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지역별 현황/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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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최초의 유치원은, 1900년에 설립된 경성공립유치원이다. 지금의 중구에 설립되었으며, 일본인 전용 유치원이었다.

서울이 아직 경성부이던 시절인 1910년에는 정동유치원이 세워졌다. 1913년에는 백인기에 의해 경성유치원[1]이 세워졌는데, 한국 땅에서 최초로 한국인이 설립한 유치원이며 한국인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이었다. 소재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이며, 종로구 최초의 유치원이기도 하다.

1914년에는 이화학당에 이화유치원이 설립되었다(최초의 개신교계 유치원).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중구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로, 차츰 학년과 학제가 정비되면서 유치원도 개설된 것. 첫 원생은 1908년~1910년생이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는 정동에 그대로 남았으나, 이화유치원은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함께 서대문구 신촌으로 이전되었고, 오늘날까지 신촌에 있다(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 이화유치원이 세워진 후로 용산유치원, 혜라유치원 등의 유치원들도 설립되었다.

불교계 유치원은 1925년에 설립된 화광유치원이, 가톨릭계 유치원은 1937년 종로구 혜화동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성당 부설로 설립된 혜화유치원이 최초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일본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던 애국유치원[2]도 주로 서울에 설립됐다. 이화유치원 첫 졸업생은 거의 사망했고, 살아 있더라도 113~116세의 어르신이 됐다. 현재 설립 110주년을 맞을 만큼 역사가 매우 깊다. 이런 이유로 조부모나 증조부모가 다녔던 유치원에 그 자손들이 다니는 등 3~4대가 한 유치원을 다녔던 보기 드문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3] 일본인 자녀의 경우는 1894년~1896년생이 최초의 원생이었다. 물론 현재는 모두 사망.

과거 1950~60년대 서울의 유치원 취원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4], 이는 부유층들이 서울의 사대문안 등에 대거 거주했고[5], 당시 유치원들이 특수초등학교 입시 대비를 해 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유층 학부모들이 몰린 것이다. 그냥 시대적인 배경 탓에 연세 70이 넘은 어르신들 중 대학교는 나왔지만 유치원은 못 다녀 본 사람이 많았을 뿐이다.[6]

1908년생부터 1940년생까지는 유치원생 시기에 서울이 경기도 소속이었으나, 1941년, 1942년생은 유치원 재학 도중에 서울이 경기도에서 분리됐으며 1943년생부터는 유치원 입학 이전에 서울이 경기도에서 분리됐다.

한강 이남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유치원은 1927년 영등포구(당시 시흥군 영등포읍)에 개원한 흥화유치원이다. 이 곳 최초의 원생은 1921년~1923년생으로 현재 살아 있다면 100~103세가 되었다. 당시 원생은 주로 현재의 영등포구에 살았고, 드물게는 구로구 구로동, 동작구 노량진동, 양천구 목동(!!!) 등지에서도 왔다고 한다.

서울의 유치원 확장은 서울의 시가지 확장과 대체로 일치한다. 버스 권역으로 보면 0권역[7]-6권역[8]-5권역[9]-3권역[10]-1권역[11]-2권역[12]-7권역[13]-4권역[14] 순인데, 처음에는 시내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가 점차 외곽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유치원들도 자연히 그에 맞춰 지은 것이다.

또한 시가지 팽창에 따라 기존에 시내에 있던 유치원들이 외곽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중앙유치원이 있는데, 1916년 설립 당시에는 중구 정동에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50년 가까이 그 위치를 유지하다가 1998년 동작구 흑석동으로 이전했다.[15] 운경유치원은 1959년부터 1977년까지는 용산구 동자동, 1978년부터 1990년까지는 강남구 청담동, 1991년부터 2006년까지는 송파구 가락동에 있었다가 끝내 폐원되었다. 1999년생들이 이 곳의 마지막 졸업생이 됐고, 2000년, 2001년, 2002년생들은 다른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으로 분산 배치됐다. 관내 866곳의 유치원 중 국공립은 138곳이었으나, 국공립은 226곳으로 늘어났고, 사립유치원의 잇따른 폐원으로 822곳으로 줄었다. 다만, 2019년에는 관악구의 구암유치원이 국내 최초의 매입형 유치원이자 협동조합 유치원으로 개원했다. 또한 현행법상 불법인 임대유치원이 서울에만 50곳 넘게 운영 중이다. 유치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시흥군 서면→소하읍, 양주군 구리면→구리읍, 고양군 신도면→신도읍 등 서울과 인접한 읍이나 면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버스나 기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역으로 서울의 대규모 확장 이전에는 창동, 도봉동, 방학동, 독산동, 시흥동, 오류동, 온수동 등 현재의 서울 외곽 지역에 살던 아이들이 자신이 사는 리를 관할하는 군 소재지[16]나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서울의 지형만 봐도 답이 나온다. 서울에서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산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 정도만 있는데,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은 강북에 있고, 강남 지역에서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산이라고는 관악산 정도밖에 없어서 (그나마 정상은 경기도 과천시에 있다. 우면산, 대모산, 아차산, 용마산은 브리태니커 기준 (해발 2,000피트 이상) 산이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너무 낮다. 거의 네덜란드, 벨라루스, 세네갈 수준이다.) 개발이 용이해[17] 인구가 몰리면서 강남 지역에 유치원이 많이 들어서고, 강북에서도 강남으로 명문 고등학교들이 옮겨 가면서[18] 유치원도 옮겨 가는 것이다.

1950~60년대에 시도별로 유치원 취원율을 계산하면 서울이 꼭 가장 높았다[19]고 한다. 시골에서 5,000명에 1명, 중소도시에서 1,000명에 1명, 지방 중견도시에서 500명에 1명 꼴로 유치원을 다닐 때 서울은 200~300명에 1명 꼴로 유치원 다닌 아이들이 있을 정도. 이 시기 유치원 취원율이 1%에 불과했던 것도 시골 지역의 유치원 취원율이 낮아서 평균을 깎아먹어 생긴 것이다.

서울은 생활권이 구별로 나뉘지 않아 다른 구의 유치원 버스가 지나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송파구 풍납동이 있는데, 풍납동에는 우일유치원, 동화나라유치원, 한가람유치원, 현대유치원 등 사립유치원이 있지만, 그 곳의 정원이 다 차거나, 그 지역 유치원 추첨에서 다 떨어졌거나 하는 이유로 강동구에 있는 유치원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어, 풍납동의 주요 도로인 풍성로토성로에서 유정유치원[20], 준현유치원[21], 천호유치원[22] 등 강동구의 유치원 버스를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송파구 잠실동-강남구 삼성동[23], 송파구 방이동-강동구 둔촌동, 성북구 장위동-노원구 월계동, 강남구 신사동-서초구 잠원동, 성동구 성수동-광진구 화양동 등에서 더 볼 수 있다. 같은 동에 사는 아이라도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유치원이 갈리기도 한다.

