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후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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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후작령
Marca di Tuscia
파일:카노사 가문 치하 토스카나 후작령 최대 영토.jpg
812년 ~ 1197년
위치
이탈리아 중부
수도
루카(1057년까지)
피렌체(1057 ~ 1116)
산 미니아토(1116 ~ 1197)
정치체제
봉건제
국가원수
변경백후작
주요 변경백 및 후작
보니파초 1세(812 ~ 823)
아달베르토 1세(847 ~ 884)
우고(961 ~ 1001)
보니파초 4세(1027 ~ 1052)
토스카나의 마틸다(1055 ~ 1115)
언어
이탈리아어, 프랑크어, 라틴어, 독일어
종족
프랑크인, 라틴인, 독일인
종교
가톨릭
주요사건
812년 보니파초 1세가 토스카나 일대의 총독으로 선임됨.
847년 아달베르토 1세가 정식으로 변경백에 선임됨
986년 우고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변경백을 겸임함.
1027년 카노사 가문의 지배가 시작됨
1075 ~ 1122년 교회 서임권 분쟁
1115년 토스카나의 마틸다 사망
1198년 토스카나 연맹의 결성
성립 이전
랑고바르드 왕국
해체 이후
토스카나 연맹

1. 개요
2. 역사
2.1. 카노사 가문 이전
2.2. 카노사 가문
2.3. 카노사 가문 이후
3. 역대 변경백 및 후작
3.1. 카노사 가문 이전
3.2. 카노사 가문
3.3. 카노사 가문 이후



1. 개요[편집]


812 ~ 1197년 토스카나 일대를 지배한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국. 남쪽으로는 교황령, 서쪽으로는 리구리아해, 북쪽으로는 롬바르디아와 접했다. 최전성기엔 스폴레토 공국, 카메리노 변경백을 겸하며 북이탈리아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군림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간의 서임권 분쟁에 깊숙이 참여했다. 그러나 1115년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사망한 뒤 토스카나 일대의 여러 도시들이 대거 독립하면서 위축되다가 1197년 토스카나 대도시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필리프에 대항하여 토스카나 연맹을 결성하면서 사실상 무너졌다.


2. 역사[편집]



2.1. 카노사 가문 이전[편집]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를 손아귀에 넣은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는 781년에 아들 피핀 카를로만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워서 자신을 대신하여 이탈리아를 다스리게 했다. 810년 피핀이 사망하자, 카를루스 대제는 일찍이 이탈리아 원정에 함께 했던 바이에른 출신의 귀족 보니파초 1세를 이탈리아 총독에 세웠다. 보니파초 1세는 813년부터 루카의 백작이자 공작을 역임했으며, 피사, 피스토이아, 볼테라 등 여러 도시를 자신의 치하에 두었기에 후대인들에 의해 토스카나의 첫 변경백으로 여겨진다.

823년 보니파초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보니파초 2세가 828년 로타리우스 1세로부터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그는 로타리우스 1세의 코르시카 원정을 도왔으며, 828년 7~8월에 사라센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는데, 사라센을 찾지 못하자 아프리카를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우티카와 카르타고 사이의 해안가를 약탈한 뒤 코르시카로 귀환했다. 전승에 따르면, 830년경 사라센의 습격에 맞서 군사 작전을 벌이는 동안 코르시카의 도시인 킬코산토 근처에 작은 요새를 세웠다. 이 요새는 훗날 또다른 도시로 발전했고, 나중에 그를 기리기 위해 '보니파초'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833년 루도비쿠스 1세와 로타리우스 1세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보니파초 2세는 토르토냐에 수감된 루도비쿠스 1세의 아내인 바르바라의 유디트를 석방하는 등 루도비쿠스 1세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834년 루도비쿠스가 패배하고 로타르 1세가 이탈리아의 왕으로 군림한 뒤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프랑스로 망명한 뒤 846년 또는 847년에 사망했다. 이후 토스카나 일대는 프랑크 왕국의 직할지가 되어 궁정백 마인프리둑스(Mainfridux, 833 ~ 838)와 아가누스(Aganus, 838 ~ 846)의 대리 통치를 받았다.

그러던 846년, 보니파초 2세의 아들 아달베르토 1세가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음으로써 북해에서 중부 이탈리아까지 이르는 프랑크 왕국의 중앙부를 차지한 로타리우스 1세에 의해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그는 사라센 해적으로부터 코르시카를 방어하는 한편 교황 베네딕토 3세에 대항하여 대립교황 아나스타시오 3세를 지원하다가 나중에 베네딕토 3세 편에 섰다. 이후 포르모소요한 8세간의 교황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포르모소의 편에 섰고, 878년 3월 처남인 스폴레토 공작 람베르토 1세와 함께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 요한 8세는 트루아로 피신한 뒤 서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람베르토와 아달베르트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879년 4월에 급사해버리면서, 그가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 후 람베르토가 급사하고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로만 2세가 개입해 요한 8세를 인정하라고 압박하자, 그는 요한 8세와 화해하고 그가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아달베르토 1세는 생전에 스폴레토 공작 귀도 1세의 딸이며 람베르토 1세의 누이인 로틸데와 결혼하여 아들 아달베르토 2세를 낳았다. 884년 아달베르토 1세가 사망한 뒤 직위를 계씅한 아달베르토 2세는 스폴레토의 귀도 가문과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89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귀도 3세와 함께 힘을 합쳐 프리올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와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상대로 맞서 싸웠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잡힌 뒤 베렝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장악한 후 석방되었다.

