아들인 가리발트가 랑고바르트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재위 3개월 만에 왕국에 돌아온 페르타리트에게 축출되었다. 로무알트는 이복동생을 몰아낸 페르타리트와 맞서기보다는 타협하기로 하고, 자신이 무제한의 자치권을 누리는 걸 용인받는 대신 그리발트가 생전에 포로로 잡아뒀던 페르타리트의 아내 로델린다와 아들 쿠닝페르트를 랑고바르트 왕실이 있는 파비아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후 로무알트 1세는 판노니아에서 벌어진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나 이탈리아로 망명한 불가르족 또는 아바르족인 알제코(Alzeco)에게 목초지를 주고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에 선임하는 대가로 군사적 지원을 얻어냈고, 이를 토대로 타란토브린디시 공략에 성공했다.

687년 로무알트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그리말트 2세가 새 공작이 되었지만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하고 689년에 사망했다. 이후 남동생 기술프 1세가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703년경 라벤나 총독부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폭정에 분노한 라벤나 시민들의 봉기로 인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라벤나 총독부에 속해 있던 소라, 아르피노아르케 일대를 공략하고 캄파니아 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다 푸테올리 마을에서 교황 요한 6세의 사절단이 찾아와서 막대한 뇌물을 찔러주며 돌아가달라고 부탁하자 이를 받아들여 철수했다.

706년 기술프1세 사후 아들 로무알트 2세가 베네벤토의 새 공작에 취임했다. 717년 나폴리 총독 요안네스를 격파한 뒤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쿠마에를 공략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2세가 교황 특사 테오디무스를 보내 70파운드의 금을 줄 테니 쿠마에를 돌려달라고 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쿠마에를 돌려줬다. 731/732년 로무알트 2세가 사망하자, 많은 이들은 로무알트 2세의 아들인 기술프 2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공작 계승권을 박탈하고 아우델라이스를 공작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733년 기술프 2세의 지지자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베네벤토에서 축출되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국왕 리우프란트가 개입해 자신의 조카 그레고리오를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하고 기술프 2세를 파비아로 데려가서 아들처럼 키웠다.

739년 그레고리오가 사망한 뒤, 베네벤토인들은 랑고바르드 왕국의 간섭에 대항하기 위해 고데스칼을 독자적으로 선임했다. 그는 아내 안나와 함께 볼투르노 수도원에 여러 땅을 기증해 교회의 지지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리우프란트의 편을 들기로 했고, 역시 리우프란트를 상대로 반기를 든 스폴레토 공작 트라사문트 2세는 리우프란트의 공세에 밀렸다. 이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한 그는 742년 리우프란트의 공세에 직면하자 아내와 함께 배에 귀중품을 싣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나려 했다가 도중에 기술프 2세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리우프란트에 의해 베네벤토 공작에 세워진 기술프 2세는 745년 9월 킨기아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 테아노 인근의 영지를 기증했으며, 750년 볼투르노 수도원에도 재산을 기증했다. 이 사실은 12세기 불투르노 수도원에서 활동하던 요한이라는 수도자라틴어로 집필한 <볼투르노 연대기>에 기재되었다.

751년 기술프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리우프란트가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어머니 스카우니페르가가 756년까지 섭정했다. 756년 랑고바르드 국왕 아이스툴프가 사망한 뒤 라치스데시데리우스간의 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랑고바르드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다. 758년, 역시 랑고바르드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스폴레토 공작 알보인을 사로잡은 데시데리우스가 베네벤토로 쳐들어왔다. 그는 별다른 저항을 못하고 동로마 제국에 속한 오트란토로 도주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사위 아레치스 2세를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했다. 이후 774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에 의해 종주국인 랑고바르드 왕국이 멸망하게 되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1.2.8.3. 기타 공국들[편집]

베네벤토와 스폴레토보다 자치권이 강하지 않았지만 랑고바르드 왕국 내에서도 여러 공국들이 존재했다. 568년 최초로 성립된 프리올리 공국을 시작으로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페르시클레토스 공국, 이브레아 공국 아오스타 공국, 세네다 공국, 트레비소 공국, 비첸차 공국, 베로나 공국, 트렌토 공국, 파르마 공국, 레지오 공국, 피아첸차 공국, 브레시아 공국, 베르가모 공국, 산 줄리오 공국, 파비아 공국, 토리노 공국, 아스티 공국, 투스키아 공국이며 641년 현재의 리구리아 지역을 정복하면서 리구리아 지방이 추가되었다.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멸망하면서 프리올리를 제외한 공국이 프랑크 왕국의 카운티로 속하게 되었다.

1.3. 동로마 제국령[편집]



1.3.1. 라벤나 총독부[편집]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했는데 554년에 일어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던 상태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 정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나르세스를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라벤나에서 통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전비를 소모해서 제국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경제 위기를 해소하고 전비를 회수하기 위해 이탈리아 속주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제국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그래도 나르세스가 총독으로서 12년간 통치할 때는 그런대로 문제없었다. 나르세스는 세금을 악착같이 뜯어내면서도 많은 교량을 수리하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재건해, 로마를 어느정도 복구시켰다. 또한 4개의 군 사령부를 창설해 이탈리아를 지키게 했다. 하나는 프리울리에, 하나는 타란토에, 하나는 마기올레와 코모 호수 부근에, 남은 하나는 코티아 알프스와 그라얀 알프스에 설치되어 외적의 침입과 내란에 대비했다. 567년 나르세스가 이탈리아 총독에서 물러난 뒤 롱기누스가 이탈리아 대관구 지사로 부임했고, 4개 사령부가 이탈리아 주둔 동로마군을 이끌었다.

하지만 랑고바르드족이 쳐들어온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주민들은 그동안 동로마 제국의 수탈 아닌 수탈에 시달려 지칠대로 지쳐서 침략자에 저항할 의욕을 잃었다. 군대 역시 수적으로 열세한 데다 나르세스가 떠난 뒤 그들에 맞설 만한 지휘관이 없어서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랑고바르드족은 이 상황을 잘 활용해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569년 9월 비첸차와 베로나에 이어 밀라노를 공략했다. 570년대에 리구리아와 베네토 해안을 제외한 이탈리아 북부 일대를 정복하였고, 3년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파비아에 수도를 두었다. 랑고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자리를 잡았고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가서 스폴레토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다만 랑고바르드족은 라벤나에 주둔한 제국군을 의식해 라벤나 주변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동로마 제국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 및 남부 지역을 건드리지 않았고 이탈리아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을 존중했다. 당시 황제 유스티누스 2세는 아바르족이 발칸 반도를 침략하고 사산 왕조가 동방 전선을 뚫고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랑고바르드 족을 저지할 여력이 없었기에, 그들이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걸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575년, 미쳐버린 유스티누스 2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티베리우스 2세는 아바르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뒤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의 군대를 동방으로 보내 사산 왕조에 대항하게 했다. 또한 랑고바르드족에 대응하기 위해 유스티누스 2세의 사위인 바두아리우스 장군 휘하의 증원군을 이탈리아에 파견했다. 바두아리우스 장군은 로마를 랑고바르드족에게서 구해냈고 프랑크 왕국의 왕 힐데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족에 공동 대응했다. 그러나 바두아리우스는 576년 랑고바르드족에게 패하고 얼마 후 사망했고, 이탈리아의 더 많은 제국 영토가 랑고바르드족에게 잠식되었다. 579년 랑고바르드족이 로마를 포위하자, 교황과 로마 원로원은 티베리우스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산 왕조와의 전쟁이 급했던 황제는 이에 응하지 못했고, 원로원이 자체적으로 공물을 모아서 랑고바르드족에게 바치고 돌아가게 해야 했다.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 티베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에 증원군을 보내 랑고바르드 족의 공세를 저지하고 라벤나를 보강했다. 그 후 새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기존에 민정 지사와 군사 지휘관으로 나뉘어 있었던 이탈리아 총독부와 아프리카 총독부를 개편하여, 라벤나 총독과 아프리카 총독이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민정과 군사를 모두 집행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라벤나 총독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라벤나의 촉독들은 그 권한이 막강한 편이었다. 라벤나 총독은 라벤나 궁정에서 통치를 행사했으며, 로마에도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을 별도로 두었다. 총독은 동로마 제국의 귀족 집단에서 선발되었으며, 이탈리아군 주둔 로마군을 지휘하고, 재정과 행정, 외교 등 전반적인 통치를 수행했다. 또한 황제가 이탈리아로 파견한 관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관리를 직접 임명할 권한이 있었으며, 교황 선출을 승인할 권한도 가졌다. 여러모로 이탈리아 내에서는 황제의 대리자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들은 라벤나 총독이 누리는 거대한 권력을 견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벤나 총독의 임기는 딱히 정해지지 않아서, 황제의 의향에 따라 직임을 상실할 수 있었다. 또한 총독은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된 특별 위원의 조사도 받아야 했다. 특히 종교 정책에 관해서는 황제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 총독들은 이러한 통제에 많은 압박을 받았고, 엘레우테리우스올림피오스 총독이 제국과 떨어져 나가려고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다.

라벤나 총독은 이론적으로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7세기 말부터 교황청과 민중의 반항, 군대의 불복종에 시달려야 했다. 교황은 확실하게 지원해주지도 않으면서 간섭을 많이 하는 제국에 불만을 품었고, 민중 역시 베풀어주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또한 현지화된 군대는 황제와 총독보다는 교황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그 결과, 많은 총독이 피살되었고, 라벤나 총독부의 영향력은 라벤나 일대만으로 국한되었다.

라벤나 총독에 대한 첫번째 언급은 584년 10월 4일 교황 펠라지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낸 서신에서 확인된다. 그는 이 편지에서, 데키우스 총독이 라벤나에서 랑고바르드족에게 포위되었고, 로마 역시 위험에 처했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역사학계는 이 편지를 근거로 데키우스가 초대 라벤나 총독이라고 추정한다. 데키우스의 전반적인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얼마 안가서 스마라그두스로 교체된 것만은 분명하다.

스마라그두스는 프랑크,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항했다. 하지만 두 종족이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588년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시스를 탈환하는 소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아퀼레이아 대주교 세베리누스에게 정교회 교리에 따르도록 강요하였고, 세베리누스와 추종자들이 거부하자 심한 탄압을 가했다. 마우리키우스는 그가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켰다며 질책하였고, 589년 그를 경질하고 로마누스를 새 총독에 선임했다.

로마누스는 동방 전선에서 사산 왕조를 상대로 활약한 유능한 장군이었다. 그는 프랑크 왕 힐데베르트 2세에게 전리품을 전부 넘길 테니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했고, 힐데베르트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크군을 파견했다. 프랑크군은 3개 대열로 이탈리아에 진입하여 랑고바르드 왕 아우타리가 파비아에 갇히게 하였다. 한편 그는 동로마군을 이끌고 모데나, 알티나, 만토바를 공략하였고, 파비아로 가서 프랑크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크군은 로마누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아우타리와 10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철수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질이 돌면서 많은 프랑크 병사가 죽어나가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프랑크군이 철수했지만, 로마누스는 개의치 않고 작전을 이어갔다. 그는 랑고바르드 공국인 파르마, 레지오, 피아첸차 등의 복종을 받아내고 공작의 자녀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냈다. 라벤나로 철수한 후 베네치아로 가서 충성 맹세를 받아냈으며, 별동대를 이스트리아로 파견해 여러 마을을 탈환하였다. 또한 프랑크 왕국에 사절을 보내 제멋대로 후퇴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힐데베르트 2세는 응하지 않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591년 아길루프를 새 국왕으로 세운 뒤 반격하기 시작했다. 아길루프는 로마와 라벤나를 연결하는 움브리아 회랑의 여러 도시를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했다. 한편 베네벤토 공국의 랑고바르드군은 나폴리를 포위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그는 섣불리 로마나 나폴리를 구하러 갔다간 라벤나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592년 그레고리오 1세가 아길루프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누스는 협상이 이뤄지게 내버려뒀다간 움브리아 회랑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로 했다. 그는 그해 7월 라벤나에서 출진하여 해로를 따라 로마로 이동한 뒤, 움브리아 회랑의 도시들을 재정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깨지자, 아길루프는 분노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였고, 로마누스는 이번에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청의 재산을 털어서 랑고바르드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고, 아길루프는 이에 만족하여 물러갔다. 그레고리오 1세는 평화를 갈망하여 로마누스에게 랑고바르드 왕국과 휴전을 맺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로마누스는 절대로 협상에 응하지 말라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 간의 사이는 멀어졌다. 로마노스는 596년경 사망했고, 칼리니쿠스가 라벤나 신임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칼리니쿠스는 교황청과 대립했던 전임 총독과는 달리 교황의 요청에 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599년 여름에 이스트리아 북부 지역을 방비하고자 성채를 쌓았으며, 종교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단으로 정죄된 정파들을 관용적으로 대했다. 또한 그레그리오 1세와 살로나 주교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여 둘이 화해하도록 하였다.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휴전 협약이 끝나고 전쟁이 재개되자, 601~602년에 파르마를 공략하고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아길루프는 파도바를 공략하여 학살을 자행하고 몬셀리체 요새를 공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에 오른 포카스는 칼라니쿠스를 해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하고, 과거 라벤나 총독을 역임했던 스마라그두스를 라벤나 총독으로 복귀시켰다. 스마라그두스는 칼리니쿠스가 주도하던 랑고바르드족과의 전쟁을 이어받았고, 랑고바르드 군주 아길루프가 포로로 잡힌 딸과 사위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걸 거부했다. 그러자 아길루프는 603년 크레모나를 포위하였고 605년 8월 21일 크레모나를 함락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9월 1일 마토바를 점령했으며, 불투르나 요새를 포위하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고, 뒤이어 브레셀로를 공략했다. 결국 그는 아길루프에게 사죄하고 605년 4월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석방했다. 이리하여 라벤나 총독부와 랑고바르드 왕국간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한편 그는 포카스 황제의 명에 따라 포로 로마노에 큰 기둥을 세우고 금박을 입힌 포카스 동상을 세웠다.

610년 포카스를 몰아내고 새 황제가 된 이라클리오스는 스마라그두스를 소환하고 요안니스 1세를 새 총독으로 선임했다. 요안니스 1세는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하면서도, 재정이 열악해진 제국의 독촉에 따라 속주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분노한 라벤나 시민들이 615년 폭동을 일으켰고, 요안니스와 휘하 관료들이 살해되었다. 이에 이라클리오스는 환관 엘레우테리우스를 파견해 혼란을 수습하게 한 뒤 라벤나 총독에 임명했다.

엘레우테리우스는 617년 나폴리에서 콘자의 요한이 반란을 일으키자 즉시 출진하여 나폴리를 탈환하고 요한과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얼마 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위협하자, 매년 300두카트를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619년, 엘레우테리우스는 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이탈리아에서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기로 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는 수도를 로마로 삼기로 하고, 620년 로마로 가서 교황 보니파시오 5세를 찾아가 대관식을 거행하는 방식에 관해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로 가던 중 카스트룸 루체올리스 근처에서 이라클리오스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병사들에게 피살당했고, 그의 수급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라클리오스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라벤나 총독은 수년간 공석 상태였다가 625년경 마기스테르 밀리툼 직책을 맡던 이사키오스가 부임했다. 이 무렵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아달랄트 왕이 폐위되고 아리알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아달랄트는 가톨릭 신자였고, 아리알트는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 신도였기에, 교황 호노리오 1세는 그에게 폐위된 아달랄트를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그는 라벤나 시가 전임 총독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건 무리라고 보고, 아리알트의 즉위를 인정했다.

630년경, 아리알트 왕이 투스키아의 타소네 공작이 일으킨 반란에 고전하다가 이사키오스에게 사람을 보내 타소네 공작을 대신 죽여준다면 매년 바쳐야 하는 공물을 300 두카트에서 200 두카트로 줄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사키오스는 이에 동의하여 타소네에게 서신을 보내 동맹을 맺고 싶으니 라벤나로 와달라고 청했다. 타소네는 이에 동의해 라벤나로 갔다가 이사키오스의 병사들에게 습격을 받아 죽었다. 아리알트 왕은 이에 만족하여 공물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638년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정교회단성론을 중재하려는 의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세르기오스가 고안한 단의론호노리오 1세 교황이 수용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사키오스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황청에 사신을 보냈고, 동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호노리오 1세는 단의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638년 10월 호노리오 1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세베리노는 단의론을 거부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세베리노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고, 비서이자 장군인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를 파견해 세베리노를 체포하게 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로마로 가서 민병대를 동원한 뒤, 라테라노 궁전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라벤나 총독 이사키오스도 로마로 가서 라테라노 궁전에서 약탈한 보물을 확보했다. 이후 두 사람은 보물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운송하면서도, 상당한 양을 빼돌렸다. 세베리노는 이런 상황에서도 단의론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고 심신이 지친 이라클리오스는 640년 5월 단의론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철회하고 세베리노를 교황으로 승인했다.

636년 랑고바르드 왕국 새 군주로 즉위한 로타리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정책을 중단하기로 하고 639년 오데르초와 알티노를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두 도시는 정복되었고, 주민들은 베네치아 석호로 도주했다. 이사키오스는 토르첼로의 산타 마리아 마드레 디 디오 성당을 새로 세우고 로타리 왕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알티노 주교를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643년 로마 공국의 공작을 맡던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가 이라클리오스의 사망 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로마 공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이사키오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로마 시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성 마리아 아드 프라세페 성당에 숨었지만, 곧 끌려나와 사슬에 묶인 채 라벤나로 보내져 참수당했다.

로타리 왕은 동로마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틈을 타 라벤나로 진격했고, 643년 스쿨테나 전투에서 동로마군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이사키오스는 이때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타리는 여세를 몰아 라벤나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본국에 돌아갔다. 이후 새 총독에 부임한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는 2년간 직임을 수행하다 645년 플라톤에게 넘겼다. 플라톤은 교황 테오도로 1세단의론을 거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피로스 1세와 후임인 바울로 2세를 연이어 파문하자, 이 소식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알리면서 콘스탄스 2세 황제에게 교황과 결별하도록 종용했다.

648년 초, 콘스탄스 2세이슬람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져 제국의 영토를 잃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칼케돈 공의회파와 단성론, 그리고 단의론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 신민들이 분열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범(Typos)>을 발표하여 일체의 논쟁을 중지하고, 앞으로 예수의 인격, 신격을 운운하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고 밝혔다. 주교나 사제라면 즉각 해임하고, 수도자라면 파문할 것이며, 군인이나 관리라면 지위나 직함을 박탈하며, 원로원 의원이라면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인이라면 매질을 하고 유배를 보내겠다고 했다.

649년 10월, 교황 마르티노 1세는 공의회를 열어 전범을 비난했다. 그는 공의회의 논의 사항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그리스어로 번역에서 보내면서, 콘스탄스 2세에게 단의론을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이에 분노했고, 플라톤에 이어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올림피오스에게 교황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소규모 군대와 함께 로마로 출진했다. 마르티노 1세의 전기를 쓴 아나스타시오스에 따르면, 올림피오스는 애초에 교황을 체포하기보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여러 차례의 시도가 실패한 뒤 교황이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교황에게 참회했다고 한다. 이후 이탈리아에 널리퍼진 동로마 제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이용하여 이탈리아를 제국으로부터 분리하고 자신이 황제로 자처하기로 했다. 그는 652년 시칠리아로 진군해 제국군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군대는 와해되었고, 그 역시 같은 해에 병사했다.

653년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가 라벤나 총독으로 복귀한 뒤, 콘스탄스 2세 황제의 지시에 따라 로마로 진격하여 6월 17일 교황 마르티노 1세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다. 이후 에우제니오 1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고 666년까지 라벤나를 평화롭게 다스리다 그레고리오스에게 직임을 넘겼다. 그레고리오스는 콘스탄스 2세의 남이탈리아 원정에 힘을 보탰고, 황제의 뜻에 따라 라벤나 대주교구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도록 지원했다. 668년 콘스탄스 2세가 시칠리아에서 암살되자, 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와 협력하여 시칠리아의 반란자 미지지오스를 토벌하는 데 기여했다. 677년 그레고리오스가 물러났고, 테오도로스 2세가 새 총독으로 부임했다.

686년, 교황 요한 5세가 사망한 후, 로마 시민들은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문제를 놓고 두 패로 갈렸다. 성직자들은 페트로스를 지지했고, 군부는 테오도르를 지지했다. 성직자들은 대성당을 봉쇄하여 군인들이 못 들어오도록 막았으나 군인들도 다른 성당으로 이동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교황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그러다 양측은 대안으로 고령의 나이라서 오랫동안 교황 직임을 이어가기 어려운 코논을 차기 교황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하였고, 테오도로스 2세 역시 이를 인정하여 686년 10월 21일 교황좌에 착좌하게 하였다.

687년 9월 22일 코논이 11개월 만에 사망한 뒤, 수석부제 파스칼과 수석사제 테오도르는 각각 동로마 세력과 로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교황 자리를 경쟁했다. 파스칼은 테오도로스에게 뇌물을 줘서 교황이 되려 하였다. 급기야 로마시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로마 시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시민, 군부, 사제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모여서 논의한 끝에 세르지오 1세를 교황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파스칼은 이에 불복하여 테오도로스에게 많은 뇌물을 약속하고 도움을 청했다. 테오도로스는 즉시 로마로 진군했지만, 로마 시에 들어와보니 여론이 신임 교황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파스칼이 약속했던 뇌물을 세르지오 1세에게 받아내려 했지만, 687년 12월 15일 세르지오가 정식으로 교황에 취임할 때 돌연 사망했다.

뒤이어 새 총독에 선임된 요안니스 2세 플라티노스는 전임 총독이 받아내려 했던 뇌물을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룩한 그릇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자신이 소유한 전부라고 주장했다. 지역 주민들은 교황을 위해 집결했고, 총독이 원하는 대로 100파운드 상당의 금을 줬다. 총독은 이에 만족하여 세르지오 1세를 교황으로 인정했다.

692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퀴니섹스툼 공의회를 마무리한 뒤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 102개의 교회법 조항을 보내며 당장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교황은 퀴니섹스툼 공의회에 대표단을 보낸 적이 없었는데도 강제로 따르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교황은 세속의 성직자에게 결혼을 허용하고[4] 사순시기 토요일마다 금식하는 것 등 몇 가지 조항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라벤나 총독 요안니스에게 교황을 당장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요안니스는 심복인 자카리아스(Zacharias)를 로마로 파견하여 교황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라벤나 시와 라벤나 주둔 제국군은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자카리아스가 교황을 잡으러 로마에 들어오자, 오히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로마 시민들과 함께 자카리아스를 감금했다. 자카리아스는 교황의 침대로 피신했다가 세르지오 1세가 직접 중재에 나선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라벤나 총독의 이탈리아에서의 위신은 추락하였다. 702년경 새 총독에 부임한 테오필락토스는 라벤나 군대가 로마 교황에 충성을 맹세하며 반기를 드는 바람에 도시에 입성하지도 못하다가, 교황 요한 6세가 자신을 지지해준 덕분에 겨우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라벤나에 입성할 수 있었다.

709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테오도로스에게 함대를 맡겨 라벤나로 파견해 사사건건 제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압하게 했다. 라벤나에 도착한 테오도로스는 황제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어 모든 고관들을 초청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관들은 아무 의심 없이 약속된 날짜에 연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펠릭스 대주교만이 실명형에 처해진 후 폰투스에 유배되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처형된 뒤에야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테오도로스의 병사들은 라벤나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라벤나 시민들은 당연히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라벤나 총독부는 수년간 마비되었다. 그는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이를 틈타 소라, 아르피노 등을 공략했다.

710년경 새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요안니스 3세 리조코포스는 라벤나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피살당했다. 이후 3년간 공석이었다가 713년 아나스타시오스 2세에 의해 스콜라스티코스가 부임했다. 그는 콘스탄티노 교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황제의 뜻에 따라 로마 교황청과 가급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722년 레온 3세가 아랍과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기로 할 때 교황 그레고리오 2세가 협조를 거부하고 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잡으려 하자, 레온 3세는 무력으로 교황을 압박하기로 하고 그동안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스콜라스티코스를 파울로스로 교체했다. 파울로스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레고리오 2세를 죽이거나 체포하려 했지만 로마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민병대에게 패퇴했다.

726년 레온 3세가 성상 파괴 운동을 밀어붙이자, 727년 라벤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울로스를 살해하고 자체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독립을 주장했다. 레온 3세는 에우티키오스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에우티키오스는 나폴리로 상륙한 뒤 일부 관리들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에 뇌물을 줘서 그레고리오 2세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무효로 하게 유도하였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반항적인 베네벤토 공국스폴레토 공국을 복종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와 손을 잡겠다고 했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로마 침략을 저지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라벤나로 가서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교황과 화해하였고, 730년 또는 731년 투시나에서 반란을 일으킨 티베리오스 페타시오스를 교황의 도움에 힘입어 토벌했다.

732년 랑고바르드 군주 리우프란트는 태도를 바꿔 라벤나를 급습했고, 라벤나는 얼마 안가 함락되었다. 그는 베네치아 석호로 피신한 뒤 당시 총독의 암살로 혼란에 빠져 있던 베네치아를 수습하고 도제를 선출할 수 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5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랑고바르드 국왕 리우프란트에 대항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공작을 지원하여 두 공작이 중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이 혼란에 휩싸인 사이, 그는 739년 베네치아의 도움으로 라벤나를 탈환했다.

743년 스폴레토를 제압하고 직할령으로 삼은 리우프란트가 라벤나로 진군하자, 그는 무력으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라벤나 대주교 요한 5세와 시민 대표들을 교황 자카리아에게 보내 중재를 요청했다. 리우프란트는 교황의 설득에 넘어가 라벤나를 정복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751년, 아이스툴프 왕이 이끄는 랑고바르드군이 라벤나를 공략했고, 그는 사력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은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프랑크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피핀 3세는 군대를 일으켜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옛 라벤나 총독부 지역을 확보한 뒤, 교황청에 기증했다. 이리하여 교황령이 탄생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바리에 총독부를 새로 세워 남이탈리아의 일부 영역을 보전했다.


1.3.1.1. 로마 공국 ⇒ 교황령[편집]

로마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오랫동안 원로원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고, 오도아케르 왕국을 정복한 동고트 왕국의 지배층들 또한 원로원과의 공존을 택하면서 자신들을 ‘로마 원로원의 보호자’로 자처, 원로원을 자신들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552년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의해 시작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당시 원로원과 동로마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은 동고트에 의해 몰살당하면서 끝났다. 동로마 제국이 동고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로마를 수복하고 다시 원로원을 만들었지만 서로마 시대와는 달리 전국적인 기능은 완전히 잃고 지방의회(참사회)로 완전히 전락했다. 이후 랑고바르드족들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하해 쳐들어와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경제적 기반이 축소된 로마 원로원에 속한 귀족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584년에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라벤나 총독부가 만들어졌고, 이때 590년쯤 라벤나 총독부 산하로 동로마 황제 혹은 라벤나 총독이 직접 임명한 독스가 통치하는 로마 공국이 성립되었다.[5] 하지만 기나긴 혼란기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세계의 중심 로마는 황무지로 변해갔고, 중세 초 로마 원로원은 서서히 소멸해 갔다. 로마 원로원은 603년 포카스 황제의 즉위를 축하는 서신을 끝으로 더 이상 역사서에 기록이 남겨지지 않았다. 이에 당대의 로마 총대주교그레고리오 1세는 황폐화된 로마를 보며 "이런 때에 원로원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시민들은 어디로 떠난 것인가?"라며 탄식한 발언을 볼 때 로마 원로원은 사실상 붕괴된 것으로 보이며 로마 원로원이 쓰던 쿠리아 율리아 건물은 로마 총대주교인 호노리오 1세가 630년에 교회로 개조해버렸다. 이는 구 로마 원로원 귀족층이 완전히 로마 교회의 고위 사제단, 즉 사실상의 교회 귀족으로 변모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다만 그렇다고 로마총대주교가 로마 공국을 단독으로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상기한대로 로마의 통치는 동로마 황제 및 라벤나 총독이 임명한 독스가 맡고 있었다. 이로 인해 로마 총대주교 또한 콘스탄티노플 정부의 의사에 따른 인사로 임명되어야 했다. 이로 인해 로마 총대주교들은 라벤나 총독부와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몇몇 로마총대주교들은 라벤나 총독을 통한 콘스탄티노플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이미 로마를 탈환 뒤 단성론 수용의 가불에 대한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성론을 수용하려는 콘스탄티노플 정부와 달리 당시 로마 총대주교인 비질리오는 단성론의 수용을 거부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를 파문해 억류해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질리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된 제5차 공의회를 세계 공의회로 승인했고, 그 대가로 그에 대한 파문은 취소되었다. 이 조치로 비질리오는 로마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돌아오던 중 시라쿠사에서 사망하였다.

심지어 로마 공국이 성립된 후 2년도 지나지 않아 59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아길루프를 새 국왕으로 세운 뒤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길루프는 로마와 라벤나를 연결하는 움브리아 회랑의 여러 도시를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했다. 한편 랑고바르드 왕국의 봉신국인 베네벤토 공국의 군대가 나폴리를 포위했다. 총대주교인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그는 섣불리 로마나 나폴리를 구하러 갔다간 라벤나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592년 그레고리오 1세가 아길루프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누스는 협상이 이뤄지게 내버려뒀다간 움브리아 회랑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로 했다. 그는 그해 7월 라벤나에서 출진하여 해로를 따라 로마로 이동한 뒤, 움브리아 회랑의 도시들을 재정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깨지자, 아길루프는 분노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였고, 로마누스는 이번에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총대주교 그레고리오 1세는 총대주교구의 재산을 털어서 랑고바르드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고, 아길루프는 이에 만족하여 물러갔다. 그레고리오 1세는 평화를 갈망하여 로마누스에게 랑고바르드 왕국과 휴전을 맺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로마누스는 절대로 협상에 응하지 말라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로마 총대주교구 간의 사이는 멀어졌다.

596년 로마노스가 죽고 후임 총독으로 칼리니쿠스가 라벤나 신임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칼리니쿠스는 총대주교구와 대립했던 전임 총독과는 달리 총대주교의 요청에 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599년 여름에 이스트리아 북부 지역을 방비하고자 성채를 쌓았으며, 종교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단으로 정죄된 정파들을 관용적으로 대했다. 또한 그레그리오 1세와 살로나 주교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여 둘이 화해하도록 하였다.

603~604년 그레고리오 1세의 후임인 사비니아노는 선임총대주교에 비해 부족한 인물로 그레고리오 1세는 곡식 창고를 열어서 로마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던 데 반해, 사비니아노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그레고리오 1세의 일대기를 쓴 전기작가들이 허위로 기재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그는 로마시의 치안과 민사사건에 대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직을 수행했다고 알려졌다.

619년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파견한 환관 출신의 총독인 엘레우테리우스가 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이탈리아에서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기로 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는 수도를 로마로 삼기로 하고, 620년 로마로 가서 총대주교 보니파시오 5세를 찾아가 대관식을 거행하는 방식에 관해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로 가던 중 카스트룸 루체올리스 근처에서 이라클리오스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병사들에게 피살당했고, 그의 수급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라클리오스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라벤나 총독은 수년간 공석 상태에 있게 되었다.

625년에 선출된 호노리오 1세는 도시의 성벽과 수로의 유지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이 무렵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아달랄트 왕이 폐위되고 아리알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아달랄트는 가톨릭 신자였고, 아리알트는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 신도였기에, 총대주교 호노리오 1세는 그에게 폐위된 아달랄트를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그는 라벤나 시가 전임 총독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건 무리라고 보고, 아리알트의 즉위를 인정했다.

638년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정교회단성론을 중재하려는 의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세르기오스가 고안한 단의론호노리오 1세 총대주교가 수용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사키오스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로마 총대주교구에 사신을 보냈고, 동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호노리오 1세는 단의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638년 10월 호노리오 1세가 사망한 뒤, 새 총대주교 세베리노는 단의론을 거부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세베리노를 총대주교로 인정하지 않고, 비서이자 장군인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를 파견해 세베리노를 체포하게 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로마로 가서 민병대를 동원한 뒤, 라테라노 궁전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라벤나 총독 이사키오스도 로마로 가서 라테라노 궁전에서 약탈한 보물을 확보했다. 이후 두 사람은 보물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운송하면서도, 상당한 양을 빼돌렸다. 세베리노는 이런 상황에서도 단의론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고 심신이 지친 이라클리오스는 640년 5월 단의론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철회하고 세베리노를 총대주교으로 승인했다.

643년 로마 공국의 공작을 맡던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가 이라클리오스의 사망 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로마 공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이사키오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로마 시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성 마리아 아드 프라세페 성당에 숨었지만, 곧 끌려나와 사슬에 묶인 채 라벤나로 보내져 참수당했다.

645년 플라톤에게 넘겼다. 플라톤은 총대주교 테오도로 1세단의론을 거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피로스 1세와 후임인 바울로 2세를 연이어 파문하자, 이 소식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알리면서 콘스탄스 2세 황제에게 총대주교와 결별하도록 종용했다.

648년 초, 콘스탄스 2세이슬람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져 제국의 영토를 잃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칼케돈 공의회파와 단성론, 그리고 단의론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 신민들이 분열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범(Typos)>을 발표하여 일체의 논쟁을 중지하고, 앞으로 예수의 인격, 신격을 운운하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고 밝혔다. 주교나 사제라면 즉각 해임하고, 수도자라면 파문할 것이며, 군인이나 관리라면 지위나 직함을 박탈하며, 원로원 의원이라면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인이라면 매질을 하고 유배를 보내겠다고 했다.

649년 10월, 새 총대주교인 마르티노 1세는 공의회를 열어 전범을 비난했다. 그는 공의회의 논의 사항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그리스어로 번역에서 보내면서, 콘스탄스 2세에게 단의론을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이에 분노했고, 플라톤에 이어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올림피오스에게 총대주교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소규모 군대와 함께 로마로 출진했다. 마르티노 1세의 전기를 쓴 아나스타시오스에 따르면, 올림피오스는 애초에 총대주교를 체포하기보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여러 차례의 시도가 실패한 뒤 총대주굑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총대주교에게 참회했다고 한다.

653년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가 라벤나 총독으로 복귀한 뒤, 콘스탄스 2세 황제의 지시에 따라 로마로 진격하여 6월 17일 총대주교 마르티노 1세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다. 이후 에우제니오 1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하고 666년까지 라벤나를 평화롭게 다스리다 그레고리오스에게 직임을 넘겼다. 그레고리오스는 콘스탄스 2세의 남이탈리아 원정에 힘을 보탰고, 황제의 뜻에 따라 라벤나 대주교구가 로마 총대주교구로부터 독립하도록 지원했다.

