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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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제13-14대
이종찬

제15대
이명박[1]

제15대
노무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李明博 | Lee Myung-bak


파일:new_mb.jpg

출생
1941년 12월 19일 (82세)
오사카부 나카카와치군 가미무라 후쿠이도쵸우3초메 52[1][2]
(現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라노구 가미미나미정3초메 4-15)[3]
사저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학동로23길 42[4]
재임기간
제17대 대통령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서명
파일:이명박 서명.svg
[5]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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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 이씨[1]
등록기준지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면 덕성동 538
(現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리 538)
부모
아버지 이충우, 어머니 채태원
형제자매
이상은, 이상득
누나 이귀선,[2] 이귀애[A]
남동생 이상필[A]
여동생 이윤진[3]
배우자
김윤옥
자녀
장녀 이주연, 차녀 이승연,
삼녀 이수연, 장남 이시형
학력
포항영흥국민학교 (졸업)
포항중학교 (졸업)
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반 / 졸업)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 / 학사)
병역
전시근로역 (기관지 확장증)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4]
신체
175cm[5], 70kg, B형
소속 정당
[6]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4, 15
약칭
MB,

청계(淸溪)[7]



파일:이명박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6.2. 제17대 대통령 퇴임사
8. 저서
9. 대중 매체에서
10. 가족 관계
11. 각종 타이틀
12. 선거 이력
13. 소속 정당
14. 여담
1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취임 선서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2. 약력[편집]


  • 1954.2. 포항영흥국민학교 졸업
  • 1957.2. 포항중학교 졸업
  • 1960.2. 동지상업고등학교 졸업
  • 1964.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7]
  • 1965.2.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1965. 현대건설 경리과 평사원
  • 1976. 한국포장건설 사장
  • 1977.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 1978.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 1978. 한국도시개발 대표이사 사장
  • 1978. 한국철강협회 부회장
  • 1978. 구국여성봉사단 운영위원[8]
  • 1980. 해외건설협회 업계대표 부회장
  • 1980.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업계대표 부회장
  • 1981. 대한알루미늄 사장
  • 1981. 대한수영연맹 회장[9]
  • 1982. 현대엔지니어링 사장
  • 1982.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 1982.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겸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 1982. 체육훈장 백마장·거상장 수훈
  • 1983.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 1983. 해외건설협회 이사
  • 1983. 동남아경제협력 건설분과 위원장
  • 1984. 아시아수영연맹 회장
  • 1984. 국제수영연맹 집행위원
  • 1984.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
  • 1985. 한라건설 대표이사 사장
  • 1985. 금탑산업훈장 수훈
  • 1986. 주한 부탄 왕국 명예총영사
  • 1986. 체육훈장 거상장 수훈
  • 1987.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회장
  • 1987. 현정국토개발상 수상[10]
  • 1988.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 1988. 한무쇼핑 대표이사 회장
  • 1988. 현대엔진공업 대표이사 회장
  • 1989. 현대종합목재 대표이사 회장
  • 1989. 한·소련 경제협회 부회장[11]
  • 1990. 현대자원개발 대표이사 회장
  • 1990. 한국항만협회 이사
  • 1990. 대명기업 대표이사[12]
  • 1990. 대명통상 대표이사
  • 1991. 한국사회발전연구소 이사장
  • 1991. 동북아민간경제협회 회장
  • 1992.5.30. ~ 1996.5.29. 제14대 국회의원 (초선 / 전국구 25번 / 민주자유당)
  • 1992. 6.3동지회 회장[13]
  • 1992. 미국 아칸소 주 명예대사
  • 1993. 한국청년실업인협회 회장
  • 1993.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운영이사회장
  • 1993. 제1차 세계한인상공인대회 조직위원장[14]
  • 1993. 부동산임대이명박 대표[15]
  • 1995. 삼청로터리클럽 회장
  • 1995.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 1995. 소망교회 장로[16]
  •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민주자유당 경선 후보[17]
  • 1995. 민주자유당 종로구 지구당위원장
  • 1996. 신한국당 종로구 지구당위원장
  • 1996.5.30. ~ 1998.2.21. 제15대 국회의원 (재선 / 서울 종로구 / 신한국당)[18]
  • 1996. 한국국악협회 고문
  • 1997. 한나라당 종로구 지구당위원장
  •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한나라당 경선 후보[19]
  • 1998.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박사
  • 1998.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 등재[20]
  • 1999.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객원연구원[21]
  • 1999. BBK투자자문 대표이사 회장
  • 2000. 아시아·태평양 환경 NGO 한국본부 총재[22]
  • 2000. 캄보디아 훈 센 총리 경제고문
  • 2000. LKe뱅크 대표이사 회장
  • 2000. e뱅크증권 중개 대표이사 회장[23]
  • 2000. 한국장애인정보화협의회 명예회장
  • 2001. 해외한인무역협회 고문[24]
  • 2001.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분과위원장
  • 2002.6.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한나라당 후보
  • 2002.7.1. ~ 2006.6.30. 제32대 서울특별시장 (민선 3기 / 한나라당)
  • 2002. 서울시립대학교 운영위원장[25]
  • 2002. 제2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 2004. 서강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 2004. 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학교 명예이학박사
  • 2005. 몽골 몽골국립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 2005. 목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 2006.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장
  • 2007. 한나라당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위원장
  •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 2008.2.25. ~ 2013.2.24.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 2008.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명예박사
  • 2009.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명예행정학박사
  • 2011. 프랑스 파리제7대학교 명예예술학·문학·철학·고전학박사
  • 2011.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대학교 명예환경학박사
  • 2011. 덴마크 코끼리훈장 수훈
  • 2013.2. 무궁화대훈장 수훈
  • 2013. 캄보디아 훈 센 총리 경제고문[26]


3.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나 광복 이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성장했다.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하여 3학년 때는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4년 박정희 정부가 한일수교를 강행하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서 이에 반대하는 6.3 항쟁을 이끈다. 이것을 이유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 동안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65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현대건설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2년 만에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에 오르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1992년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14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정치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1~14대 종로구 국회의원 이종찬, 그리고 노무현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다. 서울특별시장 재임 당시 하이서울 브랜딩, 청계천 복원사업, 서울시 대중교통 시스템 개편 등의 정책을 수행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득표율 차이 22.53%p, 득표수 차이 5,317,708표로 꺾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27] 이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 평화적 정권교체에 해당한다.

2023년 기준 생존한 전직 대한민국 대통령[28] 중 최고령이며 생존한 전현직 대통령을 통틀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태어난 마지막 인물이다.


3.1. 이명박 시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서울시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이명박 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 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 정부/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어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어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 제17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연설문 보기]

선진화의 길, 다 함께 열어갑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00만 해외동포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하신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 그리고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엥흐바야르 남바르 몽골 대통령, 삼덱 훈센 캄보디아 총리, 후쿠다 야스오 일본 내각총리대신, 빅토르 줍코프 러시아 연방 총리, 무하마드 유수프 칼라 인도네시아 부통령을 비롯한 각국 경축사절과 내외 귀빈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국민 여러분의 부름을 받고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한없이 자랑스러운 나라, 한없이 위대한 국민 앞에 엄숙한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며 제게 주어진 역사적, 시대적 사명에 신명을 바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국민을 섬겨 나라를 편안하게 하겠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통합하겠습니다. 문화를 창달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겠습니다. 안보를 튼튼히 하고 평화 통일의 기반을 다지겠습니다. 국제사회에 책임을 다하고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겠습니다.

올해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잃었던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세계 역사상 최단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업을 동시에 이루어 내었습니다. 오로지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힘으로 일구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베푸는 나라로 올라섰습니다. 이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신화’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함께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입니다.

그것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진실한 삶의 이야기입니다.

독립을 위해목숨을 바친 선열들, 전선에서 산화한 장병들, 뙤약볕, 비바람 속에 땅을 일군 농민들, 밤낮없이 산업현장을 지켜낸 근로자들, 젊음을 바쳐 민주화를 일구어낸 청년들의 눈물겹도록 위대한 이야기입니다.

장롱속 금붙이를 들고 나와 외환위기에 맞섰던 시민들, 겨울 바닷가에서 기름을 걷고 닦는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사회 각 영역에서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수행해온 수많은 직장인들과 공직자들, 이들 모두가 대한민국 성공신화의 주역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내놓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떳떳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자부심이 미래를 여는 대한민국의 힘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로 가는 길을 찾아 열어가고자 합니다.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실의 제약을 여유롭게 바라보면서,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함께 전진하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60년을 시작하는 첫해인 2008년을 대한민국 선진화의 원년으로 선포합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결실을 소중하게 가꾸고, 각자가 스스로 자기 몫을 다하며, 공공의 복리를 위해 협력하는 사회, 풍요와 배려와 품격이 넘치는 나라를 향한 장엄한 출발을 선언합니다.