898년에는 베렝가리오 1세 편에 서서 스폴레토 공작 람베르토 2세를 상대로 싸웠다가 베렝가리오 1세가 패퇴한 뒤 또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람베르토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후 풀려난 그는 900년 루이 3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베렝가리오 1세 편에 섰다가 베렝가리오 1세가 패배하자 루이 3세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루이 3세가 베렝가리오 1세의 반격으로 축출되자 다시 베렝가리오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915년 아달베르토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귀도가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그는 920년경 만투아에 궁정을 세웠고, 924년 또는 925년에 투스쿨름 백작이자 로마 집정관인 테오필락트와 테오도라의 딸인 마로치아의 두번째 남편이 되었다. 마로치아가 그를 뒷배로 삼아 로마를 장악하려 들자, 교황 요한 10세는 이에 대응해 동생 피에르토를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하고 오르테 호숫가에 거점을 마련한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어 마로치아를 견제하게 했다.

928년, 귀도가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라테라노 궁전을 기습 공격해 피에트로를 체포하여 요한 10세가 보는 앞에서 사지를 절단했다. 이후 요한 10세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몇 달 만에 옥사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귀도와 마로치아 부부의 손아귀에 놓여졌지만, 정작 귀도는 오래 살지 못하고 929년 2월 3일에 사망했다. 사후 동생 람베르토가 그의 뒤를 이어 토스카나 변경백이 되었다. 그러나 931년 10월 이탈리아 국왕 위그가 그를 폐위시키고 토스카나 변경백에 자신의 형제인 보소네를 앉혔다. 하지만 보소네 역시 36년 위그를 상대로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체포된 후 생 베르나르-드-로망스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위그는 뒤이어 자신의 사생아우베르토를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했다. 943년 스폴레토 공작 사를리오가 위그의 강력한 압력에 의해 수도원에 강제 은퇴한 뒤, 우베르토는 스폴레토 공작이자 카메리노 변경백을 겸임했다. 946년 이브레아 변경백 베렝가리오 2세가 위그를 몰아내고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한 후, 우베르토는 베렝가리오 2세의 압박에 못 이겨 스폴레토를 보니파초 2세에게 넘겼지만 토스카나 변경백 직위는 유지했다. 962년 베렝가리오 2세의 아들인 이브레아 변경백 아달베르토 2세에 의해 교황령 북쪽을 빼앗긴 교황 요한 12세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오토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오토 1세는 즉시 이탈리아로 진군해 베렝가리오 2세를 격파하고 봉신으로 삼은 뒤 이탈리아 국왕에 즉위했다. 이후 북상하여 우베르토를 공격해 격파한 뒤 1년간 토스카나에서 축출했다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대가로 토스카나에 복귀하는 것을 허락했다.

969년경 우베르토가 사망한 뒤, 아들 우고가 토스카나 변경백에 올랐다. 그는 도시들간의 분쟁과 외부 세력의 개입, 용병들의 약탈, 치안 붕괴로 인해 지극히 혼란스러웠던 토스카나의 질서를 회복하고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일개 소도시에 불과했던 피렌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아르노 강 유역의 핵심 도시로 성장시켰고 바디아 피오렌티나(Badia Fiorentina) 수도원을 건설했다. 14세기 피렌체의 은행가, 상인이자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는 저서 <새로운 연대기(Nuova Cronica)>에서 우고가 토스카나 백국의 수도를 루카에서 피렌체로 옮겼다고 기술했지만, 이를 입증하는 당대의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사실무근으로 간주한다.

우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 오토 2세 부자의 이탈리아 방면에서의 핵심 조언자로서 로마를 통제하길 원하는 두 황제의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던 983년 오토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오토 3세가 3살의 나이에 로마왕이 되면서 제국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우고는 이 때를 틈타 세력 확장을 꾀했다. 986년 트라사문트 4세가 사망한 뒤 공석이 된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 직위를 겸임했으며, 993년 카푸아 대공이며 오토 3세의 가신을 자처했던 란테눌프 2세가 반란으로 인해 살해되자 군대를 이끌고 카푸아로 남하해 반란을 진압하고 판둘프 1세의 막내아들 라이둘프를 카푸아 대공에 세웠다. 또한 993년에 케른텐 공작이며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의 외손자인 오토의 딸 유디트와 결혼했다.

996년, 성년의 나이가 된 오토 3세는 우고의 위세가 너무 강하다고 여기고 스폴레토 공작의 직위를 이브레아의 콘라트에게 넘기게 했다. 우고는 이를 달게 받아들였고 황제의 사촌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와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와 함께 제국군 사령관으로서 이탈리아에서의 제국의 권력 유지에 힘을 보탰으며, 로마로 내려가서 통치를 행사한 황제를 호위했다. 그러던 1001년 로마인들이 오토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황제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포위하고 성문을 폐쇄해 우고와 하인리히가 로마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우고는 반란 주모자들과 협상해 오토 3세가 이탈리아를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시키게 했다.

