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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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31대 임금이자 통일신라의 두 번째 군주. 삼국통일이 완수된지 5년 후인 681년에 즉위하여 11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왕권을 전제화시키고, 통일신라의 중앙·지방제도, 군사제도,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신라 중대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다음의 거물급 왕이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신문왕/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11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을 보냈음에도 강력한 임팩트를 남긴 군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지지않을만큼 뛰어난 명군이다. 특히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과 아버지 문무왕이 오랜 난세를 끝내고 통일신라라는 한반도 왕조의 형태를 갖춘 창업군주형에 가까웠다면 숙청을 기반으로 한 왕권 강화책이나 행정 제도의 정비라는 업적을 보면 수성형 군주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문무왕은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 바깥으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오랜 전란 과정 속에서 전쟁 영웅과 공신 세력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졌고[6] 외교도 불안정했으며 옛 고구려계와 백제계 유민들은 아직 신라의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지도 않은 상태에 국토는 삼국통일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보위를 계승한 신문왕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잘 알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해 통일신라라는 나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이 때 발해는 아직 건국되지 않았고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기 위해 국정을 흔들고 있는 시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는 통일신라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명군이지만 통일 전쟁기의 공신들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숙청한 진골 귀족 세력들과 관련된 왕비까지 폐출시켰던 무시무시한 임금이기도 하다. 철혈 명군으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통일신라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는 한편 문화 면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긴 만큼 오늘날 국사 교육 과정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김흠돌의 난 토벌 교서에서 밝히기를 문무왕의 숭고한 기틀을 받아 지키느라 먹을 것도 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든다고 하고 있으므로 비교적 이른 붕어의 원인은 과로였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게 왕권이 강할수록 왕 자신이 직접 손볼 일이 많아진다. 다만 신라 왕실에 만연하던 근친혼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후대 왕들은 대부분 신문왕보다도 훨씬 명이 짧았는데 물론 이건 자기네들끼리 왕 자리 놓고 권력 투쟁하다가 서로 칼로 죽인 탓.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군이 이긴 것은 안동도호부로 대표되는 당나라의 동북방 군대들이었고 당나라의 주력 부대들은 이 시기에 관중에서 토번과 싸우고 있었다. 이 때 시기적으로 강성해진 토번이 서역과 관중 일대를 위협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했던 부대들을 일부 돌려서 관중 일대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의 시기는 후대 성덕왕 시기에 가서야 당나라와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고 패강 이남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라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신라가 이미 영역화하고 있었기에 당나라의 인정 유무가 상관은 없지만 명목상이나마 인정한 것은 옛 백제 지역과 평양 이남 지역을 공격하지 않겠다라는 약속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만주에 발해가 건국되면서 당나라가 육지로 올 가능성이 없어진 상황과 발해를 견제하려는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신라로서는 진정한 종전 선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문(神文)·효소(孝昭)·성덕(聖德)은 간신히 수성(守成)할 수 있었고(후략) 대개 신문왕(神文王) 이후로는 순박함이 없어지고 난적(亂賊)이 뒤를 이어 그 화가 만연(蔓延)됨이 이에 이르러 심화되었습니다."
다만 《동국통감》의 평가는 위에서 소개했듯이 나라를 겨우겨우 유지한 왕이라는 평을 받았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신문왕 본기>
一年秋七月 신문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진복을 상대등으로 제수하다
一年秋八月八日 김흠돌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죽임을 당하다
一年秋八月十三日 보덕국의 왕이 축하 사신을 보내다
一年秋八月十六日 왕이 소집한 군대를 돌려보내라는 교서를 내리다
一年秋八月二十八日 왕이 이찬 군관을 죽이라는 교서를 내리다
一年冬十月 시위감을 없애고 장군을 두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면하다
二年夏四月 위화부령에 두 사람을 배치하다
二年夏五月 태백성이 달을 범하다
二年夏六月 국학을 세우다
二年夏六月 공장부감과 채전감을 두다[7]
三年春二月 순지를 중시로 삼다
三年春二月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맞기 위해 납채하다
三年夏四月 여름에 눈이 내리다
三年夏五月七日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하다
三年冬十月 보덕국 왕 안승을 소판으로 삼다
三年 혜성이 나타나다
四年冬十月 유성이 떨어지다
四年冬十一月 대문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다
五年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다
五年 청주를 설치하고 복세를 총관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서원소경을 설치하다
五年春三月 남원소경을 설치하다
五年春三月 봉성사가 완성되다
五年夏四月 망덕사가 완성되다
六年春一月 대장을 중시로 삼다
六年春一月 예작부에 경을 두다
六年春二月 석산현·마산현·고산현·사평현을 설치하다
六年春二月 사비주를 군으로 하다
六年春二月 웅천군을 주로 하다
六年春二月 발라주를 군으로 하다
六年春二月 무진군을 주로 하다
六年 당에 《예기》와 문장에 관한 책을 요청하여 받다
七年春二月 원자가 태어나다
七年春三月 사벌주를 설치하고 관장을 총관으로 삼다
七年夏四月 음성서의 수장을 경으로 고치다
七年夏四月 조묘에서 치제를 올리다
七年夏五月 관료에게 전지를 하사하다
七年 사벌주와 삽량주에 성을 쌓다
八年春一月 대장이 죽다
八年春一月 원사를 중시로 삼다
八年春二月 선부에 경을 더하다
九年春一月 녹읍을 폐지하다
九年秋閏九月二十六日 서원경성을 쌓다
九年 달구벌로 천도하려 하다
十年春二月 선원을 중시로 삼다
十年冬十月 전야산군을 설치하다
十一年春三月一日 왕자 이홍을 태자로 삼다
十一年春三月十三日 사면하다
十一年 사화주에서 흰 참새를 바치다
十二年 남원성을 쌓다
十二年 대나무가 시들다
十二年 당 중종이 태종의 묘호를 고치라는 조칙을 전하다
十二年 태종 묘호를 못 고치겠다고 답하다
十二年秋七月 신문왕이 죽다
신문왕부터 《삼국사기》 8권이 시작된다.
