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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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79년

발 카모니카의 암각화
Incisioni rupestri della Val Camonica

1980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코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Chiesa e convento domenicano di
Santa Maria delle Grazie con
l'Ultima Cena di Leonardo da Vinci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Centro storico di Roma, le proprietà extraterritoriali della
Santa Sede e la 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1982년

피렌체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Firenze

1987년

베네치아와 석호
Venezia e la sua laguna

1987년

피사의 두오모 광장
Piazza del Duomo di Pisa

1990년

산지미냐노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an Gimignano

1993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
I Sassi e il parco delle
chiese rupestri di Matera


1994년

베네토의 비첸차 시와 팔라디오 양식 건축물
Città di Vicenza e le ville palladiane del Veneto

1995년

시에나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iena

1995년

나폴리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Napoli

1995년

크레스피 다다
Crespi d'Adda

1995년

르네상스 도시 페라라와 포 삼각주
Ferrara, città del Rinascimento,
e il suo delta del Po


1996년

몬테 성
Castel del Monte

1996년

알베로벨로의 트룰리
Trulli di Alberobello

1996년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기념물
Monumenti paleocristiani di Ravenna

1996년

피엔차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Pienza

1997년

카세르타의 18세기 궁전과 공원,
반비텔리 수도교, 산 레우초
Palazzo Reale del XVIII secolo di Caserta con il Parco ,
l' Acquedotto di Vanvitelli e il Complesso di San Leucio


1997년

사보이아 궁중저택
Residenze della Casa Reale di Savoia

1997년

파도바 식물원
Orto botanico di Padova

1997년

포르토베네레, 친퀘테레와 섬들
(팔마리아 섬, 티노 섬, 티네토 섬)
Portovenere, le Cinque Terre e le isole
(Palmaria, Tino e Tinetto)


1997년

모데나의 대성당,
토레치비카, 피아차 그란데

Cattedrale, Torre Civica e
Piazza Grande di Modena


1997년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그리고
토레 아눈치아타 고고 지구

Aree archeologiche di Pompei,
Ercolano e Torre Annunziata


1997년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
Costiera amalfitana

1997년

아그리젠토 고고 지구
Area archeologica di Agrigento

1997년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
Villa romana del Casale

1997년

수 누락시 디 바루미니
Su Nuraxi di Barumini

1998년

아퀼레이아의 고고 지구와 가톨릭 성당
Area archeologica e
Basilica patriarcale di Aquileia


1998년

우르비노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Urbino

1998년

칠렌토 ・ 발로 디 디아노 국립공원,
파에스툼과 벨리아 고고 유적지
Parco nazionale del Cilento e Vallo di Diano con i siti
Archeologici di Paestum e Velia e la certosa di Padula


1999년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
Villa Adriana, Tivoli

2000년

베로나 시
Città di Verona

2000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유적

Assisi, la basilica di San Francesco e
Altri siti Francescani


2001년

빌라 데스테, 티볼리
Villa d'Este, Tivoli

2002년

시칠리아 남동부 발디노토의
후기 바로크 도시
Città tardo barocche del
Val di Noto (Sud est Sicilia)


2003년

피에몬테롬바르디아의 사크리 몬티
Sacri Monti del Piemonte e della Lombardia

2004년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의
에트루리아인 네크로폴리스
Necropoli etrusche di Cerveteri e Tarquinia

2004년

발 도르차
Val d'Orcia

2005년

시라쿠사와 판틸리카 바위 네크로폴리스
Siracusa e la necropoli di Pantalica

2006년

제노바
: 르 스트라다 누오보와 팔라치 데이 롤리

Genova: Le Strade Nuove ed il
Complesso dei Palazzi dei Rolli


2008년

알불라 ・ 베르니나 지역의 래티셰 철로
Ferrovia Retica nei paesaggi
dell'Albula e del Bernina


2008년

만토바와 사비오네타
Mantova e Sabbioneta

2011년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
: 권력의 장소 (568년 ~ 774년)
Longobardi in Italia
: I luoghi del potere (DLXVIII al DCCLXXIV d.C.)


2011년

알프스 주변의 선사 시대 호상 가옥
Siti palafitticoli preistorici attorno alle Alpi

2013년

토스카나의 빌라 메디치와 정원
Ville e giardini medicei in Toscana

2014년

피에몬테의 포도밭 경관
: 란게 - 로에로와 몬페라토
Paesaggio vitivinicolo del Piemonte
: Langhe-Roero e Monferrato


2015년

아랍 - 노르만 팔레르모 그리고
체팔루 대성당과 몬레알레 대성당

Palermo arabo-normanna e le
Cattedrali di Cefalù e Monreale


2017년

16~17세기 베네치아의 방어 시설
: 스타토 다 테라 - 스타토 다 마르 서부
Opere di difesa veneziane tra XVI e XVII secolo
: Stato da Terra-Stato da Mar occidentale


2018년

이브레아
: 20세기 산업도시
Ivrea, città industriale del XX secolo

2019년

프로세코 디 코넬리아노와
발도비아데네 구릉지
Colline del Prosecco
di Conegliano e Valdobbiadene


2021년

파도바의 14세기 프레스코화
Cicli di affreschi del XIV secolo di Padova

2021년

유럽의 거대 온천 도시들
Grandi città termali d'Europa

2021년

볼로냐의 포르티코
Portici di Bologna

자연유산

2000년

에올리에 제도
Isole Eolie

2003년

몬테 산 조르조 산
Monte San Giorgio

2017년

카르파티아 및 유럽의 기타 지역에
생육하는 고대 및 원시 너도밤나무 숲
Antiche faggete primordiali dei
Carpazi e di altre regioni d’Europa


2009년

돌로미티 산맥
Dolomiti

2013년

에트나 산
Monte Etna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글
[1]
영어
[2]
프랑스어
[3]
국가·위치
이탈리아 시라쿠사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5년
등재기준
(ii)[4], (iii)[5], (iv)[6], (vi)[7]
지정번호
1200

1. 개요
2. 역사
2.1. 고대 그리스 도시
2.1.2. 참주의 몰락과 1차 민주정
2.1.4. 정국의 혼란
2.1.6. 제2차 민주정과 아가토클레스
2.1.7. 시라쿠사의 위기와 피로스 1세
2.1.9. 시라쿠사 국의 멸망
2.2. 로마 시대
2.3. 중세
2.4. 근대
2.5. 현대
3. 역대 참주
4. 여담



1. 개요[편집]


파일:시라쿠사 전경.jpg

Siracusa (이탈리아어)
Sarausa (시칠리아어)
Syracuse (영어, 시러큐스)
Συράκουσαι (고대 그리스어로 쉬라쿠사이, 코이네 그리스어로 쉬라쿠세)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유서 깊은 도시. 인구는 2017년 기준 약 13만 명이다.

2. 역사[편집]


파일:시라쿠사 유적.jpg
내륙부의 고대 그리스 극장 유적

2.1. 고대 그리스 도시[편집]


기원전 734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 중 하나인 코린토스 출신의 그리스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전설에 따르면, 정착민들의 지도자는 바키아데스 가문에 속한 아르키아스였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시라쿠사 앞바다의 오르티가 섬을 장악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여 원주민들의 공격에 맞섰다. 그러다가 섬에 거주하는 인구가 갈수록 늘어나서 포화 상태가 되자, 반대편 해안으로 진출했고 나중에는 시칠리아 동부 일대를 장악하여 아크리(기원전 664년), 카스메네(기원전 643년), 헬로로스(기원전 7세기), 카마리나(기원전 598년) 등 여러 식민도시를 잇따라 건설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시칠리아 서부 일대를 장악한 고대 카르타고와 마주쳤고,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싼 두 세력의 대립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2.1.1. 겔론 1세 시대[편집]


파일:시라쿠사 아폴론.jpg
겔론 1세의 치세에 조성된 아폴론 신전. 오르티기아 섬의 몇 안되는 현존 유적지 중 하나이다

초기에는 아르키아스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모로스(gamoros) 귀족들이 과두정부를 세우고 국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귀족과 평민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이로 인해 정국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지다가 기원전 485년 민중혁명이 발발하면서 가모로스 귀족들이 추방당했다. 귀족들은 당시 겔라의 참주였던 겔론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겔론은 기원전 484년 겔라군을 이끌고 시라쿠사로 진군해 별다른 저항없이 입성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시라쿠사가 거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하고, 동생인 히에로 1세를 겔라의 참주로 임명한 후 이전에 공략했던 카마리나 시의 모든 주민을 시라쿠사로 데려와 시민으로 삼았다.

겔론 1세가 참주로 군림한 이래, 시라쿠사는 특별한 경제적, 군사적 힘을 얻었다. 토목공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는데, 특히 본토에 있는 아흐라디나 요새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성벽을 건설하여 시라쿠사를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또한 토착 시칠리아 부족에서 끌어온 강력한 용병부대가 창설되었고, 그리스에서 온 1만 명 남짓한 병력이 별도로 편성되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겔론 1세는 그리스 병사 1만 명 전원에게 시라쿠사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481년,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로부터 크세르크세스 1세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군에 맞서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겔론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일 때 그리스인들이 돕지 않아서 시칠리아 전역의 그리스인들이 야만인들의 노예가 될 뻔했다며 질책했다. 그러면서 병사 2만 8천 명과 배 200척, 그리고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군용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리스 연합군의 육군이나 함대를 직접 지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스파르타아테네가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그리스 본토에 원군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이후 델포이에 사신을 보내 사태의 추이를 살피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약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기면 돈, 흙, 그리고 물을 주고 그리스가 이긴다면 돈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했다. 그리스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자, 사절은 돈을 가지고 시라쿠사에 복귀했다.