우고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도 종교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수도원장이 몇 년째 세워지지 않을 정도로 쇠락한 보비오 수도원을 재건하는 데 기여했고, 바디아 피오렌티나 수도원 외에도 산 미켈레 알라 베루카(San Michele alla Verruca) 수도원, 몬테 세나리오의 바디아 델 부온솔라초 수도원, 세티모의 산티 살바토레와 로렌초(Santi Salvatore e Lorenzo) 수도원, 포지본 시의 산 미켈레 수도원, 아레초 수도원, 치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 수도원 등 여러 수도원을 건설했다. 또한 수많은 기부금을 여러 교회에 전달하고 빈민 구제 사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쌓았기에, 우고는 후대인들에 의해 '대 변경백'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그러나 우고가 1001년 12월 21일에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한 후 아달베르토 2세의 후손으로서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된 보니파초 3세는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토스카나의 유력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놓고 경쟁하던 하인리히 2세와 아르두이노 디브레아 중 하나를 택하고 상대방을 음해하려 들었고, 이로 인해 토스카나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급기야 1008년 하인리히 2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고 아두이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토스카나 전역이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던 그는 1012년에 사망했고, 1014년 라니에리가 새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라니에리 역시 뚜렷한 업적을 거두지 못하다가 10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임되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콘라트 2세에 대적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토스카나 변경백 직위에서 축출되었다.


2.2. 카노사 가문[편집]


콘라트 2세는 경쟁자들의 숱한 방해공작을 뚫고 로마에 입성한 뒤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보니파초 4세를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했다. 보니파초 4세는 만토바, 브레시아, 모데나, 페라라, 레지오 등 북부 이탈리아의 상당수 영지를 갖춘 카노사 가문의 가주였다. 여기에 토스카나 변경백까지 손에 쥐면서,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부상했다. 1036년 콘라트 2세의 아들 하인리히크누트 대왕의 딸 군힐다의 결혼식이 열린 네이메헌에 가서 그 곳에 한 달 이상 머물면서 콘라트 2세의 황후인 슈바벤의 기젤라의 조카이자 수양딸인 로렌의 베아트릭스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베아트릭스는 지참금으로써 로렌의 중요한 자산인 브리이 성과 스테네이, 무제이, 쥐비니, 롱리에 등 여러 영지를 가져왔다. 베아트릭스와 결혼한 뒤 토스카나로 돌아온 보니파초는 1036년 초여름 콘라트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든 블루아 백작 오도 2세를 격파했고, 뒤이어 황제를 상대로 반기를 든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에게 가담한 파르마를 제압했다. 1038년 2월 콘라트 2세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정성껏 대접했다.

1043년 콘라트 2세는 그동안 제국에 공헌한 그에게 보답하고자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백국을 수여했다. 여기에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주요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 후 만토바에 주로 거주하면서 자신이 관할하는 광할한 영토를 통치했다. 1046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한 뒤 로마왕에 오른 하인리히 3세가 황후 아그네스와 함께 피아첸차에 도착했을 때 환영했다. 그러나 그와 하인리히 3세와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그가 신하로서 과도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고, 그를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자신에게 심대한 위협이 될 거라 여겼다.

하인리히 3세의 이러한 우려는 보니파초가 교황 선임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1047년 8월 교황 클레멘스 2세가 사망한 후, 지난날 2번이나 교황에 선임되었다가 폐위되었던 베네딕토 9세가 보니파초의 은밀한 지원에 힘입어 그 해 11월에 교황에 복위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로마 시민들은 하인리히 3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새 교황을 지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는 브릭센의 주교 포포를 새 교황 다마소 2세로 선임했다.

보니파초는 로마로 향하는 다마소 2세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베네딕토 9세가 이미 교황에 올랐다며 그를 로마로 들여보낼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마소 2세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에게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송하고 베네딕토 9세를 폐위시키라고 명령했다. 보니파초는 이번에는 황제의 뜻에 따라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위하여 베네딕토 9세를 축출한 뒤 7월 17일에 다마소 2세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다마소 2세는 즉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9일에 로마시 외곽의 팔레스트리나에서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증세가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와 유사한 점을 들어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고 추정하지만, 당대에는 보니파초가 교황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렇듯 위세를 떨치던 보니파초는 1052년 5월 6일 산 마르티노 또는 스핀다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암살자들이 하인리히 3세의 사주를 받았다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보니파초 4세의 아들 '''페데리코가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고 어머니 베아트릭스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보니파초 4세를 위시한 카노사 가문의 강력한 권세를 질시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 4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카노사 가문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이들을 약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페데리코의 직위 승계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영지를 몰수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황제의 의도를 눈치챈 베아트릭스는 1054년 중반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상 로렌 공국을 빼앗긴 고드프리트 3세와 재혼했다.

