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나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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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9세기~기원전 753년
에트루리아
기원전 753년~기원전 5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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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년~7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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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년~751년

756년~17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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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17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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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18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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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18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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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1849년
교황령
1849년~1850년
로마 공화국
1850년~1870년
교황령
1870년~1929년
바티칸 포로
이탈리아 왕국

1929년~현재
바티칸 시국




라틴어
Exarchatus Ravennatis
그리스어
Εξαρχάτο της Ραβέννας
영어
Exarchate of Ravenna

파일:라벤나 총독부.jpg

1. 개요
2. 창설 배경
3. 역사
4. 총독의 권한
5. 역대 총독
6. 둘러보기 틀



1. 개요[편집]


584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창설되어 이탈리아의 동로마 제국 영토를 통치한 총독부. 아프리카 총독부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를 관리했다.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멸망했다.


2. 창설 배경[편집]


554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수십년간 진행한 끝에 이탈리아 정복을 완수했다. 황제는 이탈리아 정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나르세스를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라벤나에서 통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전비를 소모해서 제국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경제 위기를 해소하고 전비를 회수하기 위해 이탈리아 속주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제국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그래도 나르세스가 총독으로서 12년간 통치할 때는 그런대로 문제없었다. 나르세스는 세금을 악착같이 뜯어내면서도 많은 교량을 수리하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재건해, 로마를 어느정도 복구시켰다. 또한 4개의 군 사령부를 창설해 이탈리아를 지키게 했다. 하나는 프리울리에, 하나는 타란토에, 하나는 마기올레와 코모 호수 부근에, 남은 하나는 코티아 알프스와 그라얀 알프스에 설치되어 외적의 침입과 내란에 대비했다. 567년 나르세스가 이탈리아 총독에서 물러난 뒤 롱기누스가 이탈리아 대관구 지사로 부임했고, 4개 사령부가 이탈리아 주둔 동로마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568년 봄, 랑고바르드족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탈리아 주민들은 전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데다 막대한 세금을 내느라 지칠대로 지쳐서 침략자에 저항할 의욕을 잃었다. 군대 역시 수적으로 열세한 데다 나르세스가 떠난 뒤 그들에 맞설 만한 지휘관이 없어서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랑고바르드족은 이 상황을 잘 활용해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569년 9월 비첸차와 베로나에 이어 밀라노를 공략했다. 570년대에 리구리아와 베네토 해안을 제외한 이탈리아 북부 일대를 정복하였고, 3년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파비아에 수도를 두었다. 랑고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자리를 잡았고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가서 스폴레토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다만 랑고바르드족은 라벤나에 주둔한 제국군을 의식해 라벤나 주변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동로마 제국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 및 남부 지역을 건드리지 않았고 이탈리아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을 존중했다. 당시 황제 유스티누스 2세는 아바르족이 발칸 반도를 침략하고 사산 왕조가 동방 전선을 뚫고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랑고바르드 족을 저지할 여력이 없었기에, 그들이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걸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575년, 미쳐버린 유스티누스 2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티베리우스 2세는 아바르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뒤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의 군대를 동방으로 보내 사산 왕조에 대항하게 했다. 또한 랑고바르드족에 대응하기 위해 유스티누스 2세의 사위인 바두아리우스 장군 휘하의 증원군을 이탈리아에 파견했다. 바두아리우스 장군은 로마를 랑고바르드족에게서 구해냈고 프랑크 왕국의 왕 힐데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족에 공동 대응했다. 그러나 바두아리우스는 576년 랑고바르드족에게 패하고 얼마 후 사망했고, 이탈리아의 더 많은 제국 영토가 랑고바르드족에게 잠식되었다. 579년 랑고바르드족이 로마를 포위하자, 교황과 로마 원로원은 티베리우스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산 왕조와의 전쟁이 급했던 황제는 이에 응하지 못했고, 원로원이 자체적으로 공물을 모아서 랑고바르드족에게 바치고 돌아가게 해야 했다.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 티베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에 증원군을 보내 랑고바르드 족의 공세를 저지하고 라벤나를 보강했다. 그 후 새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기존에 민정 지사와 군사 지휘관으로 나뉘어 있었던 이탈리아 총독부와 아프리카 총독부를 개편하여, 라벤나 총독과 아프리카 총독이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민정과 군사를 모두 집행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라벤나 총독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3. 역사[편집]