기원전 480년, 하밀카르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 30만 명[8]이 시칠리아 북쪽의 파노르모스(현재 팔레르모)에 상륙하여 히메라를 향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도시에 접근한 하밀카르는 육군과 해군 진영을 별도로 설치하고 히메라인들의 탈출을 막았다. 장인인 테론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겔론은 보병 5만 명과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히메라로 진격했다. 그러던 중 시라쿠사 장병들이 하밀카르에게 서신을 전하러 가던 셀리눈도스의 전령을 붙잡자, 겔론 1세는 자신의 기병들에게 셀리눈도스의 전령인 양 속여 카르타고 진영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약속한 날에 겔론의 시라쿠사 기마병들이 카르타고 진영의 경비병들을 속이고 진영 안에 들어와 제물을 바치고 있던 하밀카르를 죽이고 배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신호가 올라오자 겔론은 본대를 이끌고 적진을 공격했다. 양군은 곧 격전을 벌였는데, 함선에서 화염이 치솟고 하밀카르가 죽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카르타고인들은 달아났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15만 명에 달했고 포로는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디오도로스는 히메라 전투테르모필레 전투와 같은 날에 벌어졌다고 기술했지만, 헤로도토스살라미스 해전과 일치한다고 기록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나중에 이 참패 소식을 들은 후 전쟁 배상금 2천 달란트를 겔론에게 지불하고, 조약의 내용을 보관한 사원 두 곳을 짓는 조건으로 평화를 맺자며 호소했고, 겔론은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겔론은 시라쿠사와 히메라의 사원을 장식하기 위해 전리품 중 가장 값진 것을 보냈고, 전투에서 활약한 이들에게 보상을 제공했으며 나머지 전리품과 많은 포로를 동맹국에 분배했다. 히메라 전투 직후, 라이벌 시칠리아 도시국가들의 사절단이 화해를 요청하기 위해 겔론을 찾아왔고, 그는 모든 사람을 관대하게 대우했다. 이후 페르시아에 대항할 원정을 준비했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승리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중단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시라쿠사로 돌아온 뒤 시민들에게 무장을 갖춘 채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다. 그는 비무장인 상태로 회의에 참석한 뒤 자신의 행동에서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지금 즉시 자신을 죽이고 시라쿠사를 장악하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카르타고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한 영웅이라고 떠받들며 그를 계속 모시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겔론 1세는 시라쿠사에서 2년 더 통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2.1.2. 참주의 몰락과 1차 민주정[편집]


기원전 478년 겔론 1세가 사망한 뒤, 동생인 히에로 1세가 시라쿠사의 새 참주로 선임되었다. 또다른 형제이자 겔라의 총독 폴리젤로스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카긴타의 통치자이자 겔론의 장인인 티론에게 망명했다. 양자는 전쟁을 벌이는 듯했지만, 기원전 477년 시인(詩人) 시모니데스가 중재하여 화해했다. 같은 해 시라쿠사는 레지아의 참주 아낙실라스의 공격을 받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에피제피리아 참주 로크로스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기원전 476년 낙소스 섬과 카타니아의 주민들을 레온티노스로 옮기고 카타니아를 에트나로 개명했으며, 시라쿠사인 5천 명과 펠로폰네소스인 용병 5천 명을 그곳에 정착시켰다. 이후 히에로 1세는 에트나와 도리스 제도를 아들 데이노메네스에게 맡겼다. 기원전 474년 에트루리아인들을 해전에서 격파해 키미 주민들을 구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에트루리아군의 투구를 올림피아 신전에 헌정했다. 이후 티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트라시디오스를 격파하고 아카긴타의 참주에서 폐위했다.

시라쿠사는 히에로 1세의 통치기간 동안 큰 번영을 누렸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많은 금화와 은화가 발행되었으며, 시모니데스, 크세노파네스, 에피카르무스, 아이스퀼로스, 핀다로스, 바킬리데스 등 당대 최고의 시인, 음악가, 예술가들이 초빙받아 히에로 1세의 궁정에 머물렀다. 그러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를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하며, 온화하고 순수했던 형 겔론 1세와 대조했다. 그에 따르면, 히에로 1세는 간첩 조직을 결성하여 정적들의 약점을 찾아내어 숙청했다고 한다. 기원전 467년 히에로 1세가 사망한 뒤 집권한 트라시볼로스는 히에로 1세보다 잔인하여 많은 시민을 불법적으로 살해하거나 거짓 혐의로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한 폭군이었다. 기원전 465년, 시민들은 폭정에 분노해 반란을 일으켜 트라시볼로스를 축출하고 민주정을 도입했다.

기원전 458년에서 452년 사이, 시칠리아의 원주민들은 섬 내부에 강력한 국가를 새우고 모르간티니 등 일부 그리스와 카르타고인 도시국가들을 장악했다. 시라쿠사의 제1민주정은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끝에 시칠리아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그들을 간접 지배했으며, 엘바 섬과 코르시카 섬 등 여러 섬에도 원정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기원전 445년 아카간타를 공략하면서 시칠리아 섬의 절반 이상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라쿠사의 패권에 위협을 느낀 많은 시칠리아 도시들은 아테네와 손을 잡았다. 아테네 역시 스파르타의 동맹인 코린토스와 관계가 깊은 시라쿠사가 스파르타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칠 수 있다고 여겼거니와 시칠리아의 풍요로운 자원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시라쿠사를 장차 도모하려고 했다.

기원전 427년, 아테네는 시칠리아로 함선 20척을 보내 시라쿠사에 맞서는 레기온과 레온티노스 등 동맹도시들을 지원했고 기원전 425년에 증원군 40척을 파견했지만, 기원전 424년 아테네와 손을 잡았던 시칠리아의 동맹도시들이 시라쿠사에 복종을 서약하면서 무위에 그쳤다.{제1차 시라쿠사(시켈리아) 원정, 기원전 427~424} 아테네는 이후에도 시라쿠사와 다른 도시국가들의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시라쿠사를 견제했다. 그러던 기원전 416년, 세게스타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모든 전쟁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하자, 아테네는 이에 혹해 전함 134척, 중장보병 5천 명 이상, 함대 운용인력 2만 명 이상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했다(제2차 시라쿠사 원정, 기원전 415~414). 아테네군은 초반에는 시라쿠사군을 압도하여 시라쿠사를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시라쿠사의 구원 요청을 받은 스파르타군이 견제하면서 차츰 장기전으로 흘러가다가 보급이 끊기면서 지리멸렬해졌다. 결국 시라쿠사-스파르타 연합군의 협공에 궤멸되어 원정군 지휘관들은 전원 처형되었고, 아테네 사람 7천 명이 생포된 뒤 채석장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을 해야 했다.

아테네군이 궤멸되면서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세게스타는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다. 기원전 409년, 카르타고는 히메라 전투 때 전사한 하밀카르의 손자인 한니발 마고 휘하의 대군을 파견했다. 한니발 마고는 셀리눈다, 히메라, 아크라간타, 겔라, 카마리나를 함락시키고 히메라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려고 그리스인 3천 명을 집단 처형했다. 이후 시라쿠사와 한니발 마고 간의 전쟁이 수년간 이어졌는데, 전세는 갈수록 시라쿠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기원전 406년 12월 카르타고군이 시라쿠사군을 격파하고 아르라가스(오늘날 아그리젠토)를 공략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시라쿠사인들은 기원전 405년 대 디오니시오스를 무제한의 권한을 가진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strategós autokrátor: 단독 지휘관)로 선출했다. 비상시에만 시행되는 임시 관직이었지만,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절대권력을 손에 넣기로 작심했다.

2.1.3. 대 디오니시오스[편집]


파일:디오니시오스의 귀.jpg
파일:디니시오스 귀.jpg
'디오니시오스의 귀'로 불리는 고대 저수조. 본래 상단의 작은 수로였으나 수세기간 인공 동굴로 확장했다. 디오니시오스는 이를 감옥으로 활용했고, 동굴의 메아리를 통해 죄수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었다고 한다.

기원전 405년 여름, 대 디오니시오스는 쿠데타를 단행하고 제1차 민주정의 헌법을 사실상 전복한 후 참주에 올랐다. 이후 어느 젊은이를 매수해 자신을 암살하려는 척하게 한 뒤, 이를 빌미로 민회로부터 경호원 600명을 거느림을 허락받았다. 얼마 후엔 그 숫자가 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오직 대 디오니시오스에게만 충성을 바쳤고, 민회와 완전히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제공했다. 그러면서도 귀족 여인 2명과 동시에 결혼할 정도로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뒤, 대 디오니시오스는 카르타고의 공세에 위협을 받고 있는 겔라로 이동했다. 당시 겔라는 민주파와 과두파 사이에 갈등이 첨예했는데, 대 디오니시오스는 민주파의 승리를 도왔다. 부유한 상류층에 대한 재판과 처형을 주선했으며, 그들로부터 압류한 재산을 활용하여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불했다. 그로써 겔라의 빈민과 군대 모두에게 인기를 얻었다.

기원전 405년 7월, 카르타고 장군 히밀코가 겔라를 포위했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3개 분견대를 편성해 적의 정면과 양 측면을 동시에 타격하는 작전을 구사했지만, 각 분견대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움직이다가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후 겔라 시민들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면서 카마니아인들에게도 대피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남부 해안 전체가 카르타고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카르타고인들은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고 대 디오니시오스는 즉시 승낙했다. 그는 시라쿠사의 참주로 인정받았지만, 그가 자신의 제국에 통합하기를 원했던 그리스 및 비 그리스 도시 일부는 카르타고인들의 속국이 되었고, 성벽을 부숴야 했으며, 나머지는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 협약은 카르타고나 시라쿠사 영토와 국경을 접하지 않은 메사나(지금의 메시나) 같은 도시를 포함하여 시칠리아 섬 전체에 적용되었다. 이 협약은 힘의 균형에 대한 전반적인 규정으로서,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그리스인 간 협약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대 디오니시오스는 영토 확장을 불가능하게 만든 이 협약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404년 협약을 파기하고 헤르베소스를 공격했으나, 병사들이 도중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충성을 유지한 용병들과 함께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시민들의 소요를 막기 위해 시라쿠사로 서둘러 향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한 발 앞서 시라쿠사 내 참주 반대파와 손을 잡고, 메사나와 레기온의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라쿠사를 지킬 수 없었던 대 디오니시오스는 오르티가 섬으로 후퇴해 요새를 세웠다. 이 섬은 둑길로 시라쿠사 시와 연결되었으며, 외해로부터 항구를 봉쇄했다.

시라쿠사인들은 몇 달 동안 오르티가 섬의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굳건히 버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라쿠사군이 "항복하면 시민권을 주겠다." 하는 회유에 많은 용병들이 넘어가 배신하자 입지가 크게 약해졌다. 그는 일단 시라쿠사인들과 항복 협상을 진행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전에 카르타고 편에서 싸웠던 시칠리아 서부 출신 용병들을 모집했다. 여기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리스의 지배 세력이 된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았다. 병력을 성공적으로 규합한 뒤, 방심하고 있었던 시라쿠사를 기습 공격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보복하는 대신 관용을 베풀었다. 이때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어떠한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각 위기에서 벗어난 후, 대 디오니시오스는 403년에 팽창 정책을 재개했다. 중앙 및 북동 시칠리아 지역의 자치 도시들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그들의 영토를 황폐화시켰고, 정복한 도시의 시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또한 시라쿠사에 새로운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기로 하고, 도시의 북서쪽에 있는 에피폴라이 고원을 성벽으로 둘러싼 후, 시라쿠사의 고리 성벽에 포함시켰으며, 고원 위에 에우랄로스 요새를 건설했다. 한편 선박 200척 이상을 건조했는데, 그 중 일부는 신형 공성 무기를 장착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실직한 그리스 장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렇게 군비 증강이 완료된 뒤, 대 디오니시오스는 민회를 소집했고 카르타고의 지배로부터 모든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자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르타고와 전쟁을 재개하자고 제안해 승인을 받아냈다.

