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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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러시아 제국 해군
Российский императорский флот(РИФ)
Imperial Russian Navy

파일:러시아 해군기.svg
러시아 제국 해군기
존속기간
1696년 10월 30일 ~ 1917년 4월 16일[1]
국가
파일:루스 차르국 국기.svg 루스 차르국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러시아 제국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공화국,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국
소속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러시아 제국군
명령체계
최고사령관 → 전쟁부 → 해군협의회, 해군성
주임무
해상전, 영해보호, 왕조와 조국의 수호(상징)
군종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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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조직
흑해함대, 발트함대, 태평양함대, 카스피해 소함대, 해병대
수호자
성 니콜라우스
전력
129,081명1855년
91,000명크림전쟁
59,500명제1차 세계대전
함선건조량
범선형 500~700척[1]
증기함 250척~300척 건조[2]
참전
대북방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나폴레옹 전쟁
크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
전신
신설[3]
후신
러시아 내전
파일:러시아 국기.svg백함대
파일:적기.svg노동자 농민의 적함대
파일:소련 해군기.svg소비에트 연방 해군

지휘
파일:러시아 제국 국장.svg 최고 사령관
표트르 1세 | 니콜라이 2세
해군원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해군장관
이반 그리고로비치
발트 함대 사령관
알렉산드르 라즈보조프
흑해 함대 사령관
알렉산드르 콜차크

1. 개요
2. 역사
2.1. 기원
2.2. 전성기
2.3. 쇠퇴기
2.4. 중흥기
2.6. 마지막 함대의 부활
2.7. 러시아 제국 함대의 말년
3. 해군성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러시아 제국군의 해군이다. 공식적으로 러시아 제국 해군은 러시아 제국 시절이 아닌 루스 차르국 시절인 1696년에 창설되었다. 1917년 2월 혁명까지를 마지막으로 보며, 극초기는 공동통치로 발전이 부실했다가 표트르 대제 단독재위 시작과 동시에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제2차 아조프 전역을 기점으로 발전이 빨라졌다. 18세기 후반부터 규모를 확장하여 19세기 초에는 최대 규모를 자랑했으며, 규모 면으로 보면 영국, 프랑스 다음으로 가는 규모였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쇠퇴기를 걷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 해군의 장교는 귀족층으로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사람만 받았으며, 젊은 귀족은 국립해군학교에서 훈련받았으며, 1818년부터는 해군 장교들이 식민지 개척과 무역을 위해 항해하였다. 초기 러시아 제국 해군의 수병은 외국인으로 고용했지만 이후에 징집병으로 모집되었다. 복무기간은 종신이었다고 한다. 해군 수병은 핀란드, 발트해 연안 지방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러시아 제국의 해군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부동항의 확보가 첫 번째이며, 항구와 공해 간의 항해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두 번째이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연안항구는 겨울이 되면 바다가 얼어 해군운영이 힘들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흑해바렌츠 해에 접한 무르만스크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흑해의 흑해 함대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오스만 제국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지중해대서양을 가기 위한 자유로운 접근이 어려웠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의 해군의 발전은 발트해와 흑해, 극동, 북극에서 이루어졌지만 상대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2. 역사[편집]



2.1. 기원[편집]


미하일 1세의 통치 기간인 1636년에 돛대가 3개인 배가 완성되었다. 홀슈타인(Holstein)에서 서유럽형 디자인으로 건조되어 발라흐나(Балахна)에서 진수되었으며 프레더릭(Friedrich)[2]이라고 명명되었다. 처녀 항해하여 카스피해에서 강력한 폭풍에 휘말려 배가 심하게 파손되어 좌초되었다. 이후 프레더릭(Friedrich)은 끌려가 10마일 떨어진 데르벤트 지역 주민에게 약탈당했다.