라벤나 총독에 대한 첫번째 언급은 584년 10월 4일 교황 펠라지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낸 서신에서 확인된다. 그는 이 편지에서, 데키우스 총독이 라벤나에서 랑고바르드족에게 포위되었고, 로마 역시 위험에 처했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역사학계는 이 편지를 근거로 데키우스가 초대 라벤나 총독이라고 추정한다. 데키우스의 전반적인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얼마 안가서 스마라그두스로 교체된 것만은 분명하다.

스마라그두스는 프랑크,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항했다. 하지만 두 종족이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588년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시스를 탈환하는 소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아퀼레이아 대주교 세베리누스에게 정교회 교리에 따르도록 강요하였고, 세베리누스와 추종자들이 거부하자 심한 탄압을 가했다. 마우리키우스는 그가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켰다며 질책하였고, 589년 그를 경질하고 로마누스를 새 총독에 선임했다.

로마누스는 동방 전선에서 사산 왕조를 상대로 활약한 유능한 장군이었다. 그는 프랑크 왕 힐데베르트 2세에게 전리품을 전부 넘길 테니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했고, 힐데베르트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크군을 파견했다. 프랑크군은 3개 대열로 이탈리아에 진입하여 랑고바르드 왕 아우타리가 파비아에 갇히게 하였다. 한편 그는 동로마군을 이끌고 모데나, 알티나, 만토바를 공략하였고, 파비아로 가서 프랑크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크군은 로마누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아우타리와 10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철수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질이 돌면서 많은 프랑크 병사가 죽어나가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프랑크군이 철수했지만, 로마누스는 개의치 않고 작전을 이어갔다. 그는 랑고바르드 공국인 파르마, 레지오, 피아첸차 등의 복종을 받아내고 공작의 자녀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냈다. 라벤나로 철수한 후 베네치아로 가서 충성 맹세를 받아냈으며, 별동대를 이스트리아로 파견해 여러 마을을 탈환하였다. 또한 프랑크 왕국에 사절을 보내 제멋대로 후퇴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힐데베르트 2세는 응하지 않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591년 아길루프를 새 국왕으로 세운 뒤 반격하기 시작했다. 아길루프는 로마와 라벤나를 연결하는 움브리아 회랑의 여러 도시를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했다. 한편 베네벤토 공국의 랑고바르드군은 나폴리를 포위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그는 섣불리 로마나 나폴리를 구하러 갔다간 라벤나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592년 그레고리오 1세가 아길루프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누스는 협상이 이뤄지게 내버려뒀다간 움브리아 회랑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로 했다. 그는 그해 7월 라벤나에서 출진하여 해로를 따라 로마로 이동한 뒤, 움브리아 회랑의 도시들을 재정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깨지자, 아길루프는 분노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였고, 로마누스는 이번에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청의 재산을 털어서 랑고바르드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고, 아길루프는 이에 만족하여 물러갔다. 그레고리오 1세는 평화를 갈망하여 로마누스에게 랑고바르드 왕국과 휴전을 맺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로마누스는 절대로 협상에 응하지 말라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 간의 사이는 멀어졌다. 로마노스는 596년경 사망했고, 칼리니쿠스가 라벤나 신임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칼리니쿠스는 교황청과 대립했던 전임 총독과는 달리 교황의 요청에 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599년 여름에 이스트리아 북부 지역을 방비하고자 성채를 쌓았으며, 종교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단으로 정죄된 정파들을 관용적으로 대했다. 또한 그레그리오 1세와 살로나 주교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여 둘이 화해하도록 하였다.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휴전 협약이 끝나고 전쟁이 재개되자, 601~602년에 파르마를 공략하고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아길루프는 파도바를 공략하여 학살을 자행하고 몬셀리체 요새를 공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에 오른 포카스는 칼라니쿠스를 해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하고, 과거 라벤나 총독을 역임했던 스마라그두스를 라벤나 총독으로 복귀시켰다. 스마라그두스는 칼리니쿠스가 주도하던 랑고바르드족과의 전쟁을 이어받았고, 랑고바르드 군주 아길루프가 포로로 잡힌 딸과 사위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걸 거부했다. 그러자 아길루프는 603년 크레모나를 포위하였고 605년 8월 21일 크레모나를 함락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9월 1일 마토바를 점령했으며, 불투르나 요새를 포위하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고, 뒤이어 브레셀로를 공략했다. 결국 그는 아길루프에게 사죄하고 605년 4월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석방했다. 이리하여 라벤나 총독부와 랑고바르드 왕국간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한편 그는 포카스 황제의 명에 따라 포로 로마노에 큰 기둥을 세우고 금박을 입힌 포카스 동상을 세웠다.