지난 10년, 더러는 멈칫거리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이제 성취의 기쁨은 물론 실패의 아픔까지도 자산으로 삼아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합니다. 실용정신은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합리적 원리이자, 세계화 물결을 헤쳐 나가는 데에 유효한 실천적 지혜입니다.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 개인과 공동체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삶을 구현하는 시대정신입니다.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이룩하는 데에 나와 너가 따로 없고, 우리와 그들의 차별이 없습니다. 협력과 조화를 향한 실용정신으로 계층갈등을 녹이고 강경투쟁을 풀고자 합니다.

정부가 국민을 지성으로 섬기는 나라 경제가 활기차게 돌아가고, 노사가 한마음 되어, 소수와 약자를 따뜻이 배려하는 나라

훌륭한 인재를 길러 세계로 보내고, 세계의 인재를 불러들이는 나라, 바로 제가 그리는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이룩하고자 하는 선진 일류국가의 꿈입니다.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신화는 이어질 것입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발전의 엔진에 다시 불을 붙여 더욱 힘차게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제가 앞장서고 국민 여러분이 하나 되어 나서면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이 시점에서 우리 함께 다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 흐름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세계는 우리를 저만치 앞질러가고 있습니다. 후발국들도 바짝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국가경쟁력은 떨어지고 자원과 금융시장의 불안이 우리 경제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국내 사정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중산층은 위축되고 서민생활은 어려워졌습니다. 계층간, 집단간의 관계는 여전히 갈등과 투쟁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시민사회는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권리주장이 책임의식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오고 있습니다. 분단국으로서 지고 있는 짐도 무겁습니다.

다음 60년의 국운을 좌우할 갈림길에서, 이 역사적 고비를 너끈히 넘어가기 위해서 저는 국민 여러분이 더 적극적으로 변화에 나서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변화를 소홀히 하면 낙오합니다. 변화를 거스르면 휩쓸리고 맙니다. 변화의 흐름을 타고, 변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더 빨리 변해야 합니다. 불합리하거나 시대에 맞지 않으면 익숙한 것들과 과감히 헤어져야 합니다. 방향은 개방과 자율, 그리고 창의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경제 살리기가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신성장동력을 확보하여 더 활기차게 성장하고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정부부터 유능한 조직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작은 정부, 큰 시장’으로 효율성을 높이겠습니다. ‘일 잘하는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앞으로 정부는 잘 하는 곳은 더 잘 하게 해주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힘이 되는 역할을 맡겠습니다.

꼭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은 민간에 이양하겠습니다. 공공부문에도 경쟁을 도입하겠습니다. 세금도 낮춰야합니다. 그래야 투자와 소비가 살>아납니다.

공무원 수를 점진적으로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는 빠른 시일 내에 혁파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머지않아 새 정부가 효율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업은 국부의 원천이요, 일자리 창출의 주역입니다. 누구나 쉽게 창업하고 공장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업인이 나서서 투자하고 신바람 나서 세계 시장을 누비도록 시장과 제도적 환경을 개선하겠습니다.

기술혁신을 추구하는 중소기업들이 활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들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해서 대기업들과 협력하고 경쟁하도록 돕겠습니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경영하는 기업인들이 존경받고,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이 사랑받아야 합니다.

노와 사는 기업이라는 수레를 움직이는 두 바퀴입니다. 어느 하나가 제몫을 못 하면 수레가 넘어집니다.

선진국에서는 노사분규가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과격한 투쟁은 결국 자멸을 가져온다,” 는 인식을 노사 모두가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노사문화의 자율적 개선은 선진화의 필수요건입니다. 이제 ‘투쟁의 시대’를 끝내고 ‘동반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기업도 노조도 서로 양보하고 한걸음씩 다가서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기업이 힘을 내야 합니다. 기업이 먼저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으로 노동자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이런 때 노동자도 더 열심히 일해 주어야 합니다. 불법투쟁은 지양하고 생산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노사관계가 건강해집니다. 정부도 원칙과 성의를 가지고 노력하겠습니다.

시장개방은 피할 수 없는 큰 흐름입니다. 수출산업이 경제의 큰 몫을 차지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국부를 늘려가야 합니다.

그러나 개방에 취약한 부문에서는 걱정이 많습니다. 특히 농어민들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국민 모두가 농어민의 아들딸입니다. 농업, 농촌, 농민 걱정이 곧 나라 걱정입니다. 대응책을 마련하는데 정부가 함께 하겠습니다.

농림수산업이 더 이상 1차 산업으로 머물러선 안 됩니다. 첨단 생산기술을 접목하고 유통 서비스 경영과 결합시켜 경쟁력 있는 2차, 3차 산업으로 업그레이드 해야 합니다.

해외시장 개척에도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농어민과 정부가 뜻을 합치고 지혜를 모으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고, 다 함께 건강하고 편안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은 국가가 보살펴야 합니다.

시혜적, 사후적 복지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능동적, 예방적 복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낙오자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됩니다.

여성은 시민사회와 국가발전의 당당한 주역입니다. 여성의 사회참여는 사회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양성평등 정책을 추진해서 시민권과 사회권의 확장에 힘쓰겠습니다. 더 많은 여성이 의사결정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기회를 늘리고 관련 제도를 개선하겠습니다.

생애주기와 생활형편에 따른 수요에 맞추어 맞춤형 보육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정부가 보육의 짐을 덜어주면 저출산 문제가 개선될 뿐만 아니라 삶의 질과 인적 자원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청년세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국내외에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젊은이들의 사회 진출을 돕겠습니다. 주거생활을 안정시킴으로써 개인 생활은 물론 사회의 안정 기반을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노인복지대책도 시급합니다. 노령연금을 현실화하고, 공공복지를 개선하겠습니다.

고령자를 위한 의료혜택과 시설을 늘리고, 근로의욕이 있는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도 힘쓰겠습니다.

장애인들에게도 더 따뜻한 배려와 함께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은 국가가 책임지고 보살피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선진화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선진화는 얼마나 훌륭한 인재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청소년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꿈과 활력의 발전기 입니다. 청소년들의 적성과 잠재력을 개발하고 디지털, 글로벌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적극 나서겠습니다.

교육개혁은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획일적 관치교육, 폐쇄적 입시교육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고 교육현장에 자율과 창의, 그리고 경쟁의 숨결을불어 넣어야 합니다.

학교유형을 다양화하고 교사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겠습니다. 그래야 공교육이 정상화되고, 사교육 열풍이 잦아들게 됩니다. 학생들의 적성과 창의력이 살아납니다.

대학의 자율화는 국가경쟁력 뿐 아니라 한국 사회 선진화의 관건입니다. 교육과 연구의 역량을 늘려서 세계의 대학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합니다. 지식기반사회의 전선에 서야 합니다.

교육의 기회를 질적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형편이 어려워도 공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복지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겠습니다.

과학이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고 선진화 시킵니다. 한국의 몇몇 과학기술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20년, 30년을 내다보면서 과학기술의 창의적 역량을 키워 가겠습니다.

우수한 과학도를 길러내고, 과학자를 존경하고 우대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과학기술이 미래로 가는 문을 열어줍니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거대기술에 대한 연구개발에 국가가 장기계획을 가지고 밀어 주어야 합니다. 대학과 기업과 정부의 연구개발 협력체제도 보다 실질화 하는 방안을 모색하겠습니다.

주택은 재산이 아니라 생활의 인프라입니다. 주거생활의 수준을 높이고 주택가격을 안정시키는 주거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가겠습니다.

국토의 구조를 미래지향적으로 개편하고자 합니다. 해양지향, 광역화는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미래의 생활양식에 필요한 공간 활용 방안도 마련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든 친환경, 친문화적 기조를 유지하여 국토의 건강성과 품격을 높여나가겠습니다.

환경보전은 삶의 질을 개선하고 환경산업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냅니다. 지구 환경 변화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상재해가 잦아지고 피해 규모도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탄소 배출을 줄이는 일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 경제가 이에 적응하려면 당장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참고 창의적으로 적응해야만 합니다.

식량, 환경, 물, 자원, 에너지 등과 관련된 정책 전반을 환경친화적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국가입니다. 최근 세계무대에서 주목받는 한류는 그런 전통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전통문화의 현대화와 문화예술의 선진화가 함께 가야 경제적 풍요도 빛이 날 것입니다.

이제는 문화도 산업입니다.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 문화강국의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문화수준이 높아지면 삶의 격조가 올라갑니다. 문화로 즐기고, 문화로 화합하며, 문화로 발전해야 합니다.

정부는 우리 문화의 저력이 21세기의 열린 공간에서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은 더 넓은 시야, 더 능동적 자세로 국제사회와 더불어 함께하고 교류하는 글로벌 외교를 펼칠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과 종교, 빈부의 차이를 넘어 세계의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인류 공동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지구촌의 평화와 발전에 동참하겠습니다.

미국과는 전통적 우호관계를 미래지향적 동맹관계로 발전, 강화시키겠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형성된 역사적 신뢰를 바탕으로 전략적 동맹관계를 굳건히 해 나가겠습니다.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도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일본, 중국, 러시아와 고루 협력관계를 강화하여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모색하겠습니다.

우리 경제의 엔진을 안정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자원과 에너지의 안정적인 확보에도 힘쓸 것입니다. 아울러 평화와 환경을 위한 국제협력에도 앞장서겠습니다.