제2차 북방전쟁 당시 1656년 8월 1일 표트르 포템킨의 소함대가 코틀린 섬(Ко́тлин)에서의 해전으로 스웨덴 해군을 격파하고 6연장 갤리를 노획하였다. 역사가들의 의해서 현대에 최초로 기록된 러시아 해군의 해상 승리로 간주되어진다. 또한 니엔샨츠(Ниеншанц)[3] 공방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다우가바 강에 위치한 스웨덴 요새 뒤네문트(Dynemunt)와 코켄후센(Kokenhusen)을 함락시킨다. 보야르 아파나시 오르딘 나쇼킨(Афанасий Ордин-Нащокин) 차레비초프와 드미트리예프에 조선소를 건설하고 발트해에서 항해할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1661년[4] 루스 차르국스웨덴스웨덴령 에스토니아에서 카르디스 평화조약에 서명하면서 정복한 영토반환과 차레비초프와 드미트리예프에 조선소에 정박 중인 모든 선박을 파괴하였다.

아파나시 오르딘 나쇼킨은 1667년 겨울 오카 강에 위치한 데니노보(Дединово) 마을[5]에 조선소를 건립했으며, 네덜란드인 선박장인들을 조선소로 초대하여 2년 안에 프리깃 오룔(Орёл)과 소형선박 3척을 건조하였다.[6]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해군성 첨탑에는 프리깃 오룔 문장이 새겨져 있다.


2.2. 전성기[편집]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전성기는 표트르 대제 시절이다. 본래 러시아는 루스 차르국 말기까지 해군이 없었으며 주 항구는 11월 ~ 3월은 얼어붙는 아르한겔스크였다.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면서 발트함대 창설과 코틀린 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였으며, 첫 번째 주요 해전은 강구트[7] 해전(Гангутское сражение)이었다.

1693년 아르한겔스크의 주변 솔롬발라 조선소(Соломбальская верфь)가 건설되었으며, 요트 성 표트르(Святой Пётр)가 네덜란드 선박장인에 의해 건조되었다. 이듬해 상선 스뱌토파벨(Святой Павел)이 건조되었다. 1696년에 프레오브라젠스카야 조선소(Преображенская верфь)가 건설되었다. 1696년 제2아조프 전역 당시 오스만 제국과 전쟁 당시 2척의 전열함과 4척의 화공선과 23척의 갤리, 1,300척의 스트록크를 동원하였다. 아조프 요새를 점령한 후 보야르 두마는 회의를 통해 1696년 10월 30일 해군건설을 결정하였다. 이날이 정규 러시아 제국 해군의 창설로 간주한다. 새로운 함대의 선박은 보로네즈 해군본부(Воронежское адмиралтейство)에서 건조되었다. 1699년 12월 1일 사도 안드레아(Апо́стол Андре́й)이름을 유래하고 문양X는 안드레아의 처형된 기울어진 십자각이 상징 문양이 되었다. 이후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제국 해군의 공식 깃발로 선포하면서 안드레이의 깃발(Андреевский флаг)이라고 부른다.

러시아 제국의 발트함대대북방전쟁 동안에 창설되었다. 발트 함대는 1702년~1704년 삼각형 하구에 위치한 사스카야 조선소(Сясьская верфь)에서 발트 함대는 정복한 해안을 보호하고 적의 항로를 공격하는 것이 주목표였다. 또한 건조도 하지만 외국에서도 건조하였다. 17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Адмиралтейские верфи) 건설되었고 1703년~1723년에 발트 함대의 주항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으나 이후 크론시타트(Кроншта́дт) 비보르크(Вы́борг) 탈린(Таллин)에도 군사항구가 건설되었다.

17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해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고, 1718년 러시아 해군협의회의 카잔 해군본부(Казанское адмиралтейство)가 조직되었고, 1722년 아스트라한 해군본부(Астраханское адмиралтейство)가 건설되었고, 1724년 예핌 니코노프(Ефим Никонов)라는 발명가는 나무로 만든 잠수함#을 만들었다. 표트르 대제 재위 당시에는 탄원서를 통해 알려졌고 이에 지원을 받아 3번의 시험을 하였지만 연이은 실패로 돌아갔다. 1725년 러시아 제국 해군은 전열함 36척, 프리깃 9척, 스노우 3척, 화공선 5척, 보조함 77척 총 130척을 보유했다. 러시아 제국 육군 소속 함대는 396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24개의 조선소를 가지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 재위당시 창설한 함대는 1800년~1820년대에 힘의 절정이였다. 1723년 57문 전열함과 100문 전열함 표트르 1세와 2세(Пётр Первый и Второй)이라고 명명되었으며 이 전열함은 표트르 대제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2.3. 쇠퇴기[편집]


