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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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23대 국왕
Aistulf | 아이스툴프
파일:아이스툴프.jpg
제호
한국어
아이스툴프
라틴어
Aistulf
생몰 년도
미상 ~ 756년 12월
재위 기간
749년 ~ 756년 12월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랑고바르드 왕국 23대 국왕.


2. 행적[편집]


프리올리 공작 페모의 아들이며, 라치스의 형이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라치스가 프리올리 공작에 선임된 뒤 수도 파비아에서 공작 서임식이 거행될 때 아버지를 축출한 리우프란트 왕을 암살하려 했다가 라치스의 제지를 받았다고 한다. 744년 라치스가 왕위에 오른 뒤 프리올리 공작이 되었다. 749년 라치스가 자카리아 교황의 설득을 받아들여 페루자 포위를 풀자, 밀라노에서 라치스의 친 로마 정책에 반감을 품고 있던 귀족들을 소집한 뒤 왕이 교황에게 매수되었으니 더 이상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한 후 동생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탈리아 전체를 자신의 통치하에 두려는 야망을 품고, 이를 위한 군대의 재편과 강화에 전념했다. 모든 자유인은 군 복무 대상이 되었으며, 징병 대상자들의 경제적 자원에 상응하는 의무를 준수해야 했다. 대지주와 부유한 상인들은 흉갑과 말을 착용해야 하고, 보통 지주와 일반 상인들은 말, 방패, 창을 들고 나와야 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나무 방패, 활, 화살을 장비해야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고자 알프스 산맥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물류 흐름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여기에 피핀 3세의 형이며 당시 수도원에서 은퇴 생활을 하던 카를로만과 손을 잡아 피핀을 견제하게 했다.

750년, 라벤나 총독부를 침공한 그는 코마치오와 페레라를 공략했다. 이후 751년 여름 이스트리아를 공략한 뒤 라벤나를 포위 공격했다. 에우티키오스 총독은 사력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고, 라벤나의 총독 궁전은 아이스툴프의 또다른 궁전이 되었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동로마 제국의 양식에 기반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752년,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로마 공국의 각 주민과 영토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는 분견대를 잇따라 파견해 로마를 괴롭혔고 753년 체사노 요새를 함락했다. 다만 로마 시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가톨릭 군주의 입장상 부담이 컸기에 쉽사리 감행하지 않았다. 한편 751년 라치스에게 충성하던 스폴레토 공작 루푸스를 제거하고 스폴레토 공국을 직할령으로 삼았으며, 베네벤토 공국에게도 충성 서약을 다시 한 번 확보했다.

753년 10월 스테파노 2세는 아이스툴프에게 사절을 보내 빼앗아간 요새를 돌려준다면 보상금을 바치겠다고 제안했지만, 아이스툴프는 무조건 복종하라며 거부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스테파노 2세는 754년 1월 6일 프랑크 왕국으로 찾아가서 피핀 3세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일전에 교황이 메로빙거 왕조를 밀어내고 자신이 프랑크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적이 있는 데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가신이 되는 걸 막고 싶었기에, 피핀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로 했다. 4월 14일, 피핀은 프랑크 귀족들을 소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전쟁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카를로만은 지난해에 사망했기에, 프랑크 왕국 내에서 피핀을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755년 봄, 피핀 3세는 알프스 산맥으로 진입해 수사 계곡 요새에서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아이스툴프는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프랑크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어진 평화 협상 끝에, 755년 6월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이스툴프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인질을 넘기며, 자신이 빼앗았던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피핀 3세가 철수한 후, 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756년 1월부터 3월까지 로마 공방전을 전개했다. 알프스 산맥을 겨울에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프랑크군이 산맥을 넘지 못하는 사이에 로마 시를 함락시켜서 모든 걸 끝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지하며 끝까지 저항한 수비대와 시민들 때문에 함락되지 않았고, 아이스툴프는 4월 초 포위를 풀고 파비아로 돌아갔다. 한편 피핀 3세는 아이스툴프가 약속을 어겼다는 소식을 듣고 4월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아이스툴프를 또다시 격파하고 파비아에서 포위 공격했다. 아이스툴프는 결국 756년 6월 항복하고 훨씬 가혹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번에는 일전에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이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로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인질을 프랑크 왕국에 보내야 했으며, 상당한 배상금을 프랑크 왕국에 지불해야 했다. 이리하여 교황청이 피핀 3세로부터 라벤나 총독부 등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기증받으면서 교황령이 탄생했다.

756년 12월, 아이스툴프는 사냥 도중 낙마한 여파로 사망하고 파비아의 성 마리아 교회에 안장되었다. 당시 로마에서 수도자로 지내던 라치스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비아로 달려가서 왕이 되려 했다. 그러나 투스키나 공작 데시데리우스가 피핀 3세의 지원에 힘입어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데시데리우스가 새 왕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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