기원전 398년 봄 카르타고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 그는 8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전역을 휩쓸며 시칠리아의 극서쪽으로 진군했다. 이후 카르타고 함대의 기습 공격을 격퇴해가며 모티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그해 겨울에 함락시켰다. 기원전 397년 봄, 히밀코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와 육군이 파노르모스(현재 팔레르모)에 상륙한 뒤 모티아를 비롯한 여러 마을을 재빨리 탈환했다. 이에 대 디오니시오스는 시칠리아 서부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후퇴했다. 히밀코는 시칠리아 서부를 회복한 뒤 시칠리아 북쪽 해안을 따라 진군하여 이탈리아 남부에서 원군이 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고 메사나를 정복했다. 이에 수많은 시라쿠사 동맹도시들이 카르타고 편을 들었다. 게다가 카타니아 해전에서 카르타고 함대가 시라쿠사 함대를 상대로 100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전세가 악화되자 대 디오니시오스는 시라쿠사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카르타고군은 시라쿠사에 도착한 뒤 기원전 396년 여름까지 공성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많은 병사가 사망했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새로운 용병을 모집하고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은 대 디오니시오스는 기습 공격을 감행해 카르타고 육군을 격파했다. 이와 동시에, 시라쿠사 함대는 카르타고 함대를 시라쿠사 앞바다에서 쳐부쉈다. 히밀코는 잔여 함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달아났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적이 패전의 여파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재공격을 가해 상당한 영토를 회복했다. 카르타고는 이에 맞서 기원전 392년 다시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양측은 거듭된 전쟁에 지쳤고, 결국 평화협상을 맺기로 했다. 기원전 392년에 체결된 평화협약은 두 나라가 시칠리아 섬을 분할하는 걸 다시 합의했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기원전 405년에 맺은 협약에 비해 대 디오니시오스에게 훨씬 유리했다. 그는 이 협약에 따라 카르타고에 속하지 않은 도시국가들을 카르타고의 동의 없이도 공격할 수 있었다.

기원전 390년 가을, 대 디오니시오스는 메시나 해협을 장악하기 위해 레기온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도시국가{마그나 그라이키아(대 그리스)}들이 상호방위협약을 맺어뒀기 때문에, 그의 공세는 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작전을 변경해 이탈리아 중부의 루카니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기원전 388년 엘레포로스(오늘날 스틸라로) 강 어귀 북쪽의 카울로니아 시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이탈리아 남부의 다른 도시국가들이 원군을 보냈지만, 엘레포로스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카울로니아를 함락한 대 디오니시오스는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시라쿠사로 이송시켰으며, 뒤이어 스카일레티온(오늘 스퀼레이스)를 정복했다. 하지만 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대신 몸값을 받지 않고 포로 1만 명을 석방하는 등 온건 정책을 구사해 그들의 마음을 사고자 했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정복한 도시인 카울로니아와 스카일레티온 및 히포니온을 동맹국인 로크리인에게 넘겼다. 로크리는 공식적으로는 자치권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통제를 받았다. 이탈리아 남부의 다른 도시 국가들은 시라쿠사와 전쟁을 벌이길 꺼려 평화협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남부 도시국가들이 시칠리아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한 뒤, 기원전 387년 레기온을 공격하여 11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기원전 386년 함락시킨 뒤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레기온 공성전). 거금을 지불하여 자유의 몸이 된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레기온 시민들이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이리하여 대 디오니시오스는 칼라브리아 남쪽부터 스퀼라체 만과 에우페미아 만까지 시라쿠사의 영향권으로 삼는 데 성공했으며,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 사이의 해협을 성공적으로 통제했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이와 더불어 동쪽의 아드리아 해로 진출하여 오트란토 해협을 통해 그리스 서부 에페이로스로 가는 항로를 통재하고 아드리아 해 연안에 항구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동맹을 맺고 있었던 스파르타가 반발할 것을 예상해 북서 그리스로의 추가 공세는 벌이지 않았다. 기원전 384/383년, 대 디오니시오스는 이탈리아 서부 해안을 따라 진군하여 에트루리아를 상대로 공세를 벌였다. 그의 군대는 에트루리아의 카에리 시의 항구인 피르기를 공략하고 상당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여기에 별개 함대를 코르시카 섬으로 파견해 역시 상당한 전리품과 노예를 획득했다.

이렇듯 세력을 확장하던 대 디오니시오스는 카르타고의 영향권 내에 있었던 시칠리아 서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은밀히 동맹을 맺고 카르타고를 축출할 기회를 노렸다. 이 사실을 간파한 카르타고는 기원전 382년 전쟁을 선포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반 시라쿠사 세력과 동맹을 맺은 뒤 처음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대 디오니시오스는 이탈리아 본토의 카르타고군 기지인 크로톤 시를 공략하고, 시칠리아 섬의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카발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카발라 전투).

이후 카르타고인들에게 시칠리아 섬에서 완전히 철수하라고 요구했으나, 카르타고인들은 단호히 거부하고 다시 반격을 가했다. 기원전 374년 크로니온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시라쿠사군의 기세가 꺾여버리자, 대 디오니시오스는 어쩔 수 없이 평화협약을 맺기로 했다. 양측은 할리코스 강을 경계로 삼아 시칠리아 섬을 양분하기로 했다. 기원전 368년, 대 디오니시오스는 대형 화재가 나서 카르타고 함대 전체가 파괴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전해듣자 평화를 깨고 카르타고를 다시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처음에는 시칠리아 섬의 서쪽 끝까지 이르렀지만, 카르타고 함대의 성공적인 반격으로 인해 보급이 끊기자 시라쿠사 본국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양측은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렇듯 대 디오니시오스는 숙적인 카르타고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한편,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구 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으며, 시민의 대표자로서 민회를 계속 열고 중요한 결정에 대해 그들의 승인을 얻는 관행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민회는 최고위직을 선출할 권한을 상실하고 법안을 스스로 발의할 수 없었다. 또한 대 디오니시오스는 정적들을 추방하고 자신의 고위급 장교들과 부하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세웠다. 이 신귀족들은 참주의 가족과 인척들을 중심으로 뭉쳤으며, 시라쿠사의 정치, 외교 및 군사적 임무를 위임받았다. 한편, 대 디오니시오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모델로 삼아 왕실 예복을 입고 궁정을 화려하게 치장해, 자신이 사실상 시칠리아 섬의 임금임을 모두에게 과시했다. 그리고 당대의 명사들을 초빙하여 시, 연극, 조각상 등 예술 활동을 마음껏 벌이도록 했다.


2.1.4. 정국의 혼란[편집]


절대 권력을 구가하던 대 디오니시오스가 기원전 367년에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소 디오니시오스가 새 참주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부터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무 경험이 없어 인척인 디온에게 실권을 맡겼다. 디온은 플라톤과 친분을 맺었고, 그의 국가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기원전 366년 시칠리아를 방문한 플라톤은 디온의 환영을 받으며 시라쿠사 궁정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디온과 플라톤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필리스토스였다. 이 인물은 과거 대 디오니시오스에게 밉보여 시라쿠사에서 쫓겨났다가 소 디오니시오스의 집권 이후 복귀한 인사로, 소 디오니시오스를 디온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전쟁 중이었다. 디온은 카르타고에 서신을 보내 평화협상을 중재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디온의 반대 세력에게 발각되어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넘겨겼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필리스토스의 조언에 따라 디온을 반역죄로 고발하고 시라쿠사에서 추방했으며, 디온은 그리스로 망명했다. 플라톤은 이후에도 훌륭한 철학자로서 시라쿠사에서 존중받았지만,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가능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기원전 365년 시라쿠사를 떠났다. 한편 소 디오니시오스는 카르타고와 평화협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었다.

기원전 361년, 소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을 다시 초빙했다. 플라톤은 친구인 디온이 용서받는 것을 돕고 싶었던 반면, 소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 싶어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의 설득을 받아들여 디온을 시라쿠사로 복귀시켰지만, 그가 플라톤의 제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지자 자신을 실각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해 디온의 소유물을 몰수했다. 플라톤은 기원전 360년경 궁정의 의심을 사자 시라쿠사를 떠났다. 디온은 이대로 가면 참주인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처형당할 게 자명하다고 여기고 반기를 들기로 결심한 후, 그리스로 가서 용병을 고용했다.

기원전 357년, 소 디오니시오스는 디온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로 항해해 디온을 요격할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디온은 예상과는 달리 배 5척과 용청 800명 남짓을 데리고 카르타고의 땅이던 시칠리아 서쪽에 상륙했고 카르타고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디온의 군대가 시라쿠사에 도착하자, 소 디오니시오스의 무능한 통치에 질려 있었던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디온은 시라쿠사를 손쉽게 장악했다. 오직 참주정 권력의 중심이던 오르티가 섬의 요새만이 소 디오니시오스 휘하 용병들의 수중에 남았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오르티가 섬으로 이동한 뒤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에 여러 전투가 벌어진 끝에, 필리스토스가 이끄는 함대가 시라쿠사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배하고 필리스토스가 전사하면서 소 디오니시오스의 지지 기반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이에 그는 배 몇 척과 함께 오르티가 섬을 탈출했다. 이리하여 디온이 시라쿠사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가 시민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고 새로운 독재정을 세우려 한다는 의혹이 도시 곳곳에 퍼졌다. 또한 디온은 오랫동안 디오니소스 가문의 핵심인물로 활동했기 때문에, 민주파 인사들은 그를 강하게 의심했다. 이에 디온이 소 디오니시오스의 탈출을 용인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대 디오니시오스의 무덤 파괴를 허용하지 않았던 일 역시 의심거리가 되었다. 반 디온 세력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디온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함대 사령관 헤라클레이데스를 찾아갔다. 헤라클레이데스는 디온의 지휘하에 있었으나, 반 디온파의 설득을 받아들여 디온의 정적으로 부상했다.

기원전 356년 여름, 민회는 헤라클레이데스의 반 디온 당파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토지가 시라쿠사 시민들에게 재분배되었고, 디온의 용병들에 대한 급료 지불이 중단되었다. 또한 새로운 지휘관이 선출되었는데, 여기서 디온이 빠지고 헤라클레이데스가 포함되었다. 이에 디온은 휘하 용병들과 함께 시라쿠사 시 영내에 속한 레온티노이로 이동했다. 레온티노이 시민들은 시라쿠사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그들을 후원하여 독립을 이루기로 하고,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얼마 후, 오르티가 섬의 수비대 장군 닙시오스에게 기습공격을 받아 시라쿠사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헤라클레이데스의 위세가 꺾인 틈을 타, 디온은 대 디오니시오스의 관할하에 있었던 시칠리아 섬의 도시국가들로부터 후원을 받은 뒤 시라쿠사로 진격했다.