1722년 이후 러시아 제국의 조선 건조능력은 감소하기 시작하여, 1725년 2월 8일 표트르 대제의 사후에 조선업이 급격히 악화되어 1726년 54문 전열함 1척만이 건조되었고 1727년~1730년은 1척도 건조되지 않았다.

1728년 러시아 주재 스웨덴 대사는 스웨덴에 이러한 보고를 하였다.

갤리는 매년 건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갤리함대는 이전과 비교하면 크게 감소했습니다. 배는 폐허가 되고있고, 오래된 배들이 다썩어서 5척 이상의 배는 바다로 나갈수 없고, 새로운 배를 건조하는 능력도 약해졌습니다. 해군에서는 3년안에 함대를 예전의 상태로 되돌릴수 없을 정도로 간과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1731년 말에 함대는 전열함 36척, 프리깃 12척, 슈나브 2척를 보유했으나 30%만이 완전히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이 중에서도 20%만이 날씨가 좋은 날에만 발트해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8척만이 전투준비가 완료되고 5척만이 발트해에서 배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함포도 많은 양이 작동이 하지 않았다. 그나마 12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갤리선의 상태는 만족스러웠으며, 1726년 표트르 시버스(Петер Сиверс) 제독은 1728년에 시행한 갤리선함대에 온전한상태를 도입하는 것을 제안했으며, 함대는 90척을 지속적으로 배치하며, 다른 30척은 빠른 건조가 가능하도록 목재를 준비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표트르 2세 통치기간 동안 해군의 장교와 수병의 훈련강도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서 국고는 좋지 않았고 급여또한 지급하지 못하여 장교는 다른 국가로 떠나는 상황에 수병은 기강이 떨어졌다.


2.4. 중흥기[편집]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재위로 최고 추밀원을 폐지한 후 여제는 첫 번째 칙령으로 함대의 복원 문제로 눈을 돌렸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 해군은 재도약을 가질 수 있었다. 1730년 7월 21일 개인법령을 발행하여 규정과 헌장에 따라 선박함대 유지보수와 해군협의회 및 함대가 약화되지 않고 번영하는 평시에 의존하지 않고, 헌장과 규정에 따라 유지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확인시켰다. 1731년 12월 여제는 항구에서의 정박은 삭구 등 기타 손상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군함의 상태확인을 위해서 발트함대의 정기적인 훈련 재개를 명령하였다. 1731년 1월 새로운 66문 전열함 러시아 영광(Слава России)이 건조되었으며, 1732년 2월~3월에는 4척이 건조되었다. 1732년 군사해양위원회 부위원장 안드레이 오스테르만(Андрей Остерман) 백작의 함대개혁을 위한 군사 해군협의회가 설립되었다. 66문 전열함이 해군의 함대의 주력이 되었으며 함대의 구성의 59%를 비중을 가졌다.
함포
1720년
1732년
전열함
90문
3척
0척
80문
4척
4척
76문
2척
0척
66문
12척
16척
54문
0척
7척
55문
6척
0척
프리깃
32문
6척
6척
1720년에는 33척을 보유했으며 1732년에도 33척을 보유했지만 퇴역한 배의 장비와 대포를 새로 건조한 배에 장착에 사용되었다. 총 군함척수는 변화는 없지만 전투 수준은 변화했다.