610년 포카스를 몰아내고 새 황제가 된 이라클리오스는 스마라그두스를 소환하고 요안니스 1세를 새 총독으로 선임했다. 요안니스 1세는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하면서도, 재정이 열악해진 제국의 독촉에 따라 속주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분노한 라벤나 시민들이 615년 폭동을 일으켰고, 요안니스와 휘하 관료들이 살해되었다. 이에 이라클리오스는 환관 엘레우테리우스를 파견해 혼란을 수습하게 한 뒤 라벤나 총독에 임명했다.

엘레우테리우스는 617년 나폴리에서 콘자의 요한이 반란을 일으키자 즉시 출진하여 나폴리를 탈환하고 요한과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얼마 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위협하자, 매년 300두카트를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619년, 엘레우테리우스는 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이탈리아에서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기로 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는 수도를 로마로 삼기로 하고, 620년 로마로 가서 교황 보니파시오 5세를 찾아가 대관식을 거행하는 방식에 관해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로 가던 중 카스트룸 루체올리스 근처에서 이라클리오스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병사들에게 피살당했고, 그의 수급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라클리오스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라벤나 총독은 수년간 공석 상태였다가 625년경 마기스테르 밀리툼 직책을 맡던 이사키오스가 부임했다. 이 무렵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아달랄트 왕이 폐위되고 아리알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아달랄트는 가톨릭 신자였고, 아리알트는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 신도였기에, 교황 호노리오 1세는 그에게 폐위된 아달랄트를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그는 라벤나 시가 전임 총독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건 무리라고 보고, 아리알트의 즉위를 인정했다.

630년경, 아리알트 왕이 투스키아의 타소네 공작이 일으킨 반란에 고전하다가 이사키오스에게 사람을 보내 타소네 공작을 대신 죽여준다면 매년 바쳐야 하는 공물을 300 두카트에서 200 두카트로 줄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사키오스는 이에 동의하여 타소네에게 서신을 보내 동맹을 맺고 싶으니 라벤나로 와달라고 청했다. 타소네는 이에 동의해 라벤나로 갔다가 이사키오스의 병사들에게 습격을 받아 죽었다. 아리알트 왕은 이에 만족하여 공물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638년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정교회단성론을 중재하려는 의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세르기오스가 고안한 단의론호노리오 1세 교황이 수용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사키오스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황청에 사신을 보냈고, 동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호노리오 1세는 단의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638년 10월 호노리오 1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세베리노는 단의론을 거부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세베리노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고, 비서이자 장군인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를 파견해 세베리노를 체포하게 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로마로 가서 민병대를 동원한 뒤, 라테라노 궁전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라벤나 총독 이사키오스도 로마로 가서 라테라노 궁전에서 약탈한 보물을 확보했다. 이후 두 사람은 보물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운송하면서도, 상당한 양을 빼돌렸다. 세베리노는 이런 상황에서도 단의론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고 심신이 지친 이라클리오스는 640년 5월 단의론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철회하고 세베리노를 교황으로 승인했다.

