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시오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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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말씀을 통해 배우니, 교회와 그 권력은 2개의 검을 갖는다. 바로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검과 속세를 다스리는 검이다.
ㅡ 칙령인 《Unam Sanctam》에서
1. 개요[편집]
카페 왕조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4세와 대립하다가 일개 기사에게 뺨을 맞은 아나니의 사건으로 유명해진 교황이다.
2. 상세[편집]
2.1. 첼레스티노 5세를 퇴위시키고 교황이 되다[편집]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에 의존하던 첼레스티노 5세를 설득하여 사임시킨 후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첼레스티노 5세가 교황직을 자진 사퇴하도록 지속적인 감언이설로 설득했으나, 막상 첼레스티노 5세가 사임하고 자신이 교황이 되자 돌변하여 그를 체포하고 구금했다. 첼레스티노 5세는 감금된 채 1296년에 사망했다.
2.2. 교황권 강화 정책[편집]
야심만만하고, 당시의 타락한 성직자를 바라보는 기준에서 봐도 부패한 인물이었던 보니파시오 8세는
라는 주장을 통해 프랑스 국왕 및 잉글랜드 국왕에 맞서면서 쇠퇴해가던 교황권의 회복과 세속 군주들에게 잠식되어가던 가톨릭 교회의 독립성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결국 아비뇽 유수라는 최악의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교황권이 세속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
그러나 항상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대립 관계를 이어간 것은 아니었고, 재정적인 타격이 심해지자 필리프 4세의 할아버지인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시성하는 정치쇼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리석처럼 차가운 성격으로 유명했던 필리프 4세는 교황의 이런 정치쇼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황권 강화를 위해 1300년에 성년을 선포, 많은 순례객들을 로마로 끌어모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필리프 4세와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1302년 《우남 상크탐》(Unam Sanctam)을 발표하여
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시대는 인노첸시오 3세가"만일 세속적인 권력이 과오를 저지르면 영적인 권력으로 심판받아야 하며, 영적인 권력은 위엄이나 고귀함에서 세속적인 권력보다 우월하다."
이라고 불리던 그 시기가 아니었다."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
2.3. 콜론나 가문 멸문[편집]
이탈리아에서는 교황 자리를 두고 다투어 왔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조져서 그 가문을 거의 멸문시키고, 콜론나 가문이 다스리던 도시와 마을들까지 완전히 초토화시켜 지도에서 지웠다.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콜론나 가문에게 반역죄를 씌워, 영지와 재산을 몰수한 데 이어 결국 군대까지 동원하여 콜론나 가문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콜론나 가문에
고 제안했으나, 막상 콜론나 가문의 사람들이 항복하자 죽여버렸다. 뿐만 아니라 콜론나 가문이 근거한 지역의 민가를 완전히 박살내어, 말 그대로 지도에서 도시가 사라져 버렸다.(콜론나 가문 학살)"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이렇게 잔인하게 콜론나 가문을 멸문지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살아남은 콜론나 가문 사람들은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고, 그 중에서 시욘나 콜론나가 훗날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결탁하여 아나니에서 보니파시오 8세를 체포하는 데 협력했다.
2.4. 뺨을 얻어맞다[편집]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4세와 성직자 과세를 두고 대립했는데, 1303년 9월 7일 아나니에 머물던 중 첼레스티노를 지지하던 콜론나 가문과 프랑스 군대의 습격을 받았다. 당대의 로마에서 콜론나 가문과 보니파시오 8세가 속했던 카이나티 가문은 적대 관계였다. 양 가문 모두 교황이 되어 부와 권력을 얻으려고 애를 썼고, 이를 위해 이탈리아 외부의 세력까지 끌어왔다. 교황권의 약화를 노리던 필리프 4세의 입장에서는 떡이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이때 프랑스의 재상이었던 기욤 드 노가레와 콜론나 가문의 가주였던 시욘나 콜론나는 갑주를 입고, 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한채 교황의 알현실로 와서는 보니파시오 8세를 모욕하고 난폭한 행동을 하며, 필리프 4세의 명령으로 보니파시오 8세에게 당장 사임하라고 협박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가 격분하여
라고 외치며 강력히 거부하자 안그래도 원한이 맺힌 데다가 화까지 치민 시욘나 콜론나가 끼고 있던 장갑을 빼어 교황의 뺨을 후려쳤다. 이후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얻어 맞으며 감금당했다고 한다. 교황의 곁에 있던 성직자들도 두들겨 맞았고, 교황과 같이 감금당했으며 교회의 보물들까지 빼앗겼다. 이는 14세기 교황권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로, 아나니의 뺨 때리기(schiaffo di Anagni / Anagni slap)로 불리게 되었다."차라리 날 죽여라"
당시 보니파시오 8세의 나이는 73세였는데, 노구의 몸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은 탓에 3일 후, 로마 시민들에 의해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1개월 후에 사망했다. 이를 두고 당시
라는 말이 돌았다."보니파시오 8세는 여우처럼 교황의 지위에 올라 사자처럼 지배하고, 개같이 죽었다."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교황이지만 교황청의 독립을 위해 세속 군주들, 특히 필리프 4세와 대립했던 마지막 교황이기도 하다. 그의 사후 교황권은 더욱 쇠퇴하며, 1309년 아비뇽 유수가 일어나게 되었다.
3. 여담[편집]
- 여담으로 로마 순례시에 왼쪽으로 통행하게 하여 좌측 통행의 룰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 파스타를 좋아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1] . 얼마나 좋아했으면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팀발로 알라 보니파초 8세’라고 불리우는 파스타가 존재할 정도라고 한다[2] . 참고로 중세 유럽의 파스타는 오늘날의 파스타와는 생김새가 많이 달랐고, 파이나 피자와 유사하게 생긴 파스타였다. 매우 비싸고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고 하며[3] , 무려 송로버섯까지 들어있었다고 한다. 보니파시오 8세가 얼마나 사치를 누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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