686년, 총대주교 요한 5세가 사망한 후, 로마 시민들은 차기 총대주교를 선출하는 문제를 놓고 두 패로 갈렸다. 성직자들은 페트로스를 지지했고, 군부는 테오도르를 지지했다. 성직자들은 대성당을 봉쇄하여 군인들이 못 들어오도록 막았으나 군인들도 다른 성당으로 이동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총대주교로 옹립하고자 했다. 그러다 양측은 대안으로 고령의 나이라서 오랫동안 총대주교 직임을 이어가기 어려운 코논을 차기 총대주교로로 선출하기로 합의하였고, 테오도로스 2세 역시 이를 인정하여 686년 10월 21일 총대주교의 직임을 수행하게 하였다.

687년 9월 22일 코논이 11개월만에 사망한 뒤, 수석부제 파스칼과 수석사제 테오도르는 각각 동로마 세력과 로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대주교 자리를 경쟁했다. 파스칼은 테오도로스에게 뇌물을 줘서 총대주교가 되려 하였다. 급기야 로마시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로마 시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시민, 군부, 사제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모여서 논의한 끝에 세르지오 1세를 총대주교로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파스칼은 이에 불복하여 테오도로스에게 많은 뇌물을 약속하고 도움을 청했다. 테오도로스는 즉시 로마로 진군했지만, 로마 시에 들어와보니 여론이 신임 총대주교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파스칼이 약속했던 뇌물을 세르지오 1세에게 받아내려 했지만, 687년 12월 15일 세르지오가 정식으로 총대주교에 취임할 때 돌연 사망했다.

뒤이어 새 총독에 선임된 요안니스 2세 플라티노스는 전임 총독이 받아내려 했던 뇌물을 총대주교 세르지오 1세에게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로마 총대주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룩한 그릇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자신이 소유한 전부라고 주장했다. 지역 주민들은 총대주교를 위해 집결했고, 총독이 원하는 대로 100파운드 상당의 금을 줬다. 총독은 이에 만족하여 세르지오 1세를 총대주교로 인정했다.

692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퀴니섹스툼 공의회를 마무리한 뒤 총대주교로 세르지오 1세에게 102개의 교회법 조항을 보내며 당장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교황은 퀴니섹스툼 공의회에 대표단을 보낸 적이 없었는데도 강제로 따르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교황은 세속의 성직자에게 결혼을 허용하고[6] 사순절 토요일마다 금식하는 것 등 몇 가지 조항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라벤나 총독 요안니스에게 교황을 당장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요안니스는 심복인 자카리아스(Zacharias)를 로마로 파견하여 교황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라벤나 시와 라벤나 주둔 제국군은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자카리아스가 교황을 잡으러 로마에 들어오자, 오히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로마 시민들과 함께 자카리아스를 감금했다. 자카리아스는 교황의 침대로 피신했다가 세르지오 1세가 직접 중재에 나선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라벤나 총독의 이탈리아에서의 위신은 추락하였다. 702년경 새 총독에 부임한 테오필락토스는 라벤나 군대가 로마 교황에 충성을 맹세하며 반기를 드는 바람에 도시에 입성하지도 못하다가, 총대주교 요한 6세가 자신을 지지해준 덕분에 겨우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라벤나에 입성할 수 있었다.

709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테오도로스에게 함대를 맡겨 라벤나로 파견해 사사건건 제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압하게 했다. 라벤나에 도착한 테오도로스는 황제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어 모든 고관들을 초청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관들은 아무 의심 없이 약속된 날짜에 연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펠릭스 대주교만이 실명형에 처해진 후 폰투스에 유배되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처형된 뒤에야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710년경 새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요안니스 3세 리조코포스는 라벤나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피살당했다. 이후 3년간 공석이었다가 713년 아나스타시오스 2세에 의해 스콜라스티코스가 부임했다. 그는 콘스탄티노 로마 총대주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황제의 뜻에 따라 로마 총대주교구와 가급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722년 레온 3세가 아랍과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기로 할 때 총대주교인 그레고리오 2세가 협조를 거부하고 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잡으려 하자, 레온 3세는 무력으로 총대주교를 압박하기로 하고 그동안 로마 총대주교구와 우호적인 관계였던 스콜라스티코스를 파울로스로 교체했다. 파울로스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레고리오 2세를 죽이거나 체포하려 했지만 로마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민병대에게 패퇴했다.

726년 레온 3세가 성상 파괴 운동을 밀어붙이자, 727년 라벤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울로스를 살해하고 자체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독립을 주장했다. 레온 3세는 에우티키오스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에우티키오스는 나폴리로 상륙한 뒤 일부 관리들을 로마로 파견해 총대주교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에 뇌물을 줘서 그레고리오 2세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무효로 하게 유도하였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반항적인 베네벤토 공국스폴레토 공국을 복종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와 손을 잡겠다고 했다. 총대주교가 랑고바르드 왕국의 로마 침략을 저지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라벤나로 가서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총대주교와 화해하였고, 730년 또는 731년 투시나에서 반란을 일으킨 티베리오스 페타시오스를 총대주교의 도움에 힘입어 토벌했다.

732년 랑고바르드 국왕 리우프란트가 태도를 바꿔 라벤나를 급습했고, 라벤나는 얼마 안가 함락되었다. 에우티키오스는 베네치아로 도망쳐 총독의 암살로 혼란에 빠져 있던 베네치아를 수습하고 도제를 선출할 수 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5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랑고바르드 국왕 리우프란트에 대항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공작을 지원하여 두 공작이 중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이 혼란에 휩싸인 사이, 그는 739년 베네치아의 도움으로 라벤나를 탈환했다.

743년 스폴레토를 제압하고 직할령으로 삼은 리우프란트가 라벤나로 진군하자, 그는 무력으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라벤나 대주교 요한 5세와 시민 대표들을 총대주교 자카리아에게 보내 중재를 요청했다. 리우프란트는 총대주교의 설득에 넘어가 라벤나를 정복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751년, 아이스툴프 왕이 이끄는 랑고바르드군이 라벤나를 공략했고, 그는 사력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로마 총대주교구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동시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고 있기에 450년 이후 사용하던 서방 총대주교직 대신 비공식적으로 사용하던 교황이란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마 공국의 힘만으로 랑고바르드 족을 막기는 힘들었기에 프랑크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피핀 3세는 자카리아의 묵인 하에 메로베우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킬데리크 3세를 폐위시키고 새 왕조를 일으킨 보답으로 군대를 일으켜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옛 라벤나 총독부 지역을 확보한 뒤, 교황청에 기증했다. 이리하여 교황령이 탄생했다.

다만 이때 스테파노 교황은 피핀에게 라벤나 총독령을 요구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라는 위조 문서를 만들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서로마의 정치적 지배권을 로마 총대주교(교황)에게 양도했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누가 봐도 허위임이 명백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두고두고 교황이 세속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었다.

하지만 여전히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험은 존재했었다. 757년 4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바오로 1세가 반대자들의 거센 도전으로 곤욕을 치르자, 데시데리우스는 이 때를 틈타 아이스툴프 왕의 패전으로 흔들리던 왕국의 권위를 되살리려 했다. 758년 펜타폴리스를 통해 스폴레토 공국으로 진군하여 로마 교황과 연계하여 독립을 꾀하던 알보인 공작을 체포해 지지자들과 함께 처형했고, 베네벤토 공작 리우프란트를 몰아낸 뒤 자신의 사위인 아리치스 2세를 새 공작으로 앉혔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에 반항하던 두 공국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이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데시데리우스는 753년 고향인 브레시아에 성 살바토레 수도원을 세우고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게 했으며, 딸 안셀페르가를 수녀원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롬바르디아, 에밀리아, 투스카니 일대의 모든 수도원이 이 성 살바토레 수도원의 관할하에 종속되었다. 758년에는 바디아 레오넨세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수용했다. 또한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힘에 의존해 자신들을 또다시 치도록 유도할 것을 우려해 페라라, 피엔차, 펜타폴리스 등의 소유권을 교황에게 넘기고 로마로 가서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 등 교황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767년 6월 바오로 1세가 선종하자, 차기 교황을 놓고 여러 후보가 각축전을 벌였다. 그는 이에 개입해 친 랑고바르드 성향을 가진 인물을 교황으로 세우려 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을 따르는 귀족들의 대표였던 토토 공작이 동생 콘스탄티노를 교황에 세우려 했다. 이에 로마 교회의 공증인이었던 크리스토포로와 아들 세르지오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세르지오에게 군대를 내주었고, 세르지오는 토토 공작을 살해하고 콘스탄티노를 축출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은 새로운 교황 후보로 수사 필립보를 내세웠으나 크리스토포로는 이를 무효화하고, 다시금 선거를 열어 스테파노 3세를 정통 교황으로 내세웠다. 스테파노 3세는 768년 8월 7일 교황좌에 공식 착좌했다. 이후 알라트리에서 콘스탄티노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내 진압되었다.

768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사망하자, 두 아들 카롤루스와 카를로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왕국이 두 패로 나뉘었다. 스테파노 3세는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잘 먹히지 않자 데시데리우스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딸 데시데르타를 카를로만과 결혼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이 랑고바르드 왕국에 간섭할 여지가 크게 줄어들자,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로마를 장악하기로 마음먹었다.

769년,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순례를 핑계로 군대를 거느리고 교황령에 들어섰다. 산 피에트로 성당 인근 평원에 진영을 세운 그는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포함한 친 랑고바르드 세력을 지원했다. 그 결과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고, 크리스토포로는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3일만에 사망했다. 772년 교황 스테파노 3세가 중병에 걸리자, 아피아르타는 로마 교회의 권력을 장악해 유력한 귀족과 성직자들을 내쫓고, 1월 24일에는 소경이 된 채 라테라노 궁전의 독방에 수감된 세르지오를 교살해 후환을 없앴다.

이 무렵 카를로만이 사망했다. 데시데르타의 요청을 받은 그는 딸이 남편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게 해주려 했다. 이에 분노한 카롤루스는 공세를 개시해 카를로만의 영토를 접수했다. 데시데르타와 두 아들은 카롤루스의 공세를 피해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적대했다. 그는 이 상황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를 조속히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겼다.

772년 2월 1일, 스테파노 3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이 된 하드리아노 1세가 새 교황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프랑크 왕국이 반 랑고바르드 정서로 돌아선 걸 눈치채고 친 랑고바르드파의 수장인 아파아르타를 해임하고 아파아르타에게 축출되었던 인사들을 복귀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교황이 "피핀 왕과 아이스툴프 왕이 맺었던 조약 대로 모든 점령지를 교황청에 넘겨라"라고 요구하면서 결렬되었다. 이에 데시데리우스는 공세에 나서 피엔차, 페라라, 코마키오를 점령하고 라벤나를 위협했다. 그러면서 카를로만의 아들들을 프랑크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로마를 치겠다고 위협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친 랑고바르드파 인사들을 계속 해임했다.

772년 말,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인근의 여러 마을을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그를 파문하고 카롤루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카롤루스는 작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교황의 요청에 응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돌렸다. 773년 봄, 카롤루스는 제네바 인근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두 부대로 나눴다. 한 부대는 카롤루스의 삼촌 베르나르도의 인솔하에 발레다오스타로 진군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이끌고 이끌고 몬체니시오를 가로질러 남하했다. 그는 프랑크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마 포위를 풀고 북상해 수사 계곡 인근의 키우세에서 카롤루스를 막아섰다. 그러나 발레다오스타로 가 있던 아들 아델치스는 베르나르도의 군대에게 참패한 뒤 남이탈리아로 달아났다.

패전 소식을 접한 그는 파비아로 도주한 뒤 수비에 전념했다. 그러나 여러 공작들이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파악하고 프랑크 왕국으로 돌아섰고, 스폴레토, 페르모, 오소모, 안코나는 로마 교황에 복종하기로 했다. 카롤루스는 원정을 이어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카를로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파비아는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774년 초 함락되었고, 데시데리우스와 그의 아내는 프랑크군에 사로잡혔다. 카롤루스는 데시데리우스를 프랑스 북부의 코르비 수도원으로 추방하고 랑고바르드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고 랑고바르드 공작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조건하에 자치를 누릴 수 있게 해주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의 평정을 공식적으로 완료했고, 교황과의 외교에서도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 받아 파비아 공성전 와중 카롤루스는 부활절에 맞추어 로마를 방문,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공작령을 포함한 넓은 땅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교황령은 프랑크 왕국 아래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의 타이틀 중에 로마의 파트리키우스가 추가가 되면서 로마의 수호자가 되었다.

1.3.1.2. 동로마 제국 통치하의 베네치아[편집]

본래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동북부에 거주하던 베네티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베네티족의 준마는 뛰어나기로 유명해서 그리스 본토나 식민도시에서도 말을 구하기 위해 베네티족에게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기원전 3세기경부터 로마에게 동화되어 서서히 흡수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로마 시대에는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7], 현재에도 이 지역에는 베네토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과거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에 속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던 시점에는 '베네티아'가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해안가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도시 베네치아에 베네치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쨌든 고대부터 베네티아 해안가의 석호지대에는 어부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로마인들은 이들을 "석호 거주민(incolae lacunae)"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본디 습지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미개발지에 가까웠으며,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베네치아는 5세기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고트족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서 파두아, 아퀼레이아, 콘코르디아, 트레비소, 알티노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이 석호의 섬들(토르첼로Torcello, 이에솔로Iesolo, 말라모코Malamocco)로 모였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이들의 정착과 함께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고, 지대가 물러서 제대로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만 머물 곳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아예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떠올린 방법은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육체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항목 참조.

6세기 중엽인 554년 동로마 제국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하다가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침입 후 584년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이 때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동안 더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상임통치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와 토르첼로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럿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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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동로마 제국령(분홍) 베네치아

본래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인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697-717)와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는 동일인물이었고,[8] 그의 후임자는 본래 그 휘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첼로 테갈리아노였다. 그러나 726년 성상파괴령을 둘러싸고 동서교회간 논쟁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2세의 촉구에 반응하여 총독의 관할 지역 군인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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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년 동로마 제국령(분홍) 베네치아

이에 파울로스를 선출한 때처럼 12명의 호민관들이 에라클라아에 소집되어 이들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우르수스 이파토(726-737)였다. 그는 레온 3세의 라벤나 정복을 지지해 군인과 선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베네치아에 각종 특권을 내려주고, 우르수스를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면서 "히파투스"(로마 시대의 집정관Consul을 뜻하는 그리스어)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된다.

하지만 737년 에아클레아와 예솔로 간의 분쟁이 발생했다. 이때 우르수스는 아에클레아쪽의 편을 들자 이에 앙심을 품은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후 베네치아는 마지스터 밀리툼(Magister militum)들에 의해 군정으로 통치되었고, 최초의 마지스터 밀리툼은 도메니코 레오니였고, 라벤나 총독부는 그의 지권을 인정했다. 이후 다음 마지스터 밀리툼인 페리체 코르니콜라에 의해 암살된 우르수스의 아들로 국외 추방 상태였던 테오다트 이피토를 사면시킨 후 후 임기를 마쳤고, 739년 테오다트가 다음 마지스터 밀리툼으로 선출되었다, 데오다트는 1년의 임기를 마쳤고, 조비안 세파리우스가 선출되었는데, 그의 지권기 동안 에아클레아와와 에솔로 간의 분쟁이 다시 발발했다.

그의 뒤를 이어 마지스터 밀리툼에 선출된 조반니 파브리시아코는 전임자 시절 발생한 에아클레아와 에솔로와의 분쟁을 해결해야 했는데 우르수스처럼 과격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가 결국 742년 동로마식으로 실명형에 처한 후 베네치아 밖으로 추방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다시 도제를 선출하기로 결의했고, 이번 도제에 세번째 마지스터 밀리툼으로 재직했던 테오다트를 선출시켰다. 테오다트는 에아클레아와 에솔라와의 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수도를 에아클레아에서 말리코모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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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주황)과 랑고바르드족(회색), 751년 이탈리아 반도

751년경 랑고바르드족은 결국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무너뜨렸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테오다트는 랑고바르드 왕국 외교적으로 관계를 개선시키려고 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나중에 공식 명칭도 '도제'가 됨) 이때 상술한 대로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고,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테오다트는 재임 말기에 베네치아 석호에 지진이 발생해 마을의 일부가 침수되어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는 도중에 755년 갈라 가올로의 선동을 실명형 내지는 암살되었다.

선동으로 도제 자리를 꿰찬 갈라 가올로의 1년 간의 집권기 당시 베네치아의 정치 상황은 세파벌로 나눠진 상태였다. 하나는 도제를 중심으로 하는 친 동로마파와 또하나는 756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굴복시킨 북쪽의 강국이었던 프랑크 왕국에 복속하길 원하는 프랑크파와 독립적인 세력이길 원하는 공화파로 나눠졌다. 이중 갈라 가올로는 친프랑크파로 보이는데 756년 랑고바르드 국왕 데시데리우스의 지원을 받은 도메니코 모네가리오가 반란을 일으켜 갈라 가올로를 축출하고 도제에 취임한다. 하지만 도메니코 또한 베네치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바로잡기엔 카리스마가 없던 인물이었기에 764년 무능한 그에게 염증을 느낀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다음 도제로 마우리치오 갈바리오를 선출했다. 그나마 마우리치오는 이전 도제들과 달리 베네치아의 시대상이 요구하는 리더쉽과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로 33년을 집권할 수 있었다. 774년 프랑크 왕국이 랑고바르드 왕국을 병탄하면서 베네치아는 프랑크 왕국과 마주하게 되었다.마우리치오는 아들인 조반니에게 랑고바르드 왕국을 도울 군대를 맡겼으나 프랑크 군대는 이들마저 격파해 아들인 조반니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현재의 베네토 지방이 점령되고 이스르리아 반도마저 위협하자 결국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중제하에 아들을 돌려봤는데는 성공한다.

1.3.1.3. 나폴리 공국[편집]

661년, 나폴리콘스탄스 2세 황제에 의해 바실리우스 1세라는 인물이 나폴리와 인근 지역들을 다스릴 권리를 얻으면서 성립되었다. 그의 칭호 중에는 패트리코와 하이파토도 있었다. 당시 나폴리 공작은 베수비오, 캄피 플레그레이, 소렌틴 반도, 주글리아노, 아베르사, 아프라골라, 놀라, 그리고 이스키아와 프로키다 섬을 아우르는 대략 현재의 나폴리 지방에 해당하는 지역을 지배했다. 카프리는 나중에 아말피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가에타, 아말피, 소렌토의 인접 항구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 항구들은 각각 특히 나폴리 공국의 말기에 대부분 자치되었다. 나폴리 공국 또한 라벤나 총독부에 속해 있었다.

이 시대에, 공국은 황제의 형상과 그리스 문자가 세겨진 동로마의 화폐를 만들었고,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그리스 문화권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라틴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많은 등 여전히 라틴적 색체가 강한 편이었다.

공작 시대의 나폴리 공국에 속한 귀족들은 중세 도시의 자리에 등록한 소위 "거대 가문"으로 대표되었다.그들 중 케이프체, 페라리오, 멜루소, 피시첼리, 파판소냐, 보키아, 데 게나로, 루소, 모르피사의 가문들은 특히 시민 생활의 중요성을 가졌다. 615년 라벤나 총독 요안니스 1세가 무거운 세율을 독촉하다가 라벤나 시민들이 일으킨 반란에 죽자 이 혼란을 틈타 나폴린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동로마 군대를 지휘하던 콘차의 요한이란 자가 나폴리의 독스를 죽이고 나폴리의 독스를 자처하고 동로마 제국에 독립하려 했으나 이라클리오스가 라벤나의 새총독으로 환관 엘레우테리우스를 임명해 라벤나 총독부의 혼란을 가라앉게 했다.

이에 엘레우테리우스는 라벤나로 가 사태를 수습한 후 617년 나폴리로 출병해 콘차의 요한을 생포한 후 추종자들과 함께 처형했다. 이후 위에 상술한대로 661년 바실리우스란 인물이 나폴리의 독스로 임명되었다. 716년 죠반니 1세 당시 나폴리에 역병이 돌자 베네벤토 공작 로무알트 2세가 이틈을 노려 공격하려해 막으려 했지만 패배하고 인근 도시였던 쿠마에마저 공략당하고 만다. 이에 로마 총대주교 그레고리오 2세가 특사 테오디무스를 보내 70파운드의 금을 줄 테니 쿠마에를 돌려달라고 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쿠마에를 돌려줬다. 이로 인해 나폴리 공국은 동로마 제국 본토보다는 로마 공국의 실권자나 다름 없던 로마 총대주교들과 가까이 하게 되었는데 조반니 1세 다음 나폴리의 독스가 된 테오도르 1세때 동로마 황제 레온 3세에 의한 성상 파괴 운동이 한창이었던 이때 테오도르 1세는 레온 3세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727년 마지막 총독이었던 에우티키오스가 레온 3세의 성상 파괴령을 로마 총대주교 그레고리오 2세에게 하달하기 위해 직접 나폴리로 상륙해 테오도르 1세를 비롯한 나폴리의 귀족들을 대동해 로마까지 진군했다. 729년 새로 나폴리 독스가 된 조르지오는 동로마 황제와 로마 총대주교 사이에서 중립적인 포커스를 취해야 했다. 또한 그는 베네벤토 공작 로무알트 2세로부터 가에타 북쪽의 테라치나에서 팔레르모까지 티레니아 해안을 방어했다. 그 다음의 나폴리 독스였던 그레고리오 1세가 독스에 취임한지 11년이 되었을 때인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에 의해 라벤나 총독부가 붕괴되자 테마 시켈리아스에 속하게 되었다.



1.3.1.4. 리구리아[편집]

476년 서로마 제국의 붕괴 당시의 현재의 리구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오도아케르 왕국으로 편입되다가 동로마 제국의 사주를 받은 동고트의 지도자인 테오도리크에 의해 라벤나에서 두 세력의 결합 및 공동 통치가 될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오도아케르가 암살된 후 동고트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리구리아는 6세기 중엽까지 동코트 왕국의 영토로 있다가 535년 동로마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538년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어 동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568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하한 랑고바르드족들에 의해 1년만에 이탈리아 서북부 지방들이 대거 점령될때 유일하게 동로마 제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라벤나를 중심으로 하는 라벤나 총독부에 속해 있었지만 아우타리가 즉위한 후의 랑고바르드 왕국의 지속되는 영토 확장으로 인해 치략의 위협에 노출되다가 599년 아길루프에 의해 동쪽으로 라벤나와 육로로 통하는 피에드몬드(Piedmont)와 비스만토바(Bismantova)와 수리아노-필라티에라(Suriano-filattiera) 등이 정복되면서 육상으로 통행이 차단되어 이제는 해로를 통하는 길이 아니라면 라벤나와 연락하는 길이 차단되었다.

이후 아길루프 사후 한동안 평화기를 누리지만 636년 로타리가 랑고바르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그의 정복 목표중 하나가 되어 643년에 로타리에 의해 정복었다. 이후 리구리아는 한세기 넘게 랑고바르드 왕국의 영토로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포도원 증설과 제재소, 제분소 등이 도입되면서 증가한 농업 생산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역로와 기름, 소금, 향신료 등을 수입하는 무역기지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751년 라벤나를가 함락되어 라벤나 총독부가 붕괴후 발생한 755년 프랑크 왕국의 침공에 운 좋게 진격로에서 벗어났으나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프랑크 왕국에 병탄됨에 따라 프랑크 왕국령으로 편입되었다.

1.3.1.5. 칼라브리아 공국[편집]

476년 서로마 제국의 붕괴 당시의 현재의 칼라브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오도아케르 왕국으로 편입되다가 동로마 제국의 사주를 받은 동고트의 지도자인 테오도리크에 의해 라벤나에서 두 세력의 결합 및 공동 통치가 될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오도아케르가 암살된 후 동고트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칼라브리아는 6세기 중엽까지 동코트 왕국의 영토로 있다가 535년 동로마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536년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레기움이 점령되어 동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되어 동로마 제국에서 임명된 둑스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통치되었다. 하지만 568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하한 랑고바르드족들에 의해 1년만에 북부 지역들을 대거 점령해 알보인을 초대 국왕으로 하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운다. 이후 알보인 휘하 귀족들은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해 독립 공국들을 세웠는데, 그 중엔 조토라는 인물도 있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를 집필한 8세기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파울 부제에 따르면, 조토는 570년 8월 캄파니아에 침투하여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베네벤토에 거점을 삼고 공작(Duke)으로서 주변 지역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나폴리 공략에 착수했지만 수 년간의 공방전 끝에 581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다만 그는 이탈리아 나부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점거하는데 성공했고, 이제 이탈리아 남부의 동로마 제국령은 나폴리, 소렌토, 아말피의 이근 지역과 남부 끝의 바리와 칼라브리아 밖에 없었다.

이후 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라벤나를 중심으로 하는 라벤나 총독부에 속해 있었지만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공격해 라벤나 총독부를 붕괴시키면서, 칼라브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남부의 일부 지역들이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에 점유하고 있던 남은 곳들이 되었다.

8세기와 9세기 사이에 이탈리아의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점차 줄어들었고, 753년 랑고바르드 국왕 아이스툴프, 베네벤토 공작 리우프란트에 이르려서는 칼라브리아와 바리 지역 간의 육로가 끊어지게 되었고, 칼라브리아는 공국에서 테마로 전환되었다.


1.3.1.6. 페루자 공국[편집]

페루자를 비롯한 움브리아 지역 또한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오도아케르 왕국으로 편입되다가 동로마 제국의 사주를 받은 동고트의 지도자인 테오도리크에 의해 라벤나에서 두 세력의 결합 및 공동 통치가 될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오도아케르가 암살된 후 동고트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리구리아는 6세기 중엽까지 동코트 왕국의 영토로 있다가 535년 동로마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538년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어 동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568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하한 랑고바르드족들에 의해 1년만에 이탈리아 서북부 지방들이 대거 점령될때 이탈리아 남부를 진군하던 랑고바르드족들은 페루자를 비롯한 움브리아의 이부 지역들을 건들지 않고 그대로 진군하면서 페루자를 비롯한 옴브리아 일부 지역들은 그대뢰 회랑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라치오 지방과 라벤나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니아 지방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육상으로 나마 남쪽의 스폴레토 공국, 베네벤토 공국과 북쪽의 랑고바르드 왕국간의 차단할 수 있어 중요한 전략적 거점 지역이 되었다. 이지역의 종요성은 랑고바르드 왕국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지속적으로 침입했고, 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명으로 라벤나에 라벤나 총독부가 성립된 후 590년대에 독스를 두었다. 하지만 751년 랑고바르드 국왕인 아이스툴프가 군대를 일으켜 라벤나 총독부를 붕괴시키면서 움브리아 회랑 또한 안전해지지 않게 되었고, 결국 752년 페루자를 비롯한 움브리아 회랑 동쪽이 랑고바르드 왕국에 의해 정령되었다. 하지만 756년 프랑크 왕국피핀 3세가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으로 랑고바르드 왕국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교황에게 기증하였고, 그 뒤로 교황령에 속하였다.


1.3.1.7. 펜타폴리스 공국[편집]

펜타폴리스 공국은 라벤나에서 남쪽에 위치한 아드리아해를 마주하는 안코나, 파노, 페사로, 리미니, 시니가글리아의 도시들로 구성되었으며 페루자 공국이 위치한 옴브리아 회랑을 통해 로마 공국과과 연결되었다. 펜타폴리스의 독스는 라벤나 총독이 임명했으며 펜타폴리스의 민사행정권과 군사권을 쥐고 있었다. 수도는 리미니로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침입 이후인 대략 7세기경에 성립되었다.

펜타폴리스 공국에 속한 다섯 개의 도시들은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 상업이 발달한 곳으로 성립 이후 펜타폴리스의 민중들은 공국 내에서 총독의 권한을 끊임없이 축소하려고 했다. 이당시 동로마 제국령 이탈리아는 중앙 정부의 통제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지방 분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725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와 공국의 주민들이 동로마 황제 레온 3세성상 파괴 운동에 반발해 현직 로마 공작을 추방하자 파울로스 총독이 징벌 원정을 이끌려고 할 때 라븐네이트와 펜타폴리스에서 병사를 모았다. 하지만 롬바르디아의 역사가 파울 부제는 필요한 병력을 모으는 데 매우 힘들었고, 그의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말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동로마 제국령에서 레온 3세의 파괴령에 반발한 세력들이 있었음을 의미했고, 결국 727년 라벤나에서 반란을 시작으로 펜타폴리스를 비롯한 각지의 동로마 제국령에서 반란이 일어나 총독이 파울로스가 죽었다. 반란군은 자체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독립을 주장했다. 레온 3세는 에우티키오스를 파견하여 반란을 제압하게 한 후 그를 새 라벤나 총독으로 선임했다.

738년, 롬바르디아의 국왕 리우프란트스폴레토 공국로 가기 위해 도중에 펜타폴리스를 경유했지만, 그 도중에 스폴레토의 롬바르디아인들과 로마인들로 구성된 괴한들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현지 주민들은 스폴레토 공작 트라사문트 2세와 협정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는 총독 에우티키우스에 의해 선동되었다.

리우프란트는 743년에 에밀리아 경유로 라벤나와 체세나를 공격했지만, 이는 소폴레토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의 영토를 막고 있는 옴브리아 회랑을 비롯한 동로마 제국 내의 통로를 제어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공격은 리우프란트각 죽은 후 749년 라치스가 로마로 망명해 수도자로 운둔하기까지 펜타폴리스와 페루자의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 752년, 펜타폴리스는 라벤나 총독부와 함께 아이스툴프에 의해 정복되었다.

하지만 랑고바르드 왕국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교황 위협을 느낀 스테파노 2세는 754년 1월 6일 프랑크 왕국으로 찾아가서 피핀 3세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일전에 교황이 메로빙거 왕조를 밀어내고 자신이 프랑크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적이 있는 데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가신이 되는 걸 막고 싶었기에, 피핀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로 했다. 4월 14일, 피핀은 프랑크 귀족들을 소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전쟁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카를로만은 지난해에 사망했기에, 프랑크 왕국 내에서 피핀을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755년 봄, 피핀 3세는 알프스 산맥으로 진입해 수사 계곡 요새에서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아이스툴프는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프랑크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어진 평화 협상 끝에, 755년 6월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이스툴프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인질을 넘기며, 자신이 빼앗았던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피핀 3세가 철수한 후, 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756년 1월부터 3월까지 로마 공방전을 전개했다. 알프스 산맥을 겨울에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프랑크군이 산맥을 넘지 못하는 사이에 로마 시를 함락시켜서 모든 걸 끝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지하며 끝까지 저항한 수비대와 시민들 때문에 함락되지 않았고, 아이스툴프는 4월 초 포위를 풀고 파비아로 돌아갔다. 한편 피핀 3세는 아이스툴프가 약속을 어겼다는 소식을 듣고 4월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아이스툴프를 또다시 격파하고 파비아에서 포위 공격했다. 아이스툴프는 결국 756년 6월 항복하고 훨씬 가혹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번에는 일전에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이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로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인질을 프랑크 왕국에 보내야 했으며, 상당한 배상금을 프랑크 왕국에 지불해야 했다. 이리하여 교황청이 피핀 3세로부터 라벤나 총독부와 펜타폴리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기증받으면서 교황령이 탄생했다.

1.3.2. 테마 시켈리아스[편집]

시칠리아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도 전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반달족들이 세운 반달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후 서로마 제국 붕괴 후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오도아케르 왕국이 시칠리아를 침공해 차지했고고, 493년 그와 공동 통치를 약속받았던 동고트족의 지도자인 테오도리크가 라벤나의 궁정에서 열린 연회에서 오도아케르를 암살, 그의 친위 세력까지 숙청한 후 동고트 왕국을 건국한 후 시칠리아의 소유권 또한 동고트 왕국이 계속 보유했다.

하지만 53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개시하면서 이섬의 소유권 또한 다시 변동되는데 535년 여름에 벨리사리우스가 이끌던 원정군이 시라쿠스에 상륙해 정령한 후 다음에 12월, 팔레르모 또한 점령해 섬을 차지한 후 반달 왕국을 정복할 전초 기지가 되었다.

이후 550년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가 이탈리아 남부로 남하하면서 해안 도시들과 도서 지역들을 공격했고, 시칠리아 또한 그 대상에 있었다. 553년 동고트 왕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 대관구에 속했으나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침공해 570년 사이에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라치오 지방과 라벤나와 베네치아 일대와 양쪽 지역을 연결하는 옴브리아 회랑과 일부 해안지역 밖에 남지 않게 되엇다.

이에 584년 마우리키우스에 의해 이탈리아의 남은 지역들을 묶어 라벤나 총독부를 설치했고, 시칠리아 또한 별도의 테마 제도가 설치되었다. 테마 시케리아스로 불린 시칠리아는 스트라티고스가 행정과 군사권을 동시에 행사했다. 다만 시칠리아 테마의 속한 각각의 도시들에서 주교들이 관리 선발이나 감사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만 라벤나 총독부와 마찬가지로 과도한 징세로 악명이 높았고, 로마 총대주교인 그레고리오 1세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포카스 황제에게 세금 감면 요청한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시칠리아의 역사는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흘려갔다.

622년 아라비아 반도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교 탄생한 후 10년 후인 632년 무함마드가 죽자 성립된 라시둔 칼리파국은 주변으로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는 인접한 동로마 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미 유스티니아누스 1세부터 시작한 고토 수족 전쟁과 탈환한 지역들에 대한 막대한 유지비 및 포카스의 폭정으로 동로마 제국은 맛이 갈 때로 간 상태였고, 사산 왕조호스로 2세의 공격으로 이집트까지 빼앗긴 것을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이라클리오스의 반정 이후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내정을 개혁하려는 등 제국을 회복시키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634년 동로마 제국령 시리아를 공격해 629년에 완전히 정복했고, 이후 이집트를 공격해 646년에 완전히 정복했고, 644년 현재의 리비아 북부와 튀니지 동쪽 일부까지 정복했다.이후 발생한 1차 피트나 이슬람의 팽창이 주춤했지만 이미 해군까지 만든 상태라 시칠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도서의 동로마 제국령 또한 안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이당시 시칠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652년 로마 총대주교였던 마르티노 1세가 동방교회에 만연한 단의설을 처리하기 위해 전임 교황 테오도로 1세가 소집했던 라테라노 교회회의를 재소집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헤라클리우스 황제 때 단의설의 신앙 고백 문서인 에크테시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지에 관한 논쟁 자체를 금한 콘스탄스 2세의 티포스(Typos) 칙령까지도 비판했다.

