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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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
Kaiserliche und königliche Kriegsmarine독일어
Császári és Királyi Haditengerészet헝가리어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상선기(변형).svg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문장.png
깃발
문장
참전
의화단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수뇌부
3. 전력과 편제
3.1. 주력함대
3.2. 순양함 분함대
3.3. 기지 직속 해방함
3.3.1. 잠수함 기지
3.4. 강방함대
4. 역사
4.1. 19세기
4.1.1. 창군과 1848년 혁명까지
4.1.2. 19세기 중반의 위기
4.1.3. 세기말의 발전
4.2. 20세기
4.2.1. 대양해군으로의 확장
4.2.2.1. 초중반의 선전
4.2.2.2. 악화되는 전황
4.2.2.3. 의의와 한계
4.3. 해체와 그 이후
5. 주요 인물
6. 군가
7. 기타
7.1.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정식 명칭은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Kaiserliche und königliche Kriegsmarine)이며, 줄여서 K.u.K 해군(K.u.K Kriegsmarine)로도 부른다. 세 갈래로 나눠진 육군과 달리, 단일 조직으로 제국 전쟁성에 속했다.

1786년에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요제프 2세에 의해 황제군 산하에 최초로 창설되었고, 1867년 대타협 이후 개편된 신제국의 해군이 되면서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황립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왕립은 헝가리 왕국을 뜻한다. 황립 해군이었으니 함선 명칭에도 SMS(Seiner Majestät Schiff: 황제 폐하의 함선)이 붙었다.

1차 대전 패전을 계기로 해체되었다. 주력함대의 유산은 주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 흡수된다. 다뉴브 전대의 일부 함선들은 공화국이 된 오스트리아군에 남거나 헝가리군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프랑스 해군그리스 해군,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에서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을 배상함으로 넘겨받아 편입하였다.

2. 수뇌부[편집]


  • 1914년 개전 시점
해군 감찰관
해군최고사령관
전쟁성 해군부장
함대사령관
[겸임.]
파일:Archduke_Charles_Stephen_of_Austria.jpg
파일:Admiral_Anton_Haus,_Kommandant_der_k._und_k._Flotte.png
해군 원수 카를 슈테판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1]
해군 대장 안톤 하우스[2]

합스부르크 황실 인원들이 보임되는 명예직인 해군 감찰관(Marineinspekteur)과 실질적인 지도자인 해군최고사령관(Oberkommandant der Marine)이 가장 상위에 존재한다. 작전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함대사령관(Flottenkommandant)직은 1914년에 신설되었으며 실질적인 운용을 맡는다. 한편 동시대 다른 국가들과 달리 해군성은 없던 대신 합동 육군을 관장하는 전쟁성의 산하에 해군 부서가 존재했다. 이 부서의 장은 전쟁성 해군부장(Chef der Marinesektion)이라 불렸다. 1차대전 발발 당시에는 카를 슈테판 폰 외스터라이히(Karl Stephan von Österreich) 대공이 원수로서 감찰관직을 맡았고 나머지 세 요직은 전부 안톤 하우스(Anton Haus) 대장이 1917년에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겸직했다.

하우스 원수가 사망한 후, 전쟁성 해군부장직은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중장에게, 그리고 해군최고사령관직과 함대사령관직은 막시밀리안 녜고반(Maximilian Njegovan) 대장에게 돌아갔다. 곧 칼텐펠스 중장이 사임하고 녜고반 대장이 세 요직을 다시 전부 겸직했으나, 카를 1세와 빌헬름 2세 황제와 갈등을 빚던 도중 1918년 카타로에서 수병 반란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그 결과 함대사령관직은 호르티 미클로시(Horthy Miklós) 중장에게, 전쟁성 해군부장직은 프란츠 폰 홀룹(Franz von Holub) 중장에게 넘어갔다. 최고사령관직은 공석으로 남았다.

이 중 전쟁성 해군부장직의 경우, 패전으로 제국 해군이 사라진 이후에도 몇 년간 존속했다. 해군은 사라졌어도 다뉴브강을 순찰하는 도나우 전대만은 존속했기 때문. 그러나 1923년 최후의 해군부장 알프레트 주호멜 중령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3. 전력과 편제[편집]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제1차 세계 대전의 황립 및 왕립 해군 군함 파일:Austria-Hungary-flag-1869-1914-naval-1786-1869-merchant.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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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함
후사르급, 타트라급, 에르자츠 트리글라우급
잠수함
U보트
경순양함
에르자츠 센타급
정찰순양함
아트미랄 슈파운, 노바라급
장갑순양함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왕비, 카를 6세 황제, 장크트 게오로크
방호순양함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급, 센타급
전함
전 드레드노트급
합스부르크급, 에르츠헤르초크 카를급, 라데츠키급
드레드노트급
테게토프급,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취소선: 계획만 되거나 건조 중 취소





파일:1914년 8월 해군력.webp
1914년 8월 시점 세계 각국의 해군 전력. 왼쪽부터 순서대로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만, 그리스, 일본, 그리고 미국이다.[3]

오스트리아 해군은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모든 종류의 함선과 장비를 충실하게 갖춘데다, 최소 60년간의 운용 노하우를 가진 견실한 지역해군 함대였다.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1914년 8월 시점에서는 드레드노트급 3척,[4] 준드레드노트급 3척과 전드레드노트급 6척의 전함들을 중심으로, 장갑순양함 2척, 방호순양함 3척 및 경순양함 2척이 존재했다. 그 외 보조함 전력으로 구축함 25척과 잠수함 5척, 그리고 약 70척에 달하는 어뢰정으로 구성되었다.

전함 전력에 있어서는 1914년 8월을 기준으로 이탈리아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 해군과 비등하거나 오히려 앞섰다. 특히 가장 유의미한 전력인 드레드노트와 준드레드노트, 그리고 순양전함의 숫자로만 한정할 경우에는 영독미프에 뒤이은 세계 5위의 전력을 자랑했다.[5] 그러나 함대의 허리 노릇을 하는 순양함구축함, 그리고 보조 전력인 잠수함의 절대적인 수가 매우 부족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뢰정도 타국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넉넉하다고 하기 힘들었다. 이탈리아의 추격도 맹렬했다.

그래도 주 전장이 아드리아해라는 좁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는 숫적 열세를 일부 만회할 수 있었다. 순양함 전력은 결국 전쟁 끝까지 보충되지 못하지만 잠수함 전력의 경우 전쟁 발발 이후 대대적으로 확충되어, 사실상 제국 해군의 주력으로 활동한다. 해군사에서는 어뢰를 최초로 상용화한 해군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예하 전투함대는 주력함대와 순양함 분함대, 지역방어대들과 잠수함 전대들로 구성되었다. 하술할 편제 관련 정보는 주로 1914년 군 소책자에서 발췌하였다.


3.1. 주력함대[편집]



파일:테케토프급_드레드노트.jpg

K.u.K 해군의 주력인 제1전함전단의 제1중전대. 세 척 모두 테게토프급 전함이다.[6]

전열함대, 또는 주력함대[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가장 핵심적인 주력함들이 모여 있는 함대로, 현대 대한민국 해군제7기동전단의 위상과 유사한 위치이다. 2개 전단(Geschwader)에 분속된 5개 중(重)전대(Schwere Division)로 구성되었다. 풀라 항에 주둔하였다.

각 중전대는 대부분 같은 함급별로 묶여 있었다. 1914년 기준으로 가장 핵심적인 전력은 최신예 드레드노트급인 테게토프급 전함 4척이 전부 배속된 제1전함전단 소속 제1중전대였다. 그 다음인 준드레드노트급 라데츠키급 전함들은 1전단 제2중전대, 전드레드노트급인 에르츠헤르초그 카를급 전함들은 2전단에 속한 제3중전대, 그리고 가장 초기형 전드레드노트급인 합스부르크급 전함들은 2전단 제4중전대에 속했다. 여기까지가 실질적으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는 전력들이었다. 이외의 제5중전대는 모나르히급 해방전함들로 구성되었으나 이들은 가장 노후화된 함선들이었으므로 주로 항구 방위 임무에 종사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활약했던 것은 제5전대였다.

일각에서는 덴마크식 표현인 '황립 및 왕립 전단(K.u.k Eskadre[8])'이라고 호칭하는데, 몇 개의 그림 엽서에 쓰인 것으로 보아 실제로 사용되기는 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표현이 '주력함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3.2. 순양함 분함대[편집]



순양함 분함대순양함 전대 2개와 어뢰정 전대 2개를 합쳐 총 4개 전대로 구성되었다.