우리의 경제규모와 외교역량에 걸맞게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는 기여외교를 펴겠습니다. UN 평화유지군에 적극 참여하고 공적개발원조를 확대하겠습니다.

문화외교에 역점을 두어 국제사회와의 소통을 더 원활히 하겠습니다. 우리의 전통문화와 첨단기술이 어우러지면 한국의 매력을 세계로 내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통일은 7천만 국민의 염원입니다. 남북관계는 이제까지보다 더 생산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풀어가겠습니다. 남북한 주민이 행복하게 살고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비핵 개방 3000 구상’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을 택하면 남북협력에 새 지평이 열릴 것입니다.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10년 안에 북한 주민 소득이 3천 달러에 이르도록 돕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족을 위하는 길이고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정치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7천만 국민을 잘 살게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서로 존중하면서 통일의 문을 열 수 있는가, 하는 생각들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라면, 남북 정상이 언제든지 만나서 가슴을 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회는 열려 있습니다.

정치의 근본은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변하지 않고는 선진일류국가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발전 방향과 실천 대안을 만들어 제시해야 합니다. 민생고를 덜어주고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실용정치의 기본입니다.

길은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가능한 일부터 시작해 봅시다. 소모적인 정치관행과 과감하게 결별합시다. 국민의 뜻을 받들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생산적인 일을 챙겨 합시다.

여와 야를 넘어 대화의 문을 활짝 열겠습니다. 국회와 협력하고, 사법부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던 시골 소년이 노점상, 고학생, 일용노동자, 샐러리맨을 두루 거쳐 대기업 회장, 국회의원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꿈을 꿀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꿈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되길 바랍니다.

저는 이 소중한 땅에 기회가 넘치게 하고 싶습니다.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라

땀 흘려 노력한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국민의 마음속에 있는 대한민국 지도를 세계로 넓히겠습니다. 세계의 문물이 거침없이 들어와서 이 땅에서 새로운 가치로 창조되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새로운 가치를 내보내는 나라 선진 일류국가가 되게하겠습니다.

선대의 기원이고, 당대의 희망이며,후대와의 약속입니다.

저, 이명박이 앞장서겠습니다.

정부만의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함께 나서 주셔야 합니다. 각자가 스스로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더 튼튼하게 길러야 합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더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기업인과 노동자들은 손잡고 더 진취적으로 매진해야 합니다.

청년들은 자기 개발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군인과 경찰은 국가와 사회를 더 성실히 지켜야 합니다. 종교인, 시민운동가, 언론인도 더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공직자들은 더 성심껏 국민을 섬겨야 합니다. 대통령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의 시대적 과제, 대한민국 선진화를 향한 대전진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넘어 한반도의 새로운 신화를 향해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갑시다.

저, 이명박이 앞장서겠습니다.

국민이 합심하여 떨치고 나서면 해낼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




6.2. 제17대 대통령 퇴임사[편집]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연설문 보기]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지난 5년 대통령으로서 봉사할 기회를 주시고, 늘 함께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바닷가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길에서 장사를하며 고학하던 소년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 그런 대한민국은 위대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만들어온 우리 국민 또한 참으로 위대한 국민입니다.

위대한 국민과 더불어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일할 수 있었던 지난 5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보람되고 영광된 시간이었습니다.

5년 전 저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을 선진화하는데 제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청와대 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나가는 이 순간까지, 잠시도 잊지 않았던 소명은 오로지 선진일류국가로 가는 기초를 닦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제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미진한 부분도 있고,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은 계속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선진국이 이제 우리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 큰 대한민국'이 우리 눈앞에 당당히 서 있습니다.

얼마 전 통계청 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의 85%가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이런 저런 어려움이 우리 삶을 고단하게 해도 우리가 이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 국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긍심과 자신감이야말로, 앞으로 펼쳐질 웅대한 대한민국의 꿈을 실현할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5년간 두 차례에 걸친 전대미문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며 '더 큰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고자 힘써왔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2008년 정부가 출범하던 때는 세계 어떤 나라도, 어떤 전문가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전 세계를 엄습하면서, 모든 나라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한 외국 언론은 한국이 가장 먼저 침몰할 거라고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2백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고 2만 개 이상의 기업이 도산했던 때보다도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오직 이 위기를 넘겨야 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에 우선해서 위기를 벗어나는 데 전력을 쏟았습니다.

'비상경제정부'를 선언하고, 매주 빠짐없이, 무려 145차례에 걸쳐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어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신속하고 선제적이며 과감하게, 정책을 집행했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과 통화 스왑을 체결한 것은 금융위기 극복에 결정적 힘이 되었습니다.

그 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유럽발 재정위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지켜온 재정건전성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재정건전성이 취약한 유럽 국가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노·사·정이 힘을 모으고, 국민 모두가 합심해서 위기 극복을 위해 밤낮없이 땀 흘렸습니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대한민국은 모든 예상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해 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며 또 한 번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고, 세계 7대 무역 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한·아세안, 한·EU, 한·미 FTA를 통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은 경제영토를 개척했습니다.

지난 해 세계 7번째로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천만이 넘는 나라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세계 주요국의 국가신용등급이 모두 떨어지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가신용등급은 지난 5년간 OECD 34개국 중 가장 높이 상승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장구한 세계사 속에서 위기는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의 위치를 바꾸는 큰 분수령이 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이번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또한 오히려 대한민국의 위상과 국격을 높일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고, 마침내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위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분명한 교훈은 이제 글로벌 리더십 없이는 나라를 지킬 수도, 키울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세계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이처럼 직접적으로 연결된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세계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이처럼 깊이 연관된 적도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코리아를 국정의 주요 과제로 삼았습니다.

녹색성장 비전을 제시한 것도 유효했습니다.

녹색성장은 이제 세계 공통 용어가 되고 많은 나라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만 잘사는 길이 아니라 세계가 함께 잘사는 길을 우리가 앞장서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G20정상회의와 핵안보정상회의 의장국이 되어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이사국으로 선출되고, 미래의 대표적인 국제기구로 전망되는 녹색기후기금을 유치한 것은 우리의 글로벌 외교가 글로벌 리더십으로 이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5대양 6대주의 모든 나라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질서를 쫓아가던 나라에서 세계질서를 만들어가는 나라,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 살기만 바빴던 나라에서 앞장 서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나라,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일류국가의 모습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여러분!

돌이켜보면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처음엔 갑자기 긴 터널에 들어온 것처럼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하지만 민관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위기 대처를 위해 지혜를 모으면서 자신감을 얻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우리가 힘과 지혜만 모으면 어떤 어려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동안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묵묵히 땀 흘려 온 기업인, 근로자, 공직자,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고맙고 또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이 묵묵히 참고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가락동 새벽시장에서 "얼마나 힘드시냐"고 하는 저에게 "나야 나 살려고 하는 일이지만, 대통령이야말로 얼마나 힘드시냐?"며 도리어 저를 위로하던 박부자 할머니에게 받았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용기를 잃지 않고, 어려운 다른 이들을 걱정하며 열심히 사는 이런 분들을 저는 곳곳에서 만났습니다.

그 분들이 바로 우리 국민들의 참 모습입니다.

사실 경제위기 때는 물론이고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서민들이라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서민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일에 최우선을 두고, 일자리 나누기, 복지 사각지대 지원, 미소 금융, 든든 학자금, 전통시장 상품권 같은 다양한 친서민정책을 펼쳐왔습니다.

많은 성과도 있었지만, 기대만큼 서민들의 어려움이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양극화 문제는 세계 모든 나라의 공통 과제로서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명박 정부도 이에 대해 많이 고심하면서 새로운 비전과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친서민 중도실용, 동반성장, 공생발전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제시된 비전입니다.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자연과 인간, 국가와 국가, 남과 북, 기업가와 근로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인과 청년, 남성과 여성, 수도권과 지방, 도시와 농촌이 공생하는 길입니다.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해 가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중소기업 정책을 강화하고 동반성장을 통해 상생의 산업생태계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지, 교육과 보육, 문화, 과학기술에 대한 제도를 확충하고 투자를 계속 늘리는 것도 필수적인 일입니다.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잃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국정의 중심을 삶의 질 향상에 두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 자유롭고 더 풍요해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행복해 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 큰 길에 이념과 지역과 세대를 넘는 협력과 동참이 필요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입니다.

과거에는 우리의 모델이 되는 나라들이 있었고, 그 나라들을 따라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할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계 경제 영토 2/3와 맺은 FTA를 기반으로 세계 최고의 자유 통상 국가의 길을 추구하는 것도 대한민국만이 시도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선진국과 신흥국의 가교 역할을 더욱 강화하면서, 세계가 가야할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선도하는 것도 대한민국의 몫입니다.

인류적 의제인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단순한 말이나 구호가 아니라 세계 최초로 녹색성장기본법을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예측치(BAU) 보다 30% 줄이겠다고 스스로 한 약속을 우리는 꼭 지켜야 합니다.

기후변화에 따른 물 부족과 대규모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 시행한 4대강 살리기 사업도 그 취지를 계속 살려나가야 합니다.