하인리히 3세는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의 결혼은 자신의 허락없이 이뤄졌으니 유효하지 않으며, 황위에 도전하려는 음모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1055년, 하인리히 3세는 친히 피렌체로 진격해 베아트릭스와 페데리코, 그리고 마틸다를 체포하고 독일로 끌고 갔다. 페데리코는 독일로 끌려가던 중인 그 해 7월 병사했다. 베아트릭스의 남편 고드프리트 3세가 황제를 피해 로렌으로 달아난 뒤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하인리히 3세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다가 1056년 10월 5일 보드펠트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뒤이어 6살된 아들 하인리히 4세가 새 황제에 등극했고, 아그네스 황후가 섭정을 맡았다. 아그네스는 고드프리트 3세가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고드프리트와 베아트릭스의 결혼을 승인하고 베아트릭스와 마틸다를 석방했다. 1057년 토스카나에 돌아온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여 변경백에 취임했고 어머니 베아트릭스와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섭정을 맡았다.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 3세는 자신들의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켜서 로렌 가문과 카노사 가문의 동맹을 강화하기로 했다. 1069년, 마틸다는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전처 도다[1]와의 사이에서 낳은 '꼽추' 고드프리트와 결혼했다. 그 직후 고드프리트 3세가 사망하면서, 마틸다의 남편고드프리트가 고드프리트 4세로서 공작에 올랐다. 이후 마틸다는 로렌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살았고, 토스카나 일대는 어머니 손에 맡겨졌다. 마틸다는 1070년에 임신해 1071년 1월 초에 딸을 낳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 베아트리체로 지었지만, 아기는 태어난 지 몇 주 만인 1071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

그 후 남편과 심한 불화를 겪은 마틸다는 1072년 1월 19일 로렌에서 탈출하여 만토바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에게 달아난 뒤 안드레아스 수도원에 은거했다. 1072년 고드프리트 4세가 알프스를 넘어 토스카나의 여러 곳을 방문하며 마틸다의 남편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당시 루카에 머물고 있던 마틸다가 만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재회에 실패했다. 1073년 여름 고드프리트가 로렌으로 돌아간 뒤, 마틸다는 교황청에 결혼 무효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친 교황 세력인 로렌 공국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간의 서임권 분쟁이 발발했을 때, 마틸다는 교황을 지지한 반면 고드프리트 4세는 황제 편에 섰다. 그는 하인리히 4세의 작센 원정에 참여해 작센 공작 마그누스와 맞서 싸웠으며, 웨스트 프리슬란트의 백작 디트리히 5세를 추방했다. 그런데 1076년 2월 27일, 고드프리트 4세는 블라르딩겐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마틸다에게 적대적인 독일측 연대기에서는 마틸다가 남편의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고드프리트 4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기에, 원칙대로라면 마틸다가 로렌 공국을 상속받아야 했다. 그러나 고드프리트는 암살되기 전에 조카 고드프루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영지를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하인리히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린 아들 콘라트를 로렌 공작에 세우고 나무르 백작 아달베르트 3세를 섭정으로 삼았다. 고드프루아는 108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마틸다는 토스카나로 돌아온 뒤 수녀원에 은거하면서 힐데브란트 추기경과 친분을 맺었다. 힐데브란트 추기경은 1073년 4월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등극한 뒤 교회 개혁을 밀어붙였고,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는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075년 12월 하인리히 4세가 로마에 무장 사절을 보내 그레고리오 7세를 체포했지만, 마틸다 모녀를 비롯한 교황 충성파가 교황을 구출했다. 1076년 1월 24일 보름스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는 마인츠의 지그프리트 대주교, 트리어의 우도 대주교, 그리고 24명의 다른 주교들 앞에서 "교황이 낯선 여성과 탁자를 공유하고 필요 이상으로 친밀하게 수용하고 있다", "교황이 여자를 원로원에 들여보냈다"고 비난했다. 이는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가 그레고리오 7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겨냥한 공격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에 맞서 1076년 2월 15일에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를 풀어주고 기독교인들이 하인리히 4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금지했다. 이렇듯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던 1076년 4월 18일 베아트릭스가 사망하면서, 마틸다는 토스카나 백국의 단독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 해 9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제후들은 항니리히 4세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뒤 그레고리오 7세에게 다가오는 겨울에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탈리아를 떠나길 원치 않았지만 마틸다의 적극적인 권유를 따르기로 하고, 그해 12월에 마틸다와 함께 회의가 열릴 예정인 트레부르(Trebur)로 출발했다.

파일:카노사의 굴욕.jpg
하인리히 4세(가운데 인물)가 클뤼니 대수도원장 우고(St. Hugh the Great. 1024-1109)(왼쪽 인물)와 마틸다(오른쪽 인물)에게 간청하는 장면을 묘사한 12세기의 유명한 삽화이다.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스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다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

1077년 1월 초,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롬바르디아로 향했다. 그레고리오 7세와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틸다의 본거지인 카노사 성채로 경로를 변경했다.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 앞에 나타난 하인리히 4세는 강추위를 무릅쓰고 참회복을 입고 맨발로 선 채 성문이 열릴 때까지 대기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자신을 잡으려고 술수를 부리는 것이라 여겨 면담을 거부했지만, 하인리히 4세는 계속 성문 앞에서 무릎꿇은 채 3일을 버텼다. 이에 마틸다는 성직자들과 함께 하인리히 4세를 만나보라고 권고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마침내 황제를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 앞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복종의 의미를 표현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을 철회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의 면담을 주선한 후, 마틸다는 광활한 영지를 순회하며 통치를 행사하고 여러 교구에 기부했다. 1077년 후반에는 거주지를 로마로 옮기고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 정책을 지원했다. 한편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 직후엔 루돌프를 지지했지만, 파문을 취소한 후에는 루돌프의 지지를 철회하고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1080년 3월 로마 사순절 행사에서 "하인리히 황제가 약속을 어기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파문을 선고했다. 그러나 독일 주교와 제후들은 교황이 언행을 아무렇지 않게 바꾸고 독선적으로 행동한다고 여겨 분개했다.

