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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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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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문희상
박병석
김진표

국회부의장 · 임시의정원 의장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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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
제16대 전반기
이상희

제16대 전반기
김형오


제16대 후반기
안동선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영도구)
제13대
김정길

제14-18대
김형오


제19대
이재균[1]




대한민국 제18대 전반기 국회의장
김형오
金炯旿 | Kim Hyong-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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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47년 11월 30일 (76세)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
본관
김해 김씨[1]

임당(林堂)
재임기간
제18대 전반기 국회의장
2008년 7월 10일 ~ 2010년 5월 29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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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지인경
자녀
2녀
학력
고성국민학교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경남고등학교 (졸업 / 20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 / 석사[1])
경남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 박사[2])
병역
대한민국 육군 상병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
신체
170cm, 66kg
소속 정당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4, 15, 16, 17, 18
경력
동아일보 기자
대통령비서실 공보과장
대통령비서실 정무1과장
국무총리비서실 정무비서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제14대 국회의원 (부산 영도구 / 민주자유당)
민주자유당 부대변인
민주자유당 인원위원회 위원장
신한국당 기획조정위원회 위원장
제15대 국회의원 (부산 영도구 / 신한국당)
신한국당 대선기획단 정책본부 공약개발위원회 정치행정분과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정보통신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뉴밀레니엄위원회 정보화위원장
제16대 국회의원 (부산 영도구 / 한나라당)
한나라당 부산광역시 지부 위원장
한나라당 당무위원
제16대 국회 실업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제16대 국회 전반기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개혁특별위원회 정치개혁 분과위원장
한나라당 제17대 총선 공약개발위원장
한나라당 제17대 총선 공동선거대책본부장
한나라당 사무총장
제17대 국회의원 (부산 영도구 / 한나라당)
한나라당 인재영입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원내대표
제17대 대선 이명박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일류국가비전위원장 (정책 공약 총괄)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
제18대 국회의원 (부산 영도구 / 한나라당)
제18대 전반기 국회의장
부산대학교 석좌교수
새누리당 상임고문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
미래통합당 21대 총선 공천관리위원장
롯데문화재단 이사장
제21대 국회 국민통합위원회 공동위원장


1. 개요
2. 생애 및 정치 경력
2.1. 사무총장(2004.3-2005.2)
2.2. 원내대표(2006.7-2007.8)
2.3. 국회의장(2008.7-2010.5)
2.4. 21대 총선 공관위원장
2.4.1. 공관위 출범
2.4.2. 공천 발표
2.4.3. 공천 논란
2.4.4. 공천 쟁점
3. 여담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2. 생애 및 정치 경력[편집]


1947년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에서 태어났다. 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경남중학교에 입학했다. 수학여행도 못 갈 정도로 몸이 약했으며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부산에 오면서 난생 처음 기차, 전차를 비롯한 도시 문물을 접했다. 얼마 후 부모님이 부산으로 이사를 오셔 가족 전체가 부산에서 살게 되었다.[2] 영도에는 고등학교 때 이사를 갔다. 이후 경남고등학교[3]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4]를 졸업하였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다가 강영훈의 권유로 외교안보연구원으로 이직했다.[5] 이후 노태우 정부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등의 관료를 역임하였다.[6]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당 김정길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5년까지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역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새누리당 상임고문이었으나 160525 한겨레 기사에 의하면 20대 총선 얼마 전이었던 2016년 3월에 새누리당을 탈당했고, 부산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파일:김형오1.jpg


국회의장 퇴임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을 다룬 소설 술탄과 황제를 집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스 11세의 심리 묘사와 현대에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는 본인의 심정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저술되었다.

또한 친정인 자유한국당지방선거에서 대참패 이후, 기사 인터뷰나 의원 연찬회에서 한국당의 문제점을 꼬집으면서 비판했다.

21대 총선 자유한국당(이후 미래통합당) 공천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총선용 임시 TF의 장을 맡은 것이긴 하지만, 2016년에 당을 떠난 후 거의 4년 만에 친정에 다시 돌아온 셈이다.