반 디온 세력은 성문을 걸어잠그고 항전했지만 닙시오스가 또다시 습격을 감행해 시라쿠사 시에 불을 지르고 시민들을 살해하는 걸 막지 못하는 바람에 지지를 잃어버렸다. 시민들은 이제 디온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는 용병대와 함께 도시에 입성한 뒤 많은 구역을 점령하고 황폐화시킨 닙시오스를 격파하여 오르티가 섬으로 도로 철수하도록 했다. 그 후 디온은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었고, 헤라클레이데스는 함대 지휘권을 맡았다. 그러나 디온이 이전 소유자들에게 토지를 도로 되돌려주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기원전 355년, 오르티가 섬의 수비대는 디온과 헤라클레이데스의 연이은 공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로크리로 이동해 전 참주인 소 디오니시오스의 휘하에 들어갔고, 오르티가 섬에 억류되어 있던 디온의 가족은 석방되었다. 그 후 디온은 자신의 정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먼저 민주파의 보루가 될 위험이 있는 함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자 신데레온(synhédrion)을 소집했다. 신데레온에는 시라쿠사인 외에도 시라쿠사의 모도시인 코린토스 사람도 포함되었다. 당시 코린토스는 과두정 체제였으므로 시라쿠사에 참주가 다시 등장함을 용인할 가능성이 높았다.

디온은 반대 세력의 반발을 예상하고 정적인 헤라클레이데스를 신데레온에 참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데스는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세웠다. 이리하여 양측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헤라클레이데스가 디온의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디온의 지지도는 크게 줄어들었다. 민회에서 디온의 용병대에게 급료를 더 이상 지급하지 않기로 결의하자, 그는 정적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하고 지지자들에게 재산을 헌납하라고 요구하는 등 강압적인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시민들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한 데다가, 그렇게 했는데도 급료 체불이 있었기 때문에 용병들마저 디온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주저했다.

한편 디온은 아테네에 체류하던 시절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칼리포스와 친분을 맺었다. 칼리포스는 디온의 정변에 함께 해 그가 집권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상황이 디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디온을 제거하고 자기가 시라쿠사의 참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354년, 칼리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라쿠사 시의 주요 거점을 점거하고 집에 있었던 디온을 습격해 살해했다. 칼리포스는 자신의 행동을

시라쿠사 시민들의 자유를 위해 독재자를 처단했다.

라고 선전하고 시라쿠사의 새 집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칼리포스의 입지는 불안정해서 디온의 친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칼리포스는 이런 상황에서 시라쿠사 시민들의 지지를 확고하게 얻어내려면 군사적인 위업을 달성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원정을 감행하여 카타나를 장악하고 메사나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뒤 해협 건너편의 레기움을 점령했다.

그러나 칼리포스가 레기움에 머물고 있었던 기원전 353년, 디온의 조카였던 히파리노스가 시라쿠사를 기습하여 공략에 성공한 뒤 참주로 등극했다. 칼리포스는 본국의 지원이 끊기자 용병들에게 급료를 주지 못했고, 이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에게 피살당했다. 히파리노스는 여러 정적을 처단하고 시민들을 무력으로 억눌렀으나 2년 만인 기원전 351년에 사망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뒤이어 참주가 된 니사이오스는 성격이 연약한 인물이라 측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고 전한다.

기원전 346년, 소 디오니시오스는 시라쿠사가 혼란한 틈을 타 시라쿠사로 진격해 공략에 성공하고 10년 만에 참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가 기반으로 삼았던 로크리 주민들은 그가 부재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소 디오니시오스를 따르던 용병들을 모조리 몰아냈고, 로크리에 남겨졌던 가족들은 모조리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시라쿠사의 패권은 완전히 사라졌고, 시칠리아 섬의 다른 도시국가들도 시라쿠사에게 등을 돌리며 참주를 독자적으로 세웠다.

레온티노이의 참주 히케타스는 이때를 틈타 시라쿠사를 도모하기로 하고 카르타고 및 시라쿠사 내 반 디오니시오스 세력과 손을 잡았다. 양측 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진 끝에 기원전 344년 히케타스가 시라쿠사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고, 소 디오니시오스는 다시 오르티가 섬으로 피신했다. 이렇듯 시라쿠사가 혼란해지자,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을 완전 재패하기로 결의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시라쿠사인들은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고 모도시 코린토스에 구원을 요청했다.


2.1.5. 티몰레온[편집]


코린토스 정부는 시라쿠사인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고 누구를 지휘관으로 삼을 지 논의한 끝에, 20년 전 형제인 티모파네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참주가 되려 하자 몸소 살해한 뒤 지금까지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던 티몰레온을 지휘관으로 삼기로 결의했다. 티몰레온은 코린토스 정부의 통보에 따라 함대 10척과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때 히케타스가 코린토스 정부에 서신을 보내

나는 카르타고 편을 들기로 했다. 만약 시칠리아로 군대를 보낸다면, 카르타고의 강력한 함대가 막을 것이다.

라며 원정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인들은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고, 티몰레온의 함대는 시칠리아로 진격했다.

티몰레온이 이탈리아 남부의 레기움에 도착했을 때, 카르타고군은 코린토스 함대를 차단하기 위해 대한노 1세가 이끄는 3단 노선 스무 척을 파견했다. 카르타고에서 파견한 사신이 티몰레온과 접견하여 히케타스와 힘을 합친다면 시칠리아 섬을 분배할 때 코린토스에게도 일정 부분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만약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군대를 코린토스로 돌려야 했고, 제안을 거부한다면 카르타고 함대가 티몰레온을 막아설 게 분명했다. 이에 티몰레온은 레기아인들을 도우러 왔을 뿐 시칠리아에 간섭하지 않으리라는 거짓말로 카르타고 사절과 함대를 속인 뒤 야밤을 틈타 시칠리아로 항해해 시칠리아의 도시 타우로메니아에 잠입했다. 이후 타우로메니아에서 군사 1천을 이끌고 시라쿠사로 진군해, 히케타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시라쿠사 일부를 장악한 뒤 오르티가 섬에서 소 디오니시오스와 만났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히케타스보다는 티몰레온에게 항복하는 편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항복했다. 티몰레온은 그로부터 오르티가 섬을 접수받은 뒤 코린토스로 이송했다.

대한노 1세가 상륙을 막지 못하자, 카르타고인들은 한노를 소환한 뒤 마고를 새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마고는 군대 5-6만 명을 이끌고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카타나에 주둔한 티몰레온이 시라쿠사에 지속적으로 보급해줬기 때문에 함락이 어려웠다. 이에 마고와 히케타스는 카타나를 공략하기로 하고, 최고의 전사들을 선발해 그곳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수비대 지휘관 네온이 포위한 카르타고군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경계가 허술한 점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그들을 도망치게 만든 후, 시라쿠사의 또 다른 지역인 아흐라디나를 점령하여 그 주변의 성벽을 요새화하고 사방에 경비병을 배치했다. 마고와 히케타스는 카타나로 진군하던 중 이 소식을 접하자 즉시 철수했다.

티몰레온이 시라쿠사를 성공적으로 구원했다는 소식에 기뻐한 코린토스인들은 배 10척에 병사 2천 명과 기병 200명을 더 보내기로 했다. 카르타고는 이를 저지하고자 한노를 이탈리아 해안으로 파견해 코린토스의 추가 병력이 상륙하는 걸 저지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악천후가 며칠간 지속되자 코린토스 함대가 건너지 못하리라 여기고 시라쿠사로 항해하여 요새를 지나면서

코린토스군이 바다를 건널 때 격파했다.

라고 외쳐서 수비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날이 개었고, 코린토스인들은 해협을 지키는 함대가 없는 걸 본 후 재빨리 뗏목과 어선에 올라 시칠리아 해안으로 이동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에 상륙한 코린토스 지원군과 합세한 티몰레온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 시라쿠사에서 카르타고군을 몰아냈다. 마고는 거듭되는 실패에 좌절한 끝에 히케타스의 간절한 설득을 뿌리치고 북아프리카로 도주했다. 티몰레온은 여세를 몰아 히케타스를 격파해 레온티노이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 패배에 격분하여 마고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시라쿠사인들은 자신들을 구해낸 티몰레온에게 열광하며 그를 참주로 세웠다.

티몰레온은 시라쿠사의 통치자가 된 뒤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우선 역대 참주들이 세웠던 오르티가 섬의 요새와 궁정, 심지어 참주들의 묘비를 모조리 파괴했다. 또한 민주제도가 가미된 새 헌법을 입안했으며, 거듭된 내란으로 줄어든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랑민들을 대거 거둬들이고 코린토스로부터 자원자들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시라쿠사의 시민수는 6만 명에 달했다. 티몰레온은 이주민들에게 토지와 도시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줬다. 여기에 전쟁 물자와 용병 고용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도시에 세워진 동상을 포함해 모든 기념물들을 팔았다. 이리하여 시라쿠사 내에 있던 거의 모든 동상이 제거되었지만, 기원전 480년 히메라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물리치고 시라쿠사의 전성기를 연 영웅 겔론 1세의 동상만은 보존되었다.

티몰레온은 뒤이어 시라쿠사로부터 독립한 도시국가들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엔기온과 아폴로니아 레피노스를 공략하고 그 곳의 참주들을 코린토스로 압송했다. 히케타스는 티몰레온이 엔기온을 포위한 틈을 타 시라쿠사를 공략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카르타고의 재침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티몰레온은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과 군사-정치적 연합을 결성했다. 나중에는 히케타스 역시 계속 티몰레온과 싸워봐야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와 연합하기로 했다. 기원전 341/340년, 티몰레온은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시칠리아 서부에 용병 천 명을 보내 부유한 지역을 약탈하도록 했다. 이후 엔텔라를 정복하고 카르타고 지지자 15명을 처형했다. 이후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섬 주요 거점인 릴리바이움을 위협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에 맞서 하밀카르와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의 병력은 7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보병은 7만 이상, 기병은 1만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네들의 목표는 티몰레온을 격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칠리아 섬 전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티몰레온은 카르타고군의 규모를 알고는 시칠리아 섬 상륙을 막고자 가용한 모든 병력을 모아 시칠리아 서쪽으로 향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티몰레온이 거느린 병력이 보병 6천 명에 기병 1천 명이라 서술하였고,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1만 2천 명이라고 하였다. 진군하던 중 천여 명이 압도적인 카르타고군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여 달아나자, 티몰레온은 나머지 병사들에게

저 비겁한 놈들이 전투 도중이 아니라 이전에 도망쳤으니 다행이다.

라며 오히려 독려했다.

기원전 339년, 양군은 크리미소스 강 인근에서 격돌했다. 티몰레온의 시라쿠사 군대는 강 근처 언덕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는 전차와 완전 무장한 보병대가 강을 건너는 걸 보고, 카르타고군이 강을 중간까지 건넜을 때 급습했다. 카르타고군은 시라쿠사군의 첫 번째 공격을 확고하게 버텼다. 그런데 갑자기 뇌우가 발생하더니 돌풍과 우박을 동반한 폭우가 카르타고군을 강타했다. 이에 그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지휘관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시라쿠사군은 이 때를 틈타 맹공격을 퍼부어 카르타고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크리미소스 강이 범람하여 제방을 덮치는 바람에 카르타고군의 사상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카르타고군은 패주했고, 시라쿠사군은 이들을 추격해 상당수의 적병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크리미소스 강 전투).

