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영어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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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특징
4. 폐교
5. 군번 1번 문제
6. 졸업생


1. 개요[편집]



Military Language School

미군정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장교 생활을 경험한 한국인 군경력자를 대상으로 영어를 교육한 학교로 현재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다. 졸업자들은 국방경비대 참위[1]로 임관했다.


2. 역사[편집]


미군정 초대 국방사령관이었던 미 육군중장 L.E. 쉬크 장군의 지시로 통역관 및 군간부요원 확보를 위해 1945년 12월 5일에 개교하였다.

먼저 '경찰예비대'를 창설 준비를 영어에 능통한 만주군 출신 원용덕에게 요청했다. 그는 이응준 등 사설 군사단체의 간부들을 모와 1945년 11월 20일에 미군정청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결과 좌익계는 제안에 거부한다며 장내를 빠져나갔고, 자신들만이 국군이 될것이라고 생각한 광복군계도 거부하였다. 결국 만주군관학교 대선배 원용덕과 일본육사 대선배인 이응준 둘이서 면접을 보아 군사영어학교 학생을 뽑아 '경찰예비대' 창설을 준비하였고 이는 국군 창설로 이어졌다.

초창기에는 감리교신학대학교(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건물을 활용했다.[2] 1946년 2월 27일엔 태릉으로 옮겼다. 태릉의 舊 일본 육군 지원병훈련소 부지에는 1946년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초대 교장은 그린 육군 중령이었는데 개교 후 5개월 사이에 4번이나 교장이 바뀌었다. 그 바람에 실질적인 학교 운영자는 법무장교인 리스 소령과 부교장(겸 생도) 원용덕이었다.

경비대가 창설되는 동안 군사영어학교로는 당장 필요한 장교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고 판단,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를 폐교하고, 폐교 다음날인 1946년 5월 1일 정규의 간부양성기관인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 國防警備士官學校)를 설치하여 간부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는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이다.

3. 특징[편집]


설치목적 자체가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하였기 때문에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출신 장교 및 준사관 중에서 중등학교 이상을 졸업하고 영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구비한 자로 제한했다. 주로 군사영어(Military English)와 한국사, 참모학, 화기훈련, 자동차 교육 등이 실시됐다. 웨스트포인트의 교육방식을 따랐으며 사관생도 들에겐 통역관에 준하는 급료가 지불되었다고 한다. 매주 토요일에는 사열분열도 했다고 한다. 단 이는 위관급 장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고 상당한 군경력자 17명은(이응준 등) 그냥 군사영어학교에서 하루나 이틀 연수시키고 바로 특별임관시켰다. 심지어 교장인 원용덕도 교육생으로 쳐서 군번을 받았다.

군번 1번 이형근, 2번 채병덕, 3번 유재흥, 4번 장석륜, 5번 정일권까지는 육군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백선엽, 김백일, 최남근, 이성가는 서류상으로만 수료하고 바로 육군 중위에 임관하여 조선경비대 창설 요원으로 간다. 군사영어학교생들을 선발한 일본군 대좌 출신 이응준(군번 110번)은 대령으로 임관, 부교장인 만주군 소좌 출신 원용덕(군번 47번)은 소령으로 임관했다.

조선인 일본 육군 출신자는 39만 명이라는 대병력인 데 비해, 광복군 출신자는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도망친 사람까지 합쳐서 3만 5천 명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입장이었고 광복군 역시 그대로 한국군을 창설할 예비 단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영어학교는 일군, 만군, 중국군(팔로군 , 광복군, 독립군 출신 포함)등을 안가리고 받아 들였다. 이는 광복군 출신자들에게 대단한 모욕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학교 60명의 1기를 선발할 때 만주군 출신 20명은 원용덕이 중국군 출신 20명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고 일본군 출신 20명은 이응준이 추천하기로 했는데 중국군, 즉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광복군들은 나중에 1946년 9월에 통위부 장관에 자군 출신인 유동열이 오르자 입대하였다.

이후 110명의 교육수료자 가운데 87명은 일본군 출신이었고(일본육군사관학교 13명, 학병 68명, 조선지원병 6명, 관련기사 )[3] 21명은 만주군(만주국육군군관학교, 간도특설대), 2명은 광복군/중국군(이성가, 유해준)[4]결국 110명 중 108명이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이들이었다. 광복군은 단 두명.