1080년 6월 25일 브릭센에 모인 7명의 독일 주교, 1명의 부르고뉴 주교, 그리고 20명의 이탈리아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귀베르토를 교황 클레멘스 3세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이때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가 마틸다와 간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틸다는 이에 대항하여 1080년 9월 페라라에서 귀족들을 소집한 뒤 그레고리오 7세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하인리히 4세에 맞서 정의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080년 10월, 그레고리오 7세와 마틸다의 군대는 볼타 만토바나에서 친 황제파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많은 토스카나 귀족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귀순했고, 마틸다는 카노사 성으로 피신했다.

1081년 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한 하인리히 4세는 마틸다에 대한 충성을 접고 자신 편에 선 루카 시에게 포괄적인 특권을 부여했고, 마틸다의 모든 영지와 재산을 몰수한다고 선포했다. 이후 제국군은 로마로 내려가 도시를 2년간 포위 공격한 끝에 1084년 함락시켰고,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한편 마틸다 역시 카노사 성채를 압박하는 제국군의 공세에 직면했고, 1082년 스폴레토 귀족 라니에리 2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스폴레토 공작으로서 독립하는 등 대다수 가신들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럼에도 마틸다는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카노사 성 근처에 지어진 아폴로니우스 수도원과 노난툴라 수도원에 보관된 귀금속들을 모조리 팔아치워서 얻은 수익금을 그레고리오 6세에게 보냈다.

1084년 5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백작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군이 그레고리오 7세를 복위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로마로 진군해 하인리히 4세의 군대를 격퇴하고 로마를 공략했다. 이로 인해 제국군의 기세가 꺾이자, 마틸다는 이 때를 틈타 카노사 성채에서 출진해 반격에 착수했다. 그 해 여름, 마틸다는 모데나 북동쪽의 소르바라에서 하인리히 4세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파르마 주교 에버하르트를 사로잡았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독일로 돌아갔고, 마틸다와 추종자들은 모데나, 레지오, 피스톨라, 스폴레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해 살레르노에 유폐된 뒤 1085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1085년 7월,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의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가 마틸다에게 청혼했다.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그녀는 하인리히 4세와 대적할 노르만 병사들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전하기로 했다. 1087년 교황 빅토르 3세가 사망한 뒤 추기경단이 오스티아 주교 오도를 교황 우르바노 2세로 선출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우르바노 2세와 굳건한 동맹을 맺었고, 1089년 우르바노 2세의 제안에 따라 바이에른 공자 벨프 5세와 결혼했다.

우르바노 2세와 마틸다는 벨프 5세가 군대를 이끌고 오기를 기대했지만, 황제와 대놓고 맞설 생각이 없었던 벨프 5세는 1089년 중반에 수십 명의 수행원들만 이끌고 찾아왔다. 마틸다는 수천 명의 군대를 롬바르디아로 파견해 그를 영예롭게 환영하고 120일간의 결혼 축제를 거행했다. 그러나 두 부부간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고, 1095년 봄 부부는 자식을 두지 못한 채 헤어졌다. 두 사람의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는 일은 없었지만, 마틸다 측 기록에서 벨프 5세의 이름은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1090년,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이탈리아로 진군해 만토바를 포위했다. 이후 11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1091년 4월 만토바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황제의 군대는 1091년 여름에 브레시아, 베로나를 포함한 포 강 북쪽의 대다수 영역을 장악했으며, 1092년에 모데나와 레지오 등지를 공략했다. 이에 마틸다는 1092년 늦여름 키르피네티에서 아직까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과 앞으로 어찌할 지를 상의했다. 대다수는 황제와 평화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롤라의 은둔자 요한네스만이 계속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틸다는 요한네스의 주장에 동의하며 추종자들에게 성전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1092년 가을 하인리히 4세의 군대가 카노사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마틸다가 굳건히 버텨서 공략이 지지부진한 데다 겨울이 찾아오면서 식량 보급에 애를 먹고 전염병이 나돌자, 병사들이 대거 탈영해버렸다. 결국 카노사 공략을 포기하고 베로나로 철수한 황제는 독일로 돌아가서 군대를 다시 일으키려 했지만, 남부 독일 공작들이 그를 상대로 반기를 들어 알프스 계곡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1093년 봄 제위 계승자인 콘라트가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크레모나, 로디, 밀라노, 피아첸차의 귀족들이 마틸다의 사주를 받고 반기를 들었다. 이리하여 하인리히 4세는 베로나 일대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전락했다. 다만 아드리아해 연안 지대에서 변경백을 자칭하던 베르너 2세가 하인리히 4세 지지를 천명하며 스폴레토를 장악한 뒤 하인리히 4세로부터 스폴레토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1094년, 하인리히 4세의 두번째 아내인 키예프의 에우프락시아가 산 제노 수도원 감옥에서 탈출했다가 베로나에서 하인리히 4세가 급파한 추격대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마틸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그녀는 카노사 성으로 피신했다. 1095년 3월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마틸다의 보호 아래 피아첸차 공의회를 소집했다. 에우프락시아는 이 공의회에 참석해 하인리히 4세가 자신더러 난교에 참여하도록 강요했으며 악마의 미사를 드리려 했다고 고발했다. 이로 인해 하인리히 4세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그러다가 마틸다가 벨프 5세와 헤어진 뒤 벨프 5세의 아버지인 바이에른 공작 벨프 4세가 하인리히 4세의 편을 들기로 하면서, 하인리히 4세는 마침내 1097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두 번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고, 우르바노 2세는 마틸다의 지원에 힘입어 클레멘스 3세를 몰아내고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성 베드로의 여성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Marchio(후작) 작위를 공공연히 사용했다.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마틸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을 순회하며 교황의 뜻에 따라 십자군에 참여해달라고 설득했다. 또한 롬바르디아, 레지오 에밀리아, 토스카나의 교회 및 사회 기관에 대한 기부를 대대적으로 벌임으로써 하인리히 4세와의 전쟁 동안 피폐해진 수도원 및 마을 재건에 힘을 쏟았다. 특히 1083년, 1100년, 1103년에 피사에 대규모 기부금을 보내 피사 대성당이 재건축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수많은 병원을 설립하고 홍보했다. 그러는 한편, 루카, 파비아, 피사 등지의 독립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이 자신에게 명목상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는 것을 허용했다.