1732년 8월부터 1722년 폐쇄된 아르한겔스크 항구를 복원하고, 함대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솔롬발라 조선소는 발트함대를 복원하기 위해 다시 건조를 시작하였다, 이전에 1737년에는 66척, 1783년 74척을 건조하였다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통치기간 동안 발트 함대의 52.6%는 아르한겔스크에서 건조되었고,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통치기간에는 64.1%를 건조하였다. 1731년부터 1799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55척, 아르한겔스크에서는 100척을 건조하였다. 아르한겔스크 조선소에서는 제한된 자원을 절양하기 위해 참나무를 사용하였고 많은 선박 건조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을 하였다. 이로써 아르항겔스크 조선소는 실제로 발트 함대의 주요 조선기지가 되었다. 숙련된 선박공과 원활한 목재 보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조능력보다는 낮았다.

1734년 5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토마스 고든(Thomas Gordon)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 해군 함대로 단치히를 포위하기 위해 전열함14척, 프리깃5척, 투폭함2척으로 바다로 출항하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몇 달이 지난 뒤 전쟁준비가능 전열함과 프리깃함을 늘렸다.

1736년 ~ 1739년 러시아-튀르크 전쟁동안 러시아 제국은 건조능력이 조금 쇠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네프르 소함대와 아조프 소함대를 집중적으로 건조하였다.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통치기간 동안은 일정하게 진전이 있었다. 튀르크와의 전쟁이 끝난 후 해군협의회에서는 최대한 빠르게 함대복원과 군함건조를 집중하였으며 1739년 2척, 1740년 3척, 1741년 5척을 건조하였다.

18세기 20~30년대 발트함대 전투준비 전열함 척수
1720년
1727년
1731년
1739년
28척
15척
13척
23척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해군 개혁과 발전으로 쇠락하던 러시아 제국 해군은 다시 떠오를 수 있었다. 또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 해군은 강화되었다. 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러시아 제국 해군은 발트해흑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해군 함대를 파견하였다. 1770년 체슈메 해전으로 알렉세이 오를로프(Алексей Орлов) 제독, 그리고리 스피리도프(Григорий Спиридов) 제독, 존 엘핀스톤(Джон Эльфинстон) 제독은 오스만 제국 해군을 격파하고 에게 해흑해에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1771년 러시아 제국군은 케르치 해협과 케르치의 요새 예니칼레(Еникале)를 점령하였다. 또 도나우 강에 도달하자 하구를 보호하기 위해 도나우 소함대(1771~1878)가 편성되었다. 1773년에는 아조프 소함대가 흑해로 진입하였다. 러시아-튀르크 전쟁(1768년~1774년)는 러시아 제국의 승리로 아조프 해, 남부크 강, 드네스트르 강이 양도되었고, 흑해의 해안국경선이 크게 바뀌었다. 1783년 크림 반도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자 흑해함대를 신설했으며 세바스토폴에 조선기업 세바스토폴 해양플랜트를 건설하였다. 1778년 헤르손에 항구를 건설했고, 1783년 흑해함대의 첫 배가 진수되었다. 1788년 니콜라예프 해군기지(Николаевское адмиралтейство)를 건설하였다. 1787년 ~ 1791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흑해함대는 오스만 제국 해군과의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791년 기준 러시아 제국 해군은 전열함 67척 프리깃40척, 보조함 300척을 보유하였다. 1798년 ~ 1800년 프랑스 제1공화국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러시아 제국의 표도르 우샤코프(Фёдор Ушаков)제독은 대영제국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제독, 오스만 제국의 카디르(Kadyr) 지방장관 등의 연합함대로 지중해 원정을 하였는데, 프랑스 제1제국코르푸 섬 요새가 함락되고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의 해안에 상륙할 정도의 성공을 이루어냈다.

