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오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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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der Stolze (하인리히 오만공)
가문
벨프 가문
생몰년도
1108년 ~ 1139년 10월 20일 (31세)
출생지
슈바벤 라벤스부르크
사망지
크베들린부르크
재위
기간
바이에른 공작
(1126년 – 1138년)
작센 공작
(1137년 ~ 1139년)
토스카나 후작스폴레토 공작
(1137년 ~ 1139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작센 공작, 바이에른 공작, 토스카나 후작령 18대 후작, 스폴레토 공국 53대 공작. 바이에른 공작으로는 하인리히 10세이고 작센 공작으로는 하인리히 2세이다.


2. 행적[편집]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와 작센 공작 마그누스의 딸 울프힐데의 둘째 아들이다. 1126년 아버지가 바인가르텐 수도원에 은퇴했을 때 형 콘라트는 시토회 수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얼마 후 부모가 사망하면서, 그는 바이에른에 이어 작센의 소유물을 물려받았다. 1127년 로마왕 로타르 3세의 외동딸 게르트루트와 결혼했고, 로타르 3세가 슈바벤 공작이자 여동생 유디트의 남편인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로타르 3세를 지지했다.

1136년 로타르 3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해 시칠리아 왕국으로 진격하여 바리까지 진격하면서 진군로 주변 마을과 토지를 황폐화했다. 이후 신성 로마 황제가 된 로타르 3세에게 공적을 인정받아 1137년 작센 공작과 토스카나 후작,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인 프라이징(Freising) 수도사 오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바다에서 바다로, 덴마크에서 시칠리아까지 이르는 영토를 가졌다"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1137년 12월 로타르 3세가 독일로 돌아가던 중 급사한 뒤, 하인리히는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선제후들은 그가 오만하고 위세가 지나치게 강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3세를 새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하인리히가 콘라트 3세에게 "로타르 3세에게서 받은 황제복을 줄 테니 내가 작센 공국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신하가 두 개의 공국을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불법이라며 거부하자, 그는 이에 분개해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이에 콘라트 3세는 1138년 8월 하인리히를 반역 혐의로 기소하고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를 바이에른 공작에 선임하고 전임 작센 공작 마그누스의 딸인 에일리카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를 작센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알브레히트의 공세를 가볍게 격파한 뒤 바이에른을 빼앗아간 레오폴트 3세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1139년 10월 20일 크베들린부르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게르트루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하인리히 사자공이 13세의 나이로 작센 공작에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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