마르티노 1세는 5회에 걸친 라테라노 교회회의가 끝나고, 이 회의의 결과를 발간하여 널리 퍼치도록 했다. 이슬람과의 대결에 직면한 황제 콘스탄스 2세는 내부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강경한 마르티노 1세의 조치는 황제의 의지와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결국 황제도 강수를 두어 라벤나 총독 올림피오스에게 교황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올림피오스는 딴 마음을 먹고 자신을 황제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시칠리아를 공략하려 했지만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이후 새로 부임한 라벤나 총독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가국 마르티노 1세를 653년 6월 17일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654년 장남 콘스탄티노스 4세를 공동 황제로 승격시킨 콘스탄스는 659년 두 아들 이라클리오스티베리오스 역시 공동 황제로 승격시켰다. 이후 동생 테오도시우스의 처형 이후로 수도의 민심이 콘스탄스를 외면하자, 황제는 660년 이후로 시칠리아시라쿠사로 궁정[9]을 이전하였다. 이후에는 남부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썼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회복한 이탈리아 반도는 대제의 사후 랑고바르드족이 남하하며 라벤나 ~ 로마를 잇은 회랑과 나폴리 일대, 그리고 장화의 앞뒤굼치 부분만 동로마 제국령으로 남아 있었다. 663년, 콘스탄스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인 그리모알드 1세가 프랑크 왕국네우스트리아[10]에 있는 틈을 타 베네벤토 공국으로 출정하였다. 타란토에서 북진한 동로마 군대는 루체라를 함락하였으나, 수도인 베네벤토에서는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함락에 실패하고 나폴리로 퇴각하던 콘스탄스는, 카푸아 백작의 군대에게 습격당하여 패배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황제는 카푸아에 대한 공격을 명하였으나, 제국군은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롬바르드족에 패하며 또 한번 자존심을 구겼다.

664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 게나디오스 2세가 공물을 증액하라는 콘스탄스 2세의 칙사를 쫓아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665년 엘레우테리오스가 콘스탄스 2세를 위해 역적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병대를 일으켜 게나디오스를 축출하고 총독을 자칭했다. 게나디오스는 다마스쿠스로 달아난 뒤 무아위야 1세에게 자신이 총독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했다. 무아위야 1세는 즉시 우크바에게 아프리카 원정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게나디오스는 이들을 따라가다가 665년 말 알렉산드리아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우크바는 그대로 아프리카 속주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시칠리아에서 달려온 동로마 장군 니키포로스를 격파한 뒤 이집트로 회군했다.

668년, 9월 15일 콘스탄스 2세가 제국의 수도를 시라쿠사로 옮긴다는 소문이 커져 민심이 흉흉할 무렵, 시라쿠사 궁전의 지중해가 보이는 욕실에서 목욕 중이던 황제는 시종장[11]에게 바구니(...)에 맞아죽으며 암살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계 출신의 장군인 미지지오스콘스탄티노스 4세에게 일으키지만 콘스탄티노스는 원정군을 파견, 로마 총대주교인 비탈리아노의 지원을 받고 7개월만인 669년에 진압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정예군이 시칠리아를 떠나자마자 이슬람 해적들이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섬을 침략해 동로마 군이 미쳐 챙겨가지 못한 콘스탄스 2세가 로마에서 뜯어낸 각종 귀금속들을 약탈했다. 이후 한 차례 실패했기는 했으나 다시 시칠리아를 공격해 왔다.

68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 의해 테마 시켈라이아의 관할지는 시칠리아 섬 외에도 이탈리아 본토 남부의 칼라브리아가 추가되었다.

751년 라벤나 총독부가 랑고바르드 왕국에 붕괴되면서 테마 시켈리아스가 이탈리아 남부의 남은 해안 지역들을 총괄하게 되었다.

1.3.3. 아프리카 총독 관할 하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편집]

사르데냐코르시카 또한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476년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전 반달족에게 점령되어 466년 469년 사이에 반달 왕국에 편입된 상태였다.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확보한 반달 왕국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사이의 해상 무역로를 얻음과 동시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고, 코르시카의 경우 선박 제조를 위한 목재 공급처로 활용되었다.

이후 오도아케르동고트에게 점령된 시칠리아와 달리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의 경우 6세기 중엽까지 반달 왕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사르데냐의 경우 이외로 로마식의 행정으로 통치되어 선출된 총독 밑으로 감찰관(procurators), 징세관(tax collectors), 그리고 토지 조사관(conductors)의 보조를 받았다. 사르데냐의 로마인 지주들 또한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았지만 그댓가로 막대한 징세를 받쳐야 했다. 그러다가 533년 고트족 출신의 총독인 고디스가 자신을 사르데냐의 왕으로 자칭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반달 국왕인 겔리메르는 진압군을 사르데냐로 파견했는데 문제는 이시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개시했다는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달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의 명분으로 전통교회로 개종하다가 폐위된 힐데리크의 복위와 함께 고디스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태운 선단이 서지중해 방면으로 항해하기 시작해 시칠리아 동부에 상륙해 동고트 왕국령이었던 시칠리아를 정복했다. 그 사이에 겔리메르는 사르데냐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디스를 진압하기 위해 5천의 병력을 급파하면서 힐데리크와 그의 동생을 처형하지만 벨리사리우스의 원정군은 주력군이 거의 빠져나간 상태인 반달 왕국의 수도인 카르타고를 공격해 정령하는데 성공한 후 겔리메르를 생포하면서 반달 왕국을 멸망시킨다.

이후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는 동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되었다. 550년 동고트 왕국토틸라가 돌로마 제국에 의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남쪽으로 남하하면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또한 토틸라를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553년 토틸라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동고트 왕국이 멸망하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다가 568년 랑고바르드족들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하해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도시였던 파비아를 함락시키고 그곳을 수도로 삼고 572년 공식적으로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한 575년까지 현재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과 중부 지역에 속한 스플레토와 이탈리아 남부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베네벤토 일대를 장악하면서 코르시카와 사르데냐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두 섬의 전략적, 경제적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지속적으로 두 섬을 침략했다. 이후 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이탈리아의 남은 지역에 라벤나 총독부가 들어섰고, 아프리카 지역에는 아프리카 총독부가 들어섰는데,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는 아프리카 총독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시기 사르데냐의 행정은 통상적인 행정과 사법구너만을 행사하는 문민 총독과 군사권만 관할하는 독스로 양분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기동 야전군인 코미타텐스(Comitatenses)가 포르둥야누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코르시카의 경우 관련 문헌이 없으나 대체로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사르데냐에는 고대 로마에 의해 사르데냐가 정복되었으메도 여전히 산과 계곡에 숨어살고 있는 바바기안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590년에서 604년 로마 총대주교였던 그레고리오 1세가 이곳으로 선교사로 파견해 개종을 시작해 족장인호스피토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했고, 이후 바바기안인들을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는 것을 선택했다.

599년 칼리아리 해안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재차 침략하지만 격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본토 및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사르데냐 또한 세금 부담율이 가중되었고, 603년 그레고리오 1세는 콘스탄티노플로 사절을 보내 포카스에게 감세를 요청했다. 코르시카의 경우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알수 없으나 섬이기는 하나 동쪽 해안으로 언제든지 랑고바르드 인들이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642년 상황이 더 않게 흘려 가게 되었다. 622년 아라비아 반도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교 탄생한 후 10년 후인 632년 무함마드가 죽자 성립된 라시둔 칼리파국은 주변으로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는 인접한 동로마 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미 유스티니아누스 1세부터 시작한 고토 수족 전쟁과 탈환한 지역들에 대한 막대한 유지비 및 포카스의 폭정으로 동로마 제국은 맛이 갈 때로 간 상태였고, 사산 왕조호스로 2세의 공격으로 이집트까지 빼앗긴 것을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이라클리오스의 반정 이후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내정을 개혁하려는 등 제국을 회복시키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634년 동로마 제국령 시리아를 공격해 629년에 완전히 정복했고, 이후 이집트를 공격해 646년에 완전히 정복했고, 644년 현재의 리비아 북부와 튀니지 동쪽 일부까지 정복했다. 이후 발생한 1차 피트나 이슬람의 팽창이 주춤했지만 언제 이슬람 세력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아프리카 총독부의 붕괴후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는 라벤나 총독부의 통제를 받아야 했지만 문제는 라벤나 총독부타머 롬바르디아 왕국과의 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 본토에 남은 영토에서 집중해야 했기에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관할할 입장이 아니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 직활로 통치되었지만 문제는 이마저도 거리가 멀데로 멀었기에 비효율적인 통치로 전개되었다.

사르데냐에 이슬람 해적들이 최초로 침입한 시기는 705년으로 709, 711, 733에서 736, 753년에 걸쳐 발생했으며, 코르시카의 경우 713년 최초로 이슬람 해적들이 코르시카의 해변들을 약탈해오기 시작했고, 725년 랑고바르드 국왕인 리우프란트의 침공을 받아 정복되었지만 아직까지 동로마 제국이 해안 일대만을 장악했다. 그러다가 8세기 중반쯤 프랑크 왕국의 위협이 가시화 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은 코르시카에 철수하면 동로마 제국은 코르시카의 통제권을 되찾는데 성공하나 이슬람 제국에 의해 코르시카 남부가 점령되었다. 772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한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 스테파노 3세에게 랑고바르드 국왕이 명목상 갖고 있던 코르시카에 대한 통치권을 넘겨주지만 교황령은 코르시카의 방어를 보장 할 수단이 없었다. 결국 780년 시칠리아를 비롯해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포함한 티레니아해를 방어하기 위해 함대를 확충해야 했지만 이후 더 이상 코르시카에 대한 기록이 없어 섬에서 완전히 철수 한 것으로 보인다.

1.4. 중프랑크 왕국롬바르디아 왕국이탈리아 왕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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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게된 구 롬바르디아 왕국령을 포함한 이탈리아 중·북부는 대체로 평온한 평화기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그의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가 단독으로 프랑크 국왕겸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평화기가 끝나기 시작해 루도비쿠스 사망 후 840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세분할되면서 로타리우스 1세 통치하는 중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되다가 855년 로타리우스 1세가 죽자 중프랑크 왕국은 프룀 조약을 통하여 그의 세 아들인 장남 루도비코 2세, 차남 로타르 2세, 막내 샤를 2세에게 또 다시 분할되었다.

루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 왕국과 황제 칭호를 가져가지만 몇 년 안가 세 아들 또한 훈손을 남기지 못하거나 사생아만 남긴 탓에 대가 끊겼다. 이후 887년까지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의 아들들이 번갈아 가며 이탈리아를 지배했지만 카를 3세의 죽음으로 스폴레토 공작귀도 3세가 이탈리아의 국왕이 되면서 10세기 말까지 이탈리아는 혼란기에 빠지게 된다.


1.4.1. 카롤링거 왕조 통치기[편집]

이후 롬바르드 왕국은 프랑크 왕국 일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랑고바르드 최후의 국왕인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델치스는 남이탈리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의 공작들마저 프랑크 왕국에 복종하기로 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한 뒤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의 영접을 받고 귀족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올 기회를 노렸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반감이 생긴 일부 랑고바르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788년 말 동로마군이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아델치스를 랑고바르드 왕에 복위시키려 했지만, 스폴레토 공작 힐데프란트와 베네벤토 공작 그리말트 3세, 그리고 위니게스 휘하의 프랑크군이 결성한 연합군에게 패퇴했다. 결국 아델치스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강고바르드 왕국의 잔여 세력들인 스플레토 공국은 위치상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던 지역이었기에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편입되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교황령 역시 종교적 권위로 우위에 있을지도 모르나 사실상 프랑크 왕국에 종속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800년 카롤루스 1세는 로마로 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아 새로운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는 유일한 로마 황제라는 권위를 갖고 있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을 자극하는 계가 되었다.한술 더 떠 카롤루스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여제인 이리니에게 재혼 제릐를 보냈는데 문제는 안그래도 인망을 잃어가던 여제에게 반정이 일어날 명분을 제공했으며 802녀 반정으로 이리니가 실각되며 니키포로스 1세가 즉위했다.

806년 카롤루스의 명령에 의해 동로마 제국과의 세력 싸움의 일환으로 지금껏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별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를 눈독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아들 피핀을 시켜 배를 건조해 이 지역을 정복하는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에 친동로마, 친프랑크와 완전한 자주국가로서의 독립을 원하는 세력으로 나눠져 파벌 싸움에 매물되어 가고 있었고, 인접 도시 그라도와의 다툼으로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동로마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임시 휴전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동로마에 넘겨졌고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로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군은 텅 빈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어두웠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시간이 끌리며 케팔리니아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불가르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동로마 제국과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고(다만 '로마 황제'가 아닌 그냥 '황제'로만 인정) 동맹을 채결했다.

814년에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후 루도비쿠스 1세가 즉위 초까지만 하더라도 무난하게 통치를 했으나 820년대부터 핵심 조언가로서 개혁을 진두지휘하던 아니안(Aniane) 수도원의 베네딕트가 사망헀다. 그 후 교회 개혁 운동은 쇠퇴했고, 왕이 파견한 감찰단에게 시달린 영주들의 불만이 점점 증폭되었으며, 성직자들은 그가 재위 초기에 친족에게 저지른 범죄를 비난하는등 비꺽거리기 시작했다.

818년 아들 로타리우스 1세를 롬바르디아의 분국왕으로 임명한 뒤 이탈리아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의 귀족들은 샤를마뉴 시대에 이미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루이는 베네벤토의 공작인 그리모알드 4세(Grimoald IV)나 후임 공작 싸이코(Sico) 등으로부터 충성 맹약을 받았지만 이는 모두 형식적인 것이었다.

817년 7월 루도비쿠스는 아헨에서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이탈리아 왕으로 앉히기 위해, 조카 베르나르두스의 이탈리아 왕의 지위와 롬바르디아 통치권 승인 철회를 선언했다. 이후 실질적인 장남이었던 로타리우스를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같은 해 12월에 밀라노의 주교 안셀름(Anselme), 크레모나의 울보드(Wolvod) 등은 그에게 루트비히를 상대로 저항하도록 병력과 무기를 제공하였다. 베른하르트의 군사는 알프스산맥 넘어서까지 점령했지만, 살롱-쉬-사온느에서 루트비히 1세 군에 대패하고, 베른하르트 자신은 포로로 사로잡혔다.

822년 이탈리아 왕국을 본격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로타리우스는 822년 또는 823년 4월 5일 부활절에 교황 파스칼 1세로부터 축성, 황제관을 수여받았다. 824년 공동황제가 된 로타리우스는 법을 만들어 교황의 관할권과 이탈리아 정계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정치 개입권한을 제한하였다. 824년 11월 로타리우스는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관한 법령이자 이탈리아의 법인 '로마 협정'(Constitutio Romana)을 발표했다. 로마 협정은 교교황과 황제의 기밀을 취급하는 인물은 치외 법권의 특혜를 누리고, 교황과 황제는 공동의 위원회를 통해 국가 교회의 관리를 감독하며 위원회는 해마다 황제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교황의 선거는 로마인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교황으로 선출된 당사자는 교황 즉위 이전에 황제의 특사에게 충성 서약―교황 에우제니오는 이행했다―을 이행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로타르는 스스로 로마에서 최고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그나마 교황과 교회가 인정 받은 특권으로는 교황이 사망할 시에 그 재산에 대한 보호 및 강탈당한 교회의 자신에 대한 북구 및 보호에 대한 조항 밖에 없었다. 이로서 황제가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음을 확인하고, 교황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일로 가톨릭 주교들과 사제들의 지지를 잃게 된다. 이어 이탈리아 랑고바르드 분국의 법령을 재개정하여 다양한 조례를 발표했다.

824년 루도비쿠스는 프랑크 제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국내 노예 무역을 관장할 권한을 포함한 몇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이때 여러 기독교인이 후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하는 코르도바로 판매되었다. 이에 리옹 대주교 아고바르드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유대인들로부터 자금 융통을 받고 있던 루도비쿠스 1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로 교회와 그와의 사이가 틀어졌다. 한편 825년 2월 로타리우스 1세는 루카 백작이었던 보니파초와 함께 코르시카를 공격해 정령했고, 자신을 도와 코르시카 원정에 참전한 보니파초에게 토스카나 변경백과 코르시카 지사에 선임했다.

한편 루도비쿠스는 818년 첫번째 황후였던 히스파니아의 이르멘가르트가 병으로 사망한 후 바이에른과 아르톨프의 공작이며 레겐스부르크의 영주인 구엘프 1세의 딸 유디트 바이에른과 재혼해 딸 기셀라와 아들 샤를을 봤는데 829년 알레만니아와 네우스트리아의 왕에 봉해졌는데 이때 그가 아버지로부터 영토를 하사받을 때 두 형 로타리우스 1세와 루트비히 독일인의 영지를 일부 떼어준 일이 격심한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결국 831년, 833년 로타리우스, 피핀, 루트비히 등은 반란을 일으켜 한때 그는 양위했고 유디트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지지로 834년 기적적으로 복위했다. 이 일은 종내 부자 형제간의 분쟁을 야기하고 프랑크의 국력을 쇠하게 했다. 당초 로타리우스는 두 동생의 지원을 업고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했다. 그러나 830년 10월에 열린 네이메헨 의회는 루트비히 1세를 복위시켰으며, 831년 2월 아헨의 제국 의회가 개입해서 상속령을 정해 제2차 분배에서 로타리우스 1세는 이탈리아만을 배당받았다. 그리고 로타리우스의 북부 로트링겐, 프로방스 등의 영토를 대머리 샤를에게 준다고 명시했다.

831년 피핀은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측근인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사주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화해하였다. 832년 루트비히는 피핀에게서 아키텐 영지를 빼앗아 샤를에게 주었다. 이에 피핀은 강력 반발했고 그의 계비인 바이에른의 유디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로타리우스, 피핀, 루트비히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의 지원을 얻어 거병, 반란을 일으켰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알자스의 지골스하임 부근에서 회의를 열어 다시 아버지인 그를 폐위했다.

로타리우스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사로잡는데 성공, 롤페르트로 끌고갔다가 말렘으로, 말렘에서 메츠로, 메츠에서 다시 수아송까지 끌고 갔다가 수아송의 생메다드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동시에 이복동생 대머리 샤를은 부모에게서 떼어내 아르덴 근처 프륌 수도원에 보냈다. 그러나 834년 3월 루트비히는 다시 황제 지지파들의 지원으로 제위에 복귀했으며 피핀 및 독일인 루트비히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834년 말 로타리우스 1세는 혼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롬바르디아로 패주했다.

835년에는 아들들에 의해 수아송의 한 성에 투옥되었으나 감시병들이 조는 틈을 타서 이들을 베고 탈출하기도 했다. 반란들을 진압함에 따라 837년 아헨 제국 의회, 838년 네이메겐 제국 의회에서 독일인 루트비히의 영토 일부를 떼어 더 많은 영토를 아들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일단 로타리우스, 아키텐의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등은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로타리우스의 경우 그의 명령은 모두 취소되었다. 생드니 대성당에서 아버지가 복위하자 곧 공동 국왕 권리는 박탈당하고, 그의 영역은 이탈리아로 제한되었으며 반 자치화되던 이탈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하위 왕국으로 유지되었고, 로타리우스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의 동의 없이는 여행이 제한되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바이킹들이 북해 연안 지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838년 12월 아키텐의 피핀이 정신질환 등의 질병으로 갑자기 죽자,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는 새로운 분할계획을 세웠다. 그는 바이에른과 그 부근 지역을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주고 그 나머지 부분을 둘로 나눠 동쪽은 로타리우스에게, 서쪽은 대머리왕 카를에게 각각 돌아가도록 했다. 아키텐의 피핀의 죽음 이후 838년 로타리우스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와 화해하였다. 839년 5월 3일 로타리우스는 이탈리아 지역, 프랑크 제국의 동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차기 통치자로 내정되었다. 839년 5월 30일 보름스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와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을 차지했다. 로타르는 이때 롬바르드, 로트링겐, 프로방스,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바이에른을 제외한)를 차지했다. 수개월 후 베네치아의 피에트로 트라도니코( Pietro Tradonico)와 협정을 체결하고 로타리우스의 협약(Pactum Lotharii)이라 이름하였다.

로타르는 황제 칭호를 가질 수 있었으나 817년 7월의 제국 칙령(Ordinatio imperii)에 의해 허락된 프랑크 왕국내 다른 왕들과 공작, 제후들에 대한 종주권은 없어졌다. 839년 로타리우스는 베네치아 주지사로 현지 출신인 피에르토 트라도니코(Pietro Tradonico)와 로타르의 계약(Pactum Lotharii)이라는 이름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840년 8월 하순 메츠에서 병으로 죽어가던 루도비쿠스 1세는 사자를 보내, 그에게 제국 전체의 상징과 휘장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로타리우스 1세를 군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로타르는 부왕이 준 제국의 상징을 근거로 단독 통치자가 될 계획을 세운다. 840년 8월 27일 루도비쿠스 1세가 잉겔하임(잉겔하임암라인)에서 죽은 뒤 로타르는 아헨에서 단독으로 황제가 되고, 프랑크 왕이 되었다. 이에 이복동생 대머리왕 카를과 셋째 동생 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발하여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스트라스부르크의 서약을 체결한 뒤, 로타리우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시민 전쟁이라 부른다.

이때 아키텐의 분국왕이자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군이 합류, 로타리우스를 도와주었다. 로타리우스는 817년의 제국 칙령에서 부여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841년 6월 25일부터 발생한 퐁트누아 전투에서 출정했다.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아키텐 군대가 로타리우스 1세에게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로타리우스 1세와 아키텐인 피핀 2세는 아헨에서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격파당하고 도주했다. 7월 25일 동생인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에게 최종적으로 패했다. 로타르는 곧 아헨(Aachen)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협상을 하게 된다.

842년 2월 14일 두 동생인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동맹을 결의한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게르만어로, 대머리 카를은 갈로-로망어로 조약문을 읽었다 한다.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의 힘이 너무 강하여 로타르 1세는 가져갈 수 있는 보물을 모두 챙긴 뒤, 자신의 수도 아헨도 버리고 달아났다. 로타르 1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센 군대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왔고, 한때 로마 시내를 포위하기도 했다. 결국 교황청의 주도하에 사라센 군대를 겨우 몰아냈다.

북쪽으로 바이킹 남쪽으로 이슬람 해적들의 노략질이 심화되면서 내전 전개 불투명해졌다. 세 형제는 이후 평화 협상을 시도한다. 842년 6월 로타리우스는 두 동생인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를 작센 또는 손 강(Saône)의 한 섬에서 만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다. 이때 각자의 입장을 대표할 성직자 40명씩을 동원해 배석시키기로 정하게 되었다. 842년 11월에 로타리우스는 코블렌츠에서 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 카를과 재협상하였으나 실패했다. 협상은 여러 번 결렬되었으나 로타리우스가 패하면서 결국 843년 8월 10일에 세 형제는 843년 프랑스 북부의 베르됭에서 만나 프랑크 왕국을 삼분하는 베르됭 조약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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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리우스 1세는 황제 칭호와 함께 제국의 중앙 부분을 가졌으며, 루트비히 2세는 제국의 동쪽 부분인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지역을 가졌다. 그리고 샤를 2세는 제국의 서쪽 지역인 네우스트라시아와 피핀 2세에게서 빼앗은 아키텐 지역 등을 가졌다.

이때 이탈리아는 여전히 롬바르디아 왕국이란 명칭으로 중프랑크 왕국으로 편입되었다.이리하여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혼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846년, 남부 이탈리아를 습격한 사라센인들이 로마를 위협했다. 로타리우스 1세는 아들 루도비코 2세를 로마로 파견해 격퇴하게 했지만 오히려 사라센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847년 베네벤토 일대를 유린하고 로마로 쳐들어가려는 사라센에 대항할 원정군을 재조직하고, 848년 루도비코 2세를 시켜 사라센을 물리치게 했다. 루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로 내려가서 로마의 방비를 강화하고 사라센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850년, 교황 레오 4세는 로타리우스 1세의 요청에 따라 루도비코 2세에게 기름을 부어 신성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로 세웠다.

그 후 바이킹의 연이은 침략을 막아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해 골머리를 앓던 그는 855년 중병에 걸렸고, 회복할 기미가 없자 9월 23일 프룀 수도원에 입회해 수도자가 되었다. 죽기 전 장남 루도비코 2세에게 이탈리아 왕좌와 황제 직위를 물려주고, 둘째 아들 로타르 2세를 로타링기아 왕으로 삼아 프리실란트 등 북해와 라인강과 뫼즈 강, 그리고 쥐라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맡겼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 샤를에게 프로방스, 리옹, 부르고뉴, 트란스쥐라나를 맡기고 프로방스의 왕으로 세웠다. 로타리우스가 죽자 중프랑크 왕국은 프륌 조약을 통하여 그의 세 아들인 장남 루트비히 2세, 차남 로타르 2세, 막내 샤를 2세(프로방스의 샤를)에게 또 다시 분할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와 신성 로마 황제 칭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 샤를 2세는 부르군트를 나누어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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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년, 로타르 2세는 본처 테오베르가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애첩 발드라다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는 이를 협조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대가로 제네바, 로잔, 시옹을 접수받았다. 862년, 루도비코 2세와 로타르 2세는 아헨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뒤 주교들로부터 테오베르가와 로타르 2세의 결혼을 무효화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로타르 2세는 즉시 테오베르가와 이별하고 발드라다와 결혼했다.

863년 프로방스의 샤를이 후계자없이 사망하자, 로타르 2세보다 먼저 프로방스를 점령해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로타르 2세가 이에 불만을 품고 군대를 이끌고 프로방스에 진군하자, 내전을 피하기 위해 트란스쥐라니아 일부를 로타르 2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몇 달 후,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로타르 2세와 테오베르가의 결혼 무효화와 발드라다와의 재혼을 지지한 주교들을 해임하고 로타르 1세와 발드라다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에 로타르 2세와 루도비코 2세는 군대를 동원해서 로마를 포위하고 교황을 압박했지만, 교황이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는데다 전염병이 돌자 결국 평화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865년, 파비아에서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겠다고 선포하고 북부 이탈리아의 전사들에게 루세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병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아 출진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황후 엥겔베르가와 함께 캄파니아 일대를 여행했다. 이에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조속히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지 않으면 무슬림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하고 로마까지 몰아붙일 테니 서둘러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867년 봄, 비로소 바리 토후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한 마테라를 공략한 뒤 철저히 파괴하고 오리아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무슬림이 장악한 바리와 타란토와의 교통로가 끊어졌다. 이후 베네벤토에 도착한 직후 868년 겨울을 베네벤토에 머물면서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바리 토후국을 향한 합동 공세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당시 그에게는 마땅한 해군이 없었기에, 해안도시인 바리의 해상을 봉쇄하려면 동로마 함대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마침 바리 토후국이 아드리아해 연안을 연이어 습격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던 바실리오스 1세는 루도비코 2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확실히 얻기 위해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자신의 딸 에르멩가르다와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와 결혼시키고자 했다.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면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사이가 돈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 함대 사령관이 루도비코를 '프랑크의 왕'이라고 부르자 루도비코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는 바람에 어그러졌다. 루도비코는 바실레우스 즉, 로마 황제라는 칭호로 불러주기를 원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이 시기에 루도비코 2세가 바실리오스 1세에게 보낸 편지가 유명하다.영어 번역 바실리우스 1세와 '로마인'의 정의에 대해 보이는 극명한 관점 차이가 돋보이며,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은 그가 죽은 이후로도 천 년 가까이 남아 유럽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단 이 편지는 루도비코 2세 본인이 승인한 내용이긴 해도 그가 직접 쓴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 저자는 로마 시민이자 로마 교회 사서였던 아나스타시우스라고 한다.

869년, 형제 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로타르 2세는 생전에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서프랑크 왕국샤를 2세동프랑크 왕국루트비히 2세는 교회로부터 사생아로 간주된 아이들의 영지 상속을 인정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로타르 2세의 영지를 분할하고 870년 메르센 조약을 체결해 분할을 확정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두 삼촌이 자신을 무시하고 분할을 진행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교황은 랭스의 힌크마르 주교에게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를 찾아가서 루도비코 2세의 입장을 고려하라고 권하게 했다. 그러나 힌크마르 주교는 자신의 주권자인 샤를 2세를 따르기로 하고 교황의 바람을 무시하고 메르센 조약을 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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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년 2월, 동로마 함대의 지원에 힘입어 바리 토후국을 정복했다.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는 바리 토후국이 지배하던 아풀리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기를 바랐지만,그가 그다지 유순하지 않은 가신이라 여기고 아풀리아를 넘겨주길 거부했다. 게다가 베네벤토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켜서 베네벤토를 완전히 통제하려 했다. 그러자 아델치스는 베네벤토에 머무는 황제 일행을 습격했고, 황후와 함께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40일간 억류되었던 황제는 다시는 베네벤토로 오지 않을 것이며 랑고바르드인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야 풀려났다. 이때 루도비코 2세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샤를 2세는 소문을 믿고 조카의 영지를 취하고자 군대를 보냈다가 뒤늦게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자 군대를 물렸다.

그 후 로마로 이동한 직후 873년 카푸아에서 사라센을 격파했다. 그러나 남부 이탈리아를 통제하려는 그의 시도는 영주들의 거듭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북상하다가 875년 8월 12일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지방의 게디 시에서 사망했고, 일주일 후 밀라노의 산탐브로지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샤를 2세는 즉각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프로방스와 이탈리아 북부 전역을 확보하고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했다.

이후 루트비히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가 사망하면서 루트비히 2세의 장남 카를만이 롬바르디아 왕국을 물려받았으나 샤를 2세가 이탈리아를 정복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간의 분쟁이 가시화되고 형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가 죽자 샤를 2세는 황제라는 명분으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을 노골적으로 탐내어, 조카인 루트비히 3세는 숙부의 야욕을 저지하였고, 샤를 2세는 병사한다.

샤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가 신성 로마 제위를 물려받으려 했으나 이탈리아로 가기를 망설였고 카를만은 상속을 명분으로 이탈리아를 차지했으나 교황이 황제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둘은 비슷한 시기에 죽게 되었다. 카를만은 동프랑크의 영지들과 이탈리아, 제위를 동생 카를 3세에게 물려주고 880년 리베몽 조약을 맺게 된다. 그런 다음 카를 3세는 서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한 샤를 3세가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국왕직을 대리하게 되어 887년 프랑크 왕국을 다시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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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카를 3세가 무능력한 인물이었기에 왕실 내에서 이에 반발로 내분이 일어나 1년 만인 888년 강제 퇴위하고 이후 프랑크 왕국은 완전히 분열된다.

1.4.2. 혼란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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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년 카를 3세가 폐위된 후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된다. 이탈리아 왕국 또한 별도로 분리된 후 왕국의 제후들과 주교들에 의해 파비아에서는 다시 후임 이탈리아 군주를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프리올리 변경백인 베렌가리오는 여러 주교들을 설득했다. 당시 서프랑크의 왕 역시 말더듬이 왕 루이 2세가 죽고 아들들이 어렸으므로 주교들과 귀족들이 왕을 선출하는 형태가 됐다. 이때 베렌가리오와 스플레토 공작 귀도 3세 또한 각각 모계로 부터 카롤링거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귀도의 경우 랭스의 주교인 폴크가 친척인데다가 그의 지원으로 서프랑크 왕위에 대한 후보로 올 수 있었고, 서프랑크의 왕으로 선출되는 듯 하였으나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베렌가리오나 귀도 대신 외드를 선택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갔다.

888년 1월 6일 롬바르드의 파비아에서 개최된 제후와 주교단 특별회의에서 베렌가리오와 귀도는 다시 이탈리아의 왕위에 대한 경합을 겨루었으나 일부 이탈리아 귀족들에 의해 베렌가리오가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출, 공식 승인되었다. 즉위 직후 베렌가리오는 동프랑크 왕 아르눌프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동시에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그의 봉신이 되었다. 그러나 888년 여름, 귀도 3세의 군대는 브레시아 강에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의 군대와 맞붙었고, 10월 알프스 산맥 근처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결집하여 스스로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주장했다. 888년 12월 파비아에서 열린 귀족들, 주교들의 선거에서 귀도 3세는 다시 이탈리아의 왕으로 당선되었다.

888년 12월 연말, 교황 스테파노 5세는 파비아에서 귀도 3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공인하였다. 그러나 베렝가리오 1세는 불복했고, 889년 1월 초 에밀리아로마냐의 트레비아 강변에서 베렝가리오 1세의 군대를 꺾고, 1월 주현절(예수 공현 대축일) 티베르 강가에서 베렝가리오 1세의 군대를 최종적으로 격파했다. 한편 그는 주교들에게도 지지를 구했다. 파비아의 주교 시노드는 귀도를 지지하는 대가로 여덟 장의 계약서를 쓰게 했다. 시노드 주교는 귀도 3세에게 그때까지 교회와 수도원, 교황령에서 약탈한 재산을 모두 양도하는 것과 교회의 보호 및 관리, 사라센의 이교도들로부터의 보호를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귀도 3세는 즉각 응했고 시노드 주교는 이탈리아의 다른 주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889년 2월 16일 파비아의 포 강변 지유레어 이탈리아의 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스폴레토 공작령과 카메리노 후작령은 아들 귀도 4세에게 넘겨주었다. 889년 3월 여동생 로틸드(Rotilde)의 남편인 토스카나 후작 아달베르토 2세 등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귀족들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 베렝가리오를 꺾고 이탈리아의 패권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귀도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탈리아 중부 티베르 강 이남,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로 한정되었다. 5월 초 그는 아들 람베르토를 이탈리아의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890년 10월 15일 그는 자신의 영지인 프리울리에는 자신의 측근인 왈프레도를 프리울리 후작이자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통치하게 했다. 왈프레도는 그가 죽는 896년까지 베렌가리오의 대리인으로 프리울리를 통치했다.

891년 2월 21일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귀도는 즉위와 동시에 "새로운 프랑크 왕국(Renovatio Francorum)"을 선언하였다. 자신이 황제로 즉위한 2월 21일, 귀도 3세는 왕권을 확정하고자 바로 교황 스테파노 5세에 의해 아들 람베르토 2세에게 이탈리아 왕관을 주고, 람베르토 2세를 공동 황제 겸 이탈리아의 공동 국왕으로 선포하였다. 즉위한 후 귀도 3세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선대의 카피툴라리아(Capitulary)를 존중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 만족하여 다른 군주, 영주들의 영지를 넘보지 않았고, 또 북부 이탈리아를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영향력은 프리울리, 제노바 등의 지역을 비롯한 이탈리아 북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중, 남부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891년 9월 14일 교황 스테파누스 5세가 사망하고 10월 6일 새로 즉위한 교황 포르모소와 계속 갈등하였다. 교황 포르모소는 귀도와 아들 람베르토 2세를 불신했는데, 결국 교황 포르모소는 귀도 3세와 아들 람베르토 2세를 적법한 군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교황 포르모소는 892년부터 동프랑크의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아르눌프는 귀도 3세에게 제국의회에 출석할 것을 요구하나 귀도 3세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아르눌프는 수시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이탈리아를 공격했고, 그의 봉신이 된 부르고뉴의 라울과 자신의 아들 츠벤티볼트를 시켜 이탈리아를 공격하여 그를 괴롭혔다.

