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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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9-11대 국회의원
신상초
申相楚 | Shin Sang-cho


파일:external/rokps.or.kr/760.jpg

출생
1922년 12월 15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대성동
사망
1989년 2월 26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삼호가든아파트 B동 601호
학력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쿠오카고등학교 (문과 병류 /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 중퇴)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5, 9, 11
경력
동아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논설위원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위원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한양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교수
경희대학교 교수
북한학회 회장
한국반공연맹 이사장
최종 당적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법학자, 언론인, 정치인이며 본관은 평산(平山)[1][2], 호는 월강(月崗)이다.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2. 생애[편집]


1922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고등학교[3] 문과 병(丙)류[4]를 졸업한 뒤, 194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1944년 일본군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가[5][6][7] 팔로군 지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조선의용군에 편입되어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때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마오쩌둥정풍운동을 직접 몸으로 겪기도 하였다.

1946년 초 조선의용군을 이탈하여[8] 고향으로 귀환하였다가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강제노역 생활을 하였다.[9] 1949년 초 월남하였고 이후 반공주의자가 되었다.[11] 안타깝게도 월남하는 과정에서 두 아들과 아버지를 이북 땅에 놓고 온 바람에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12]

이후 서울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한양대학교·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편,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사상계 편집에 참여하는 등 언론인으로도 활동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사실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석 달 뒤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었다...

1966년 동양방송에 출연해 삼성그룹사카린 밀수 사건을 옹호하다가 물의를 빚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반박정희에서 친박정희 성향으로 정치성향이 바뀌는 행보를 보인다.[13]

1970년 김지하의 오적 필화 사건 때에는 검찰측 증인으로 나서서 오적은 공산주의 문학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10월 유신 이후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제2기 및 제3기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80년에는 전두환의 신군부에 협력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역임하고,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4~1988년까지 북한학회 회장, 1985년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맡았으며, 1989년 2월 26일 오후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0[14]

[[무소속|
무소속
]]

10,289 (19.94%)
낙선 (2위)

1961
1961년 재보궐선거
서울 13[15]


9,785 (44.90%)
당선 (1위)
초선[16]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17]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16,264 (22.60%)
낙선 (2위)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6[18]

파일:민주당(1967년) 로고타입.svg

13,439 (14.69%)
낙선 (3위)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유신정우회|
파일:유신정우회_한글로고.svg
]]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당선
재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3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5,776,624 (35.60%)
당선 (26번)
4선

4. 둘러보기[편집]




파일:유신정우회_한글로고.svg 제9대 국회 전국구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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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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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최영희
최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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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수
함재훈
함종빈
허무인[A]
현오봉
황창주
송효순 [C]
김충수 [C]
이승복 [C]
남상돈 [C]
[B] 임기 중 사퇴.[A] A B 임기 중 사망.[C] A B C D 승계.




파일:유신정우회_한글로고.svg 제9대 국회 전국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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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종
이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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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식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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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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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구
정일영
정재호
주영관
지종걸 [B]
최영철
최영희
최우근
한태연
함명수
현오봉
변우량 [C]
마달천 [C]
[B] A B 임기 중 사퇴.[C] A B 승계.




파일:유신정우회_한글로고.svg 제10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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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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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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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식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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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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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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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헌
최영희
최우근
최태호[B]
태완선
한기춘
한옥신
한태연
함명수
현기순
고귀남 [C]
남재한 [C]
이호동 [C]
김유복 [C]
[A] 임기 중 사망.[B] A B C 임기 중 사퇴.[C] A B C D 승계.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1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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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6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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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김기철
~~~~
송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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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정원민

김정호

윤석순

김종호

최상업

황병준

류근환

김용수

박태준

박경석
----
이우재

이춘구

김현자
~~~~
정순덕