마틸다는 40여 년간 통치를 행사하면서 정기적으로 박식한 학자들의 조언을 구했다. 그녀의 치세에 반포된 법령에는 42명의 법관, 29명의 재판관, 8명의 법학 교사, 42명의 변호사의 이름이 실렸다. 피렌체 문서 보관소에는 그녀의 이름으로 반포된 30개의 사법 회의 기록이 보관되고 있다. 이렇듯 박식한 학자들을 중용하고 그들의 조언을 따라 법령을 시행하면서 사법 행정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또한 마틸다는 사계절 내내 자신의 영지를 여행하며 순회 법정을 벌임으로써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자 노력했다.

1111년 로마에 들러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 문제에 대한 논쟁이 또다시 불거지자 교황 파스칼 2세 및 추기경 몇 명을 사로잡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틸다는 자신과 가까운 두 명의 추기경인 파르마의 베르나르도와 레지오의 본시뇨레의 석방을 요청했고 하인리히 5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탈다는 교황과 다른 추기경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로마를 떠나 독일로 돌아가던 하인리히 5세는 1111년 5월 6~11일에 비아넬로 성에서 마틸다와 만나서 리구리아의 통치를 양도하고 이탈리아 부왕으로 선임했다.

마틸다는 황제를 접견한 뒤 프리냐노 술라 세키아(Prignano sulla Secchia) 인근의 몬테바라조네(Montebaranzone)로 은퇴했다. 1114년 여름 만토바에서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만토바인들은 토스카나 후작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만토바에서 5km 떨어진 성채이자 그녀의 '혐오스러운 권력'으로 간주된 리발타 카스텔( Rivalta Castle)을 불태웠다. 이 소식을 접한 마틸다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관료를 보내 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알렸고, 1115년 4월 만토바에 있는 산 미켈레 교회에 파센고 법원의 권리와 수입을 넘겼다.

마틸다는 두 차례 결혼했으나 전부 실패로 끝났고, 이로 인해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 이로 인해 누가 카노사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을 지를 놓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주요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구이도 구에라( Guido Guerra)를 양자로 들였다는 설을 제기하지만, 1099년 11월 12일 브레셀로 수도원 문서에 마틸다의 양아들( adoptivus filius domine comitisse Matilde)로 언급된 것을 제외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교황청 자료에 따르면, 마틸다는 1102년 11월 17일 성 크리소고노 성당의 베르나르도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자신이 죽으면 모든 재산을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뜻에 따라" 교황청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담긴 문서가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정말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측 기록에는 마틸다가 1111년에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접견한 뒤 황제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삼았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렇듯 후계 구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마틸다는 1115년 7월 24일 밤 69세의 나이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에 걸려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에 폴리로네에 있는 산 베네데토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3. 카노사 가문 이후[편집]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로 손꼽힌 마틸다가 사망한 이듬해인 111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베를린 출신의 귀족 라보도를 토스카나 후작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당시 토스카나 일대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수많은 도시들이 토스카나 후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걷고 있었고,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던 라보도는 후작령의 중심지를 피렌체에서 산 마니아토 알 테데스코로 옮겨야 했다.

그는 피렌체를 견제하기 위해 피렌체의 라이벌인 알베르티 가문과 동맹을 맺었고, 비엔티나 성을 피사의 피에트로 모라코니 대주교와 피사의 재판관 및 관리자 일데브란도에게 양도했다. 1119년 알베르티 가문과 힘을 합쳐 피렌체로부터 몬테 카시올리 성을 공략했지만 피렌체인들이 두 차례 반격을 가하는 것을 막으려다 전사했고, 성은 불태워졌다. 하인리히 5세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120년에 콘라트를 새 후작으로 선임했다.