18세기 말 ~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 해군은 영국, 프랑스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전력이 되었다. 흑해 함대는 전열함 5척, 프리깃 19척을 보유했고, 발트 함대는 전열함 23척, 프리깃 130척을 보유했다.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 해군의 편제는 발트함대, 흑해함대, 카스피해 소함대, 백해 소함대, 오호츠크 소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1802년 해군부가 설립되었고, 1805년 해군장관으로 변경되었다. 러시아의 최초 증기선은 스코틀랜드 출신 찰스 버드(Charles Baird)가 제작하였으며, 버드는 러시아의 엔지니어로 러시아에 공장을 세워 증기기관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후, 러시아 내에서 건조된 첫 번째 증기선 옐리자베타(Елизавета)를 1805년, 두 번째 증기선은 1806년에 건조하였다. 1826년 최초로 군용 증기선 이조라(Ижора)가 건조되었다. 1836년 프리깃 증기선 바가티르(Богатырь)가 건조되었다. 1803년부터 1855년까지 러시아 해군은 세계일주와 장거리 항해를 40회이상 수행하였으며, 이는 극동과 해양과 바다의 작전지역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03년~1806년 러시아의 최초의 세계일주에 슬루프 니바(Нева)와 슬루프 네제(Надежда)가 사용되었다. 또 한 1819년~1821년에는 최초의 남극탐험을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남극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국가가 된다. 1819년 6월 17일 알렉산드르 1세는 용기와 용맹을 찬양하기위해 선수에 성 게오르기 깃발을 걸어주었다고 한다. 1834년 엔지니어 겸 공병이었던 카를 쉴리데르(Карл Ши́льдер)가 금속으로 제작한 쉴리데르의 잠수함(Подводные лодки Шильдера)#을 만들어 실험하였다.

1860~70년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원정이 두 번 이루어졌으며, 스테판 레솝스키(Степан Лесовский) 제독과 안드레이 포포프(Андрей Попов) 제독의 지휘 하에 프리깃 3척과 코르벳함 3척은 원정동안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난 상태였다. 또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뉴욕을 방문하였다. 1881년부터 국가조선프로그램을 시작하여 근대식 전함, 순양함, 구축함과 같은 군함을 건조했으며 러시아 제국 해군 수뇌부는 미국의 이론가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의 저술한 책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은 러시아 제국 해군의 교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말까지 발트함대는 근대식 철갑함 9척, 해방전함 3척, 장갑순양함 8척을 보유했으며, 니콜라예프와 세바스토폴에서 건조된 군함은 흑해함대에 소속되었다. 1880년 러시아 제국이 채택한 바베트 형식의 증기선이 건조되었으며, 1890년대 말까지 흑해함대는 발트함대보다 훨씬 현대적인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20세기 초 흑해함대는 전함7척, 순양함1척, 기뢰순양함 3척, 건보트 6척, 구축함 및 보조함 22척을 보유하였다.

1864년 최초의 쇄빙선 겸 예인선인 파일롯(Пайлот)을 건조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러시아 제국의 증기함은 발트해 연안의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1860년대 초반 영국으로부터 해방전함인 2척을 주문하였다. 2척의 모델로 삼아 1860년대 중반에는 해방전함을 러시아에서 건조하였다. 1863년에는 핀란드 만의 해안을 보호하기 위해서 11척의 모니터함을 건조하였으며 암초 열도에서 활동하였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러시아 제국의 느린 경제와 산업발전은 조선 분야까지 영향을 끼쳐 유럽의 다른 국가와 비해서 뒤처진 이유였으며 크림전쟁의 시작으로 러시아 제국은 목조함(전열함, 슬루프 등등)은 있었지만 증기전열함은 한척도 보유하지 않았다. 특히나 수병은 농노 계층으로 특히 발트함대의 가혹한 훈련은 악명이 자자하여 해군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미하일 라자레프(Михаил Лазарев) 제독, 파벨 나히모프(Па́вел Нахи́мов) 제독, 블라디미르 코르닐로프(Владимир Корнилов) 제독, 블라디미르 이스토민(Владимир Истомин) 제독 덕분에 흑해함대의 장교와 수병은 표트르 우샤코프 제독부터 이어온 해군의 문제와 해양전통을 잘 보완하고 유지하였다.