티몰레온이 대승의 기세를 몰아 시칠리아 섬 전역을 장악하려 하자, 카르타고의 새 지휘관 기스코는 히케타스를 설득해 티몰레온을 적대하도록 했다. 히케타스는 티몰레온이 메사나로 보낸 병사 400명과 이에타 지역의 용병 분견대를 학살했다. 또한 티몰레온이 칼라브리아를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히케타스는 시라쿠사를 침공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티몰레온은 군대를 돌려 히케타스를 추격했고, 다므리 강변에서 따라잡았다. 히케타스는 티몰레온의 군대가 자신을 추격하느라 지쳤고, 자기가 먼저 가파른 둑을 선점했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보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다므리 강 전투의 결과는 히케타스의 패배였다. 히케타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레온티노이로 후퇴했으나 곧 군대의 반란에 휘말려 아들과 함께 생포된 뒤 티몰레온에게 넘겨졌다. 히케타스와 그의 아들은 폭정을 일삼고 카르타고와 손을 잡은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레온티노이 시민들 역시 재판을 벌여 히케타스의 아내와 딸들을 처형했다.

이리하여 히케타스를 끝장낸 티몰레온은 뒤이어 카타나로 향했다. 기원전 338년 아볼 강 전투에서 카르타고 분견대와 합세한 카타나 참주 마메르코스를 격파했다. 결국 카르타고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티몰레온과 협상한 끝에 갈릭 강 서쪽 시칠리아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시칠리아 동부 참주들과 동맹을 맺지 않기로 했다. 그 후 티몰레온은 모든 참주들을 쉽사리 축출할 수 있었다. 다만 티몰레온이 시라쿠사를 구하려고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을 때 처음으로 그의 편을 들었던 타우로메니아의 안드로마네스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종식된 직후, 티몰레온은 은퇴를 선언하고 시라쿠사인들이 마련해 준 집에 살았다. 그는 말년에 장님이 되었지만 여전히 시라쿠사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티몰레온을 병거에 태워서 중앙 광장으로 데려와 자문을 구했다. 그는 양측의 의견을 경청한 뒤 자신의 의견을 밝혔고, 시라쿠사 시민들은 이를 받아들여 정책에 반영했다. 기원전 337년 영웅 티몰레온이 사망하자, 시라쿠사인들은 음악, 승마, 체조 대회를 개최해 그를 추모했고, 청소년 활동을 위한 티몰레온테온 광장이 세워졌다.


2.1.6. 제2차 민주정과 아가토클레스[편집]


파일:아가토클레스 3.jpg
아가토클레스의 금화. 트라스켈리온이 보인다.

시라쿠사는 영웅 티몰레온 사후 민주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파와 과두파간의 오래된 갈등이 또다시 전면에 나타났다. 양측간의 치열한 정쟁 끝에, 과두파가 민주파를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한 뒤 600명으로 구성된 의회를 수립해 도시를 통치했다. 민주파의 지도자였던 아가토클레스는 이에 반발하여 과두파의 주요 정치인인 소시스트라토스와 헤라클레이데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소시스트라토스와 헤라클레이데스는 아가토클레스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고 시라쿠사에서 추방했다. 아가토클레스는 이탈리아 남부 각지에서 용병 생활을 하다가 시라쿠사 과두파의 맹공을 받고 있었던 레기온 수비대에 가담하여 시라쿠사군을 격퇴했다. 이 패배의 여파로 소시트라토스와 헤라클레이데스의 입지가 좁아진 끝에 축출되었고, 민주파가 권력을 되찾았다.

시라쿠사에서 축출된 과두파 인사들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시라쿠사를 도모하려고 했다. 이에 민주파는 아가토클레스를 불러들여 카르타고를 막도록 했다. 이리하여 귀환할 수 있었으나, 시민들은 아가토클레스의 야심을 불신하여 그 대신 코린토스 출신의 장성을 지휘관으로 세우기로 했다. 코린토스에서 파견된 아케스토리데스는 과두파와 화해하고 카르타고와 평화협정을 맺고자 했다. 민주파는 이를 수용해야 했고, 온건한 과두파 인사들이 집권했다. 아케스토리데스는 아가토클레스를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에서 달아난 뒤 사병을 육성한 후 레온티노이 시에서 세력을 구축한 뒤 시라쿠사 과두정에 맞섰다. 시라쿠사 정부는 아가토클레스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위협을 느끼고 카르타고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르타고군 사령관 하밀카르가 군대를 이끌고 레온티노이로 접근하자, 아가토클레스는 하밀카르와 협상해 철수시켰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두 장군은 개인적인 동맹을 맺고 각자 시라쿠사와 카르타고의 참주가 될 때까지 서로 후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카르타고군이 철수해버리자 시라쿠사는 고립되었고, 시민들은 과두파 정치인들을 위해 목숨을 걸 의지가 없었기에 아가토클레스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는 참주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기원전 319/318년에 귀환한 뒤 '스트라테고스'에 선임되었다. 아가토클레스는 자신을 계속해서 막아서는 600인회를 제거하기 위해 비그리스계 시칠리아인과 시라쿠사인 사이의 대립 및 도시 빈민과 부유층 사이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외적에 대한 방어를 구실로 빈민 출신의 시칠리아인과 그리스인 전사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를 모아 오직 자신의 명령만 받들도록 했다.

기원전 317년, 아가토클레스는 반대파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한 뒤 과두파 정치인 40여 명이 자신을 음해하려는 계획을 모의했다고 비난하며 이들을 체포했다. 그의 사병들은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고, 아가토클레스는 이에 호응하여 체포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후 군악병들이 전투 신호를 알리는 나팔을 불자, 사병들이 즉시 시라쿠사 시내를 휘저으며 대학살을 자행했다. 상류층이라는 이유만으로 4천 명이 살해되었고, 6천 명 이상이 시라쿠사를 탈출해 아그리젠토로 피신했다. 남겨진 재산은 시라쿠사 정부에 귀속되었다. 그후 민회를 소집한 아가토클레스는 과두파의 책략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티몰레온처럼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추종자들이 나라를 지켜달라고 호소하자 못 이기는 척하며 받아들인 뒤 무한한 권한을 가진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스'(strategós autokrátor)를 맡았다(아가토클레스의 정변). 아가토클레스는 이 직책을 원하는 만큼 맡을 수 있었다. 이후 부채 탕감 및 토지 분배를 안건으로 제시해 시라쿠사 빈민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그렇게 참주에 오른 뒤,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에 적대하는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을 제압하는 과업을 수행했다. 이에 아그리젠토, 겔라, 메사나가 반 시라쿠사 연합군을 결성하고 스파르타 출신의 아크로타토스를 선임했지만, 그는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채 내부 분열만 일으키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주했다. 그러나 시라쿠사군 역시 메사나를 점령하지 못했다.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카르타고가 개입했다. 기원전 314년, 카르타고군 사령관 하밀카르가 평화를 중재했다. 카르타고의 영향권 밖의 모든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은 자치를 인정받았지만, 패권은 시라쿠사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아가토클레스는 카르타고가 자국의 패권을 인정하겠다고 한 것에 고무되어 세력 확장을 본격적으로 단행해 여러 성읍을 점령했다. 기원전 313/312년, 그의 추종자들이 메사나에서 과두파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아가토클레스의 군대를 도시 안으로 입성시켰다. 뒤이어 타우로메니온 시도 그의 손에 들어갔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이후 시라쿠사군이 아그리젠토를 공격하려고 하자, 아그리젠토의 지도자였던 데이노크라테스는 카르타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서야 상황이 위급하다는 걸 알게 된 카르타고인들은 하밀카르가 일처리를 잘못했다고 비난하며 대 시라쿠사 전쟁을 단행했다.

기원전 311년, 카르타고인들은 함대를 파견해 아가토클레스를 압박하여 아그리젠토에서 철수하도록 했다. 시라쿠사군은 이에 맞서 칼타기론 지역의 갈라리아에서 아그리젠토군을 격파했다(갈라리아 전투). 기원전 310년, 전함 130척과 육군 1만 4천으로 구성된 카르타고군이 하밀카르[9]의 인도하에 시칠리아 섬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폭풍우로 인해 선박 60척이 가라앉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하밀카르는 상륙 이후 용병을 고용하고 그리스 동맹군과 합류해 군대를 보충할 수 있었다. 기원전 310년 6월, 제2차 히메라 전투에서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 투석병들의 활약에 힘입은 카르타고군이 승리했고, 아가토클레스는 병력 7천을 잃고는 패주했다. 이에 시칠리아 섬의 거의 모든 도시국가들이 카르타고의 편에 섰고,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로 후퇴한 뒤 카르타고군에 포위되었다.

아가토클레스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끝장이라고 여겨 일생일대의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기원전 310년 8월 14일, 배 60척과 병력 1만 4천을 이끌고 항구를 떠난 뒤, 해질녘까지 추격해오는 카르타고 해군을 가까스로 피했다. 당시 그의 군대에는 시라쿠사 시민병과 그리스 용병 외에도 삼니움인, 에트루리아인, 켈트인 등이 있었다. 그들은 시칠리아 섬 북쪽 해안을 따라 우회하다가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더니, 엿새간 배를 몬 끝에 카르타고 인근의 튀니지 서해안에 상륙했다. 함선들을 지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아가토클레스는 배를 전부 불태우게 한 뒤 카르타고로 직공했다(아가토클레스의 북아프리카 원정).

아가토클레스가 이리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 카르타고인들은 경악했다. 도시 건국 이래로 대규모 적군이 중심부를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 시에는 군사 요새가 불충분했고 정규 병력도 적었다. 아가토클레스는 각지를 약탈하여 상당한 재물을 긁어모았다. 카르타고인들은 보병 4만, 기병 1만, 전차병 2천으로 구성된 병력을 긁어모았다. 이들은 시라쿠사군보다 훨씬 많았으나 훈련과 전투 경험은 부족했다. 뒤이은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시라쿠사군의 기세에 짓눌려 카르타고 성벽 뒤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카르타고군이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카르타고 역시 시라쿠사군에게 에워싸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카르타고 정부는 시칠리아 섬의 하밀카르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일부 병력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에 하밀카르는 본국으로 급히 5천 명을 파견했다. 한편, 아가토클레스는 타인스를 포함하여 카르타고 인근의 여러 해안 마을과 도시들을 점령했다. 여기에 리비아의 왕 아이라마스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해안을 정복한 후, 아가토클레스는 내륙으로 진군하여 카르타고를 압박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수차례 반격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한편 시칠리아에서도 상황이 반전되었다. 기원전 309년, 아가토클레스의 형제인 안탄드로스의 지휘를 받은 시칠리아인들이 야습하려고 접근해오는 하밀카르의 카르타고군을 역습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하밀카르는 포로로 잡힌 뒤 처형되었고, 그의 수급은 북아프리카의 아가토클레스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순식간에 카르타고를 버리고 시라쿠사 편을 들었다.