2020년 3월 8일 기준, 미래통합당 공천이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공천된 후보자들을 보면 친박이 많이 줄어들었고 옛 바른미래당새로운보수당 출신(친유친안)이 약진했다고 한다. 탈당복당 경력은 공천에서 걸림돌이 거의 되지 않았다. 또 친박과 비박이 혼재한 친황계도 상당수가 공천을 받았다. #

하지만 공천을 둔 논란이 커지자 사퇴를 선언했다. 결국 미래통합당은 21대 총선에서 참패했고, 공천 관련 잡음과 불협화음이 선거 참패 이유 중의 하나로 분석되고 있다.


2.1. 사무총장(2004.3-2005.2)[편집]


2004년 3월 말 17대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역풍이 불자 한나라당박근혜 대표 체제로 긴급히 전환했다. 박 대표는 여의도 중소기업박람회장 부지에 천막당사를 설치하면서 김형오를 17대 총선 선대본부장 겸 사무총장[7]으로 발탁했다. 천막 3동과 컨테이너 9개동으로 만든 천막당사의 사무총장이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은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획득함으로써 비록 제2당이었지만 기사회생했고 이어 6.5 재보선에서 광역자치단체장 4석 중 3석을 차지했다. 이후 당 사무처 구조조정을 거쳐 84일 간의 천막당사 시대를 마감하고 염창동 당사 시대를 열었다.


2.2. 원내대표(2006.7-2007.8)[편집]


2006년 7월 김무성 의원과 경선을 통해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당선된 뒤, 1년의 임기를 다 채우고도 2개월 더 함으로써 최장수 원내대표를 기록했다. 원내대표로 있는 동안 안건처리건수는 1,716건, 안건처리율은 78%를 기록했다. 이로써 '발목잡지 않은 야당'이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 7월 치열한 쟁점법안으로 1년 이상을 끌어왔던 사학법, 로스쿨법, 국민연금법 등 3대법안을 여야합의로 일괄 타결하였다. 2006년 11월 헌법위반으로 여야가 대립했던 전효숙 헌법재판소 소장 임명파동에 대해 임명철회를 관철시켰다.

2007년 2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잃어버린 10년' 을 제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3. 국회의장(2008.7-2010.5)[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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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시·과천시 지역의 4선 중진인 안상수 의원[8]을 당내 경선에서 꺾고 18대 국회 전반기 의장에 선출되었다.

여야합의를 고집하다가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과 야당인 민주당에 협공을 받고 임기내내 시달렸으나 끝까지 중재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2008년 9월 추경안 처리를 절차상의 하자(정족수 미달)로 거절하자,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2008년 연말 한나라당으로부터 85개 법안을 직권상정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고 이듬해 3월 여야합의로 처리하는 뚝심을 보였다. 한편 2009년 7월 미디어법을 직권상정, 강행처리하여 민주당으로부터 헌재에 제소당하기도 했다. 2009년 연말 2010년도 예산안 통과를 위해 사흘간 의장석을 사수하여 처리했고 당시 추미애 환노위원장이 의결한 노조관련 법안도 강행처리했다.

이때 한나라당+친박연대+자유선진당+친여 무소속 의원들을 합친 범보수 의석수가 개헌선인 200석을 뛰어넘을 정도여서, 국회공성전으로 고생을 많이 하던 국회의장이기도 했다. 진보쪽(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친야권 무소속)은 의석수 적은 야당 무시하냐며 항의, 보수쪽은 우리가 다수당인데 무시하냐며 항의...했었다.