636년 랑고바르드 왕국 새 군주로 즉위한 로타리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정책을 중단하기로 하고 639년 오데르초와 알티노를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두 도시는 정복되었고, 주민들은 베네치아 석호로 도주했다. 이사키오스는 토르첼로의 산타 마리아 마드레 디 디오 성당을 새로 세우고 로타리 왕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알티노 주교를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643년 로마 공국의 공작을 맡던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가 이라클리오스의 사망 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로마 공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이사키오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로마 시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성 마리아 아드 프라세페 성당에 숨었지만, 곧 끌려나와 사슬에 묶인 채 라벤나로 보내져 참수당했다.

로타리 왕은 동로마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틈을 타 라벤나로 진격했고, 643년 스쿨테나 전투에서 동로마군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이사키오스는 이때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타리는 여세를 몰아 라벤나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본국에 돌아갔다. 이후 새 총독에 부임한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는 2년간 직임을 수행하다 645년 플라톤에게 넘겼다. 플라톤은 교황 테오도로 1세단의론을 거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피로스 1세와 후임인 바울로 2세를 연이어 파문하자, 이 소식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알리면서 콘스탄스 2세 황제에게 교황과 결별하도록 종용했다.

648년 초, 콘스탄스 2세이슬람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져 제국의 영토를 잃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칼케돈 공의회파와 단성론, 그리고 단의론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 신민들이 분열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범(Typos)>을 발표하여 일체의 논쟁을 중지하고, 앞으로 예수의 인격, 신격을 운운하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고 밝혔다. 주교나 사제라면 즉각 해임하고, 수도사라면 파문할 것이며, 군인이나 관리라면 지위나 직함을 박탈하며, 원로원 의원이라면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인이라면 매질을 하고 유배를 보내겠다고 했다.

649년 10월, 교황 마르티노 1세는 공의회를 열어 전범을 비난했다. 그는 공의회의 논의 사항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그리스어로 번역에서 보내면서, 콘스탄스 2세에게 단의론을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이에 분노했고, 플라톤에 이어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올림피오스에게 교황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소규모 군대와 함께 로마로 출진했다. 마르티노 1세의 전기를 쓴 아나스타시오스에 따르면, 올림피오스는 애초에 교황을 체포하기보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여러 차례의 시도가 실패한 뒤 교황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교황에게 참회했다고 한다. 이후 이탈리아에 널리퍼진 동로마 제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이용하여 이탈리아를 제국으로부터 분리하고 자신이 황제로 자처하기로 했다. 그는 652년 시칠리아로 진군해 제국군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군대는 와해되었고, 그 역시 같은 해에 병사했다.

653년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가 라벤나 총독으로 복귀한 뒤, 콘스탄스 2세 황제의 지시에 따라 로마로 진격하여 6월 17일 교황 마르티노 1세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다. 이후 에우제니오 1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고 666년까지 라벤나를 평화롭게 다스리다 그레고리오스에게 직임을 넘겼다. 그레고리오스는 콘스탄스 2세의 남이탈리아 원정에 힘을 보탰고, 황제의 뜻에 따라 라벤나 대주교구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도록 지원했다. 668년 콘스탄스 2세가 시칠리아에서 암살되자, 새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와 협력하여 시칠리아의 반란자 미지지오스를 토벌하는 데 기여했다. 677년 그레고리오스가 물러났고, 테오도로스 2세가 새 총독으로 부임했다.