위기를 극복한 아가토클레스는 이렇게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했으나, 연회 석상에서 그의 아들 아르차가토스가 어느 고위 장교와 말다툼을 벌인 끝에 살해해버린 사건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희생자의 친구들은 복수를 원했고, 많은 장병들이 아르차가토스를 죽이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아가토클레스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역시 죽여야 한다고 여겼다. 카르타고인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반란을 모의하는 시라쿠사군 장교들을 초대해 자기들 편에 서면 거액의 보상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가토클레스가 휘하 군대를 설득해 마음을 바꿔 자신을 따르게 한 후, 카르타고인들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여러 전투를 치렀지만, 전쟁의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병사들이 아가토클레스를 기꺼이 버리려 했던 데는 아르차가토스의 일탈행위에 분노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아가토클레스는 자금이 부족해서 급여 지급을 차일피일 미뤘다. 현지 주민들을 약탈했다간 민심을 잃어버려서 입지가 위태로워지므로 그럴 수도 없었다. 급료 지급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니 병사들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횡행했다. 아가토클레스로서는 어떻게든 추가 병력을 확보하여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압해야만 했다. 이에 마케도니아계 이집트 파라오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키레나이카 총독으로 임명한 마케도니아 사람 오펠라스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아가토클레스는 오펠라스가 자신을 돕는 대가로 카르타고 본토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오펠라스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테네에서 수많은 용병을 모집해 전사 약 1만 1천 명과 함께 서쪽으로 진군했다. 그후 2개월에 걸쳐 사막을 가로지르는 힘겨운 행군 끝에 겨우 시라쿠사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아가토클레스는 겨우 도착한 오펠라스를 반역죄로 고발하여 처단한 뒤 오펠라스의 용병 군대를 자기 소유로 삼았다. 이후 수년 간 북아프리카의 영역을 자기 것으로 굳히고 카르타고 시를 점점 더 고립시켰다. 그러나 해상 봉쇄에 필요한 함대가 아직 부족했고, 육지 쪽에서 공격하는 것 역시 카르타고 시민들이 그 사이에 세운 강력한 요새 때문에 가망이 없었다. 이에 아가토클레스 본인이 시라쿠사로 가서 함대를 가져오기로 하고, 병사 2천을 데리고 떠나면서 떠나면서 북아프리카 내 시라쿠사군을 아들인 아르차가토스에게 맡겼다. 한편, 카르타고 함대는 본토가 털리고 있는 와중에도 시라쿠사를 계속 봉쇄했다. 아그리젠토의 지도자인 데이노크라테스의 과두파는 여전히 강력했으며,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자치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인기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라쿠사 함대를 차출해 북아프리카로 보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아가토클레스는 몇 년간 시라쿠사에서 발목이 묶였다.

그러는 사이,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아르차가토스의 상황은 극적으로 악화되었다. 장병들은 아가토클레스가 엄격히 금지했던 약탈 행위를 거리낌없이 자행했고, 현지 주민들은 이에 반감을 품고 카르타고 편을 들었다. 카르타고군은 이 때를 틈타 병력 3만을 모아 공세를 개시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전략적인 재능이 없었던 아르차가토스는 기병 1천을 포함하여 병력 1만 3천 명을 상실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입지는 급격히 위태로워져 자칫하면 몰살당할 위험에 처했다.

한편, 아가토클레스는 에트루리아와 동맹을 맺고 함대 18척을 지원받은 뒤 마침 사령관이 사망하여 어수선해진 카르타고 함대를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카르타고 함대는 봉쇄를 풀고 철수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아그리젠토의 적군을 상대로 공세를 펼쳐 상당한 성과를 거둬들였다. 그때 북아프리카에서 아들이 완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가토클레스는 기원전 307년 가을에 아프리카로 서둘러 돌아왔다. 북아프리카에 도착해보니 보병 1만 2천과 기병 1500명만 있었다. 여기에 리비아 동맹병 1만 명이 더 있었으나 충성심이 의심스러웠다.

아가토클레스는 카르타고 진영을 공격해봤으나 병력 3천 명만 잃고 실패했고, 리비아 동맹병 1만 명은 전원 탈영했다. 이에 시칠리아로 퇴각하려 했지만 군대를 싣고 갈 함대가 없었다. 이에 전군을 해안가로 집결시켜서 수비에 전념하게 한뒤, 자신은 기원전 307년 10월 이나 11월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시칠리아로 가서 구조 함대를 조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겨진 병사들은 그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여기고 반란을 일으켜 아가토클레스의 두 아들을 살해한 후 장군을 뽑은 뒤 카르타고인들과 항복 협상을 벌였다.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거나 카르타고의 영향권에 있는 시칠리아 서부에 정착시켜주겠다고 제안했고, 병사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직 소수의 지휘관만이 아가토클레스에게 충성을 끝까지 바치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북아프리카 전역이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아가토클레스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그만두지 않고 군대를 새로 모으며 자금을 조달했다. 동맹도시인 세게스타에서 강압적인 징발에 반발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그는 주민 1만 명을 하루 만에 모조리 살해하고 아이들을 노예로 팔았다. 이런 아가토클레스의 강압적인 조치에 반감을 품은 부관 파시필로스가 일부 병사들과 함께 과두파에 망명했고 여러 도시가 아가토클레스에게서 독립했다. 이제 아가토클레스는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내의 반대세력, 두 세력과 싸우는 양면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알았다. 기원전 306년 카르타고와 협상한 끝에 전쟁 전과 동일한 조건으로 경계를 짓고, 은 300달란트와 20만 부셸에 해당하는 황금을 카르타고에 바치는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했다.

이렇게 카르타고와 타협한 뒤, 아가토클레스는 가용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과두파 지지자들과 전쟁을 벌였다. 토리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데이노크라테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뒤 사로잡은 포로 수천 명을 살해했다(토리온 전투). 하지만 이때 생포된 데이노크라테스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아가토클레스와 화해하고 부관이 되었다. 이후 데이노크라테스는 이전의 동료였던 파시필로스를 죽이고 아그리젠토를 아가토클레스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아가토클레스는 시칠리아 동부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기원전 305년 또는 304년에는 마침내, 디아도코이들이 각지에서 칭왕함을 본따 시라쿠사의 왕을 칭했다. 하지만 자신이 민주파임을 잘 알았기에 왕궁이나 성을 건축하기를 삼갔고, 왕관 대신 화환만 썼다.

한편, 주화에서도 아가토클레스의 절대 권력이 명백히 드러났다. 기원전 310년까지는 '시라쿠사인'만이 모든 주화에 조폐국으로 지명되었지만, 기원전 310년부터 306년까지 은화 뒷면에 아가토클레스의 이름이 등장하며, 승리의 여신 니케의 이미지와 함께 승리의 표식이 새겨졌다. 나중에는 은화 주조에 아가토클레스의 이름이 항상 새겨졌고, '시라쿠사인'들은 오직 청동 주화의 조폐국으로서만 표현되었다. 아가토클레스가 왕을 칭한 뒤에는 주화에 왕의 칭호가 새겨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디아도코이들과는 달리 주화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지는 않았다.

기원전 304년, 아가토클레스는 리파라 섬을 습격하여 주민들에게 시라쿠사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비슷한 시기에 루카니아인들로부터 공격받은 타라스[10] 시민들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즉시 개입하여 이탈리아 남부의 칼라브리아 일대를 석권했다. 그러나 루카니아 사람들이 거세게 저항하여 인력과 물자 손실이 갈수록 불어나자, 아가토클레스는 전쟁을 중단하고 시칠리아 섬으로 귀환했다. 기원전 299년, 그리스와 이탈리아 남부 사이의 항로를 통제하고자 그리스 서부 코르기라(코르푸) 섬을 점령하고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의 함대를 격파했다. 말년에는 숙적인 카르타고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해 시칠리아 섬에서 카르타고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마음먹고, 200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갖추었지만 원정을 감행하기 직전인 기원전 289년에 숨을 거두었다.

아가토클레스는 통치 말기에 3남 아가토클레스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에트나 산 근처 군대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그 군대의 원래 사령관은 아가토클레스의 장남 아르차가토스의 아들이자 아가토클레스의 손자인 아르차가토스였다. 아르차가토스는 숙부에게 지휘권을 양도하는 대신 죽여버렸다. 아가토클레스는 이 소식을 듣곤 격노하여 아르차가토스의 후계자 자격을 박탈했다. 기원전 289년에 아가토클레스가 죽은 뒤 손자 아르차가토스 역시 얼마 안 가 살해당했다. 시라쿠사인들은 참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동상을 모조리 제거했으며, 아가토클레스가 정복한 도시들은 대거 독립했다.


2.1.7. 시라쿠사의 위기와 피로스 1세[편집]


