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문왕 (문단 편집) == 기타 == * 대중적으로는 [[삼국통일]]의 주역들인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에 비해 덜 유명한 편이고 대중매체에서도 거의 안 나온다. 한 일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데 이는 [[법흥왕]]도 비슷한 상황. 하지만 신문왕은 의외로 [[콘텐츠]]화하기 좋은 인물이다. 일단 [[한국]] 사극에서 선호하는 강력한 [[왕권]]의 소유자에다 각종 제도 [[개혁]]을 추진하는 개혁 [[군주]]이기 때문. [[신라]] 역대 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임금]]인데 재위 기간은 11년 정도로 한 나라의 주요 임금으로 꼽을 수 있는 행적치고는 별로 길지 않다. *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긴 임금이라 각급 [[한국사(교과)|한국사]] [[시험]]에서 신라 중대를 물을 때 90% [[확률]]로 선정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준비나 [[공무원]] 시험 등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수험생]]들은 신문왕의 업적을 필수적으로 알아둬야 한다.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삼국 통일 전쟁은 다들 잘 아는 편이라 [[임팩트]]에 비해 [[변별력]]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후의 [[경덕왕]]이나 [[성덕왕]]은 [[교과서]] 수준으로 단독 출제하기에는 업적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이한 시험에서 신라 중대를 묻는다면 안심하고 신문왕 관련 내용을 찍으면 되는데 각종 [[임용]] 시험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같은 경우에는 예외이다. * [[말장난]]으로 신문왕에 대해 [[강의]]하다가 '''News Paper King'''이라고 하는 [[최태성|역사 선생]]들이 드물게 보인다. 물론 그 [[신문]]은 '''新聞'''이고, 이 신문왕은 '''神文'''이다. [[의자왕]]과 비슷한 사례. 진짜로 신문왕(News paper King)이 [[별명]]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이다. * 자는 일초(日怊) 혹은 일소(日炤). 《[[삼국사기]]》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08r_0020_0010&types=r|신문왕 본기]]>를 보면 신문왕의 휘(諱)와 자(字)를 소개하는 첫 부분의 원문이 神文王立諱 政明明之字日怊라고 되어 있다. 이 원문을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에서는 "신문왕이 즉위하니 휘는 정명이고, 정명의 자는 일초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 <[[https://db.history.go.kr/id/sy_001r_0010_0110|왕력편]]>에서는 일소(日炤)로 나온다. 이와는 달리 원문의 '명지자일'(明之字日) 부분을 "(휘를) 명지(明之)라고도 하는데 자(字)는 일소(日怊)이다"로 해석해서 '명지'(明之)도 신문왕의 또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http://db.history.go.kr/url.jsp?ID=sg|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의 해당 부분 각주에서 해석에 대해 '명지'를 문맥상 휘로 보기 어렵다고 적혀 있지만 대부분의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김명지' 역시 신문왕의 휘로 적어두고 있기에 본 문서에서는 둘 다 표기한다. 신문왕은 역대 신라 국왕은 물론 [[한국]]의 모든 임금 중에서 기록상 최초로 [[자(이름)|자]]가 확인되는 인물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를 가진 인물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기록상으로는 신문왕이 최초다. 신문왕의 숙부인 [[김인문(신라)|김인문]]도 '인수'(仁壽)라는 자를 썼다. 이로 미루어보면 정황상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도 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 유명한 [[전설]] 속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왕권 강화책을 펼친 영향으로 만파식적 설화가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관한 것은 만파식적 항목을 참고할 것. 또한 만파식적의 재료가 된 대나무와 함께 흑옥대(黒玉帶)도 받았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y_002r_0010_0020_0030|#]] [[설총]]으로부터 <[[화왕계]]> 이야기를 듣는 왕도 신문왕으로 이것은 유학자였던 설총이 <화왕계>를 통해 신문왕에게 바라는 군주상을 제시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 위의 행적을 보면 길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굵직굵직한 치적(治績)을 해마다 남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쉬지 않고 일했던 [[워커홀릭]]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 [[파일:gojung3.jpg]] * 한 어린이용 위인전에 나온 옷이 왼쪽의 문무왕의 국가 표준영정과는 달리 현실을 잘 반영했다. 무열왕이 당나라와 조공 책봉 관계를 맺었을 때 당나라에서 왕과 관리들이 입을 관복을 사여받아 와서 관복제도를 개편했기 때문에 무열왕 이후 통일신라시대 왕들은 오른쪽 그림 신문왕처럼 당나라식 사모와 단령 차림으로 그리는 것이 옳다. 통일신라 시대를 다룰 때 미디어에서 의외로 자주 실수하는 부분이다.[* 다만 670년 이후 시점을 그린 그림인 당나라 장회태자 이현의 무덤 벽화 <예빈도>에서 신라 사신이 여전히 당인들과 달리 조우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열왕부터 신문왕 등 등 7세기 중반까지는 사모단령과 기존 복식이 혼용되었다는 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