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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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 왕국 9대 군주
Totila | 토틸라
파일:토틸라.jpg.webp
이름
한국어
바드윌라
라틴어
Baduila
별칭
토틸라(Totila: 전사)
생몰 년도
미상 ~ 552년 7월 1일
재위 기간
541년 ~ 552년 7월 1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고트 왕국의 9대 국왕. 실제 이름은 바드윌라(Baduila)였지만, 당대부터 전사라는 뜻의 '토틸라(Totila)'로 동고트족과 동로마인 모두에게 불렸다.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시기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동로마 제국군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왕국의 부흥을 이끌어낸 명군이자 명장. 그러나 552년 7월 1일 동로마 제국의 환관 장군인 나르세스와 맞붙은 타기나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편집]


동고트 왕국 6대 국왕 헬데바두스의 조카로, 541년 당시 막 수복한 트레비소의 군사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5월 헬데바두스 왕이 게피드 족 출신의 경호원 벨라스에게 암살당한 뒤, 일찍이 오도아케르를 따르다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복속되었던 루기아 족이 독단적으로 자기네 일원인 에라리크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동고트 귀족들은 자기들과 의논하지도 않고 멋대로 왕을 선출한 것에 반발했지만,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급했기에 일단 인정했다. 에라리크는 언제까지나 전쟁을 벌여서 좋은 건 없다며 귀족들을 설득해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했다. 하지만 뒤로는 왕국을 제국에 넘길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541년 가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밀서가 발각되면서 음모가 발각되었다. 당초 평화 협상에 긍정적이었던 토틸라는 격노했고,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새 왕이 되었다. 에라리크는 곧 토틸라의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토틸라의 즉위를 찬탈로 규정하였고 541년 말, 콘스탄티누스와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군대 12,000명이 북상하여 베로나를 포위했다.

동로마군의 특공대 100명은 성안 내통자 마르키아누스의 도움으로 밤중에 성문 중 하나를 점령하였으나 성 밖의 두 장군은 약탈품의 분배를 놓고 밤새 실랑이를 벌이며 입성을 지연하였다. 다툼이 지속되는 동안 고트족 수비대는 성문을 회복한 후 반격하였고, 동로마 군은 패배하여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성문에 있던 특공대는 지면으로 뛰어내리다 추락사했다. 토틸라는 동로마 군의 기강이 해이한 걸 확인하고, 본격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당시 동로마군은 포 강 이남의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했지만, 벨리사리우스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1세의 침공을 막으러 떠난 뒤에는 여러 장군들이 각자 군대를 별도로 이끌면서 서로 협력하길 꺼리는 바람에 지휘체계가 해이해졌다. 게다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창궐하면서 정부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 원정군에게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 했고, 이탈리아 주둔 동로마군은 알아서 돈을 마련하려고 주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장군은 테오도리크 대왕의 세금 징수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수증을 만들어서 모든 금전 거래에 대해 설명하도록 했고, 이를 트집삼아 재산을 뜯어냈다. 자연히 민심은 동로마 제국을 떠났고, 토틸라로서는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었다.

동로마군이 베로나 공략에 실패하고 라벤나 남서쪽의 레노 강과 파벤티아-파엔차 강 사이의 평원으로 철수하자, 토틸라는 5천 병사를 이끌고 추격했다. 542년경, 양군은 파벤티아에서 전투를 벌였다. 동로마군은 적의 2배 이상이었지만 기강이 워낙 해이해졌고 장수들간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반면에 동고트군은 반드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침략자들을 몰아내겠다는 신념을 품고, 토틸라의 지휘를 충실히 따라 적을 몰아붙였다. 여기에 토틸라가 사전에 적군의 후방으로 우회시킨 동고트 궁수 300명이 화살을 날리자, 동로마군은 또다른 거대한 군대의 선봉대라고 생각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했다. 토틸라는 패주하는 적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수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파벤티아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자, 그동안 동로마 제국군의 압제로 신음하던 고트족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토틸라는 삽시간에 2만 가량의 병력을 확보했다. 그는 토스카나로 진격하여 피렌체를 포위공격했다. 피렌체 수비대장 유스티누스는 요한네스, 베사스, 카프리아누스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세 장군이 군대를 합쳐 피렌체로 진군하자, 토틸라는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포위를 계속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토틸라가 후퇴하자, 세 장군은 즉시 추격했다. 토틸라는 무켈리움 언덕 고지에 군대를 배치한 후 추격해오는 적군과 맞섰다.

