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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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2. 일생[편집]
1926년 1월 17일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에서 아버지 정수태(丁洙泰, 1890. 11. 2 ~ 1948. 4. 28)와 어머니 영천 이씨(寧川 李氏, 1888. 8. 12 ~ 1967. 10. 22)[3]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서중학교(19회)를 거쳐 1945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8기로 졸업하고 장교로 짧게 임관했다가[4] 광복 후 1948년 육군사관학교 7기로 임관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사단 참모장으로 참전하였다. 정전이 되고 1954년 육군보병학교 교장을 거쳐 그 해 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5.16 군사정변 후 현역 군인 신분으로 상공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62년 군단장, 1964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1966년 제2군사령관이 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의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1968년 중장으로 예편한 뒤 1970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5] 그러나 1971년 실미도 사건이 일어나자 경질되었다.
1973년부터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9대, 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80년 3월 31일 김종필 총재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곧 5.17 내란을 맞게 되었다. 신군부는 김종필과 김대중을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키고, 국회와 각 당의 당사를 무력으로 점거하여 기존 정치세력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는데, 정래혁은 당시 신군부가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개헌안에 따라 해산이 예정된 공화당의 총재 권한대행과 청산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6] 결국 10월 27일 국보위의 개헌안대로 5공 헌법이 시행되면서 헌법 부칙에 따라 민주공화당이 해산되고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활동 규제가 이루어졌는데, 정래혁은 전두환에 의해 국보위가 개편된 국가보위입법회의의 부의장으로 임명되면서 정치활동 규제를 피하였다. 입법회의는 11월 25일 정당법을 개정하여 해산된 정당의 재산을 유사한 목적의 정당 또는 단체로 기부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하였는데, 이 조항을 통해 정래혁은 12월 10일 민주공화당 청산위원회에서 공화당의 재산을 민주정의당으로 무상양도시켰다.
1981년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제11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83년 3월 국회의장 직에서 물러난 이후 민정당 상임위원으로 있다가 1983년 10월 국무총리가 된 진의종의 뒤를 이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되었다.[7] 중요 직책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정래혁은 야당과의 선거법 협상이 한창이던 1984년 6월 25일 갑작스럽게 민정당 대표위원 직에서 경질되었는데, 이는 민정당과 언론사에 제보된 익명의 투서 때문이었다. 이 투서의 뒤에는 정래혁과 오랜 악연이 있던 문형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 졌는데, 정래혁이 부동산 등 재산 178억원을 투기와 직권남용으로 부정축재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고 부동산등기부등본, 주민등록 사본, 관계 사진 등 치밀하고 구체적인 증빙자료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투서를 전달 받은 민정당과 전두환은 이를 묵살하려 하였으나 투서가 언론에 퍼지자 큰 파문이 일었다. 정부와 여당은 논란에 휩싸인 정래혁을 공직에서 사퇴시키고 여당 인사를 공격한 문형태를 괘씸죄로 구속하고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하였으나, 신고인만 잡아가냐며 여론이 악화되었고 청와대도 이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정래혁은 명목상 여당의 2인자였지만 전두환 정권의 실세는 아니었기에, 자신의 재산 축적에 부정은 없었다는 정래혁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와 여당의 요구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했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민주화 이후 1988년 3월 정래혁은 1984년 기부헌납된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정래혁은 1984년 6월 28일 최영철 의원이 사퇴 성명서의 작성을 강요하였고, 자신은 "하늘에 맹세코 부정에 의한 축재가 아닙니다."라고 성명서를 작성했으나 이후 발표된 성명서에는 이 내용이 빠지고 "본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코자 합니다"라는 내용이 삽입되었으며, 이후 당직자 및 의원들이 번갈아 찾아와 헌납을 강요했고 8월 9일 이상재가 헌납하지 않으면 연행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을 비치자 8월 10일 협박에 의해 할 수 없이 재산을 기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89년 11월 1심에서 재판부가 민정당은 재산을 국가에 기부할 것을 종용하였을 뿐이어서 정래혁의 재산 헌납은 강박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정래혁은 패소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그의 아들 정채하[8] 가 새누리당 후보로 순천-곡성 선거구에 출마하며 힘을 실어줬지만, 2.97%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재보선에서 같은 당에서 당선자를 냈다.
2022년 5월 17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3. 선거 이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관련 문서[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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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25년 12월 4일.[2] 사간공파(司諫公派) 27세 래(來)○ 항렬.[3] 이익신(李益信)의 딸이다.[4]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軍) 부문에 선정되었다. #[5] 일본의 요도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기도 했다. 일본 측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도 그가 등장하는데, 일본어가 능통한 한국 배우 김응수가 연기했다.[6] 이 청산위원회는 민주화 이후 1988년, 신민주공화당 측이 민주정의당을 상대로 제기한 구 민주공화당의 재산 반환 청구 소송 과정에서 해산된 민주공화당 당직자들의 점심 식사 방명록 서명이 청산위원회 참가 서명으로 둔갑했다며 설치의 불법성 논란이 제기되었다.#[7] 당 총재는 전두환 대통령이었으므로 오늘날 여당의 당 대표가 된 것과 유사하다.[8] 육사26기. 20기계화보병사단장 역임.[9] 성북구[10] 담양군·곡성군·화순군[11] 전반기 국회의장[12]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