산 마니아토 알 테데스코에 도착한 콘라트는 전임 후작을 살해한 피렌체를 적대하면서도 제국에 그나마 공손하게 대하는 루카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1120년 루카에게 집정관을 임의로 뽑고 무제한적인 자치를 누리는 것을 허용하는 등의 혜택을 부여했다. 이후 라보도 사후 피렌체 편으로 돌아선 알베르티 가문에 맞서 루카의 동맹인 귀도 가문과 손을 잡았다.

1120년 10월, 귀도 가문의 가주 귀도 게라 2세와 쿠라 코뮌의 지원을 받으며 알베르티 가문이 영지로 삼은 폰토르모 성을 포위했다. 또한 귀도 가문은 엠폴리의 산탄드레아 교회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교회 가까이로 이동하고 그곳에 벽과 탑을 건설하도록 강요해 알베르티 영역과 경계를 이루는 요새화된 마을을 건설하기도 했다. 1121년 4월, 폰토르모 성 공략에 실패한 콘라트는 발 디 페사의 파시냐노 인근에 진을 치고 알베르티 가문을 압박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행동은 피렌체에 어떠한 영향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1122년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면서 황제와 교황간의 서임권 분쟁이 해결되자, 피렌체 코뮌과 알베르티 가문은 마침내 콘라트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1122년 10월, 콘라트는 피렌체 외곽에서 평의회를 개최하고 사법권을 행사했다. 10월 24일, 피렌체 교회의 부제와 시성사가 법정에 출두했다. 그들은 보니파초 디 테그리모를 불법적으로 토지를 점유한 혐의로 기소했고, 콘라트는 토지를 몰수하고 보니파초에게 벌금을 매겼다.

1123년경, 귀도 가문에 충성하는 용병들이 피렌체가 내려다보이는 피에솔레의 언덕에 자리잡은 산성을 점령했다. 이에 피렌체는 1123년 또는 1124년 피에솔레를 포위 공격했다. 포위전은 3년간 지속되다가 마침내 1125년 또는 1126년 피에솔라인들이 굶주려 굴복하고 성벽이 파괴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콘라트는 피에솔레를 방어하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 피사와 제노바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노바를 지원하기로 한 그는 피렌체가 피사를 지원하는 것을 막고자 피렌체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1127년 피렌체의 고프레도 주교에게 캄폴리, 데시모, 보솔로로 구성된 교구에서 숙식을 제공받을 권리를 부여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루카와 피사의 무역 전쟁에서 루카의 편을 들었고, 1128년 피사와 시에나의 전쟁 때 시에나 편을 들어서 피사의 게라르데스키 가문으로부터 볼그레리 성을 점령했다.

콘라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으나, 학자들은 대체로 1129년에서 1131년 사이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토스카나 후작 지위는 수년간 비워졌다가 11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의 특사로서 피사 공의회에 참석한 이스트리아 변경백 엥겔베르트 3세가 토스카나 후작이자 스폴레토 공작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엥겔베르트 3세는 1137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오만공에게 직위를 넘기고 독일로 귀환했다. 하인리히는 이를 통해 바이에른, 작센에 이어 이탈리아 중북부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인 프라이징(Freising) 수도사 오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바다에서 바다로, 덴마크에서 시칠리아까지 이르는 영토를 가졌다"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1137년 12월 로타르 3세가 독일로 돌아가던 중 급사한 뒤, 하인리히는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선제후들은 그가 오만하고 위세가 지나치게 강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3세를 새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하인리히가 콘라트 3세에게 "로타르 3세에게서 받은 황제복을 줄 테니 내가 작센 공국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신하가 두 개의 공국을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불법이라며 거부하자, 그는 이에 분개해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이에 콘라트 3세는 1138년 8월 하인리히를 반역 혐의로 기소하고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를 바이에른 공작에 선임하고 전임 작센 공작 마그누스의 딸인 에일리카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를 작센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알브레히트의 공세를 가볍게 격파한 뒤 바이에른을 빼앗아간 레오폴트 3세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으나, 1139년 10월 20일 크베들린부르크에서 급사했다.

그 후 토스카나 후작에는 아티미스 시의 유지인 울리히 폰 아템스가 콘라트 3세의 지시에 따라 부임했다. 그는 스폴레토 공작을 겸임하면서 토스카나 일대에 대한 제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1140년 시칠리아 왕국 국왕 루지에로 2세의 지시를 받은 카푸아 공작 알폰소가 스폴레토 공국의 일부 지역인 아브루초 북부 일대를 공략하고 트론토강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후에도 토스카나 일대의 도시들을 복종시키는 데 실패했다. 115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그의 역량으로는 토스카나를 장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벨프 가문벨프 6세에게 직위를 넘기도록 했다.

벨프 6세 본인은 독일에 남아있으면서 아들 벨프 7세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삼고 자신을 대신해서 이탈리아를 경영하게 했다. 그러나 1167년, 벨프 7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구엘프파를 응징하기 위한 북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병사했다. 벨프 6세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깊은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정치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탈리아의 영지를 프리드리히 1세에게 상당한 금액에 팔았다. 다만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 직위는 그대로 맡다가 1173년 정식으로 물러났다.

