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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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가톨릭의 제254대 교황.
가톨릭 역사상 주교품을 받지 않은 채 추기경으로 서임된 마지막 교황으로[1] 까말돌리 수도회[2] 아빠스 출신으로서, 바티칸에서 관리로 일하였다가 탁월한 능력 덕택에 주교품을 받지 않고 추기경에 올랐다.
2. 재위기간[편집]
그 역시 이 시기의 교황들처럼 보수 반동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는데, 이는 보수주의의 물결이 불던 유럽의 열강들조차도 비판할 정도로 심각했다. 철도를 '지옥의 길'이라 부르면서 교황령 전역에서 철도 건설을 금했으며, 이 무렵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오스트리아 제국의 힘을 빌려 강하게 진압했다. 언론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단속당했다.
교황령 외부에서도 그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1832년에 러시아 제국에 맞서 봉기한 폴란드인[3] 들이 가혹하게 진압되었지만, 교황은 가톨릭 신자들을 지지하기는커녕 반란을 규탄하는 칙서를 발표했다. 당시는 프랑스의 자유주의자 사제들을 중심으로 "교회는 압제자가 아닌 대중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었는데, 그레고리오 16세와 교황령은 이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비록 그레고리오 16세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면모로 교황령의 진보를 막았지만, 고전적인 교황으로서의 역할은 충실했다. 노예 무역을 맹비난했으며[4] , 해외선교에 관심을 보여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선교사업을 재조직했고, 전 세계에 걸쳐 70여 개의 새로운 교구를 건설했다. 한국 가톨릭도 그 은혜를 받은 곳 중 하나로,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했으며[5] , 캐나다와 미국에 각각 4개와 10개의 교구를 설정했다. 사실 선대 교황인 비오 6세 때, 조선에 가톨릭이 자생했다는 기적같은 소식이 교황청에 전해졌지만 당시 비오 6세는 프랑스에 유배된 상태라 무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그 역할을 그레고리오 16세가 맡았던 것. 비오 6세는 죽기 전 당시 추기경이던 바르톨로메오 추기경(= 그레고리오 16세)에게 비상금을 털어서 그 역할을 맡겼다고 한다. 이와 함께 100여년 뒤 조선인 성인이 될 정하상 바오로가 목숨을 걸고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문(편지)을 써서 로마 교황청까지 전달한 것도 조선대목구를 설정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25년에 쓰여졌으나 1827년에야 교황청으로 어렵사리 전해진 이 편지를 읽은 그레고리오 16세는 "동방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구나"라고 말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파리의 성모로 인해 생겨난 통칭 기적의 패를 자기 책상에 있는 십자가 아래에 뒀다고 전해진다.
1836년에는 바티칸 미술관 내에 에트루리아 미술관과 이집트 미술관을 설립했으며,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도 그리스도교 미술관을 세워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다.
3. 사망[편집]
안면단독(丹毒)이 발병한 교황은 1846년 6월 1일 80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 이후, 요한 23세는 "모든 직급의 추기경의 서임은 주교의 서품을 받은 다음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을 바꾸었다.[2] 베네딕토회와 같은 연합회 소속인 수도회. 로무알도 성인이 1012년 설립한 최초의 은수 수도회로, 1450년부터 천연재료로 약품, 화장품, 와인, 식료품 등을 만들어 보급하는 사도직을 했다. 2016년 한국에 진출했으며, 명동성당 앞 가톨릭회관 2층에 전통 약방을 열었다.#[3] 폴란드는 폴란드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였다.[4] 교황들은 노예 무역이 시작된 이래 지속적으로 노예 무역을 비판해 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는 다 평등하니까.[5]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한 채 만주에서 사망해, 앵베르 주교가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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