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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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랑크 카롤루스 왕조 초대 국왕
루트비히 2세
Ludwig II


파일:루트비히 2세.jpg

제호
루트비히 2세 (Ludwig II)
별칭
독일인 루트비히 (Ludwig der Deutsche)
출생
806년
사망
876년 8월 28일 (70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재위
동프랑크인의 왕
843년 ~ 876년
배우자
볼프의 엠마
(812년 결혼 / 876년 사망)
자녀
힐데가르트, 카를로만, 에르멩가르트, 기젤라, 엠마, 루트비히 3세, 버사, 카를 3세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
어머니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
형제
로타리우스 1세, 피핀, 아델라이드, 로트루드, 일드가르드, 샤를 2세, 지셀라
종교
기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라틴어: Lodhuvicus (로두비쿠스)[1]
고대 고지 독일어: Ludhuwīg (루두위그)[2]
독일어: Ludwig II.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 왕국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별명은 독일왕(Ludovicus Germanicus). 실질적인 독일 왕국의 첫 국왕.

프랑크 왕국루도비쿠스 1세(Ludwig der Fromme, 자비왕 또는 경건왕 루트비히)의 셋째 아들로 814년 바이에른의 왕에 임명되었고, 843년에는 동프랑크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베르됭 조약의 주역.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806년경 루도비쿠스 1세와 잉글램 백작의 딸인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 사이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로타리우스 1세, 피핀, 로트루드, 힐데가르트가 있었다. 817년, 루도비쿠스 1세는 아헨 의회에서 제국의 승계를 규정하기 위해 제국 상속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장남 로타리우스 1세가 명목상 제국 전체의 지배자를 맡아 프랑크 제국의 중앙부를 다스리고, 피핀은 아키텐, 툴루즈, 셉티마니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 카린티아, 보헤미아 등지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아헨에서 아버지의 궁정에 있다가 826년이 되어서야 바이에른으로 향했고, 827년 그의 아버지가 두번째 황후로 맞이한 유디트 황후의 누이인 엠마와 결혼했다. 한편 자신의 통치를 라인 강에서 마인 강 연안으로 확장하려는 마음을 먹고 828년과 829년에 판노니아를 침략하려는 불가리아인을 상대로 두 번의 원정을 벌였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823년, 루도비쿠스 1세는 유디트 황후와의 사이에서 샤를 2세를 낳았다. 그는 제국 분배 계획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829년 맏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로타리우스 1세를 이탈리아로 보내고 일부 봉토를 샤를 2세에게 넘겨주려 했다. 이에 로타리우스 1세와 피핀, 루트비히 2세는 강한 불만을 품고 아버지에 대항하려 했다. 830년, 루도비쿠스 1세는 제국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로 하고 브르타뉴인을 향한 원정을 벌였다. 그러나 원정 준비가 한창이던 830년 4월 궁정에서 반란이 일어나 루도비쿠스 1세는 감옥에 갇혔고, 유디트 황후는 셉티마니아 공작 베른하르트와 간통한 혐의로 푸아티에 인근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로타리우스 1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와서 제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로타리우스 1세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이 서로 권력 쟁탈전을 일삼기만 해 민심을 잃었고, 830년 10월 네이메헨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루도비쿠스 1세의 복귀가 결의되었다. 이리하여 제위에 복귀한 루도비쿠스 1세는 주모자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추방했고, 유디트를 아헨으로 복귀시켰으며, 로타리우스 1세를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했다. 피핀과 루트비히 2세는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832년 아버지에게 충성을 재차 서약했다.