결국 이들이 창군이 주역이 되었고, 6.25 전쟁을 이끌어 갔다. 1948년 12월 15일 이응준이 최초로 장성으로 승진되었고 뒤를 이어 중간에 유고자를 제외하고 딱 5명만 별을 달지 못하고 남은 78명이 장성으로 승진하였다.(대장 8명, 중장 26명)

여담으로 110명이란 수치는 실질 참여자 170명 가운데 군으로 간 인원이 110명이라 그렇게 나온 것이다. 실제 건군기에 참여한 초기의 육군 장교들은 170명 수준이었다. 그리고 학교 자체의 입교자 전체는 200명이었다. 90명이 중간에 이탈한 셈. 실제 졸업생은 110명보다 더 많았는데 초과 인원은 전부 조선해안경비대로 쫓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한민국 해군으로 개편된 뒤 제독까지 진급했다(...)고 한다.새옹지마

1기는 60명이었고 평균 연령은 23-24세 수준이었다. 입학시험은 미군정청 내의 군사국에서 면접과 신체검사, 군경력을 확인하는 절차로 이뤄졌으며 입교 후에 영어 실력에 따라 네 개 반으로 나눠 편성되었다. 건군기에 졸업한 이들은 고위 장교가 없는 한국군의 당시 특성상 아주 빠르게 진급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에 대령으로 사단장을 하기도 했고 30대에 중장을 달기도 했다. 졸업생 110명 중에 78명(89%)이 장군으로 진급하였고[5] 대장까지 오른 이는 8명이었고 참모총장도 13명을 배출하였다.[6] 별들의 기수 이상 수준이다.

이중에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은 13명(이형근, 채병덕, 정일권, 최경록, 민기식, 김종오, 김계원, 최영희, 백선엽, 김용배, 장도영, 송요찬, 이응준) 배출,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은 7명(이형근, 정일권, 유재흥,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 장창국)을 배출했다. 대부분 5.16 군사 정변으로 군문을 떠나게 되지만 이후 박정희 밑에서 잘보이면 국방부장관, 국회의원, 국무총리, 공기업 사장으로 한자리씩 받았고, 밉보이면 외교대사로 해외를 떠돌았다.

교장은 미 육군인 리스 소령이었고 부교장은 원용덕[7] 참령(소령)이었다. 교직원의 숫자는 미군 셋, 한국군 셋으로 6개월 동안 교장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여담으로 부교장인 원용덕은 부교장이면서 교육생이어서 군번 47번을 받았다고 한다(...). 근데 군번은 없고 등록번호만 있다는데 군번이 있다는 썰은 이형근이 자신이 군번 1번을 받은 것을 정당화하려고 그랬다는 말이 많다. 채병덕보다 앞선 군번을 받으려고.

졸업자 명단은 블로그를 참고할 것. 이색 경력자에 대한 얘기는 블로그를 볼 것.

최고령자는 대령으로 임관한 이응준 (56세)였고 최연소는 정래혁(20세)이다. 1919년~1923년생이 가장 많아 보통 26세 안팍이었다.

학력으로는 대졸 54명, 전문학교 15명, 중학교 20명, 불분명 21명이었다. 반면 육군특별지원병 출신들은 국민학교 졸업이었다.


4. 폐교[편집]


1946년 4월 말 폐교한다. 당시 남아있던 학생들은 5월 새로이 개교한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 1기생으로 전입하였다.

1946년 5월 1일 개교한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1946년 6월 15일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는 경비대를 창설하는데 필요한 전문적인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고, 초대 교장은 군번 1번 이형근 대위였다. 1기 88명을 시작으로 6기까지 있었다. 1,2기는 군 경력자, 3,4,6기는 조선경비대 하사관중 추천자, 5기는 민간인이었다. 총 1,511명이 입교해 1,255명이 임관하여 366명이 전사하고 257명이 장성을 달았다. 그런데 1,2기의 경우 군사영어학교생과 일본군 군경력은 비슷하지만 임관일의 차이 때문에 승진이 넘사벽이었다. 예를들어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이 6.25 때 별을 달고 5.16까지 돌아가며 육군참모총장 해먹을 때 조선경비사관학교 1,2기는 이제 막 장성 달았고, 그 이하 기수는 한국전쟁 당시 대대장~연대장 급이었다.

1948년 8월 9일부터는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어 7기~11기 까지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시 10기는 2년제 교육, 11기는 4년제 교육생이었는데 10기는 소위로 임관시켜 줬고, 11기 338명은 소총수로 참전했다가 전사자를 제외한 175명은 그해 8월 육군종합학교 제1~2기 속성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951년 10월 경남 진해에 새롭게 4년제가 선발되며 11기로 계산 되었고, 원조 11기는 없는 셈 치게 되었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원조 11기 생들은 '생도 2기'라고 불러달라거나 육사 10기 후반기로 계산해달라고 하는데 잘 안 되는 듯.