제1 순양함 전대(1. Kreuzerdivision)는 모든 장갑순양함들과 비교적 신형인 젠타급 방호순양함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초기형 방호순양함들인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급들의 경우 서류상으로는 제2순양함전대(2. Kreuzerdivision)에 속하였으나, 실제로는 각 지역 지방대 또는 오스트리아령 톈진에 파견 형식으로 나가 있었다. 때문에 제2전대는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뢰정 전대(Torpedofahrzeugdivision) 역시 2개로, 재빠른 정찰순양함들과 구축함, 그리고 어뢰정들로 구성되어 뇌격전을 수행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오트란토 해협 일대에서 협상국의 봉쇄에 맞서 가장 활약한 부대들이다.


3.3. 기지 직속 해방함[편집]



기지 함선(Stationsschiff)이란 주요 해군기지와 항구를 방위하는 함선들로, 일종의 해방함이다. 동시에 해외 식민지의 주요 거점에 소속된 함선들도 지칭한다. 이들 전체를 포괄하는 통합적인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개별 항구와 기지 방위대에 직접 속하는 식이었다.

주로 어뢰정들이나 노후화된 함선들로 구성되었다. 가령 전함들 중 가장 구식이었던 모나르크급 해방전함들은 서류상으로는 주력함대 소속 제5중전대에 배치되었으나 실제로는 여러 항구에 파견 형식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상술한 제2순양함대의 함선들도 마찬가지.


3.3.1. 잠수함 기지[편집]



잠수함들 역시 평시에는 개별 기지와 항구에 나뉘어 속하다 1차 대전 발발 이후 하나의 항구에 집중적으로 편성되면서 잠수함대의 형태로 발전한다. 중심지는 풀라 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공용어는 독일어였으므로, 제국 해군의 잠수함 역시 유보트라 불린다.


3.4. 강방함대[편집]


다뉴브 분함대(Donauflottille)와 가르다 호 분함대(Gardaseeflottille)로 나뉜다.

다뉴브 분함대는 제국의 중심을 관통하는 다뉴브 강을 경비하기 위한 함대이다. 제국 해군의 예하부대 중 가장 최초로 형성된 조직이자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조직이기도 하다. 16세기부터 이어지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당시 최초로 결성되었고,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오헝 제국의 멸망 후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다뉴브 소함대로 갈라졌고, 일부 함선들은 2차 대전까지 치렀다.

한편 가르다 호 분함대는 19세기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인 가르다 호에 존재했던 분함대이다. 1866년 제국이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상실하면서 가르다 호 일대가 이탈리아로 넘어감에 따라 폐지되었다.

3.5. 해군 항공대[편집]


  • 독일어: Kaiserliche und königliche Seefliegerkorps

해군 항공대는 1916년 테게토프급 전함의 수상 정찰기 부대로 시작하였다. 전쟁 말기까지 주로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안 기지들에 배치되었다. 주력 항공기들은 독일제였고, 전투기와 정찰기, 일부의 폭격기들로 구성되었다. 협상국 해군의 접근을 경보하고 항구를 보호하는 역할이었다.


3.6. 해병대[편집]



해상대대, 즉 해병대 역시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통합된 군사조직으로서의 해병대가 아니라, 기지를 경비하고 그때그때 무장하여 투입되는 정도의 기초적인 수준이었다. # 트리에스테풀라, 그리고 톈진 등의 일부 도시에 주둔했었다는 것 외에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4. 역사[편집]



4.1. 19세기[편집]



4.1.1. 창군과 1848년 혁명까지[편집]


파일:8ijvwk3we8s21.jpg

▲ 1864년의 헬골란트 해전을 그린 유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 해군과 덴마크 해군의 전투 모습이다.[9]

대타협 이전부터 오스트리아 해군의 주 타겟은 통일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던 이탈리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국 해군 역시 뿌리를 이탈리아에 두고 있었다.

제국 해군은 황제군 해군을 계승했으나, 실질적으로 18세기 이전 황제군의 해군이라 불릴 전력은 매우 미약했다. 본토인 오스트리아가 바다를 접하는 곳은 트리에스테 제국직할 도시 단 한 곳 뿐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개발된 곳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해상 세력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에 기반하고 있었고, 이마저도 해군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의 상선들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벨기에를 상실하며 미약한 오스트리아의 해양력은 완전히 파괴당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 해군의 기반이 된 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 인프라였다.[10]

1797년,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맺어 베네치아를 프랑스로부터 얻어내었다. 이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으로 해안선을 잃고 내륙국이 되며 베네치아도 잠시 상실했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에 재점령하여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라는 이름의 구성국으로 편입하여 빈 회의에서 국제적으로 지배를 공언받았다. 이때 베네치아에 있던 5척의 전열함이 오스트리아가 가지게 된 최초의 제대로 된 해군 전력이었다. 해군사관학교 또한 1802년에 베네치아에서 설립되었으며, 제국 해군의 모든 함선들 또한 그 유명한 베네치아 병기창(Arsenale di Venezia)[11]에서 건조되었다.

제국 해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1830년대부터였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주로 지중해에서 활개치던 바르바리 해적들이나 그리스인 해적들을 진압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고, 1840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태수 메흐메드 알리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영국과 함께 개입하여 이집트군 점령 하의 동지중해 해안을 타격했다. 그리고 1840년대가 되어 빈 체제가 점차 흔들림에 따라 유럽 방면으로도 전력을 투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 해군의 확장을 이끈 것은 황실 인사들이었다. 첫 번째는 19세기 초중반 해군의 건설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레오폴트 대공(Friedrich Ferdinand Leopold von Österreich)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세 번째 아들인 그는 메흐메트 알리의 반란 당시 십대의 어린 나이로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해군과 영국 해군, 오스만 제국 해군 육전대를 직접 이끌고 아크레의 이집트군 요새에 부하들과 함께 돌격했을 정도로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전쟁에서 세운 무공과 황가의 일원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로 무장했던 레오폴트 대공은 고작 23세의 나이로 해군 최고사령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바탕으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구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의 잔당이나 다름없던 오스트리아 해군의 정체성을 합스부르크 황실에 충성하는 황립 해군으로 점차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레오폴트 대공은 1847년 황달에 걸려 고작 26세의 나이로 요절해버렸다. 그리고 그의 죽음 직후 불어닥친 자유주의자들의 1848년 혁명은 제국 해군에 엄청난 위기를 몰고 왔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해군의 뼈대를 구축하던 이탈리아인들 상당수가 혁명과 독립 열기에 영향을 받아 이탈해버린 것이다. 거기다 제국 동부에서 헝가리인들의 대대적인 독립운동까지 일어나 오스트리아 제국 자체가 해체 직전까지 몰린 마당에 제국 정부에서는 해군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제국 해군의 잔여 세력은 우세한 사르데냐 왕국 해군[12]에 쫓겨 독일 연방 영내인 트리에스트피우메로 탈출해야 했다.


4.1.2. 19세기 중반의 위기[편집]


파일:Soerensen_Seeschlacht_bei_Lissa_1866_Rammstoss.jpg
▲ 1866년 리사 해전 당시 모습. 테게토프 중장의 기함인 SMS 페르디난트 막스 함의 충각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이탈리아 왕립 해군 레디탈리아 함의 모습이다.

1848년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유능한 사관은 대부분 베네치아의 전통을 잇는 이탈리아인이었지만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인들을 다른 민족들로 교체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탈리아인들을 제외한 제국 내의 대부분의 민족들은 해양과는 동떨어진 생활 문화를 지녔다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아직 해양 진출에 미숙했고, 유럽 내륙 깊숙한 지역에 사는 헝가리인들이나 체코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충성심까지 갖춘 뱃사람들이었으나 해군을 조직하고 운영할 전문 지식에는 미숙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빙해오기로 결정했다. 여기 호응한 것은 북유럽의 해양 대국인 덴마크였다. 당시 덴마크는 유틀란트 반도 남부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을 놓고 프로이센과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치를 정도로 갈등을 빚고 있던 터였다. 그랬기에 독일 연방 내에서 우월한 위치를 가진 오스트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고, 이에 요청에 응한 것. 1849년 덴마크 정부는 덴마크 해군의 포술교관이었던 한스 비에크 달레루프(Hans Birch Dahlerup) 준장을 군사 고문으로 보내주었다.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중장 계급을 달아주고 해군 재건 업무를 맡겼다.

