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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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 4세는 제103대 가톨릭 교황이다.
교황이 되기 이전부터 로마 교구에서 일했다. 이전 교황 세르지오 2세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됐고, 847년 세르지오 2세가 선종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미사 중에 성가를 부르도록 장려하였다.
846년 무슬림의 침략에 대비하여 로마를 재건하고 성벽을 보수하도록 하였다. 846년 사라센 해적이 로마시 외곽을 공격해 구 성 베드로 성당이 불타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다행히 로마 시민들이 농성을 하자 해적들은 퇴각해 로마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 혼란 속에 교황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황제의 승인을 더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레오 4세를 선출했다.
습격이 있은 후 구 성 베르도 성당과 도시 외곽의 화재를 진압한 뒤 파괴된 여러 곳을 복구하고, 성벽과 여러 방어탑을 세우는 등 로마시 방어에 큰 공적을 세웠다. 이때 쌓은 성벽 안쪽은 일명 '레오의 도시'라 불렸다. 849년 또다시 사라센 해적의 함대가 포르투스 항구로 접근하자 나폴리, 가에타, 아말피 공화국 등 동맹들을 소집하고 인근 오스티아 항구 근처에서 해전으로 사라센 함대를 대파하였다. 이때 폭풍의 도움으로 사라센 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사람들은 신의 가호라 여겼다. 이 오스티아 전투는 중세 교황령 역사상 매우 중요한 전투로 꼽히며 후대에 성 베드로 성당이 개축될 때 라파엘로가 기념화를 그리기도 했다.#
850년 4월 프랑크 국왕 로타리우스 1세의 아들인 루이 2세를 황제로 대관했다. 855년에는 로마를 순례한 애설울프 왕과 당시 왕자였던 어린 알프레드 대왕을 만나 환영했다.
855년 7월 17일 선종하고 유해는 성 베드로 성장에 매장됐다. 사후 여러 공적으로 시성됐다.
레오 4세와 베네딕토 3세 사이에 여교황 요한나가 2년 7개월 재위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교회와 성 베드로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수탉을 지정했다.[1]
1. 개요[편집]
성 레오 4세는 제103대 가톨릭 교황이다.
2. 생애[편집]
교황이 되기 이전부터 로마 교구에서 일했다. 이전 교황 세르지오 2세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됐고, 847년 세르지오 2세가 선종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미사 중에 성가를 부르도록 장려하였다.
846년 무슬림의 침략에 대비하여 로마를 재건하고 성벽을 보수하도록 하였다. 846년 사라센 해적이 로마시 외곽을 공격해 구 성 베드로 성당이 불타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다행히 로마 시민들이 농성을 하자 해적들은 퇴각해 로마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 혼란 속에 교황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황제의 승인을 더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레오 4세를 선출했다.
습격이 있은 후 구 성 베르도 성당과 도시 외곽의 화재를 진압한 뒤 파괴된 여러 곳을 복구하고, 성벽과 여러 방어탑을 세우는 등 로마시 방어에 큰 공적을 세웠다. 이때 쌓은 성벽 안쪽은 일명 '레오의 도시'라 불렸다. 849년 또다시 사라센 해적의 함대가 포르투스 항구로 접근하자 나폴리, 가에타, 아말피 공화국 등 동맹들을 소집하고 인근 오스티아 항구 근처에서 해전으로 사라센 함대를 대파하였다. 이때 폭풍의 도움으로 사라센 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사람들은 신의 가호라 여겼다. 이 오스티아 전투는 중세 교황령 역사상 매우 중요한 전투로 꼽히며 후대에 성 베드로 성당이 개축될 때 라파엘로가 기념화를 그리기도 했다.#
850년 4월 프랑크 국왕 로타리우스 1세의 아들인 루이 2세를 황제로 대관했다. 855년에는 로마를 순례한 애설울프 왕과 당시 왕자였던 어린 알프레드 대왕을 만나 환영했다.
855년 7월 17일 선종하고 유해는 성 베드로 성장에 매장됐다. 사후 여러 공적으로 시성됐다.
3. 여담[편집]
레오 4세와 베네딕토 3세 사이에 여교황 요한나가 2년 7개월 재위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교회와 성 베드로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수탉을 지정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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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가 잡혀가자 수탉이 울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를 3번 부인했고 이윽고 예수의 예언대로 수탉이 울은 일화 때문이다. 수탉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한 사건과 이후 그의 회개를 가리킨다. 가톨릭 성당에 가끔 닭 상징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