사립유치원은 684군데가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다. 전세난으로 경기도충청남도[24]로 빠져나가는 인구와 공공기관공기업 이전으로 인한 이주자, 은퇴자의 수도권 인접 비수도권 이주, 제주도 이주 열풍으로 충청남도, 충청북도, 강원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로 빠져나가는 인구가 많아지고 해외로 이민 등을 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이전 거주지가 서울인데도 이 정도다.[25]

구별로는 종로구 14곳, 중구 10곳, 용산구 13곳, 성동구 19곳, 광진구 30곳, 동대문구 24곳, 중랑구 27곳, 성북구 39곳, 강북구 20곳, 도봉구 26곳, 노원구 58곳, 마포구 18곳, 서대문구 22곳, 은평구 38곳, 강서구 45곳, 양천구 39곳, 영등포구 33곳, 구로구 26곳, 금천구 13곳, 동작구 29곳, 관악구 26곳, 서초구 19곳, 강남구 25곳, 송파구 45곳, 강동구 26곳이다. 강북 지역에 358곳, 강남 지역에 326곳이다. 강북 지역이 52.3%, 강남 지역이 47.7%로, 강북 지역에 사립유치원이 더 많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강남에 영어학원 유치부(영어유치원[26])가 많이 들어섰고,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자녀를 일반 유치원보다는 영어학원 유치부[27]에 더 많이 보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의 신당동 근화유치원은 박근혜 前 대통령이 졸업한 곳[28]이며, 혜화유치원은 장영신[29]이, 서대문유치원은 연예인 구봉서[30]가, 밀알유치원은 연예인 문희준[31], 리라초등학교 부설유치원은 스케이트 선수 이승훈[32]이 졸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강남구의 초이유치원은 최순실이 설립했고, 아란유치원은 우병우의 아들이 다녔다[33]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1964~1966년에 유치원을 다녔다.[34] 축구선수 이강인[35]의 어머니[36]는 결혼 전 서울에서 유아교사로 근무했다. 시인 김수영은 1925~1927년에[37], 원로배우이자 전직 중랑구 갑 국회의원이었던 이순재는 1938~1940년에[38], 코미디언 김수용은 1970~1972년에[39], 유재석은 1976~1978년에[40], 용준형은 1992~1995년에[41], 김현수는 1991~1993년[42]에, 이선재는 1978~1980년 사이에[43], 류수영은 1983~1985년 사이에[44], 장나라는 1985~1987년 사이에[45], 국내에서 최초로 수영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은 1992~1995년 사이에[46], 국내 최초로 NBA에 진출한 농구선수 하승진은 1989년~1991년 사이에 서울에서 유치원을 다녔다.[47] 이다지도 1989-1991년 사이에 서울에서 유치원을 다녔다[48]고 한다.

1950년대 이후 서울에 개성시,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서 실향민이 몰려 오면서 강북 지역을 중심으로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중 실향민 출신인 원아가 있는 곳도 있을 정도이다. 또한 산업화로 인해 다양한 지역에서 아이들이 몰려 오면서[49] 1970~80년대 서울에 있는 유치원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온 원아들의 다양한 사투리를 들어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유아교사들도 고향 사투리 억양이 섞인 표준어를 쓰거나 아예 자기 고향의 사투리를 쓸 정도.

2022년에는 이태원 압사 사고의 여파로 전국적으로 유치원의 할로윈 행사를 취소하는 분위기였는데 서울은 그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어 할로윈 행사를 취소한 유치원이 많았다.

과거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50]이나 강동구 성내동, 마포구 망원동의 유치원들은 여름•가을철 홍수로 인한 휴원이 잦았으나, 현재는 홍수로 인한 휴원이 줄고, 태풍으로 인한 휴원이 늘었다. 겨울에 건조한 탓에 폭설로 인한 휴원은 더 적다.[51] 2016년 89세[52]의 나이로 퇴임한 국내 최고령 유치원 교사 역시 서울에서 근무했는데, 남한 출신도 아니고 무려 황해북도 사리원시 출신의 실향민이다. 1970년대에는 데모가 엄청나게 많아 강북 지역의 유치원들이 휴원 혹은 단축수업을 했고[53],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 사이에는[54]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서울에 있는 유치원들이 단축수업을 했다. 2010년대 이후로는 가을부터 이듬해 까지 미세먼지로 인한 휴원이 잦아지고 있다.

서울에는 아파트가 매우 많아서, 아파트 단지 하나에 유치원이 2곳 이상 있거나[55], 공립유치원과 사립유치원이 모두 있는 아파트 단지도 있을 정도이다. 인구도 많아서[56] 가톨릭, 개신교, 불교 계통 유치원이 모두 있는 도시 중 하나이다.[57] 1960년대 379만 3,280명이던 인구가 1990년 1,061만 2,577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감소해서 2021년 966만 8,465명으로 줄어드는 등 증감을 반복하는데도[58], 유치원도 같이 늘었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는 전국적인 성씨 분포와 유사한 편이다. 서울의 상위 10개 성씨는 김-이-박-최-정-조-강-윤-장-임 순서인데 구에 따라 장씨가 윤씨보다 많다거나, 조씨가 강씨보다 많다는 등의 세세한 변화까지 따지면 원생의 성씨 분포가 달라질 수도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희귀 성씨를 가진 원생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

2021년 서울에서는 공립유치원 비율이 처음으로 30%를 넘겼는데 저출산과 코로나19 사태로 사립유치원이 잇따라 폐원되고 대신 공립이 늘어나면서 생긴 결과이다.

서울에 방송국이 많이 있다는 특성상 서울에 사는 유아들은 유치원 시절 방송국 소풍을 갈 수 있으며, 서울 동북부에서는 서울어린이대공원으로, 서울 강남4구에서는 올림픽공원이나 롯데월드 어드벤처로 많이 간다. 이는 인근의 하남, 성남, 구리, 의정부, 도농 (다산신도시), 덕소, 팔당, 조안, 퇴계원, 사릉, 평내, 마석, 송추, 퇴촌, 남종, 양수리 일대는 물론 멀리는 양평, 동두천, 포천, 연천, 철원에 있는 유치원에서도 서울로 소풍을 많이 온다.

1999년에는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로 서울 소망유치원[59] 원생들이 사망했고[60], 2020년 9월 14일에는 대왕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원생 1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해당 유치원에서 근무하는 28세 여교사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2번 (3월 12일, 5월 13일) 받기도 했다. 또 같은 해 9월 5일에는 성동구 아이들세상유치원 원생 1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으나 교사와 다른 아이들은 모두 음성이었다. 2020년 12월 서울의 유치원들은 모두 원격수업으로 전환되었다. 2021년 2월 17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양천구의 유치원에서 원생과 가족 등 18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같은 해 4월 25일과 27일에도 유치원생 1명, 5월 9일, 12일, 21일에는 동대문구의 병설유치원 유치원 교사 4명, 6월 28일과 7월 15일에는 유치원생 3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2022년 12월 15일 서울의 한 유치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2. 중구[편집]


해방 전 서울의 유치원은 종로구, 중구, 용산구 등 주로 시내에 있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유치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구 최초의 유치원은 1900년 경성공립유치원. 일본인 전용이었다. 이후 한국인을 위한 유치원으로 1910년 정동유치원, 1914년 이화유치원이 설립됐는데 경성공립유치원은 한성부 시절에, 나머지 2곳은 경성부 시절에 설립되었다. 첫 입학생은 1894년~1896년생이고, 첫 졸업생은 모두 사망했다. 당시 원생들은 모두 을지로회현동, 명동 등 중구의 도심 지역에서 살았다.