일부 학자들은 아가토클레스가 죽은 이후 시라쿠사에 민주정이 다시 도래했다고 주장하지만, 고대 문헌에는 아가토클레스 사후 히케타스가 참주를 맡았다고 서술했다. 히케타스는 반기를 든 멤논 시와 전쟁을 벌여 초반에는 승기를 잡았지만, 카르타고가 멤논을 후원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에 양자는 평화협약을 맺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히케타스는 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전권을 계속 쥐었기에 참주로 일컬어졌다. 당시 시라쿠사는 기존의 시민들과 아가토클레스로부터 신시민으로 인정된 용병들 사이에 충돌이 심화되고 있었다. 히케타스는 양자간의 화해를 촉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탈리아인 용병 마메르티니들은 시라쿠사에서 구시민들에게 밀리자 재산을 팔아치우고 북쪽의 메사나로 가서 그 곳의 주민들을 학살한 후 권력을 장악한 뒤 주변의 도시들을 상대로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고대 기록은 히케타스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관해서 설명하지 않았으나, 마메르티니의 위협이 그가 전권을 계속 쥐는 걸 인정받는 데 유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278년경, 히케타스는 시칠리아 섬의 서부 카르타고 영역을 침공했지만 테리우스 강 전투에서 패배한 뒤 마메오스의 아들인 포이논에게 피살당했다. 그후 티니온소시트라토스가 동시에 집권하여 권력을 공유했고, 용병 1만으로 구성된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권력 다툼을 벌였다. 소시트라토스가 시라쿠사 본토를 장악했고, 티리온은 오르티가 섬에서 농성했다. 카르타고는 이 시라쿠사 내전을 이용해 시칠리아 섬을 완전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시칠리아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시라쿠사를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포위 공격했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두 파벌은 당시 로마 공화국을 상대로 피로스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에페이로스 왕국의 군주 피로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자신들을 도와준다면 시라쿠사의 종주권을 넘겨주겠으며 시칠리아 섬 내 도시국가들의 도움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로마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피로스 1세는 풍요로운 시칠리아 섬을 자기 세력으로 삼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시라쿠사로 진군하여 카르타고군을 쫓아내고 도시에 입성했다. 그는 시라쿠사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던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를 서로 화해시키고 티니온을 영토 방어 감독관, 소시트라토스를 용병대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시라쿠사 인근의 여러 도시에서 사절이 와 피로스 1세에게 귀순하면서 지원을 약속하자, 그는 이들을 모두 친절하게 맞이하고 시칠리아 섬 전체를 장악하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카르타고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헤라클레아 시를 공략했다. 뒤이어 카르타고의 영역에 속한 시칠리아 서부로 진격해 여러 도시를 순식간에 확보하고 여세를 몰아 에릭스를 포위했다(에릭스 공성전). 에릭스 시는 난공불락으로 명성이 자자한 도시였지만, 피로스 1세가 보병 3만 명, 기병 2500명, 전함 200척을 동원해 장기간 포위 공격하고 몸소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전투를 벌이는 등 용맹을 떨친 끝에 함락시켰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제물을 바치고 경기를 개최했다. 피로스 1세는 시칠리아 섬의 현지 부족으로 그리스인들을 상대로 숱한 습격과 약탈을 일삼던 마메르타이인들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로마의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피로스 1세는 시칠리아에서 성공을 거둔 덕분에 "시칠리아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시라쿠사를 수도로 삼았으며 알렉산드로스에게 시칠리아를 관리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평화협상을 하려 했지만, 이미 시칠리아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피로스 1세는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이 완전히 떠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그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원정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시칠리아 섬의 도시국가들에게 막대한 공물과 병력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이에 시라쿠사의 공동 참주였던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가 반발하자, 피로스 1세는 티니온을 죽이고 소시트라토스를 쫓아냈다. 이에 분노한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피로스 1세에게 등을 돌리고 카르타고인과 마메르타이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카르타고 함대는 피로스군의 해상 보급을 끊어버렸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피로스 1세는 마침 타라스(타렌툼, 현재의 타란토)가 로마의 공세로 위험에 빠졌다며 구원 요청을 하자 즉시 시칠리아 섬을 떠나 이탈리아 남부의 타라스로 이동했다.


2.1.8. 히에로 2세[편집]


기원전 276년 피로스 1세가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가 시칠리아를 떠난 뒤, 시라쿠사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카르타고의 대대적인 침략을 독자적으로 막아내야 했다. 현재 남아있는 고대 기록에는 이 전쟁의 진행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무렵 시라쿠사 공동체와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275/274년, 메르간 시 근처에 주둔했던 군대는 사령관을 몰아내고 아르테미도로스와 히에로 2세를 새 지휘관으로 선정해 자신들을 시라쿠사로 진격하게 했다. 히에로 2세는 "몇몇 친구"의 도움으로 시라쿠사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정치 집단을 무력화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처형이나 보복은 없었다고 한다.

히에로 2세는 시라쿠사 정부로부터 유일한 사령관 직위를 확인받았고, 대 디오니시오스 형제의 후손인 레프티네스의 딸 필리스타스와 결혼함으로써 시라쿠사 과두파와 정치적인 연맹을 맺었다. 그후 시라쿠사와 군사 동맹을 맺은 여러 이웃 도시의 군대도 통솔했다. 이 도시들은 레온티노이, 기블라, 메가라, 겔로르, 니톤, 아크레이였다. 하지만 히에로 2세는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직위를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활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르타고와 평화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그 대신, 전 참주 아가토클레스에게 고용되었다가 아가토클레스 사후 메사나를 무단 점령하고 20여 년간 주변 그리스 도시들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한 이탈리아계 마메르티니인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기원전 271년, 히에로 2세는 용병과 민병대를 포함한 시라쿠사군을 이끌고 메사나로 진격했다. 키아모소르 강 전투를 치렀을 때, 그는 용병들이 시라쿠사의 정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다른 경쟁자를 지원하려는 조짐이 있음을 감지했다. 이에 일부러 용병들을 적에게 노출시켜 몰살당하게 유도하면서 민병대는 안전한 곳으로 빼두었다.

그렇게 기존의 용병들을 죽게 만든 뒤 새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재개한 히에로 2세는 기원전 270년 시칠리아 섬 북부 해안의 밀라, 틴다리다, 타우로메니움 시를 공략했고 269년 롱가노 강 전투에서 마메르티니인을 물리치고 메사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도시가 함락되기 직전에 카르타고군 사령관 한니발 기스코의 함대가 나타나 중재를 제안했다. 히에로 2세는 카르타고와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이고 마메르티니인과 화해하기로 했다. 시라쿠사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히에로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당시 그의 영토는 메사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섬 동부 전체를 통제했으며, 시라쿠사의 동맹도시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몇년 후, 시라쿠사 왕 히에로 2세는 마메르티니인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마메르티니인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탈리아 본토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같은 라틴족이라지만 그동안 저지른 만행이 심각해서 도와줄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카르타고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는 말을 듣자 자국 영토 코앞에 카르타고 같은 강대한 국가의 함대가 활개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여겨 개입하기로 했다(제1차 포에니 전쟁). 이에 로마의 소규모 병력이 메사나에 들어갔고, 얼마 후 히에로 2세의 시라쿠사 군대가 메사나를 포위했다(메사나 공성전). 기원전 264년, 로마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브덱스는 2개 군단과 함께 카르타고 함대의 감시를 피해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이후 벌어진 메사나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한 히에로 2세는 시라쿠사로 후퇴했다.

뒤이어 카르타고군도 격파한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히에로 2세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클라우디우스와 평화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듬해(기원전 263) 집정관인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와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와 평화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배상금 규모는 25달란트, 100달란트, 또는 200달란트로 기록마다 다르게 서술되었다. 나중에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는 대가로 배상금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시라쿠사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왕국의 영토는 시칠리아 섬의 남동쪽으로 좁혀졌다.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여 20여 년간 이어졌다. 히에로 2세는 전쟁 내내 로마를 끝까지 지지했다. 만약 그가 동맹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처음에 함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로마인들은 시칠리아 섬에 주둔한 로마군을 보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시라쿠사 함대는 로마군이 아크라가스와 릴리바이움을 공략하고 시칠리아 섬 주변의 여러 섬을 공략하는 걸 도왔다. 그 결과 로마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고, 히에로 2세의 시라쿠사 왕국을 제외한 시칠리아 섬 전체가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기원전 241년에 체결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평화협정에는

카르타고인들은 히에로 2세와 싸우지 않고, 그의 동맹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후 히에로 2세는 죽을 때까지 지중해의 강자가 된 로마 공화정에 충성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도중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한니발 바르카에게 크게 패배한 뒤, 히에로 2세는 밀 3만 모디(26만 2500리터)를 로마로 보내 로마 시가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도록 도왔다. 다만 로마만 도운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230년대에 용병대가 심각한 봉기를 일으키면서 카르타고가 위험에 처하자, 히에로 2세는 상당량의 자금과 물자를 지원해줘서 그들이 용병 반란을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렇듯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로서 입지를 굳힌 히에로 2세는 왕권을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의 칭호와 궁전, 왕족들의 생활 등은 헬레니즘 제국과 매우 유사했다. 히에로 2세는 시라쿠사 민병대를 이끄는 것 외에도 용병 분견대를 구성하고 유지했으며, 사비로 해군을 건설했다. 또한 소지주와 소작인으로부터 10분의 1 세금을 철저하게 징수하는 <히에로 세법>을 도입하여 국고 수입을 증진했다. 이 법에 적용되지 않는 귀족과 대지주들은 자신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후원을 해주는 히에로 2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반면에 소지주와 소작인들은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고대 기록에는 빈민들 사이에 히에로 2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말년에 히에로 2세가 권력을 포기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혔던 점, 그가 죽은 뒤 후계자로 지명된 히에로니무스가 얼마 안 가 살해당한 점, 시라쿠사 공방전 때 시라쿠사 시민들이 로마와의 전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점 등을 볼 때 막대한 재원을 가져가는 로마와 이를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히에로 2세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음을 암시한다.

히에로 2세는 <히에로 세법>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토대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했다. 오르티가 섬에 궁전 요새를 신설했고, 시라쿠사 광장에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세웠으며, 길이가 200 m에 달해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제단으로 손꼽히는 제단을 세웠고, 극장을 여러 개 신설했다. 히에로 2세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시라쿠사'호를 건조하기도 했다. 이 배에는 체육관과 전망대, 투석기 및 기타 방어 무기, 마구간 및 목욕탕이 갇춰졌다고 한다. 시라쿠사와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하고는 어떤 항구도 시라쿠사호를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히에로 2세는 이집트의 마케도니아계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이 배를 선보임으로써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을 도리어 선전용으로 활용했다. 한편 기원전 227년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로도스 섬에 막대한 자금과 방어를 위한 투석기를 보내주는 등 지중해 세계의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후원하여 시라쿠사 왕국의 명성을 드높이고자 했다. 또한 히에로 2세는 이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알려진 아르키메데스의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가 히에로 2세의 친척이었으며, 아르키메데스가 기이한 기계를 제조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다고 서술했다.

히에로 2세는 모종의 시기에 아들 겔론 2세를 공동 참주로 세워서 후계자로 공인했지만, 기원전 216년에 겔론이 그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에 겔론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왕손인 히에로니무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기원전 215년 임종을 눈앞에 둔 히에로 2세는 히에로니무스의 나이가 15살밖에 안 되었음을 우려하여 사위 아드라노도로스와 조이포스 등 고명대신 15명에게 곧 즉위할 아들 히에로니무스의 보좌 역을 맡겼다.


2.1.9. 시라쿠사 국의 멸망[편집]


파일:시라쿠사 아르키메데스.jpg
기원전 212년의 시라쿠사 함락 당시의 아르키메데스와 로마 병사를 묘사한 2세기 모자이크

기원전 215년 히에로 2세가 죽은 뒤 히에로니무스는 새 임금으로 즉위하여 고명대신 15명에게 보좌를 받았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인 아드라노도로스가 얼마 후에 히에로니무스가 성년식을 치렀으니 이미 성인이라는 이유로 섭정단을 해산하고, 또다른 사위였던 조이포스를 히에로니무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동생들과 함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아드라노도로스의 정변). 그리고 칸나이 전투에서 참패한 로마가 곧 멸망할 거라 보고 카르타고와 손을 잡은 후 시칠리아 섬 전체를 석권하고자 했다. 선대 히에로 2세 대부터 정계에서 활약한 프라손이 반대하자, 아드라노도로스는 프라손이 어린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처형했다.