또한 귀도는 외드와 대립하던 서프랑크의 단순왕 샤를 3세를 보호하였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요구하던 소년 단순왕 샤를 3세 생쁠와 893년 1월 28일 동맹을 맺었으나 샤를 3세 생쁠은 아직 소년이었으므로, 귀도는 서프랑크 왕국의 일부 주교들을 통해 샤를을 보호하게 하였다. 893년 봄 파비아에서 지형을 이용해 병력을 매복해 있다가 아르눌프의 군대를 격퇴했다. 그러나 893년 여름에는 아르눌프의 서자 츠벤티볼트가 아르놀프의 명령으로 베렌가리오를 돕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로마까지 쳐들어와 한때 피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병력 수가 충분치 않자 베렌가리오와 츠벤티볼트는 병사를 모집하지만 자원하는 이가 없어 어려움에 봉착한다. 귀도 3세는 츠벤티볼트에게 막대한 데나리온 돈을 주어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893년 가을 츠벤티볼트는 다시 이탈리아 중부를 공략하여 그를 괴롭혔다.

894년 아르눌프는 자신의 봉신이기도 한 베렝가리오 1세를 이탈리아 국왕으로 봉했고, 베렝가리오 1세는 다시 동프랑크 왕국의 아헨으로 갔다. 그 해 아르눌프는 다시 이탈리아를 공략하였다. 894년 가을 출정한 아르눌프의 군대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베렝가리오 1세의 군대의 도움을 받아 베르가모와 밀라노, 트렌토, 파비아를 줄줄이 함락시키고 그에게 스폴레토로 은퇴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곧 겨울이 되면서 혹한과 기상 악화에 시달리면서 아르눌프의 군대는 몇주 후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로 되돌아갔고 귀도 3세는 곧 아르눌프-베렝가리오 군대에게 함락당했던 잃어버린 도시들을 모두 회복하였다. 귀도 3세는 자신의 요새화된 성에서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전투를 치를 계획을 세우고 아내 아겔트루드와 아들 람베르토를 피신시킨 뒤, 자신은 타로 강을 넘어 스폴레토로 갔다. 그러나 귀도는 894년 12월 12일에 피아첸차에서 파르마로 가던 중 갑자기 사망하였다.

공동통치자였던 아버지 구이도가 병사하자 유일한 황제이자, 이탈리아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아버지 구이도 3세가 죽자 마자 아버지 구이도의 경쟁자였던 베렌가리오 1세는 다시 롬바르디아의 수도 파비아를 점령했지만 람베르토는 자신의 모후와 측근들의 강력한 지원으로 베렌가리오 군대를 다시 쫓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894년 초부터 아르눌프는 개인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의 포 강까지 공략하였다. 람베르토는 아르눌프의 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그는 나이가 젊었지만 어머니 아겔트루드가 섭정 노릇을 하였다. 아겔트루드는 철저한 반(反) 독일주의자이기도 했다. 람베르토와 아겔트루드는 교황의 승인을 얻기 위해 로마로 갔다. 람베르토 모자가 로마로 갈 무렵 베렌가리오가 파비아를 점유한다. 람베르토는 다시 교황 포르모소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요구하지만 포르모소는 제관을 아르눌프에게 수여했고, 람베르토 일행을 산 탄젤로 성에 감금해버린다.

그는 집권기간 내내 이탈리아를 공략하려는 아르눌프와 베렝가리오 1세와 전쟁하였다. 토스카나의 아달베르토 2세는 파비아에 있으면서 베렝가리오 1세 군대를 공격하는 저격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896년 무렵에는 람베르토를 배신하고 아르눌프의 편에 서게 된다. 893년부터 아르눌프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람베르토는 선봉으로 아르눌프 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894년 부왕 구이도 3세가 죽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아르눌프의 침공은 계속되었고, 교황 포르모소에 의해 896년 2월 21일 황제위를 박탈당했다.

894년 귀도가 죽자 아르눌프는 이탈리아의 군주임을 주장했고,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했으며 베렝가르를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명하였다. 896년 아르눌프의 군대는 베렌가리오의 도움으로 그해 3월 토스카니와 롬바르디아를 확보한다.

895년 1월 람베르토는 자신의 수도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같은 해에 그의 형제 구이도 4세는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얻어 스폴레토 지역을 점령했다. 람베르토는 정식 황제로 승인해줄 것을 촉구했고, 랭스의 풀크 주교는 침묵했다. 895년 9월 교황의 사절은 다시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했다. 10월 아르눌프는 두 번째 이탈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람베르토 2세는 아르눌프 군과의 전투를 회피하였고, 아르눌프는 토스카나의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를 모으고 있었다. 이때 람베르토 2세의 측근이었던 토스카나의 아달베르토 역시 아르눌프의 편에 가담했다. 이들은 람베르토와 아겔트루드를 찾아내려 했고, 896년 2월 21일에는 로마를 점령했다. 바로 포르모소에 의해 제관은 아르눌프에게 수여되었고, 람베르토는 황제직에서 면직이 선언되었다. 람베르토는 어머니 아겔트루드와 함께 스폴레토로 도주했다. 하지만 아르눌프가 뇌졸중과 중풍을 앓고 있었으므로 아르눌프의 군대는 아르놀프의 서자 라톨드를 이탈리아 북부에 남겨두고 곧 동프랑크로 되돌아갔고, 베렌가르의 영향력은 밀라노에까지만 미쳤다. 또한 람베르토 2세는 곧 풀려났다. 이탈리아는 사실상 람베르토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파비아를 재탈환하여 마기눌프 등을 참수하였고, 4월 4일 교황 포르모소가 선종하자 황제관 박탈에 앙심을 품고 있던 람베르토는 어머니 아젤트루데와 함께 다시 로마를 방문한 후 자신들의 측근들을 시켜 포르모수스의 묘소를 파헤치기도 했다. 한편 람베르토는 아르눌프에게 협력했던 밀라노의 백작 마기눌프 등을 파비아에서 참수형에 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지지층의 이탈을 막기도 했다. 이어 교황 스테파노 6세를 사주하여 죽은 포르모소를 재판하는 시노드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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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파울 라운렌스 作, 1870년

람베르토 2세와 교황 스테파누스 6세는 교황 포르모소의 시체에 교황 옷을 입히고 교황자리에 앉힌 뒤 교황 포르모소의 교황직을 폐하고, 그가 시행한 교회 훈령과 포르모소가 생전 수여한 성직자 임명을 전부 무효라고 선언했다. 곧이어 스테파누스는 포르모소의 시체를 로마시내 거리로 끌고 다녀 조리돌림을 한 뒤 테베레 강에 던져 빠뜨리도록 명령함으로써 그 재판을 끝냈다. 하지만 시체 시노드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평민이 스테파노 6세와 람베르토가 교황의 시신을 모욕했다며 897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더구나 스테파노 6세도 포르모소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었기에 결국 이 반란으로 퇴위당하였다.

동시에 10월과 11월 베렝가리오 1세에게 사람을 보내, 코모(Como) 호수에서 계약을 체결, 베렝가리오가 차지하고 있던 영역과 자신이 차지한 파비아 이남 지역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이탈리아를 분할하여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하고, 포 강에서 휴전을 선언하였다. 람베르토 2세와 베렝가리오 1세는 또한 베르가몬을 공유하기로 약속하고 베렌가리오 1세의 딸 기셀라와 결혼하기로 정략결혼동맹 약속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람베르토와 베렝가리오 1세의 일시적인 휴전과 정략결혼 동맹계획은 깨졌는데, 크레모나의 작가 리우르프란트는 이탈리아가 두 왕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이는 이런 저런 말을 낳다가 람베르토와 베렝가리오 1세의 동맹관계는 깨지게 된다.

람베르토 2세는 아버지 구이도 3세의 "새로운 프랑크 왕국(Renovatio Francorum)"이라는 정책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선대 프랑크 왕들의 법령 역시 계승하였다. 람베르토 2세는 또 824년의 프랑크 황제 로타르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 부활을 선언했는데, 교황 요한네스 9세는 로타르의 로마 헌장을 다시 승인하여, 교황 선출 때 황제의 사절을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확정하였다. 898년 초, 람베르토 2세는 아버지 구이도의 정책을 명문화한 우티넨의 로마법(Lex Romana Utinensis)을 제정하였다. 895년 5월 람베르토는 라벤나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여 자기를 적법한 신성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와 황제관 수여 무효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북동부는 여전히 베렝가리오 1세의 세력이 강건했고, 그는 토스카나의 반항적인 아달베르토를 상대해야 했다.

무엇보다 요한 9세가 의회에서 람베르토의 뜻에 거슬러 포르모소의 신원을 회복시키며 시체 시노드의 판결을 뒤집는다. 의회의 성직자들은 스테파노 6세의 재판과 성직자 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 교령들을 파기하고, 스테파노 6세에게 폐위당한 성직자들을 복권시킨다.

898년 초가을, 그는 베렝가리오 1세와 교전했지만 패하였다. 그러나 베렝가리오는 파비아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했고 여전히 이탈리아 중남부는 람베르토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898년 10월 15일 사냥을 위해 파비아에 갔다가 밀라노 남부의 마렝고로 가서 사냥하였다. 사냥 도중 그는 피덴차의 보르도 산 도미노(Borgo San Donnino)에서 경쟁자가 보낸 자객에 의해 말 위에서 떨어져 낙마한 뒤 암살되었다. 크레모나의 주교 리우르프란트는 마기눌프의 아들 우고를 암살자로 지목했다.

이제 베렌가리오가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국왕이 되었지만 899년 마자르 족 군사 5천명이 여러 분대로 나뉘어 이탈리아 곳곳을 점령, 약탈했다. 이들은 포 강변을 노략하였으며 이후 베네치아에서 집결하려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베렝가리오 1세는 1만 5천 명의 이탈리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 브렌타 강변에서 마자르 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마자르 족은 이들에게 군대를 물러달라고 간청했고, 베렌가리오는 이들을 거의 무찔렀다고 보고 만만하게 봤다. 이탈리아 병사들이 갑옷을 벗고 편히 쉬던 중, 숲에 숨어있던 나머지 마자르족 군사들이 이탈리아 군을 급습하였다. 급습당한 이탈리아 군사들 중에는식사 중 입에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군은 크게 궤멸되었고 마자르족은 되돌아가 판노니아 일대를 공략하게 된다.

899년 혹은 900년 베렝가리오 1세는 스폴레토의 구이도 가문을 몰아내고 스폴레토 공작이 된 스폴레토의 알베리크 1세를 자신의 대리인이자 로마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내정과 외정 등에 신경써야 했던 베렝가리오는 자신을 대신할 대리인을 구이도 가문을 몰아낸 알베리크를 선정한 것이다.899년 12월 8일 주군인 독일의 아르놀프가 사망하였고, 그의 어린 아들인 루트비히 4세가 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베렌가리오는 루트비히 4세에게 봉신 맹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렝가리오 1세를 반대하는 귀족들이 다른 군주를 초청하여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하는 등 이탈리아의 혼란기가 계속되자 알베리크와 그의 처 마로치아, 아들 알베리크 2세 등이 군주가 아님에도 로마 시내와 주변지역의 실권자가 되고 교황청 인사까지 개입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 베렝가리오 1세의 능력을 의심한 이탈리아 귀족들은 프로방스(저지 부르군트)의 국왕이자 카롤루스 가문 직계인 루이 3세에게 베렝가리오 1세를 몰아내고 대신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달라 요청한다. 그밖에 북부 이탈리아의 일부 귀족이 루도비쿠스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달베르토 등의 사자는 루도비쿠스의 조카를 만나 의사를 전달한 뒤, 다시 루도비쿠스를 알현하고 추대 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무능한 베렝가리오 1세의 통치 아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은 황폐화되었다. 루도비쿠스는 900년 루도비쿠스는 파비아에서 열린 이탈리아 귀족회의에서 귀족들에 의해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베렝가리오의 군대를 무찌르고, 900년 9월 민치오에서 베렝가리오의 군대를 패주시켰다. 롬바르드족의 옛 수도인 파비아의 상 미셀 마조레에서 10월 12일 롬바르드의 철왕관을 수여받고 이탈리아 왕에 올랐다. 그는 계속하여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 베네딕토 4세를 알현, 교황 베네딕토 4세에 의해 이듬해 2월 15일 또는 2월 22일에 축성받고 신성로마제국황제의 대관식도 치렀다. 899년 그는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6세의 딸 안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902년까지 그는 마자르 족의 이탈리아 약탈을 물리치지 못했고, 루도비쿠스를 지지하던 일부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다시 베렝가리오의 편으로 돌아섰다. 902년 베렝가리오 1세는 그에게 프로방스로 돌아가라고 강요했고, 루도비쿠스는 거절했다. 902년 그는 베렝가리오에게 패하여 영원히 이탈리아를 떠나는 서약을 하고 프로방스로 물러났다.

904년 이탈리아를 재공략하여 롬바르디아의 북서부를 획득하였다. 905년 루도비쿠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와 달라는 이탈리아인 귀족들의 제의를 받았다. 그에게 이탈리아 방문을 제의한 귀족들 중에는 이브레아 후작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 1세도 있었다. 루도비쿠스는 이탈리아의 공략을 준비한다. 다시 한번 그는 파비아에서 베렌가리오 1세 군사를 물리치고 입성하였으며, 베로나 시와 주교 아달하르트(Adalard) 등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905년 이브레아의 후작 아달베르토 1세가 루도비쿠스의 이탈리아로 초청했다. 905년 7월 그는 다시한번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는데, 파비아에서 베렝가리오의 군사를 물리치고 베로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이에른 군대의 도움을 받은 베렝가리오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베로나 시내에서 베렝가리오의 군사에게 위치가 노출된 그는 성 페트로의 교회의 성소 안에 숨었지만, 붙잡혀 베로나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905년 7월 21일 그는 서약을 깬 죄목으로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그래서 그의 별명이 맹인왕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황제의 지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것이 카롤링거 왕조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것이었고 실패로 끝났다. 베렝가리오는 그가 다시는 이탈리아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를 풀어주었다.

루이 3세를 완전히 몰아낸 베렌가리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다. 잠시 905년까지는 이탈리아의 왕 자리는 루트비히 3세였으나, 바이에른 군대의 도움으로 그해 7월 베렌가리오가 승리, 루트비히를 생포하였다. 905년 7월 12일 루트비히는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7월 21일 베렌가리오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쫓겨났으며, 베렌가리오는 이탈리아 왕과 황제의 지위를 받았다. 904년에는 베르가모를 점령한 무슬림들을 추방하였다. 한편 베렌가르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북쪽에 한정되었다. 토스카나 후작 아달베르토 2세(Adalberto II)와 카메리노의 후작 알베리코(Alberico)는 베렝가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베렝가르를 지지하는 대신 자신의 도시에 대한 자치권을 요구했고, 베렝가르는 이를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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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가르는 915년 1월 이탈리아 남부를 침략한 무슬림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교황 요한 10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사라센을 염려하였고, 베렌가르를 맹주로 하는 이탈리아 제후들, 귀족들의 동맹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베렌가리오는 일부 용병을 고용해야 하는 등, 많은 군사를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라치오와 캄파니아에 쳐들어온 사라센군을 가리야노(Garigliano)에서 기적적으로 격퇴하는데 성공한다.(가리야노의 전투) 그해 11월 교황 요한네스 10세에 의해 로마에서 정식으로 축성받고 대관식을 올렸다. 그해 베렌가리오의 장녀 베르타가 브레시아 산 살바토레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베르타의 이모 중 한명이 살바토레 수녀원의 수녀였고 베렌가리오의 딸 베르타는 이 인연으로 살바토레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가 원장이 되었다. 그는 살바토레 수녀원을 전폭 지원하였다. 황제로서 베렌가르는 이탈리아 내 주교좌, 대주교좌의 선거에 개입하려 했다. 920년 리에 교구의 대주교인 스테판 대주교가 죽자, 베렌가르는 로트링겐 출신 쾰른 대주교 헤르만 1세를 리에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다. 이는 동프랑크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물을 세우려 든다며, 리에 지역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베렌가리오는 스폴레토의 베르틸라와 결혼하였으나 910년 베르틸라와 이혼했고, 베르틸라는 계속 자신의 황후로서의 지위를 요구했다. 결혼 생활 후반기간 중 베르틸라는 불륜관계를 가졌고,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베렌가리오는 915년 12월 베르틸라를 독살한다. 914년 또는 915년 12월 베렌가리오는 비잔틴 제국의 공주 안나와 재혼한다. 안나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6세와 황후이자 후일 여제가 되는 조에 차우차이나의 딸이었다. 이 결혼에서도 자녀가 몇 명 태어났지만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915년 12월에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한 마자르 족을 설득, 매수하여 신속하게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 취임 이후의 베렌가리오의 영도력에 대해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그의 정치적 무능력과 통치기간 중의 혼란, 해안가로 들어오는 이민족과 해적의 침략을 제대로 방어, 격퇴하지 못한 혐의로 수시로 소환하려 하였다.

900년대 이후 그는 마자르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탈리아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 등은 마자르 용병을 고용해서 돈을 지불하느라 자신의 가족과 이탈리아 제후들에 대한 보조금을 중단한 것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의 사주 하에 이탈리아의 주교들은 921년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를 이탈리아로 초청했다. 아달베르토는 루트비히 3세를 격퇴한 이후부터 그에게 반기를 들었 고, 내부의 적의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외손자 베렌가리오 2세 역시 루돌프에게 선동되어 그에게 공공연히 맞섰다. 베렌가리오 1세가 고용했던 마자르 족 용병들은 베로나를 약탈하여 말썽을 일으켰다. 이후 반란이 일어났고 922년 봄 베렝가리오에 반대하던 귀족들은 부르고뉴 출신 루돌프 2세 왕을 불러들였다. 922년 피올렌차의 피오랑주올라 다르다에서 루돌프 2세와 교전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그는 시체들 사이에 덮여서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923년 7월 17일 사위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피아첸차에서 루돌프 2세와 교전하였다. 그러나 피아첸차 근처 피오렌추올라에서 루돌프를 따르는 귀족들 및 프로방스 군대와의 교전에서 패배했으며, 그는 사위 아달베르토와 함께 베로나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슈바벤 공작 부르카르트가 루돌프의 부르고뉴 영지를 노리자 루돌프는 곧 부르고뉴로 돌아갔고, 베렌가리오는 루돌프의 병력을 격파하기 위해 파비아에 마자르 족 5천 명으로 구성된 용병부대를 확보, 루돌프가 없는 틈을 타 이탈리아의 왕을 선출하고 도시를 포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베렌가리오가 항복, 퇴각하게 되자, 마자르족 부대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고대 로마의 성벽과 신전 등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파비아 시내는 불에 타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마자르 족의 파괴, 방화 행위로 이탈리아 각 도시의 영주들과 귀족들은 용병들을 동원한 베렌가리오를 혐오하게 되었다. 피아첸차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사실상 이탈리아 왕이 베렝가르에서 루돌프로 바뀐 것으로 인식되었다.

898년에 베렝가리오의 부계쪽 먼 친척이기도 한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와 결혼했던 그의 딸 기셀라는 913년에 사망했고, 아달베르토는 바로 재혼했다. 이들 사이에서는 외손자 베렌가리오 2세가 태어난다. 베렌가르는 아달베르토 일족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재혼한 후의 아달베르토는 그의 내부의 정적 중의 한 사람으로 돌변한다. 한편 924년 초, 베렌가르는 파비아에 머무르면서 다시 이탈리아를 탈환하려 노력했지만 924년 마자르 족이 파비아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베렝가르는 마자르 족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가 마자르 족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알려지면서 소수의 지지자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924년 4월 7일 새벽, 전쟁 중 피아첸차의 막사에서 기도하던 중, 뒤에서 기습한 자객에 칼에 맞고 살해당했다. 일설에는 베로나에 왔다가 칼에 찔렸다는 설도 있다. 그를 살해한 이는 루돌프가 보낸 자객으로 보지만, 루돌프의 선동 또는 루돌프에게 매수당한 그의 측근들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후 38년 동안 황제의 자리는 사실상 공석이 된다. 962년에야 동프랑크 국왕 오토 1세가 제위에 올랐다..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와 루돌프 2세는 베렝가리오 1세를 물리치고 루돌프 2세는 사실상 이탈리아의 국왕이 된다.

얼마 되지 않아 이탈리아 귀족들은 루돌프 2세에게 등을 돌렸고, 프로방스(저지 부르군트)의 섭정으로 있던 아를 백작 위그가 이탈리아를 통치해주기 바랐다. 926년 루돌프 2세의 장인인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2세가 루돌프 2세를 지원하려고 갔으나, 그는 노바라 근처에서 밀라노 대주교 람베르토[12]의 심복에게 죽임을 당한다. 루돌프 2세는 자기 신변을 지키려 고지 부르군트로 돌아가고, 같은 해 위그는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다.

프로방스 국왕 루이 3세가 죽자 위그는 프로방스의 정통 국왕이 되려고 서프랑크 국왕 라울과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지만, 이미 프로방스는 루이 3세의 아들 샤를 콩스탕틴이 실권을 잡고 있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문에 위그는 이탈리아의 통치에만 집중하게 된다. 위그는 자기 아들 로타리오 2세를 차기 왕으로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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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2년 위그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옛 부인을 버리고 다시 결혼하려 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새 신부가 교황 세르지오 3세의 정부로 창부정치로 유명한 로마 귀족 마로치아였다. 마로치아의 전 남편 중에 위그의 이부형제가 있어 가톨릭 교회법상 위그와 마로치아는 인척으로 돼버려서 결혼이 금지되었다. 위그는 포기하지 않고 인척 관계를 지워버리기 위해 자기 이부형제들을 제거하려 했다. 노력 끝에 위그는 마로치아와 결혼할 수 있게 되지만 이번에는 마로치아가 초혼하고 낳은 아들인 알베리코 2세가 로마의 폭도들을 선동해 새아버지 위그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고 로마를 점거한다. 위그는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마로치아는 투옥되어 937년 옥사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위그는 외교 문제에 집중한다. 933년 위그는 고지 부르군트의 루돌프 2세에게 프로방스(저지 부르군트)를 양도한다. 이로써 고지와 저지 부르군트가 통일되고 아를 왕국이 세워진다. 대신 루돌프 2세는 자신의 이탈리아 왕위를 포기한다. 그리고 루돌프 2세는 딸 아델라이데를 위그의 아들 로타리오 2세에게 시집보낸다. 또 위그는 로마를 점거한 알베리코 2세와 타협하고, 알베리코 2세는 위그의 딸과 결혼하기까지 한다.

위그는 자기 가족과 친구들에게 되는대로 관직이나 토지를 갖다주는 등 온갖 특혜를 주었는데, 이탈리아 귀족들의 눈에는 이것이 아니꼽게 보였다.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의 귀족들을 등에 업고 자기 처삼촌 위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한다.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는 독일 왕국으로 피신하여 오토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된다. 945년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는 오토 1세로부터 군대를 얻어 다시 이탈리아로 복귀하여 위그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위그를 아를 왕국으로 추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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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는 947년 죽을 때까지 명목상으로 이탈리아 국왕 작위를 갖고 있었고, 그의 아들 로타리오 2세도 명목상 이탈리아의 국왕이었지만, 실권은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에게 있었다.


1.4.3. 독일 왕국에 복속되다[편집]

950년 로타리오 2세가 독살당하자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는 베렝가리오 2세로서 정식으로 이탈리아 왕위에 오른다. 베렝가리오 2세는 아들 아달베르토를 공동 군주로 세운다. 그리고 전임 국왕 로타리오 2세의 부인 아델라이데를 자기 아들 아달베르토와 결혼시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아델라이데는 이에 질색한다. 베렝가리오 2세는 아델라이데를 투옥하지만, 한 백작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출한 아델라이데는 독일 왕국오토 1세에게 보호를 간청한다. 아델라이데의 요청으로 951년 오토 1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한다.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베렝가리오 2세에게 등을 돌려 오토 1세를 지지하였고, 오토 1세는 이탈리아 국왕 대관식을 치르고 파비아에서 아델라이데와 결혼한다. 결국 955년 베렝가리오 2세와 아달베르토는 오토 1세의 봉신이 되어 조공을 바쳐야 했고 프리울리 변경백국을 양도해야 했다. 오토 1세는 프리울리 변경백국을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하사하고 그 영토는 베로나 변경백국이 된다.

하지만 오토 1세가 돌아가자 베렝가리오는 독일의 영향하에서 벗어나 이탈리아 내의 주권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그러나 오토는 베렝가리오의 행보를 감지해 957년에 재차 남하했다. 960년 베렝가리오 2세의 아들 아달베르토가 교황령을 공격하자 오토 1세는 다시 이탈리아로 진군한다. 오토 1세는 파비아를 확보하여 베렝가리오 2세를 퇴위시키고, 로마까지 가서 962년 교황 요한 12세에게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된다. 이로써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사망부터 38년 만에 신성 로마 제위는 부활한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 된다. 10일 뒤에 교황과 오토는 황제가 교황령 독립의 보증인이 되는 ‘오토의 특권’ 조약을 체결했다.

파일:HRR-1_(962).png[13]

한편, 요한 12세는 자신이 손수 대관해준 오토 1세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요한 12세는 마자르족들과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오토 1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촉구한다. 요한 12세는 코르시카에서 아달베르토와도 협상을 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963년 오토 1세는 로마로 돌아와 종교 회의를 소집하여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 레오 8세를 선출한다. 964년 베렝가리오 2세는 오토 1세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가 966년 밤베르크에서 옥사한다.

하지만 오토 1세가 요한 12세를 폐위하고 레오 8세를 세웠다는 소식에 분개한 로마 시민들은 레오 8세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고 황제에 의해 폐위된 요한 12세를 다시 로마로 불러들였다. 로마로 귀환한 요한 12세는 즉시 시노드를 소집하여 레오 8세를 대립교황으로 규정하며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요한 12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로마 시민들은 레오 8세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공석이 된 교황좌를 채우기 위항 새로운 교황을 찾기에 나섰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은 당시 민병대의 지지를 받고 있던 베네데토를 교황 후보로 내세웠고, 베네데토는 이후 베네딕토 5세로 선출되었다. 로마 시민들은 본격적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기 전에 대표단을 오토 1세에게 파견해 이와 같은 소식을 알렸으나, 자신이 내세운 교황이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것이 불만스러웠던 오토 1세는 교황 대관식을 진행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오토 1세의 답변을 받은 로마 시민들은 황제의 경고를 무시하고 964년 5월 33일 베네딕토 5세을 거행했다.

오로지 레오 8세만을 교황으로 인정했던 오토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도시 자체를 초토화시켰다. 베네딕토 5세는 오토 1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물론 로마 병사들을 격려해 저항을 꾀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군의 위세에 밀린 로마 시민들은 결국 항복했다. 시민들은 964년 6월 23일 오토 1세에게 베네딕토 5세를 넘겨주었고, 레오 8세는 정통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베네딕토 5세는 레오 8세가 소집한 시노드에서 심문을 받았고, 베네딕토 5세는 새로운 교황 앞에 엎드려 치욕의 사죄를 했다.

이로 인해 베네딕토 5세는 주교품을 박탈당했지만, 오토 1세의 중재 덕분에 부제품만은 유지했다. 오토 1세는 이 기회에 제국의 인정 없이 교황을 선출할 수 없다는 약속을 로마 시민들에게 받아냈다. 964년 6월 말 베네딕토 5세를 데리고 로마를 떠났다. 아달베르토는 오토 1세가 다시 독일 왕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린다. 오토 1세가 돌아간 뒤 아달베르토는 파비아를 점거하려 하나,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3세가 이를 저지한다. 아달베르토는 파르마 인근에서 부르하르트 3세와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한다. 이탈리아 탈환에 실패하자 아달베르토는 동로마 제국과 기나긴 협상을 하였으나 이것마저 실패하고, 부르군트로 돌아가 은퇴하여 975년에 사망한다.

아달베르토를 격파한 오토는 966년부터 972년까지 몇 차례나 남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967년에 베네벤토와 카푸아의 지배자이며 메조기오르노의 강력한 동맹인 판덜프에게 스폴레토 공작령을 주었다. 968년에 오토는 판덜프에게 맡겨진 바리의 포위를 풀었으나, 판덜프는 보비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군대에게 사로잡혔다.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 또한 이탈리아에 관심을 갖고 980년 이탈리아 국왕 자격으로 측근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남하해 불안정한 로마의 치안을 바로 잡은 후 서유럽의 모든 귀족들과 제후들이 참가하는 궁정을 설치하려고 했다.

또한 남 이탈리아의 병합을 재추진하면서 시칠리아 토후국을 정복하려 했으나 982년 칼라브리아의 아랍인들에게 패하였으며 베네치아를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로 삼으려 노력하다가 사망하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아들 오토 3세 또한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한 정치를 시도했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로마로 옮겼고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하여 팔라티나 언덕에 왕궁을 지었고, 이탈리아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에서 큰 반발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인 브루노 폰 케른텐을 교황 그레고리오 5세로 선출시켰으나 로마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대립교황으로 피아첸차의 대주교 조반니 필라가토를 내세웠다. 오토 3세는 결국 대립교황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세운 교황을 복권시키는데 성공했다.


1.4.4. 교황령[편집]


1.4.4.1. 프랑크 왕국의 예속기[편집]

774년 피핀 3세의 아들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하면서 교황령은 큰 위협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대신 프랑크 왕국의 속령이 되었다. 780년 부활절에 카롤루스는 다시 로마를 방문한다. 그리고 이때 그는 교황령을 스폴레토로 확대하는 약속을 파기하였다.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왕으로서 스스로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지배자가 되고자 했고 그 권리를 교황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이때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과 결혼동맹을 맺을 계획[14]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이탈리아에 있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해하고자 하는 교황의 의도에 대해 지지할 수 없었다. 786년에도 카롤루스는 로마를 방문하는데, 이는 베네벤토 공작의 복종을 받아내기 위한 것으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위에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카롤루스의 행보에서 알 수 있듯, 카롤루스는 교황을 비호하였지만 교회에 복종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하드리아노 1세 선종 후 후임 교황인 레오 3세에게 카롤루스가 보낸 서신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이 서신에서 카롤루스는 스스로를 "모든 기독교인의 지배자요 아버지요 왕이요, 수장이자 지도자"라고 주장하면서 교황이 준수해야 할 노선을 지정하였다. 레오 3세는 이에 대해 카롤루스에게 로마 시의 기를 보내고 카롤루스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시기를 기점으로 하는 연대 산정 양식을 채택하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이를 통해 카롤루스는 기독교의 보호자로 행동하였고 중세의 그 어떤 군주보다도 교회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아직 교황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미 정치적으로도 교황은 동로마 제국이 아닌 프랑크 왕국의 산하에 들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800년, 카롤루스는 4번째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로마를 방문한다. 이는 전임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조카와 로마 교회의 관료들, 귀족들이 귀족 출신이 아닌 레오 3세가 교황이 된 것에 반발하여 그에게 간통죄와 위증죄를 지었다고 비난하면서 799년 4월에 그를 습격, 폭행한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레오 3세는 이 공격을 피해 스폴레토 공작의 도움을 받아 파더보른으로 피신한 후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카롤루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레오 3세와 함께 로마로 입성한 후 사건 주동자들을 색출해 처형시키며 레오 3세의 직위를 복귀시켜 주었다. 레오 3세는 800년 12월 23일에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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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주님성탄대축일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했던 카롤루스는 그 자리에서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미사를 드리던 도중 참석한 로마 귀족 전원이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환호했고 미사는 곧 황제 추대식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카롤루스가 이 사건을 예상했을 가능성보다는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듯 보인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카롤루스는 교황보다 우위에 서서 교황을 지켜주고, 교황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까지도 정해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이 황제의 관을 씌워줬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누려온 교회와 교황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레오 3세에게는 황제를 추대할 법적 권리가 없었고,[15] 그보다 더 정치적 힘이 있었던 교황들도 그처럼 황제를 추대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황제 즉위의 정통성 자체가 상당히 취약했다. 이 점을 인식했는지 카롤루스의 전기문인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카롤루스는 교황이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을 알았다면 결코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그가 이 칭호를 전혀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그 대표적인 논거는 그 당시 카롤루스가 교황에 대해 누리던 우월한 지위를 생각할 때 과연 교황의 황제 추대가 카롤루스의 동의 없이 가능은 한 일이었겠냐는 것. 실제로 카롤루스는 황제 추대에 화를 냈다고는 하지만, 이후 그 직위를 인정받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도 전쟁을 벌이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새침데기 그야 자기 쫄따구가 준 걸 딴 놈에게 빼앗기면 꼴불견이잖아[16]

이 추대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본 것은 교황이었다. 이 추대가 선례가 되면서 교황은 새로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임명하고 제관과 홀을 수여할 권리를 얻었다. 이는 이전의 그 어떤 교황도 누리지 못한 엄청난 특권이었다. 은연중에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나타낸 것이다. 이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 종속되어 황제에게 선출을 인정해 달라는 서신을 보내 허락받고, 카롤루스의 보호 아래서 카롤루스가 정해주는 정책 진로를 따라야 했던 교황이 이제는 황제를 임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일이고, 실제로는 카롤루스 왕조의 황제,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교황에 대해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어쨌든 상황에 따라서는 그 반대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교황의 입장에선 더없이 큰 이득이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완전히 부정하고 대등한 관계를 확보할 토대를 쌓은 것도 또다른 성과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오만이자 황권에 대한 모독적인 행위였다. 레오 3세 또한 자신의 행동으로 서방 교회가 동로마 제국과 완전히 결별하겠다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동로마 제국이 본인의 황제 즉위를 인정할 때까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811년에 이르러서 동로마 제국이 자신보다 서열이 앞선다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어쨌든 카롤루스는 이 때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일컬어지기 시작했고, 그의 정통성은 대체로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다만 끊겠다던 동로마 제국과 동방 정교회와의 관계는 중세 중기에 이르기까지 끊지 못했다.

814년 카룰루스대제가 사망한 후 즉위한 루도비쿠스 1세는 아들 로타리우스 1세를 이탈리아 국왕으로 임명했다. 822년 이탈리아 왕국을 본격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로타리우스는 822년 또는 823년 4월 5일 부활절에 교황 파스칼 1세로부터 축성, 황제관을 수여받았다. 824년 공동황제가 된 로타리우스는 법을 만들어 교황의 관할권과 이탈리아 정계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정치 개입권한을 제한하였다. 824년 11월 로타리우스는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관한 법령이자 이탈리아의 법인 '로마 협정'(Constitutio Romana)을 발표했다. 로마 협정은 교교황과 황제의 기밀을 취급하는 인물은 치외 법권의 특혜를 누리고, 교황과 황제는 공동의 위원회를 통해 국가 교회의 관리를 감독하며 위원회는 해마다 황제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교황의 선거는 로마인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교황으로 선출된 당사자는 교황 즉위 이전에 황제의 특사에게 충성 서약―교황 에우제니오는 이행했다―을 이행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로타르는 스스로 로마에서 최고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그나마 교황과 교회가 인정 받은 특권으로는 교황이 사망할 시에 그 재산에 대한 보호 및 강탈당한 교회의 자신에 대한 북구 및 보호에 대한 조항 밖에 없었다. 이로서 황제가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음을 확인하고, 교황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일로 가톨릭 주교들과 사제들의 지지를 잃게 된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교황령은 북이탈리아와 함께 중프랑크 왕국에 배정되었다. 846년 사라센 해적이 로마시 외곽을 공격해 구 성 베드로 성당이 불타는 참사가 일어났다. 교황 레오 4세는 로마시를 복구하고 성벽과 방어탑을 쌓아 수비를 보강했다. 849년 또다시 사라센 해적이 얼쩡거리자 나폴리, 가에타, 아말피 동맹과 함께 오스티아 해전에서 사라센 해적을 대파해 무슬림 해적의 침공을 어느정도 근절했다.