국내 일부에서 논란도 있지만, 해외 전문가 그룹들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OECD는 '종합적 수자원관리의 성공사례'로 꼽고, 유엔환경기구(UNEP)은 '강 복원을 통한 녹색경제 사례'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태국 물 관리사업에도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선진일류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에 기반한 창조와 선도의 과학기술 역사를 만드는 것도 코리아 루트입니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지난 5년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그 이전 10년 합친 것 보다 많은 총 68조원을 투자했고, GDP 대비 투자 비율은 세계 2위가 되었습니다.

이를 계속 살려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제 과학비즈니스벨트에서는 국내외 과학자들이 모여 인류를 위한 기초과학의 꿈을 키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만이 아니라 창의적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력중심 사회를 지양하고 능력중심 사회를 열기 위해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를 집중 지원함으로써 신고졸시대를 열었습니다.

저는 지난 2월 7일 마이스터고 졸업식에 참석해서 졸업생들의 자신에 찬 모습과 학부모들의 밝은 표정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한 취업난 속에서도 100% 가까운 취업률을 기록한 것을 보면서, 능력중심 사회로 변화해 가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정부 출범 시 4.2%에 불과했던 석유·가스 자주개발률은 13.7%로 높아졌고, 6대 전략광물 자주개발율도 18.5에서 29%로 높아진 것은 의미가 큽니다.

이 역시 계속 살려가야 할 코리아 루트입니다.

한류를 전 세계에 확산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세계 곳곳으로 나가 어려운 이웃나라에서 땀 흘려 봉사하며 세계인의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 전인미답의 코리아 루트가 더욱 힘차게 개척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국 통일에 달려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남북관계는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안으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5년이 북한이 진정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 상생공영의 남북관계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원칙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내 정치를 위해 남북관계를 이용하지도 않았고 실질적인 변화 없이는 일방적 지원도 절제했습니다.

도발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앞으로도 한·미 간 완벽한 공조와 중국을 위시한 주요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펼쳐나간다면, 남북관계에서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난주 북한은 국제사회의 거듭된 만류와 경고를 무시하고 3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북한정권은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자축하고 있지만, 핵과 미사일이 북한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고 국제사회로부터 고립과 제재를 자초해 막다른 길로 점점 다가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북한 정권은 변화를 거부하고 있지만 북한 주민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변화를 면밀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제 통일의 시대가 멀지 않았음을 굳게 믿습니다.

서둘러 통일을 준비해야합니다.

물론 한 치의 빈 틈 없는 확고한 안보태세가 바탕이 되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 정부 5년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모두 역사에 맡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은 더 이상 변방의 작은 나라가 아닌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었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저는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는 끝나도, 국민 행복을 위한 저의 명예로운 의무는 계속될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국정을 도와주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애쓰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난 5년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생각을 달리하고 불편했던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국정의 책임을 내려놓는 이 시점에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정부를 간절히 바랬지만, 제 주변의 일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가슴 깊이 안고 가야할 아픔도 있습니다.

바로 천안함 46용사들입니다.

이들을 떠나보내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이름을 부를 때 목이 메고 가슴이 저렸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는 바로 그날, 저는 이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한 사람 한 사람 부르고자 합니다.

온 국민과 함께 박근혜 당선인과 새 정부에 따뜻한 축복을 보냅니다.

저는 새 정부가 '더 큰 대한민국'과 '행복한 국민'을 향한 큰 길을 열어갈 것으로 믿습니다.

헌신적으로 보좌한 국무위원과 비서진, 그리고 공직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힘들 때마다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에게 감사하고, 세계 여러 나라 친구들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인생을 늘 새롭게 시작한다는 각오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버거운 역사의 무게를 내려놓으면서, 저는 다시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있습니다.

퇴임 후 꽃피는 계절이 오면, 4대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우리 강산을 한 번 둘러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저에게 항상 기회와 용기를 주신 국민 여러분, 내내 행복하시고,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13년 2월 19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




7. 별명[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별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저서[편집]


신화는 없다[29], 이명박

파일: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jpg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30], 이명박

파일:대통령의 시간 2008 - 2013.jpg
대통령의 시간[31], 이명박


9. 대중 매체에서[편집]


이명박을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드라마 작품이 다수 있다.


10. 가족 관계[편집]


  • 조부 이종한 (? ~ ?)
  • 아버지 이충우 (1907 ~ 1981)[46] / 어머니 채태원 (1909 ~ 1965)[47]
    • 누나 이귀선 (1929 ~ 2010) / 夫 김일용
      • 조카 김동석
      • 조카 김동혁 (1951 ~ ) 前 현대산업개발 자재부장[32]
    • 이상은 (1933 ~) 다스 회장 / 妻 박청자
      • 조카 이동형 다스 부사장
      • 조카 이?? / 夫 전종화 (1966 ~ ) 前 씨모텍 부사장[33]
    • 이상득 (1935 ~ ) 전 국회부의장 / 妻 최신자 (1941 ~ )
      • 조카 이지형 (1966 ~ )맥쿼리-IMM자산운용 대표 / 妻 조재희 (1973 ~ )
      • 조카 이성은 (1969 ~ ) / 夫 구본천 (1964 ~ ) LB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 사장[35]
        • 종손 구??[34]
      • 조카 이지은 (1970 ~ ) / 夫 오정석 (1970 ~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36]
    • 누나 이귀애[A]
    • 본인 이명박 (1941 ~ )(족보에는 이상정으로 올라감) / 妻 김윤옥 (1947 ~ )
      • 장녀 이주연 (1971 ~ )[B] / 夫 이상주 (1970 ~ ) 청계재단 이사 겸 삼성전자 해외법무팀 전무이사[37]
        • 손주 1남 1녀
      • 차녀 이승연 (1973 ~ )[B] / 夫 최의근 (1973 ~ ) 서울대학교병원 순환기내과 교수[38]
        • 손녀 2녀
      • 3녀 이수연 (1975 ~ )[40] / 夫 조현범 (1972 ~ )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대표이사 사장[41]
        • 손주 1녀 1남[39]
      • 아들 이시형 (1978 ~ ) 다스 전무이사 겸 에스엠 대표이사[42] / 妻 손진아[43]
    • 여동생 이귀분[44] / 夫 김진 에스엠 대표[45]
    • 남동생 이상필[A]


11. 각종 타이틀[편집]


  • 김대중에 이어 2번째 기업인 출신 대통령
  • 윤보선, 노무현에 이어 3번째 종로구 국회의원 출신 대통령
  •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민선 자치단체장(서울시장) 출신 대통령[48][49]이면서 역대 2번째 자치단체장(서울특별시장) 출신 대통령[50]
  • 유일한 샐러리맨 출신 대통령
  • 최초로 외국에서 출생한 대통령[51]
  • 가장 동쪽에서 태어난 대통령[52]
  • 가장 남쪽에서 태어난 대통령[53]
  • 윤석열과 함께 유이한 전시근로역 대통령[54]
  •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최다 득표율 차로 당선된 대통령[55]
  • 재임기간 중 독도를 방문한 최초이자 유일한 대통령
  • 제6공화국 출범 이래로 임기 말에 탈당 및 당적변경을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56][57]
  • 헌정사상 4번째로 법정 구속된 전직 대통령
  • 전임 대통령후임 대통령이 탄핵 소추를 당한 대통령[58]
  • 최초로 임기 중 두 명[59]의 전직 대통령의 장례를 지켜본 전직 대통령[60]
  • 6공 이후 2월 24일에 퇴임한 마지막 대통령[61]
  • 일제 강점기 당시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62]
  • 박정희와 더불어서 아들보다 딸이 더 많은 대통령[63]
  • 국회 잔디마당에서 취임식 후 청와대로 들어가 직무를 수행하고 마지막 임기까지 모두 마친 마지막 대통령[64]
  • 2023년 기준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마지막 대통령


12.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7,923,718 (38.5%)
당선 (25번)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40,230 (41.01%)
당선 (1위)
재선[65]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819,057 (52.28%)
초선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1,492,389 (48.67%)
[66]

역대 선거 벽보



1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2 - 1995
정계 입문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97 - 2012
합당[67]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당명 변경
정계 은퇴

[[무소속|
무소속
]]

2017 - 현재
탈당[68]


14. 여담[편집]


  • 족보 이름(譜名)은 이상정(李相定)으로 형 이상은이상득처럼 '상()' 자 돌림이다. 이명박(李明博)이라는 이름은 이명박의 어머니가 이명박을 임신했을 당시 보름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기 때문에 밝을 명()에 넓을 박()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유년기에 일본에서 지낼 때 창씨개명한 이름은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월산명박)이다.