아드라노도로스의 설득에 넘어간 히에로니무스 왕은 명장 한니발 바르카에게 동맹 의사를 타진했다. 이에 한니발은 시라쿠사에 사절을 즉시 파견하여 자신과 손을 잡으면 시칠리아 섬를 시라쿠사 왕국에게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한니발이 보낸 사절단 중 절반의 혈통이 시라쿠사인이던 히포크라테스에피키데스는 한니발의 대리인으로서 시라쿠사 궁정에 남았다. 로마의 시칠리아 행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이 사실을 알자 히에로니무스에게 사절을 보내 조부 히에로 2세의 뜻을 받들어 로마와 우호관계를 이어가라고 요청했다. 이에 히에로니무스는 시라쿠사 왕국이 히메라 강으로 확장하는 걸 동의하고, 히에론 2세가 로마에 바쳤던 모든 공물을 돌려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다. 결국 로마는 어린 왕을 설득하길 포기했다.

기원전 214년 여름,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지휘하는 군대 2천 명이 로마 수비대로부터 이웃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진군했다. 히에로니무스 왕은 본대 1만 5천 명을 본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섬 내륙의 대도시 레온티니를 공략했다. 그러나 이무렵 히에론 왕가의 독재에 반감을 품은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에로니무스가 레온티니의 좁은 길을 따라 아고라로 향하고 있을 때, 경호원 한 명이 그를 따라가던 신하들을 멈춰 세웠다. 그 직후, 골목에 숨어있던 공모자들이 뛰쳐나와 히에로니무스를 단검으로 난자해 살해했다.

히에로니무스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드라노도로스는 시라쿠사 시의 모든 요충지를 장악한 뒤 히에로 왕가의 폐지를 선언하고 스트라테고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히에로 2세의 왕녀였던 아내 데마라타의 설득을 받아들여 왕정을 조만간 회복할 마음을 품고, 로마를 지향하는 귀족들과 카르타고를 지지하는 자들을 이간질시킨 후 이를 빌미로 절대 권력을 손에 쥘 야심을 품었다. 이 왕정 복고 음모에는 데마라타 공주의 조카와 결혼한 테미스토스도 참여했다.

그러나 시라쿠사 정부는 밀고를 통해 이 왕정 복고 음모를 사전에 포착했고, 군인들을 시켜 아드라노도로스를 죽이도록 했다. 그는 의회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군인들의 습격을 받아 암살당했다. 주민들이 아드라노도로스 암살을 단행한 자들을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암살자 중 한 사람인 소파테르가 아드라노도로스가 왕이 될 야심을 품고 있었으며, 전왕 히에로니무스가 방탕한 행위를 저지른 배경엔 그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아드라노도로스와 테미스토스가 데마라타 등 히에로 2세의 딸과 손녀들의 부추김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분노한 시라쿠사 주민들은 데마라타 등 히에로 2세의 남겨진 딸과 손녀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이렇듯 혼란스러웠던 시라쿠사의 정국을 장악한 이는 한니발의 사절로서 시라쿠사를 찾아왔던 에피키데스히포크라테스 형제였다. 두 사람은 스트라테고스에 선임된 뒤 현 상황에서 로마와 싸우는 건 무리라 보고, 기원전 213년 봄에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 로마의 명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마르켈루스 역시 시라쿠사와 타협하고 한니발에게 전념하고 싶었기에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카르타고가 곧 원군을 보낼 거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마음을 달리먹고 인근 영토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수비대를 공격해 많은 이를 살육했다. 이에 분노한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에 전령을 보내 로마를 배신한 두 사람을 넘기지 않으면 전쟁 뿐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두 형제는 로마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레온티니 시로 도피했고, 시라쿠사인들은 마르켈루스에게 레온티니에 두 사람이 피신했으니, 그들을 친다면 자기들이 돕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마르켈루스는 전군을 이끌고 레온티니 시를 공격했고,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성문이 파괴되고 성벽이 공략당하자 아크로폴리스와 에르베소로 피신했다(레온티니 공성전). 로마군을 돕기 위해 출진한 시라쿠사군 8천 명은 도중에 레온티니 시 주민과 군인들이 전부 도륙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전해 듣고는 충격을 받아 행군을 멈췄다.

얼마 후, 로마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시라쿠사군을 찾아갔다. 그들은 부디 자신들을 넘기지 말고 보호해달라고 간청하면서, 로마군은 언젠가 시라쿠사도 레온티니 시처럼 만들 거라고 덧붙였다. 시라쿠사군의 지휘관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라쿠사 원로원에 조언을 구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이때 히포크라테스가 편지를 가로채어 큰 소리로 읽었다. 그 편지에는 두 사령관이 마르켈루스에게 모든 용병 민병대를 넘겨서 가혹하게 다루도록 하는 대가로 시라쿠사가 독립과 자유를 보장받도록 하는 게 어떠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병사들은 이에 분노했고, 사령관들은 시라쿠사로 달아났다. 군대는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를 새 사령관으로 추대한 뒤 시라쿠사로 돌아왔다. 이후 시라쿠사는 잔혹행위를 자행한 로마와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하고, 친로마파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도 학살을 자행한 시라쿠사를 응징하기로 결의하고 마르켈루스에게 시라쿠사 공략을 맡겼다. 이리하여 역사상 유명한 시라쿠사 공방전이 발발했다.

에피키데스가 시라쿠사의 수비를 전담하는 동안, 히포크라테스는 시칠리아 섬 각지를 전전하며 로마군에 맞서다가 히밀코 장군이 인솔하는 카르타고군과 합세하여 마르켈루스와 대적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의 공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히밀코가 우유부단한 행보로 일관하며, 보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 역시 격파당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기원전 212년 시라쿠사의 외성이 끝내 함락되자 내성으로 후퇴하여 여덟 달 동안 항전했다. 히밀코는 뒤늦게 시라쿠사를 도우러 출진했지만 마르켈루스에게 격퇴되었고, 뒤이은 전염병으로 히포크라테스와 함께 사망했다. 결국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에피키데스는 바다를 통해 시라쿠사를 빠져나갔고, 시라쿠사는 로마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시라쿠사의 독자적인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2. 로마 시대[편집]


파일:시라쿠사 경기장.jpg
로마 제국기 경기장 유적

로마 시기 시라쿠사는 시칠리아 속주의 주도로 유지되었고, 제국의 동서를 잇는 해상 무역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1세기 들어 바울을 통해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성 마르치아노가 첫 주교가 되었다. 2-3세기의 박해를 피해 로마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카타콤베가 생겼을 정도로 기독교는 빠르게 정착하였다. 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시에는 현지 여성 산타 루치아가 순교하여 후일 도시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쇠퇴를 틈타 469년 반달 왕국이 점령했다가, 477년 오도아케르령이 되었다. 491년 테오도리크 대왕이 점령, 동고트 왕국령이 되었다가 535년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점령하였다. 663년에는 이슬람 정복에 맞서 고토 수복에 나선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시라쿠사로 조정을 옮겼고, 공식적인 천도까지 계획했으나 668년 암살당하며 무산되기도 하였다.

2.3. 중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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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프리드리히 2세에 걸쳐 오르티기아 섬의 끝단 세워진 카스텔로 마니아체의 전경

이후로도 동로마 령으로 유지되던 도시는 827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아글라브 왕조의 원정군에게 포위되었다. 비록 이듬해 포위는 풀렸지만, 시칠리아 섬의 대부분이 조금씩 장악되며 시라쿠사는 반세기 가량 고립되게 된다. 해상 보급을 받으며 버티던 시라쿠사는 873년 5월, 결국 아글라브 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시칠리아의 저항 의지가 꺾였고, 결국 964년 마지막 동로마 거점이 함락되며 시칠리아 토후국이 섬을 통일했다. 시칠리아 토후국은 동로마 저항의 거점이던 시라쿠사 대신 팔레르모를 수도로 삼았고, 이로써 섬의 중심이 영영 옮겨지게 된다.

1040년, 동로마 장군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시칠리아 재정복 시도의 일환으로 시라쿠사를 점령했다. 그는 성녀 루치아의 성유물을 수도로 보냈고, 더 진격하려 했으나 롬바르드-노르만 용병대의 반란과 동행한 장군들의 농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동로마 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그리고 1085년 루제루 1세의 노르만 군이 시라쿠사를 점령하였고, 그는 시칠리아 백국을 선포했다. 모스크들은 다시 교회로 환원되었다. 다만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는 여전히 팔레르모로 유지되었다. 1194년 도시를 포함한 섬 전역은 호엔슈타우펜 왕조령이 된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신성로마제국 계승전에 휘말려 약화된 틈인 1205년 ~ 1220년간 제노바 출신의 알라만노 다 코스타가 지배하기도 했다가, 프리드리히 2세가 주권을 회복하였다. 스스로 시칠리아 인이라 여겼던 프리드리히 (페데리코)는 마니아체 요새, 주교궁, 벨로모 궁전 등을 세웠다. 프리드리히의 사후 프랑스의 앙주 가문이 일시 집권했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반란이 벌어졌다. 시라쿠사 시민들은 프리드리히 혈통을 이은 아라곤 왕국 측에 섰고, 결국 1298년 독립을 얻었다. 비록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시라쿠사는 특권을 받아 안정을 누렸다.

2.4. 근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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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건물에 1753년 바로크식 외벽이 더해진 두오모

1542년과 1693년 시라쿠사는 두 차례의 대지진을 겪었고, 1729년에는 역병이 엄습하여 쇠퇴하였다. 18세기 중반 시라쿠사를 포함한 동부 해안 도시들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다만 1816년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양시칠리아 왕국이 집권한 후 민심이 흉흉해져 1837년 콜레라 발병 후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에 왕실은 동부의 주도를 노토로 옮겨버렸다. 1848년 시칠리아 혁명 당시에도 시라쿠사 시민들은 반부르봉 봉기에 참여했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의 편입 후에야 도시는 안정을 회복했고, 재차 시칠리아 동부의 치소가 되어 발전하였다. 근대적인 시가지 구획을 위해 성벽이 철거되었고, 오르티기아 섬을 잇는 다리가 놓였으며 철도 역시 부설되었다.

2.5. 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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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 1994년에 걸쳐 세워진 마돈나 델라 라크리메 (눈물의 성모) 성당

세계 2차 대전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1943년 7월) 당시 시라쿠사는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의 폭격을 겪으며 큰 피해를 입었다. 도시 서쪽에는 1천여 영연방 병사들이 안장된 연합군 묘원이 있다. 전후 시가지는 북쪽으로 확장되었고, 90년대에는 유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있었다.

3. 역대 참주[편집]





4. 여담[편집]





  • 모바일 게임 <명일방주>에서 시라쿠사라는 국가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1] 시라쿠사와 판틸리카 바위 네크로폴리스[2] Syracuse and the Rocky Necropolis of Pantalica[3] Syracuse et la nécropole rocheuse de Pantalica[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7]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8] 현대 역사가들은 2만 명으로 추정한다.[9] 아가토클레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의한 하밀카르와 동명이인이다.[10] 라틴어로는 타렌툼, 현재의 타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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