855년 9월 29일 베네딕토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그를 인정하지 않은 무리들은 아나스타시오를 대립 교황으로 추대하였다. 아나스타시오와 그의 추종자들은 교황궁인 라테라노 궁전을 강제로 점령하고, 베네딕토 3세를 감금했다. 하지만 로마의 민심은 베네딕토 3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이틀 만에 전세가 역전된다. 황제 루도비코 2세는 베네딕토 3세를 인정하였지만 아나스타시오의 추종자들을 관대하게 대할 것을 교황에게 요구하였다.

교황 자리를 굳힌 베네딕토 3세는 로타리우스 1세의 세 아들인 루도비코 2세, 로타르 2세, 프로방스의 샤를의 갈등을 조율하였으며, 잉글랜드에서의 주교를 재판 없이 파직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84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천사학교(Schola Anglorum)를 복원하기도 했다. 855년 프륌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에서 북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으로 분할되면서 이탈리아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86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의 해임과 포티오스의 선임을 놓고 교황 니콜라오 1세가 이그타니오스의 지지자들에 의해 개입했다. 포티오스는 교황에 서신을 보내 자신을 총대주교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니콜라오 1세는 포티오스의 취임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서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 답신을 통해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열자고 제안하면서, 자신도 두 명의 위원을 보내 그들로부터 보고를 직접 듣겠다고 했다. 만약 사절단이 이그나티오스의 고발을 뒷받침한다면,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레온 3세가 732년에 로마의 관할권에서 빼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옮긴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주교구, 테살로니키 교구, 기타 발칸 반도의 여러 관구를 다시 교황청에 반환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교황은 아나니의 자카리아와 포르투의 로도알드를 사절 대표로 선임하였고, 두 사람은 861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이후 사도 성당에서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렸고, 이그나티오스는 초라한 수도복을 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를 반대하는 증인이 72명에 달했고, 교황의 두 사절은 포티오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데다 미하일 3세로부터 "그대들의 귀환은 전적으로 짐의 자비에 달려있다"라는 은근한 협박을 받은 터라 포티오스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결국 위원회는 이그나티오스가 교회법이 아니라 테오도라의 지시에 의해 총대주교에 임명되었으므로 무효라고 결의하고, 포티오스를 공식적으로 총대주교에 선임했다. 그 후 이그나이토스는 다시 체포되어 2주일간 심한 압박을 받은 끝에 자신의 해임에 동의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테레빈토스 섬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니콜라오 1세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두 사절이 포티오스에게 매수되었다고 비난했고, 포티오스가 위원회의 결정을 통보하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포티오스는 은근히 자신이 교황과 동격이라는 입장을 드러냈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테살로니키, 발칸 반도의 여러 관구를 로마의 관할에 속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황제께서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고 여기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교황은 그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원의 총주교 대리를 맡던 테오그노스토스가 로마로 망명한 뒤 로마 교황을 존경하는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자, 교황은 포티오스를 인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교황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에게 서신을 돌려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하게 해임되고 그 자리를 비열한 자가 가로챘으니 이그나티오스를 원래의 지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를 알렸다. 또한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교마 교황의 권한이 가장 우월하며 교황의 승인이 없이는 총대주교가 임명되거나 해임될 수 없음을 재차 강조했다.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가 답신을 보내지 않자, 교황은 863년 4월 라테란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해 포티오스의 모든 성직을 박탈하고, 총대주교의 모든 권한을 즉각 포기하지 않을 경우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포티오스가 임명한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비슷한 선고가 내려졌고, 이그나티오스를 비롯하여 포티오스에게 해임된 모든 성직자들을 원직에 복귀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포티오스에게 회유되어 그릇된 처사를 한 아나니의 자카리아와 포르투의 로도알드를 소환했다. 자카리아는 종교 회의에 출석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해임되었다. 포르투의 로도알드는 교황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결국 864년 해임되었다.

포티오스는 교황의 공세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지만, 황제 미하일 3세가 니콜라오 1세에게 서신을 보내 교황의 권위는 총대주교를 능가하지 않는데 마치 상위의 존재처럼 군다고 규탄하는 서신을 보냈다. 심지어 이 서신에서 '촌스러운' 라틴어를 쓴다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에 니콜라오 1세는 사도적 전통에 따라 로마 교황이 모든 대주교보다 상위의 존재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그나티오스와 포티오스를 로마로 초대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서방과 동방 교회의 대립이 갈수록 격화될 무렵, 불가리아의 차르 보리스 1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기독교로 개종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포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포티오스가 볼가리아에 별도의 대주교를 선출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그는 라틴 선교사들을 초대했다. 이 선교단 중에는 훗날 교황으로 선임되는 포르모소도 있었다. 그는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면서, 동로마 성직자들이 결혼하는 것, 성찬식에서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는 것, 니케아 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하지 않는 것 등을 비난했다.

많은 불가리아인이 그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보리스 1세는 교황청에 포르모소를 불가리아 대주교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포르모소는 당시 포르투의 주교였고, 교회법에는 누구도 동시에 두 교구의 주교가 될 수 없었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니콜라오 1세는 포르모스를 잠재적 경쟁자로 여겼기에 포르모소가 승진하는 걸 꺼렸다. 그래서 그는 포르모소를 로마로 소환했다. 이 시기, 불가리아보다 더 북쪽인 모라비아가 서방 교회를 택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하일 3세는 가뭄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보리스 1세를 굴복시키고 865년 미하일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866년 미하일 3세는 측근 바실리오스와 함께 권신 바르다스를 살해하고 바실리오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그는 가톨릭의 동진을 두려워한 포티오스의 청원을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집했다. 이리하여 867년에 열린 공의회는 교황 니콜라오 1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에 처했으며, 그를 따르는 모든 이도 같이 파문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서방과 동방 교회는 일시적으로 분열되었다.하지만 공의회의 결정이 내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7년 9월 24일, 바실리오스가 정변을 일으켜 미하일 3세를 암살하고 단독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서방 교회와 화해하기로 하고 포티오스를 총대주교에서 해임하고 이그나티오스를 총대주교로 복직시켰으며, 이전 공의회가 내린 결정을 무효화했다.

11월 13일 파문되었다는 소식이 도착도 하기 전에 니콜라오 1세가 선종했고, 후임 교황으로 하드리아노 2세가 선출되었다. 그 후 새롭게 마케도니아 왕조를 개창한 바실리오스 1세로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 교회와의 화해를 꾀하고자 하였고, 이에 교황의 뜻대로 포티오스를 파면하였다. 그리고 후속 조치를 위해 공의회를 열고, 새로운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여기에 교황 사절을 파견하였다. 869년부터 870년까지 열린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포티오스와 그를 서품한 그리고리오스를 단죄, 로마의 수위권 인정, 5대 총대주교좌의 서열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으로 결정, 주교 선출에 대한 국가의 간섭권 부정[17], 성화상 공경에 대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재확인[제2차]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곧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와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라는 말씀이, 그들의 뒤를 이어 그들을 따라, 가톨릭 교회의 교황들과 최고 사목자들이 된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으며너,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들도 총대주교좌를 다스리는 이들에게서 어떤 것도 절대로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그들의 주교좌에서 어떤 것도 제거하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옛 로마의 교황 성하와 그다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그다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이 모든 영예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옛 로마의 교황 성하를 거슬러, 포티우스가 최근에 한 것과 오래 전에 디오스코루스가 한 것처럼, 마치 어떤 범죄를 알리는 듯한 핑계로, 글들을 쓰거나 이야기를 꾸며 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가 포티우스와 디오스코루스처럼,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좌에 반대하여 글로써 또는 글을 쓰지 않고 어떤 모욕을 야기시키는 그런 자만심과 대담함을 행사한다면, 그는 저들과 동등하고 같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만일 세속의 권력을 향유하거나 차지하면서 이미 언급한 사도좌의 교황이나 다른 총대주교들 중 어느 누구를 내쫓으려 시도한다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보편 공의회가 소집되어 로마인들의 거룩한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이나 논쟁이 생겼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땅한 경의를 가지고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고, 도움을 받든지 도움을 주든지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결코 옛 로마의 교황들을 거슬러 감히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카논 21[원문]


때문에 동로마 측은 사략선까지 동원하여 공의회 문서를 탈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의회는 869년 10월 5일부터 870년 2월 28일까지 황제 특사 바네스의 사회로 회의를 열었다. 개막 당시에는 이냐티우스파 주교 열둘만이 참석한 극히 보잘것없는 회합이었으나, 마지막에는 참석자가 최대 103명까지 늘어났다. 이 공의회의 부수현상 가운데 중요한 것: 포티우스가 로마와의 싸움을 근본적인 차원으로 몰고가자, 로마 교황 사절들 쪽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참된 신앙의 규범이자 교회일치의 중심으로서의 교황수위권에 대한 원칙적 인정을 요구했다. 이 일은 '「명예회복 문서」{{{-2 Libellus satisfactionis''}}}를 통해 행해졌던바, 포티우스 추종자들은 복권과 재임용을 원한다면 이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근본적으로 519년 「호르미스다스 정식」의 표현들을 다시 채택한 이 문서에 따르면, 참된 신앙과 교회일치를 위한 보증은 로마와의 결속에 있다. 포티우스 추종자들에게는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주목할 만하다. 주교들은 황제에게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자매가 아니라 마치 여주인의 하녀처럼 취급하는 것을 황제가 용납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황제로서도 로마 사절들이 자신도 원하던 포티우스 사건의 해결을 넘서서서 그것을 교회론 문제의 전반적 해결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명예회복 문서」의 서명본들이 사절들의 숙소에서 없어졌다. 그들에게 배정된 하인들이, 물론 높은 분들의 지시로, 그것들을 훔쳐냈던 것이다. 사절들은 즉시 위협하기를, 자기들은 곧바로 떠나 공의회를 흩어 버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서류들이 "우연히" 다시 발견되었다. 로마 사절인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조심하게 됐고, 그래서 모든 공의회 문서의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아나스타시우스의 행동이 참으로 적절했음은 공의회가 끝난 뒤에 드러날 터였다. 귀국 길에 사절들의 배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사절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잡혀 있다가 개별적으로 풀려났으나, 문서들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적들과 그들에게 그 일을 지시했음이 확실한 황제는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본을 만들어 다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이 공의회의 문서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스 교회는 훗날 공의회를 무효로 선언했기 때문에 문서들도 폐기해 버렸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21-122쪽


하지만 877년 이그나티오스가 선종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자리에는 포티오스가 복위하였다. 바실리오스 1세 입장에서는 어차피 불가리아 문제로 서방과의 일치는 물 건너 갔고, 동로마 국내 사정도 안정되어 있었으니 눈치 볼 것이 없었다. 황제는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879년 1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회하여 이듬해 3월 5일까지 개최된 이 공의회에서는 포티오스를 파문한 869년 공의회의 결정을 뒤엎는 한편, 필리오케 문제에 대해서도 필리오케의 삽입을 규탄하였다. 당대의 교황 요한 8세는 이 결정에 당연히 반발했지만 결국 포티오스의 복직을 받아들였다.

라고 천주교 측에서는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879~880년 공의회는 869~870년 공의회 보다 더 많은 주교들과 사절들이 참여했으며, 로마 교황 또한 교황사절을 보내어 869년의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모든 내용을 무효화 하고 필리오퀘를 단죄하는 879년 공의회의 모든 회기록에 서명을 했다.

그러다가 12세기 초 천주교에서 교회법학자들에 의해 다시 869년의 공의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는 그들이 869년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회법 조항 22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자신들 스스로 교황사절을 보내어 동의하고 당시 교황 요한 8세 본인 또한 받아들인 879년 공의회를 거짓 8차 세계 공의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출처

다만 교황령을 비롯해 이탈리아의 정세 또한 좋지 않았다. 872년 하드리아노 2세가 선종하면서 새로이 요한 8세가 선출된 후 로타리우스 1세의 장남이었던 루도비코 2세가 875년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동생들 차남 로타링기아 국왕 로타르를 제외하면 후손을 남기지 못했으며, 로타르의 아들 또한 사생아라 로타리우스 1세의 동생들인 서프랑크의 샤를 2세와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에게로 각각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중 이탈리아 왕국은 샤를의 손에 넘어 갔다.

그동안 요한 8세는 치세 중에 사라센의 침입에 대비하였는데, 9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토후국이었던 아글라브 왕조[18]의 침탈이 극심했고, 시칠리아는 아예 이슬람 세력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잦은 사라센의 침입이 계속 이어졌고, 교황은 느슨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결속하고 연합함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교황은 몸소 살레르노, 카푸아, 나폴리, 가에타, 아말피 등 캄파니아 도시들을 순회하였고 스스로 해군 사령관이 되어 876년 사라센 함대와 맞서 싸워 승리했다. 이듬해에는 살레르노를 비롯한 5개 도시가 교황과 동맹에 가담하였다.

한편 877년 그가 죽으면서 동프랑크 국왕인 카를로만에게 넘어가다가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카를 3세에게 넘어갔으며, 또한 전임 하드리아노 2세로부터 단죄받은 포티오스가 879년 동로마 측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파면이 철회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하자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10년 간의 치세 동안 안으로는 행정 정비,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을 막고 이탈리아 도시들의 결속을 도모하는 등 정열적으로 활동하며 열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요한 8새는 882년 12월에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암살당했는데, 교회 역사상 첫 교황 암살이었다. 암살 배경 및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친척들이 독살을 시도했으나 치사량 부족으로 바로 죽지 않아 망치로 때려 숨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교황좌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들의 정쟁에 휘말려 막장스러운 행태가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한편 카를 3세는 프랑크 왕국을 통합시켰지만 불과 1년만에 무능력만 보였고, 결국 888년 사망하면서 리베몽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된다.


1.4.4.2. 혼란기[편집]

프랑크 왕국에서 떨어져 나간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가 새 국왕이 되는데, 경쟁자인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 때문에 왕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서프랑크 왕위 획득에 실패한 귀도 3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군사를 모아 신성 로마 제위를 노린다. 귀도 3세는 전투를 벌여 베렝가리오 1세를 물리치고 889년 이탈리아의 단독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891년 교황 스테파노 5세는 귀도 3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한다.

스테파노 5세가 죽은 뒤 포르모소가 교황으로 새로 즉위하였고, 귀도 3세는 포르모소에게 자기 아들 람베르토를 공동 황제로 임명시킨다. 포르모소는 귀도 3세를 불신하여 그에 대항할 세력을 찾았고,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에게 귀도 3세를 타도시키고 스스로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라고 제안한다. 아르눌프는 베렝가리오 1세에게 군사들을 보내고, 아르눌프와 베렝가리오 1세의 연합군은 베르가모에서 귀도 3세를 물리친다. 894년 아르눌프는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고, 베렝가리오 1세는 아르눌프의 봉신이 된다.

부대에 전염병이 돌고 귀도 3세도 갑자기 죽자 아르눌프는 더 이상의 이탈리아 진군을 멈춘다. 한편 람베르토는 교황 포르모소에게 신성 로마 제위를 인정받기 위해 자기 어머니 아젤트루데와 함께 로마를 방문하는데, 이미 아르눌프의 편에 선 포르모소는 당연히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이에 람베르토는 포르모소를 투옥한다. 이런 일이 생기자 교황 대사가 아르눌프에게 교황 구출 지원을 간청하였고 아르눌프는 다시 이탈리아로 진군한다. 이탈리아에 있던 군주들과 귀족들은 람베르토에게 등을 뒤돌았고 아르눌프를 지지하였고, 아르눌프는 갇혀있던 교황 포르모소를 구출한다.

896년 교황 포르모소는 아르눌프에게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한다. 아르눌프는 아젤트루데를 쫓으려다 병에 걸리고, 서자 라톨도를 이탈리아의 부왕(副王)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를 대신 통치하게 한 뒤 동프랑크로 돌아간다.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서 떠나고 교황 포르모소도 죽자 람베르토는 다시 이탈리아에 실권을 잡기 시작하고, 베렝가리오 1세 역시 아르눌프의 그늘에서 벗어나 권력을 잡는다. 람베르토와 베렝가리오 1세는 아르눌프가 임명한 관리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부왕 라톨도는 동프랑크로 도망친다. 새 교황으로 즉위한 스테파노 6세는 처음에 아르눌프를 지지했지만 결국 람베르토를 지원하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에는 이 둘이 군림하게 된다. 베렝가리오 1세는 아다강과 포강 사이 일대를, 람베르토는 나머지를 가지기로 하고 베르가모는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람베르토는 또한 베렝가리오 1세의 딸 기셀라와 결혼하기로 하여 정략결혼 동맹을 맺기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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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파울 라운렌스 作, 1870년

람베르토는 어머니 아젤트루데와 함께 다시 로마를 방문한다. 람베르토와 아젤트루데는 자신들에 대항했던 포르모소에게 보복을 가하고자 하였고 이는 교회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판으로 이어진다. 람베르토의 후원으로 교황 자리에 오른 스테파노 6세는 람베르토의 복수극을 실행해줘야 했는데, 포르모소의 시신은 무덤에서 꺼내져 피고석에 앉혀졌고 그가 행한 모든 사제 서품은 무효로 만들었으며 그가 교황이 되기 전 치죄받은 모든 죄목이 재차 유죄로 판결되었다. 판결에 따라 포르모소의 시체에서 교황의 법복을 벗겼고 오른손 손가락 세 개가 베어진 후 테베레강에 버려진다. 그러나 시체 시노드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평민이 스테파노 6세와 람베르토가 교황의 시신을 모욕했다며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스테파노 6세는 이 반란으로 퇴위당한후 감옥에서 교살되었다.

람베르토는 라벤나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여 자기를 적법한 신성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를 무효로 해달라 하였다. 한편 로마노테오도로 2세가 수개월의 임기 끝에 잇달아 선종한 후 새로 즉위한 교황 요한 9세는 의회에서 람베르토의 뜻에 거슬러 포르모소의 신원을 회복시키며 시체 시노드의 판결을 뒤집는다. 의회의 성직자들은 스테파노 6세의 재판과 성직자 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 교령들을 파기하고, 스테파노 6세에게 폐위당한 성직자들을 복권시킨다.

람베르토는 정책과 제도 제정에 힘썼다. 람베르토는 아버지 귀도 3세의 '새로운 프랑크 왕국(Renovatio Francorum)'이라는 정책과 선대 프랑크 국왕들의 법령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람베르토는 로타리우스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도 부활시켰는데, 교황 요한 9세는 로마 헌장을 다시 승인하여 교황 선출 때 황제의 사절을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확정하였다.

903년 레오 5세가 선출되나 3개월 만에 추기경 크리스토포로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만다. 크리스토포로는 스스로 교황이라 자처했으나 정상적으로 선출된 교황이 아니기 때문에 대립교황으로 취급된다.

레오 5세가 짧은 재임기간 동안 한 일은, 볼로냐의 의전사제들에게 세금 납부를 면제해 준다는 교서를 내린 것 정도였다. 감옥에 갇힌 후에는 결국 감옥에서 교살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를 교살한 유력한 용의자로는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 뒤이어 교황이 된 세르지오 3세, 로마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 등이 언급되나 정확히 누가 교살한 것 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새로 선출된 세르지오 3세는 교황령 출신으로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 집안과 친척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통적인 로마 귀족 집안 출신으로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는 군사를 동원해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를 추포하고 세르지오에게 교황좌에 앉을 것을 권한다. 세르지오는 이를 받아들여 세르지오 3세로서 교황좌에 착좌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모든 실권은 군권을 쥐고 있던 테오필락트 1세에게 있었고 세르지오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후 전입 교황인 레오 5세와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는 감옥에서 교살 되는데 아마도 테오필락트 1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르지오 3세와 테오필락트 1세는 루트비히 3세를 탐탁치 않아 했지만 그의 경쟁자 베렝가리오 1세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베렝가리오와 몇번이나 대관문제를 두고 말이 오갔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를 대관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과의 정치적 문제에서도 황제 레온 6세의 혼인 문제에 대해 관여했는데 3번째 혼인까지만 인정하던 관례를 깨고 황제의 4번째 혼인을 인정하면서 동방 대주교와 동로마 황제 사이에서 황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편 그는 테오필락트 1세의 딸 마르치아와 염문이 나돌았는데, 둘 사이의 사생아가 훗날 교황 요한 11세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50여년 뒤의 기록에서만 발견될 뿐, 명확하지는 않지만 창부정치의 시작점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911년 세르지오 3세가 선종한 후 이후 선출된 교황들은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의 꼭두각시 914년 요한 10세가 선출된 후 테오필락트가 죽기 전까지 이어졌다.

교황에 선출된 요한 10세는 곡두각시 신세였던 이전 교황들과 달리 이탈리아에 전초 기지를 만들어 약탈을 일삼던 사라센을 물리치기 위해 스플레토의 알베리크와 이탈리아의 여러 군주, 특히 베렝가리오의 힘을 빌렸으며 결과적으로 무력을 앞세워 사라센 세력을 이탈리아 밖으로 몰아낸다. 요한 10세는 베렝가리오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그를 이탈리아 왕으로 대관하였고 베렝가리오를 중심으로 이탈리아가 통일 되도록 후원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베렝가리오가 이탈리아 귀족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그 뒤 암살당하기에 이르러 이 꿈은 물거품이 된다.

연이어서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테오필락트가 사망하였고, 스플레토의 알베리크도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후원자가 연이어 사망하자 요한 10세는 위기에 몰렸는데, 테오필락트의 딸 마로치아는 평소 자신의 어머니 테오도라와 염문을 뿌리고 다닌 요한 10세를 못마땅해 했으며 토스카나 후작 귀도와 혼인한 뒤 그의 지원을 얻어 언제든 요한 10세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에 요한 10세는 자신의 동생 피에트로를 공석이 된 스플레토 공작 자리에 앉혔고 마자르족의 후원까지 얻어 세력 균형을 맞췄다.

요한 10세는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이 맞춰진 후, 유럽 및 종교적 업무에 열심을 다하였다. 특히 클뤼니 수도원을 후원하고, 라테라노 대성전을 재건축하였으며, 동유럽 미사 문제에 대해서도 라틴어만을 사용하는 미사 집전만 인정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915년 남이탈리아에서 무슬림들이 침략해오자 베렝가리오 1세는 가릴리아노강에서 사라센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요한 10세는 베렝가리오 1세를 신성 로마 황제로 등극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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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926년부터 불안하게 맞춰져 오던 마로치아와의 권력 균형이 928년 마로치아 쪽의 기습에 소수 병력만 있던 교황과 피에트로[19] 일파가 당하면서 무너졌고, 요한 10세는 폐위되고 만다. 이후 마로치아 일파에 의해 레오 6세가 선출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그가 교회 내에서 이룬 업적은 스플리트 시노드의 교령을 재확인한 것과 달마티아[20]에서의 성직자들의 분쟁을 정리한 것 그리고 주교들의 시목 범위를 자신이 속한 교구로 한정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전임자에 이어서 이슬람 세력에 여러 제후들이 맞설 것을 주창하였으며 이교도들과의 싸움에서 순교한 사람들에게 천국이 약속 될 것임을 설파했다. 어찌 보면 십자군 전쟁에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한편 사회적으로도 특이한 법을 제정하였는데, 결혼하지 않은 남성의 거세를 금지한 것이었다.

제한된 권한과 외세의 침략에서도 꿋꿋하게 버틴 레오 6세의 최후는 그다지 좋지 않아서 교황이 된지 6개월 만에 감금[21]되었고, 스테파노 7세를 선출시킨다.

하지만 스테파노 7세는 2년여의 재임기간 중 성직자들의 불의함을 치리하고 교회를 정화하고자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꼭두각시에 불과했기에 한계가 있었고, 931년 2월 마로치아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폐위된 후 얼마 뒤인 3월 15일 감옥에서 처형되어 사망한다. 마로치아는 차기 교황으로 자신의 아들인 요한 11세를 내세운다.

요한 11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마로치아가 15살 때 당시 포르투스의 주교였던 세르지오 3세하고 사이에 낳은 사생아라고 한다. 그 뒤 마로치아는 스플레토 공작 알베리크와 결혼하여 또 다른 아들 알베리크 2세를 낳는다. 마로치아가 연이어 꼭두각시 교황들을 제거하고 자기 아들을 교황으로 올리면서 창부정치가 절정으로 달하는 시기가 바로 요한 11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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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2년 위그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옛 부인을 버리고 다시 결혼하려 했으나, 문제는 새 신부가 교황 세르지오 3세의 정부로 창부정치로 유명한 로마 귀족 마로치아였다. 마로치아의 전 남편 중에 위그의 이부형제가 있어 가톨릭 교회법상 위그와 마로치아는 인척으로 돼버려서 결혼이 금지되었다. 위그는 포기하지 않고 인척 관계를 지워버리기 위해 자기 이부형제들을 제거하려 했다. 노력 끝에 위그는 마로치아와 결혼할 수 있게 되지만 이번에는 마로치아가 초혼하고 낳은 아들인 알베리코 2세가 로마의 폭도들을 선동해 새아버지 위그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고 로마를 점거한다. 위그는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요한 11세와 마로치아는 투옥되어 요한 11세는 투옥 동안 교황직은 유지했지만 3년 후 죽었고, 마로치아는 937년 옥사한다.

936년 1월 3일 스플레토의 알베리크 2세는 요한 11세의 뒤를 이어 레오 7세를 선출시킨다. 레오 7세는 나름의 야망이 있었지만 스플레토의 알베리크 2세의 뜻에 좌절된다. 사실상 알베리크 2세의 꼭두각시였던 셈.

그의 즉위기간은 겨우 삼 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행한 일들은 있었다. 그가 즉위기간 도중에 발표한 교서들 대부분은 클뤼니 수도원을 포함한 여러 수도원에 대해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이었다. 레오 7세는 알베리크 2세와 알베리크 2세의 계부이자 이탈리아 왕인 위그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클뤼니의 오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도는 위그의 딸 알다와 알베리크 사이의 혼담을 성사시킴으로써 양측의 휴전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레오 7세는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를 교황 총대리와 사절로 임명하여 모든 품급의 성직자들의 쇄신을 위해 힘쓰게 하였다. 그가 프리드리히 대주교에게 한 권고 중에는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것은 금지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도시에서 추방해도 좋다고 한 내용이 있었다.

레오 7세는 939년 7월 사망하였으며 스테파노 8세가 선출되었다. 스테파노 8세는 로마인들이 아직도 갈리아라고 부른 서프랑크 지역에 관심을 가졌다. 위그 대공과 베르망두아 백작 에베르 2세가 반역을 일으키자 루이 4세 서프랑크 국왕은 즉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자 위그 대공과 에베르 2세는 독일의 왕 오토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여기에 스테파노 8세가 개입하였다.

스테파노 8세는 교황 특사들을 파견하여 서프랑크 지역 귀족들에게 루이 4세를 왕으로 인정하고 그에 반기를 드는 자들은 교황의 뜻을 거스른 것으로 판단하여 누구든지 파문하리라 경고하였다. 교황 특사들은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위그와 에베르 2세를 지지한 프랑크 주교들의 지지를 철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스테파노 8세는 에베르 2세의 아들 베르망두아의 위그에게 랭스의 대주교 자리를 제안하여 루이 4세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동맹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는 지역 교회(대교구)를 사목하는 대주교의 권위와 책임, 친교의 상징인 팔리움과 함께 교황 특사를 보내 서프랑크 귀족들에게 루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촉구하였다.

反 루이 4세 세력은 자신들이 루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뜻을 예수 성탄 대축일 전까지 교황에게 알리지 않을 경우 파문당하리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反 교황 세력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 이전보다 더 많은 귀족들이 루이 4세의 편을 서겠다 선언하였고 942년 말 모든 귀족이 루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교황에게 알렸다.

그러나 로마에서 스테파노 8세의 통치는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투스쿨룸 백작 가문의 지배 아래 계속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교황령의 명목상 통치자는 스테파노 8세였지만, 실권은 모두 스스로 로마 공작이라고 칭한 스폴레토의 알베리크 2세에게 있었다.

940년 이탈리아의 위그가 로마를 포위하면서 스테파노 8세는 알베리크 2세와 위그 사이에 싸움에 휘말렸다. 자신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알베리크 2세는 로마 내에 잠재적인 불만 세력 및 이탈 세력에 대한 집중적인 단속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주교들을 포함한 수많은 그의 정적들이 처형되거나 감옥에 보내졌다. 오파바의 마르티노는 알베리크 2세의 지지자들이 스테파노 8세를 붙잡하 고문해 불구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알베리크 2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일어난 시점과 스테파노 8세가 선종하기 바로 전 사이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알베리크는 로마 시노드를 소집해서 프리미케리우스, 노타리우스, 베스타라리우스 등 로마 교회의 여러 관료들을 동원해서 자신이 로마 교회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과시하였다.

스테파노 8세는 942년 10월 사망했으며, 교황 마리노 2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마리노 2세는 교황의 행정 업무에 관심을 기울였고 재속 사제들과 수도 사제들의 규율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는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를 교황 총대리로 임명하고 독일과 프랑스에 파견해 해당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부정을 근절시키게 만들었다. 카푸아의 주교 시쿠스가 허락없이 마음대로 해당 교구 지역 베네딕토회 성당을 침입하자 즉시 개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카푸아의 주교 시쿠스가 몬테카시노를 침입하자 그것을 보호하기도 했다.

그는 교회의 세속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규율을 정비하고 로마 성당을 복구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군주들의 전쟁을 협상을 통해 평화스럽게 끝내도록 하였다.

마리노 2세는 수도원을 총애하여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도원을 위한 교황 칙서를 많이 반포했다고 한다. 946년 5월에 사망했으며, 교황 아가피토 2세가 뒤를 이었다. 그동안 알베리크 2세는 막후에서 교황령을 통치했으나 954년 죽었는데, 이때 유언으로 갓 성년이 될 자신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를 교황으로 세울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때마침 그가 내세운 아가피토 2세가 다음 해에 죽으면서 옥타비아누스가 요한 12세로 즉위한다.


1.4.4.3. 신성 로마 제국(독일 왕국)에 편입되다.[편집]

960년 요한 12세는 빼앗긴 교황령 동쪽 지역들을 수복하기 위해 베네벤토와 카푸아의 롬바르드 공작들에 대한 공격을 직접 이끌었다. 투스쿨룸과 스폴레토에서 온 군대의 선두에 서서 행진하는 요한의 모습에 맞서 베네벤툼과 카푸아 공작들은 그들을 도우러 온 살레르노의 기술프 1세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요한 12세는 북쪽으로 후퇴하여 테라치나에서 지술프와 협상을 시작했다.두 정당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고, 기술프의 불간섭에 대한 대가는 교황이 살레르노를 더 이상 교황령의 일부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요한 12세는 아버지 알베리크 2세처럼 그렇게 쉽게 했던 것처럼 강력한 로마의 귀족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이시기 이탈리아 국왕인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령 북쪽을 점령하자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오토는 이탈리아로 진군해 베렝가리오 2세를 격파하고 그를 봉신으로 삼은 뒤 이탈리아 국왕 자리에 즉위 하였다. 그리고 962년 2월 2일에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10일 뒤에 교황과 오토는 황제가 교황령 독립의 보증인이 되는 ‘오토의 특권’ 조약을 체결했다. 다음에 오토가 로마를 떠나 교황령 북쪽을 되찾았지만 요한 12세가 오토 1세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요한 12세는 마자르 인들과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오토에 대항하는 동맹을 촉구했다. 963년 11월 오토는 로마로 돌아와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 레오 8세를 선출했다. 그러나 오토가 로마를 떠나자 오토 지지 세력과 요한 12세 지지 세력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요한 12세가 거대한 유혈사태 가운데 힘을 가지고 돌아와 즉각 시노드를 소집해 964년 2월 26일 레오 8세를 교황직에서 폐위시킴과 동시에 파문했고, 동시자신을 내쫓은 오토를 파문했다. 하지만 요한 12세는 아버지의 유언을 통해 일반 평신도의 신분에서 단숨에 교황으로 선출돈 인물이었기에 그다지 신실한 성직자는 아니었다. 964년 4월 그는 결혼한 여자를 강간했다가 남편에게 맞은 후유증으로 인해 죽었다. 이에 새로운 교황으로 베네딕토 5세가 선출되었다.

이에 반발한 오토 1세는 레오 8세와 함께 군대를 로마로 이끌고 가차없이 공격했다. 제국군의 위세에 눌린 로마 시민들이 결국 오토 1세에게 항복함으로써 레오 8세는 정통 교황으로 다시 즉위했다. 레오 8세는 즉각 시노드를 소집해 964년 6월에 베네딕토 5세의 주교품을 박탈하고, 베네딕토 5세는 함부르크 지역으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오토는 제국의 인정 없이 교황을 선출할 수 없다는 약속을 로마 시민들에게 받아냈고, 이로 인해 962년 이탈리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면서 교황령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965년 3월 레오 8세가 선종하고 요한 13세가 10월 1일에 선출되었다. 요한 13세는 우선 로마 귀족들의 권력을 통제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는 내부적으로는 크레센치 가문의 사람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혔고, 대외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오토 1세가 독일 왕국으로 돌아가자, 왕이 없는 틈을 타 로마 귀족들이 요한 13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로마 민병대의 지휘관들은 965년 12월 16일 요한 13세를 급습해 산탄젤로 성에 있는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다가 산탄젤로 성 안에 있는 요한 13세의 추종자들이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해 다시 캄파냐에 있는 로프레도의 성으로 이감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오토 1세는 곧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그동안 요한 13세는 가까스로 캄파냐에서 탈출해 카푸아로 도망쳐 그곳의 공작인 판둘프 1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몸을 숨겼다. 그는 자신을 도와준 공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카푸아 교구를 관구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동생을 카푸아 관구의 첫 관구장 주교로 서임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요한 13세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봉기가 일어나 요한 13세를 감옥에 가둔 로프레도와 스테파노는 교황의 조카인 조반니 크레센치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로마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요한 13세는 966년 11월 14일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로마로 돌아왔고, 오토 1세가 로마에 당도하자 곧바로 자신을 몰아낸 반역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하기 시작했다. 집정관 두 명을 독일 왕국으로 유배를 보내고, 12명의 민병대 지휘관들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 밖에 반역에 동참한 나머지 사람들도 뒤이어 처형되거나 안구가 적출되는 형벌을 받았다. 반역자들을 모조리 짓밟은 요한 13세는 오토 1세에게 감사의 표시로 세 번씩 축복을 해 주었다.