686년, 교황 요한 5세가 사망한 후, 로마 시민들은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문제를 놓고 두 패로 갈렸다. 성직자들은 페트로스를 지지했고, 군부는 테오도로를 지지했다. 성직자들은 대성당을 봉쇄하여 군인들이 못 들어오도록 막았으나 군인들도 다른 성당으로 이동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교황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그러다 양측은 대안으로 고령의 나이라서 오랫동안 교황 직임을 이어가기 어려운 코논을 차기 교황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하였고, 테오도로스 2세 역시 이를 인정하여 686년 10월 21일 교황좌에 착좌하게 하였다.

687년 9월 22일 코논이 11개월만에 사망한 뒤, 수석부제 파스칼과 수석사제 테오도로는 각각 동로마 세력과 로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교황 자리를 경쟁했다. 파스칼은 테오도로스에게 뇌물을 줘서 교황이 되려 하였다. 급기야 로마시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로마 시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시민, 군부, 사제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모여서 논의한 끝에 세르지오 1세를 교황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파스칼은 이에 불복하여 테오도로스에게 많은 뇌물을 약속하고 도움을 청했다. 테오도로스는 즉시 로마로 진군했지만, 로마 시에 들어와보니 여론이 신임 교황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파스칼이 약속했던 뇌물을 세르지오 1세에게 받아내려 했지만, 687년 12월 15일 세르지오가 정식으로 교황에 취임할 때 돌연 사망했다.

뒤이어 새 총독에 선임된 요안니스 2세 플라티노스는 전임 총독이 받아내려 했던 뇌물을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룩한 그릇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자신이 소유한 전부라고 주장했다. 지역 주민들은 교황을 위해 집결했고, 총독이 원하는 대로 100파운드 상당의 금을 줬다. 총독은 이에 만족하여 세르지오 1세를 교황으로 인정했다.

692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퀴니섹스툼 공의회를 마무리한 뒤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 102개의 교회법 조항을 보내며 당장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교황은 퀴니섹스툼 공의회에 대표단을 보낸 적이 없었는데도 강제로 따르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교황은 세속의 성직자에게 결혼을 허용하고[1] 사순절 토요일마다 금식하는 것 등 몇 가지 조항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라벤나 총독 요안니스에게 교황을 당장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요안니스는 심복인 자카리아스(Zacharias)를 로마로 파견하여 교황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라벤나 시와 라벤나 주둔 제국군은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자카리아스가 교황을 잡으러 로마에 들어오자, 오히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로마 시민들과 함께 자카리아스를 감금했다. 자카리아스는 교황의 침대로 피신했다가 세르지오 1세가 직접 중재에 나선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라벤나 총독의 이탈리아에서의 위신은 추락하였다. 702년경 새 총독에 부임한 테오필락토스는 라벤나 군대가 로마 교황에 충성을 맹세하며 반기를 드는 바람에 도시에 입성하지도 못하다가, 교황 요한 6세가 자신을 지지해준 덕분에 겨우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라벤나에 입성할 수 있었다.

709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테오도로스에게 함대를 맡겨 라벤나로 파견해 사사건건 제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압하게 했다. 라벤나에 도착한 테오도로스는 황제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어 모든 고관들을 초청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관들은 아무 의심 없이 약속된 날짜에 연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펠릭스 대주교만이 실명형에 처해진 후 폰투스에 유배되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처형된 뒤에야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테오도로스의 병사들은 라벤나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라벤나 시민들은 당연히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라벤나 총독부는 수년간 마비되었다. 그는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이를 틈타 소라, 아르피노 등을 공략했다.

710년경 새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요안니스 3세 리조코포스는 라벤나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피살당했다. 이후 3년간 공석이었다가 713년 아나스타시오스 2세에 의해 스콜라스티코스가 부임했다. 그는 콘스탄티노 교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황제의 뜻에 따라 로마 교황청과 가급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722년 레온 3세가 아랍과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기로 할 때 교황 그레고리오 2세가 협조를 거부하고 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잡으려 하자, 레온 3세는 무력으로 교황을 압박하기로 하고 그동안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스콜라스티코스를 파울로스로 교체했다. 파울로스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레고리오 2세를 죽이거나 체포하려 했지만 로마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민병대에게 패퇴했다.