먼저 전장에 도착한 요한네스의 동로마군은 고지를 선점한 뒤 공격을 퍼붓는 동고트군에게 고전했다. 그들은 한동안 꽤 버텼지만, 도중에 요한네스가 전사했다는 헛소문이 군중에 퍼지자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했다. 베사스와 카프리아누스 장군이 뒤따라 진군하다가 선두 부대가 패주하는 걸 보고 역시 퇴각했다. 토틸라는 이 전투에서 상당한 식량과 전리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후 요한네스는 로마 시, 베사스는 스플레토, 키프리아누스는 페루자에서 농성했다. 그들은 토틸라가 피렌체를 포위공격하면서 전력을 소모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토틸라는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력만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막강한 병력과 부를 끝까지 당해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면 대결 대신 병력을 소규모 분대로 나눠서 동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는 도시들을 우회하여 시골과 항구를 장악하고, 적의 보급을 차단해 말라죽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이에 따라 적군이 모여 있는 이탈리아 중부 지방을 그대로 지나가서 남부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그동안 가혹한 징세와 수탈에 시달리던 민중은 열렬히 환영했고, 베네벤툼, 쿠마에 등 여러 도시가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그동안 동로마군은 요새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남부 이탈리아 대부분을 평정한 토틸라는 543년 나폴리를 포위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시칠리아의 신임 군사령관 데메트리오스에게 나폴리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데메트리오스는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지만, 도중에 동고트 함대에게 대패했다. 그는 다시 구원 함대를 파견했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파괴되었고, 적 함대가 습격을 가해오자 결국 패퇴했다. 이후 성 내부의 식량이 바닥나고 민심이 요동치자, 토틸라는 수비대장 칼론에게 항복한다면 수비대 전원의 안위 보장을 약속한다는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543년 봄, 칼론이 이를 받아들이며 1천의 동로마 수비대는 항복하였다.

토틸라는 나폴리 시가 다시 반기를 들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벽을 허물었고, 식량을 무상으로 제공해 굶주린 시민들을 먹여 살렸다. 또한 동로마 포로들 중 부상자를 치료해 주었으며, 포로들의 향후 행선지도 그들 자유에 맡기며 간섭하지 않았다. 이에 포로들은 감격하여 그에게 귀순했는데, 그중 몇몇은 그의 심복이 되기도 했다. 이후 전력을 재정비한 토틸라는 544년 아풀리아에 잔존한 동로마 측 도시인 히드룬툼(오늘날 오트란토)에 입성하여 남부 이탈리아를 거의 장악했다. 그해 말, 그는 로마 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북진했다. 544년 겨울 로마 시에 도착한 동고트 군은 도시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일 준비에 착수했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544년 벨리사리우스를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545년 초 라벤나에 상륙한 그는 로마 시를 구원하기에 앞서 배후의 곡창 지대인 남부 지방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그는 오트란토에 입성하여 칼라브리아 일대를 탈환하고, 중부의 아욱시움(오늘날 오시무)를 회복하였으며, 라벤나에서 북쪽으로 50여 km 떨어진 페사로 항구를 공격해온 동고트 별동대를 격퇴했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는 로마 시를 구원할 수 없었기에 다라키움으로 이동한 뒤 황제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지원군은 546년이 되어서야 들어왔고, 그나마도 소규모였다. 당시 사산 왕조의 침략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동로마의 주력군은 동방 전선에 묶여 있었기에, 이탈리아로 보낼 수 있는 병력은 지극히 한정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프랑크 왕국테우데베르 1세에게 토틸라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토틸라가 사전에 보물을 바치며 중립을 지켜달라고 요청한 걸 받아들였기에, 그는 황제의 요청을 거절했다.

