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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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도암(道岩)이다.
2. 생애[편집]
1908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29년 일본 토요대학 1학년 때 중퇴하였다.
1952년 용산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1953년에는 경인합동음료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전국청량음료공업협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황성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당 황성수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 신파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61년 장면 내각에서 내무부 차관에 임명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임명된지 보름만에 물러났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당 서민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뒤 신민당 중앙상무위 의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1월 신민당 정치훈련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치러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승환과 복수 공천을 받아 서울특별시 용산구-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신민당 부총재가 되었다. 1974년 8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정일형 등이 창설한 계보인 화요회에 가입하였으며 비주류가 되었다. 그리하여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때는 신도환, 고흥문 등과 함께 이철승을 지지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노승환과 복수공천을 받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본인은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정계 은퇴 뒤 1979년에는 신민당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81년부터 1986년까지 강동국제청과회장을 지냈다. 이후 1986년에는 국회의원동우회 부회장도 역임하였다.1988년에는 민주화합추진위 민주발전분과위장을 맡았으며, 1989년부터 1995년까지는 헌정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95년 헌정회 회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5월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선거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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