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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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 ~ 882년 12월 16일
- 재위기간: 872년 12월 13일 ~ 882년 12월 16일
1. 개요[편집]
하드리아노 2세가 사망한 후 수석 부제였던 요한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요한 8세로 교황좌에 착좌했다. 10년에 걸친 치세 동안 로마 교회의 행정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사라센의 침입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치적으로 9세기 교황들 중에선 가장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치세[편집]
873년에 요한 8세는 대 모라비아 왕국 지역 슬라브족 선교를 위해 미사 때 슬라브어를 사용하다 독일 출신 반대자들에게 억류된 메토디오스[1] 를 석방시켜 복직하도록 하였으나, 미사에 슬라브어를 사용[2] 함은 금지하였다.[3]
요한 8세는 치세 중에 사라센의 침입에 대비하였는데, 9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토후국이었던 아글라브 왕조[4] 의 침탈이 극심했고, 시칠리아는 아예 이슬람 세력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잦은 사라센의 침입이 계속 이어졌고, 교황은 느슨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결속하고 연합함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교황은 몸소 살레르노, 카푸아, 나폴리, 가에타, 아말피 등 캄파니아 도시들을 순회하였고 스스로 해군 사령관이 되어 876년 사라센 함대와 맞서 싸워 승리했다. 이듬해에는 살레르노를 비롯한 5개 도시가 교황과 동맹에 가담하였다.
한편 전임 하드리아노 2세로부터 단죄받은 포티오스가 879년 동로마 측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파면이 철회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하자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10년 간의 치세 동안 안으로는 행정 정비,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을 막고 이탈리아 도시들의 결속을 도모하는 등 정열적으로 활동하며 열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교황은 882년 12월에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암살당했는데, 교회 역사상 첫 교황 암살이었다. 암살 배경 및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친척들이 독살을 시도했으나 치사량 부족으로 바로 죽지 않아 망치로 때려 숨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교황좌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들의 정쟁에 휘말려 막장스러운 행태가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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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생인 키릴로스와 함께 키릴 문자의 원형인 글라골 문자를 고안한 위인이다. 동서방 교회 양측 모두 성인으로 시성.[2] 미사에 슬라브어 사용을 허가한 사람은 전임 하드리아노 2세였으나 이에 대한 반발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3] 당시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모두 슬라브족 대상 사역에 집중하고 있던 차라 관할 주체 다툼이 치열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 메토디오스는 콘스탄티노플 교회 소속으로 로마교회 소속 수도자들에게 집중 견제를 받는 입장이었다. 대 모라비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은 메토디오스 사후 서방교회 소속 관할로 확정되어 콘스탄티노플 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일제히 추방된다. 반대로 요한 8세 시기 불가리아 제1제국을 로마교회 관할권에 편입시키려다 콘스탄티노플 교회 측의 견제로 실패한 적도 있고.[4] 아바스 왕조의 속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