당시는 아직 혁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달레루프 중장은 우선 베네치아와 이탈리아의 잔재들을 쓸어내고 황립 해군의 기틀을 잡는 데 중점을 맞추었다. 함명과 각종 용어들로 쓰이던 베네토어[13] 독일어로 바뀌었고, 베네치아식 조직문화도 제거되었다. 제국 해군의 중요 거점 중 하나인 트리에스테풀라가 군항으로서 개발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이다. 그리고 스웨덴 해군에서 에릭 아프 클린트(Erik af Klint) 중위와 노르웨이 해군[14] 의 페르디난트 베델야를스베르그(Ferdinand Julius Wedel-Jarlsberg) 중위를 초청하여 각각 베네치아 병기창 주임과 사관학교 교관을 맡겨 노하우를 전수하게끔 했다. 빌헬름 폰 테게토프,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 등 여러 인재들이 이들 북유럽 교관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달레루프 중장의 발빠른 지휘로 잔존 해군 함선들도 수습되었다. 그리고 이 전력을 바탕으로 그는 육군의 요제프 라데츠키 원수의 군대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베네치아를 포위했다.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혁명군이 베네치아 진입을 시도했으나 오스트리아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결국 혁명은 진압되었으며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오스트리아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인이 추진한 이 2년간의 격렬한 개혁은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많은 독일인들은 그가 오스트리아 해군을 덴마크화시킨다고 비난을 가했다. 결국 달레루프 중장은 오스트리아에 온 지 2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덴마크 해군에 복귀했다. 그가 초빙한 야를스베르그 중위도 이때 그를 따라 돌아가 노르웨이 해군에 복귀했다.

하지만 개혁은 멈추지 않았다. 몰아치던 신 절대주의 체제 속에서 제국 해군은 착실히 독일화되어 갔다. 그리고 달레루프의 제자이자 황제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Ferdinand Maximilian Josef Maria von Habsburg-Lothringen)은 1854년에 소장 계급으로 해군 감찰관직에 올라 해군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의 임기 중이었던 1856년에는 해군사관학교가 피우메에 자리를 잡았고, 풀라에 새로이 설립된 해군공창은 베네치아 병기창의 자리를 대신했다.[15] 여기서 만든 함체와 영국에서 수입한 엔진들을 가지고 제국 해군은 기선을 건조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풀라 해군공창은 건설 2년 후 91문급[16] 증기 전열함 SMS 카이저(SMS Kaiser) 함을 진수시키면서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계 민간조선사인 STT(Stabilimento Tecnico Triestino 트리에스테 기술 회사)사도 트리에스테에 두 번째 조선소인 산 로코 조선소를 설립하여 운영을 시작했다. 훗날 제국 해군 건함계획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되는 STT는 한동안 선박 엔진을 제작하거나 민간 선박만을 건조했으나, 1869년이 되자 오스트리아 최초의 철갑함인 SMS 쿠스토자(SMS Custoza)함을 건조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국 해군의 건함 사업에 참여했다. 수입에 의존하던 선박 엔진 또한 1860년대가 되어서는 국산으로 조달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스트리아 해군의 전력은 미약했고 대부분이 목제 군함이었다. 이 때문에 1859년 제 2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 철갑함들로 구성된 프랑스 제국 해군과 사르데냐 해군 연합 함대가 오스트리아 해안선을 봉쇄하는 동안 제국 해군은 항구에서 손가락을 빨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861년에는 사르데냐와 주세페 가리발디양시칠리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합병하여 새로이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오트란토 해협의 통제권이 사실상 이탈리아 쪽으로 넘어가버림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은 아드리아해에 고립되었다.[17] 설상가상으로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로 즉위했다가 처형당하고 말았다.

파일:1000014533.jpg
▲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 철갑함 4척에 포위된 오스트리아 91문 전열함 SMS 카이저. 불리한 상황임에도 충각 돌격과 함포 포격으로 각각 1척씩 전투불능으로 만들고 생환했다.

그래도 제국 해군은 과거와 달리 빌헬름 폰 테게토프(Wilhelm von Tegetthoff) 제독과 같은 걸출한 지휘관의 지휘 하에 여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의 지원을 받았던 그는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에는 프로이센 해군과 연합해 북해로 나아가 헬골란트 해전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테게토프는 덴마크 해군의 포격으로 인해 자신의 기함에 불이 붙었음에도 전통적인 해군 열강 중 하나였던 덴마크 해군에 판정승을 거두었고, 독일 연방에 대한 덴마크의 해상봉쇄를 푸는 데 성공했다. 불과 몇 년 전 덴마크 해군이 제국 해군의 재건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전투는 사실상 스승에 대한 승리이기도 했다.[18]

곧바로 벌어진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벌어진 리사 해전은 오스트리아 해군사상 최고의 승리로 꼽힌다. 테게토프 중장은 목제 전열함 11척과 철갑함 7척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함대를 이끌고 양적, 질적으로 우세한 이탈리아 해군 철갑함대를 격파하면서 1859년의 굴욕을 갚았다. 그는 이탈리아 함대의 혼란을 틈타 빠르게 돌격하였고, 적의 함렬을 양단하여 충각과 근접 포격을 가했다. 이탈리아 해군 역시 격렬하게 반격하였으나[19] 오스트리아 함대의 능수능란한 대응으로 인해 각개격파당했다. 가령 목제 전함이었던 SMS 카이저 함은 이탈리아 해군 철갑함 4척에게 맹렬한 공격을 당했으나 오히려 역으로 2척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리사 해전은 목제 군함들로 구성된 해군이 철갑함들을 이긴 사실상 유일한 전투로 기록되었으며,[20] 지휘관 빌헬름 폰 테게토프 제독은 오스트리아가 배출한 대표적인 해군 명장으로 역사에 남았다.

다만 이 승리는 전략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보오전쟁의 핵심적인 전장은 오스트리아 육군과 프로이센 육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던 독일체코 일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육전에서 오스트리아가 7주만에 처절하게 패배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완전히 상실했다.[21] 이로써 제국 해군은 군항 중 하나이자 탄생지였던 페네디히를 잃었으며, 통일을 거의 완수한 이탈리아 왕국은 아드리아해의 서쪽 절반을 장악했다.

함대의 질적인 열세도 여전했다. 1860~70년대 당시 신형 철갑함들을 다수 건조하며 한때나마 세계 3위의 강력한 해군 전력을 구축했던 라이벌 이탈리아와 달리, 오스트리아의 철갑함 건조 기술은 여전히 일천하다시피 했다. 1860년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스트리아의 산업화가 매우 미진했기 때문인데, 1860년대 초 오스트리아에서 강판을 생산할 수 있던 업체는 슈타이어마르크 지방의 첼트베크 철공소[22] 단 한 곳 뿐이었고 이마저도 대부분 육군의 수요를 감당하는 데 쓰였다. 신형 함포들 또한 조달이 불가능해 영국의 암스트롱사나 독일의 크루프 사의 제품을 수입해야 했다.

경제 위기도 닥쳤다. 1873년 4월 8일 에서 주식시장이 폭락하며 시작된 장기불황(Long Depression)은 발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다. 이는 제국 해군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는데, 1875년에 STT사는 2호 조선소인 산 로코 조선소를 폐쇄했고 이로써 제국의 조선업체는 19세기 말까지 풀라 해군공창과 STT의 1호 조선소 단 둘만이 남게 된다. 그 외에도 다뉴브 강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제국 최초의 근대적 조선소인 오부다 조선소(Óbudai Hajógyár) 등의 잡다한 조선소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강안에 위치하였으므로 확장에 한계가 명확했다.


4.1.3. 세기말의 발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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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최초의 철갑함인 SMS 쿠스토자 함.

다행히도, 18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제국 해군은 대대적인 확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제국 해군은 광활한 아드리아 해안선과 지중해로의 출구를 확보하는 것을 주 과제로 삼았기에 이탈리아와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1900년대 영독 해군경쟁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치열한 건함경쟁이 기범선 시대부터 드레드노트급 시대까지 40년 이상 펼쳐졌다.

장기불황 이후 허우적대던 제국의 중공업도 곧 급격하게 발전하며 해군의 국산화 수요를 맞춰주었다. 체코 오스트라바의 비코비체 제철소(Witkowitzer Bergbau- und Hüttengewerkschaft)는[23] 제국 해군의 철강 소요를 대부분 충당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폴디 제철소(Poldi Hütte)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체코 필젠의 중공업 재벌인 스코다(Škoda)는 독일 크루프 사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1890년대부터 각종 포신을 생산했다. 1차대전 발발 시점에 이르러서는 세계 최초로 3연장 전함 주포를 개발하고 당대 미국 정도만이 보유했던 14인치급 3연장 함포도[24]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08년에는 트리에스테 해군 조선소(Cantiere Navale Triestino)가[25] 추가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렇게 관련 중공업이 발전하며 오스트리아는 자국 해군력을 국산으로 충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제국 해군은 최대한 자국 업체들에 일감을 몰아주어 후발주자인 그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국산 함선들이 인도받기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리거나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타국에서 직도입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해군과 방위산업체들의 이런 밀월과 독과점 덕에 오스트리아의 건함 인프라는 빠르게 발전했다.