요한 13세는 이후 오토 1세와 손을 잡고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몰두했다. 967년 라벤나에 소집된 시노드에서 오토 1세가 라벤나와 그 밖에 전임 교황들로부터 빼앗았던 수많은 영토들을 교황령에게 반환했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요한 13세는 독일 왕국의 마그데부르크 지역에 대교구를 신설했다.

972년 9월 6일 요한 13세가 선종하고 베네딕토 6세가 973년 1월 19일에 선출되었다. 베네딕토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가 세상을 떠나고 오토 2세가 즉위함으로써 독일 왕국의 귀족들은 황제권이 잠깐 미약해진 틈을 타 저마다의 권위를 주장했다. 이 때문에 새로운 황제가 독일 귀족들과의 마찰을 진정시키는 데에 집중하느라 로마에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자, 평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로마에 간섭하는 것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로마 귀족들은, 황제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교황을 몰아내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집정관 직위를 가진 로마 귀족의 대표 크레센치오와 추기경 프란코 페루치가 이끄는 반란 세력이 974년 베네딕토 6세를 습격한 후 산탄젤로 성에 감금했다. 쿠데타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페루치 추기경은 스스로 교황 보니파시오 7세라고 자칭하며 대립교황이 되었다.

한편, 베네딕토 6세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오토 2세는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시코 백작을 로마로 보냈으나,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스스로 물러날 생각이 일절 전혀 없었다. 오히려 대립교황은 어느 사제에게 감옥에 투옥된 베네딕토 6세를 살해하라고 지시하면서 974년 베네딕토 6세는 산탄젤로 성에서 살해당했다.

하지만 보니파시오 7세의 야망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0월에 새로이 선출된 교황은 그가 아닌 베네딕토 7세였다. 보니파시오 7세는 그대로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쳤고, 베네딕토 7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2세와 손을 잡고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다. 981년 3월 교황은 구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소집한 시노드를 통해 교회의 여러 가지 부정, 특히 성직 매매를 전면 금지하는 등 엄격한 대처를 요구했다. 그리고 부활절에 오토 2세가 로마로 오자 직접 마중나와 그의 로마 입성을 받아들였다.

오토 2세는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에 서유럽의 모든 귀족들과 제후들이 참가하는 궁정을 설치하려고 했다. 983년 7월 10일 베네딕토 7세는 선종한 후 11월에 요한 14세가 선출되었지만 곧바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2세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오토 3세가 즉위했지만, 새로운 황제는 아직 3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요한 14세를 보호할 역량이 일절 없는 상태였다. 이에 당시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무력해진 로마 교황에 대한 반대 여론을 바탕으로 콘스탄티노폴에서 돌아와 요한 14세를 산탄젤로 성에 있는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 14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보니파시오 7세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새로운 교황으로 요한 15세가 선출되었다. 요한 15세는 교황좌에 올랐을 당시 로마의 귀족 크레센티우스 3세가 새 교황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를 받았지만, 989년부터 991년까지 로마에 머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의 섭정을 맡은 테오파누 태후의 존재가 그의 야망을 가로막았다. 교황으로 재임한 10년 동안 때때로 크레센티우스 3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요한 15세는 테오파노 태후와 정치적 동반자로서 가까이 지내면서 어느 정도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요한 15세는 부패와 족벌주의 때문에 당대 로마 시민들로부터 평판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교회 쇄신을 주창한 클뤼니 수도원의 후원자이자 보호자로 나선 것은 칭찬받을 일이었다.

요한 15세가 재임한 동안 991년에 한 프랑스 성직자에 의해 랭스 대주교 아르눌프의 사임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요한 15세의 개입은 처음에는 아무런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이 사건은 훗날 서임권 투쟁으로 정점에 이르게 되는, 교황들과 프랑스 군주들 간의 갈등의 전초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프랑스 국왕 위그 카페는 자신의 최대 적수(로렌의 샤를)의 조카였음에도 아르눌프를 988년 랭스의 대교구장 주교로 서임하도록 하였다. 이후 샤를은 랭스를 함락하고 아르눌프 대주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러나 아르눌프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위그는 요한 15세에게 그를 대교구장직에서 파면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요한 15세로부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위그 카페는 서둘러 샤를과 아르눌프를 사로잡아 991년 소집된 랭스 시노드에서 아르눌프를 대교구장직에서 파면시키고 후임자로 제르베르 드 오리야크를 추대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제르베르 드 오리야크는 훗날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되는 인물이다.

시노드에서 오를레앙 교구장 아르눌프 주교는 요한 15세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였다.

거룩한 아버지들인 우리가 겸손한 사제품 후보자들의 생활과 윤리, 성과를 면밀히 살펴볼 의무가 있을진데, 하물며 모든 사제의 주인이자 우두머리이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그 직무에 적합한지 우리가 더욱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를 위한 모든 미덕이 지극히 부족하고, 성직품 가운데 가장 낮은 품을 받기에도 미흡한 사람이 가장 높은 성직에 오른다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줏빛과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느님의 성전에 앉아 스스로를 하느님처럼 보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출처]


랭스 시노드는 제2차 회의에서 칙령이 비준되어 발표되었지만, 로마로부터 거부당했다. 요한 15세는 랭스 대주교의 파면 사건을 다시 심의하기 위해 프랑스 주교들에게 프랑스 국왕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시노드를 프랑스 밖 영토인 아헨에서 다시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 프랑스 주교들이 이를 거부하자, 요한 15세는 그들에게 즉시 로마로 출두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프랑스 주교들은 프랑스에서 로마로 가는 길이 위험하고, 로마의 치안도 불안정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이후 요한 15세는 교황 특사를 통해 프랑스와 독일의 주교들에게 무송에서 시노드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시노드 소집 당일 무송에는 독일의 주교들만 참석하고, 프랑스의 주교들은 위그 카페와 그의 아들 로베르의 반대로 참석하지 않았다. 교황 특사의 노력으로 아르눌프의 파면은 최종적으로 불법으로 판결되었다. 996년 10월 23일에 위그 카페가 죽고 난 후에 아르눌프는 감금 상태에서 풀려나서 곧 자신의 모든 지위를 회복하였다. 제르베르는 랭스 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나 마그데부르크 궁정으로 가서 오토 3세 황제의 개인 지도 교사로 임용되었다.

993년 1월 31일 로마 시노드에서 요한 1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울다리코 주교를 장엄하게 시성하였으며, 이를 같은 해 2월 3일 프랑스와 독일의 모든 주교에게 교황 칙서를 공표함으로써 널리 알렸다. 이는 역사적으로 교황이 처음으로 장엄하게 시성식을 집전한 첫 사례로 기록된다.

996년 오토 3세는 교황이 집전하는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4월 12일까지 파비아에 머무는 동안 요한 15세는 996년 4월 1일 열병으로 선종하였다. 그러자 오토 3세는 자신의 친척인 브루노를 교황 그레고리오 5세로 선출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선출된 그레고리오 5세는 교황의 첫 업무는 자신의 조카인 오토 3세를 황제로 즉위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로마 집정관 지위의 고위 인사인 크레센치오 2세를 포함한 로마의 귀족들은 교황이 친척 관계인 어린 황제 오토 3세의 뜻에 따라 선출되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레고리오 5세를 반대하고, 대신 피아첸차의 대주교 조반니 필라가토를 대립교황 요한 16세로 추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교황은 반란을 진압하고자 자신의 조카인 오토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삼촌의 요청을 받은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를 로마로 보내 곧바로 반란 세력을 진압했다. 대립교황 요한 16세는 도주했으며, 주동자 크레센치오 2세는 산탄젤로 성에 몸을 숨겼다. 황제의 군대는 대립교황을 쫓아 생포한 다음, 그의 코, 귀, 혀를 잘라내고 눈을 멀게 만든 후 오토 3세와 그레고리오 5세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 앞으로 끌고 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게 했다. 대립교황은 이후 독일 풀다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1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했다. 반면 크레센치오 2세는 산탄젤로 성에서 황제의 군대와 공방전을 벌이는 발악을 했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생포된 크레센치오 2세는 성벽에 목이 매달리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5세는 그 어떠한 타살 정황 없이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요절했다. 이에 오토 3세는 자신의 개인 교사이기도 했던 서프랑크 왕국 출신의 제르베르 드 오리야크를 새로운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 세웠고, 교회 역사상 최초의 프랑스인 교황이며, 과학자이자 교사 출신인 교황으로 기록되었다.

실베스테르 2세는 당시의 기독교인들과는 다르게 수학, 과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 교황이 되기 전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2세와 오토 3세의 개인 교사였으며 랭스 지역의 대성당 사립 학교의 교사로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라비아 지역과 그리스 로마 지역에서 깊이 연구된 수학, 천문학을 널리 장려했으며, 동로마 제국을 제외한 나머지 유럽에서 잊혔던 주판혼천의의 사용을 다시 추진했다. 또한 0을 뺀 아라비아 숫자를 활용한 10진법을 유럽에 도입했다.

그 밖에도 선출 직후 과거 자신과 껄끄러운 상대였던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직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교황으로서 그는 사생활에 흠이 없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만이 주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성직자들 사이에 암암리에 행해져왔던 성직매매와 축첩 등의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1.4.5. 토스카나 변경백령[편집]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를 손아귀에 넣은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는 781년에 아들 피핀 카를로만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워서 자신을 대신하여 이탈리아를 다스리게 했다. 810년 피핀이 사망하자, 카를루스 대제는 일찍이 이탈리아 원정에 함께 했던 바이에른 출신의 귀족 보니파초 1세를 이탈리아 총독에 세웠다. 보니파초 1세는 813년부터 루카의 백작이자 공작을 역임했으며, 피사, 피스토이아, 볼테라 등 여러 도시를 자신의 치하에 두었기에 후대인들에 의해 토스카나의 첫 변경백으로 여겨진다.

823년 보니파초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보니파초 2세가 828년 로타리우스 1세로부터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그는 로타리우스 1세의 코르시카 원정을 도왔으며, 828년 7~8월에 사라센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는데, 사라센을 찾지 못하자 아프리카를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우티카와 카르타고 사이의 해안가를 약탈한 뒤 코르시카로 귀환했다. 전승에 따르면, 830년경 사라센의 습격에 맞서 군사 작전을 벌이는 동안 코르시카의 도시인 킬코산토 근처에 작은 요새를 세웠다. 이 요새는 훗날 또다른 도시로 발전했고, 나중에 그를 기리기 위해 '보니파초'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833년 루도비쿠스 1세와 로타리우스 1세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보니파초 2세는 토르토냐에 수감된 루도비쿠스 1세의 아내인 바르바라의 유디트를 석방하는 등 루도비쿠스 1세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834년 루도비쿠스가 패배하고 로타르 1세가 이탈리아의 왕으로 군림한 뒤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프랑스로 망명한 뒤 846년 또는 847년에 사망했다. 이후 토스카나 일대는 프랑크 왕국의 직할지가 되어 궁정백 마인프리둑스(Mainfridux, 833 ~ 838)와 아가누스(Aganus, 838 ~ 846)의 대리 통치를 받았다.

그러던 846년, 보니파초 2세의 아들 아달베르토 1세가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음으로써 북해에서 중부 이탈리아까지 이르는 프랑크 왕국의 중앙부를 차지한 로타리우스 1세에 의해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그는 사라센 해적으로부터 코르시카를 방어하는 한편 교황 베네딕토 3세에 대항하여 대립교황 아나스타시오 3세를 지원하다가 나중에 베네딕토 3세 편에 섰다. 이후 포르모소요한 8세간의 교황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포르모소의 편에 섰고, 878년 3월 처남인 스폴레토 공작 람베르토 1세와 함께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 요한 8세는 트루아로 피신한 뒤 서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람베르토와 아달베르트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879년 4월에 급사해버리면서, 그가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 후 람베르토가 급사하고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로만 2세가 개입해 요한 8세를 인정하라고 압박하자, 그는 요한 8세와 화해하고 그가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아달베르토 1세는 생전에 스폴레토 공작 귀도 1세의 딸이며 람베르토 1세의 누이인 로틸데와 결혼하여 아들 아달베르토 2세를 낳았다. 884년 아달베르토 1세가 사망한 뒤 직위를 계씅한 아달베르토 2세는 스폴레토의 귀도 가문과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89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귀도 3세와 함께 힘을 합쳐 프리올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와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상대로 맞서 싸웠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잡힌 뒤 베렝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장악한 후 석방되었다.

898년에는 베렝가리오 1세 편에 서서 스폴레토 공작 람베르토 2세를 상대로 싸웠다가 베렝가리오 1세가 패퇴한 뒤 또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람베르토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후 풀려난 그는 900년 루이 3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베렝가리오 1세 편에 섰다가 베렝가리오 1세가 패배하자 루이 3세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루이 3세가 베렝가리오 1세의 반격으로 축출되자 다시 베렝가리오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915년 아달베르토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귀도가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그는 920년경 만투아에 궁정을 세웠고, 924년 또는 925년에 투스쿨름 백작이자 로마 집정관인 테오필락트와 테오도라의 딸인 마로치아의 두번째 남편이 되었다. 마로치아가 그를 뒷배로 삼아 로마를 장악하려 들자, 교황 요한 10세는 이에 대응해 동생 피에르토를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하고 오르테 호숫가에 거점을 마련한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어 마로치아를 견제하게 했다.

928년, 귀도가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라테라노 궁전을 기습 공격해 피에트로를 체포하여 요한 10세가 보는 앞에서 사지를 절단했다. 이후 요한 10세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몇 달 만에 옥사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귀도와 마로치아 부부의 손아귀에 놓여졌지만, 정작 귀도는 오래 살지 못하고 929년 2월 3일에 사망했다. 사후 동생 람베르토가 그의 뒤를 이어 토스카나 변경백이 되었다. 그러나 931년 10월 이탈리아 국왕 위그가 그를 폐위시키고 토스카나 변경백에 자신의 형제인 보소네를 앉혔다. 하지만 보소네 역시 36년 위그를 상대로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체포된 후 생 베르나르-드-로망스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위그는 뒤이어 자신의 사생아우베르토를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했다. 943년 스폴레토 공작 사를리오가 위그의 강력한 압력에 의해 수도원에 강제 은퇴한 뒤, 우베르토는 스폴레토 공작이자 카메리노 변경백을 겸임했다. 946년 이브레아 변경백 베렝가리오 2세가 위그를 몰아내고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한 후, 우베르토는 베렝가리오 2세의 압박에 못 이겨 스폴레토를 보니파초 2세에게 넘겼지만 토스카나 변경백 직위는 유지했다. 962년 베렝가리오 2세의 아들인 이브레아 변경백 아달베르토 2세에 의해 교황령 북쪽을 빼앗긴 교황 요한 12세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오토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오토 1세는 즉시 이탈리아로 진군해 베렝가리오 2세를 격파하고 봉신으로 삼은 뒤 이탈리아 국왕에 즉위했다. 이후 북상하여 우베르토를 공격해 격파한 뒤 1년간 토스카나에서 축출했다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대가로 토스카나에 복귀하는 것을 허락했다.

969년경 우베르토가 사망한 뒤, 아들 우고가 토스카나 변경백에 올랐다. 그는 도시들간의 분쟁과 외부 세력의 개입, 용병들의 약탈, 치안 붕괴로 인해 지극히 혼란스러웠던 토스카나의 질서를 회복하고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일개 소도시에 불과했던 피렌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아르노 강 유역의 핵심 도시로 성장시켰고 바디아 피오렌티나(Badia Fiorentina) 수도원을 건설했다. 14세기 피렌체의 은행가, 상인이자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는 저서 <새로운 연대기(Nuova Cronica)>에서 우고가 토스카나 백국의 수도를 루카에서 피렌체로 옮겼다고 기술했지만, 이를 입증하는 당대의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사실무근으로 간주한다.

우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 오토 2세 부자의 이탈리아 방면에서의 핵심 조언자로서 로마를 통제하길 원하는 두 황제의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던 983년 오토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오토 3세가 3살의 나이에 로마왕이 되면서 제국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우고는 이 때를 틈타 세력 확장을 꾀했다. 986년 트라사문트 4세가 사망한 뒤 공석이 된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 직위를 겸임했으며, 993년 카푸아 대공이며 오토 3세의 가신을 자처했던 란테눌프 2세가 반란으로 인해 살해되자 군대를 이끌고 카푸아로 남하해 반란을 진압하고 판둘프 1세의 막내아들 라이둘프를 카푸아 대공에 세웠다. 또한 993년에 케른텐 공작이며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의 외손자인 오토의 딸 유디트와 결혼했다.

996년, 성년의 나이가 된 오토 3세는 우고의 위세가 너무 강하다고 여기고 스폴레토 공작의 직위를 이브레아의 콘라트에게 넘기게 했다. 우고는 이를 달게 받아들였고 황제의 사촌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와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와 함께 제국군 사령관으로서 이탈리아에서의 제국의 권력 유지에 힘을 보탰으며, 로마로 내려가서 통치를 행사한 황제를 호위했다.


1.4.5.1. 토스카나 변경백령 코르시카[편집]

780년대 이후로 동로마 제국코르시카에서 철수하면서 코르시카는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유럽과 이탈리아 북·중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프랑크 왕국은 이슬람 세력이 코르시카를 본거지로 해 해적질로 지중해 일대의 해안 지역들을 노략질하는 것을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781년 카롤루스 대제는 자신의 아들인 피핀 카를로만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워서 자신을 대신하여 이탈리아를 다스리게 했다.

806년 피핀은 프랑크인 제노바 백작이었던 아데마르를 코르시카로 파견했다. 아데마르는 제노바에서 함대를 이끌고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1년뒤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들이 다시 코르시카를 점령하려고 하자 카롤루스 대제가 파견한 무관장(constable) 버차드가 포르토 베키오 주변에서 해전을 벌여 승리했다.

하지만 809년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해적들이 다시 코르시카를 침략해 부활절에 아작시오를 점령해 약탈했다. 그러다가 825년 카롤루스 대제의 뒤를 이어 부활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던 루도비쿠스 1세는 자신의 아들인 로타리우스 1세이탈리아 국왕으로 임명했고, 로타리우스는 루카 백작인 보니파초와 함께 코르시카로 원정을 떠나 다시 재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로타리우스는 자신의 원정을 도운 보니파초에게 보답으로 토스카나 변경백과 함께 코르시카 지사로 임명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한 후 교황에게 명목항 코르시카의 통치권을 넘겨줬지만 교황령의 빈약한 힘으로 이곳의 통치권을 주장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9세기 중반 코르시카에 역병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살아 남은 자들은 내륙의 산속으로 도망쳤고, 또 일부는 레오 4세 통치 당시의 교황령으로 도피했다.

이같은 악조건 속에서 토스카나 변경백들은 이슬람 해적들로부터 코르시카를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846년 이슬람 세력의 일부인 아글라브 왕조에 의해 섬의 일부를 잃게 되었다. 아글라브 왕조는 60년 동안 코르시카의 일부를 점유했으나 결국 파티마 왕조의 공격 909년 북아프리카의 본토가 점령당한 후 일부 잔여 세력들이 남아 있었지만 파티마 왕조의 해군이 934~935년 사아, 사략전술로 제노바를 바롯한 서지중해 전역을 약탈했을 당시 공격대상중 하나로 찍혀 공격을 받았다.

이후 시기 미상이나 독일왕 오토 1세와 분쟁 중이었던 베렝가리오 2세에 의해 다시 재정복되었다. 하지만 962년 베렝가리오 2세와 오토 1세에게 붙잡혀 이탈리아 국왕에서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인 아달베르트가 코르시카로 피신한 후 오토 1세를 두려워해 그를 배신한 요한 12세의 협력하에 코르시카를 거점으로 이탈리아 본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부르군트 왕국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 편입된다.


1.5. 랑고바르드 왕국의 잔여 세력들[편집]



1.5.1. 스폴레토 공국[편집]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위니게스는 799년 4월 25일 교황 레오 3세가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에서 성 로렌스 성전으로 가던 중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성 에라스무스 수도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로 달려가서 교황을 카롤루스 대제가 있는 파데보른까지 호송하면서 신변을 보호했다. 802년 알 수 없는 이유로 루체리아에서 베네벤토 대공 그리말트 3세와 맞붙었다가 생포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815년 로마에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탈리아 국왕 베르나르도의 지시에 따라 로마로 진군해 진압했다. 822년 고령으로 집무를 더 이상 보기 힘들어지자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위니게스 사후 브레시아 시의 백작이었던 수포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했다. 그는 브레시아를 아들 마우링에게 넘겨주고 스폴레토에서 공무를 수행하다가 2년 만에 사망했다. 뒤이어 스폴레토 공국에서 궁전백을 역임하던 아델라트가 새 공작에 취임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5개월 만에 사망했고, 수포 1세의 아들 마우링이 새 공작에 취임했다. 아인하르트(Eginhard)[22]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며칠 만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사후 수포 1세의 또다른 아들 아델치스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아델치스는 10년간 공국을 이끌었다고 전해지나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프랑크 국왕 루도비쿠스 1세에 의해 알 수 없는 이유로 낭트 백작 랑베르 1세로 교체되었다. 랑베르 1세는 부임한 지 2년 만인 836년 토스카나 일대를 강타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베렝게르가 새 공작에 선임되었다. 베렝게르에 대한 행적은 837년 7월에 파르파 수도원에 상당량의 기부금을 바친 사실만 알려졌으며, 843년 랑베르 1세와 롬바르디아 국왕 피핀 카를로만[23]의 딸 아델라에데의 아들인 귀도 1세로타리우스 1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것을 볼 때 그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843년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귀도 1세는 베네벤토 공국의 대공 지코의 딸 이타와 결혼함으로써 베네벤토 공국과의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후 베네벤토 공국의 내전에 개입해 살레르노 공국지코눌프를 공개적으로 지원하면서도 지코눌프에 대적하는 라델치스 1세에게도 일부 병력을 비밀리에 보내주고 상당한 뇌물을 받아냈다. 846년 사라센이 성 피에트로 수도원을 약탈하는 등 라치오에서 활개치자 토벌에 나서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사라센들이 성 피에트로 수도원의 보물을 전부 챙기고 탈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858년 카푸아 백국의 란도 1세와 살레르노 공국의 아데마르 대공이 맞붙었을 때 아데마르를 지원하면서 소라와 아르피노의 리리 강 계곡의 소유권을 확보했다.

860년 귀도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람베르토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마르시 백작 제라르, 텔레세의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 말레포토, 보이아노의 가스탈트 완델베르토와 함께 바리 토후국의 에미르 사우단이 카푸아와 테라 데 라보로를 심각하게 약탈한 뒤 바리로 돌아가는 것을 저지했다. 그러니 뒤이은 혈투 끝에 사라센이 길을 뚫는 데 성공하면서, 사우단이 바리로 돌아가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860년 4월 카메리노 백작 힐데베르트와 함께 이탈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르시에서 루도비코 2세의 군대에게 패배한 뒤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에게 망명했다. 루도비코 2세는 한동안 베네벤토를 포위했다가 람베르토 1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재차 맹세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스폴레토에 복귀하는 것을 허락했다. 866년 카푸아 백작 란둘프 2세를 체포한 루도비코 2세는 자신을 도운 람베르토에게 카푸아 백국을 가지도록 허락했다.

867년 11월 13일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선출된 후 12월 13일 교황의 대관식이 열렸을 때, 람베르토 1세는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서는 교황령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루도비코 2세의 지시에 따라 로마를 약탈했다. 람베르토는 즉시 파문당했지만, 정작 루도비코 2세는 하드리아노 2세와 화해하고 그를 복권시키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람베르토 1세는 871년 루도비코 2세가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고 있을 때 살레르노 공국의 구아페르,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와 동맹을 맺고 루도비코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 때 루도비코 2세가 베네벤토에 억류되면서 반란이 성공하는 듯했지만, 아델치스가 사라센의 침략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루도비코 2세를 풀어주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북이탈리아에 돌아온 루도비코 2세는 람베르토 1세를 스폴레토 대공위에서 해임하고 아델치스의 아들 수포 2세를 새 공작으로 선임했다. 람베르토 1세는 베네벤토로 망명했고, 루도비코 2세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그를 잡으러 시도할 수 없었다.

875년 루도비코 2세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한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2세는 876년 수포 1세를 사임시키고 람베르토 1세를 스폴레토 공작에 복위시켰다. 샤를 2세는 이에 더해 람베르토 1세의 형제 귀도 3세를 교황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카메리노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샤를 2세는 그해 7월 16일 폰티온에서 스폴레토 공국의 상당 부분을 교황에게 기부하기로 해,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교황과 가급적 잘 지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877년 샤를 2세가 사망했다. 람베르토 1세는 샤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보다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국왕이 될 야심을 품고 로마로 진군해 878년 3월 토스카나 변경백 아달베르토 1세와 함께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 요한 8세는 트루아로 피신한 뒤 서프랑크 국왕 루이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람베르토와 아달베르토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879년 4월에 급사해버리면서, 그가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람베르토 1세는 로마 공략에 실패한 뒤 목표를 카푸아로 돌리고 880년 카푸아 공방전을 감행하다가 도중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 귀도 2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귀도 2세는 교황령을 공략하여 영토를 남서쪽으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교황 요한 8세는 협상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하고 교황령으로 쳐들어가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요한 8세는 카를 3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삼아줄 테니 교황령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간질과 뇌졸중으로 시달리고 바이킹의 침략에 직면했던 카를 3세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882년 2월 카를 3세가 라벤나에서 회의를 소집해 양자의 화해를 주선했다. 귀도 2세와 삼촌인 카메라노 변경백 귀도 3세는 빼앗아간 교황령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요한 8세는 '두 귀도'가 약속을 지킬 기미가 없다며 카를 3세에게 응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렇듯 카를 3세가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으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듯했지만, 귀도 2세는 883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 귀도 4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삼촌 귀도 3세가 스폴레토 공작을 맡았다. 885년 1월 7일, 아르눌프가 이끄는 바이에른군과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의 군대가 스폴레토 공국 북쪽 경계에 이르자, 귀도 3세는 파비아로 달려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3세에게 그동안 자신이 교황령과 카를 3세에게 대적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해 사면을 받아냈다. 이후 새 교황 스테파노 5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사라센과 동맹을 맺고, 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가 베네벤토를 공략하고 아이울프 2세를 포로로 잡았지만, 얼마 후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스폴레토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 사이에 아이울프 2세가 감옥에서 탈출해 베네벤토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887년 11월 아르눌프가 카를 3세를 퇴위시키고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자, 랭스의 대주교이자 친척인 폴크가 카롤루스 왕조와 혈연 관계가 있었던 귀도 3세를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에 추대했다. 귀도 3세는 즉시 호응해 프랑스로 향했지만, 888년 1월 파리 백작 외드가 바이킹족을 물리쳐 왕국을 구해낸 공로로 서프랑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국왕이 되었다. 이후 외드와의 정쟁에서 밀려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889년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한 베렝가리오 1세를 성공적으로 물리친 그는 파비아에서 롬바르디아 철관을 쓰고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은 귀도 3세의 조카이자 귀도 2세의 아들인 귀도 4세에게 돌아갔다.

귀도 4세는 스폴레토 공작이 된 뒤 귀도 3세의 통제를 받다가 894년 12월 귀도 3세가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에게 패배한 뒤 후퇴하던 중 타로 강 근처에서 급사하면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895년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고 롬바르디아 테마를 건설한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레온 6세의 부름을 받고 발칸 반도로 돌아가서 불가리아 제1제국시메온 대제와 맞섰다. 그는 이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에 주둔한 동로마군이 약해진 틈을 노려 공세를 개시해 베네벤토에서 동로마군을 축출한 뒤 베네벤토 대공을 겸임했다.

이후 여동생 이타의 남편인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1세에게 베네벤토 섭정을 맡겼지만, 과이마르 1세가 베네벤토로 가던 도중에 동로마 황실에 의해 가스탈트로 선임된 아벨리노의 아델페리오가 도중에 습격해 포로로 삼았다. 귀도 4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아벨리노를 포위 공격해 과이마르 1세를 돌려받았다. 897년 귀도 3세의 아들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람베르토를 만나러 로마로 갔다가 테베레 강변에서 귀도 3세의 시종이었던 알베리크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후 알베리크는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에 선임되었고, 베네벤토 대공에는 지난날 스폴레토 공국에 망명했던 라델치스 2세가 귀도 3세의 아내이자 그의 누이인 아게투르데의 지원에 힘입어 복위했다.

알베리크는 귀도 4세를 살해하고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뒤 899년 또는 900년에 베렝가리오 1세의 대 마자르 전쟁에 참여한 공으로 베렝가리오 1세로부터 스폴레토와 카메라노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904년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와 함께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를 폐위시키고 세르지오 3세를 교황으로 옹립했다. 909년 테오필락트 1세의 딸 마로치아와 결혼했다. 일부 학자들은 마로치아가 세르지오 3세와 성관계를 맺으면서 태어난 사생아로 알려진 요한 11세는 사실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명백한 근거는 없다. 또한 훗날 로마의 통치자가 된 알베리크[24]와 네피 주교 세르지오, 교황 베네딕토 7세의 아버지인 다비드 또는 테오다투스가 그의 자식으로 전해진다.

917년. 알베리크는 테오필락트의 지원에 힘입어 로마인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들을 숙청하다가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고, 결국 922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즈음에 스폴레토에서 보니파초 1세라는 인물이 스폴레토 공작을 자처했다는 일부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볼 때 스폴레토에서도 권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니파초 1세의 통치에 관련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924년 교황 요한 10세의 형제인 피에트로가 마로치아의 권세에 위협을 느끼고 형을 설득해 스폴레토 공작에 부임했을 즈음에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피에트로는 스폴레토 공작 부임 후 오르테 호숫가에 거점을 마련한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926년 로마로 귀환해 귀도와 마로치아를 일시적으로 제압하고 권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928년 토스카나 변경백 귀도가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라테라노 궁전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귀도가 이리 나올 줄 예상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붙잡힌 뒤 형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절단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요한 10세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몇 달 만에 옥사했다. 이후 보니파초 1세의 아들인 테오발트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929년 베네벤토 공국란둘프 1세, 살레르노 공국과이마르 2세와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령인 루카니아와 칼라브리아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황제에게 봉사하는 내시로 삼겠다"며 전원 거세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과이마르 2세는 동로마 제국의 반격이 거세지자 동로마 제국에 도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936년 테오발트 1세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국왕 위그는 이브레아 변경백이었던 안스카리오를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했다. 939년 위그가 라벤나를 직할지로 삼고 중앙집권화 및 확장 정책을 추진하자, 안스카리오는 로마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알베리크와 동맹을 맺고 위그에 대항하려 했다. 이에 위그는 그가 자신의 정책에 방해된다고 여기고, 940년 봄 스폴레토 귀족 사를리오에게 안스카리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는 이에 맞서려 했지만 다른 귀족들이 사를리오에게 호응하는 바람에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를리오는 안스카리오의 뒤를 이어 스폴레토 공작이 되었지만, 943년 위그가 사를리오에게 안스카리오를 살해한 죄를 물어 수도원으로 은퇴하도록 강요하고 토스카나 변경백을 맡고 있던 사생아 우베르토가 스폴레토 공작을 겸하게 했다. 946년 이브레아 변경백 베렝가리오 2세가 위그를 몰아내고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한 후, 우베르토는 베렝가리오 2세의 압박에 못 이겨 스폴레토를 보니파초 2세에게 넘겼다. 보니파초 2세는 아들 테오발트 2세와 함께 스폴레토를 다스리다가 953년에 사망했다. 이후 테오발트 2세가 단독 공작이 되었지만, 959년 베렝가리오 2세가 오토 1세를 지지하는 인사들을 숙청할 때 그 역시 오토파로 지목되어 축출되었다. 파르파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테오발트 2세가 물러난 후 '트라사문트(트라사문트 3세)'라는 인물이 공작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교차검증할 다른 문서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실존 여부가 불분명하다.

961년 베렝가리오 2세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하게 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967년 동로마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베네벤토 대공 판둘프 1세에게 스폴레토 공국을 겸임하게 하며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판둘프 1세는 이에 따라 동생 란둘프 3세와 함께 병력을 소집한 뒤 968년 오토 1세의 남부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해 바리 포위전에 가담했지만, 969년 보비노 전투에서 동로마군의 역습으로 참패하고 생포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끌려갔다. 이후 요안니스 1세니키포로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에 오른 뒤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와 자신의 조카딸 테오파노를 결혼시키는 과정에서 석방되었다.

973년, 아테눌프 2세의 아들이었으며 940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백부 란둘프 1세에 의해 공동 대공에 선임되었다가 얼마 안가 추방당한 란둘프가 나폴리 공작 마리누스 2세와 아말피 공화국만소 1세의 지원에 힘입어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 기술프 1세를 몰아내고 살레르노 공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이에 판둘프 1세가 즉각 살레르노로 진격해 란둘프를 몰아내고 기술프 1세를 복위시켰다. 978년 기술프 1세가 사망한 뒤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의 후계국인 베네벤토 공국, 살레르노 공국, 스폴레토 공국, 카메리노 공국, 카푸아 백국 전역이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동로마 제국령 남부 이탈리아마저 석권하기 위해 공세를 계획하던 그는 981년 원정을 채 감행하기 전에 사망했다. 장남 란둘프 4세는 카푸아의 베네벤토 공국을 상속받았고, 차남 판둘프 2세는 살레르노 공국을 상속받았다. 반면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공국은 오토 2세에 의해 회수되어 트라사문트 4세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트리사문트 4세의 공작으로서의 업적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으며, 986년 사망한 뒤 토스카나 변경백 우고 1세가 스폴레토 공작을 겸임했다.

우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 오토 2세 부자의 이탈리아 방면에서의 핵심 조언자로서 로마를 통제하길 원하는 두 황제의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던 983년 오토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오토 3세가 3살의 나이에 로마왕이 되면서 제국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우고는 이 때를 틈타 세력 확장을 꾀했다. 993년 카푸아 대공이며 오토 3세의 가신을 자처했던 란테눌프 2세가 반란으로 인해 살해되자 군대를 이끌고 카푸아로 남하해 반란을 진압하고 판둘프 1세의 막내아들 라이둘프를 카푸아 대공에 세웠다. 또한 993년에 케른텐 공작이며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의 외손자인 오토의 딸 유디트와 결혼했다.