726년 레온 3세가 성상 파괴 운동을 밀어붙이자, 727년 라벤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울로스를 살해하고 자체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독립을 주장했다. 레온 3세는 에우티키오스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에우티키오스는 나폴리로 상륙한 뒤 일부 관리들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에 뇌물을 줘서 그레고리오 2세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무효로 하게 유도하였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반항적인 베네벤토 공국스폴레토 공국을 복종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와 손을 잡겠다고 했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로마 침략을 저지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라벤나로 가서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교황과 화해하였고, 730년 또는 731년 투시나에서 반란을 일으킨 티베리오스 페타시오스를 교황의 도움에 힘입어 토벌했다.

732년 랑고바르드 군주 리우프란트는 태도를 바꿔 라벤나를 급습했고, 라벤나는 얼마 안가 함락되었다. 그는 베네치아 석호로 피신한 뒤 당시 총독의 암살로 혼란에 빠져 있던 베네치아를 수습하고 도제를 선출할 수 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5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랑고바르드 국왕 리우프란트에 대항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공작을 지원하여 두 공작이 중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이 혼란에 휩싸인 사이, 그는 739년 베네치아의 도움으로 라벤나를 탈환했다.

743년 스폴레토를 제압하고 직할령으로 삼은 리우프란트가 라벤나로 진군하자, 그는 무력으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라벤나 대주교 요한 5세와 시민 대표들을 교황 자카리아에게 보내 중재를 요청했다. 리우프란트는 교황의 설득에 넘어가 라벤나를 정복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751년, 아이스툴프 왕이 이끄는 랑고바르드군이 라벤나를 공략했고, 그는 사력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은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프랑크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피핀 3세는 군대를 일으켜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옛 라벤나 총독부 지역을 확보한 뒤, 교황청에 기증했다. 이리하여 교황령이 탄생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바리에 총독부를 새로 세워 남이탈리아의 일부 영역을 보전했다.


4. 총독의 권한[편집]


라벤나 총독은 라벤나 궁정에서 통치를 행사했으며, 로마에도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을 별도로 두었다. 총독은 동로마 제국의 귀족 집단에서 선발되었으며, 이탈리아군 주둔 로마군을 지휘하고, 재정과 행정, 외교 등 전반적인 통치를 수행했다. 또한 황제가 이탈리아로 파견한 관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관리를 직접 임명할 권한이 있었으며, 교황 선출을 승인할 권한도 가졌다. 여러모로 이탈리아 내에서는 황제의 대리자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들은 라벤나 총독이 누리는 거대한 권력을 견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벤나 총독의 임기는 딱히 정해지지 않아서, 황제의 의향에 따라 직임을 상실할 수 있었다. 또한 총독은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된 특별 위원의 조사도 받아야 했다. 특히 종교 정책에 관해서는 황제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 총독들은 이러한 통제에 많은 압박을 받았고, 엘레우테리우스올림피오스 총독이 제국과 떨어져 나가려고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다.

라벤나 총독은 이론적으로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7세기 말부터 교황청과 민중의 반항, 군대의 불복종에 시달려야 했다. 교황은 확실하게 지원해주지도 않으면서 간섭을 많이 하는 제국에 불만을 품었고, 민중 역시 베풀어주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또한 현지화된 군대는 황제와 총독보다는 교황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그 결과, 많은 총독이 피살되었고, 라벤나 총독부의 영향력은 라벤나 일대만으로 국한되었다.


5. 역대 총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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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나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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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법 3조에서 성직자의 '재혼'을 금지한다고 기술되었지만 결혼 자체는 금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