그러나 세 아들들은 이복형제인 샤를 2세가 아버지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자신들의 영지를 갉아먹는 것에 강한 적의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고, 결국 833년 동맹을 맺고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833년 6월 말, 루도비쿠스 1세가 이끄는 진압군과 세 아들의 반란군이 콜마르 인근의 로펠트에서 대면했다. 이때 사전에 회유된 진압군이 반란군에 모조리 투항해버리면서, 루도비쿠스 1세는 제대로 된 저항 조차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수아송 인근의 생메다르 수도원에 유폐되고 황제복을 벗고 참회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유디트 황후는 이탈리아의 토르토냐로 추방되었고, 샤를 2세는 푸룸 수도원에 감금되어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계모, 이복형제를 실각시킨 뒤, 로타리우스 1세는 단독 황제로 군림하고 두 형제를 부왕으로 삼아 영토를 나눠줬다. 그러나 얼마 후 로타리우스 1세와 피핀, 루트비히 2세 형제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두 형제는 로타리우스 1세가 간섭을 심하게 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로타리우스 1세 역시 그들이 통제에 잘 따르지 않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결국 834년 초 피핀과 루트비히 2세가 로타리우스 1세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프랑크 제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면서 감시가 소홀해지자, 루도비쿠스 1세는 생 메다르 수도원을 탈출하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생 드니 수도원에서 무기와 왕꽌을 확보하고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후 유디트 황후를 아헨으로 불러들였고, 838년 차남 피핀이 사망하자 샤를 2세에게 프리슬란트와 마스 강과 센 강 사이의 지역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루트비히 2세가 자신의 영역이 침해받았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루도비쿠스 1세는 이를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바이킹이 제국 곳곳을 침략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840년 6월 20일, 루도비쿠스 1세는 루트비히 2세와 한판 붙기 위해 잉겔하임의 라인강 부근 한 섬에 이동했다가 도중에 사망했다. 이후 로타리우스 1세는 자신이 제국 전체의 황제임을 내세워 두 형제를 좌지우지하려 들었다. 이에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는 동맹을 맺고 로타리우스 1세에 대적했고, 로타리우스 1세는 이에 맞서 형제 피핀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피핀 2세와 동맹을 맺었다. 841년 6월 25일,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 연합군은 오세르 인근의 퐁트누아에서 로타리우스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로타리우스 1세는 아헨으로 퇴각한 뒤 두 형제 중 한 형제와 협상하고 다른 형제를 공격해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두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에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는 842년 2월 스트라스부르에서 상호 방위를 약속하고 둘 다 토타리우스 1세와 동맹 협정을 맺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아헨으로 진격했다. 로타리우스 1세는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코블렌츠에서 병사들이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이는 적과 교전을 거부하고 뿔뿔이 흩어지자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아헨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다 론 강에 이르렀을 때 두 형제의 추격대에게 따라잡히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제국을 세 부분으로 나누자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842년 6월 마콩 인근의 사오네 강변에서 휴전이 성립되었고, 각 형제 당 40명씩 협상단을 꾸려서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843년 8월, 1년 2개월간 이어진 협상 끝에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다. 샤를 2세는 대서양에서 뫼즈 강까지 프랑크 제국의 서반부 일대를 통치하고, 루트비히 2세는 라인 강 동쪽의 제국 동부를 다스릴 권한이 주어졌다. 로타리우스 1세는 뫼즈 강과 라인강 사이의 지역과 프로방스, 이탈리아 북부 일대를 맡았다. 또한 양자는 각자의 아들에게 왕국의 상속을 보장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렇게 전쟁을 매듭지은 뒤, 루트비히 2세는 프랑크푸르트와 레겐스부르크 등지를 중심지로 삼고 통치를 행사했다.

동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그의 최대 목표는 슬라브인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844년 엘베강에 거주하는 오보트리테스(Obotrites) 족을 상대로 군사 원정에 착수해 그들의 복종을 받아내고 연례 조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오보트리테스 족은 이듬해 데인족과 연합하여 함부르크를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본래 함부르크 대주교였던 아스카르는 브레멘으로 옮겨야 했다. 루트비히 2세는 데인족, 오보트리테스족과 무력 대결과 협상을 병행한 끝에 파더보른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서로 인질을 교환했다.

반면 모라비아의 슬라브인 통치자들은 프랑크 왕국의 봉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846년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를 향한 대규모 원정을 일으켜 자신에게 연례 공물을 바치길 거부한 모즈미르 1세를 폐위시키고 모즈미르 1세의 조카 라스티슬라프를 새 통치자로 세웠다. 그러나 라스티슬라프는 몇 년 후 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855년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크군은 궤멸되었지만, 864년 재차 파견된 프랑크군은 라스티슬라프를 궁지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라스티슬라프는 충성을 맹세하고 인질을 제공해야 했다.