그리고 불황의 타격이 적었던 신생 헝가리 왕국이 산업화에 드라이브를 걸면서[26] 해양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1870년대 말이다. 당시 피우메의 시장은 이탈리아계였던 조반니 디 시오타(Giovanni de Ciotta)였는데, 그는 티서 칼만(Tisza Kálmán)[27] 헝가리 총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피우메와 부다페스트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고 해운업과 항구를 정비했다. 영국인인 로버트 화이트헤드가 설립한 화이트헤드 어뢰공장(Whitehead Torpedo Works)이 자리잡은 곳도 피우메였다.[28] 다만 헝가리의 해양력이 제국 해군과 접목되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외교적으로는 1880년대 삼국 동맹이 수립되면서 제국 해군의 부담이 잠시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여전히 잠재적인 적이자 경쟁 대상이었지만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동맹에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모두 가입하면서 아군이 된 것이다. 1860년대부터 가열차게 벌어지던 양국 간의 철갑함 건함 경쟁은 이로써 끝이 났고, 양국은 합동하여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타격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구체화되지 못했다. 비스마르크 사후 삼국 동맹의 근간인 비스마르크 체제가 점차 해체되고 최종적으로는 1차 대전이 벌어지며 양국이 다시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4.2. 20세기[편집]



4.2.1. 대양해군으로의 확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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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드리아 해에서 항진하는 제1전함전단. 선두의 함선은 테게토프급 1번함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다.

20세기가 되자 제국 해군은 전력을 더욱 급격하게 확장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것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대타협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주기적으로 국정운영의 세부 사항들을 합의해 왔는데, 해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건함 사업에 그럭저럭 만족하였던 반면 헝가리 왕국은 그렇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STT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업체들이 해군이 필요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업들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헝가리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헝가리는 합동 육군과 해군의 예산 중 약 31% ~ 36%를 부담하고 있었으나 해군이 진행하는 사업에 실제로 참가한 헝가리 업체들의 비율은 고작 12%에 불과했다. 피우메에 위치한 화이트헤드 어뢰공장 정도만이 해군과 관련된 헝가리 회사였고 나머지는 전부 오스트리아에 기반을 두었다. 때문에 헝가리 입장에서 해군의 확장은 자국 산업을 육성할 기회는 없으면서 막대한 예산만 들어가는 돈낭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해군최고사령관 헤르만 폰 슈파운(Hermann von Spaun) 대장이 1898년에 수립한 건함 계획 또한 헝가리 의회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슈파운 대장은 해군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헝가리를 설득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헝가리 정치인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유화책으로서 앞으로 있을 해군의 사업들에 헝가리 업체들을 대대적으로 참여시킬 것을 제시했다. 헝가리 총리 티서 이슈트반은 해군의 이런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으나 몇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그 중 비밀조항으로 협의한 내용은 너무 급진적이었다. 구축함 및 어뢰정 건조를 헝가리가 주도하고 해군용 탄약 생산의 자그마치 50%를 헝가리가 담당한다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헝가리의 중공업과 조선업이 성장했다고는 해도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듬해인 1905년 헝가리 선거에서 야당이었던 독립당이 승리하였다가 황제에 의해 해산당하는 헌정 위기가 발생하면서 헝가리는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06년 헝가리의 무리한 요구가 일부 철회되는 협의가 제국 해군과 헝가리 정부 간에 새로 맺어졌고, 제국 해군의 건함 계획은 양국의 이런 합의 이후에나 본궤도에 올랐다. # 이로써 1896년 야심차게 수립된 헝가리의 대표적인 조선소인 다누비우스(Danubius) 조선소는 제국 해군 주력함 건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대표적인 함선이 바로 헝가리의 국산 드레드노트로 유명한 테게토프급 전함 4번함 센트 이슈트반이다.

1907년부터 군제 개혁을 추진한 슈파운 대장의 후임자인 루돌프 몬테쿠콜리(Rudolf Graf Montecuccoli degli Erri) 대장[29] 역시 제국 의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함의 건조와 제국 해군의 현대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 덕에 오스트리아는 세계대전 발발 당시 현대화된 전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해군의 확장에는 해상에서의 실질적인 위협이 증가하는 것이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는 과거 경험한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군의 봉쇄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상실을 기억했다. 점점 강해지는 이탈리아 해군의 봉쇄는 장차 제국의 존속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대두되면서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05년에는 HMS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인해 건함 경쟁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부가적으로 동쪽의 러시아 제국이 호시탐탐 지중해와 발칸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것도 고려해야 했다.

사상적인 근원과 황실의 지원도 있었다. 미합중국 해군 제독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이 발표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오스트리아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는 오스트리아가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한다. 노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딱히 해군에 관심이 없었으나, 제국의 새 후계자이자 제국군 총감찰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머핸의 사상에 깊이 감명받아 제국 해군이 대양해군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몬테쿠콜리의 야심찬 건함 계획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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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 필젠 스코다 공장의 함포탑 제작 공정

몬테쿠콜리가 수립한 건함 계획은 열두 척의 전함과 4척의 장갑순양함, 8척의 정찰순양함과 18척의 구축함, 36척의 어뢰정과 6척의 잠수함을 건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20세기 초 제국의 산업은 19세기와 달리 이 거대한 건함 계획에 필요한 대부분의 수요를 자체적으로 충족할 수 있었다.

민간에서의 자금 지원도 있었다. 독일 제국 해군이 함대 협회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팽창했던 것처럼 오스트리아 해군도 그러했다. 1904년에 세워진 '오스트리아 함대 협회(Ӧstereichisches Flottenverein)'는 제국의회의 일부 의원들과 민간인들의 후원을 받아 제국 해군의 건함 계획을 보조했다. 이로써 제국 해군은 1차대전 발발 시점에서 전/준드레드노트급 도합 9척에 드레드노트급 3척을 보유했는데, 당시 주적인 이탈리아에는 전드레드노트급 8척과 드레드노트급 전함 세 척이 있었으므로 제국 해군의 전력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함대 협회에 대한 지원은 독일에서처럼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헝가리 왕국 의회는 건함계획에 불만이 있었고, 적이 많던 페르디난트 대공을 제외한 합스부르크 황실 역시 해군을 딱히 중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해군의 확충 때문에 제국 육군 포병대의 개혁은 지지부진해졌다. 그들은 1차대전 초기까지 청동제 대포를 써야 했다. 제국 내의 강재 생산 물량 대부분이 해군 쪽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단지 해군뿐만이 아니라 오헝 제국 육군이 셋으로 나뉘어 있어 내부 예산 싸움이 매우 심각했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여느 열강의 함선들이 그러하듯 탐험포함외교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당장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외교 관계를 수립한 조오수호통상조약에도 제국 해군의 조선 기항에 관한 조항이 불평등조약의 형식으로 삽입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북극에 대한 탐험 및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 대한 식민화 시도 또한 제국 해군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 북극 탐험대의 이야기가 매우 유명한데, 제국 육군의 율리우스 폰 파이아 대위가 이끄는 탐험대는 제국 해군의 카를 바이프레이트 중위가 지휘하는 탐험선 테게토프호를 타고 1872년 북극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유빙에 갇혀 조난당하고 말았으나 그 와중에도 새로운 섬들을 발견하여 황제의 이름을 따 프란츠 요제프 군도라 명명했다. 결국 탐험 시작 2년 뒤인 1874년에 대부분이 생존하여 귀환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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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톈진의 대고구 요새로 돌격하는 오스트리아 수병들. 좌하단은 같이 돌격한 독일 제국군이다.

20세기 오헝 제국 해군의 대표적인 해외 군사 원정은 바로 의화단 전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8개국 연합군으로 중국에 개입하면서 제국 해군 전력을 중심으로 원정군을 꾸려 보냈다. SMS 젠타 함과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은 톈진 대고구 포위전에 참여하여 청나라 북양함대 요새에 포격을 퍼부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해외 원정 사례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였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톈진의 경비를 위해 일부 해군 육전대와 함선이 중국에 주둔한다.

대고구 요새 포위전 당시 영상. 44초와 3분경에 함렬을 따라가는 2개 연돌이 달린 검은색 함선이 제국 해군의 장갑순양함 K.u.K 마리아 테레지아 함이다. 당시 함장은 훗날 제국 해군의 최고사령관이자 원수가 되는 안톤 하우스 대령이었다.


4.2.2. 제1차 세계 대전[편집]



4.2.2.1. 초중반의 선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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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 이탈리아 중동부 해안의 안코나 시를 포격하는 오헝 제국 함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헝 제국 해군은 아드리아해에 고립되고 말았다. 협상국 해군 전부가 오스트리아를 잡겠다고 아드리아해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 알바니아를 잇는 오트란토 해협에는 협상국 해군 함대의 봉쇄망이 깔렸다.