토틸라는 로마시에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하자, 식량 공급을 끊고 말라죽기를 기다렸다. 수비대 사령관 베사스는 군용 식량을 시민들에게 터무니없는 고가로 팔아넘기는 데에 열중했고, 시민들은 벨리사리우스가 어서 구원하러 오기를 희망했다. 546년 봄, 벨리사리우스는 다라키움에서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토틸라는 테베레 강 하류에 쇠사슬 등 각종 장애물과 강을 가로지르는 목재 다리를 세웠으며, 다리의 양끝에는 정예병 2백과 투석기 등이 배치된 탑을 세웠다.

546년 5월, 벨리사리우스는 테베레 강 하구에 도착하여 포르투스에 보급 기지를 꾸렸고 베사스와 연락을 취하여 성 안밖에서 동고트 군대를 공격하자는 작전을 세웠다. 로마시의 상황이 심각한 것을 파악한 그는 부장 이사키오스에게 보급기지의 군량과 자신의 아내 안토니나를 부탁하고 자신은 2백여 척의 선박에 공성병기와 유황, 역청 등 을 지니고 소를 동원하여 배를 끌게하는 등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강의 양안에 배치한 기병대와 함께 진군하며 토틸라가 설치해 놓은 요새들을 하나 하나씩 격파, 마지막 관문인 탑이 설치된 목재 교각에 도착했다.

그런데 로마에서 출격하기로 약속했던 베사스가 움직이지 않았고, 보급 기지를 지키던 이사키오스가 섣불리 움직였다가 동고트 군에게 잡혔다. 이대로는 보급이 끊길 수도 있었고, 이사키오스에게 맡겼던 아내 안토니나가 걱정되었던 벨리사리우스는 후퇴를 명령했다. 하지만 보급기지로 돌아와보니 별 이상 없었고, 안토니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상은 이사키오스와 소수의 병사들만 사로잡힌 것이었다. 동고트군은 희대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격퇴한 것에 크게 기뻐했고, 동로마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얻게 되자, 벨리사리우스는 철수했다.

546년 여름, 토틸라는 공성전을 감행했다. 식량이 끊긴지 오래였던 로마 시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했다. 베사스는 시민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는데, 토틸라는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상당수가 기력이 쇠해 쓰러져 죽거나 고트족 병사들에 살해되었다. 그렇게 몇달간 무자비한 포위 공격 끝에, 546년 12월 로마 성문을 지키던 아사우리아 족 병사들이 비밀리에 성문을 열어서 동고트군이 입성하게 했다.

이리하여 546년 12월 17일 로마 시에 입성한 토틸라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참배했고, 동고트 병사들은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했다.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시민들과 병사들은 교회에 숨었으나 26명의 병사들과 60명의 시민들이 고트족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단호히 거부하고, 벨리사리우스에게 조속히 로마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틸라는 이에 맞서 벨리사리우스에게 사신을 보내 만약 황제군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하지 않고, 자신이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로마를 파괴하고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한 뒤 여전히 제국에 충성하고 있는 다른 도시들을 파괴할 거라고 위협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토틸라에게 답장을 보내 "이탈리아는 제국에 속하며, 황제께서 당신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의 기사도와 명예에 호소하며, "당신은 포로들에게 너그럽게 대하기로 명성이 높은데, 오랜 역사를 가진 로마를 한 순간에 파괴하고 명망높은 의원들을 처형하는 건 비극적인 실수"라고 지적했다. 그는 토틸라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파괴한 도시를 재건해야 하며, 만약 패배한다면 로마는 파괴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자비를 베풀어 로마를 남겨두면 그의 이름은 영원히 명예롭게 기억되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후대에 불명스럽게 여겨질 거라고 덧붙였다.

토틸라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설득되었고, 로마 시에 계속 머물고 있으면 중부의 로마군과 벨리사리우스에게 협공당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원로원 의원들과 가족을 인질로 잡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1/3 가량 파괴해 성곽 구실을 못하게 한 뒤 일부 병력을 로마에 남겨둔 채 나폴리로 이동했다. 그는 장차 아풀리아의 동로마군을 섬멸하려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틈을 타 로마시로 진격하였고 547년 2월, 1천 명의 기병과 함께 로마를 습격하여 탈환하였다. 그는 성벽을 재빨리 보수하고 마름쇠를 깔아서 예상되는 토틸라의 공격에 대비했다.