육사 7~10기만 계산하면 4,055명이 입교하여 3,731명이 임관하고 1,095명이 전사했으며 343명이 별을 달았다. 정규기수는 모두 민간인을 시험봐서 선발했으나 7~8기 중 특별전형은 군경력자와 하사관 추천자인데 민간인보다는 적고 교육 기간도 1/3 정도였다. 민간인 선발인 5기와 7~9기 정규 기수는 24주 교육이며 10기는 원래 2년제를 목표 했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충 수료한 셈 치고 7월에 소위로 임관 하였다. 교육기간은 당초 목표와 달리 48주였다. 반면 원조 11기생은 6월에 입교하여 25일에 전쟁이 터졌다(...).


5. 군번 1번 문제[편집]


좀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조선이 일본과 통합되는 과정에서 일본육사에서 위탁교육 중이던 조선인들은, 지청천, 김경천처럼 중국으로 도망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자들도 있고, 지청천의 설득을 거부하고 남은 홍사익, 이응준, 유승렬(이상 일본 육사 26기) 같은 자들이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조선인 입교자가 없다가 1930년이 돼서야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져서 채병덕, 이종찬이 49기로 졸업 후 임관 하였다. 그 바람에 조선시대의 이응준 같은 원로들과 차이가 많이 난다.(홍사익은 중장, 이응준/유승렬은 대좌, 채병덕은 소좌) 이응준, 지청천 등의 원로들은 한국군 창군기에 대령등으로 특별임관 하였다. 그에 비해 채병덕 소좌 이하로는 전부 군사영어학교를 거치게 된다.

만주군의 경우 2년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는 1932년에 세워졌고, 일본계는 전원 일본 육사에 편입하였고, 비일본계는 성적 우수자에 한해 일본육사에 편입했는데[8] 여기에 최선임인 김석범이 일본 육사 54기 상당, 동기생이였던 정일권이 55기 상당으로 일본 육사로 편입되었다.

즉 특별임관한 대한제국 출신 장교들을 제외하면 채병덕과 이종찬이 최선임이고, 특히 채병덕은 소좌, 이종찬은 대위로 채병덕이 최선임, 최고참 군사영어학교 수료자이다. 그런데 난데 없이 이형근이 군번 1번을 가져가버렸다. 채병덕은 일본49기의 선배이고, 이형근은 56기이다. 특별임관한 광복군 출신의 원로들에게 군번1번을 안 준것은 미군정에서 그딴 거 인정 안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채병덕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군번1번을 안준 것은 환장할 노릇. 그 바람에 이형근이 장인 이응준 백으로 군번 1번을 받았다고 비난하고, 이형근은 시험을 보고 선착순 성적순으로 군번을 매겼다고 하다가, 시험 자체가 없었던 것이 들통나니, 말을 바꿔서 일본군에서 보내준 자료를 검토해서 미군정에서 군번 1번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육사 기수로 군번 뽑을 거면 이응준이 1번 아닌가?

왜 군번1번 문제를 언급하냐면 이것이 결국 채병덕과 이형근 사이의 한국군 최초의 파벌 싸움 문제로 번지게 되었고, 이것은 6.25 당시 까지 연관이 되어 파벌 싸움 때문에 6.25 직전에 참모총장 및 각군 주요지휘관을 바꾸던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6. 졸업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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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소위[2] 감신대는 1944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상태였기 때문에 잠시 건물을 활용한 것이다.[3] 1944년부터 모집된 조선인 징병자는 일제 패망 당시 막 초병 교육 끝난 상태라 일선에 투입도 안 된 이등병들이었다. 그러니 징병 출신자 중에서는 군사영어학교에 갈 정도의 군사경력이 있는 경우가 없었다.[4] 이성가는 중국남경군관학교 1기로 국부군소령으로 광복군 잠편지대활동을 했고, 유해준은 황포군관학교 15기로 중국군 대위로서 광복군활동을 하였다.[5] 추서자 5명까지 포함하여서다.[6] 당시엔 소장이나 중장이 참모총장을 맡기도 했다.[7] 만주군 중령 출신으로 한국군 육군 중장을 지냈다.[8] 조선인은 만주계에 속했는데 일본어를 잘해 조선 출신 중 반 이상이 성적 우수로 일본 육사 본과로 편입되었다. 대만계/만주계는 일본 육사를 갔다 온 즉시 독립군에 투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조선인의 경우 그런 일이 단 1건도 없이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했다. 그에 대한 보답인지 1942년 입교자부터는 일본계으로 계산되어 전원 일본 육사로 편입되었다.[추서계급] A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