3. 종로구[편집]


1913년 경성유치원. 한국 땅에서 최초로 한국인이 설립했다. 193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성당 부설로 설립된 혜화유치원[61]도 이곳에 있다. 당시 경성부 관할. 당시 원생들은 종로구 도심 지역에서 살았다. 첫 입학생은 1907년~190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살아 있다면 116~117세이다.

4. 용산구[편집]


용산구[62] 최초의 유치원은 1915년 용산유치원. 당시 경성부 관할. 당시 원생들은 용산동, 이촌동, 후암동에 살았다고 한다. 한창 때에는 성동구, 강남구에서도 버스 등을 타고 오기도 했다. 첫 입학생은 1909년~1911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살아 있다면 114~115세이다.

5. 영등포구[편집]


그러다가 1920년대 이후 서울의 시가지 확장에 따라, 점차 외곽 지역에도 유치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생겨난 유치원들은 다음과 같다. 영등포구 최초의 유치원은 1927년 흥화유치원, 당시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 관할. 1950년대 이전에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동네는 영등포였는데 이미 1927년에 흥화유치원, 1929년에 영등포유치원이 설립될 정도였다. 당시 원생들은 지금의 영등포구 영등포동, 신길동, 당산동동작구 노량진동, 대방동, 흑석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노량진[63]에 유치원이 설립되는 1955년까지 강남 지역에 유치원이 새로 들어오지 못했고, 여의도는 1970년대까지 제대로 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첫 입학생은 1921년~1923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살아 있다면 102~103세이다.

6. 동작구[편집]


1955년 노량진교회 부설 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64] 첫 입학생은 1949년~1951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74~75세이다.

7. 강동구[편집]


1956년 성애유치원, 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관할, 천호동교회 부설로 설립됐다 1959년 폐원. 천호동은 강남 8학군 지역 중 가장 먼저 유치원이 설립됐는데,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천호동이 한강 이남에서 영등포 다음으로 큰 동네였기 때문이다. 다만, 1960년대에 천호동을 제외한 강동구의 나머지 동[65]들은 모두 시골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치원은 1972년 설립된 천호유치원이다. 당시 원생은 지금의 강동구 천호동, 성내동, 암사동송파구 풍납동[66], 방이동[67]에 살았다고 한다. 이후 1961년 천호제일감리교회 부설 낙원유치원이 설립되었는데, 역시 원생들 대부분이 현재의 강동구 천호동성내동암사동명일동길동송파구 풍납동[68]에 살고 있었다. 첫 입학생은 1950년~1952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73~74세이다.

8. 성동구[편집]


1957년 성호교회 부설 유치원. 당시 원생들은 현재의 금호동, 옥수동, 응봉동과 용산구 한남동[69]에 살고 있었다. 현재는 어린이집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현존하는 곳 중 최고는 1966년 성심유치원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왕십리 성당 부설이다. 1950년대 이전에는 성동구 왕십리동에 사는 아이들이 경원선 기차나 서울전차를 타고 용산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고, 강남구 압구정동, 신사동, 청담동, 삼성동, 강동구 천호동, 성내동, 송파구 풍납동, 신천동[70], 잠실동에서 버스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71] 첫 입학생은 1951년~1953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72~73세이다.

9. 노원구[편집]


1959년 공능교회 부설 신공덕유치원, 당시 양주군 노해면 관할.[72] 신공덕유치원은 양주군 노해면 신공덕리가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되면서 공릉유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원생은 지금의 노원구 공릉동, 하계동, 중랑구 묵동, 성북구 월곡동, 장위동,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에 살고 있었다. 첫 입학생은 1953년~1955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70~71세이다.

10. 동대문구[편집]


1961년 경희유치원. 경희대학교와 같은 재단이다. 이전에는 버스, 전차, 기차 (경원선)를 타고 원정 통학을 해야 했고, 그 이후에는 중랑구는 물론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73]에서 원정 통학을 왔다. 당시 원생들은 동대문구 청량리동, 전농동, 회기동, 휘경동, 이문동과 중랑구 중화동, 상봉동에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55년~195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8~69세이다.

11. 마포구[편집]


1961년 배영유치원. 당시 원생들은 마포구 동교동, 서교동, 합정동, 상수동에 살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버스, 전차, 기차 (용산선)를 타고 원정 통학을 해야 했고, 마포구 서부의 상암동성산동은 1970~80년대까지도 은평구로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첫 입학생은 1955년~195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8~69세이다. 참고로 한국 유일의 일본인 유치원도 이 곳에 있다.

12. 은평구[편집]


1962년 성온유치원, 당시 서대문구 관할. 원생들은 은평구 구산동, 응암동, 역촌동, 대조동, 신사동에 살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버스기차 (경의선)를 타고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심지어 마포구 상암동, 성산동[74]에 살던 아이들도 은평구 수색동의 유치원으로 오기도 했다. 첫 입학생은 1956년~195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7~68세이다.

13. 서대문구[편집]


1963년 신촌유치원.[75] 이전에는 버스, 전차, 기차를 타고 도심으로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당시 원생들은 현재의 서대문구 신촌동, 북가좌동, 대현동과 마포구 아현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57년~195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6~67세이다. 한성화교유치원도 이 곳에 있다.

14. 성북구[편집]


성북구[76] 최초의 유치원은 1964년 새싹유치원. 이전에는 버스, 전차, 기차 (경춘선[77])를 타고 다른 구로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당시 원생들은 정릉동, 돈암동, 동선동, 안암동에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58년~1960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5~66세이다.

15. 송파구[편집]


1965년 거암교회 부속유치원, 당시 성동구 송파출장소 관할.[78] 당시 원생들은 거여동, 마천동, 오금동에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59년~1961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4~65세이다.

16. 광진구[편집]


1966년 자양유치원[79]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치원은 1968년 선경유치원이며 두 곳 모두 당시 성동구 관할. 당시 원생은 지금의 광진구 자양동, 화양동, 능동, 구의동과 송파구 잠실동에 살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버스를 타고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개원 초기에는 광진교 너머의 강동구 천호동송파구 풍납동[80]에서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광진구 자양동에 사는데 풍납동 우일유치원으로 오기도 한다. 첫 입학생은 1960년~1962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3~64세이다.

17. 관악구[편집]


서울에 편입된 이후에도 한동안 시골이었던 지역들은, 1970년대에 대규모로 개발한 이후에야 겨우 유치원이 생겨났다.[81] 대표적인 예는 대략 다음과 같다. 관악구 최초의 유치원은 1972년 성도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2] 당시 원생들은 관악구 신림동에 주로 살았고 봉천동이나 동작구 신대방동 등지에서 오기도 했으며 현재는 폐원되었다. 첫 입학생은 1966년~196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7~58세이다.

그 외에도 소슬유치원, 새소슬유치원 등이 있다.

18. 강남구[편집]


1972년 성요셉유치원. 당시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 청담동 소재이며,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운영한다. 당시 원생들은 청담동, 삼성동, 압구정동, 논현동에 주로 살았고 송파구나 성동구에서 오기도 했다. 1956년 지금의 강동구 천호동에 설립됐다 3년 만에 폐원된 성애유치원을 제외하면, 강남 8학군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유치원이다.[83] 첫 입학생은 1966년~196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7~58세이다.