547년 3월, 토틸라는 재차 공격하였으나 짧은 기간내에 상당한 준비를 해놓은 수비군에게 격퇴되었다. 비록 동로마군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뿌려놓은 마름쇠 때문에 바로 추격을 못하였고 토틸라는 동로마 측의 주요 거점이었던 페루자를 함락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페루자를 되찾기 위해 루카니아로 이동하여 크로토나에 주둔했다가 토틸라에게 급습당했다. 근처의 구릉을 지키던 병사들은 고트족을 보고 도주해 버렸고, 벨리사리우스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까지 퇴각했다.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루카니아 회복에 나서 로시노를 두차례 공격하였지만, 첫 번째 시도는 폭풍으로, 두 번째 시도는 토틸라가 파견한 지원군에 의해 실패하였다. 지원이 절실하다고 느낀 벨리사리우스는 황후 테오도라와 친분이 있는 자신의 아내 안토니나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어 지원을 호소하게 하였는데, 그녀는 별 소득없이 돌아왔다. 테오도라 황후가 암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실의에 빠진 황제가 누구도 접견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다가 549년 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어 은퇴를 선고받았다.

토틸라는 벨리사리우스가 떠난 호기를 틈타 로마 시를 재차 공격했다. 동고트군의 압도적인 공격에도 3천 수비대가 버텨내자, 토틸라는 병사들을 아끼기 위해 또 다시 로마를 말려 죽이려 하였다. 사령관 디오게네스는 장기간의 포위에 대비하여 미리 라티움 지역의 밀을 수확, 식량을 비축해 놓았다. 하지만, 포위가 길어지며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일부 병사들이 고트 진영과 내통하였고 푸짐한 보상에 눈이 멀어 밤중에 성문을 열어버렸다. 이리하여 550년 1월 16일 로마에 입성한 토틸라의 군대는 들이닥쳐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던 동로마군을 살육하였고, 남아있던 대부분의 귀족층 시민들과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로마시는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약탈되었고 남자들은 학살되었는데, 엄명으로 아녀자에 대한 살육은 금지되었다. 토틸라는 기병대를 보내어 도로변에 매복을 시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가도를 따라 도주하던 병사, 시민들의 대부분이 생포되었고 장군 디오게네스와 소수의 병사들만이 달아나는 데에 성공했다. 토틸라는 로마 시를 파괴하여 목초지로 삼으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동고트 족과 기존의 시민들이 로마 시를 재건하게 하였다. 이후에는 다시 전차 경기가 열리는 등, 로마시는 토틸라의 치하에서 잠시나마 평화를 찾았다.

한편 사산 왕조와의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되고 재정이 호전되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재개하기로 마음먹고 조카 게르마누스에게 세르디카에서 장병을 모집하여 원정을 준비하게 하였다. 게르마누스는 전 동고트 왕 비티게스의 미망인 마타순타와 결혼해서 동고트 귀족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게르마누스는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인 서기 550년 여름에 병으로 죽었다. 이에 황제는 나르세스에게 2만 5천에 달하는 원정군을 맡겼다.

토틸라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안코나와 크로토네 등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들을 탈환하고, 적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400여 척의 함대를 건조했다. 이들 함대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점령하고 시칠리아를 약탈했으며, 그리스까지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나르세스의 동로마군이 곧 출동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상륙거점으로 예상되는 안코나를 공략하기로 하고 551년 늦여름 시칠리아를 떠나 북상하여 안코나를 포위하였으며, 동고트 전함 47척이 해상 봉쇄에 가담하였다. 남은 3백여 척의 고트족 함대는 동로마 측의 의지를 꺾고 경고를 하고자 에피로스 지방과 이오니아 제도를 습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를 반드시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역효과를 낳았다.