  • 여러 가지 휘호들을 남겼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385089_STD.jpg
파일:external/www.inews365.com/pp_183968_1_1308121874.jpg
파일:external/ppss.kr/%EC%9D%B4%EB%AA%85%EB%B0%958.jpg

  • 1979년 6월 10일에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에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 옆에 당시 박근혜 영애와 최순실이 앉았다. 당시 이명박은 구국여성봉사단(새마음봉사단) 운영위원이었고, 박근혜는 봉사단 총재, 최순실은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이었다.
파일:503_2MB.jpg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났다. 물론 엄밀히 따져보면 태어났을 당시에는 외국이 아니었지만, 광복 이후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일본제국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차이는 존재했다. 여담으로 최초로 외국에서 출생한 영부인은 두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외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시민권을 취득한 영부인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카 도너이고, 외국에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귀국한 영부인은 이순자이다.

  • 최초의 기업 CEO 출신 대통령이다.


  • 현대건설 사장 재직 시절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관리 감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 전두환 정부 당시 정권에서 상공부장관으로 이명박을 쓰려고 했으나 정주영 전 현대 회장이 거절했다고 한다. 1988년 민주정의당에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 요구를 했으나 역시 회사 차원에서 거절했다고.[출처]

  • 유년 시절 장래희망은 교사소방관이었으며,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마하트마 간디안창호를, 좋아하는 음식으로 김치찌개와 스파게티를 꼽았다. 주량은 맥주 2컵이고[69]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 생일과 결혼기념일, 그리고 대통령 당선일이 모두 12월 19일로 같다. 때문에 이날을 "트리플 크라운 데이"라고 부르면서 매년 전날인 12월 18일에 친이계 출신 전현직 의원들이 모여 송년회를 겸한 생일잔치를 한다. 이외에도 청와대 비서관급과 수석비서관급, 장관급 인사들도 날짜를 달리해 각각 이명박과 회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측은 매년 벌여온 자축연이고 참석자가 많아 이명박과 안부 나누는 정도일 뿐이라며 세력화 등의 정치적 해석을 경계한다고 밝혔다.[70] 19일 당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낸다고 한다.

  •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7년에 과거 아들이 재학했었던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 방문하기도 했다. 사진에 나온 식당은 현운재라는 교수 전용 숙박건물에 있는 교수 전용 식당이다.
파일:이명박 - 연세대 원주 구내식당.png

  • 인터넷상에서 이명박이 학생운동 시절 도피 차원에서 여장하는 사진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는데,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71]

  • 서울시장 재직 시절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03년 WCG 폐막식에서 우승자 이용범과 이벤트 경기를 벌이는 사진이다. 종족은 저그로서 경기를 위해 5개월 전부터 연습했다는 후문이 있지만 시작 5분 만에 4드론(...)으로 패배했다. 거기다 상대방의 정찰기를 잡는 위엄을 보였다고 한다.[72]

  • 생방송 음악캠프 성기노출 사건으로 인디 밴드에 대한 질타가 높아지자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은 홍익대학교 퇴폐공연 블랙리스트를 만들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한때 홍대의 클럽들을 싹 다 뒤엎으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디밴드의 반발로 무산되고, 친분이 있었던 유인촌설득을 듣고 오! 부라더스 공연을 관람하여 인디밴드와 화해하고, 홍대거리에 대한 생각 또한 긍정적으로 바꿨다고 한다. 여기서 설명했다시피 대통령 이전부터 이명박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파일:external/file.cbs.co.kr/j_050915_07.jpg

  • 취임 후 첫 철도 착공식인 원주강릉선 착공식에 병풍으로 KTX-산천 열차를 사용했는데, 하필 착공식이 강릉역에서 열린 나머지 KTX가 영동선 스위치백을 넘는 장면이 목격되었으며, 400억짜리 병풍이라는 논란이 일었지만 철덕들에게는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 서울특별시장으로서도 본의 아니게 매우 희한한 이력이 생기고 말았다. 정작 본인은 임기를 전부 마치고 퇴임했지만 현재 기준 마지막으로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친 서울시장이 되었다. 후임 서울특별시장 2명 모두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치지 않았다.[73][74]

  • 닮은 사람이 매우 많다. 주로 언급되는 사람으로는 마릴린 맨슨[75], 블라디미르 푸틴[76], 유희열, 인피니트김성규[77], 서승만, 박명수, 유동근[78],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존조 셸비 등이 있다. 양궁 선수 기보배와도 닮았으며, 젊은 시절을 보면 축구 선수 이천수와 야구 선수 김하성과도 닮았다.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와도 닮았다.[79]




파일:빠명박.jpg

  • 얀 반 에이크의 초상화로 유명한, 15세기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Giovanni di Nicolao Arnolfini)[80]도, 이명박이 그의 환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다. 다만 해당 초상화는 해외에서 푸틴과 닮은 것으로 더 유명하다.


  • 나이에 비하면 상당히 동안이었다. 현재 82세이며, 대통령 선거 당일이 만 66세 생일이기에 취임 전부터 임기 내내 법적으로도 노인이었다. 당장 다음 대통령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나이차도 10살 이상이고 이전 대통령인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도 나이가 많다. 운동을 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 것을 보면 자기관리를 꽤 열심히 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는 머리가 백발로 세는 등 동안은 옛말이 되었다.

  • 유행어로는 '나도 해봐서 아는데~'가 있다. 사용 예로는 '나도 호떡 장사 해봐서 아는데~'가 있다. '내가 건물 만들어 봐서 아는데~', '내가 배도 만들어 봐서 아는데~' 식의 발언들이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할 수 있다. 농담식으로 넘기면 될 듯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과 장사를 해본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여고 앞에서 한 뻥튀기 장사가 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

  • 대표적인 범친이계 국회의원이자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지냈던 정병국의 말로는 이 많은 경험을 했던 것이 이명박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한다. 이명박은 회의 등에서 참모들의 얘기를 끝까지 다 듣지만 마지막에는 항상 본인의 의사대로 결정했는데, 이때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하면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

  • 민주화 이후 최초로 임기 종료 시까지 소속된 당에서 탈당하지 않고 당적을 유지한 대통령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모두 임기 말에 지지율이 떨어지면 소속된 당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탈당했는데, 처음으로 새누리당 당적을 지킨 채 임기를 마무리한 것이다. 사실 대통령 임기 막판에는 인기가 시들해지고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당 차원에서는 애물단지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임기 말 당으로부터 압력이 들어와 쫓겨나거나 탈당하는 관습이 존재했었다. 일례로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토사구팽 당했고, 김영삼부터 노무현까지 전부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명박이 당적을 유지한 배경으로는 퇴임 지지율이 높았던 점도 한몫했지만 그게 결정적일 정도로 높은 지지율은 아니었다는 견해가 많다(탈당했던 김대중과도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이명박이 당적을 유지한 것은 역대 대통령이 대선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했던 점과는 다르게 친이-친박을 필두로 척을 지는 이미지가 강해서 박근혜와 크게 엮이지 않은 점이 큰 요소였다. 다만, 대통령 퇴임 이후 당 회비를 계속 내지 않고 있었으며, 2017년 1월 새누리당을 자유한국당으로 개명하기 이전에 탈당했다. 이후 문재인 전 대통령이 탈당을 하지 않으면서 이 기록은 최초가 되었다.

  • 논필가 지만원에게 뒷조사 시도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의 사이는 같은 우파라도 좋을 수가 없다.[81] 그의 주장으로는 이명박의 부친은 (이명박 본인의) 자서전에 언급한 대로 양반 태생이 아니며, 친일 행각을 한 노비이며, 부친의 원래 이름은 떡쇠이며,[82] 이명박은 그의 일본인 첩 사이에서 낳은 서자라고 했다. 다만, 지만원 평소 행적 특성상 지만원의 말이 사실일 확률은 거의 없다.(...) 애초에 지만원은 이명박을 공격하기 위해 저런 말을 한 것 같지만 설령 이게 사실일지라도 부친의 친일 행각이라면 문제가 될지언정 신분제가 폐지된 현대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아버지가 노비면 어떻고 본인이 서자라고 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

  • 조지 워커 부시미국 대통령과 관계가 좋다. 퇴임 후에도 사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고 그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 중에 이명박 초상화도 있다. 정작 두 사람의 임기가 겹친 적인 1년도 채 안 된다.

  • 청담동 가로수길 꼬르소 꼬모에서 아내 김윤옥 여사와 브런치를 즐기거나 원래 취미였던 테니스장이나 여러 공연장에서 목격되는 등 퇴임 후 구속 전까지 꽤 여유로운 노후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사면 후에는 언론에 비춰질까봐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 2007년 대선 후보 시절에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물론 이 당시는 아이돌 그룹 자체의 수도 적었고 원더걸스가 천하통일을 했던 때였기 때문에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정치인들 대부분은 원더걸스를 뽑았다.[83]

  • 노홍철이 아는 형님 중 가장 높은 사람이다. 무한도전에서 게스트로 초청하겠다고 전화를 걸었지만 멤버들의 만류로 무산되었고,[84] 노홍철 본인에 의하면 정치적 목적은 없고 실제로 친분이 있다고 한다.[85]

  • 서울시장 시절 탈모가 심해져 2005년에 모발이식 수술을 받았다. 실제로 서울시장 재직 중의 모습을 보면 거의 대머리 수준으로 탈모가 진행된[86]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대통령 중 탈모로 인해 모발이식 수술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이자 미용 목적으로 수술을 받은 두 번째 대통령이다. 첫 번째는 안검하수 수술을 받은 노무현이 있지만 사실 이쪽은 안검하수 수술이기 때문에 미용 목적이라고 하기는 뭣하다.