19. 강서구[편집]


1973년 새싹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4] 당시 원생들은 강서구 화곡동, 발산동과 양천구 신정동, 목동에 살았다. 첫 입학생은 1967년~196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6~57세이다.

20. 강북구[편집]


1973년 성체유치원. 가톨릭 인보성체수녀회에서 운영. 유치원의 이름은 가톨릭의 미사 중에 영하는 '성체'에서 유래했다. 인보성체수녀회는 서울시 외에도 경기도 성남시용인시에서도 성체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성체유치원은 인보성체수녀회 서울 분원과 한 담장 안에 있고, 바로 옆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수유동 성당이 이웃해 있다.

설립 당시에는 도봉구 관할이었다. 원생들은 보통 강북구 수유동, 번동이나 도봉구 쌍문동에서 살았고 드물게 창동에서도 왔다. 그 전에는 버스를 타고 성북구로 원정을 가야 했다. 첫 입학생은 1967년~196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6~57세이다.

21. 구로구[편집]


1974년 은별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5] 당시 원생들은 구로구 개봉동, 오류동, 고척동과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에서 살았다. 첫 입학생은 1968년~1970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5~56세이다.

22. 양천구[편집]


1976년 성보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6] 당시 원생들은 양천구 목동, 신월동, 신정동과 강서구 화곡동, 염창동, 영등포구 양평동에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70년~1972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3~54세이다.

23. 금천구[편집]


금천구[87] 최초의 유치원은 1977년 독산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8] 첫 입학생은 1971년~1973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2~53세이다.

24. 서초구[편집]


1978년 새성민유치원, 당시 강남구 관할.[89] 당시 원생들은 서초구 서초동, 방배동과 동작구 사당동에서 살았다. 첫 입학생은 1972년~1974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1~52세이다.

25. 도봉구[편집]


1972년 2월에 도봉구 도봉동에 도봉유치원이 설립되었으며, 1966년~1967년생이 입학하여 1973년 2월에 1회 졸업생 (현재 57~58세)이 배출되었다. 현존하는 곳은 1980년 정의유치원. 한신초등학교, 정의여자중학교, 정의여자고등학교와 함께 학교법인 삼산학원에 속해 있으며 개신교 계열이다.[90] 당시 원생들은 도봉구 쌍문동, 창동, 방학동과 강북구 우이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74년~1976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9~50세이다.

26. 중랑구[편집]