전쟁 시작 직후 프랑스는 오헝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노출된 지중해 식민지들을 지키기 위해 전 함대를 지중해로 보냈다. 강대한 영국 해군 또한 지중해 함대를 보내어 이집트와 수에즈를 보호하고자 했다. 영국 지중해 함대에는 3척의 순양전함이 있었고, 프랑스 해군은 22척의 전드레드노트급과 3척의 드레드노트급 전함 전체를 지중해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오트란토 해협 안으로 대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1915년부터는 기존의 영국-프랑스 함대에 더해 새로 선전포고를 한 이탈리아 왕국도 가세했다. 독일 해군은 북해에서 영국을 상대로, 오스만 제국 해군은 주로 흑해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활동했으므로 오스트리아는 협상국 연합함대와 사실상 홀로 맞서야 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 중에서도 주로 프랑스 해군이 주적이었다.

하지만 협상국 함대 또한 황립해군이 지키는 아드리아해 내부로 침투할 여력은 되지 않았다. 아드리아해는 매우 좁은 바다였고, 오헝 제국 해군의 근거지가 있는 달마티아 해안은 서부 이탈리아 연안과 달리 높은 디나르알프스 산맥과 굴곡진 리아스식 해안에 보호받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영해에 접근한 협상국 해군 군함들은 이 미로 같은 해안선에 숨은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함대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거기다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오면 섬과 섬 사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어뢰를 쏘고 다시 사라지는 오헝 제국 해군 어뢰정유보트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 초에 협상국, 특히 프랑스 해군이 입었던 주요 함선 손실들은 거의 다 이런 식으로 달마티아 해안에 근접하다 뇌격당한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최고사령관 안톤 하우스[31] 대장이 이끄는 제국 해군은 현존함대 전략을 기본 방침으로 세우되, 유보트 전력으로 협상국을 타격하는 전술로 전환하였다. 오헝 제국 해군 유보트 함대와 지원 나온 독일 제국 해군 풀라 잠수함 전단[32]은 오트란토 해협에 깔린 순찰선들과 대잠망들을 회피해 지중해로 나와 통상파괴전을 실시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해군 전력이 갈리폴리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향하자 해협의 경계도가 떨어졌고, 이는 동맹국 해군에 있어서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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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상국 수송선을 격침한 오헝 제국 해군 잠수함.

미국 디자인을 바탕으로 헝가리의 피우메에서 건조된 U-5 함은 1915년 초 프랑스 해군 장갑순양함 레옹 강베타 함을 침몰시켰고, 동형함인 U-12함은 1914년 말에 쿠르베급 전함 3번함 장 바르를 대파시켰다. 일본 해군 카바급 구축함을 대파시키고 십수 척의 그리스 선박들을 뇌격한 독일제 U-27함의 활약도 돋보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보트 타격전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모델로 유명한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라프 소령이었다. 그는 노획되어 U-14란 이름으로 개칭된 프랑스 해군 잠수함 '퀴리'의 함장이었는데, 1916년부터 그리스 연안과 동지중해에서 수 척의 협상국 수송선들과 민간 선박들을 침몰시켰다. 그의 함선인 U-14함이 본래 프랑스 선박이었던 고로 그는 프랑스 삼색기를 달아 협상국 함대를 속이고 유유히 봉쇄망을 넘어갔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한편 수상함대는 항구와 전력을 온존하여 협상국에 압박을 주는 것 외에도 아드리아해 봉쇄를 돌파하거나 발칸의 육군 작전을 지원하고, 이탈리아 연안을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중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1915년에 있었다. 이탈리아삼국 동맹을 배신하고 협상국 측에 가담할 것이라는 정황이 명백해지자, 하우스 대장은 이탈리아가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이탈리아 동부 해안의 항구들을 기습하여 파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기 4시간 전 그는 가용한 전체 수상함대에 출항 명령을 내려 기계획된 내용에 따라 이탈리아 연안을 급습했다. 이 기습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특히 안코나의 철도 시설에 대한 포격은 이탈리아군의 동원 능력을 성공적으로 저해했다. 다만 그들의 주요 목표가 민간 시설들이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제국 해군의 포격에 다수의 이탈리아 민간인들도 휘말려 살해되었다.

제국 해군은 해군 항공대 운영에 있어 선구적인 조직이기도 했다. 미 해군연구소에 따르면 제국 해군 항공대는 아드리아해의 해안선과 오트란토 해협 입구를 돌아다니며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 사령부에 실시간으로 적 함대의 위치를 보고했고, 이는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방어전략을 가능케 했다. 또는 몬테네그로 해안을 포격하던 제국 해군의 관측반 역할을 맡아 포격을 유도하거나 직접 적 함대를 폭격하기도 했다. 1916년에는 프랑스 해군 브뤼메르급 잠수함 푸코 함이 제국 해군의 로너 수상기들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는데 이는 최초로 항공기가 함선을 격침에 성공한 케이스다.[33] 이외에도 바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 해안을 폭격하기도 했다.

해협 봉쇄선에 대한 돌파 시도도 있었다. 여기서 가장 활약했던 것은 타트라급 구축함들과 노바라급/헬골란트급 정찰순양함들이었다. 협상국 해군은 주로 트롤어선들을 동원해 해협 입구에 기뢰와 대잠망을 깔았는데, 기민하고 재빠른 움직임이 가능했던 제국 해군 구축함대는 이 기뢰지대 근처를 오가며 협상국 어선단에 공격을 가했다. 동원된 민간인들이 다수였던 이 어선들은 이 때마다 격침당하거나 마구 도망쳤고, 목표를 달성한 제국 해군 구축함들은 빠른 속도를 살려 적 증원 함대가 오기 전에 퇴각했다. 그럼 이렇게 엉망이 된 봉쇄망의 틈으로 유보트들이 나가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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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해협 해전 당시 기록화. 호르티 미클로시 대령의 함선인 정찰순양함 SMS 노바라 함이 협상국 선단의 함렬을 돌파하는 모습이다.

1917년 하우스 원수가 폐렴으로 급사한 후에는 막시밀리안 녜고반 대장[34]이 해군최고사령관직에 올랐고, 그의 지휘 하에 제국 해군은 1917년의 오트란토 해협 해전에서 협상국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오트란토 해협 역시 근본적으로는 상술한 구축함대의 기습 작전이었다. 이때 수상함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호르티 미클로시였다. 그는 여기서 쌓은 명성을 바탕으로 훗날 헝가리의 섭정으로 군림하게 된다.

한편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견되었다가 톈진 조계 방위를 위해 남게 된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과 해군 육전대칭다오 전투에서 일본 해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카이제린 엘리자베트는 최초로 함상 발진 항공기에 항공 폭격을 당한 함선이기도 했다. 이들은 같이 싸우다 포로가 된 독일 제국 해군 병사들과 함께 일본의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전후에 귀국한다. 한편 톈진 조계는 1917년 동맹국에 선전포고한 중화민국 북양정부안휘군벌 군대가 들어와 접수했다.


4.2.2.2. 악화되는 전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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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왕립 해군 어뢰정에 뇌격당해 침몰하는 테게토프급 전함 4번함 SMS 센트 이슈트반. 오른쪽의 함선은 동형함인 SMS 테게토프다. 센트 이슈트반의 침몰은 테게토프에서 촬영한 영상으로도 남아 있다.

제국 해군의 선전은 협상국의 일부 전력을 아드리아해 입구에 묶어 놓음으로써 제국의 해안을 보호하고 3면 전선의 압박을 중화시킨다는 의의가 있었다. 협상국 해군이 아드리아해에 진입하여 이탈리아 육군과 공조하거나 오스트리아의 해안선에 상륙한다면 이탈리아 전선의 추가 협상국 쪽으로 순식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었으니 오스트리아의 현존함대 전략은 이 상황을 방지하는 것만으로 제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었다. 해군의 승전은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처럼 보다 큰 전략적 의미를 가지기는 힘들었다. 1917년부터는 일본 제국 해군 구축함대와 미국 해군, 그리고 ANZAC 해군까지 가세하면서 협상국 해군의 전력은 갈수록 늘어나는 반면, 제국 해군의 전력은 반대로 조금씩 줄어 갔다. 봉쇄는 그대로였다.

거기다 제국 해군 내부에서는 반란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었으며 이 열기는 1918년 2월의 카타로[35] 해군 반란 사건으로 터져나오고 말았다.[36] 오스트리아 해군의 사관-수병 관계는 러시아 제국 해군처럼 매우 좋지 못해 수병들은 인종차별과 사관들의 가혹한 처벌, 부실한 식사와 고된 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처우 개선과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수병들의 반란은 오트란토 해협 일대를 방위하는 주요 항구인 카타로 항에 정박해 있던 순양함 SMS 장크트 게오르크함에서 최초로 터졌다. 반란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이틀 사이에 항구 전체가 반란군에 점령당했고 사실상 순양함 전단 전체가 반란에 가담했다. 제국 해군은 곧바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들로 이루어진 진압군을 파견하여 카타로의 반란을 진압했고, 주동자들을 처형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오스트리아판 포템킨 반란 사건이자 곧 일어날 제국 붕괴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었다. 해군최고사령관 녜고반 대장도 이 반란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당했고,[37] 사건 조사를 맡은 감찰관 카를 슈테판 대공은 오트란토 해협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던 호르티 미클로시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이로써 호르티는 오헝 제국 해군 최후의 함대사령관이 되었다.

