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화한인청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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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되었던 무정부주의운동단체. 일본의 폭력과 독재를 저항하는 급진적 독립운동을 추구했다. 따라서 의열단과 유사한 무력 투쟁이 주요 활동이었으며, 자금 조달과 선전 활동도 벌였다.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1929년에 만주 북부 지역에서 이회영의 영향을 받아 결성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상하이로 철수하면서 개편하여 발족한 단체이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김좌진은 1930년 1월에 피살되었고, 상하이로 옮겨온 남화한인청년연맹에는 장도선, 정화암, 정해리, 안공근 등이 참여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자본주의사회의 기구를 근본부터 타도하고, 일체의 권력과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며, 상호부조・자유연합의 정신에 기초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창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① 우리들의 일체 조직은 자유연합 원리를 기본으로 한다 ② 일체의 정치적 운동과 노동조합지상운동을 부인한다 ③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한다 ④ 위도덕적(僞道德的) 종교와 가족제도를 부인한다 ⑤ 우리들은 만인이 절대적으로 자유 평등한 이상적 신 사회를 건설한다” 등의 강령을 제정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유자명을 의장 겸 대외책임자로 선출하고, 산하에 남화구락부를 설치하여 선전 작업을 담당케 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연구・토론 등 각종 회의를 개최하여 아나키즘 이론을 연구하였으며, 각종 기념일에는 격문을 살포하여 재 중국 한국인 청년들에게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등 일반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오면직은 이용준, 백정기, 이달, 김지강, 엄형순, 이규창, 박기성 등과 함께 1931년 12월경부터 1932년 3월 하순경까지 상하이 시외 난시앙 입달학원 부근의 독립가옥에서 동거하면서 아나키즘연구회를 개최하여 아나키즘을 연구하였다.

1931년 11월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와 연대하여 항일구국연맹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정화암과 김구의 분화로 일부 맹원이 탈퇴하고, 흑색공포단의 백정기 등 핵심 인물이 체포되었으며 남은 이들도 상당수가 군사 훈련을 위해 황포군관학교 등에 입학하면서 1930년대 중반 이후 활동이 침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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