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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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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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양일동
梁一東[* 梁一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으며, 1971년을 전후하여 梁東으로 개명했다.]


파일:양일동 총재.jpg

출생
1912년 12월 30일
전라북도 임피군 동이면 장곶리
(현 전라북도 군산시 서수면 마룡리 하장곤마을)[1]
사망
1980년 4월 1일 (향년 67세)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자택
묘소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2]
본관
남원 양씨[3]

현곡(玄谷)
학력
중동중학교 (제적)
베이징 민탁고급학교 (졸업)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3, 4, 5, 8, 10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독립운동 시절 김구의 제자로 활동한 후 정치에 입문하여 1980년까지 반공법 등의 제재로 원활하지 않은 정치 생활 끝 5선 의원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뜻을 같이한 동지로는 민주화 운동 당시 장준하, 김대중 등이 친한 편이었고 윤보선, 김영삼, 문익환 목사 등 여러 재야 인사들과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신민당유진산 체제였을 시절, 기존의 타협적인 당의 태도에 반발하는 의원들을 이끌고 선명야당을 위시하여 민주통일당, 즉 제3야당을 창당하여 독자 노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1965년 양일동 본인이 반공법으로 구속된 적이 있을 정도로 거침없이 국회의원을 탄압하고 반정부 행위를 탄압하는 이중에 선명야당을 위시한 민주통일당을 가만둘 리 없었기에 많은 고초가 뒤따랐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령 윤보선은 박정희와 대통령 선거전을 할 당시 ‘남로당 출신 박정희는 뒤에서 비겁하게 행동하지 말고 남자답게 나와 주먹으로 대결을 하자’라고 말했을 정도로 박정희에게 격분하여 막말을 한 적도 있다.

박정희 정부시절 독재 타도를 외치며 제3야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2. 생애[편집]


1912년 12월 30일 전라북도 임피군 동이면 장곶리(현 군산시 서수면 마룡리 하장곤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동중학교 재학 중이던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시위를 주도했다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같은 해 3월 오재덕(吳在德)·이영욱(李永昱)과 함께 중화민국 베이징시로 건너가 백정기·정내동(丁來東) 등과 접선, 교류하게 되면서 무정부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졸업 후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그는 1931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그해 4월 한하연(韓何然)·최낙종(崔洛鍾)·정찬진(丁贊鎭) 등의 동지들과 함께 흑우연맹(黑友聯盟)이 주관하는 『흑색신문(黑色新聞)』의 편집위원에 선임되어 무정부주의 사상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으며, 1932년 9월에는 마찬가지로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에 가입하였다.

1933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시 소재 민탁고급학교(民鐸高級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5월 오우영(吳宇永)·이윤희(李允熙) 등 일본 소재 무정부주의 단체 대표들과 연합하여 반파시즘·반제국주의·반(反)실업 등을 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1934년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상하이 소재 무정부주의 단체였던 남화한인청년연맹유자명(柳子明)·정현섭 등에게 『흑색신문』·『토민(土民)』·『무궤도열차(無軌道列車)』 등의 출판물을 부치면서 연계투쟁의 방안을 모색하였고, 이즈음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처단미수사건으로 백정기·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 등이 일본에 압송되자 이들의 구호활동에 힘썼다.

그 뒤 그는 조선동흥노동동맹의 기관지인 『뉴우스』의 발행인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1935년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3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며, 1935년에는 전단물을 가지고 일본에 가던 중 그해 11월 3일 일본의 공항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일본 이치타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2년 8개월만에 가석방되고, 고국으로 압송되어 귀환한 뒤에는 줄곧 농촌운동과 농민교육에 종사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이승만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였는데 우익에 소속되었다.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에서는 야당계 무소속으로 제3대,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주당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제2공화국 때는 민주당 소속으로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0년 12월 14일 다른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에 몸담았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정치규제에서 풀린 이후에는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진산 파동 때 범 유진산계였다가 따로 자신의 계보를 만들면서 유진산과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1973년 김홍일 등과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그 해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중선거구제 하에서 신민당 정운갑 후보, 민주공화당 민병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제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79년 5월 선명야당 노선을 내세운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자 신민당과 함께 반 유신정권 투쟁에 동참하였다.

그러다가 10대 국회 임기 중이던 1980년 4월 1일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자택[4]에서 심장마비별세하였다. 그의 별세로 소속의원들과 당직자들의 잇따른 탈당으로 인해 존립마저 위태로워진 민주통일당은 사실상 와해되어 버렸으며, 얼마못가 5.17 내란으로 강제해산 된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제2공화국삼김시대에서는 정상철이 맡았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옥구군)

[[무소속|
무소속
]]

5,328 (11.24%)
낙선 (3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옥구군)
14,663 (30.37%)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옥구군)
26,262 (52.41%)
재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옥구군)


30,786 (61.63%)
3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구 갑)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47,593 (59.26%)
4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구)

파일:민주통일당.svg

66,372 (24.84%)
낙선 (3위)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구)
78,647 (30.77%)
당선 (2위)
5선[5] [6]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

1933 - 1935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35 - 1945
탈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

1945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45 - 1960
정당 해산


1960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6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민당(1960년)|
파일:신민당1960글자.png
]]

1960 - 1961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61
정당 해산

[[민정당|
]]

1963 - 1965
창당

[[민중당(1965년)|
파일:민중당(1965년) 흰색 로고타입.svg
]]

1965 - 1966
합당[7]

[[무소속|
무소속
]]

196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민주사회당(1966년)|
민주사회당
]]

(
[[무소속|
무소속
]]
)
1966 - 1967
창당준비위원회

파일:대중당 글자.svg

1967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67
신당 합류를 위한 탈당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1967 - 1969
입당

1969
자진 정당 해산

1969 - 1973
정당 재등록

197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73 - 1980
창당
별세


6. 둘러보기[편집]









[1] 남원 양씨 이조판서공파 집성촌이다.[2] 매년 4월1일 추도식을 진행한다.[3] 이조판서공파.#[4]중구 흥인동[5] 신민당 김제만 후보와 동반당선[6] 1980.04.01 임기 중 별세[7] 민주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