865년 라스티슬라프가 재차 반기를 들자, 루트비히 2세는 870년 라스티슬라프의 친척인 스뱌토풀크 1세를 부추겨서 그를 자신에게 넘기게 했다.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푸르트로 끌려간 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루트비히 2세는 평결을 실명형으로 완화했다. 그러나 스뱌토풀크 1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루트비히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871년 프랑크군이 모라비아로 출격했으나 스뱌토풀크의 매복에 걸려 몰살당했다. 872년 루트비히의 아들 카를로만이 이끄는 군대 역시 모라비아군에게 참패했다. 결국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인들과 평화 협상을 벌이기로 하고, 874년 양자간의 10년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서프랑크의 샤를 2세는 바이킹의 연이은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귀족들의 원망을 샀다. 그들은 루트비히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샤를 2세의 무능을 성토하며 대신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본인이 가는 대신 아들 루트비히 3세를 보내기로 했다. 루트비히 3세는 854년 아퀴텐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샤를 2세를 공격하여 리모주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키텐의 전 국오아이었던 피핀 2세가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샤를 2세의 감시를 뚫고 수도원에서 탈출한 뒤 아키텐 귀족들을 설득해 루트비히 3세를 버리고 자신을 지지하게 했다.

856년 바이킹들이 센 강을 거슬러 항해하여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모든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파리를 약탈했다. 파리 시민들은 바이킹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샤를 2세의 무능에 치를 떨고 루트비히 2세에게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와의 전쟁이 급해서 거기에 신경쓸 수 없었다. 여론이 이렇듯 좋지 않자, 샤를 2세는 858년 바이킹들과 싸우기 위해 루트비히 2세와 조카 로타르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여기에 센 강 주변에 일련의 요새와 다리를 설치해 바이킹들의 통행을 막으려 했다.

861년 맏아들 카를로만이 바이에른의 국정에 간섭을 많이 하는 루트비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버지와 화해했다. 2년 후인 863년에 카를로만이 또다시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 카를 3세와 루트비히 3세도 가세했고, 결국 루트비히 2세는 세 아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카를로만은 바이에른에서 어떠한 간섭을 받지 않고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고, 작센과 프랑코니아, 튀링겐은 루트비히 3세에게 주어졌고, 슈바벤, 라에티아는 카를 3세에게 주어졌다.

869년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로타르 2세는 생전에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교회로부터 사생아로 간주된 아이들의 영지 상속을 인정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로타르 2세의 영지를 분할하고 870년 메르센 조약을 체결해 분할을 확정했다. 루도비코 2세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두 삼촌이 자신을 무시하고 분할을 진행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교황은 랭스의 힌크마르 주교에게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를 찾아가서 루도비코 2세의 입장을 고려하라고 권하게 했다. 그러나 힌크마르 주교는 자신의 주권자인 샤를 2세를 따르기로 하고 교황의 바람을 무시하고 메르센 조약을 공인했다.

871년 8월 루도비코 2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그는 샤를 2세와 함께 루도비코 2세의 이탈리아 왕국을 접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소문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자, 그들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875년 루도비코 2세가 두 딸만 남기고 사망하자, 샤를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건넜다. 루트비히 2세는 아들 카를로만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우려 했고,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가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샤를 2세가 파비아에 무사히 도착한 뒤 그해 12월 25일에 교황 요한 8세의 주관하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자,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는 샤를 2세를 지원하는 베르가모 백작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고 루트비히 2세는 서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샤를 2세는 처남 보소를 이탈리아에 두고 이탈리아 총독이자 프로방스 백작으로 임명한 후 급히 갈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아헨과 쾰른을 공략하고 동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루트비히 2세가 라인강을 건너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강을 도하했다가 루트비히 2세에게 참패하고 파리로 달아났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876년 8월 28일, 루트비히 2세가 사망했다. 사후 세 아들 카를로만, 루트비히 3세, 카를 3세가 아버지의 영지를 분할했다.


3. 가족 관계[편집]


  • 볼프의 엠마(803 ~ 876): 알트로프 백작 벨프 1세의 딸.
    • 힐데가르트(828 ~ 856/859): 프라우뮌스터 수녀원장
    • 카를로만(829 ~ 880): 바이에른 국왕, 이탈리아 국왕.
    • 에르멩가르트(831/833 ~ 866): 프라우엔킴제 수녀원장. 1929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됨.
    • 기젤라(? ~ ?): 요절.
    • 루트비히 3세(835 ~ 882): 작센 국왕, 바이에른 국왕.
    • 카를 3세(839 ~ 888): 동프랑크 왕국 국왕, 이탈리아 국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 루도비쿠스는 일반적으로 Ludovicus이나 842년의 스트라스부르 서약에 Lodhuvicus로 표기되어 있다.[2] 스트라스부르 서약에 Ludhuwīg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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