1982년 색동유치원, 당시 동대문구 관할.[91] 당시 원생들은 현재의 중랑구 중화동, 면목동, 상봉동과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76년~197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7~4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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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인범이 나왔던 경성유치원과는 다른 곳이다. 이 쪽은 대전광역시 소재.[2] 백남준이 대표적인 ‘애국유치원’ 출신이었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나 1936~1938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으며 (이 때 아내인 이경희 여사도 같은 유치원에 다녀 부부가 같은 유치원 출신인 보기 드문 사례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야구선수 추신수가 아내와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2006년 1월 29일 (설날)에 미국에서 사망. 현재 살았으면 89세이다.[3] 부모가 다닌 유치원에 자녀가 다니는 경우는 있지만 조부모나 증조부모가 다닌 유치원에 그 자손들이 다닌 경우가 드문 것은 현재 유치원생들의 조부모 세대까지는 유치원이 부유층 아이들만 다닐 수 있는 귀족학교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가끔씩 보이는 유치원 다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대다수가 고향이 도시 혹은 읍내이고, 당시에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2021년 현재 유치원생의 조부모는 194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 출생자가 대부분이라 1980~1990년대생이 조부모가 되는 2040년대 이후부터 조부모와 같은 유치원을 다닌 원생이 크게 늘 것이다.[4] 그래도 10%는 못 넘겼다. 1964년 전국 초등학교 신입생 중 유치원에 다녀 본 사람은 1.3%에 불과했다. 즉, 신입생 100명 중 유치원 다닌 아이들이 1명 있을까 말까 하는 수준. 76학번(1957년생)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이 정도였으니 60년대 학번인 어르신들은 이보다 더 낮았을 것이다. 참고로 박근혜, 윤석열이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유치원 취원율은 1%대였다.[5] 그 시절 서울에 살던 사람들은 사대문안성저십리 정도만이 진짜 서울이라고 생각했고, 강남은 그냥 깡촌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어르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서대문구에 살고 친척이 송파나루 (지금의 석촌동, 송파동 일대)에 살았다고 하면 친척을 보기 위해 용산구나 성동구까지 가서 배를 타고 거기서 1~2시간에 1대 오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지금의 강남 지역이 고향인 어르신들은 유치원에 다녀 볼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했던 셈이다.[6] 이는 대령급 이상인 장교, 상사급 이상인 부사관, 3급 이상인 공무원 (7급으로 시작한 5급 이상과 9급으로 시작한 7급 이상도 대부분 포함된다.), 총경급 이상인 경찰관 (순경에서 시작한 경우는 경위 이상), 소방정급 이상인 소방관, 교정관급 이상인 교도관, 20년 이상 근무한 교수, 시장, 군수, 도지사, 구청장, 국회의원, 차관, 대기업 회장, 나이가 많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스포츠 감독으로 가도 마찬가지. 특히 대통령은 단 2명(박근혜, 윤석열)만 유치원을 다녀 봤다고 한다.[7] 종로구중구용산구.[8] 강서구양천구영등포구구로구.[9] 동작구관악구금천구.[10] 강동구송파구.[11] 도봉구강북구성북구노원구.[12] 동대문구중랑구성동구광진구.[13] 마포구서대문구은평구.[14] 서초구강남구.[15] 1910년~1991년생까지는 중앙유치원이 시내에 있을 때 졸업했으나, 1992년생부터는 흑석동으로 이사 간 후 졸업했다.[16] 양주군: 창동, 도봉동, 방학동, 쌍문동 월계동,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 묵동, 중화동, 상봉동, 망우동, 신내동, 시흥군: 잠원동, 양재동, 반포동, 서초동, 방배동, 사당동, 남현동, 신림동, 봉천동, 가산동, 독산동, 시흥동, 김포군: 목동, 신월동, 신정동, 방화동, 개화동, 공항동, 과해동, 가양동, 등촌동, 염창동, 발산동, 화곡동, 부천군: 오쇠동, 오곡동, 오류동, 온수동, 천왕동, 궁동, 항동, 고척동, 개봉동, 광주군: 내곡동, 염곡동, 원지동, 개포동, 논현동, 학동, 삼성동, 역삼동, 청담동, 대치동, 신사동, 압구정동,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율현동, 세곡동, 장지동, 문정동, 가락동, 송파동, 삼전동, 석촌동, 방이동, 오금동, 거여동, 마천동, 문정동, 장지동, 풍납동, 천호동, 암사동, 길동, 명일동, 고덕동, 상일동, 강일동, 둔촌동, 성내동, 고양군: 진관동. 이들 중 유치원이 있었던 곳은 천호동 정도가 거의 유일했다. 이렇게 되어 이들 지역 중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은 동은 강동구 천호동, 성내동, 암사동, 길동, 명일동과 송파구 풍납동 정도에 불과했다.[17] 이 과정에서 이름만 남고 사라져 버린 산도 많다. 조계사의 말사 중 하나로 강남 지역에서 가장 큰 사찰인 봉은사가 있는 수도산이 대표적.[18] 대표적으로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등이 있다.[19] 도 단위로 내려가도 부산, 대구, 광주 등 그 도의 최대도시에서 취원율이 가장 높았다.[20] 강동구 성내동 소재.[21] 강동구 성내동 소재.[22] 강동구 천호동 소재.[23] 아침 시간대에 봉은사에 기도를 드리러 가면 봉은사 진여문 근처에서 잠실의 유치원 버스를 볼 수 있다.[24] 주로 천안시. 실제로 천안에서 서울로 통근하는 사람들도 있다.[25] 해외에 이민 등을 가서 거주하는 재외국민의 상당수가 한국 주소를 서울이나 수도권에 두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주한 미국대사 성 김 (1960년생(64세), 1964~1966년에 유치원을 다녔다.)인데, 한국에서 유치원국민학교를 다니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짐 팩은 아예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그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26] 엄밀히 말하면 '영어유치원'이라는 명칭은 불법이다.[27] 현행법상 이들은 ‘유치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한다.[28] 출생지는 대구이지만, 동남 방언의 억양은 남아 있지 않고 표준어 억양으로 구사한다.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생(72세)이므로 1956년~1957년경 유치원을 다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대통령들이 가난으로 유치원을 다녀 보지 못하거나 (최규하, 문재인), 자신의 고향에서 유치원이 너무 멀거나 (노태우, 노무현), 자신의 고향에 유치원이 설립되기 이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초로 유치원을 다녀 본 대통령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윤석열.[29] 장영신은 1936년 7월 22일생(87세)이므로 1940~194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순재 (1934년 11월 16일생)보다 겨우 2살 어린데도 유치원을 다닌 것은 그녀가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셈이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인들이 유치원을 다녀 보지 못한 것으로 보면 엄청난 부유층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40년 장영신이 4세이던 해에 창씨개명이 실시돼 일본식 이름으로 유치원을 다녔는데, 그녀의 일본식 이름은 불명.[30] 구봉서는 1926년 11월 5일생이고 2016년 8월 27일에 사망했으므로 1930~193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는데, 1931~1932년 사이에 다녔다. 1930년대면 일본어한국어보다 우위이던 시절로, 그 시절은 유치원이 매우 드물던 시절이라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을 것이다. 게다가 그 시절이면 크리스마스도 평일이었다.[31] 1978년 3월 14일생( 46세)이므로 1982~1984년에 유치원을 다녔을 것이다. 1978년생들은 버스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고, 대부분 유치원 시절에 전무후무한 음력 윤10월 (1984년 11월 23일~12월 21일)을 경험한 셈. 그는 유치원 시절 풍납동이 침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32] 1988년 3월 6일생(36세)이므로 1992~1994년에 유치원을 다녔을 것이다. 악명높은 풍납동 침수와 1994년 폭염은 이들이 유치원 시절에 겪었다. 그 시절에는 국내에 판다가 막 들어온 시점이고 (밍밍과 리리), 해외여행이 막 자유화된 시점이라 유치원생 중 해외여행을 가 본 사람의 비율이 한 자릿수였다.[33] 초이유치원에 다녔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우병우 본인이 그런 의혹을 일축했다. 