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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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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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lothar II (클로타르 2세, 고대 프랑크어)
Ludher II (루드헤르 2세, 고대 고지 독일어)
Lotharius II (로타리우스 2세, 라틴어)
Lotharius II (로타리위스 2세. 네덜란드어)
Lotario II (로타리오 2세, 이탈리아어)
Lothar II (로타어 2세, 독일어)
Lothaire II (로테르 2세, 프랑스어)
생몰년도
830년/835년 ~ 869년 (38세/33세)
재위기간
855년 ~ 869년
종교
기독교 (로마 가톨릭)

로타르 2세 (Lothair II, 830년/835년 - 869년 8월 8일)은 카롤링거 왕조 출신 로타링기아의 국왕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1세의 차남이다. 그를 이탈리아의 군주로 보는 경우 로타리오 2세를 로타리오 3세로 보기도 한다. 또한 서프랑크 왕국로테르는 로테르 3세로 부르기도 한다.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첩 발트라다와 결혼하기 위해 결혼을 취소하려 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이를 거부한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심하게 싸웠다.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에 의해 프륌 조약을 체결하고 로타링기아알사스, 벨기에 일대를 물려받았다. 로타르 2세는 북해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라인 강 서쪽지역을 물려받았는데, 이 지역은 '로타링기아 왕국'(Regnum Lotharingium)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로타르 1세에 의해 토이트베르가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나 자녀가 없었다. 로타르 2세는 자신의 아들을 낳아 준 정부 발트다라와 정식 결혼하기 위해 아내 토이트베르가에게 간통 누명을 씌우려 했지만, 교회의 반대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아버지 로타르 1세가 은퇴할 때 미성년자에 간질환자였던 동생 샤를 2세(프로방스의 샤를)에게 상속 포기를 강요하기도 했다. 후에 간질로 고생하던 프로방스의 샤를은 자신이 죽게 될 경우 영토를 로타르 2세에게 남긴다고 하였는데, 맏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가 이에 반발하여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860년 일부 주교들의 허락을 얻어 토이트베르가와 이혼하고 862년 발라다와 결혼했지만 교황 니콜라오 1세에 의해 취소, 무효화되었다.

863년 1월 동생인 프로방스의 샤를이 후계자 없이 죽자 형 루트비히와 함께 샤를의 왕국을 분할, 루트비히 2세는 프로방스 지역을, 로타르 2세는 빈과 리옹 부근 지역을 차지했다. 아내 토이트베르가와 이혼하고 정부 발트라다와 결혼하는 것과 이를 위해 자신의 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 두 삼촌들, 샤를 대머리왕루트비히 독일왕의 영향력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결국 이 무리한 시도로 결국 그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869년 교황청을 설득하려 로마를 다녀오던 중 피아첸차에서 말라리아 열병으로 사망했다.

남겨진 발트라다의 아들 위고는 즉각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에 의해 불법적인 사생아로 선포되었고, 그의 영토는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두 명의 삼촌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에게 분할되어 넘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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