996년, 성년의 나이가 된 오토 3세는 우고의 위세가 너무 강하다고 여기고 스폴레토 공작의 직위를 이브레아의 콘라트에게 넘기게 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이 직위를 오래 맡지 못하고 997년에 사망했고, 카푸아 성직자 바사오의 아들 아데마르가 뒤이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999년, 오토 3세는 자신의 충직한 신하인 란데눌프 2세를 살해한 것에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라이둘프를 공격해 생포하여 독일로 압송한 뒤 아데마르를 카푸아 대공에 세웠다.그러나 베네벤토 공국의 대공 판둘프 2세가 이에 불복해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에 반감을 품은 카푸아인들을 부추겨서 그해 7월 정변을 일으켜 카푸아에서 아데마르를 축출하게 한 뒤 동생 란둘프 7세를 카푸아 대공으로 세웠다. 이후 아키노의 가스탈트로 부임한 것을 끝으로, 아데마르의 기록은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1.5.2. 베네벤토 공국[편집]

774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켰다. 아레치스 2세는 프랑크 왕국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베네벤토 대공의 칭호를 채택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예상되는 공세를 대비해 살레르노로 궁정을 옮긴 뒤 살레르노 시와 해안을 수비하기 위해 카스텔로 디 아레칠리(Castello di Arechi)를 건설했다. 이 성채는 중세 이탈리아의 가장 견고한 성채로 손꼽혔다. 그리고 랑고바르드 국왕 로타리가 제정한 법률을 개정해 독자적으로 법률을 집행했으며, 예술과 교육을 후원했다.

한편, 아레치스 2세는 저명한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파울 부제에게 <히스토리아 로마나(Historia Romana: 로마인의 역사)>를 집필하도록 의뢰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파울 부제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Historia Gentis Langobardorum)>를 집필하도록 의뢰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787년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 이르자,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모면하기 위해 상당량의 선물과 함께 아들 로무알트를 보냈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는 로무알트를 생포한 뒤 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가 베네벤토를 손쉽게 공략했다. 하지만 아레치스 2세가 웅거하고 있는 살레르노 공략에 실패했고, 아레치스 2세의 협상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아레치스 2세는 아들 그리말트 3세를 인질로 보내고 프랑스 왕국의 봉신을 자처하며 연간 공물로 7,000 솔리두스를 바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또한 아르케, 아퀴노, 아르피노, 소라, 테아노, 카푸아를 교황령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도시를 교황에게 넘기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연합한 뒤 데시데리우스의 아들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한 아델치스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787년 8월 26일 아레치스 2세가 사망한 뒤, 베네벤토인들은 프랑크 왕국에 인질로 보내졌던 그리말트 3세를 새 공작으로 추대하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아델페르가가 섭정하게 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그를 보내주는 것을 망설였지만, 그가 "앞으로 프랑크 왕국에 대적하지 않고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하자 이를 믿고 보내줬다. 788년 초 베네벤토 공국으로 돌아온 그리말트 3세는 시칠리아의 파트리키우스인 테오도로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아델치스를 앞세워 칼라브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즉시 스폴레토 공작 힐데프란트위니게스 위하의 프랑크군과 연합해 동로마군을 협공해 궤멸시켰다. 아델치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고, 테오도로스는 생포되었으며, 4,000명의 동로마군이 사살되고 1,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지내던 그리말트 3세는 790년경 마음을 달리 먹고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동로마 귀족이며 콘스탄티노스 6세의 왕비 암니아의 마리아의 할아버지인 필라레토스의 딸 에우안티아(Euanthia)와 결혼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이며 롬바르드 국왕인 피핀 카를로만은 이에 자극받아 791년 베네벤토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792년 피핀의 형인 아키텐 왕 루트비히는 베네벤토 공국을 향한 2번째 공세를 준비했지만 기근으로 인해 취소했다.

그리말트 3세는 792년 이래로 주조한 동전에 카롤루스의 이름을 더 이상 새기지 않았고, 자신의 칭호를 프린켑스로 지정했다. 또한 동전에 "Langobardorum Genti"라는 문구를 새겼는데, 이는 랑고바르드족의 지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800년 카롤루스 대제는 피핀에게 베네벤토 공략을 재차 맡겼지만,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말트 3세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실패했다. 802년, 그리말트 3세는 루체리아에서 스폴레토 공작 위니게스를 생포했다가 1년 후에 석방시켰다.

806년 그리말트 3세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뒤, 스톨세이스(stoleseyz), 즉 재무관을 맡고 있던 그리말트 4세가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는 그리말트 3세의 반 프랑크 정책을 지속했지만 812년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카에티 백작령을 이탈리아 중부에서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서 통치를 행사하던 스폴레토 공국에 넘기고 매년 25,000 두카트를 지불하는 대가로 평화를 약속받았다. 이 이 금액은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하고 루도비쿠스 1세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후 7,000두카트로 삭감되었다.

이후 궁정을 살레르노에서 베네벤토로 옮긴 그는 817년 나폴리 시민들이 베네벤토 공국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으로 이탈하자 이를 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아세렌차의 지코와 콘차의 라델치스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대공에 선임된 지코의 행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파편적으로 전해지는 중세 이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나폴리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나폴리의 수호성인인 성 제나로의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고 한다. 또한 란둘프라는 인물을 가스탈트[25]에 선임했다. 란둘프는 본거지 명칭을 지코폴리스(Sycopolis)라고 정함으로써 그의 은덕에 감사를 표했다. 훗날 그의 후예들로 구성된 카푸아 가문은 남이탈리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832년 지코눌프가 사망한 뒤, 장남 지카르드가 베네벤토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는 소렌토, 아말피, 나폴리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836년 7월 세 도시와 5년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상인들에게 통행권을 인정했지만, 전쟁은 이후에도 반복되었다. 837년 지카르드의 공세에 밀린 나폴리 공작 안드레아 2세는 시칠리아 토후국에 사절을 보내 막대한 급료와 무제한의 약탈 권한을 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호응한 아랍인들이 들어오면서, 무슬림의 영향력은 남부 이탈리아에 미쳤다.

838년 아말피 시를 해상을 통해 공략하는 데 성공하고 그곳의 시민들을 살레르노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한 일부 아말피 상인들을 고용해 무슬림의 지배하에 놓인 에올리에 제도에 있던 사도 바르톨로메오의 유물을 회수하게 했다. 그는 이 유물을 살레르노 대성당에 안치시켰다. 그러나 839년 돌연 암살당했는데, 암살자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이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추정하는 재무관 라델치스 1세는 즉시 대공을 자처하고, 지카르드의 동생 지코눌프타란토에 감금했다. 이에 지난날 지코 대공에 의해 카푸아의 가스탈트에 선임되었던 라둘프가 841년 지코눌프를 구출했고, 지코눌프가 살레르노로 가서 독자적인 공국을 세우면서,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벤토 공국은 살레르노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으로 양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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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년 베네벤토 공국과 살레르노 공국의 분열.

베네벤토 공국이 라델치스 1세를 따르는 세력과 지코눌프를 따르는 세력으로 양분된 뒤, 양자는 공국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841년, 라델치스는 자력으로 지코눌프와 란둘프를 이기지 못하자 시칠리아 토후국에 막대한 재물을 바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많은 아랍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해 카푸아를 약탈했고, 란둘프는 트리프리스코(Triflisco) 언덕 인근에 새로운 수도를 세워야 했다. 지코눌프는 이에 대응해 많은 아랍인 용병들을 끌여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아랍인 전사들이 남부 이탈리아로 몰려들었고, 남부 이탈리아는 이들이 벌이는 약탈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특히 847년에 아글라브 왕조의 노예 출신인 칼푼이 바리를 탈취하고 바리 토후국을 건국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무슬림 국가가 최초로 등장했다.

851년, 봉신국인 베네벤토 공국의 혼란과 무슬림들의 이탈리아 진출을 보다못한 루도비코 2세가 두 사람에게 당장 타협하지 않으면 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라델치스와 지코눌프는 베네벤토 공국을 절반으로 나눠 가지는 선에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지코눌프가 이끄는 살레르노 공국이 베네벤토 공국으로부터 이탈했다. 몇 달 후 라델치스 1세가 사망했고, 장남 라델가르가 대공에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하고 3년만인 854년에 사망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아들로 왈페르를 두었지만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형제 아델치스가 대공을 계승했다.

856년, 아델치스는 살레르노 공국의 공작 아데마르와 동맹을 맺고 바리 토후국을 세운 무슬림을 물리치려 했으나 참패했다. 그 후 무슬림군이 두 공국으로 쳐들어가 막대한 재물을 약탈하고 수많은 인구를 끌고 갔다. 결국 860년 바리 에미르 사우단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86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는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기로 마음먹고 북부 이탈리아의 전사들에게 루세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병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아 출진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루도비코 2세는 황후 엥겔베르가와 함께 캄파니아 일대를 여행했다. 이에 아델치스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조속히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지 않으면 무슬림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하고 로마까지 몰아붙일 테니 서둘러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867년 봄, 비로소 바리 토후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한 루도비코 2세는 마테라를 공략한 뒤 철저히 파괴하고 오리아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무슬림이 장악한 바리와 타란토와의 교통로가 끊어졌다. 이후 황제는 베네벤토에 도착한 루도비코 2세는 868년 겨울을 베네벤토에 머물면서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바리 토후국을 향한 합동 공세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마침 바리 토후국이 아드리아해 연안을 연이어 습격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던 바실리오스 1세는 루도비코 2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이후 루도비코 2세가 이끄는 제국군과 아델치스의 베네벤토군, 동로마 함대가 합동 공격을 펼친 끝에 871년 2월 바리를 공략함으로써 바리 토후국은 24년 만에 멸망했다.

아델치스는 바리 토후국이 지배하던 아풀리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기를 바랐지만, 루도비코 2세는 그가 그다지 유순하지 않은 가신이라 여기고 아풀리아를 넘겨주길 거부했다. 게다가 베네벤토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켜서 베네벤토를 완전히 통제하려 했다. 그러자 아델치스는 베네벤토에 머무는 황제 일행을 습격했고, 루도비코 2세는 황후와 함께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40일간 억류되었던 황제는 다시는 베네벤토로 오지 않을 것이며 랑고바르드인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야 풀려났다.

이후 신성로마제국과 관계를 끊고 동로마제국에게 충성을 서약한 그는 무슬림 해적들의 맹공으로 곤경에 처한 교황령이 동로마제국에 구원을 요청할 때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876년 바실리오스 1세가 바리에 총독부를 설치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그는 이번에는 아랍 세력에 접근하여 동로마제국을 축출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기 전인 878년 5월 말에 돌연 암살당했다. 암살 배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 베네벤토 대공에 선임된 왈페르 본인 또는 추종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왈페르는 재위 말년에 무슬림 세력과 연합하여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려 했던 숙부와는 달리 바리의 동로마 총독과 우호관계를 맺고, 교황령에 사절을 보내 무슬림들의 습격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879년 카푸아 백작 란둘프 2세가 사망한 후 계승 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란둘프 3세에 맞서 싸우는 판데눌프를 지원했다. 881년 5월 아델치스의 자식들을 지지하는 반대 세력에 의해 폐위되어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탈옥에 성공한 그는 바리에 망명했고, 뒤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하여 프로토스파타리우스에 선임되었고 오리아 시의 행정관이 되었다.

왈페르를 몰아낸 베네벤토인들에 의해 대공에 선임된 아델치스의 장남 라델치스 2세는 885년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의 침공으로 칼라브리아를 상실하면서 위신이 실추된 틈을 탄 동생 아이울프 2세의 정변으로 인해 폐위된 후 베네벤토 외곽으로 추방되었다. 뒤이어 대공을 맡은 아이울프 2세는 얼마 후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의 공세로 인해 베네벤토를 빼앗기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스폴레토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스폴레토 공국까지 공격하면서 귀도 3세가 이를 막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탈출해 베네벤토로 귀환했다. 887년 바리 총독 테오필락토스가 가릴리아노강 유역의 무슬림들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에 착수한 틈을 타 바리를 기습 공략했지만, 동로마제국의 봉신인 나폴리 공작 아타나시우스가 즉시 반격에 착수하자 바리를 도로 내주고 베네벤토로 철수했다.

이후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맹공을 퍼부으면서 산타 세베리나, 레기온, 타오르미나, 트로파 등 수많은 도시와 마을을 상실하고 베네벤토마저 포위되는 형국에 처하자, 스폴레토 공국과 카푸아 백국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891년 10월에 사망했고, 아들 우르수스가 배네벤토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우르수스 역시 동로마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892년경 칼라브리아의 스트라테고스인 시바티키오스에 의해 베네벤토가 공략되면서 폐위되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설치한 랑고바르디아 테마의 일부로 전락한 베네벤토 공국은 895년 스폴레토 공작 귀도 4세가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시메온 대제와의 전쟁에 관심이 집중된 틈을 타 베네벤토를 탈취하고 베네벤토 대공을 겸임했다. 이후 여동생 이타의 남편인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1세에게 베네벤토 섭정을 맡겼지만, 과이마르 1세가 베네벤토로 가던 도중에 동로마 황실의 중용을 받던 아벨리노의 아델페리오가 도중에 습격하는 바람에 생포되었다. 귀도 4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아벨리노를 포위 공격해 과이마르 1세를 돌려받았다.

897년, 귀도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친척인 람베르토를 만나러 로마로 갔다가 테베레 강변에서 귀도 3세의 시종이었던 알베리크 1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후 알베리크 1세는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에 선임되었고, 베네벤토 대공에는 지난날 스폴레토 공국에 망명했던 라델치스 2세가 귀도 3세의 아내이자 그의 누이인 아게투르데의 지원에 힘입어 복위했다. 그러나 900년 카푸아 백작 아테눌프 1세에 의해 폐위되면서 베네벤토 공국은 카푸아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베네벤토를 최종적으로 장악한 카푸아 백작 아테눌프 1세는 901년 아들 란둘프 1세를 베네벤토 공동 대공에 선임하고 베네벤토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했다. 베네벤토 주교 피에트로가 카푸아 가문의 지배에 맞서 정변을 꾀했지만, 아테눌프 1세는 이 음모를 조기에 막아내고 피에트로를 살레르노로 추방했다. 903년 아말피 공화국과 나폴리 백작 그리고리오스 4세와 동맹을 맺고 가릴리아노강 유역으로 침투한 사라센을 격파했다. 이후 사라센에 대적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봉신을 자처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공물을 바쳤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헀다. 이후 사라센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추진했지만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910년에 사망했다.

아테눌프 1세 사후 두 아들 란둘프 1세아테눌프 2세가 베네벤토 와 카푸아 대공을 공동으로 맡았다. 이후 나폴리 공작 그리고리오스 4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으며,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지속하면서도 봉신을 자처한 아버지와는 달리 황제의 가신이 되겠다고 서약하지 않았다. 915년, 란둘프 1세는 아버지가 추진한 사라센에 대항한 원정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스폴레토 공국의 알베리크 1세, 살레르노 공국과이마르 2세, 교황 요한 10세, 바리 총독부의 스트라테고스인 니키타스 피킨기오스와 연합했다. 이때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나폴리 전임 백작 아나스타시오스 2세의 딸 게마와 결혼헀고, 동생 아테눌프 2세의 딸 가이텔그리마(Gaitelgrima)를 과이마르 2세와 결혼시켰으며, 아들 아테눌프 3세를 과이마르 2세의 딸 로틸다와 결혼시켰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의 알베리크 1세가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연합군에 지원병을 파견했다.

915년 6월, 연합군은 캄포 바카노, 비아 카시아, 티볼리 및 비코바로 등지에서 무슬림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이에 알리쿠(Alliku)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가릴리아노 강 인근의 요충지인 트레토로 철수했다. 연합군은 트레토를 포위하여 3개월간 맹공을 퍼부었고, 동로마 함대는 해상에서 구원군이 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식량이 바닥난 무슬림들은 포위망을 뚫고 시칠리아로 도피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전원 죽거나 사로잡혔다.

914년 또는 916년, 아테눌프 1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안티파토스와 파트리키오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921년 아풀리아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이 때를 틈타 아스콜리 요새를 공략하고 바리 총독부의 새 스트라테고스인 오르솔레오스를 처단했다. 그러나 922년에서 925년 사이에 사라센와 슬라브 해적들의 습격으로 인해 캄파니아가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925년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의미로 제국으로부터 받은 칭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929~934년 살레르노의 과이마르 2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령 아풀리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헀다. 동로마 제국은 935년 파트리스 직책을 맡고 있던 코스마스에게 11척의 함대를 이끌고 슬라브 함선 7척과 함께 아풀리아로 파견했지만 혼란 수습에 실패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베네벤토와 살레르노 대공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국왕 우고와 동맹을 맺었다. 란둘프 1세는 이에 대응해 형제 아테눌프 2세 및 아들 아테눌프 3세와 함께 나폴리 공작 요안니스 3세와 상호 원조 협약을 체결했다.

936년, 란둘프 1세는 아풀리아 지역의 만프레도니아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937년, 우고 왕에게 고용된 마자르족이 론 계곡을 거쳐 이탈리아로 행진해 캄파니아로 진입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격퇴에 실패했고, 마자르족은 광범위한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고 돌아갔다. 940년 란둘프 1세가 파견한 베네벤토군이 동로마 제국에 소속된 마테라를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란둘프 1세는 911년 동생 아테눌프 2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고, 933년 아들 아테눌프 3세를 공동 대공으로 선임했다. 940년 아테눌프 2세가 죽자 조카 란둘프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지만 모종의 이유로 추방했다. 이후 또다른 아들 란둘프 2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란둘프 1세가 943년 10월 4일에 사망한 뒤, 란둘프 2세가 아테눌프 3세를 살레르노 공국으로 쫓아내고 권좌에 올랐다. 이후 장남 판둘프 1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워서 후계 계도를 공고히 한 그는 살레르노 공국을 결합시켜서 장차 랑고바르드 왕국을 부활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946년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2세가 죽자, 나폴리 공작 요안니스 3세와 동맹을 맺고 살레르노 공국의 새 대공 기술프 1세를 축출했다. 그러나 아말피 공화국의 마스탈로의 급습으로 인해 카바 계곡에서 패배했고, 기술프 1세는 살레르노 대공으로 복위했다. 이후 정책을 바꿔서 나폴리 공국과 동맹을 끊고 기술프 1세와 연합해 나폴리를 공격하여 놀라 시를 공략했다.

950년 아퀴노의 가스탈트인 아테눌프 메갈루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한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인 알리게르노가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기술프 1세와 함께 몬테 카시노로 이동해 아테눌프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몬테 카시노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살레르노 공국과 함께 영토를 분할했다. 955년 아풀리아 지역민들이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지만, 동로마 제국이 이를 손쉽게 진압하고 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오자 동로마 제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961년 란둘프 2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 판둘프 1세란둘프 3세가 카푸아-베네벤토 연합 대공국을 공동으로 이끌었다. 965년 12월 16일 로마 귀족들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와 손을 잡고 자신들의 권력을 통제하려는 교황 요한 13세를 체포해 캄파니아의 로프레도 성에 감금했다. 요한 13세는 감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카푸아로 달아났고, 판둘프 1세는 교황에게 기꺼이 은신처를 제공했다. 요한 13세는 이에 보답하고자 카푸아 교구를 관구로 승격시키고 판둘프 1세의 동생 조반니를 카푸아 관구의 첫 관구장 주교로 선임했다. 10개월 후 교황이 로마로 돌아갈 때 호위병을 제공했다.

967년 오토 1세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판둘프에게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공국을 넘겨주면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에 따라 동생과 함께 병력을 소집한 뒤 968년 오토 1세의 남부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란둘프 3세가 갑작스러운 병환에 걸려 베네벤토로 간 뒤 얼마 안가 사망하자, 판둘프 1세는 신속하게 베네벤토로 돌아와 아들 란둘프 4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우고 란둘프 3세의 두 아들 판둘프 2세와 카푸아의 란둘프 7세를 추방했다.

이후 오토 1세의 원정군에 재합류한 그는 바리 포위전에 가담했지만, 969년 보비노 전투에서 동로마군의 역습으로 참패하고 생포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끌려갔다. 970년 그가 부재한 동안 동로마군이 카푸아를 포위 공격했고, 나폴리 공작 마리누스 2세는 베네벤토 공국의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이후 요안니스 1세니키포로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에 오른 뒤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와 자신의 조카딸 테오파노를 결혼시키는 과정에서 석방되었다. 그는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었다.

973년, 아테눌프 2세의 아들이었으며 940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백부 란둘프 1세에 의해 공동 대공에 선임되었다가 얼마 안가 추방당한 란둘프가 나폴리 공작 마리누스 2세와 아말피 공화국만소 1세의 지원에 힘입어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 기술프 1세를 몰아내고 살레르노 공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이에 판둘프 1세가 즉각 살레르노로 진격해 란둘프를 몰아내고 기술프 1세를 복위시켰다. 978년 기술프 1세가 사망한 뒤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의 후계국인 베네벤토 공국, 살레르노 공국, 스폴레토 공국, 카메리노 공국, 카푸아 백국 전역이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동로마 제국령 남부 이탈리아마저 석권하기 위해 공세를 계획하던 판둘프 1세는 981년 원정을 채 감행하기 전에 사망했다. 장남 란둘프 4세는 카푸아의 베네벤토 공국을 상속받았고, 차남 판둘프 2세는 살레르노 공국을 상속받았다. 반면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공국은 오토 2세에 의해 회수되어 트라사문트 4세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981년 중반, 베네벤토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란둘프 4세를 축출하고 판둘프 1세의 동생 란둘프 3세의 아들이며 지난날 란둘프 3세가 사망한 뒤 판둘프 1세에 의해 추방당했던 판둘프 2세를 새 대공으로 추대했다. 그는 카푸아 공국으로 피신한 뒤 아말피 공화국만소 1세에 의해 축출되어 카푸아로 망명한 형제 판둘프 2세와 합세한 뒤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을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982년 오토 2세로부터 타란토사라센 토벌에 함께하라는 통보를 받자, 이 기회에 황제의 눈에 들어서 베네벤토와 살레르노를 탈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할 기회를 얻기로 했다.

982년 7월 14일 콜로네 곶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은 시칠리아 토후국의 에미르 아불 카심을 전사시킴으로써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사라센들이 전의를 상실하기는 커녕 더욱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숨겨두고 있던 예비 기병대가 뛰쳐나와 신성 로마 제국군의 측면과 배후를 습격하는 바람에 도리어 신성 로마 제국군이 궤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4,000여 명이 사살되었고,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하인리히 1세, 메르제부르크 변경백 귄터, 풀다 수도원장을 포함한 19명의 독일 백작들이 죽었다. 황제 오토 2세 조차 전장을 간신히 탈출한 뒤 동로마 선박을 타고 로사노로 피신했다가 로마로 귀환했다. 이때 란둘프 4세와 판둘프 2세 역시 전사했다.

두 사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판둘프 2세는 카푸아 대공을 겸임하려 했지만 오토 2세에게 제지되었다. 오토 2세는 란둘프 4세의 또다른 형제인 란데눌프 2세를 카푸아 대공으로 세웠다. 987년, 판둘프 2세는 자신의 아들 란둘프 5세를 베네벤토의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993년 부활절에 란데눌프 2세가 테라노 백작 라이둘프의 선동을 받은 백성들에게 피살당했고, 라이둘프가 카푸아 대공에 추대되었다. 99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가 자신의 충직한 신하인 란데눌프 2세를 살해한 것에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라이둘프를 공격해 생포하여 독일로 압송한 뒤 아데마르를 카푸아 대공에 세웠다. 판둘프 2세는 이에 불복해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에 반감을 품은 카푸아인들을 부추겨서 그해 7월 정변을 일으켜 카푸아에서 아데마르를 축출하게 한 뒤 동생 란둘프 7세를 카푸아 대공으로 세웠다.

1.5.3. 살레르노 공국[편집]

839년, 베네벤토 대공 지카르드가 정체불명의 인물이 사주한 암살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재무관이었던 라델치스 1세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대공에 선임되었고, 지카르드의 동생 지코눌프타란토에 억류되었다. 이때 지코에 의해 카푸아의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에 선임되었던 라둘프가 지코눌프를 구출했고, 그는 살레르노로 간 뒤 대공에 취임한 후 라델치스에 맞섰다.

841년, 라델치스는 자력으로 지코눌프와 란둘프를 이기지 못하자 시칠리아 토후국에 막대한 재물을 바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많은 아랍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해 카푸아를 약탈했고, 란둘프는 트리프리스코(Triflisco) 언덕 인근에 새로운 수도를 세워야 했다. 지코눌프는 이에 대응해 많은 아랍인 용병들을 끌여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아랍인 전사들이 남부 이탈리아로 몰려들었고, 남부 이탈리아는 이들이 벌이는 약탈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특히 847년에 아글라브 왕조의 노예 출신인 칼푼이 바리를 탈취하고 바리 토후국을 건국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무슬림 국가가 최초로 등장했다.

851년, 봉신국인 베네벤토 공국의 혼란과 무슬림들의 이탈리아 진출을 보다못한 루도비코 2세가 두 사람에게 당장 타협하지 않으면 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라델치스와 지코눌프는 베네벤토 공국을 절반으로 나눠 가지는 선에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지코눌프가 이끄는 살레르노 공국이 베네벤토 공국으로부터 이탈했다.

살레르노 공국 초대 대공 지코눌프는 얼마 안 가 사망했고, 아들 지코가 살레르노 대공에 선임되었다.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가정교사를 맡고 있던 피에트로 백작이 후견인을 맡았지만, 2년만에 피에트로에게 축출되어 이탈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에게 망명했다. 피에트로는 루도비코 2세로부터 살레르노 대공으로 인정받았지만 855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에 지코가 살레르노로 귀환하여 복위를 꾀했지만, 피에트로의 아들 아데마르가 지코를 카푸아에서 독살해 권력을 굳건히 다졌다. 이후 카푸아 백작 란둘프 1세와 아들 란도 1세가 살레르노 공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여러 영토를 점거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해 나폴리의 첫 세습 공작인 세르기우스 1세와 동맹을 맺었다.

858년, 살레르노와 나폴리 연합군이 카푸아를 공격했지만 격파당했다. 이후 859년 5월 8일 테오데몬도 다리 전투에서 세르기우스 1세의 아들인 케사르가 사로잡히면서, 나폴리는 더 이상 카푸아와의 전쟁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카푸아는 여세를 몰아 아데마르에게 반감을 품은 귀족들을 부추겼고, 결국 861년 구아페르가 정변을 일으켜 살레르노 공국에서 아데마르를 축출했다. 아데마르는 나폴리에 망명한 뒤 복위할 기회를 노렸지만, 나폴리 측이 그를 구아페르에게 넘겼고, 결국 그는 구아페르에 의해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후 구아페르가 이끄는 살레르노 공국은 카푸아 백국과 화해했고, 구아페르는 카푸아 백작 란도 1세의 딸인 란델라이카(Landelaica)와 결혼하여 과이마르 1세를 낳았다.

871년 아글라브 왕조가 파견한 사라센군이 살레르노에 쳐들어와서 1년간 포위 공격을 벌였다. 이로 인해 도시 내에서 굶주림이 만연하여 항복을 심각하게 고려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아말피 공화국이 보급품을 보내주면서 기사회생했다. 그 후 루도비코 2세가 구아페르의 1년이 넘는 탄원과 간청 끝에 프랑크군을 파견했고, 랑고바르드-프랑크 연합군은 살레르노 외곽에서 사라센군과 격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격파했다.

880년 구아페르가 은퇴한 뒤 새 대공에 선임된 과이마르 1세는 상당한 위협에 직면했다. 881년 사라센들이 아그로폴리에 진출한 뒤 살레르노를 위협했으며, 나폴리 공작 아타나시우스 2세도 살레르노 공국의 가신인 카푸아 백국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으려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 3세가 무능한 치세로 일관해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지 못하면서 살레르노 공국을 도와줄 여력이 없자, 과이마르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대신 동로마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886년 카푸아의 란도 2세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로마 황제 레온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파트리키오스와 프로토스파트리오스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았다. 이에 대한 대가로, 동로마 제국의 관리가 살레르노 공국으로 파견되어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과이마르 1세는 스폴레토 공작 귀도 4세의 여동생 이타(Itta)와 결혼함으로써 스폴레토 공국과 동맹을 맺었다. 895년 귀도 4세가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베네벤토 공국을 재정복한 뒤 베네벤토 대공을 겸임하면서 과이마르 1세에게 베네벤토의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그가 베네벤토로 가던 도중에 동로마 황실에 의해 가스탈다토(Gastaldato: 특정 지역의 군사 및 사법 분야에서 활동하도록 위임받은 관료)로 선임된 아벨리노의 아델페리오가 도중에 습격해 포로로 삼고 실명형에 처했다. 귀도 4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아벨리노를 포위 공격해 과이마르 1세를 돌려받았다.

895년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은 친 나폴리 파벌이 살라르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아들 과이마르 2세가 토벌대를 이끌고 출진해 가까스로 진압했다. 이후 실권은 과이마르 2세에게 넘어갔고, 과이마르 1세는 명목상의 권위만 있었다.901년 과이마르 1세가 아버지 구아페르처럼 은퇴하면서, 과이마르 2세가 새 대공에 올랐다.

과이마르 2세는 통치 초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받고 충성을 바친 아버지의 노선을 따라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이어갔고, 카푸아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카푸아 백작 아테눌프 1세의 딸 가이텔그리마(Gaitelgrima)와 결혼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로틸다를 란둘프 1세의 아들인 아테눌프 3세와 결혼시켰다.

915년 가에타, 나폴리, 카푸아, 베네벤토, 라치오, 스폴레토, 로마,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 연합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활개치는 사라센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그해 6월, 스폴레토 공작 알베리크 1세가 총사령관을 맡은 연합군은 캄포 바카노, 비아 카시아, 티볼리 및 비코바로 등지에서 무슬림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이에 알리쿠(Alliku)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가릴리아노 강 인근의 요충지인 트레토로 철수했다. 연합군은 트레토를 포위하여 3개월간 맹공을 퍼부었고, 동로마 함대는 해상에서 구원군이 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식량이 바닥난 무슬림들은 포위망을 뚫고 시칠리아로 도피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전원 죽거나 사로잡혔다.

929년 동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베네벤토 대공 란둘프 1세와 연합해 934년까지 동로마 제국령 아풀리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 제국은 935년 파트리스 직책을 맡고 있던 코스마스에게 11척의 함대를 이끌고 슬라브 함선 7척과 함께 아풀리아로 파견했지만 혼란 수습에 실패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베네벤토와 살레르노 대공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국왕 우고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의 전쟁에서 별다른 이득을 챙기지 못한 과이마르 2세는 스폴레토 공작 테오발트와 동맹을 맺었지만 역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동로마 제국에 도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과이마르 2세는 살레르노 궁전을 재건축하고 산 피에트로의 팔라티노 교회 옆에 종탑을 세우는 등 토목 사업을 단행했고, 오랫동안 끊어진 금화 주조를 재개했다.또한 조부 구아페르가 설립한 산 마시모 수도원에 거액의 기부금을 냈고, 말년에 클뤼니 수도원 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에게 지원금을 제공했다. 943년 아들 기술프 1세에게 실권을 양도했고 946년 6월 4일 사망했다.

과이마르 2세 사후 대공에 오른 '''기술프 1세는 베네벤토 대공 란둘프 2세와 나폴리 공작 요안니스 3세의 침략으로 축출되었지만, 아말피 공화국의 공작 마스탈로의 구원 덕분에 복위했다. 947년, 기술프 1세는 란둘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나폴리 공국의 수비대가 주둔한 놀라 시 공략에 기여했다. 이후 나폴리 주교에게 유리한 특권을 내주며 나폴리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955년 직후 바리 총독부의 동로마 제국 스트라테고스인 마리아노스와 동맹을 맺고 파트리키오스의 칭호를 받았다. 966년 교황 요한 13세를 로마에 복귀시키려는 베네벤토 대공 판둘프 1세에 맞서 연합한 로마 민병대-투스카나 공국-스폴레토 공국과 손을 잡았지만, 막상 군대를 보내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다가 요한 13세가 로마 귀환에 성공하자 테라키나에서 교황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973년, 베네벤토 대공 아테눌프 2세의 아들이었으며 940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백부 란둘프 1세에 의해 공동 대공에 선임되었다가 얼마 안가 추방당한 란둘프가 나폴리 공작 마리누스 2세와 아말피 공화국만소 1세의 지원에 힘입어 기술프 1세를 몰아내고 살레르노 공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이에 베네벤토 대공 판둘프 1세가 즉각 살레르노로 진격해 란둘프를 몰아내고 기술프 1세를 복위시켰다. 이후 기술프 1세는 판둘프 1세의 가신으로 지내다가 978년에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기술프 1세 사후, 살레르노 공국은 베네벤토 대공이자 스폴레토 공작이며 카메리노 공작 겸 카푸아 백작이었던 판둘프 1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로써 랑고바르드 왕국의 후계국 전역이 판둘프 1세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동로마 제국령 남부 이탈리아마저 석권하기 위해 공세를 계획하던 판둘프 1세는 981년 원정을 채 감행하기 전에 사망했다. 장남 란둘프 4세는 카푸아의 베네벤토 공국을 상속받았고, 차남 판둘프 2세는 살레르노 공국을 상속받았다. 반면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공국은 오토 2세에 의해 회수되어 트라사문트 4세에게 넘겨졌다.

판둘프 1세의 뒤를 이어 살레르노 대공에 오른 판둘프 2세는 얼마 안 가 아말피 공화국의 공작 만소 1세에 의해 축출되었다. 만소 1세는 아말피 공작에 살레르노 대공을 겸임하면서, 아들 조반니 1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이후 982년 7월 14일 콜로네 곶에서 시칠리아 토후국에게 참패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는 무슬림에 함께 대항할 동맹이 절실했기에 만소 1세가 살레르노 대공을 겸임하는 것을 인정했다.

983년 만소 1세가 정적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억압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살레르노 주민들이 봉기해 만소 1세와 조반니 1세 부자를 축출하고 조반니 2세를 새 대공으로 선임했다. 조반니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산타 마리아 데 도미노를 설립해 살레르노 대교구의 관할에 넣었으며, 산 마시모 수도원의 재산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라도알드를 수도원장에 앉혔지만 성직자들의 반발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남부 이탈리아 각지를 습격한 사라센의 침략으로 파괴된 이르시나 수도원을 재건하기도 했다.

