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제니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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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207대 교황.
2. 생애[편집]
베네치아에서 부유한 상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삼촌인 그레고리오 1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24세의 나이에 시에나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젊은데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도시 당국이 반대하면서 물러났고, 교황청에서 근무하면서 산 클레멘테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이 되었다. 마르티노 5세 시절에는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옮겼고, 1431년에 마르티노 5세의 후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에 선출된 이후에는 전임 교황의 출신 가문이었던 콜론나 가문과 대립하기도 하고, 후스파와의 휴전을 모색하고, 바젤 공의회에 반대해 볼로냐 공의회를 추진하면서 공의회 지상주의를 내세운 바젤 공의회 측과 충돌하다가 지기스문트 황제의 중재로 잠시 화해하기도 했다. 1434년에는 밀라노 공작과 콜론나 가문의 공격을 피해 로마를 탈출했다가 1436년에야 돌아왔다.
1438년에는 다시 바젤 공의회에 대항해 페라라-피렌체 공의회를 소집했고, 반발한 바젤 공의회측이 대립교황으로 펠릭스 5세를 옹립하였으나 잉글랜드, 부르고뉴 등의 지지[1] 와 피렌체의 지도자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후원 속에서 공의회를 강행, 동방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교회 일치에 합의하는 성과를 올린다.[2] 한편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성장에 맞서 십자군을 지원하였으나, 이 십자군은 바르나 전투에서 대패하고 교황이 파견했던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이 전사하면서 끝난다.
1440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서라는 것이 로렌초 발라에 의해 밝혀지자 그에게 화형 판결을 내리고 그의 책은 금서로 지정했지만, 발라는 곧 사면되었고 금서 조치도 한 세기쯤 후에 풀렸다.
1443년에 완전히 로마로 돌아온 에우제니오 4세는 1447년에 선종했다. 선종할 무렵 훗날 비오 2세가 되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가 독일 전역을 에우제니오 4세 지지측으로 돌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에우제니오 4세는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한 포르투갈인들이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자 두 차례 칙서를 발표하여 포르투갈에게 허용했던 정복 권리를 취소하고 노예제를 금지하는 등 노예제 반대 역사에도 그 이름을 남겼다.
바오로 2세는 그의 외조카이다.
3. 대중매체[편집]
- Europa Universalis IV의 그랜드 캠페인인 1444년 시나리오에서 교황령의 시작 군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1/1/2로 썩 좋진 않다(...)
-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는 추기경 시절부터 등장한다. 자세한 작중 행적은 문서 참조.
-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등장한다. 역시 추기경 시절부터 등장.
- 메디치: 마스터스 오브 플로렌스에도 출연했다. 배우는 데이비드 밤버. 드라마 중후반부부터 등장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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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잉글랜드와 대립하고 있던 프랑스가 바젤 공의회를 지지한 것이 한 몫했다.[2] 그러나 이 교회일치는 이전의 교회통합 시도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 내의 격렬한 반발에 봉착했으며, 후임 교황 니콜라오 5세 시절인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사실상 무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