크림 전쟁 초기 러시아 제국 해군은 오스만 제국 해군 함대를 완전히 격파하여 승승장구였으나, 영국프랑스 제2제국의 참전으로 되려 러시아 제국 해군이 격파되고 코르닐로프, 이스토민, 나히모프 제독이 전사하기까지 하였다. 해군 장교와 수병은 배를 버리고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상륙하였으며, 1854년~1855년 동안 배를 잃은 장교와 수병, 그리고 증기 프리깃함은 만에서 세바스토폴 방어전에 참여했다. 동시 발트해에서도 연합군 함대가 도달했지만 상륙할 수 없었는데 코틀린 섬과 바다의 기뢰밭과 해안포 및 포병에 의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및 주요 항구에 상륙이 불가능했으며 발트함대는 코틀린 섬 뒤로 숨어서 살아남게 된다. 1856년 파리조약은 크림 전쟁의 후속조처물로 이루어진 조약으로 참전국이 채결함에 따라 흑해일대가 중립 지역으로 선포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흑해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된다. 186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은 오래된 범선형을 대체하기 위해 증기함으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크림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 제국 해군은 1세대 증기함 철갑함, 모니터함, 건보트 등을 건조했으나 이 배들은 중포와 두꺼운 철갑을 갖추고 있지만 느려서 긴 항해를 할수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1861년 강철 장갑을 장착한 최초의 전투함 건보트 오피트(Опыт)가 진수되었으며, 1869년 최초의 전함 표트르 벨리키(Пётр Великий)를 건조하였다.

러시아 제국 해군은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19세기 전반기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러시아 제국 해군 함대는 지중해의 두 차례 원정과 탐험, 해전에서 많은 경험을 이루어냈다.


2.5. 러일전쟁[편집]


러시아 제국은 부동항이 언제나 절실했다. 그래도 여름이 되면 대부분의 바다는 녹아 군함들의 이동이 자유로웠지만 1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보다 극동과 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는데 본래 가지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외의 항구를 원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条約)을 채결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 제국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하여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조차지를 얻었지만 일본은 많은 것을 잃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청나라 간의 러청밀약을 맺었고 뤼순항다롄을 조차하였다. 뤼순항은 러시아 제국의 전략상 중요했기 때문에 다롄과 하얼빈을 연결하는 철도길을 부설하였다. 이후 의화단 운동으로 인하여 러시아 제국은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삼사 러시아 제국 육군을 보내 만주를 사실상 지배하였다.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몰아내기엔 약하다고 생각했다.

삼국간섭을 시작으로 러청밀약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1904년 2월 8일 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 平八郎)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제국 해군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했으며, 뤼순항을 기습공격하여 해전이 일어났으며 7척의 철갑함이 격침당했다. 이공격으로 다음날 바로 전면전으로 바뀌었으며 뤼순항은 항만포위로 이어졌다. 러시아 제국 함대를 공격하려는 일본 제국 함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했으며 해안포와 함포공격 등등이었다. 특히 1904년 4월 13일 스테판 마카로프(Степа́н Мака́ров) 제독의 전사로 항구를 떠나 바다에서 해전하는 것을 꺼렸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 함대는 많이 격침되었다. 또 뤼순항 해전과 더불어 제물포 해전에서도 일본 제국 함대의 기습공격으로 패배하였다. 이두 초기 해전은 일본 제국 해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러시아 제국 해군은 15척 정도를 손실입거나 잃었다.

뤼순항을 포위한 일본군은 이전의 청나라와 다르게 러시아 제국의 뤼순항을 요새화로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로인해 일본 제국군은 육지와 바다를 포위하여 뤼순항으로의 접근을 차단한 상태로 들어갔으나, 러시아 제국은 2월 13일~14일 일본 제국 군함에 시멘트를 실은 여러 척의 배를 침몰시켰으며, 이 배들은 항해를 방해하려 했으나 너무 깊은 곳에 침몰하였다. 결과적으론 해상봉쇄는 실패하였다.