국회의장 당선 직후에 현행 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여 불행한 대통령을 배출할 수밖에 없다며 개헌론에 불을 지폈다. 이어 헌법연구자문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야인으로 있던 김종인을 위촉, 헌법에 대한 연구와 준비를 추진하였으나 개헌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2.4. 21대 총선 공관위원장[편집]



2.4.1. 공관위 출범[편집]


황교안 대표는 2020년 1월 17일 김형오를 21대 총선 공관위원장으로 위촉하면서 공관위원 구성을 포함, 활동 전반에 전권을 주었다고 밝혔다. 이날 김 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저는 이 자리가 감투라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죽을 자리를 찾아 왔다"며 각오를 밝힌 뒤, 21대 공천은 물갈이가 아닌 '판갈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긴장감을 높였다.# 이후 1월22일 공관위원 8명 명단을 발표하면서 당과 상의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며 계파에 의한 나눠먹기 공천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으나 이석연과 김세연에 대한 찬반 양론은 여론을 뜨겁게 만들었다.#

초반에는 계파 없는 공정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김 위원장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고 공천과정이 진행되면서 여론의 평가도 후했다.# 특히 조용한 행보 속에 홍준표와 김태호를 직접 찾아가 설득하기도 하고, 김성태 의원을 필두로 불출마 선언을 유도하는 등 합리적이고 인격적인 접근으로 '스텔스 공천'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반발도 거세졌다. 최고위원 중에서도 공천 탈락자가 나오고, TK와 PK지역 모두 50~60%의 탈락자가 나오자 당 최고위가 탈락자의 불만성토장이 되고, 소통채널이 제한됨으로써 공관위는 점차 고립되었다. 특히 대구 경북지역 의원들은 황 대표에게 "TK가 (당의) 식민지냐", "컷오프 비율을 정해놓은 것은 TK 모멸이다" 등 수위 높은 항의를 쏟아냈다.#


2.4.2. 공천 발표[편집]


공관위의 1차적 과제는 황교안 대표의 지역구 선정 문제였다. 이미 황 대표는 자신의 지역구 결정을 전적으로 공관위에 맡긴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당 대표의 지역구 결정은 총선 승리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여러 대안을 놓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으나 여론은 종로를 선택하여 정면승부를 하라는 주문이 강했다. 결국 2월 7일 황교안 대표는 지역구를 종로로 선택, 출마 선언을 하면서 이낙연이 아니라 문재인과 싸울 것이라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종로를 진앙으로 하는 야당 바람은 미미했고 그 결과 초라한 총선 성적표로 귀결되었다.

공관위의 1차 목표는 수도권 승리였다. 간판급 선수들을 선봉장에 배치하고 인적 쇄신을 통한 참신한 정치인을 발굴, 야당 바람을 지속 가능하도록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황교안과 오세훈, 나경원만 등판했을 뿐, 안철수는 야당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고 유승민은 불출마 선언, 홍준표는 고향을 고집한 끝에 대구 수성구 을에 무소속 출마함으로써 야당바람 전략은 위기를 맞았다.

또한 야당이 된 후 인물난이 심화되면서 정치신인도 대폭 감소했다. 물갈이는 여론의 지지를 토대로 밀어부칠 수 있지만 새 인물을 채우는 것은 난제 중 난제였다. 공관위는 그동안 정치신인에게 불리하다고 알려진 가산점제도를 폐지하고 기본점수를 주는 획기적인 제도를 도입했으나# 현실의 벽은 녹록치 않았다.

여전히 중도외연 확장에 대한 여지는 있었다. 새보수당, 전진당, 사회단체에서 인물들이 들어왔고 국민의당에서도 막판 무더기로 합류했다. 이러한 통합의 취지에 대해 기존 한국당 인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통합공천의 결과 후보자는 다양해졌고 젊어졌으며 스펙트럼 또한 넓어졌다. 하지만 중도확장의 상징이라고 여기고 과감히 영입한 강남구 병김미균 공천은 논란을 빚고 급기야 철회하는 소동을 겪으며 외연확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시대의 강'을 건너자며 주장했던 시대청산, 계파해체, 중도확장은 성과는 있었지만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김형오 위원장은 3월11일 기자회견을 통해 현역의원 과반 이상을 교체할 정도로 물갈이에는 성공했지만 그만큼 새롭고 경쟁력있는 인물을 충원하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럼에도 공천 자체는 역대 선거에 비해 내용적인 면에서 개혁성이 두드러졌다. 현역 교체율이 46.3%로 총 108명 의원 중 50명을 교체, 역대급 교체율을 기록했다. 김재섭, 김병민 등 청년 공천은 25명으로 20대의 16명에 비해 대폭 늘었다. 20대 청년 김용태광명시 을에 공천을 받았고 대구 출신 천하람이 전남 순천에 도전장을 내는 등 패기와 도전이 눈에 띄었다. 지역구 여성 공천도 24명으로 20대의 13명에 비해 거의 배로 늘어났다. 총 237명 공천자 중에서 한 번도 입후보하지 않은 정치 신인이 무려 101명이나 되었다.

