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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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9대 외무부 장관
최덕신
崔德新 | Choi Deok-shin


파일:external/insidetheworld.net/2009.07.29-korWar9.jpg

출생
1914년 9월 17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마룡리
(現 평안북도 피현군 용흥리)#
사망
1989년 11월 16일 (향년 75세)
평양시 중구역
묘소
애국렬사릉
본관
해주 최씨
재임기간
제9대 외무부 장관
1961년 10월 11일 ~ 1963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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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최동오
배우자
류미영
자녀
아들 최건국, 최인국
딸 최근애, 최경애, 최순애
학력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종교
천도교
경력
제9대 외무부 장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군사 경력
임관
황포군관학교 (기수 불명)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특3기)
복무
국민혁명군
1936년 ~ 1946년
한국광복군
?~?
대한민국 육군
1947년 ~ 1956년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8사단장
제11사단장
제1군단장

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논란
5. 기타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남한, 북한의 정치인. 남한 출신 월북자로서는 최고위급이다.


2. 생애[편집]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마룡리#에서 독립운동가 최동오(崔東旿)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장을 맡았다. 국민혁명군에서는 주로 미군과 국민혁명군간의 군사외교, 협력 업무를 맡았고 이러한 경력은 후일 휴전협정에서 한국 대표를 맡거나, 혁명정부에서 외무부장관을 맡게된 계기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6.25 전쟁 당시 제8사단, 제11사단의 사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막바지에는 휴전회담 대표를 역임하였다. 제1군단장을 지낸 뒤 1956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 초대 남베트남 대사, 태국 대사 등 외교관을 역임하다가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1961년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63년 8월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동백림 사건의 수습이 실패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되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박정희는 최덕신을 해임해 버렸다.

1967년부터 6년간 천도교 교령을 지냈고, 1976년 2월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고 공개적으로 6.25 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 활동을 벌이다가, 1986년 아예 북한으로 망명하였다.[1]

김일성은 10대 소년 시절에 최덕신의 부친인 독립운동가 최동오 선생이 만주에 설립한 화성의숙을 다닌 과거가 있는데, 김일성은 이런 인연을 들면서 최덕신을 설득했다고 한다.

역사상 최고위급 인사의 월북이어서 북한 정권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조선골프협회 회장 등을 맡았다.

사후 북한판 현충원인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김일성이 직접 조문했다고 한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논란[편집]


  • 6.25 전쟁 당시 거창 양민 학살사건으로 대표되는 영호남 지역 민간인 학살의 주동자로 지목된다. 최덕신은 게릴라전에서는 중국 국민당군(국민혁명군)이 자주 했던 견벽청야 즉 청야 전술이 해결책이라며 동일한 개념을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적용하라는 작전 지침을 하달했고, 그 결과 빨치산이 쓸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지리산 곳곳에서 수천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 백선엽의 회고에 따르면 1951년 5월 중공군의 춘계공세에 맞서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할 당시 11사단 예하 연대에서 통신이 두절되었음에도 미군의 전사교범을 뒤적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백선엽이 인편을 통해서라도 연대와 교신을 하라고 충고를 했다고 한다. 당시 최덕신은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여파로 마음이 편치 못해 보였으며, 곧 육군본부로 소환되고 후임 사단장에 오덕준이 부임했다고 한다.#

  • 독일 여비서와 NTR하다가 복상사시켰다는 도시전설급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이 이야기는 동백림 사건 이후 책임을 독박 씌우기 위한 과정에서 당시 박정희 정부의 모략일 가능성도 있다.

  • 미국 망명 직전 중화민국의 미술가이자 교수인 전만시에게 한국에 땅을 사주겠다며 8만 달러를 빌려갔으나 갚지 않고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들을 팔아 대금을 챙긴 채 망명했다고 한다.


5. 기타[편집]


  • 남한 최고위직 월북자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사회주의의 정신적[2] 우월성을 선전하는 연작 프로파간다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3] 그의 일대기도 방영했다.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면서 독립군을 이끌고 귀환했지만 미군에 의해 좌절되었고[4], 6.25 전쟁 당시 카리스마 있는 장군으로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실망감과[5] 북에 있는[6] 아버지가 잘 살면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과 아들을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과거를 상징하는 사진 세 장에 총질을 하고[7] 북한에 들어가서 편안한 일생을 보내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었다.

  • 6.25 전쟁 중 11사단장을 역임할 당시 휘하 중대장이던 양창식의 증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전라북도 남원에서 전속부관이 모 중학교에서 최덕신의 이름을 빌려 피아노를 징발해갔고, 이로 인해 피아노 사단장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 2000년대 북한 이산가족 방문단이 왔을 때 최덕신과 함께 월북한 아내 류미영[8]이 남한에 와서 남겨진 가족들과 상봉했다. 류미영은 2016년 11월 24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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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도교는 10년 뒤인 1997년에도 오익제 교령이 월북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2] 다만 일단 물질적으로는 밀리는 것을 인정하기는 한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사회주의권 영화를 비교해 보면 동독이나 소련 영화는 사회주의의 합리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북한 영화는 일관되게 민족주의적 순수성과 정신력을 강조한다는 것이다.[3] 90년대 후반부터는 독립운동가나 사회 현상 기타 다른 주제로 나갔지만, 초기는 월북자 전기 영화였다.[4] 국군의 계급을 분할 하는 장면에서 일본군 출신들은 전부 출신 계급에 맞게 계급을 받지만 국부군 대령 출신인 최덕신은 소위를 주면서 대놓고 꼽을 주는 장면이 일품, 다만 이후 높으신 분의 눈에 들어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승진하긴 하지만... 애초에 일본군 출신과 타 군 출신을 차별하는 것부터가 현실성 제로다.[5] 북한 영화에서 이 부분에서 동백림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이 재현된다. 물론 사실과 다르게도 영화에서 최덕신은 동백림 사건이 터지자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냐며 노발대발한다.[6] 최덕신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7] 군인으로서의 과거, 외교관으로서의 과거, 천도교 교령으로서의 과거.[8] 독립유공자 유동열의 딸. 대한민국을 버리고 월북한 사람이 갑자기 북측 이산가족 상봉단의 대표자로 나타났기 때문에 남한 일각에서는 북한이 우릴 우롱하는 것 아니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