물론 우병우 본인은 시골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34] 윤석열은 1960년 12월 18일생(63세, 음력 11월 1일)이라 1964~1966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윤석열이 유치원을 다니던 1960년대에는 유치원 취원율이 1%대에 불과했으므로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 전차가 있고, 문맹이 현재보다 더 많아서 장년층 (대부분 여성)에서도 문맹을 볼 수 있었으며,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여겨졌다. 다만, 의과대학 건물 내부는 그 당시에도 금연 구역이었다. 여담으로, 그의 유치원 시절 장래희망은 목사였다. 윤석열이 자신의 이름을 '윤성녈'로 발음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그렇게 불러 왔기 때문에 그 발음이 익숙해서 그런 것이다.[35] 인천 출생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11년 스페인으로 이민을 갔다.[36] 전라남도 강진군 출생이다.[37] 시인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생이고, 1968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 (살아 있었다면 아마 102세가 됐을 것이다.) 그의 세대에는 유치원이 매우 드물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 서울은 매우 작았고, 강남 지역은 아직 시골이었으며, 아직 분단 이전이라 북한도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었다. 거기에 현재의 초등학교 격인 보통학교시험을 치러서 들어갔다.[38] 이순재는 1934년 11월 16일생(89세)이므로 또래인 1934년생들은 주로 1938~1940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당시에는 유치원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게다가 보내더라도 거의 남자만 보냈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크리스마스가 평일이었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으므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당일에 할 수 있었다. (1934년생들은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간이학교 졸업생은 간이학교 졸업 후에도) 크리스마스에 쉬지 못했을 정도.) 엄밀히 말하면 이순재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군이지만 (이 때문에 이순재는 실향민이 됐다.) 유치원은 서울에서 다녔으며, 유치원 말미인 1940년에는 히로키 준사이(廣城順載; ひろきじゅんさい)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했다. 아마 그의 유치원 졸업앨범에는 본명인 '이순재'가 아니라 '히로키 준사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적혀 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높은 영아사망률로 출생신고 자체를 몇 년 늦게 해서 7세 이상인 유치원생이 현재보다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1934년생이 유치원을 다니던 당시에는 민주당이 남부에서 지지율을 높이고 있었으나 한반도에는 아직 정당이 없었다.[39] 김수용은 1966년 10월 18일생이라 1970~197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들은 100원짜리 지폐가 있고 풍납동, 잠실동, 암사동 등이 시골이며 서울의 대중교통이 버스뿐이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닌 셈. 참고로 김수용이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에 전한길 (1970년 8월 21일)과 이기상 (1971년 6월 25일)이 태어났다.[40] 유재석은 1972년 8월 14일생(51세)이므로 1976~1978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말 그대로 교련 수업과 미니스커트 단속이 있던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셈이며, 그 시절이면 용인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유도학교가 송파구 풍납동에 있었고,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41] 용준형은 1989년 12월 19일생(34세)이므로 또래인 1989년생들은 주로 1992~1995년에 유치원을 다녔다. 용준형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2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으므로 유치원은 개명하기 전에 쓰던 '용재순'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42] 김현수는 1988년 1월 12일생(36세)이므로 1987년생들과 같은 1991~1993년에 유치원을 다녔다. 사실상 이들은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고 처음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을 때 유치원을 다녔던 셈. 그와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사람으로는 류현진, 최다은, 손고운, 강정호, 차우찬, 기보배, 최주환 등이 있다.[43] 이선재 (본명 이혜선)는 1974년 4월 30일생(49세)이라 1978~1980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1974년생이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은 박정희가 암살을 당하던 시점이었고, 미니스커트 단속이 있었던 데다가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상당히 자연스러운 시절인 데다 에버랜드는 자연농원이라는 이름의 신생 테마파크였다. 엄밀히 말해 이선재는 예명이므로 유치원은 본명인 이혜선으로 다녔다.[44] 당시 유치원은 4세부터 입학이 가능했으므로 류수영(1979년 9월 5일생, 44세)은 1983년에 유치원 입학 대상이 됐다. 이들은 전무후무한 음력 윤10월 (1984년 11월 23일~12월 21일)과 가장 늦은 설날 (1985년 2월 20일)을 유치원 시절에 겪었다. '류수영'이라는 이름은 연예인이 된 후 예명으로 지은 이름이므로 유치원은 본명인 '어남선'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45] 당시 유치원은 4세부터 입학이 가능했으므로 장나라 (1981년 3월 18일생, 43세)는 1985년부터 유치원 입학이 가능했다. 장나라의 또래인 1981년생은 보통 1985~1987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으나 1981년 1월, 2월생들은 1984~1986년 사이에 다녔다. 빠른 1981년생들은 유치원 시절 전무후무한 음력 윤10월 (1984년 11월 23일~12월 21일)을, 1981년생들은 20세기 마지막 음력 윤6월 (1987년 7월 25일~8월 22일)을 경험한 셈. 이들은 유치원 때 여름만 되면 풍납동, 성내동, 망원동 등이 물에 잠겼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장나라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라 유치원생 중 해외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 1% 미만이었고 대학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을 무시하던 시절이었다.[46] 박태환은 1989년 9월 27일생이라 1992~1995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들은 유치원 시절 풍납동 침수를 겪은 셈. 그 시절이면 4년제 대학 졸업자들이 9급 공무원 시험고졸들이나 보는 시험이라며 무시하고 (게다가 당시 9급 공무원 시험 과목은 국어, 영어, 한국사, 사회, 수학, 국민윤리, 전자계산일반 등 7과목이었고 행정학, 행정법은 아직 시험 과목이 아니었다.) 거들떠도 보지 않던 시절이었고, 상위권 대학생들은 7급 공무원 시험도 무시했다고 한다.[47] 하승진은 1985년 8월 4일생(38세)이며, 그의 또래인 1985년생들은 4세부터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으므로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유치원에 다녔다. 다만 1985년 1~2월생들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유치원에 다녔는데, 1985년 1~2월생들은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원 시절에 봤고, 나머지 1985년생들은 롯데월드 어드벤처 개장 (1989년 7월 12일)을 유치원 시절에 경험했다. 심지어 그 시절이면 일본은 월드컵조차 못 나갈 때였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은 홍콩과 2번, 인도네시아와 1번 비기고 (그것도 다 0:0) 북한에 2:0으로 지는 등 졸전을 거듭해 월드컵에서 탈락) 그야말로 하승진과 이다지 (1985년 3월 11일생)는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셈. 2020년 하승진의 유치원 시절 사진이 공개됐는데, 유치원 시절에 초등학생 수준으로 키가 컸다고 한다. 실제로 하승진은 본인이 유치원 시절에 키 160cm (이는 유치원생 평균보다 40cm 이상 더 큰 것이며, 거의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캄보디아 등 동남아 국가의 성인 남성 평균 키에 가깝다. 통계상으로 동남아 국가의 평균 키가 하승진의 유치원 시절 키 (160cm)와 비슷한데, 베트남은 164cm, 라오스는 160cm, 인도네시아는 163cm, 태국은 168cm, 필리핀은 163cm, 캄보디아는 163cm, 미얀마는 165cm로 평균키가 대부분 170cm 미만이다. 유치원 아이들 중 0.1% 미만이 키가 이 정도이다.), 현재 221cm를 찍은 것으로도 모자라 할아버지가 190cm, 아버지와 누나가 200cm를 넘는 등 가족 모두가 키가 크다.