특히 윤희숙을 발굴해 서초구 갑에 출마하도록 설득한 사람 중 한 명이 김형오였다. 이인실 공관위원, 나성린 전 의원까지 붙어서 비례대표로 출마하려던 윤희숙을 지역구에 출마하도록 설득했고, 결국 윤희숙은 이들의 설득 끝에 서초구 갑에 출마했다.


2.4.3. 공천 논란[편집]


공천 과정은 초반엔 순조로웠으나 막판으로 갈수록 이상하게 흘러갔다. 사천 논란과 돌려막기 공천으로 여론이 점점 나빠지더니 급기야 최고위원회의 공천 뒤집기로 막장 공천이라는 오명까지 얻게 되었다. 공천의 절차적 정당성이 혼돈에 빠지며 결과적으로 중도 확장과 혁신 공천이라는 의미와 내용은 묻혔고 물건너 갔다. 언론에 지적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막판 공천 뒤집기 논란
김 위원장이 3월 13일 김미균 공천철회 사태를 책임지고 물러나자 희한한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최고위원회가 공천을 무효화시키는 이례적 자충수를 두었다. 무려 6건의 공천을 무효화[9]시켰다. 그것도 3월25일 후보등록 하루 전에 4건의 무효를 가결, 전대미문의 막장드라마를 연출했다.#

당헌당규상 공천후보자의 최종 결정은 최고위원회가 가지고 있지만 공관위가 최고위의 재의요구안을 다시 3분의 2로 가결하면 최종효력을 공관위가 가지게 된다. 최고위원회의 정치적 간섭을 막자는 취지다. 당시 규정은 "다만 후보자로 확정되었더라도 불법선거운동이나 금품수수 등 현저한 하자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을 경우에는 최고위원회의의 의결로 후보자추천을 무효로 할 수 있다."[10]이다. 이것은 경선과정에서 돈살포나 불법을 저지른 범법행위가 나중에 드러났을 경우를 상정한 규정이다. 예외적으로 최소로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도 최고위원회가 정략적으로 남발하는 통에 각계의 비난이 쏟아지고 여론이 싸늘해졌다. 불과 후보등록 하루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 돌려막기 공천 논란
돌려막기 공천은 계파간 나눠먹기 공천의 산물이다. 특정 지역구에 특정인을 공천하면 그 지역의 경쟁 후보자를 다른 지역에 배려해 서로 나눠먹기식으로 공천을 하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공관위원들이 실력자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것이 아니라 완전 독립적 활동이 보장된 상태였다. 더구나 야당의 인물난은 심각했다. 인물난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권역별로 돌려막기가 아닌 유력 인물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야당바람과 당선가능성을 높이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당의 간판급 인물과 광역단체장 출신 등 중진은 험지에 출마할 것을 요구받았다.

결과적으로 황교안-종로구, 김병준-세종시 을, 오세훈-광진구 을, 유정복-남동구 갑, 안상수-동구·미추홀구 을, 정우택-청주시 흥덕구, 서병수-부산진구 갑, 주호영-수성구 갑으로 출격했고, 끝까지 험지를 거부한 홍준표김태호는 공천에서 배제되었다.

  • 사천 논란
이번 공천은 특이하게도 공천 때마다 단골메뉴였던 계파간 나눠먹기, 밀실공천, 짜고치기, 살생부 같은 구시대적 용어가 사라졌다. 대신 3월 초부터 사천논란이 유튜브와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컷오프와 물갈이가 영남권을 향해 달려가던 시점이다.