5. 기타[편집]
- 대중적으로는 삼국통일의 주역들인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에 비해 덜 유명한 편이고 대중매체에서도 거의 안 나온다. 한 일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데 이는 법흥왕도 비슷한 상황. 하지만 신문왕은 의외로 콘텐츠화하기 좋은 인물이다. 일단 한국 사극에서 선호하는 강력한 왕권의 소유자에다 각종 제도 개혁을 추진하는 개혁 군주이기 때문. 신라 역대 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임금인데 재위 기간은 11년 정도로 한 나라의 주요 임금으로 꼽을 수 있는 행적치고는 별로 길지 않다.
-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긴 임금이라 각급 한국사 시험에서 신라 중대를 물을 때 90% 확률로 선정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수능 준비나 공무원 시험 등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수험생들은 신문왕의 업적을 필수적으로 알아둬야 한다.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삼국 통일 전쟁은 다들 잘 아는 편이라 임팩트에 비해 변별력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후의 경덕왕이나 성덕왕은 교과서 수준으로 단독 출제하기에는 업적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이한 시험에서 신라 중대를 묻는다면 안심하고 신문왕 관련 내용을 찍으면 되는데 각종 임용 시험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같은 경우에는 예외이다.
- 말장난으로 신문왕에 대해 강의하다가 News Paper King이라고 하는 역사 선생들이 드물게 보인다. 물론 그 신문은 新聞이고, 이 신문왕은 神文이다. 의자왕과 비슷한 사례. 진짜로 신문왕(News paper King)이 별명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이다.
- 자는 일초(日怊) 혹은 일소(日炤). 《삼국사기》 <신문왕 본기>를 보면 신문왕의 휘(諱)와 자(字)를 소개하는 첫 부분의 원문이 神文王立諱 政明明之字日怊라고 되어 있다. 이 원문을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에서는 "신문왕이 즉위하니 휘는 정명이고, 정명의 자는 일초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일소(日炤)로 나온다. 이와는 달리 원문의 '명지자일'(明之字日) 부분을 "(휘를) 명지(明之)라고도 하는데 자(字)는 일소(日怊)이다"로 해석해서 '명지'(明之)도 신문왕의 또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의 해당 부분 각주에서 해석에 대해 '명지'를 문맥상 휘로 보기 어렵다고 적혀 있지만 대부분의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김명지' 역시 신문왕의 휘로 적어두고 있기에 본 문서에서는 둘 다 표기한다. 신문왕은 역대 신라 국왕은 물론 한국의 모든 임금 중에서 기록상 최초로 자가 확인되는 인물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를 가진 인물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기록상으로는 신문왕이 최초다. 신문왕의 숙부인 김인문도 '인수'(仁壽)라는 자를 썼다. 이로 미루어보면 정황상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도 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 유명한 전설 속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왕권 강화책을 펼친 영향으로 만파식적 설화가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관한 것은 만파식적 항목을 참고할 것. 또한 만파식적의 재료가 된 대나무와 함께 흑옥대(黒玉帶)도 받았다고 한다.# 설총으로부터 <화왕계> 이야기를 듣는 왕도 신문왕으로 이것은 유학자였던 설총이 <화왕계>를 통해 신문왕에게 바라는 군주상을 제시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 위의 행적을 보면 길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굵직굵직한 치적(治績)을 해마다 남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쉬지 않고 일했던 워커홀릭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
- 한 어린이용 위인전에 나온 옷이 왼쪽의 문무왕의 국가 표준영정과는 달리 현실을 잘 반영했다. 무열왕이 당나라와 조공 책봉 관계를 맺었을 때 당나라에서 왕과 관리들이 입을 관복을 사여받아 와서 관복제도를 개편했기 때문에 무열왕 이후 통일신라시대 왕들은 오른쪽 그림 신문왕처럼 당나라식 사모와 단령 차림으로 그리는 것이 옳다. 통일신라 시대를 다룰 때 미디어에서 의외로 자주 실수하는 부분이다.[8]
6. 대중매체에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1] 아버지 문무왕이 626년에 출생했고, 문무왕의 장남이므로 641년 이후에 출생이 가능하고 장남 효소왕이 687년에 출생했다는 것과 665년 8월에 태자가 된 것을 감안하면 650년대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사망 당시 장수하지 못한 건 확실한 듯하다.#[A] A B 율리우스력 7월 27일[B] A B 음력 7월 7일[2] 《삼국유사》 기록.[C] A B 율리우스력 8월 19일[D] A B 음력 7월 2일[3]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기록.[4] 율리우스력 7월 21일[5] 음력 7월 1일[6] 기나긴 전란 끝에 평화가 찾아오면 평화의 시대에는 필요가 없는 그동안 쌓여온 군인과 공신들은 나라의 골칫거리가 된다.[7]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는 문무왕릉비를 재위 2년차였던 682년 7월 25일에 세웠다.[8] 다만 670년 이후 시점을 그린 그림인 당나라 장회태자 이현의 무덤 벽화 <예빈도>에서 신라 사신이 여전히 당인들과 달리 조우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열왕부터 신문왕 등 등 7세기 중반까지는 사모단령과 기존 복식이 혼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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