[48] 이다지는 1985년 3월 11일생(39세)이므로 1989~1991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그야말로 1985년생들은 유치원 시절에 국군의 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셈이며, 1985년생인 농구선수 하승진과 같은 유치원을 다닌 셈이지만, 키는 하승진이 40~50cm는 더 컸다. 게다가 그 시절이면 일본은 아직 월드컵에 못 나갔고 경기도 북부에 고속도로가 없었던 시절이다. 오빠 (1979년생), 언니 (1982년생)와 같은 유치원 출신인지는 불명.[49] 심지어 지방 소재 대학의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교사들도 서울로 오는 경우가 있다.[50] 풍납토성으로 인해 재개발이 제한된 것은 물론, 잦은 수해로 ‘물납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받게 되었다.[51] 2004년 3월 5일 폭설, 2010년 1월 4일 폭설 당시에는 진짜로 휴원한 적이 있다. 2010년 중부권 폭설 사태 당시 서울에서만 25.8cm라는 엄청난 눈이 내려 유치원들이 모두 휴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풍납토성은 엄청난 종이박스 천지[52] 1927년생(현재 97세). 그 시절이면 유치원이 매우 드물었던 시절이고, 시인 김수영 (1921.11.27 출생~1968.6.16 사망)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이다. 이 시점에는 아직 분단되지 않아 한국인들은 북한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데다 풍납토성몽촌토성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의 문화재였고, 봉은사 역시 경기도의 절이었다.[53] 그 시절이면 대학교 캠퍼스에 경찰이 배치될 정도로 살벌했다. (물론 데모 진압만이 아닌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도 담당했다.) 이 시기 유치원을 다닌 사람은 서경석, 박성호, 유재석, 신현준 등이 있었는데 당시 유치원 취원율은 10% 미만이었다.[54] 이 기간 중 실제 등원한 날 수는 10일이었는데, 9월 17일은 올림픽 개막식, 9월 25일9월 26일추석 연휴 (당시 추석은 2일 연휴였다.), 10월 1일국군의 날로 공휴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치원을 다닌 사람은 1982~1984년생이다.[55] 이런 경우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몇 동에 사는지에 따라 유치원이 갈릴 정도.[56] 한국의 도시 중 인구가 가장 많고, 미국의 어지간한 주들도 서울보다 인구가 적다.[57] 다만, 서울불교계 유치원은 대개 소규모 에서 관리하고, 조계사봉은사 등 대규모 사찰이 관리하는 곳은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노원구의 삼육대학교 부속 유치원은 무려 재림교 미션스쿨이다.[58] 종로구 14만 9,384명 (1.6%), 중구 12만 5,240명 (1.3%), 용산구 23만 40명 (2.3%), 성동구 29만 3,556명 (3.1%), 광진구 34만 6,682명 (3.6%), 동대문구 34만 2,837명 (3.6%), 중랑구 39만 4,702명 (4.1%), 성북구 43만 7,153명 (4.5%), 강북구 30만 8,055명 (3.2%), 도봉구 32만 5,257명 (3.4%), 노원구 52만 3,037명 (5.5%), 마포구 37만 1,890명 (3.8%), 서대문구 31만 2,173명 (3.2%), 은평구 47만 9,835명 (4.9%), 강서구 58만 185명 (6.1%), 양천구 45만 4,251명 (4.7%), 영등포구 37만 9,480명 (3.8%), 구로구 40만 4,408명 (4.2%), 금천구 23만 1,733명 (2.4%), 동작구 39만 1,220명 (4.1%), 관악구 49만 5,060명 (5.1%), 서초구 42만 5,126명 (4.4%), 강남구 53만 9,231명 (5.6%), 송파구 66만 7,960명 (6.9%), 강동구 45만 9,970명 (4.4%)로 강북 지역에 468만 4,802명 (48.3%), 강남 지역에 505만 2,160명 (51.7%)가 살고 있다. (옛날 군(郡) 관할대로 조립해 보면 광주군 153만 6,528명 (대왕면 11만 6,754명, 언주면 44만 559명, 중대면 47만 9,736명, 구천면 49만 9,389명), 양주군 110만 2,038명 (구리면 25만 3,744명, 노해면 84만 8,274명), 시흥군 199만 9,134명 (동면 84만 4,685명, 신동면 52만 9,883명, 북면 62만 4,566명), 부천군 27만 5,748명, 김포군 104만 4,436명 (양동면 83만 5,439명, 양서면 20만 8,997명), 경성부+고양군 371만 581명 (경성부 39만 1,166명, 용강면 21만 5,957명, 한지면 34만 7,631명, 뚝도면 76만 5,965명, 숭인면 101만 6,296명, 연희면 39만 7,042명, 은평면 51만 9,502명, 신도면 5만 7,022명)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치원은 강북 지역에 더 많다. 이는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자녀를 영어학원 유치부에 많이 보내고, 해외로 이민 등을 가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전 주소지가 대부분 서울 강남 지역이기 때문이다.[59] 송파구 문정동에 있었다. 사건 당일 폐원 조치되었고, 소망유치원이 있던 건물 자체는 2023년 현재도 남아있다.[60] 희생자들은 대부분 1993년생이었으므로 살아 있었다면 30세이다. 김순덕은 이 사고의 여파로 큰아들을 잃고 뉴질랜드 이민을 떠났다.[61] 초대 원장은 제2공화국 시기에 국무총리 (정부수반. 국가원수는 윤보선이었다.)까지 오른 장면. 장영신이 이 곳을 졸업했다. 또한 멀지 않은 거리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캠퍼스도 있다.[62] 2020년 늦봄에 코로나19 사태를 또다시 키운 이태원 클럽이 이 곳에 있다. 그 여파로 여름까지 코로나 확산세가 진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2022년 10월 29일에는 이태원 압사 사고가 발생해 서울은 물론, 전국의 모든 유치원이 할로윈 행사를 취소하게 만들었다.[63] 지금이야 공무원의 추악한 현실들이 밝혀지면서 많이 줄어들었지만 세간의 인식상 공무원 시험 학원, 고시원, 독서실들로 즐비한 동네인데 당시에는 유치원이 먼저 들어올 정도로 인구가 많았다. 당시에는 인근의 대방동, 상도동, 흑석동도 노량진 생활권이었다.[64] 1930~40년대에도 노량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등포유치원 등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개원 초기에는 동작구 노량진동, 대방동, 상도동은 물론 저 멀리 영등포구 여의도동관악구 신림동, 봉천동에서도 오는 경우가 있었다.[65] 길동, 둔촌동, 명일동, 고덕동, 상일동, 강일동, 성내동, 암사동. 이들 중 강일동은 가장 오랫동안 시골로 남아 있었다.[66] 지금이야 풍납토성으로 인해 재개발이 제한돼 버려 풍납동이 송파구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동네이지만, 과거에는 천호동에 가까워 송파구에서 문명의 혜택을 가장 일찍 받은 동네였다. (게다가 여름에는 수해가 잦아서 ‘물납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받을 정도이다.) 송파구의 다른 동네들이 1970년대 이후에야 겨우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은 (심지어 엄청난 부촌, 롯데월드 등으로 유명한 잠실동마저도 1970년대에 유치원이 처음 들어왔지만 현재는 아파트 단지에 공•사립 유치원이 모두 있는 곳도 있을 정도.) 반면 풍납동에는 1950년대에 이미 유치원에 다닌 아이들이 있었을 정도. 다만 이들은 극소수로, 현재 풍납동에 사는 풍납동 출신 어르신들은 거의 유치원에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송파구 풍납동에서 성애유치원으로 통학하던 아이들은 주로 현재의 씨티극동아파트 및 풍납시장 근처에서 살았으며, 경당역사공원 이남의 풍납1동이나, 풍납2동에 살던 아이들은 거리로 인해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풍납동 토박이들은 풍납1동을 윗마을, 풍납2동을 아랫마을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에 풍납동에 살던 사람들 중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풍납1동 (윗마을) 거주자가 대부분이었고 아랫마을 거주자는 거의 현재의 갑을아파트나 미성아파트 일대 거주자였다.) 이들은 대체로 어려서부터 풍납동에 살던 원주민들로, 풍납토성이 아직 문화재라는 인식이 없던 시절에 태어나 어린 시절 겨울에 눈이 오면 자루포대를 가지고 풍납토성에서 눈썰매를 타거나 서울아산병원 근처의 한강에서 얼음썰매를 타고 놀았고 초등학교는 구서국민학교 (현 천호초등학교), 중학교는 강 건너 성동구의 한양여중, 무학여중, 배명중 등지로, 고등학교는 경기고, 한양여고, 배명고 등으로 갔으나 (풍납동에는 버스가 없어 천호동까지 가야 했다.), 현재는 토성 뒤편의 빌라다세대주택, 혹은 토성 근방의 아파트에 살거나, 살던 곳이 문화재에 수용되어 고향을 버리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영향으로 지금도 천호동이나 성내동의 유치원에는 송파구 풍납동 거주 원생도 있고, 풍성로에도 강동구의 유치원 (주로 천호동 천호유치원이나 성내동 유정유치원, 준현유치원.) 버스가 운행할 정도이다. 반대로 강동구에도 우일유치원 등 풍납동의 유치원 버스가 운행하기도 한다. 현재는 더 멀리 경기도 하남시, 구리시에서도 온다.[67] 당시 방이동에서 성애유치원으로 온 유아들은 현재의 올림픽공원 일대에 살았다가 올림픽공원 조성으로 인해 고향이 철거되면서 실향민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내천을 건너고 풍납동, 성내동을 거쳐서 가야 했기 때문에 풍납동 또는 성내동 거주자들보다는 드물었다.[68] 대부분 풍납시장 근처의 풍납1동 거주.[69] 지금이야 엄청난 부촌으로 인정받지만, 당시 한남동에는 단국대학교가 있었던 대학가였다.