벨프 6세가 정치에 흥미를 잃고 토스카나 경영에 손을 뗀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수차례 단행하면서 토스카나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러다 1173년 벨프 6세가 물러나자, 황제는 토스카나를 제국령으로 삼으면서 마인츠 대주교인 크리스티안 1세 폰 부흐를 대리 통치자로 삼았다. 크리스티안은 프리드리히 1세와 대립하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를 따르는 도시들을 응징하라는 황제의 뜻에 따라 스폴레토와 아시시 등지를 제압하고 1173년 5월 안코나를 공격했다. 당시 안코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대놓고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로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

크리스티안은 안코나의 해상 라이벌인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베네치아 함대의 지원에 힘입어 안코나 시를 6개월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안코나 시민들은 압도적인 수와 우수한 공성 무기로 밀어붙이는 제국군에 격렬하게 항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안코나 시민들이 어둠을 틈타 성밖으로 빠져나와 적의 공성무기에 수지와 송진이 든 통 여러 개를 던졌다. 이제 불만 붙이면 공성무기를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었지만, 섣불리 불을 붙였다가 자기도 불길에 휘말릴 것을 걱정해서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때 안코나 출신의 과부 스타미라(Stamira)가 뛰쳐나와 도끼로 통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그러자 불길이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면서 공성 무기들을 모조리 불태웠고, 스타미라 역시 불길에 휘말려 사망했다. 제국군은 수비대의 이같은 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안코나를 공략하지 못하다가 10월 중순 베르티노로의 백작부인 알드루다 프란지페네(Aldruda Frangipane)와 구엘프 지도자 굴리에모 마르케셀리(Guglielmo Marcheselli)의 구원군이 당도하자 철수했다.

1174년 3월 토스카나로 돌아온 크리스티안은 테르니를 약탈했고 1174년 여름까지 토스카나에 머물렀다. 이후 마인츠에 잠시 돌아갔다가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로 재차 원정을 떠났을 때 합세했다. 그는 로마냐로 이동하여 토스카나 귀족 귀도 게라가 통치하던 도시인 파엔차를 볼로냐를 겨냥한 군사 작전의 중추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공세는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75년 7월 파비아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섬기던 그는 시칠리아 왕국을 공격하라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1176년 3월 10월 또는 16일 첼레서 인근의 카르솔리에서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레체 백작 탕크레디가 지휘하는 노르만군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후 6개월간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그는 1176년 5월 29일 레나노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연맹에게 참패한 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돌아가면서, 9월 21일에 페르모를 점령하고 철저히 약탈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협상을 중재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알렉산데르 3세를 교황으로 인정하기로 한 합의가 성립되게 한 그는 1178년 3월 12일 알렉산데르 3세를 로마로 호위한 뒤 대립 교황 칼리스투스 3세가 머물고 있는 비테르보를 포위해 굴복시켰다. 1179년 3월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해 파스칼 3세가 결정한 모든 정책을 무효로 확정짓는 데 기여했다. 이후 몬페라도의 콘라도가 비테르보로 쳐들어오자, 그는 즉시 요격에 나섰으나 그해 9월 카메리노에서 참패해 생포된 후 생 플라비아노 성, 로카 베네레 성, 아쿠아펜덴테 성에서 15개월 동안 갇혀 지내야 했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콘라도는 황제 마누일 1세에게 재정 지원을 받는 대가로 크리스티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려 했지만 마누일 1세가 고심 끝에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1181년 석방된 크리스티안은 비테르보에서 로마인들에게 축출된 교황 루치오 3세를 접견했으며, 1183년 루치오 3세가 투스쿨룸에서 로마인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물리치고 교황을 로마로 복귀시키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중병에 걸린 그는 그해 8월 25일 투스쿨룸에서 사망했다. 이후 토스카나 후작 지위는 수년간 비워져 있다가 119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동생 필리프를 토스카나 후작에 선임했다.

1197년 9월 28일 하인리히 6세가 급사하고 갓 3살밖에 안 된 프리드리히 2세의 등극을 인정하지 않은 이들이 각지에서 반기를 들었다. 필리프는 어린 조카의 이권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으로 로마왕에 도전하고자 독일로 떠났다. 이에 이 기회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로 마음먹은 피렌체, 아레초, 루카, 피사, 피스토이아, 포지본시, 프라토, 시에나, 볼테라 등 유력 도시들이 토스카나 연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토스카나 일대는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토스카나 후작령은 유명무실해졌다. 이후에도 토스카나 후작을 자처하거나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실권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1569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가 모든 경쟁 도시들을 굴복시키고 토스카나 전역을 평정한 후 토스카나 대공국을 수립했다.


3. 역대 변경백 및 후작[편집]





3.1. 카노사 가문 이전[편집]




3.2. 카노사 가문[편집]


  • 보니파초 4세 (1027 ~ 1052)
  • 페데리코 (1052 ~ 1055)
  • 토스카나의 마틸다 (1055 ~ 1115)
    • 베아트리체 (1052 ~ 1069): 페데리코와 마틸다의 어머니로서 섭정.
    • '턱수염이 난' 고드프리트 3세 (1053 ~ 1069): 하로트링겐 공작. 베아트리체의 새남편이자 페데리코와 마틸다의 계부로서 섭정.
    • '꼽추' 고드프리트 4세 (1069 ~ 1076): 하로트링겐 공작. 마틸다의 남편.
    • 벨프 2세 (1089 ~ 1095): 마틸다의 남편.


3.3. 카노사 가문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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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텔 백작 마나세스 2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