1904년 3월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은 뤼순항의 봉쇄를 해제하기 위해 제1태평양함대를 지휘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공격하는 측이 기뢰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기뢰를 사용하여 적 군함이 항구나 연안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방어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였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 해군은 기뢰함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러시아 제국 해군의 군함 기동성을 크게 제한시켰고, 1904년 4월 13일 2척의 러시아 제국 기함인 전노급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와 포베다(Победа)를 항구 출구에서 기뢰에 의해 폭파되었고, 페드로파블롭스크함은 빠른시간에 침몰하였고, 포베다는 작은 피해를 손상을 입어 수리를 위해 뤼순항으로 귀환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침몰로 마카로프 제독과 더불어 대부분의 장교와 수병들과 전쟁화가인 바실리 베레샤긴(Василий Верещагин)또한 사망하였다. 같은 시기에 러시아 제국도 5월 15일 일본 제국 해군의 전노급전함 하쓰세(初瀬)와 야시마(八島)는 뤼순항봉쇄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제국 해군의 기뢰부설함 아무르(Амур)의 기뢰에 격침되었다. 이때 일본 제국의 주력전함의 6척 중에 2척을 잃은 것이다. 러시아 제국은 극동과 태평양 방면 전술 합동함대인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일본 제국을 상대로 통상파괴작전을 벌여 많은 수송선을 격침시쳤다. 빌헬름 비트게프트(Вильгельм Витгефт)제독은 자신이 지휘하는 함대는 봉쇄를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려 했지만 황해에서 공격을 받아 괴멸하였다. 뤼순항의 주둔중인 러시아 제국군은 일본군이 포병을 동원하면서 점차 함락되었으며, 해군이 방어하던 뤼순항은 1905년 1월 2일 여러차례의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러시아 제국 해군성은 발트함대를 보내 북해 → 도버해협 → 대서양 → 희망봉 → 인도양을 거쳐 뤼순항을 돕기 위해 항해하였다. 하지만 항해하는 도중 북해에서 대영제국의 어선을 일본 제국의 다수의 어뢰정으로 오인포격을 가하는 도거 뱅크 사건(Dogger Bank Incident)이 발생하였으며, 사상자도 발생하였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와 여론은 러시아 제국과 발트함대를 크게 비난하였다. (러일전쟁 당시 대영제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긴 했으나 중립을 지키던 상태였다.) 더 나아가 발트함대가 피해자를 구출하지도 않고 도버 해협을 통과하자 대영제국은 순양함대를 출항시켜 추격하였고 스페인의 바고 항구까지 추격했다. 전후처리로 대영제국 내 여론은 잠재웠지만 영국 내 반러시아 감정이 강해져 발트함대에게 영국 본토와 식민지에서의 보급도 거부하였다. 이로써 발트함대가 동해까지 진출했을 때 보급도 완전하지 않고 피폐해진 상태로 바로 일본 제국 해군과의 쓰시마 해전이 터졌다. 해전 당시 일방적인 격침과 추격은 일본 제국의 전과를 올린 요인이 되었다. 또 한 발트함대가 도달하기까지의 거리와 시간이 많아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함대를 정비하고 충분한 전략을 계획할 수 있었다. 이로써 지칠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쓰시마 해협에 도달하자마자 일본 제국 해군과 마주쳐 양적이나 질적으로 높은 상태의 일본 제국 함대에게 러시아 제국 함대는 일방적으로 무력화되었다. 이로써 대부분이 격침되었고 사망하였으며, 남은 군함은 니콜라이 네보가토프(Николай Небогатов)제독 휘하에 있었고 그들은 항복하거나 중립국 항구로 가거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입항했다. 결과적으로 군함은 21척을 손실하였고 10척은 격침되었다.

엔지니어 이반 부노프(Ива́н Бу́бнов)는 딜핀(Дельфин)이라는 잠수함을 만들었으며 러일전쟁에 참여하였다.


2.6. 마지막 함대의 부활[편집]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제국의 해군 전력은 세계 3위에서 6위로 떨어졌으며, 1906년 3월 19일 니콜라이 2세는 구축함으로 분류되어 있던 잠수함을 새로운 분류로 수정하고, 잠수함은 독립적인 지위를 얻었다. 함대의 잠수함 전력은 10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후부터 3월 19일을 잠수함의 날(День моряка-подводника)로 제정하였다.