배성동

김사용

이건호

신상초
----
오제도

김윤환

정희채

김춘수

박현태

이양우

박종관

고귀남
~~~~
나웅배

김집

지갑종

허청일

이상선

손춘호

정시채

안교덕

최낙철

김모임
~~~~
이헌기

이윤자

이민섭

이영희

김종인

박원탁

이상희

이영일

이경숙

조남조
~~~~
김행자

이낙훈

김영구

황설

하순봉

곽정훈

전병우

정창화

문용주

김유상

장경우

유수환

김지호
~~~~
이성재

강창희

이성배
민주한국당

24석

~~~~
유옥우

이태구

김문석

황산성

양재권

정규헌

손태곤

신재휴

이정빈

김진기

이중희

연제원

최수환

서종렬

손정혁

김노식

이의영

조주형

강원채

이윤기

윤기대

이홍배

김형래

김덕규

이용곤

한국국민당

7석


김영광

이필우

노차태

조정구

김한선

김유복

강기필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50%; text-align: right; font-size: .8em;"
제12대




파일:민주정의당 심볼.svg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제11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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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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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춘호
정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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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철
김모임
이헌기[B]
이윤자
이민섭
이영희
김종인
박원탁
이상희
이영일
이경숙
조남조
김행자[A]
이낙훈
김영구
황설
하순봉
곽정현
전병우
정창화[C]
문용주[C]
김유상[C]
장경우[C]
류수환[C]
김지호[C]
이성재[1]
강창희[C]
이성배[C]
[A] A B 임기 중 사망.[B] A B C D E 임기 중 사퇴.[C] A B C D E F G H 승계.[1] 승계 전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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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5세손 동(東) 상(相) 영(榮) 주(柱) 항렬[2] 회고록 <탈출>에 따르면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할 때 본관인 평산에서 따와서 평산을 일본식 훈음으로 읽은 히라야마(平山)를 성씨로 정했다고 한다. 1942년 도쿄제국대학 재학생 명단과 일본군 유수명부에는 히라야마 마사오(平山正生)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있다.[3] 현재는 규슈대학에 합병[4] 이 당시 일본의 구제고는 반을 편성할 때 학생들의 외국어 선택 여부에 따랐는데 갑(甲)류는 영어, 을(乙)류는 독일어, 병(丙)류는 프랑스어 선택자로 구성이 되었다. 이 중 신상초 본인은 프랑스어를 학교에서 배울 외국어로 선택해서 문과 병류 소속 학생이 된 것. 여담으로 이 당시 배웠던 프랑스어를 활용해서 해방 이후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5]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같은 신의주고보 출신이자 훗날 고려대 총장이 되는 김준엽과 만나 우정을 쌓았다. 신상초도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무사히 원하는 대로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한 김준엽과 달리 이쪽은 어떻게 꼬여서 조선의용군쪽으로 넘어간 케이스. 사실 김준엽은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전에 중국 국민당계열의 유격대에 포획되었는데 이게 신의 한수가 된 것이다. 반면 신상초는 탈출하고 나서 중국 공산당계열의 팔로군에 합류를 하게 된 건데 여기서부터 스텝이 제대로 꼬여버린 것.[6] 이 사람의 회고록 <탈출>을 읽어보면 일본군에 합류하기 전부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오게 할 정도로 온갖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한걸 알 수 있다. 도쿄제국대학 유학시절에는 치안유지법 혐의로 50일동안 유치장에 갇혀버리질 않나, 고등계 형사의 압력때문에 강제로 학병에 지원하질 않나, 일본군에 합류하고나서는 관심병사로 찍혀서 온갖 가혹행위의 피해자가 되질 않나, 직속 상관이 민간인 중국 여성들을 학살하고 강간하는 꼴을 보질 않나... 게다가 탈출 이후에도 개고생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 그의 고보동창 김준엽이 츠카다 부대에서 동대학 선배를 상관으로 만나 비교적 심한 고생을 안 겪고 탈출도 잘 풀린 것과 비교된다.[7] 여담으로 일본군 복무시절의 행적이 기록된 일본육군전시명부에 따르면 탈출 전에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서 을종간부후보생이 되었다고 한다. 유수명부에는 일등병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8] 조선의용군은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다. 수기에 따르면 만주까지 도보로 행진해서 고향을 바로 눈앞에 두고있었으나 이당시 3.8선 이북을 점령하고있던 소군정이 조선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바람에 만주땅에 계속 발이 묶여있었다고 한다.[9] 회고록 <탈출>에 의하면 본인처럼 일본군 학병으로 차출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공산당 팔로군이나 신사군의 일원이 되었다가 스리슬쩍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간 이들 중 상당수가 김일성체제 북한에서 정치사범 및 반동분자로 찍혀 콩밥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도중에 이탈했다는 이유로 콩밥을 얻어먹게 한 장본인이 다름아니게도 본인과 한때 중국 옌안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북한에 귀국한 연안파 일원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10] 사실 신상초 본인도 <탈출>에 도쿄제국대학 재학시절만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고 적어놓기는 했다.[11] 공산주의 체제에서 워낙 개고생을 한 탓인지 몰라도 이 사람의 탈출 수기 <탈출>의 내용도 전반적으로 반공 색채가 굉장히 심한 편. 하지만 같은 학병출신이었다가 똑같이 중국 팔로군 지구로 탈출한 친구 엄영식의 수기 <탈출>(신상초의 수기와 제목이 똑같다)에 따르면 신상초는 오히려 열렬 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도중에 돌변했다고 한다.[10] 다만 엄영식의 수기는 2005년에 출판된 수기인만큼 신상초의 <탈출>보단 반공 색채가 많이 옅은 편인데다 중국공산당 신사군에 대해서도 용맹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 다만 엄영식또한 신상초처럼 공산당체질이 아니었던 탓에 도중에 몰래 이탈해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조선의용군에서 몰래 이탈한 혐의로 콩밥을 얻어먹어서 도중에 월남했다. 신상초와 같이 몰래 이탈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문동환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월남을 시도할 때 엄영식과 동행했는데 심문과정에서 엄영식만 무사히 통과하고 신상초는 그대로 붙들려서 강제수용소로 보내져버렸다고…[12] 이후 신상초가 1989년 세상을 떠났을 때 유족 명단을 보면 부인과 딸 한명만 올라와있다.[13] 그래도 오랫동안 친장면 정치인으로 활동해왔던 전적때문인지 친박정희성향으로 정치성향이 바뀌고나서 출간한 수기 <탈출>에 장면 내각은 무조건 실패한 정권은 아니었다고 장면을 옹호하는 글을 개재하기도 했다.[14] 서대문구 갑[15] 마포구[16] 전임자 김상돈 의원직 사퇴 (서울특별시장 출마)[17] 종로구[18] 성동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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