악재도 겹쳤다. 호르티가 이끄는 제국 해군은 카타로 반란 직후 지난 1917년에 그랬듯 오트란토 해협을 재차 돌파하고자 수상함대를 다시 준비했다. 다만 이번에는 그동안 아껴 두었던 전 함대를 동원했다는 것이 차이였다. 핵심 전력인 테게토프급 4척 전부와 전드레드노트급 에르츠헤르초그 카를급 3척, 그리고 순양함대 다수를 동원하여 봉쇄선을 기습한 것. 구축함과 정찰순양함들로 구성된 소규모 타격대가 기존처럼 봉쇄망을 헤집는 동안, 주력함들이 달려드는 협상국 해군을 저지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대응이 더 영민했다. 1918년 6월 10일, 이탈리아의 M,A,S 어뢰정들은 테게토프급 1번함 테게토프 함과 4번함 센트 이슈트반 함이 전속력으로 항진하며 내뿜는 매연을 포착하고 달려들어 센트 이슈트반함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했다.[38] 작전은 중단되었고, 목표 달성은 커녕 주력 전함 1척을 잃어버린 제국 해군은 다시 항구로 돌아왔다.

이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수행한 사실상의 마지막 작전이었다. 이후로도 소규모 타격대의 봉쇄선 기습과 유보트 작전은 계속되었지만 주력함대는 다시 항구에 틀어박혔다.

4.2.2.3. 의의와 한계[편집]

파일:otrantol.gif
▲ 1917 - 1918년 사이 오트란토 해협 일대의 작전 지도. 곳곳에 봉쇄선과 기뢰 지대가 겹겹이 둘러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해군이 우세한 적을 맞아 지형지물과 유기적인 운용 능력을 바탕으로 이 정도 성과를 낸 것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함대의 존재로 인해 프랑스 해군이탈리아 왕립 해군 전체가 지중해에 발이 묶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국 해군 역시 대영제국 유지에 필수적인 수에즈를 보호하기 위해 지중해 함대를 항상 유지해야만 했다. 이는 다시 강대한 세계 2위의 해군인 독일 제국 해군과의 일전이 벌어지고 있는 북해 일대에서의 전력 감소로 이어졌다. 패전으로 인해 결실을 보지는 못했으나, 황립해군은 전반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최대한 분투하며 오스트리아의 해안을 지켜내고 4년간 협상국의 해군력을 분산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보다 세부적으로는 주력함대 운용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점이 존재했다. 오헝 제국 주력함대의 전함들은 1915년의 대습격 이후로는 이스트리아 반도의 항구에 대부분 조용히 머물렀다. 합스부르크급 전함 같은 전드레드노트급들의 경우 간간히 예비대로 모습을 비추기라도 했으나, 핵심인 테게토프급 전함들은 전혀 활동이 없었다. 가령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동맹국에 대패한 이탈리아가 수십 킬로미터를 후퇴할 때,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며 베네치아를 포격하는 임무에 동원된 함선 중에서 주력함대에 속하는 함선은 단 한 척도 없었다. 이때 투입된 것은 구식 해방전함인 모나르크급들이었고 그마저도 이탈리아 방어군의 저항에 쉽게 격퇴되고 말았다.

그리고 완전히 분쇄된 세르비아군 잔존세력 26만 명이 알바니아에 집결하여 협상국으로부터 해상 보급을 받으며 재정비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에도 전함들은, 하다못해 장갑순양함조차도 나서지 않았다. 소형 함정들의 화력으로는 알바니아 해안선에 대한 타격 효과가 적었음에도 그랬다. 결국 재정비를 마친 세르비아군 잔당들은 1918년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아 오스트리아 영내로 진군했다. 그리고 세르비아를 해방하고 오헝 제국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면서 1915년의 복수에 성공한다.

이는 오헝 제국의 경제 사정 상 주력함 손실분의 보충이 극도로 어려워, 전함을 상실했을 때의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도중 추가된 전함은 한 척도 없으며 차기 슈퍼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전함은 아예 취소되었다. 거기다 부차적이지만 주요 연료인 고품질 석탄의 산지인 영국과 적이 된 것도 가동률을 급락시키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그런 경제 상황과 제국 해군의 현존함대 전략을 감안해도 전함의 운용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가령 테게토프급들은 함생의 90% 이상을 항구에서 보냈으며, 1918년의 출격에서 제국 해군이 센트 이슈트반을 어이없이 잃어버린 것은 누가 보아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미 해군연구소는 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의 전반적인 운용과 전략적으로 이뤄낸 성과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내렸다. 아드리아해를 보호한다는 목적을 달성했고, 잃은 함선보다 침몰시킨 함선이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전함에 대해서만큼은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필요성과 국가 체급에 비해 전함이 과하게 많았고, 구축함들과 달리 너무 졸렬하게 운용하여 있는 전력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게 미 해군연구소의 냉정한 평가다. # 특히 오트란토 봉쇄선을 타격하는 작전에서 대체 불가능(irreplacable)한 활약을 선보였던 정찰순양함들이 단 4척밖에 없었다는 건 심각했다.

미 해군대학의 스탠리 D.M. 카펜터 교수 역시 오헝 제국 해군이 열세한 상황에서 최대한 분투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강대한 해양전력과 우수한 인재들을 그냥 낭비(waste)했다고 비판했다. # 오헝 제국 수상함대가 전쟁 내내 벌인 주요 작전이라고는 1915년의 안코나 기습과 오트란토 해협 해전, 그리고 센트 이슈트반을 잃어버리는 재앙으로 끝난 1918년의 출격 단 셋 뿐이기 때문. 수상함대와 달리 잠수함대와 강방함대의 활약은 돋보였으나 전황을 바꿀 수준은 되지 못했다.

카펜터 교수는 압도적인 숫자의 협상국 전력을 맞닥뜨렸다는 외적인 문제 외에도 제국 해군이 가진 내적 문제를 두 가지 더 꼽았는데, 하나는 주요 항구풀라카타로 단 둘뿐이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소형 함정들의 작전반경이 매우 제한되었다. 하지만 그가 꼽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제국 해군 스스로 설정한 너무나도 제한적인 전투 목표들이었다. 주요 목표는 1. 해안 방어와 2. 아드리아해에서의 협상국 항로 공격, 3. 육군 작전 지원, 4. 오스트리아의 항로 보호, 5. 중립 국가들이 동맹국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영향을 끼치기의 다섯 가지로만 구성되었다. 그리고 최고사령관 안톤 하우스 원수가 "이탈리아 해군과 온전한 전력으로 상대할 수 있도록 함대를 보전해야 한다"고 전쟁 초에 설정한 이래 제국 해군은 상당히 위축되어 버렸다. 훗날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 해군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여 준 셈이다.

제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 전함 3척을 침몰시켰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전드레드노트급인 레지나 마르게리타함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독일 제국 해군 잠수함이 부설한 기뢰에 폭침했다. 그 동형함 베네데토 브린 함과 드레드노트급인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4번함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파괴공작으로 폭침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원인불명의 사고로 탄약고가 유폭했다는 분석이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국 해군이 전함을 대상으로 올린 가장 큰 전과는 잠수함 U-12함이 프랑스 해군 쿠르베급 전함 장 바르를 대파시킨 것이다.

