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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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예카
Rijeka




1. 개요
2. 언어별 표기
3. 역사
4. 인구와 사회
5. 볼거리
6. 기타



1. 개요[편집]


크로아티아 서북부 프리모레고르스키코타르 주(Primorsko-goranska županija)의 도시이자 주도이자 스플리트의 뒤를 잇는 크로아티아 제2의 무역항.

아드리아 해 연안 크바르네르 만과 접하고 있다.

2. 언어별 표기[편집]


크로아티아어
Rijeka
이탈리아어
Fiume (피우메)
헝가리어
Fiume (피우메)
독일어
Sankt Veit am Flaum (장크트바이트암플라움)
슬로베니아어
Reka (레카)

3. 역사[편집]


과거에는 켈트족이 거주하던 타르사티카(Tharsatica)였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이 이곳을 재건하면서 플루멘(Flumen)이라는 라틴어 지명을 붙였다. 동서로마의 분열 당시 서로마 제국에 속했으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고트족,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족,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7세기 무렵 크로아티아인이 이곳을 성 비투스의 강(Rika svetoga Vida)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이 일대에 정착했다.

799년 샤를마뉴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크로아티아 공국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925년부터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1102년부터 크로아티아 왕국이 헝가리 왕국동군연합을 이루며 헝가리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아르파드 왕조 말기에 헝가리 왕국이 붕괴 직전까지 몰린데다 트란실바니아 개척을 위해 독일인을 헝가리로 많이 불러들인 여파로 리예카 일대는 신성 로마 제국과 가까운 특성상 독일계 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발제(Walsee) 가문은 1300년부터 1466년까지 리예카의 영주 노릇을 했다.

1466년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매입하면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속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나폴레옹 전쟁 중인 1809~1813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1918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전쟁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급습해 도시를 황폐화시켰으나 곧 회복했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 차례 공격에도 견뎌냈다. 16세기 중후반부터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들어섰고 1719년 카를 6세트리에스테와 더불어 리예카를 자유도시로 선언했다. 1725년에는 에서 라이바흐를 거쳐 트리에스테와 리예카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건설되었다.

1779년 마리아 테레지아항구가 없던 헝가리를 위해 헝가리에 넘겨준 이후로는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에 속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잠시 일리리아 속주에 속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이 곧 회복했고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군기지와 해군사관학교가 들어서면서 해군 거점도시로 발전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엽에 들어서는 헝가리의 유일한 무역항이라는 입지에 힘입어 더더욱 발전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되었고 이탈리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점을 노린 이탈리아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을 흡수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1920년 라팔로 조약이 체결되어 피우메 자유국이라는 이름의 독립 공화국이 들어섰으나, 1924년 이탈리아 왕국군이 들어서 피우메 자유국은 해체되었고 결국 로마 조약으로 도시 대부분을 이탈리아가 차지하되, 북부의 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 화자가 많은 지역은 유고슬라비아로 귀속되었다.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리예카를 피우메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수샤크(Sušak)로 불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 왕국군유고슬라비아군의 격전지가 되었고 전후 완전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티토 치하의 유고슬라비아에서 항구 시설이 확충되어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중 하나로 성장하였고 각종 공업이 더욱 발달했다. 유고 내전 이후 크로아티아에 속해 있다.

4. 인구와 사회[편집]


2021년 기준 약 11만 명으로 점점 감소세에 있다. 인구의 80% 이상은 크로아티아인이며 소수의 세르비아인, 보슈냐크인,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헝가리인이 있다.

191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마지막으로 시행한 인구조사에서는 약 5만 명의 인구였는데 절반이 이탈리아인이었고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헝가리인, 독일인 순이었다. 그외에 당시 오헝제국의 인종이었던 체코인, 루마니아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이 소수민족이었다.

5. 볼거리[편집]


해변이 아름다운 관광지이자 HNK 리예카의 연고지이다. 크로아티아 해양 박물관이 유명하며 트르사트 구역에는 트르사트 성과 합스부르크 제국 시기에 오스만 제국에 맞섰던 크로아티아의 귀족 가문인 프랑코판 가문의 사람들이 다수 묻힌 트르사트 성모 교회가 있다.

근처에는 오파티야가 있다. 날이 맑으면 리예카 무역항에서 도시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며 버스 터미널에서 30분이면 왕복으로 다녀올 수 있다.

6. 기타[편집]


리예카라는 지명은 (江)에서 유래했다. 이탈리아어인 피우메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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