공관위는 공정한 심사를 위해 외부와 소통울 철저히 차단했다. 한 인터넷 언론에 최홍은 사천이라는 가사가 떴다. 잇따라 배준영, 황보승희도 사천이라고 도마 위에 올랐다. 때를 만난듯 일제히 공관위의 정당성을 비난했다. 이에 김형오가 "택도 없는 소리”라며 “사천은 보스 정치의 산물인데 나는 1주일 후면 시민으로 돌아갈 사람”이라며 일축했지만 사그러들지 않았다.#

최홍은 유능한 경영인으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나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 황보승희는 김형오의 비서 출신으로 구의원에 진출했으나 그 이후 김무성과 탈당과 입당 등 정치역정을 함께 했으며 지난 지방선거에서도 영도구청장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에 고전했으나 최종승리했다.

인천의 배준영[11]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아 2% 이하의 득표 차이로 아슬하게 낙선한 경험이 있는 기성 정치인으로 이미 지역구에서 유력한 후보였다. 이번에 인천에서 유일하게 당선되었다.

결과적으로 김형오 사천이라고 알려진 인물은 세명이었는데, 이 중 두명 출마하여 모두 당선되었다.


2.4.4. 공천 쟁점[편집]


  • 컷오프 쟁점
경남에서 홍준표 전 대표를 공천탈락시킨 것은 발표 당시나 선거 후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당대표를 두번 지내고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사람이 고향(경남)을 고집하는 것은 지도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주장과 그래도 마지막 정치역정을 불태워 양산에서 김두관과 싸우겠다는 기회는 줬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대구(수성구 을)에서 무소속 당선되었고 정작 양산시 을에서는 김두관이 승리하였다 공천의 결과로 의석 하나만 잃은 꼴이 되어 후자가 타당했다는 논리가 힘을 받고 있다. 반면에 양산시 을은 김두관 후보가 홍에 비해 경쟁력이 높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경선으로 공천된 여성 후보를 꺾기 위해 대구에서 출마한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TK 지역 공천까지 발표된 시점에서는 김재원 같은 친박 중진이나 정태옥, 김순례 등의 막말 전력이 있는 의원들을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 잘라내었기에, 젊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경우 중도층에 외면받던 주 원인들을 많이 쳐냈다는 호평을 하기도 한다. 진보 성향의 한겨레에서도 미래통합당 공천학살 숨은 코드는 '막말 정치인 퇴출'이라는 기사를 내 기대감을 나타냈을 정도이다.

  • 태영호 공천
고위직 출신의 탈북자 태영호강남구 갑에 공천한 것도 논란이 되었다.[12] #

당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통합당 태영호 공천은 '국가적 망신'이며 태영호 그 사람은 강남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남한에 뿌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며 태영호를 비례로 공천할 것을 요구했으나 당에서는 "우리 국민과 전 세계에 북한의 적나라한 실상을 널리 고발해온 인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

김형오 공관위원장은 태영호를 영입하며 1,000만 이산가족의 한과 2,500만 북한 동포의 인권을 대변하고, 국제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을 당당하게 알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지역구에 출마해 당당히 유권자의 심판을 받겠다는 그의 용기와 결단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희망을 준다며 그 의미를 강조했다.#

  • 김미균 공천
강남구 병으로 공천 확정된 김미균 후보가 문재인 전 대통령의 핀란드 순방에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했고 과거 소셜미디어에 문재인 전 대통령의 추석 선물을 받고 감사하다는 표현의 포스트를 올려서 논란이 된 것. 이후 2017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본인 회사에 방문한 것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알린 것도 추가로 논란이 되었다.