  • 박근혜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수행을 못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이계는 상도동계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니만큼 유신계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같은 보수진영이라도 본질적으로 서로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이명박근혜로 같이 묶는 데 많이들 회의적인 이유이다.

  • 사적으로는 형인 이상은, 이상득, 이재오[87]와 사적으로 매우 친한 관계이다. 배우 유인촌과도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어 취임하자마자 유인촌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임명했다.[88][89] 정운찬의 경우 예전에도 친분이 있었으나 능력을 높이 사서 한때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더 친해지게 되었고, 지금도 그 친분을 이어 가고 있다. 현재도 최측근들과 더불어 유인촌과 정운찬을 자주 만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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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박의 아들 이시형보다 작은형 이상득의 아들(조카)이 이명박과 외모가 유사하며, 어째 아버지 이상득보다 숙부 이명박을 닮은 편이다. 실제로 비교해 보면 많이 닮았다. 큰형 이상은의 아들 이동형은 이명박과 거의 똑같다. 장녀 이주연은 이명박을 빼닮았다.

  • 손학규바른미래당 대표와도 많이 친했다. 이재오와 함께 6.3 항쟁 때 서로 친해졌으며, 한나라당 시절 서울시장 때는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셋이 같이 만나 6.3항쟁 동지회라든지 모임을 상당히 많이 가졌었다고.[90] 이들은 노무현 정부 시절 같은 한나라당 소속일 때는 박근혜까지 포함해 소위 한나라당의 Big4로 언급되기도 했다.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박근혜 중 4명 모두 각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고, 3명이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며, 그 중 2명이나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름에 걸맞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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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균국무총리의 경우 친노지만 이명박, 이상득 형제처럼 대기업에서 종사했던 경험이 있는데다 이명박과 같은 고려대 출신인 공통분모가 있어 어느 정도 인맥관계로 얽혀있다.[91]

  • 제17대 대통령 당선 직후 바로 심상정을 직접 찾아 가서 만나서 인사하기도 했다.[92][93] 여담으로 이명박과 노회찬은 같은 고려대학교 출신이라고 한다.[94] 그리고 노회찬과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창당하던 때에 이명박은 대통령이었는데, 진보신당 창당 때와 진보신당 창당 2년차 모두 이명박이 직접 축하 화환을 보냈다. 진보신당 창당 기념식장에 이명박이 보낸 축하 화환 창당 2년차에도 축하 화환을 보낸 점을 봤을 때 이명박과 노회찬, 심상정이 과거에는 상당한 친분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사진을 보면 오히려 이들이 매우 친한 사이인 줄 알 정도다. 다만,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는 관계가 예전보다는 다소 멀어졌다.[95]
파일:2MB-SSJ.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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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전 대통령과 더불어 상당한 자덕이다. 친한 이재오도 같은 취미를 갖고 있어 종종 같이 타고 다니기도 하며 퇴임 후에는 정규재4대강 자전거길 투어를 하기도 했다. @

  • 자기가 퇴임하기 전 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차기 대선 주자로 염두에 두고 있던 인물이 매우 친한 사이인 이재오와 정운찬이었고, 이재오랑은 알다시피 매우 친해서 이재오가 출마선언을 했을 때 이재오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19대 대선 때 이재오뿐만 아니라 반기문, 홍준표, 유승민이 이명박을 예방했는데, 이재오가 늘푸른한국당 대선후보로 출마했을 때 이명박은 이재오가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인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역대급 사태로 범 보수계 정치세력이 대거 붕괴해 친이계나 보수계 모두 대통령 당선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이재오를 지지한단 선언을 했으니, 이재오, 정운찬 등을 차기 수장으로 한 자 계파와 친박계가 새누리당에서 당권투쟁을 할 때도 실제로는 이재오나 정운찬이 차기 대권 주자가 되길 바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현재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과거에는 박원순과도 상당히 친분이 있었다. 서울시장 시절 월급 전액을 박원순이 설립한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고 아름다운가게의 명예고문으로도 활동했으며,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 정책적 조언을 주고받는 등 교류가 활발했다. 특히 기부금 액수 때문에 한때 박원순의 든든한 후원자는 이명박이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박원순은 이명박을 맹비난하면서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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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임 이후 기존에 살던 논현동이 아닌 내곡동으로 집을 옮기려 했으나, 아들 이시형이 내곡동 사저 매입 의혹과 관련해 불구속 기소를 당하는 바람에 계속 논현동에만 거주했다.

  • 어찌된 일인지 이명박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도 이전이었던 2007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시에는 최태민 일가의 국정농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발언을 했고, 뜻밖에도 이는 현실이 되었다. 다만 박근혜의 무능과 최씨 일가와의 관계는 당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단지 이들이 자기보신 등 여러 가지 어른의 사정 탓에 침묵을 택했거나[96] 혹은 이 기사처럼 쓴소리나 폭로를 해도 묻히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2007년 경선 과정에서 벌어진 양측의 네거티브 공방은 훗날 서로를 목 죄게 된 올가미가 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97]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 당선 이전에도 박영선정봉주가 BBK, 다스 관련 의혹을 박근혜 캠프를 능가할 정도로 매우 끈질기게 제기했던 만큼 박근혜가 이런 의혹을 전혀 제기하지 못했어도 대선 과정에서 박영선, 정봉주 등의 민주당계 인물들에 의해 의혹으로 공격당했을 가능성이 여전히 매우 높다.

  • 주력전차 MBT-70이 이명박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농담도 있다.

  • 상도동계 직계 인물들과는 대부분 친한 편이지만 강삼재, 서청원 및 한나라당 시절 민주당계 정당으로 이적한 상도동계 김영춘, 박재호 등 직계 일부와는 현재로써는 친분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강삼재는 이명박이 정계 입문했을 당시부터 이명박이랑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아 이명박이 17대 대선에 출마했을 때도 대부분 이명박 지지선언을 한 상도동계 중진과는 다르게 이회창을 지지했다. 서청원과는 한때 친분이 있었지만[98] 2007년 서청원이 친박계가 된 직후에는 견원지간으로 변했다.[99] 이는 이재오도 마찬가지다. 또한, 김영춘과 박재호는 이미 2000년대 초반에 한나라당이 민주정의당처럼 되돌아가고 있다면서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했으니 이명박과 친분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시피 하다.


  • 사격 자세와 관련하여 논란이 인 바 있다. 광대뼈 함몰 사격 자세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사격자세를 잘 알지 못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총기거치대가 탄착지점과 일치하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참고.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과 서울시장 시절에 찍은 제대로 된 사격 자세 사진도 있다. 서울시장 시절 경계 근무 체험을 하면서 사격 자세를 잡았었는데, 그때는 정상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사격자세라는 소리는 애초에 말이 안되는 소리다. 한번이라도 총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탄을 발사하기 위한 방아쇠의 위치는 앞에 있다.(사진에는 실탄함에 가려져 있다. 실탄과 실탄함 사이)

  • 가훈이 '정직'이라고 한다.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기재되었던 내용이다. #

  • 이명박의 전 측근인 정두언 전 의원은 2018년 2월 28일 tbs와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종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정두언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명박은 하늘로부터 항상 보호를 받는다는 선민의식이 있었고, 이 때문인지 사석에서는 "이제껏 나(이명박)를 건드리고서 잘 된 인간은 1명도 못 봤고, 내가 하면 일이 모두 잘 풀린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정두언 혼자만의 주장인데다 실제로 정두언은 이명박에 대해 김희중 아내의 장례식 때 조화는커녕 청와대 직원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거나, 17대 대선 때 이명박의 후보 홍보물을 제작한 재미교포 인쇄업자가 돈을 요구하자 자기 사재를 털어서 막아줬다거나(참고), 이명박이 17대 대선의 사후처리를 위해 국정원 특활비를 썼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사실이 아니거나 근거가 불분명한 험담을 수차례 늘어놓은 적이 있어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 본인이 뭐든지 직접 나서서 최전방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일을 처리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고 한다.[100] 내가 직접 나서겠다라는 짤방도 그런 이명박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

  • 13대 노태우부터 17대 이명박까지는 2월 25일 취임해서 2월 24일에 퇴임하였기 때문에 이명박이 기존 헌법대로 임기를 수행한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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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도소에서 지내면서,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에 답장을 잘 해주기로 유명한데 지금까지 유저들의 인증 등으로 공개된 답신만 21년 12월말 기준으로 20개 가량 된다. 2021년 3월 13일에는 어떤 디시인사이드 유저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 국민일보