한편, 라벤나의 사령관 발레리아누스는 천혜의 항구인 안코나의 함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달마티아의 살로나에서 나르세스의 본대 도착을 기다리던 베테랑 장군 요한네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위급함을 알리는 서신을 받자마자 요한네스는 휘하의 경험 많고 숙련된 군인들이 배치된 38척의 구원 함대를 파견하였다. 발레리아누스도 라벤나에 배치된 12척의 함대를 직접 이끌고 합세, 동고트 측과 호각을 이루었다. 551년 가을, 50척의 동로마 함대와 47척의 동고트 함대가 세나 갈리카 해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동고트족이 이끄는 갈리선 47척 중 36척이 파괴되었고 기발 장군이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해상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데 성공한 나르세스는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고, 함대가 군대를 따라 베네치아의 강과 석호의 하구를 가로질러 이동했다. 토틸라는 이를 막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으나 모조리 격퇴당했다.

552년 6월 라벤나에 입성한 나르세스는 전력을 재정비하고 병사들에게 밀린 급료를 풍족하게 준 뒤 로마로 진군하다가 리미니에서 농성하는 동고트족의 저항에 부딪쳤다. 하지만 538년에 리미니에서 적에게 포위된 경험이 있던 요한네스의 계책에 따라 비교적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이후 나르세스는 플리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진하다가 552년 6월 말 타기나이 평원에서 토틸라와 마주쳤다. 이때 양측의 전력은 로마군 2만 8천 4백명, 동고트군 1만 3천명으로 2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토틸라는 앞서 구원을 요청해둔 프랑크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 나르세스에게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나르세스가 토틸라에게 항복과 전투 중 하나를 택하라고 알리자 토틸라는 "8일 후에 맞붙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적의 의도를 예측하여 평화 협상을 거부하고 전투를 감행했다. 그는 군대를 부스타 갈로룸 고원의 고지대로 이동시키고 적군의 전진을 기다렸다. 여기에 8천 명 이상의 궁수대를 전방에 초승달 모양의 대형으로 배치했으며, 그 뒤에 보병대를 팔랑크스 대형으로 배치했고, 기병대를 양쪽 측면에 배치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전투에서 승리할 때까지 아무도 대열을 이탈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틸라는 타기나이 평원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는 관례대로 기병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보병대를 후방에 배치했다. 그는 적의 중심을 한 번의 돌격으로 무너뜨리는 작전을 구상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토틸라는 병사들에게 활이나 다른 무기를 사용하지 말고 오로지 창을 들고 돌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토틸라의 아들 테이아가 2,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오고 있었기에, 토틸라는 그들이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로 했다. 그는 로마 진영의 배후를 급습하기 위해 로마 진영의 왼쪽에 위치한 언덕에 기병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미리 언덕에 장창병과 큰 방패를 갖춘 보병대를 배치해 기병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토틸라는 시간을 어떻게든 끌기 위해 평화 협상을 다시 한 번 제의하고 결투를 벌이기도 하고 호위병 하나 대동하지 않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채 말을 몰아 온갖 묘기를 선보이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테이아가 이끈 2천의 지원 병력이 7월 초에 도착하면서 동고트군은 1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즉시 화려한 갑옷을 벗고 전투 갑옷으로 갈아입어서 고트족의 왕으로 주목받지 않도록 하였다. 토틸라는 점심을 먹으러 전열을 이탈하는 듯하다가 적이 방심했을 거라고 판단하고 곧장 돌격했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병사들에게 각자 위치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 궁수들에게 계속 준비하고 있을 것을 지시해놓았고, 덕분에 궁수들은 적 기병대를 향해 가차없이 쏴 전열을 흐트러놨다.

그후 나르세스의 로마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였고 나르세스가 측면에 배치해두었던 기병대를 진격시켜 동고트 군대를 포위했다. 이후 로마군은 포위당한 동고트족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전세가 기울자, 토틸라는 다섯기의 호위대와 함께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추격대가 간격을 점점 좁혀오자, 토틸라는 말머리를 돌려 돌진했고 로마 게피데 용병의 우두머리인 아스바두스의 창에 찔려 전사했다. 그의 주검은 근처의 카프라에 빌라에 매장되었다가 나르세스가 동고트족 여인의 증언에 따라 매장지를 확인 한 후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다시 묻어주었다. 이후 동고트 족은 테이아를 새 국왕으로 세우고 계속 항전했지만, 1년만에 나르세스에게 패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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