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시데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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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24대 국왕
Desiderius | 데시데리우스
파일:데시데리우스.jpg
제호
한국어
데시데리우스
라틴어
Desiderius
생몰 년도
미상 ~ 786년
재위 기간
757년 3월 ~ 774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랑고바르드 왕국 24대이자 마지막 국왕.


2. 행적[편집]


브레시아 출신으로, 아이스툴프의 왕실 장교로 근무하다가 토스카나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756년 12월 아이스툴프 왕이 사냥 도중에 낙마한 여파로 사망했다. 당시 아이스툴프에 의해 폐위된 뒤 로마로 망명하여 수도원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던 라치스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파비아로 왕위에 복귀하려 했다. 이에 그는 프랑크 왕국의 군주 피핀 3세의 지원을 받으며 강한 압력을 행사했고, 이에 부담을 느낀 교황청이 물러나면서 라치스는 더 버티지 못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757년 3월 파비아에서 즉위식을 거행해 공식적으로 랑고바르드 왕이 되었다.

757년 4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바오로 1세가 반대자들의 거센 도전으로 곤욕을 치르자, 그는 이 때를 틈타 아이스툴프 왕의 패전으로 흔들리던 왕국의 권위를 되살리려 했다. 758년 펜타폴리스를 통해 스폴레토 공국으로 진군하여 로마 교황과 연계하여 독립을 꾀하던 알보인 공작을 체포해 지지자들과 함께 처형했고, 베네벤토 공작 리우프란트를 몰아낸 뒤 자신의 사위인 아레치스 2세를 새 공작으로 앉혔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에 반항하던 두 공국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이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는 753년 고향인 브레시아에 성 살바토레 수도원을 세우고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게 했으며, 딸 안셀페르가를 수녀원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롬바르디아, 에밀리아, 투스카니 일대의 모든 수도원이 이 성 살바토레 수도원의 관할하에 종속되었다. 758년에는 바디아 레오넨세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수용했다. 또한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힘에 의존해 자신들을 또다시 치도록 유도할 것을 우려해 페라라, 피엔차, 펜타폴리스 등의 소유권을 교황에게 넘기고 로마로 가서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 등 교황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767년 6월 바오로 1세가 선종하자, 차기 교황을 놓고 여러 후보가 각축전을 벌였다. 그는 이에 개입해 친 랑고바르드 성향을 가진 인물을 교황으로 세우려 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을 따르는 귀족들의 대표였던 토토 공작이 동생 콘스탄티노를 교황에 세우려 했다. 이에 로마 교회의 공증인이었던 크리스토포로와 아들 세르지오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세르지오에게 군대를 내주었고, 세르지오는 토토 공작을 살해하고 콘스탄티노를 축출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은 새로운 교황 후보로 수사 필립보를 내세웠으나 크리스토포로는 이를 무효화하고, 다시금 선거를 열어 스테파노 3세를 정통 교황으로 내세웠다. 스테파노 3세는 768년 8월 7일 교황좌에 공식 착좌했다. 이후 알라트리에서 콘스탄티노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내 진압되었다.

768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사망하자, 두 아들 카롤루스와 카를로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왕국이 두 패로 나뉘었다. 스테파노 3세는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잘 먹히지 않자 데시데리우스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딸 데시데르타를 카를로만과 결혼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이 랑고바르드 왕국에 간섭할 여지가 크게 줄어들자,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로마를 장악하기로 마음먹었다.

769년,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순례를 핑계로 군대를 거느리고 교황령에 들어섰다. 산 피에트로 성당 인근 평원에 진영을 세운 그는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포함한 친 랑고바르드 세력을 지원했다. 그 결과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고, 크리스토포로는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3일만에 사망했다. 772년 교황 스테파노 3세가 중병에 걸리자, 아피아르타는 로마 교회의 권력을 장악해 유력한 귀족과 성직자들을 내쫓고, 1월 24일에는 소경이 된 채 라테라노 궁전의 독방에 수감된 세르지오를 교살해 후환을 없앴다.

이 무렵 카를로만이 사망했다. 데시데르타의 요청을 받은 그는 딸이 남편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게 해주려 했다. 이에 분노한 카롤루스는 공세를 개시해 카를로만의 영토를 접수했다. 데시데르타와 두 아들은 카롤루스의 공세를 피해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적대했다. 그는 이 상황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를 조속히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겼다.

772년 2월 1일, 스테파노 3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이 된 하드리아노 1세가 새 교황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프랑크 왕국이 반 랑고바르드 정서로 돌아선 걸 눈치채고 친 랑고바르드파의 수장인 아파아르타를 해임하고 아파아르타에게 축출되었던 인사들을 복귀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교황이 "피핀 왕과 아이스툴프 왕이 맺었던 조약 대로 모든 점령지를 교황청에 넘겨라"라고 요구하면서 결렬되었다. 이에 데시데리우스는 공세에 나서 피엔차, 페라라, 코마키오를 점령하고 라벤나를 위협했다. 그러면서 카를로만의 아들들을 프랑크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로마를 치겠다고 위협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친 랑고바르드파 인사들을 계속 해임했다.

772년 말,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인근의 여러 마을을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그를 파문하고 카롤루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카롤루스는 작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교황의 요청에 응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돌렸다. 773년 봄, 카롤루스는 제네바 인근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두 부대로 나눴다. 한 부대는 카롤루스의 삼촌 베르나르도의 인솔하에 발레다오스타로 진군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이끌고 이끌고 몬체니시오를 가로질러 남하했다. 그는 프랑크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마 포위를 풀고 북상해 수사 계곡 인근의 키우세에서 카롤루스를 막아섰다. 그러나 발레다오스타로 가 있던 아들 아델치스는 베르나르도의 군대에게 참패한 뒤 남이탈리아로 달아났다.

패전 소식을 접한 그는 파비아로 도주한 뒤 수비에 전념했다. 그러나 여러 공작들이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파악하고 프랑크 왕국으로 돌아섰고, 스폴레토, 페르모, 오소모, 안코나는 로마 교황에 복종하기로 했다. 카롤루스는 원정을 이어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카를로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파비아는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774년 초 함락되었고, 데시데리우스와 그의 아내는 프랑크군에 사로잡혔다. 카롤루스는 데시데리우스를 프랑스 북부의 코르비 수도원으로 추방하고 랑고바르드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고 랑고바르드 공작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조건하에 자치를 누릴 수 있게 해줬다. 데시데리우스는 코르비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786년에 사망했다.

아들 아델치스는 남이탈리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의 공작들마저 프랑크 왕국에 복종하기로 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한 뒤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의 영접을 받고 귀족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올 기회를 노렸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반감이 생긴 일부 랑고바르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788년 말 동로마군이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아델치스를 랑고바르드 왕에 복위시키려 했지만, 스폴레토 공작 힐데프란트와 베네벤토 공작 그리말트 3세, 그리고 위니게스 휘하의 프랑크군이 결성한 연합군에게 패퇴했다. 결국 아델치스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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