  • 2023년 사면 후 5월 15일 자신의 치적이라고 할수있는 청계천을 방문해 시민들을 만나 사진도 찍고 청계천 산책을 나섰다. 자신은 퇴임 후에 TV 뉴스나 정치 프로그램은 재미가 없다며 전혀 보지 않으며 방송도 오로지 스포츠 방송만 본다고 한다. 문재인이 퇴임 후 책방을 열었다며 본인은 어떤 계획이 있느냐고 기자들이 묻자 자신은 아직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 1995년 7월 1일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민선 서울시장들 중 유일하게 임기중 서울 연고 프로야구팀의 우승을 바라보지 못했다. 조순은 1995년에 OB가, 고건[101]은 2001년에 두산이, 박원순은 2015, 2016, 2019년에 두산이, 오세훈은 2023년에 LG가 우승하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재밌는 것은 이 6회 중 2016년 두산[102]을 제외하고 모두 서울 땅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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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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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미촌은 1955년에 오사카시에 통합되었고, 동시에 후쿠이도(福井戶)정은 가미후쿠이도(加美福井戶)정으로 바뀌었다. 이후 1974년에 현재의 가미미나미(加美南)정으로 통폐합되었다. 지금 이름인 가미미나미(加美南)정과 혼동되어 존재했던 적이 없는 가미미나미 후쿠이도(加美南福井戸)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MB도 모르는 오사카 출생지(JBC 뉴스)[2] 1945년 8.15 광복 직후 부모와 함께 귀국하여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고향은 경상북도 포항시이다. 포항시 덕실마을에 이명박 전 대통령 생가가 위치해 있다. 주소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실마을길 512-7이며, 2007년 포항시에서의 경선 연설 중에도 자신의 고향이 포항이라 말한 바 있다.[3] 이카루가 유업의 본사가 위치해 있었으나 직원 부족 등의 문제로 폐업했다. 구글 지도 링크[4] 이명박/자택 참조.[5] 그 유명한 어맹뿌 밈이 바로 이 서명 특유의 필기체에서 파생된 것이다.[6] 유튜브 초창기였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홍보용으로 사용한 계정. 그 해 12월 당선인 기자회견 영상 이후 올라온 영상이 없다.[7]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맡아 6.3 항쟁을 주도했다. 이후 수배된 이명박은 서울교도소(오늘날 서울구치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8] 새마음봉사단으로 불리던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는 박근혜 영애였다. 1978년 위촉장 수여식에서 두 사람은 처음 조우한 것으로 알려졌다. # 1979년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새마음제전에서 박근혜 전 총재, 최순실 전 대학생총연합회장과 함께 관람하는 사진이 포착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9] 12년간 회장직을 맡았다.[10]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수여.[11] 현대건설 회장 자격으로 참여했다. 당시 언론 보도.[12] 영포빌딩 소유. 이 회사 대표자격으로 직장의료보험에 가입해서 월급을 99만원 받는다고 신고해서 화제가 되었다.[13] 출처.[14] 출처[15] "부동산임대이명박"이 회사이름이다. 대명주빌딩 관리.[16] 교회 설립 초기 멤버로, 장로가 되기 위해서 주차봉사활동도 하는 등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퇴임 이후로는 발길을 끊은 것으로 보였으나, 윤석열 정부 시절 사면복권 된 이후에 교회를 찾았다.[17] 당시 1위는 노태우 정부 시절 국무총리 역임했던 정원식이 공천 받았다.[18]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아 판결 나오기 전에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여담으로 본인이 사퇴한 지역구에 재보궐선거를 치뤘는데, 들어온 사람이 본인 전임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이다.[19] 당시 1위는 마지막 관선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고, 훗날 한나라당 대표를 했던 최병렬이 최종 공천 되었다.[20] 조선일보.[21] 훗날 여기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22]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인데, 아내인 김윤옥 여사의 친인척들이 번갈아 총재직을 맡고 있는 단체라고 한다.[23] 참고. BBK, LKe뱅크, e뱅크증권 중개 이 3개 기업을 통칭해 e뱅크코리아라고 명명했고, 이명박은 e뱅크코리아 회장으로 대외활동을 했다.[24] 홈페이지상에서는 아직도 고문으로 나와있다.[25] 서울특별시장이 당연직으로 겸임한다.[26] 이미 2000년에 맡은 적이 있었다. 참고.[27] 득표율 차이는 여전히 제6공화국 역사상 최고 기록이며, 득표수 차이는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5,570,951표) 이전까지 제6공화국 역사상 최다 기록이었다.[28]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29] 1995년에 이명박이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쓴 수필.[30] 2008년대통령 취임 직전에 출간한 에세이.[31]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이후 쓴 회고록.[32]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특보를 지내며 여의도에서 이명박을 도우며 정치에 뜻을 보이기도 했으며, 다스 협력업체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2018년, 상속받은 재산이 이명박의 차명재산이었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33] 씨모텍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무혐의 처분되었다.[34] 2012년에 11살의 나이로 36억원대 주식부자 반열에 올랐다.[35] LG 창업주 구인회의 손자.[36] 부총리를 지냈던 오명의 아들.[A] A B [B] A B 줄리어드 음대 졸업, 현재 전업주부[37] 前 검사. 2010년 당시 가장 젊은 삼성 임원이었으며, 2012년 사내 최연소 팀장에 오르기도 했다. 승진 속도에 대한 설명에서는 항상 이명박의 맏사위라는 설명이 덧붙는다.[38] 이명박의 대통령 재임 시절 주치의 최윤식의 아들.[39] 당시 9살 손녀와 6살 손자가 2012년 어린이 주식부자 반열에 올랐다. 당시 가치로는 9억원과 9억 1천만원대다.[40]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현재 전업주부[41] 조양래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회장의 아들. 효성그룹과 이어진다. 아내 및 두 처형과는 리라초등학교 동문이다.[42] 에스엠은 이시형이 설립한 자동차 부품업체로 다스 협력업체다.[43] Double K의 친누나[44] 중국에서 선교사를 했다고 한다. 이말분에서 이름을 바꿨다고 전해진다.[45] 이시형이 만든 다스 협력업체.[46] 평생 목축일을 했다고 알려졌다.[47] 대통령 재임 시절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 한 적 있는데 생전에 자신을 뒷바라지하며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다고 그리움을 표하며 눈물을 보였다.[48]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 시행 후 유일한 사례이다.[49] 홍준표경남지사, 이재명경기도지사도 본선 양당 후보까지는 올라갔으나 각각 문재인, 윤석열에게 졌다. 그 후 홍준표는 대구광역시장이 되어 최초의 민선 복수 광역자치단체장이 되었다.[50] 최초는 역시나 서울특별시장 출신인 윤보선 전 대통령이었으나 이때는 관선이었다.[51]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되는 조건에 출생지 제한을 두지 않는다.[52] 이 기록 역시 일본 태생이라 세워졌다. 훗날 동일본 지역이나 미국(이 경우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등지에서 태어난 대통령이 나오지 않는 이상 계속 유지될 듯.[53] 위의 타이틀과 같은 이유. 훗날 전라남도 최남단 지역이나 제주도 출신 대통령이 나온다면 이 기록은 깨지게 된다. 참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하의도와 거의 비슷한 위도지만 오사카 히라노구가 더 남쪽에 있다.[54]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김대중은 징병제의 영향을 겪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서 해당 사항이 없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장성 출신, 김영삼은 6.25 전쟁 때 잠시 학도병으로 징집된 적이 있었다. 노무현은 상등병 만기전역의 병사로 군복무를 했다. 즉, 노무현은 취임 당시 유일한 병사 출신 대통령으로서 유일하게 예비군 훈련도 받았었기 때문에 민주평통 연설에서도 "나도 군대 갔다 왔고 예비군 훈련까지 다 받았는데."라고 말을 꺼내기도 했다. 이후 후임자 박근혜는 여자라서 병역의 의무가 없었으며, 문재인이 노무현 이후 두 번째 병사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문재인의 후임자인 윤석열은 부등시로 인해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았다.[55] 48.67%를 득표하여 26.14%를 득표한 정동영 후보를 22.53% 차이로 승리했다. 득표수로 보면 531만표차로 승리했는데 이는 이승만시절 이후 2번째로 큰 득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최소 득표율 차로 당선된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으로, 불과 0.73% 차이로 득표수로 보면 24만표차로 신승했다.[56] 2017년 1월 1일(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의 개명 이전)에 새누리당을 탈당했지만 퇴임 이후 탈당이다.[57]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재임 기간 동안 당적을 유지했지만 2017년 11월 3일에 홍준표자유한국당 대표가 대표 직권으로 출당서에 도장을 찍어, 이명박과 달리 타의로 쫓겨났다.[58] 전임인 노무현은 2004년 3월 12일 탄핵 소추를 당했고, 후임인 박근혜는 2016년 12월 9일 탄핵 소추를 당했다. [59] 김대중노무현. 모두 2009년 사망.