4.3. 해체와 그 이후[편집]


파일:Tegetthoff_La_Spezia.jpg
▲ 1923년, 이탈리아 라스페치아 항에서 해체되는 SMS 테게토프. 상부구조물들은 이미 대부분 철거되었고, 부두에는 포탑에서 제거한 12인치 함포들이 널브러져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1918년 10월 말, 황제 카를 1세는 협상국이 오헝 제국 해군의 전력을 전리품으로 노리고 있음을 깨닫고 제국 해군이 보유한 전력의 대부분을 제국의 남슬라브인들이 독립을 선언한 후 세운 신생국인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국[39]에 넘겨버렸다. 10월 31일 제국 해군 함선의 대부분의 소유권이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국으로 넘어가고 다음날인 11월 1일 새벽 인간어뢰를 타고 풀라항에 잠입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 소속 특수부대가 테게토프급 전함 1번함 비리부스 우니티스의 함저를 폭파하여 침몰시켰다.[40] 당시 비리부스 우니티스의 함장이었던 얀코 부코비치(Janko Vuković de Podkapelski)는 배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

종전 이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은 대부분 협상국에 넘겨졌고 내륙 해군인 다뉴브 전대의 일부 함선들만이 신생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헝가리 왕국에 남았다. 유고슬라비아는 카를 1세가 자신들에게 전력을 넘겼음을 근거로 주력함대를 비롯한 함선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다른 협상국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제국 해군에 가장 크게 시달렸던 이탈리아는 오헝 제국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유고슬라비아가 또다른 해군 열강이 되어 아드리아해를 장악하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국 해군 함선들의 소유권은 각기 여러 나라로 갈라졌다. 그 중 오헝 제국 해군의 숙적인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 가장 중요한 함선인 테게토프급 2번함 테게토프를 비롯해 가장 중요한 함선들을 가져갔는데 테게토프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1924~5년에 걸쳐 해체되었고, 닻만이 현재 베네치아 해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국 해군의 주요 군항이었던 트리에스테풀라[41], 피우메 항구는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군항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유산으로 시작하여 오스트리아가 19세기 내내 트리에스테에 닦아 놓은 주요 인프라는 이때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더 강화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한때 제국 해군의 주력함들을 만들던 STT사는 이제 리토리오급 전함을 비롯한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함들을 건조했다. 이들은 여전히 이탈리아 소유이며 그 중 STT는 현재 핀칸티에리 산하에서 크루즈 여객선들을 만들고 있다.

프랑스는 테게토프급 3번함 프린츠 오이겐을 비롯해 순양함이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과 같은 함선들을 넘겨받았는데 프린츠 오이겐은 1922년 표적함으로 침몰시켰고 전리품으로 넘겨받은 함선들 대부분은 워싱턴 군축 조약에 따라 해체했다. 한편 그리스 해군유고슬라비아 해군은 구축함급 이하의 함선들을 넘겨받았고, 해체하기도 했으나 일부는 자국 해군에 편입하여 사용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사용되며 그리스 침공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추축국의 침공에 대항해 분투하다 격침당하기도 했다.

파일:yj82a425bfma1.jpg
▲ 복원되어 항해하는 SMS 라이타 함. 함미에 오헝 제국의 해군기를 달고 있다. #

2023년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오헝 제국 해군 함선은 두 척이다. 우선 모니터함 SMS 라이타(SMS Leitha/Lajta) 함은 1872년 건조되었으며 다뉴브 전단 소속으로 쓰였다. 제국 멸망 후에는 헝가리 적군에 편입되어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전쟁 당시 체코슬로바키아군을 저지했으나 곧 수병반란을 일으켜 헝가리 보수파의 부다페스트 탈환에 기여했다. 이후 무장을 탈거하고 70년 가까이 광물운반선으로 쓰이다 공산정권 붕괴 후인 1992년에 스위스에 팔렸다. 하지만 이 배의 역사성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반환되어, 복원을 거쳐 박물관함으로 재탄생했다. 라이타 함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모니터함이다. 헝가리 소유이며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에 정박해 있다. 오늘날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기를 달고 있는 유일한 함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테메스급 모니터함 SMS 보드로그(SMS Bodrog)함도 남아 있다. 1904년 건조되어 다뉴브 전단 소속으로 활동했다. 베오그라드를 포격하며 1차 대전의 첫 포성을 울린 함선이기도 한데, 제국 멸망 후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에 편입되어 사바(Sava) 함으로 개칭되어 1952년까지 쓰였다. 세르비아 소유이며, 한동안 폐선으로 방치되다가 수리되었다. 현재는 라이타 함처럼 베오그라드에 정박한 채 박물관함으로 쓰이고 있다. 세르비아의 적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드로그 함이 아닌,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일원이었던 사바 함으로서 보존 중이기 때문에 라이타 함과 달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국기를 달고 있다.

5. 주요 인물[편집]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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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Generalfieldmarschall / Großadmiral독일어
Tábornagy / Főtengernagy헝가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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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상급대장 계급장.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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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중장 계급장.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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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소장 계급장.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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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도마슈니안 | 율리우시 비야크 | 니콜라우스 로고샨 폰 카란제베슈 | 에두아르트 피셔 | 알프레트 폰 발트슈테텐
해군
소장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 윗 첨자 * : 지휘권을 동반하지 않음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장군참모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더 자세한 정보는 1918년 군적부 참조: #

6. 군가[편집]


오스트리아 헝가리 해군의 군악대 역시 베네치아의 군악대에서 시작한다. 1850년대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이 사령관이던 시절 많은 지원을 받았고, 체코인 작곡가이자 제국군 군악대장이던 바츨라프 자베르탈(Václav Hugo Zavrtal)의 지도 하에 성장했다. #

  • 제독기 아래에서(Unter der Admiralsflagge)

체코 작곡가 율리우스 푸치크가 작곡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제자이기도 한 푸치크는 제국 육군 연대들의 군악대 지휘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제국군을 위한 많은 군가와 행진곡들을 만들었다.

7. 기타[편집]



  • 수병들에 대한 처우는 타국 대비 좀 열악한 편이었는지, 전함 내에 가혹한 환경의 영창과 교수대 등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1918년 카타로 수병 봉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제국 해군은 민족별로 주특기를 다르게 배정했다. 수병의 다수는 해안 출신의 크로아티아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채운 반면 장교나 기술자 또는 주포 운용요원들은 독일계와 체코인이, 부포의 포술장들은 헝가리인들이 맡는 식이었다. 그 중 이탈리아계는 건군 초기에 제국 해군 장교와 수병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상술한 1848년 혁명 이후의 숙군으로 쓸려나갔다.

크로아티아 전쟁박물관에 따르면 1910년 당시 제국 해군의 민족 구성은 크로아티아인 30%, 독일계 오스트리아인 24.5%, 이탈리아인 18.3%, 헝가리인 12.6%, 체코슬로바키아인 10%와 나머지 3.6%이었다. 나머지 중에서는 유대인들이 약 1%를 차지했다. 전반적으로 아드리아해와 접한 연해 지역의 출신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해군은 1918년 수병봉기 때를 제외하면 육군에 비해 민족 갈등이 일반적으로 상당히 적었던 편에 속한다. 미 해군대학에 따르면 절대다수의 사관과 수병들은 멸망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이기도 한 트라프 소령이 나치 독일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독일 해군으로의 합류를 거부하고 끝까지 독립 국가 오스트리아의 지지자로 남은 것에는 그가 몸담았던 오헝 제국 해군의 이런 근왕주의적 문화도 일부 영향을 끼쳤다.

  • 제국 육군과 마찬가지로 제국 해군도 각 민족 언어의 피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 다만 장교들은 일반적으로 4개국어를 할 줄 알았다.

다음 피진은 헝가리인 선원이 체코인 선원와 대화할 때 사용한 피진이라고 한다. 독일어, 이탈리아어, 크로아티아어가 섞였다.
"Što radi brate, warum nichts arbeit? Mein lieber šogor, schlecht, ich muss post machen. Zu aus keine van diese. Zu aus, wiesen sie, du nichts nur puszta, kukuruc, a ima -no - diese prasae - porco, und dort ist meine kuča."

  • 1912년에는 신생 중화민국 북양정부에서 청일전쟁과 뒤이은 혼란기로 인해 무너진 중국 해군의 재건을 위해 오스트리아 측에 12척의 구축함을 주문했다. 후사르급 구축함의 설계를 따른 첫번째 함선은 1913년에 완성되어 룽퇀(龍湍) 이라는 함명을 부여받았으나, 이듬해 벌어진 전쟁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압류하여 SMS 바라스디너(Waradiner)란 이름으로 자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7.1. 매체에서[편집]


시대적 배경이 나치 병합을 앞둔 1930년대이므로 해군이 등장하진 않으나, 전직 오헝 제국 해군 유보트 함장 출신의 트라프 소령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서 트라프 소령이 가진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심과 해군 유보트 함장이었던 그의 재능을 탐내는 나치의 대립이 영화 내부의 주요 갈등 요소 중 하나다.

  • 소설 '빙하와 어둠의 공포'
상술한 북극 탐험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각색한 소설이다.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작.

전함 비리부스 우니티스(전함소녀)와 잠수함 U-14(전함소녀)가 등장한다.