결국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자 김형오는 김미균에 대해 전략 공천을 철회하고, 김미균 공천에 책임을 지고 공관위원장직에서 사퇴하였다.[13] #

결국 공천작업을 주도한 공관위와 당지도부 간 공감대 부족, 여론에 대한 공관위의 전략과 대응 미흡, 영남권을 중심으로 공천 탈락자들의 반발에 대한 방관 그리고 최고위원회의 막판 뒤집기 등이 복합적으로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3. 여담[편집]


어릴 적 건강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한 번 밖에 나가 놀면 몸살에 걸려 집에 계속 있다 나으면 밖에 나가 왕창 놀다 또 몸살 앓는 것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만 있는 시간이 많아 집에 있던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이게 독서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책을 많이 읽는 행동이 이후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술탄과 황제란 책을 집필했는데, 이 때 집필 준비를 위해 몇개월간 관련 도서를 수백 권이나 읽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죽을 뻔한 적이 있다고 한다. 비염이 심해 부산에서 잘한다는 이비인후과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잘못 돼 두 콧구멍을 비롯 눈, 귀에서까지 피를 쏟아내는 의료사고로 62kg이던 몸무게가 43kg으로 줄어들고 꼬박 4달 간 학교를 못 갔다고 한다.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으로 강영훈, 최창윤을 언급했다. 강영훈은 김형오가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시절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외교안보연구원으로 오라고 권유했으며, 이후 총리로 지낼 때 김형오가 총선 출마를 위해 영도구를 지역구로 선택했으나 당내 문제가 있어 어려움을 겪을 때 김영삼을 만나 김형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줘 영도구를 지역구로 출마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14] 최창윤은 김형오가 정무비서관으로 있을 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이었다. 또한 70 ~ 80년대에 만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신사적인 사람이었고 사람을 막 대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인상깊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영도구에서만 5선을 하면서 터줏대감 정치인으로 자리 잡았지만, 의외로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과반을 밑도는 득표율을 기록하고, 심지어 4선 성공을 했던 17대 총선 때는 약4%차(2560표차), 5선 성공을 했던 18대 총선 때는 고작 1000여 표차도 안 되는 힘든 당선을 했다.

친이계 중진답게, 2022년 1월 24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전직 국회의원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

2022년 2월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을 한 대한민국 헌정회원 중 316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영도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41,922 (41.34%)
당선 (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39,849 (42.13%)
재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46,562 (53.42%)
3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39,235 (48.37%)
4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4,426 (43.46%)
5선[15]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2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82 - 1990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입당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97 - 2008
합당[16]

[[무소속|
무소속
]]

2008 - 2010
국회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0 - 2012
복당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6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16 - 2020
탈당

[[자유한국당|
파일: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복당

[[미래통합당|
파일:미래통합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합당[17]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2020 - 현재
당명 변경


6. 둘러보기[편집]














[1] #[2] 부모님은 영도로 이사한 이후 평생 사셨다고 한다. 국회의원 출마 할 때 영도를 지역구로 택한 이유도 이 때문.[3] 20회 졸업생이며 양승태대법원장과 동기다.[4] 서울대학교 태권도부 출신이다.[5] 유신정권 시대 언론이 위축된 상황이라 탈출구가 필요했다.[6] 이 때 정무수석비서관최창윤이다.[7] 당시 부본부장을 맡은 자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었다.[8] 이후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다시맡고, 대표최고위원을 거쳐 민선 6기 경상남도 창원시장을 역임했다.[9] 강남을, 부산 북강서을, 부산 금정, 경기 화성을, 경기 의왕과천, 경북 경주 등으로 인천 연수을은 공관위에서 무효요청했으나 최고위가 거절했다.[10]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자추천 규정 제30조 3항이다[11] 중구·강화군·옹진군에서 출마했다.[12] 과거 탈북자 출신인 조명철19대 총선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뱃지를 단 사례가 있지만, 조명철 의원은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았었다. 탈북자를 지역구에 공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13] 그런데 정작 김형오 공관위원장과 이석연 부위원장은 민주당 접촉 이력을 들어 꺼렸는데, 김세연 전 의원 등이 "이 정도 인사는 포용력 있게 받아주는 당이 되어야 한다"며 적극 밀어붙였다고 한다. #[14] 왜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아닌 김영삼을 찾아갔냐고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그 당시 3당 합당에 따라 노태우와 김영삼이 같은 여당 민주자유당 소속이었고, 정권 말이었던 데다 김영삼이 유력 대권 후보로 꼽혀 부산에서 영향력이 제일 강했기 때문이다.[15] 전반기 국회의장.[16]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7]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