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타스 호니아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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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년기
3. 제국에서의 공직 생활
4. 니케아로 피난가다
5. 현대 매체에서

Νικήτας (Ἀκομινάτος)Χωνιάτης
Niketas (Akominatos)Choniates [1]
1155~1217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이자 행정가, 1150년 언저리에 아나톨리아의 국경지대 프리기아에서 중산 식자계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마누일 1세의 휘하에서 일하던 형 미하일 호니아티스를 따라 상경해 콤니노스 왕조, 앙겔로스 왕조의 행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4차 십자군의 혼란 속에서 그는 극적으로 탈출했으며, 니케아 제국으로 망명해 21권의 역사를 기록해 후대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2. 유년기[편집]


그는 프리기아의 호네(Χώναι, 현 터키 호나즈(Honaz))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호네는 동로마령 아나톨리아의 국경지대로써, 룸 술탄국과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니키타스가 태어난 시기의 황제인 마누일 1세와 선황 요안니스 2세의 요새화, 친정 전략으로 당시에는 안정되어있었던 편이었다. 그의 가족은 꽤나 부유한 편이었으며, 당시의 부유한 여러 가문들이 그러하듯, 니키타스의 아버지는 그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형이 살고 있는 콘스탄티노플로 유학보냈다. 당시 로마인들의 제국은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 1156년경에는 비록 시칠리아 왕국 정벌에 실패하긴 했지만, 마누일 황제는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던 해인 1164년경에는 달마치야를, 1167년 경에는 시르미온 전투를 통해 헝가리 대부분을 로마인들의 세력권으로 들이고 개선식을 올렸다. 10살 많은 형 미하일 호니아티스는 먼저 콘스탄티노플에 자리를 잡고 그를 보살펴주었다. 미하일은 테살로니키 대주교 에브스타티오스[2] 아래에서 수학하고 있었는데, 그는 형 미하일을 거쳐 니키타스의 학풍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제국에서의 공직 생활[편집]


그의 공직 생활은 콤니노스 왕조에서 시작하여 앙겔로스 왕조 시기에 정점을 찍게 되었다. 그의 형 미하일이 1175년 아테네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성직의 길로 갔다면, 그는 관직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민정을 담당하는 공무원인 로고세티스 직위로 그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 동안 한직에 머물렀던 그는, 이사키오스 2세가 폭군을 처단하고 왕이 되자 다시 공직에 올라 필리포폴리 테마의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1195년 룸 술탄국이 그의 고향 호니에를 파괴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도릴레온(Dorylaion)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외적의 공격은 그가 관리하던 필리포폴리 테마에서도 끝없이 이어졌다. 같은 해에 그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독일인 십자군에 대응해야 했다. 군공이 없는 그였지만, 총독으로서의 대처는 괜찮았는지, 황제는 그에게 비서관, 법관직을 거쳐 민정 총리직에 해당되는 메가스 로고세티스 직을 제수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높은 직위였겠지만, 제국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세 번에 걸친 찬탈과 내전 속에서, 그가 부임했던 필리포폴리는 4차 십자군불가리아 제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그를 등용했던 이사키오스 2세도 4차 십자군의 진로에 따라 복위와 퇴진을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숨죽이며 사태가 진정되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지켜 주던 테오도시오스 성벽도 이번에는 제국의 명운을 수호하지 못했다. 십자군은 해로 성벽을 따라 콘스탄티노플에 육박했고, 가는 곳마다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십자군 병사들은 니키타스의 자택에도 나타났지만, 니키타스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이 그를 구출해준 덕분에 그는 무사히 소아시아로 탈출할 수 있었다.

슬프게도, 그의 형 아테네 대주교 미하일은 라틴 제국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1204년, 아테네를 공격해오는 반란세력과 십자군들을 상대로 도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지만, 1205년경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리하고 내려오는 십자군 본대병력을 막아내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그는 그해 말에 항복해 히오스 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 이후 둘은 평생 만나지 못했다.


4. 니케아로 피난가다[편집]


많은 로마의 귀족들과 관료, 백성들은 언젠가는 정통한 로마인들의 제국이 수도를 탈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정통이라고 여기는 정부를 찾아 이피로스나 니케아, 트라페준타 등지로 떠나기 시작했다. 많은 제국의 방계 왕조들 중에 니키타스가 선택한 곳은 그의 고향 프리기아와 가까운 니케아 제국이었다. 니키타스는 1204년부터 테오도로스 1세의 궁정에 들어가 옛 관료체제를 복구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으며, 공직을 떠나 있는 기간에는 1118년부터 1207년까지의 제국사를 기록한 21권의 히스토리아를 집필했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콘스탄티노플 탈출기를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달하였는데, 덕분에 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일으킨 학살극의 진상이 후대에 알려질 수 있었다. 전형적인 로마식 지식인답게 그는 신학과 철학에도 통달했는데, 그의 역사서보다는 유명하지 않지만 당대에는 오히려 최고의 고전 철학의 집대성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지병이 심각해진 그는 니케아에서 1217년에 사망하였다.


5. 현대 매체에서[편집]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노에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유린했을 때 운 좋게 바우돌리노를 만나 살아나고, 그와 함께 친구의 시골 영지로 피신한다. 이 과정에서 바우돌리노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도통 모를 이야기를 듣게 된다. 참고로 엄청난 미식가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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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실제 성은 아코미나토스였다. 호니아티스는 그의 고향이 호네라는 곳이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2] 마누일 황제의 치세동안 개인 자문 겸 사관인 에피 톤 데세온(ὁ ἐπὶ τῶν δεήσεων)으로 있었던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역사서와 서사시를 번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