[60] 박정희 재임 시절 이승만, 노태우 재임 시절 윤보선, 노무현 재임 시절 최규하, 박근혜 재임 시절 김영삼이 각각 세상을 떠나 유일한 타이틀 보유자였으나, 문재인 재임 중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모두 2021년에 세상을 떠나 유일한 타이틀은 빼앗겼다.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일하게 재임 중 사망했기 때문에 장례가 진행될 당시에는 대통령직이 공석이었다. 공교롭게도 전직 대통령 2명이 사망한 해가 모두 소띠 해이며(2009년 기축년, 2021년 신축년), 뒤에 사망한 대통령이 먼저 사망한 대통령의 전임이었다.[61] 후임자인 박근혜탄핵되어 궐위로 인한 선거로 선출된 문재인부터 5월 10일에 임기가 시작됐기 때문.[62] 16대 노무현을 제외한 5대 박정희부터 17대 이명박까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났다.[63] 둘 다 1남 3녀를 두었고, 또한 각자 아들들이 집안에서 남매들 중 가장 막내다. 다른 대통령들의 자녀 여부를 보면 대다수가 아들이 딸보다 더 많고, 이승만처럼 딸 없이 순수 아들만 셋인 대통령도 있고, 윤보선처럼 아들과 딸이 둘씩인 대통령도 있고, 김영삼처럼 아들과 딸이 셋씩인 대통령도 있고, 그 외 나머지들은 아들과 딸이 하나씩이고, 박근혜와 윤석열처럼 자녀가 전무한 대통령도 있다. 단, 박근혜는 미혼이고, 윤석열은 기혼이지만 무자녀다.[64] 후자인 박근혜도 국회 잔디마당에서 취임식을 가졌으나 중간에 탄핵당했다. 이로 인해 그 후자인 문재인은 국회 내부에서 취임식을 가졌으며 문재인 퇴임 후 청와대가 개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으로 임기를 보낸 대통령은 이명박이 마지막이다.[65] 1998년 3월 의원직 사퇴 (불법 선거 운동).[66]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임기 내내 당적을 유지한 첫 대통령.[67]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68] 대한민국 제6공화국 이후 퇴임 후에도 당적을 유지하는 첫 대통령이었으나, 2017년 1월 1일 정치색을 없앤다는 뜻에서 탈당했다.[출처] 이명박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69] 다만 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인터뷰마다 술을 잘 마신다고 하고, 회식 때 소맥 폭탄주를 만들어 마셨다고 하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는 어릴 적 가난해서 술찌게미 등을 먹어서 성장한 뒤로도 술은 냄새도 맡기 싫다며 맥주 몇 잔 마시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종합하면 어린 시절에는 과거 때문에 술을 싫어했다고 하지만, 나이 먹고 정치 활동을 하면서 폭탄주 회담 등을 즐겼다는 걸 보면 후천적으로 술을 즐기는 듯 하다.[70] 그러나 회동이 열리는 장소에는 기자들이 쫙 깔려서 참석자들을 일일이 촬영하며, 4대강 사업지를 장소로 잡는가 하면 이명박 본인도 입구에서 인터뷰를 종종 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한다.[71] 사진 속 배경은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너편의 신반포4차아파트 상가인데(정확히는 현재의 서울 지하철 9호선 고속터미널역 8-2번 출구의 건너편.) 이곳의 입주 시기가 1979년이기 때문. 또한, 지나가던 한성운수 29번 버스를 보면 1980년대에 한창 다니던 차종인 BF101이다. 이명박이 대학시절이던 1960년대에는 볼 수 없는 배경인 셈이다. 애초에 1960년대 반포 지역이면 깡촌 그 자체였다.[72] 보통 저그의 정찰기라 하면 오버로드를 의미하지만 4드론이었기에 오버로드를 잡을 시간이 되지도 않았으며, 아마 기사의 내용을 보아 정찰하던 드론을 잡아낸 것으로 보인다.[73] 오세훈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본인의 시장직을 걸었다가 이를 책임지고 사퇴하였고, 박원순재임중 추문에 휘말려 자살하였다.[74] 사실 고건, 이명박을 제외한 민선 서울시장은 중도에 사퇴하거나 사망하면서 임기를 다 채우지 않았다. 그거야 민선 이후 서울시장이 아직까지 5명밖에 없으니까 이 기록이 희한해보이는 것일 뿐이다. [75] 그래서 2007년 대선 즈음 '마릴린 맨슨 내한공연기' 1편, 2편 이런 패러디물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76] 대통령 시절에 서로 만난 적이 있다.[77] 기사[78] 유동근은 실제로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이명박을 모티브로 한 박대철 역을 맡았다.[79] 이재명/별명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재명의 별명 중 하나가 이재명박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둘 다 경주 이씨에 TK 출신, 수도권 지자체장을 지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게다가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의 슬로건은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이었는데, 20대 대선에서의 이재명의 슬로건 역시 '유능한 경제 대통령'이었다.[80]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링크)[81] 지만원을 포함한 극렬 우파와 이명박 그리고 그가 모시던 김영삼을 필두로 한 온건 우파의 관계는 원래부터 견원지간이다. 극우인사들이 존경하는 박정희전두환과 김영삼이 철천지원수 사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는 현재의 국민의힘 내 계파 갈등으로 이어진다. (강경보수 친박 - 온건보수 친이 포함 비박)[82] 2세였던 쇼와 14년에 이충우로 개명했다.[83] 원더걸스가 과도한 섹시 컨셉 없이 밝고 건강한 컨셉을 지향하던 그룹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84] 노홍철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자 유재석이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고, 박명수는 처음에는 평소 그 답지 않게 상당히 놀랐지만, 그 후 호기심에 한 번 전화해 보자고 했고, 정준하정형돈은 옆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85] 이명박의 서울시장 시절 노홍철이 청계천 홍보대사가 되었을 때 이명박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노홍철의 말실수로 형님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이명박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당시 노홍철은 이 발언으로 "서울시장에게도 형님이라 부르는 돌아이"라는 등 언론에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이후 노홍철이 사과를 했으나 이명박이 오히려 괜찮다며 노홍철에게 동생이라고 불렀고, 노홍철은 대통령 취임식까지 초대를 받았다.[86] 실제로 친형 이상득은 완벽하게 대머리다.[87] 같은 이씨라 얽히지만 본관은 다르다. 다만, 재령 이씨가 경주 이씨에서 파생된 성씨라는 점을 감안하면 먼 친척 정도로는 볼 수 있겠다.[88] 유인촌이 한 드라마에서 이명박 역을 맡기도 했었던 만큼 연결관계가 이때부터 생겼을 수도 있다.[89] 여담으로 노회찬의 경우는 박중훈과 상당히 친한 사이다.[90] 특히 이명박과 그의 측근들은 당시 한나라당 대표 선거에서 이재오와 강재섭이 맞붙었을 때 모두 이재오를 지지했던 적도 있다.[91] 실제로 정세균은 친노계 중 이명박의 형 이상득과도 인맥관계로 맺혀있는 몇 안 되는 인물로, 한 술 더 떠 정세균은 포항시 출신 아내를 맞기도 했으니 MB 형제와 더 가까워지기 쉬웠을 것이다.[92] 여담으로 이명박의 개명 전 성명이 돌림자와 항렬을 맞춘 '상정'으로 심상정과 같다.[93]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명박이 옛날에 학생 운동을 했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지 노회찬, 심상정과도 면식이 있다고 한다. 이재오가 운동권 출신이라 이들과 인맥관계로 엮여있는데, 이명박이 이재오와 매우 친밀한 사이인지라 이명박도 예전부터 노회찬, 심상정과 인맥관계로 엮여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94] 그래서 그런지 노회찬과 심상정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 전부터도 이명박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지냈다.[95] 특히 노회찬은 이명박에게 고발당한 정봉주가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수감되자 이명박에게 정봉주를 당장 사면복권시킬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96] 박근혜는 2004년 당시 이미 3선 국회의원이었고(이명박은 2선) 보수의 위기라고 불렸던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 지도부로서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알려졌었다. 거기다 2006년 선거 지원유세에서 커터칼 피습을 당하면서 보수진영 내부 한정으로 박근혜는 절대성역의 대상이었다. [97] 이명박 측은 박근혜의 최태민 관련 의혹을 제기했고, 박근혜 측은 이명박의 BBK 관련 의혹을 제기했다. 그런데 바로 최태민 의혹의 그 부분이, 훗날 최순실 국정조사에서 김기춘최순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위증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박영선의 치밀한 질의에 영혼까지 털린 김기춘이 몸이 휘청거렸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게 백미.[98] 서청원 또한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처럼 6.3 항쟁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명박, 이재오와 서청원은 동년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출생 시기가 가까운 편인데, YS계 군번으로는 오히려 서청원이 선배로, 서청원은 상도동계 직계로 분류되지만 이명박과 이재오는 상도동계 직계가 아닌 YS키즈로 분류된다. 아무튼 같이 김영삼 휘하에서 종사했던 만큼 상호 간에 친분이 전혀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수도 있다.[99] 특히 이 당시 서청원이 이명박 가족의 도곡동 땅 차명보유 의혹을 제기하면서 상호 관계가 험악해졌다.[100] 높으신 분들이라고 다 뒤에서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닌 직접 나서서 일처리하는 경우도 꽤 있다.[101] 이 사람은 관선시장 시절이던 1990년에 LG가 우승하는 순간도 바라보았다. 1994년 LG 우승 확정 당시 서울시장은 우명규.[102]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우승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