[70] 주로 현재의 장미아파트, 파크리오아파트 일대에 거주했던 유아들이 이 테크를 썼다.[71] 과거 풍납동에서 공부를 잘 하는 여학생들은 천호초-한양여중-한양여고 테크를 탄 경우도 있고, 성동구의 유치원으로 가는 강남, 송파구 출신 유아는 주로 성수동으로 간다.[72] 1960년대에 지금의 노원구 월계동, 공릉동에 사는 아이들이 광운대역이나 신공덕역, 화랑대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대문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상계동 수락리버시티 3, 4단지 거주 아동이 경기도 의정부시로 가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남양주시 진접읍, 오남읍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73] 주로 기차로 연결되는 별내면, 퇴계원읍, 구 미금시 지역. 사릉역 또는 덕소역 이후에 사는 아이들은 동대문구로 원정 오는 경우가 드물다.[74] 성산동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있는 그 동네다.[75] 이화유치원은 중구에서 서대문구로 이전했다.[76] 2020년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코로나19 사태를 엄청나게 키운 사랑제일교회가 이 곳에 있다.[77] 1970년 성동~성북 (현 광운대) 구간 폐선.[78] 송파구 거여동 소재. 당시 송파출장소는 지금의 송파구 장지동, 문정동, 가락동, 오금동, 방이동, 송파동, 삼전동, 석촌동, 거여동, 마천동을 관할했다. (잠실동은 성동구 본청 관할, 풍납동은 천호출장소 관할) 잠실지구의 경우 1970년대에 잠실 4단지에 유치원이 설립됐으나 이름은 불명이고, 1976년에는 신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설립됐다. (1982~1985년 휴원).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치원은 1984년 개원한 석촌유치원이다. 강남3구 중 유치원이 가장 일찍 들어온 곳이 송파구인 셈. 아이러니하게도 송파구에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먼저 받은 동은 풍납토성으로 인해 재개발이 제한돼 송파구에서 낙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동네인 풍납동인데, 1950년대에 이미 풍납동 거주 아동이 천호동에 있는 유치원을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풍납동에 살던 아이들은 풍납동 일대에 펼쳐진 논밭과 풍납토성을 가로질러 유치원을 통학했다고 한다. 1950년대에 송파구에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은 동은 풍납동방이동 (구 이동. 구 방이동 지역은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단 둘뿐이고 나머지 잠실동, 신천동, 송파동, 석촌동, 가락동, 삼전동, 문정동, 장지동, 오금동, 거여동, 마천동은 유치원 교육의 혜택에서 열외였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 방이동 거주 유아들도 현재의 올림픽공원 내부에 살다가 1980년대에 실향민이 된 사람들이다.) 심지어 풍납토성 바로 옆에도 유치원이 두 곳 있다. 해당 유치원은 우일유치원 (유치원 창문으로 풍납토성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겨울에 눈이 오면 일부 원생들이 플라스틱 눈썰매나 비닐포대, 종이박스 등을 가지고 풍납토성에서 눈썰매를 탈 정도. 그러다가 사회복무요원 등 관리인들이 달려온다)과 동화나라유치원으로, 한강극동아파트나 현대리버빌아파트, 풍납현대아파트, 풍납극동아파트, 풍납쌍용아파트, 연지토성아파트, 송파해모로아파트, 송파힐스테이트아파트, 토성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주로 이 곳에 다닌다고 한다. (다만, 풍납현대아파트, 풍납쌍용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현대유치원으로 가기도 한다.) 잠실올림픽아이파크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경우는 우일유치원으로 많이 가지만, 드물게 파크리오아파트에 있는 햇빛유치원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동아한가람아파트, 미성아파트, 갑을아파트, 풍납강변현대아파트, 풍납신동아아파트 등에 사는 아이들은 한가람유치원 (풍납백제문화공원에서 매우 가깝다.)으로, 신성노바빌아파트나 씨티극동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거의 강동구 천호동의 유치원으로 가는데, 풍납동을 가로지르는 풍성로에도 천호유치원 (천호동), 유정유치원 (성내동), 준현유치원 (성내동) 등 강동구의 유치원에서 오가는 버스가 있을 정도면 말 다 한 거다. 빌라나 다세대주택에 살아도 인근 아파트와 비슷하게 유치원을 다닌다고 한다. 심지어 과거의 대한유도학교 부지에 세워진 잠실올림픽아이파크 아파트에서 성내동 준현유치원, 유정유치원으로 가는 아이들도 있다. 또한 강동구 둔촌동에도 송파구 방이동의 올림픽유치원, 리아유치원 버스가 운행하기도 한다. 현재는 하남시 감북동, 감일동, 학암동과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복정동에서도 온다.[79] 1968년 폐원.[80] 주로 풍납시장 이북의 풍납1동. 이들은 풍납토성을 가로질러 천호동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유치원에 갔다.[81] 의외로 송파구는 1965년에 유치원이 들어왔다. 해당 유치원의 첫 번째 졸업생들은 현재 50대 후반이 됐다.[82] 1950년대 이전에도 간간히 봉천동에 살던 아이들이 걸어서 영등포유치원이나 노량진교회 부설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83] 그 시절이면 대학교에서 데모가 끊이지 않고, 무려 대치동(!!!)에 초가집이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치동에 있던 초가집은 하이스턴 아파트 부지에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 강남에 대한 인식은 그저 ‘말만 서울이고 실제로는 어디 경기도에 있는 깡촌’이었다. 그 이전에는 압구정동, 신사동 등 일명 '테북' 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 용산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가는 아이들이 간간히 있었으나, 2000년대 들어 그런 경우는 없어졌고 오히려 송파구 잠실동, 삼전동, 가락동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 오야동, 심곡동, 고등동에서 원정 오는 경우가 늘었다. 송파구 잠실동, 삼전동에 사는 경우는 테북, 송파구 가락동과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 오야동, 심곡동, 고등동은 테남 지역으로 많이 간다.[84] 1972년 이전에는 염창동, 등촌동에 사는 아이들이 영등포유치원 등으로 걷거나 버스를 타고 등하원을 하는 경우가 간간히 있었을 뿐, 강서구에 살던 유아 대부분은 유치원에 다녀 보지 못했다.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 강서구에 대한 인식은 그저 ‘공항 있는 어디 경기도 깡촌’ 정도였다. 현재는 역으로 김포시, 부천시, 인천광역시 계양구에서까지 올 정도면 인구가 많이 늘었다.[85] 다만, 1950~60년대에도 구로구 거주 아동이 다른 지역으로 유치원 원정 통학을 한 적은 있었다. 1950년대 이전에는 주로 영등포유치원 등지로 원정 통학을 했고, 1960년대에는 구로구 오류동 등지에 사는 아이들이 부천의 소사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역으로 광명시 거주 유아들이 구로구의 유치원으로 오기도 한다.[86] 1940~60년대에도 양천구 목동에 살던 아이들이 안양천 너머의 영등포유치원 등으로 원정 통학을 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오히려 부천시에서 역으로 원정 오기도 한다.[87] 유치원 교사 급식 이물질 혼입 사건이 이 곳에서 발생했다.[88] 다만, 금천구에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먼저 받은 동네는 금천구청역 (구 시흥역)이 있는 시흥동인데, 1950년대에 이미 시흥동 거주 아동이 안양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원생들은 금천구 독산동시흥동에 주로 살았고 드물게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살던 유아들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시흥군 소하읍에 살던 아이들도 왔다고 한다.[89] 이전에는 잠원동, 반포동 (대략 고터 일대부터 반포역 부근까지)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 용산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가는 아이들이 간간히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그런 경우는 줄었고, 오히려 경기도 과천시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금토동에서 원정 오는 경우가 늘었다.[90] 다만, 도봉구에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먼저 받은 동네는 창동역이 있는 창동과 의정부에서 가까운 도봉동, 방학동인데, 1950년대에 이미 창동, 도봉동, 방학동 거주 아동이 의정부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91] 1960년대에 지금의 중랑구 신내동, 상봉동에 사는 아이들이 망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당시에 중랑역, 상봉역, 양원역, 신내역은 없었다. 상봉역은 1996년 (중앙선 2010년), 중랑, 양원역은 2005년, 신내역은 2013년에 와서야 개통했다.), 중화동에 사는 아이들이 걸어서 동대문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경기도 구리시에서 중랑구로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