[겸임.] [1] 카를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의 4남. 형인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은 육군원수로서 전군 최고사령관 겸 제국군 총감찰관이었으며 동생 오이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역시 훗날 제국 육군 원수가 된다. 자식으로는 폴란드 독립운동가 카를 알브레히트 대공과 우크라이나 독립운동가 빌헬름 프란츠 대공이 있다.[2] 최종 계급 원수[3] 출처는 P.G. 할펀의 "제1차 세계대전의 해군사"[4] 건조 중이었던 테게토프급 4번함 센트 이슈트반함 제외.[5] 일본의 경우 1914년 8월 시점에서 드레드노트급 보유 숫자는 오스트리아와 같았다. 하지만 설계상의 문제가 많은 카와치급 전함 2척, 반대로 오스트리아가 가지지 못한 최신형 14인치급의 공고급 순양전함 1척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전력의 단순 우열 비교가 힘들다. 다만 1915년이 되면서부터 일본이 오스트리아를 역전해버린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스트리아가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전함을 취소해버린 반면 일본은 공고급 순양전함들을 포함한 차기 전함들을 속속 내놓았기 때문이다.[6] 1917년 풀라 항에서 촬영되었다.[7] 독일어 단어 Linienschiff는 전열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였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며 전열함이 철갑함으로, 다시 전함으로 진화함에 따라 그들을 전부 포괄하는 '주력함'이라는 의미도 내포한다.[8] 'Eskadre'는 전단을 호칭하는 덴마크어 단어로, 프랑스어 'Escadre'에서 기원한다. 전단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는 'Geschwader' 내지는 'Eskader'이다. 이마저도 Eskader는 사어에 가깝다.[9] 왼쪽의 불타는 함선은 오스트리아 기함 SMS 슈바르첸베르크다.[10] 다만 멸망 당시 베네치아 해군은 이미 과거의 영광을 잃고 유명무실한 상황이기는 했다.[11]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 1104년 수립되어 거의 1천 년간 운영했던 조선소이자 조병창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패권 장악을 가능하게 했던 대표적인 시설이다. 운하를 이용한 조립식 대량 생산 공정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근대에 컨베이어 벨트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여기서만 가능했던 생산 방식이다. 현대 들어서는 그 자체가 역사 유적으로서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해군 박물관도 이곳에 있으며 동시에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전시장으로도 쓰인다.[12] 얄궂게도 사르데냐 왕국 해군은 빈 회의로 사르데냐 왕국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라이벌이었던 옛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를 병합한 후 제네바 공화국 해군 인프라를 이용해 구축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베네치아-제노바의 라이벌리가 오스트리아-사르데냐로 계속 이어진 셈이다.[13] 베네치아 일대에서 쓰이는 이탈리아어 방언.[14] 당시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스웨덴이 주도하는 연합왕국을 구성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노르웨이군 역시 스웨덴군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고 존속했다.[15] 풀라 해군공창은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 풀라 시와 함께 넘어간다. 2차 대전 이후에는 공산 유고슬라비아의 회사가 되었다가 1990년대의 유고 내전 이후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가져갔다. 현재는 민영화되어 울랴니크(Uljanik)라는 이름의 주식회사로 운영 중이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큰 조선업체 중 하나다.[16] 영국 기준 2급함[17] 오트란토 해협에서의 우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남이탈리아가 필수적이었다. 과거 동로마 제국의 봉신국이던 시절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례가 그 지정학적 가치를 잘 보여준다. 동로마가 남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는 한 베네치아의 해양 출구는 막힌 것이나 다름없었고, 때문에 아무리 베네치아가 동로마 본토와 거리가 멀다 한들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위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의 독립은 노르만 정복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이 남이탈리아의 통제권을 상실한 후에야 이루어졌다.[18] 얄궂게도 달레루프 중장 역시 이 전쟁을 겪었다. 그것도 오스트리아군 소속으로 말이다. 원래 그는 군사고문 임무를 마치고 덴마크 해군에 복귀하면 소장 자리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돌아가자 덴마크 정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미 오스트리아에서 연금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연금수령 자격조차 박탈해버렸다. 격노한 달레루프는 곧 퇴역했고 덴마크 해군에서 받은 훈장들을 일절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1861년에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이 스승이었던 그를 기술고문으로 다시 초청하자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고작 3년 뒤인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졸지에 조국과 싸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불만은 있을지언정 반역자는 아니었던 그는 이로 인해 심리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다행이도 오스트리아는 그를 일선에 세우지는 않았다. 이 와중에 시력까지 잃어버린 그는 이듬해인 1865년에 오스트리아군에서도 퇴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1872년에 사망했다.[19] 이 반격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 중에는 달레루프를 따라왔던 스웨덴 해군 출신 장교인 에릭 아프 클린트 대령도 있었다. 클린트 대령은 달레루프가 떠나고 나서도 오스트리아에 남아 커리어를 쌓았는데, 이 전투에서 SMS 노바라 함의 함장으로 참전했다가 사망했다.[20] 동시에 이탈리아에 대한 조롱으로도 자주 언급된다.[21]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보오전쟁 당시 이미 롬바르디아는 이탈리아의 영토였다.[22] 19세기 중반 후고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백작이 첼트베크 지역에 세운 제철소다. 1881년 슈타이어마르크 지역의 다른 군소 제철업계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알프스 광업조합(ÖAMG)을 결성했다. ÖAMG는 오늘날에도 운영 중인데, 현재는 오스트리아 대표 제철업체이자 포스코와 협력해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도 한 푀스트알피네(Voestalpine) 사의 자회사이다.[23] 비코비체 제철소는 유대계 대부호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1828년 설립했다. 1870년대에는 장기불황으로 인해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으나 새 경영자로 들어온 파울 쿠펠비저(Paul Kupelwieser)의 지도 하에 경영을 쇄신하여 중동부 유럽의 가장 거대한 제철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미 여러 국가의 제철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쿠펠비저는 벨기에의 신식 제철 설비를 들여와 생산 품질과 양을 일신했다. 제국 멸망 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에도 중요한 제철소로 남았으며 공산정권 시절에 다시 한 번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1998년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현재는 체코의 주요 산업 유적으로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24] 정확히는 350mm. 에르자츠 모나르히급 전함에 사용될 예정이었고 실제로도 제작되었으나 해당 함급이 건조가 취소되며 탑재되지는 못했다.[25] 이름은 국영 기업 같지만 민간 업체였다. 패전 이후 이탈리아로 넘어갔고 1929년에 STT사에 합병되었다. 현재는 STT가 핀칸티에리에 합병되면서 그 산하 자회사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에는 군함을 건조하지는 않고, 여객용 크루즈선이 주력 상품이다. 지금도 항해 중인 영국 큐나드 라인의 크루즈선 MS 퀸 엘리자베스가 대표적인 배다. #[26] 부다 시와 페스트 시가 합쳐져 부다페스트가 된 것도 바로 이 때이다.[27] 1차 대전 발발 당시 헝가리 총리인 티서 이슈트반의 아버지다.[28] 현대적인 어뢰의 개발자이기도 했던 화이트헤드는 제국 해군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의 손녀사위가 바로 잠수함 에이스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소령이다.[29]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이탈리아계였다. 17세기 황제군의 기반을 다진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원수의 먼 후손이다.[30] 현대 오스트리아 소설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빙하와 어둠의 공포'가 바로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에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다. #[31] 슬로베니아인이다.[32] 잠수함은 크기가 작기 때문에, 기차에 실어 지중해까지 옮길 수 있었다.[33] 최초로 항공기가 함선을 '공격'한 케이스는 아니다. 이건 일본 해군이 최초이며 2년 전인 칭다오 전투에서 시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공격받은 함선 역시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선이었던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다.[34] 크로아티아계였다.[35] 현 몬테네그로 코토르.[36] 오랜 기간 총력전이 유지되며 피로가 누적되고 있음에도 전체적인 전황은 악화일로를 걸었으며 제국의 인종 문제는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러시아 혁명의 소식과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내세운 14개조 요구의 소식이 오스트리아로도 날아들어오자 오헝 제국의 국민들은 1918년 1월에 종전과 더 나은 삶의 보장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파업과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카타로 해군 봉기도 이 영향을 받았다.[37] 그럼에도 오트란토 해협 해전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녜고반은 능력 자체는 인정받은 인물이다. 해임 이후 퇴역하였으나 제국 멸망 직전 예비역 원수로 진급했다.[38] 센트 이슈트반은 헝가리 업체인 건즈 다누비우스가 건조했는데, 건즈 다누비우스가 전함 건조에 미숙했기에 자매함들에 비해 잔고장이 많았고 엔진 또한 그랬다. 선두함들을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 항진을 시작하자 엔진이 버티지 못하고 평소보다 더 많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고, 불행히도 이것이 이탈리아군에 포착된 것이다.[39] Država Slovenaca, Hrvata i Srba / Држава Словенаца, Хрвата и Срба(세르보크로아트어) Država Slovencev, Hrvatov in Srbov(슬로베니아어). 1918년 10월 29일 독립을 선언했으나 국제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수립 33일 후인 1918년 12월 1일 세르비아 왕국에 합류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수립되면서 멸망했다.[40] 다만 당시 이탈리아는 비리부스 우니티스의 소유권이 신생국 측으로 넘어갔음을 모르고 있었다.[41] 이탈리아어로는 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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