994년 조반니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과이마르 3세가 새 대공에 선임되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베네딕토회 수도자 아마투스(Amatus)가 기술한 연대기에 따르면, 999년경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 노르망디 공국으로 귀환하던 40명의 노르만족이 살레르노에 잠시 들렀다. 이때 사라센 해적이 쳐들어오자, 그들은 두려워하는 살레르노인들을 독려하고 해적들을 몰아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과이마르 3세가 그들을 고용하려 하자, "우리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센이 도시를 짓밟는 걸 가만히 볼 수 없었을 뿐이다"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뒤 동포들을 초대해 대공을 섬기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시기에 살레르노 공국과 노르만족간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 것만은 분명하다. 11~12세기 잉글랜드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데리크 비탈리스(Orderic Vitalis)에 따르면, 과이마르 3세는 노르망디 공국에 사절을 보내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1.6. 동로마 제국령[편집]


프랑크 왕국이 이탈리아 본토의 북부의 대부분과 중부 전역을 차지하면서 남부는 가장 비중이 높은 랑고바르드계의 베네벤토 공국과 이제는 해안 일부 지역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게 된 동로마 제국령들만 남은 상태였다. 북동부의 베네치아를 제외하면 구 라벤나 총독부의 남은 지역들은 이제 이탈리아 남부에 몰려 있었지만 제각기 일부 해안 지역만 유지한 체 육로로는 차단된 상태였다. 샤르데냐와 코르시카의 경우 본디 아프리카 총독부에 속해 있었기에 라벤나 총독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던 곳들이었기에 이제 콘스탄티노플 정부 직활로 운영되었지만 불행히도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기에 행정적인 효율이 떨어졌다.

1.6.1. 베네치아 공화국[편집]

780년 프랑크 왕국가 국경을 접하게 된 베네치아는 마우리치오 갈바이로의 지도 하에 훗날의 중심지가 될 리알토를 제방으로 간척해 가면서 넓히고 있었지만 이제 국경을 접하게 된 프랑크 왕국의 위협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우리치오는 독립을 주장하는 공화파와 친프랑크파를 억누르고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그결과 동로마 황제 레온 4세로부터 마지스터 밀리툼과 같은 칭호들을 얻게 되면서 그의 권위는 올라갔다.

775년 올리블로를 교구를 승격하는 것에 대해 그라도의 주교 조반니와 대립했다.787-788년 기간에 프랑크족은 이스트리아 정복을 마쳤고 베네치아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787년 베네치아 상인들은 라벤나와 펜타폴리스 지역에서 추방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라벤나 교구에서 몰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마우리치오는 778~779년 사이에 아들 조반니를 공동 도제로 임명해 도제직을 세습하려는 꼼수를 부렸다.

797년 마우리치오가 사망하면서 공동 도제였던 아들 조반니가 단독 도제로 베네치아를 이끌었다. 조반니 또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단독 도제가 되자마자 자신의 아들인 모리스를 공동 도제로 세웠다. 허나 이는 선출로 도제를 세우기로 한 베네치아의 방침과 어긋난 일이었기에 이에 반발한 반대 세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802년 아버지 대에 이어 올리블로의 교구 승격을 두고 대립한 그라도 주교 죠반니와의 갈등 끝에 함선 한대를 그라도로 파견했고, 조반니 주교는 탑에 투신해 죽었고, 그의 후임인 포르투나투스는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했다.

허나 이는 정치적 악수로 작용하게 되어 반조반니 파벌이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하고 있던 포르투나투스를 통해 이제는 부활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롤루스 대제의 지원하에 803년 죠반니 갈바이오를 축출하고 오벨레리오를 세우는데 성공한다.[26]

카롤루스의 지원으로 도제로 취임한 오벨레리오는 자신을 지원해준 프랑크와의 관계를 중요시했으며 805년 친인척을 대동하고 아헨에 있는 카롤루스를 찾아가 충성을 맹세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니키포로스 1세는 함대를 파견해 베네치아 인근 지역들을 공격했다. 809년 베네치아 석호까지 다다르자 이에 오벨레리오는 카롤루스 대제로부터 이탈리아 국왕으로 임명된 피핀 카를로만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문제는 이때까지 베네치아에서 친프랑크파의 입지는 크지 않았다. 더욱이 원군이라 생각했던 피핀은 즉각 프랑크 함대로 하여금 베네치아를 포위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된 베네치아인들은 811년 오벨레리오를 베네치아 밖으로 추방시키고 안젤로 파르치파지오를 다음 도제로 선출했다.

새로 도제가 된 아그넬로 파르치파지오는 베네치아의 중심지역를 리알토 군도로 이전했고, 프랑크 왕국에 계속 저항했고, 케팔리니아 총독 파블로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함대가 즉각 반격하자 피핀은 결국 열병에 걸린 채 철수하고 말았다. 피핀은 그 해 7월 8일 사망하였다.

전쟁은 812년 끝났다. 카롤루스는 거듭된 베네치아 장악 시도에 실패하여 유능한 아들 하나를 잃었고, 동로마 제국은 당시 새롭게 강적으로 등장한 1차 불가리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크 왕국과 화친을 맺는 것이 좋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핀 사후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은 아헨으로 들어가 평화협상을 개시했고, 니키포로스 1세가 811년 1차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그의 두개골이 은으로 칠해지는 참극 속에서 잠깐 중단되었던 협상은 미하일 1세가 새롭게 즉위하면서 다시 진행되었다. 결국 평화협상은 812년에 타결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이 베네치아 속주들과 이스트리아 속주들을 지배함을 인정하고, 그 지역에 대한 권리 주장을 그만두었다. 다만 베네치아가 프랑크 제국에서 상업에 종사할 수 있는 권리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대신 동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위를 인정[27]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승인받았다. 물론 동로마 제국은 그를 그냥 바실레우스로만 보고 로마의 바실레우스(Ο Βασιλεύς τών Ρομαιών)가 아니라는 점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양국은 동맹을 맺어 평화를 이룬다. 이 정도에 불과했다. 즉, 어디까지나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선임임을 못박아 놓은 것이다.

한편 이기간 동안 이후 도제들의 집무실인 도제궁(palazzo ducale)과 부속 성당인 산 마르코 대성당이 건설되었다.[28] 또한 시기 미정이나 동로마 황제 레온 5세가 보내온 세례 요한의 아버지 스갸라의 유해를 선물로 받아 베니치아에 봉헌할 목적으로 산 자카리아 성당을 짓고, 전쟁으로 줄어든 인구수를 늘리는 등 리알토 일대를 확장하는데 집중했다.

814년 안젤로는 큰아들 주스티니아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한 동안, 차남 죠반니를 공동 도제로 임명했다.이후 귀국한 주스티아노는 분노해 궁전에 가는 것을 거부하고 근처 산 세베로 교회에 머물었다. 결국 안젤로는 공동 도제를 주스티아노와 그의 주스티아노의 아들 안젤로로 바꿔야 했으며 지오바니는 자라로 유배되었지만 탈출해서 달마티아로 갔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베르가모로 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 루도비쿠스 1세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이사실을 안 안젤로와 주스티니아노는 황제에게 조반니를 넘겨달라고 사신을 보냈다.황제는 조반니를 넘겨주는 것에 동의, 그를 베네치아에 인도했다.

조반니를 넘겨받은 그들은 이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820년 손자 안젤로 또한 미하일 2세의 즉위식에 맞춰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지만 채류 기간 중병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821년 핀프랑크파인 그라도 주교 포르투나투스를 주교직에서 파면시켰다. 827년 안젤로마저 죽으면서 주스티아노가 단독 도제가 된다.

취임 직후 미하일 2세의 시칠리아 방어전에 직접 원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주스티아노의 함대는 시라쿠사를 구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왔지만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다. 그러나 무슬림군은 828년 여름 전염병 창궐과 보급품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고, 지휘관 아사드 마저 병사했다.

아사드 사후 새 지휘관에 선임된 무함마드 이븐 아부 엘 자와리는 포위를 이어갔지만 동로마 함대가 접근해오자 포위를 풀고 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동로마 함대가 이를 차단하자 배를 불태우고 내륙으로 퇴각한 뒤 미네오 성으로 진군해 사흘간의 짧은 공방전 끝에 함락시켰다. 이후 무슬림군은 둘로 갈라졌다. 한 부대는 서쪽의 아그리젠토로 이동했고, 다른 한 부대는 에우페미오스와 함께 엔나로 진격했다. 이때 엔나의 수비대는 아랍군을 물리쳐준다면 에우페미오스를 지도자로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에우페미오스는 이에 혹해 소규모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구체적인 협상을 위해 엔나의 사신 2명과 접촉했지만, 그들이 숨기고 있던 검으로 찌르면서 현장에서 피살당했다.

일단 표면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미하일 2세는 베네치아에 군사적 원조를 약조했다. 또한 베네치아 상인들은 당시 아바스 왕조 치하 알렉산드리아에 매장되어 있던 성 마르코의 유해를 도굴, 혹은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부탁으로 베네치아로 가져왔다. 이슬람교도가 혐오하는 돼지고기 속에 유골을 숨겨 발각되지 않았다. 성 마르코의 유해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베네치아로 옮겨지면서 주스티아노는 도제궁에 딸린 작은 예배당에 봉헌했다.

당시 성 마르코의 유해를 갖는 것은 교황권 및 주변 지역의 주교들과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베네치아에 대한 종교적 간섭을 다소 완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는데, 이전까지의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은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였는데 문제는 성 테오도로의 출신지가 동방의 폰투스라 동로마 제국 내에서도 먼저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만큼 성 테오도르에 대한 숭배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774년 이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교황령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주변 인근 지역의 주교들 또한 친프랑크파였던 만큼 12사도중 한명이었던 성 마르코를 새로운 수호성인으로 내세운 것만으로 베네치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두 세력의 간섭을 완전히 봉쇄하는 종교적 명분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공동 도제였던 아들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가 자신보다 일찍 죽었기에 끝이 다가옴을 깨달은 주스티아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동생 조반니를 불려들어 공동 도제로 임명한 후 829년에 사망한다. 단독 도제가 된 조반니는 임기 시작을 유혈이었다. 축출되었던 오벨레리오의 그의 추종 세력들이 20년만에 말리모코로 귀환해 다시 도제 자리를 탈환하려 하자 맞대응으로 이들과 내전을 벌여 말리코모와 인근 마을인 비질리야를 초토화 시킨 후 오벨레리오 일파를 전부 죽였다.

하지만 이선택은 우호 관계였던 세력을 적대적으로 만든 빌미가 되었고, 몇년 후 가문과 신뢰 관계이거나 베네치아 내에서 일부 저명한 사람들이 조직한 광범위한 내부 반란으로 인해 베네치아에서 탈춯한 후 루도비쿠스 1세에게로 도망쳐야 했다. 도제의 자리는 트라뷴이었던 피에트로 카르소가 선출되었으나 6개월 만에 올라볼로 주교였던 조반니의 아들인 오르소의 트리뷴 조반니 마르투리오와 바실리오 트리뷰토에 의해 조반니의 복권 쿠테타가 발생해 추종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던 조반니는 다시 베네치아로 구환할 수 있었으나 836년 그의 지나친 독재와 발칸 반도 서부 해안에 자리잡은 슬라브인 해적들에 대해 저자세에 가까운 타협을 하는 모습으로 인해 다시 반란이 발생해 도제 자리에서 몰려나 강제로 수도승이 되었고, 피에트로 드라코니코가 다음 도제로 선출되었다.

피에트로느 전임 도제였던 조반니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슬라브 해적에 대해 대응을 강구해야 했고, 838년 해적 토벌을 위해 달마티아 연안으로 함대를 파견했고, 이에 크로아티아 공작인 미슬라프는 베네치아에 강화를 제의해 공격은 중단했지만 다음 해까지 현장이 준수되지 않았다.

그밖에도 피에트로는 베네치아의 동립적 지위를 굳히기 위해 당시 루도비쿠스 1세의 대리로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로타리우스 1세와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 외교적 협상을 이어갔는데 841년 1월 로타리우스 1세로부터 베네치아의 독립적 지위와 석호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이 조약은 로타리 조약(Pactum Lotharii)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칼라브리아와 풀리아를 위협하는 시칠리아의 아랍인들과 맞서는 데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미하일 3세가 파견한 테오도시우스와로부터 스파타리오와 하이파투스의 칭호를 받는다. 841년 약조대로 이슬람 해적들이 공격하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토로 함대를 파견했지만 파견된 함대는 이슬람 해적들에게 대패해 베네치아로 후퇴했고, 이슬람 해적들은 베네치아 해군을 추격했고, 이과정에서 교황령에 속한 중부 지역의 도시인 안코나까지 약탈했다.이후 842년 이스트라반도와 크로아티아 북부 연해 지방의 본토 사이에 위치한 크바르네르만까지 이슬람 해적들이 약탈을 자행했다.

베네치아 해군이 패전을 약해지자 슬랍 해적들 또한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피에트로는 다시 함대를 파견했지만 이미 손실을 회복하지 못했던 베네치아의 해군은 슬라브 해적들에게 패배했고, 846년 베네치아 서쪽에 위치한 카올레까지 약탈되었다.

856년 봄, 피에트로와 그의 아들이자 공동 도제였던 조반니는 이탈리아 국왕이자 서로마 황제였던 루도비코 2세가 그의 부인인 알자스의 엥겔베르가를 대동한 체 베네치아을 방문하자 3일 간 환대해줬고, 루도비코는 피에트로의 소녀의 후견인이 되주었다.

하지만 863년 공동 도제였던 아들 조반니가 먼저 사망하고, 보인 또한 1년 뒤인 864년 9월 13일 산자카리아 교회에서 기도하고 돌아오던 중 불평분자들의 습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얼마 후 산자카리아의 수도승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은 그를 교회에 묻었다. 이후 후임 도제로 오로소 1세 파르티치파치오가 선출되었고, 오로소 1세는 첫직무로 전임 도제인 피에트로의 의 살인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처벌해야 했다. 일부는 처형되었고, 다른 이들은 프랑크와 콘스탄티노플로 추방 판결을 받았다.

오로소 1세 역시 임기 동안은 이슬람과 슬라브 해적들과 싸우는데 보내야 했다. 때문에 대형 선박을 건조했으며, 또한 그의 취임 동안 도제를 선출하는 호민관들의 힘이 약해졌기에 그의 아들 또는 형제를 동료 도제로 공동 선택하는 것이 도제의 관습이 되어있었고, 그 역시 거리낌 없이 아들 조반니 파르치파지오를 공동 도제로 세운다. 그밖에도 치안판사와 도제 고문관을 역임할 선출된 판사를 임명했다. 또한 880년 5개의 새로운 주교구를 확보함으로써 베네치아 섬의 교회 구조를 재정비하여 아퀼레이아 대주교와 그라도 대주교의 지배를 좌절시켰다.

881년 오로소 1세가 사망하면서 공동 도제였던 아들 조반니 파르티치파치오가 단독 도제가 되었다. 하지만 조반니에 대한 베네치아인들의 평가는 족벌주의와 공익을 우선시하는 것보다 사익에 몰두하고 인물로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조반니는 자신의 동생인 바도아리오에게 교황령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코마키오를 줄려고 노력했으나 교황 하드리아노 3세에 의해 무산되었다.

883년 조카 루도비코 2세의 모든 유산을 상속해 서로마 황제가 된 서프랑크 왕국샤를 2세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887년 죽음이 다가로 또다른 동생인 오로소를 공동 도제로 내세운 후 사망했지만 오로소 또한 건강상의 이후 도제직에서 내려온 후 피에트로 1세 칸디아노가 새로운 도제로 취임한다.

하지만 피에트로 또한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9월 18일 달마티아 해안에서 해적질을 임삼고 있던 슬라브 해적 집단 중 하나였던 네레탄을 대상으로 하는 토벌전에서 전사하였고, 결국 베네치아는 크로아티아 공작 브라니미르에게 굴복해 매년 조공을 받쳐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음 도제로 선출된 사람은 13대 도제인 피에트로 트라도니코의 종손인 피에트로 트라뷰토였다. 도제로 선출된 직후 크로아티아 공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시 통일된 프랑크 왕국의 카를 3세와 협상을 진행하나 카를 3세 그의 무능으로 인해 폐위되고 888년 프랑크 왕국이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이탈리아로 다시 분리되자 이번에 동프랑크 국왕인 아르눌프와 협상을 진행해야 했으며 891년 동프랑크 왕국과 베네치아와의 무역을 증대시키는 것과 동시에 동프랑크 왕국의 상인들인 자국의 법 테두리 아래에 보호하는 대신 동프랑크 왕국 또한 베네치아 상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조치를 취하는 조약을 채결했다.

898년 마자르족이 처음으로 베네치아를 침공했다. 899년 마자르족들에 재차 침공해 이번에 롬바르디아 전역을 약탈한 후 다시 베네토 일대를 휩쓸다가 이번엔 베네치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자르족들은 유목민이었기에 제대로 된 선박이 아닌 사람 한, 두면 정도 태울 수 있는 보트들을 타고 공격하다가 베네치아의 선박들을 제대로 격침시키지도 못해 실패로 끝난다.

이후 피에트로는 마자르의 피해를 복구하면서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올리볼로 동쪽에서 리바 데글리 스키아보니에 이르는 광대한 성벽을 쌓은 뒤 산타 마리아 조베니고까지 쌓았다. 또한 훗날 대운하가 들어설 수로에 거대한 쇄사슬을 설치했다. 912년 피에트로가 죽자 새로운 도제로 오로소 2세 파르티치파치오가 선출되었다. 취임 직후 자신의 아들을 동로마 제국에 파견해 레온 6세에게 봉신 맹세를 하게 해 프로토스타리오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마 피에트로는 귀환 길에 자굴루미아 공작 미하일로 비셰비치에게 납치되어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시메온 1세에게 보내졌고, 피에트로는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도메니코를 외교관으로 파견해 협상 끝에 아들을 돌려받을 수 있었고, 이때의 공적으로 도메니코는 말라모코 주교로 임명했다.

그동안 베네치아의 상선들은 이슬람과 달마티아 네레탄 해적들에게 시달렸지만 오로소 2세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대신 조폐국을 신설했으며, 922년 당시 이탈리아 국왕이었던 베렝가리오 1세에게 반대한 귀족들에 의해 대립왕으로 선출된 부르고뉴의 왕이었던 루돌포 2세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932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불명이나 오로소 2세는 암미아나의 성 펠리체 수도원으로 물러났고, 이후 다음 도제로 887년 네렌탄 해적으로 토벌하다가 전사한 피에트로 1세의 아들 피에트로 2세 칸디아노가 새로운 도제로 선출되었다.

취임 시작부터 피에트로 2세는 그라도 주교인 마리누스 콘타리니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추방할 것을 독일왕 하인리히 1세에게 건의하는 편지를 에르푸르트 시노드로 보냈으나 이들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아드리아 해에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베네치아는 바다의 북쪽을 장악하는 독자적인 정책을 주장했다.피에트로 2세는 특히 경쟁 도시인 코마키오를 상대로 이 지역에서 확장을 시작했는데, 코마키오가 베네치아의 배를 공격한 후 도시를 불태웠다. 그는 또한 카포디스트리아(현재의 슬로베니아 코퍼)를 점령함으로써 베네치아의 영토를 이스트리아까지 확장했다. 그 후 그는 그 지역의 경제적 봉쇄 덕분에 다른 이스트리아의 도시들인 폴라, 코퍼, 트리에스테, 무지아, 노비그라드, 카올를레의 항복을 받았다. 단 이는 어디까지는 일부 해안 지대였고, 대부분의 지역은 여전히 동프랑크 왕국령에 속해야 있다.

또한 이과정에서 이전부터 경쟁 관계에 있던 도시인 코마키오를 공격해 파괴하고 주민들을 석호로 끌고 갔는데 이때 교황령은 정치적을 상황이 불안정해 코마키오 일대를 관리할 능력을 살실한지 오래였다.

933년 리알토 조약으로 베니치아는 이스트리아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이 기간 동안 이탤릭체와 슬라브족 그룹이 이스트리아로 이주했는데, 전자는 해안을 따라 이스트리아 서부의 일부 내륙 지역에 정착했고, 후자는 내륙과 동부 아드리아 해안의 일부 지역에 정착했다.

시기 미상이나 취임 직후인 930년대에 아들인 피에트로를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해 로마노스 1세에게 다시 봉신 맹세를 하게 했고, 프로토스타리오의 칭호를 받는다. 939년 삼아하자 다음 도제는 오로스 2세의 아들인 피에트로 파르테치파치오가 선출되었는데 임기 3년 동안 별다른 일 없이 보내다가 942년에 사망하고 전임 도제인 피에트로 2세의 아들인 피에트로 3세 칸디아노가 선출되었다.

피에트로 3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해 아드리아 해에서 베네치아 상업 교통의 안전을 돌 보았지만 이전 도제들과 달리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구사해 동로마 제국과도 관계를 끊었다. 문제는 이것이 완벽한 중립 정책이 아닌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베렝가리오 2세와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세가 점차 혼란스러움에 따라 베네치아 상인들이 상업에 매진하기 힘든 환경이 되면서 최소한 중립을 지켜야할 것으로 보았고, 무엇보다 해안 지대 한정이지만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놓은 이스트라 반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프리올리 변경백령이 이탈리아 국왕인 베렝가리오의 영지이기도 했기에 중립이된 베렝가리오만큼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실제로 피에트로 3세의 시기의 베네치아의 정치는 주로 자국의 상인들의 활동을 지원해주는 경향이 컸다. 특히 아퀼레이아 지역을 흐르는 나티사 강을 수로로 사용하기 위해 아퀼레이아와 그라도 두 대주교구와 944년까지 대립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다가 가까스로 관련 협정을 채결할 수 있었고, 948년 네레탄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자 이들을 공격해 잠시나마 기세를 꺽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중립 정책은 95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파비아를 점령해 베렝가리오 2세와 그의 아들 아달베르토를 굴복시키면서 위기를 겪게 되었고, 결국 편을 바꿀 필요성이 생기자 그의 정책에 반발을 품은 아들 피에트로 4세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체포되었다. 피에트로는 아들을 용서했지만 베네치아의 인민재판에서 개입할 수 없어 아들의 추방령을 막지 못했다. 추방된 피에트로 4세는 추방기간 베렝가리오 2세에게 위탁해 그의 전쟁에 종군했다.

959년 피에트로 3세가 죽자 놀랍게도 추방된 피에트로 4세가 도제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아내인 지오반나가 귀족이 아닌 이유로 정치적 스켄에 몰렸고, 2년간 그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 건이 되었다. 어째든 다시 베네치아의 도제로 복귀한 피에트로 4세는 아버지가 중단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다시 재개해 동로마 제국과의 무역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했다.

또한 족벌주의 움직임에서 피에트로는 동생 비탈레의 경쟁자인 토르첼로 주교 후보자를 성직 매매로 고발한 후 실명형을 내린 후 추방시키고 동생을 주교로 만들었다. 또한 베네치아와 경쟁 관계에 있는 북유럽으로 가는 길을 통제하는 오데르조와 포 강 지역의 주요 무역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페라라를 각각 파괴하거나 제압하면서 베네치아 상인들이 독주하게 만들려고 했다.

961년 그는 그동안 정치적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아온 지오반나와 이혼해 산 자카리아 성당에 유패시켰고, 이후 재혼 대상을 몰색했다. 이때 베렝가리오 2세와 아달베르토는 몰락한지 오래였고, 이제 독일인 왕인 오토 1세를 점점으로 하는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선 상태였기에 피에트로는 독일 왕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966년 스폴레토 공작이자 토스카나 변경백우베르토의 딸인 왈드리다와 재혼했는데 왈드리다는 오토 1세의 인척이였기에 막대한 지참금과 영지를 안겨주었고, 남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와 별개로 오만한 성격이라 베네치아 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시기 오토 1세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석권할 목적으로 세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계획했는데 로타리우스 조약을 갱신시켜 양측의 영역을 다시 조정했는데, 이때 조약은 베네치아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어 브론돌로와 포소네를 베니스 라군 남쪽에 잃었다.둘 다 제염소로 중요했고 브렌타와 아디지 강의 내륙 무역로 위에 있었다.북유럽으로 가는 길이 시작된 치타노바 북쪽 국경은 더 이상 정의되지 않았다.

971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1세는 아랍인들에게 군사용 자재로 사용될 목재와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를 어긴 배와 그들이 태운 선원들과 물품들은 불태워질 것이다. 이것은 파티마 왕조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 해에 동로마 제국과 파티마 왕조 사이의 전쟁이 다시 발발했기 때문이다. 피에트로는 이에 응했지만, 목재가 부족한 북아프리카의 아랍 해안과의 무역이 베네치아 무역의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베네치아의 경제적 이익을 훼손했다. 가구용 목재는 금지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이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금지령은 도제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대의회가 자유롭게 선택한 위반행위에 대한 벌칙조항과 함께 금지행위를 자제하겠다는 민중의회의 서약(카르타의 약속)에 의해 제정되었다.이 금지가 공작령이 아닌 민중의 의지에 의해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도제와 민중들 사이에 발달한 간극과 후자와의 고립을 구체화했다.

이러한 정책의 연이은 실책으로 피에트로 4세에 대한 베네치아인들의 분노는 쎃여만 갔다가 976년 무력 봉기로 촉발되어 결국 피에트로 4세는 어린 아들과 함께 베네치아인들에게 맞아 죽었고, 왈드리다와 그의 딸만 살아남아 베네치아 밖으로 추방되었다. 후임 도제로는 피에트로 1세 오로세올로가 선출되었다.

선출된 피에트로 1세 오로세올로는 쿠테타로 언수선해진 베네치아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이과정에 전소된 도제궁과 산 마르코 대성당의 복구를 진행했고, 특히 산 마르코 대성당 안 제단 뒤에 제단화인 팔라 도로를 만들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장인들을 초청해 만들어졌다. 또한 쿠테타로 죽은 피에트로 4세의 아내인 왈들리다와 그의 딸에게 관대함을 보여 모녀가 베네치아 내의 피에트로 4세의 유산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의 지참금만큼은 돌려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트로 오로세올로에 대한 칸디아노 가문의 견제는 여전했고, 이들의 뒤로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독일 왕인 오토 2세가 있었고, 결국 취임 2년만인 978년에 자진 퇴임과 함께 프랑스 프라데스에 있는 시토수되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결국 다음 도제로 봉기로 인해 죽었던 피에트로 4세 칸디아노의 동생이자 토르첼로의 주교였던 비탈레가 선출되었지만 취임 14개월 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였고, 결국 979년 피에트로 4세 칸디아노의 사위였던 트리뷰토 멤모가 선출되었다. 이때까지 도제궁이 복구 중이었기에 자택에서 도제의 업무를 봐야 했다.

983년 7월 오토 2세와 약국의 상업 특권에 대한 조약을 갱신했지만 신성로마제국파인 콜로프리니 가문과 동로마 제국파인 모노시니 가문이 대립 끝에 모르시니 가의 가주인 도메니코가 암살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콜로프리니 가는 베네치아에서 도망쳐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하자 카바르제레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이에 트리뷰토는 아들 모리스를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해 동로마 제국과 다시 봉신 서약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결국 991년 퇴위했다. 그의 뒤를 이어 새로 도제에 선출된 자는 피에트로 1세 오로세올로의 아들인 피에트로 2세였다.

그의 취임 초기는 운이 좋았다. 정무를 시작한 후 첫 달이 넘을 때 그는 주요 외국 세력의 호의를 얻어 공국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보장했습니다. 특히 동로마의 공동 황제였던 바실리오스 2세콘스탄티노스 8세는 베네치아 상선들이 동로마 제국군을 수송해주는 댓가로 각종 상업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금인 칙서를 받아낸다. 비슷한 시기 오토 3세에게도 동일한 상업적 특권을 얻어냄으로서 다시 베네치아의 상업을 부흥시킬 초석을 닦았다.

997년 달마티아 도시 국가들의 거듭된 항의를 하면서 998년 승천일에 네레타니아의 네레탄 해적들을 소탕하기 하면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는 네레타니아를 공격했다. 뒤이어 테레탄 해적들을 돕기로 한 크로아티아 왕국과도 충돌했다.

1.6.2. 나폴리 공국[편집]

755년 그레고리오 1세의 후임으로 나폴리 독스는 뜻밖에도 나폴리 주교였던 스테파노가 나폴리 귀족들에 의해 독스직에 선출되었다. 또한 840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혼란기를 틈타 나폴리는 독자적인 세력화되었다. 독스로 선출된 이후 초기만 하더라도 나폴리 공국은 연전히 동로마 제국의 충실한 예속국이었으나 761년 교황 바오로 1세가 파견한 특사 바울 주교가 교황의 반성상 파괴령에 대한 입장을 전하려고 나폴리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테파노 주교공 또한 성상 파괴의 지지자였다. 하지만 763년 베네벤토 공국과 이슬람 해적들의 공격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로마 교황을 무시하기엔 동로마 제국 또한 정치적 불안정으로 나폴리 공국을 돕지 못하게 되면서 결국 성상 파괴를 포기하게 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나폴리의 그리스 문화를 배제하기 시작했고, 동로마 황제의 두상이 찍힌 화폐가 발행되지 않고 3~4세기 당시 나폴리의 주교였던 성 야누아리오의 두상이 찍힌 화폐가 발행되었다.

766년 스테파노 2세는 나폴리의 독스직을 아들 그레고리오 2세에게 넘기고 다시 주교로의 소임에 전념하게 되었다. 794년 그레고리오 2세가 스테파노 2세의 사위였던 테로필렉트가 나폴리의 독스가 되었다. 취임 당시 나폴리 주변의 남이탈리아의 정세는 불안정했다.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알프스 이북에서 온 강국 프랑크 왕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이제 랑고바르드의 잔여 세력은 옴브리아 회랑 남쪽에 있던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만이 남았는데 이때 스폴레토 공국은 즉각 프랑크 왕국에 복속했지만 베네벤토 공국은 복속을 거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6.3. 가에타 공국[편집]



1.6.4. 시칠리아 테마[편집]



1.6.5. 사르데냐[편집]

코르시카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총독부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붕괴된 후 가까운 라벤나 총독부도 아닌 동로마 제국 정부 직활로 운영되었으나 동로마 제국 또한 발칸 지역에 대한 슬라브인, 마자르 및 불가리아인들의 침락을 받았고, 샤략 해적질을 일삼은 이슬람 해군 외에도 바이킹 역시 지중해에 진출하면서 코르시카에 대한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없어 9세기 경에 아예 방치하고 만다. 이때 사르데냐는 주디카티라는 일종의 4개의 독립국가들로 나눠져 '판사'라는 의미를 지닌 주디체 혹은 유디케(judike)들이 군주들이 지배했는데, 이들의 승계는 다른 유럽 국가의 군주제처럼 가문의 승계에 의한 것도 있지만 간혹 민주적으로 일종의 의회격인 코로나 데 로구에 의해 선출될 가능성도 있었다.#

1.6.6. 아말피 공화국[편집]

아말피서로마 제국 말기인 339년에 이곳에 표류한 한 동로마 제국 출신의 귀족에 의해 항구로서 형성되었다. 이후 476년 서로마 제국 붕괴 후 오도아케르 왕국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554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후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568년 알프스 산맥을 남하해온 랑고바르드족이 침공한 후 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라벤나 총독부 설치되면서 총독부에 속해 있었으며, 이후 751년 라벤나 총독부가 랑고바르드 왕국에 몰락하면서 새로 성립된 바리 총독부에 속했으나 롱바르드 계 국가인 베네벤토 공국의 침공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838년 베네벤토 공작인 지카르드가 내부 배신자들이 알려준 아말피를 점령하였다. 살레르노로 피신해 있던 아말피 인들은 살레르노 인들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839년에 도시를 탈환하였다.

839년의 탈환 이후 아말피 시민들은 지도자를 선출하기 시작하였다. 아말피는 동맹이었던 살레르노가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897년, 아말피의 성장을 견제한 소렌토와 나폴리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아말피 군대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958년 마스탈로 2세가 최초의 아말피 공작으로 선출됨으로써 나폴리 공국으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리는 사실상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아말피는 10세기 중반까지 명목상으로나마 동로마 제국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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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계기로 테오도리크는 알라리크 2세에게 딸을 시집 보낸다.[2] 로달트가 군데베르가의 아들인지 여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3] 그리말트와 테오도타는 662년에 결혼했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잡아도 9살 이내다.[4] 교회법 3조에서 성직자의 '재혼'을 금지한다고 기술되었지만 결혼 자체는 금지하지 않았다.[5] 한국어 위키백과에선 교황이 로마 공국을 통치한다고 기술되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잘못된 서술이다.[6] 교회법 3조에서 성직자의 '재혼'을 금지한다고 기술되었지만 결혼 자체는 금지하지 않았다.[7] 베네티인들이 살던 베네티아 땅과, 동쪽에 붙어있는 히스트리아(현 이스트리아 반도)를 합친 행정구역이었다.[8] 697년부터 도제를 선출했다는 책들도 있다. 80년대 한 사학자가 베네치아 공화국 최초의 도제가 사실은 라벤나 총독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에 선출의 형식은 따랐으되 라벤나 총독을 선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9] 수도 이전(천도)까지는 아니다. [10] 프랑스 북부, 파리 근교[11] chamberlin (체임벌린). 집사로도 번역된다. 환관 전용 직책이다.[12] 이탈리아 국왕 람베르토와는 동명이인이다.[13] 해당 지도에 오류가 있는데 당시 사르데냐는 오토 1세의 땅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주디카토(Giudicato)'라 불리는 토착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었다.[14] 카롤루스의 딸인 가셀라와 아테네의 이리니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6세를 혼인시키고자 했다.[15] 오도아케르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서로마 황제 제위를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반납한 뒤 서로마 황제를 임명하는 권한은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로의 제위가 공석일 시 한 쪽의 황제가 다른 쪽의 황제를 임명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16] 동양에선 선위나 추대를 받을 경우 3번 정도 거절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여겨지며, 자기의 뜻이 아닌 주변의 뜻이라는 일종의 쇼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17] 물론 이것이 지켜졌을 리 없고, 후대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 사이의 서임권 투쟁이 일어난다.[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동로마에서는 성상 파괴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2차 성화상 논쟁 시기에는 그 이전과 같은 격한 박해는 눈에 띄지 않았다. 9세기 중반에 가서야 동방에서도 성상 파괴파가 자취를 감춘다. [원문]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의 라틴어 번역본. 번역 출처: 덴칭거[18] 아바스 왕조의 속국[19] 현장에서 신체가 몇 조각이 나도록 난도질 당했다고 한다.[20]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역[21] 마로치아 몰래 다른 이성과 만난 걸 들킨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Schaff, Philip; Schley Schaff, David (1885).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Charles Scribner & Sons.[22] 775 ~ 840, 프랑크 왕국의 궁정 시종이자 학자[23] 카롤루스 대제의 차남이다.[24] 알베리크 '2세'로도 칭해지나, 스폴레토 공작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25] 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26] 죠반니는 자신의 가문 일원들과 함께 만토바로 망명했다.[27] 동로마 제국 시기 황제의 공식적인 칭호로 사용된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 vasilefs. 그리스어로 군주를 뜻한다)의 칭호를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문서에서 사용할 수 있음을 인정.[28] 이때 도제궁의 모습은 오늘날과 달리 동로마식 성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 마르코 대성당 또한 이때는 작은 예배당에 아직 이름도 없던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