1906년 5월 해군본부와 함께 해군주참모부(Главный морской штаб)가 조직되어 작전지휘기능을 인계받았다. 같은 해에 1907년 6월 6일 니콜라이 2세는 소형조선계획을 승인하면서 새로운 군함개발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해군예산이 줄어들으면서 계획자체가 재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1908년 러시아 제국 두마는 부분적으로 해군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1909년 보스니아 위기로 함대의 확장문제가 제기되었고, 새로운 전함과 순양함과 구축함이 발트함대에 발주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개인적인 명령에 따라 드레드노트급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이 건조되었으나 두마에 의하여 배치는 거부되었었다.

1909년 10년 조선 프로그램(Десятилетней программы судостроения)에 대한 적극적인 준비와 회의로 새롭게 무장하고 엔진도 바뀐 군함이 건조되었으며, 구축함 노빅(Новик)급 9척과 잠수함 6척을 건조하여 태평양함대에 배속하였고 이전에 군함을 재무장과 현대화를 진행하였다. 세 명의 니콜라스(Три Святителя) 열둘의 사도(Двенадцать Апостолов), 성 게오르기우스(Георгий Победоносец)를 재무장과 현대화 하였다. 1910년 3월 25일 니콜라이 2세는 승인하였지만 1911년까지 두마에서는 이 사항을 고려하지 않았다. 구축함 노빅과 더불어 다른 군함 장비를 외국에서 주문하는 등 외국 조선소에서도 군함을 주문하였다. 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 제국에서 주문한 군함과 장비는 모두 몰수되었고, 영국에서 주문한 장비는 동맹국을 거쳐서 러시아 제국으로 배달되었다.

다른 경우론 러시아 제국의 군함을 제작하지 않고 미국 회사가 설계한 네덜란드 602형 잠수함(Holland 602 type submarine)를 주문하여 새로운 함대 창설을 가속화 할 수 있지만 해군의 잠수함의 급속한 발전은 러시아 제국에는 잠수함을 발전시킬 만한 자원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잠수함의 부품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방법밖에 없었으므로 노후화된 잠수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 제국이 외국에 잠수함을 주문했을 때 이미 타국가들은 이미 1~2세대 잠수함을 교체한 상태였다.

흑해함대의 발전은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악화로 재무장과 확장이 되었다. 1911년 1월 17일 두마는 드레드노트 임페라트리차 마리야(Императрица Мария)급 3척 건조를 위해 자금을 할당하였고, 이반 그리고로비치(Иван Григорович)해군장관은 프로그램에 따라서 배치하였다. 또한 흑해함대를 강화하기위한 자금도 할당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1906년부터 1913년까지 해군투자를 5억1900만달러를 지출하였다. 이는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에 이어 5번째로 많은 예산을 투자한 국가이다.

1914년 중반까지 흑해함대의 새로운 강화프로그램이 승인되면서 이전 프로그램과 같이 진행되었다. 또한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의 유형의 전함인 임페라토르 니콜라이 1세(Император Николай I)와 경순양함 스베틀라나(Светлана)의 아드미랄 이스토민(Адмирал Истомин)과 아드미랄 나키모프(Адмирал Нахимов), 구축함 노빅(Новик) 8척과 잠수함 6척의 모르쉬(Морж)급과 나르발(Нарвал)급을 건조하였다.


2.6.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되기까지 러시아 제국은 9척의 전함과 순양함 14척, 구축함 66척, 잠수함 15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전쟁이 터지자 독일은 러시아 제국이 주문한 군함과 장비를 모두 몰수하였다.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발트 해흑해에서 전투를 치르었다.

발트 해는 독일 제국 해군과 러시아 제국 해군 간의 격전지로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러시아 제국을 돕기 위해 발트해 잠수함 소함대(British submarine flotilla in the Baltic)을 카테가트 해협을 통해서 발트 해로 보냈다. 독일 함대는 발트 함대보다 수적이 우세하고 강했기 때문이다. 또 필요할 경우 킬 운하를 통해서 독일 함대가 북해에서 발트해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발트 함대는 통상파괴, 수송선 격침, 기뢰작전이라는 방어적인 전투를 하였다. 이로써 영국 해군과 러시아 제국 해군의 공격과 방어적인 전략 광법위하게 사용하자 독일 동부 해군는 발트해에서의 기동이 제한되었다. 1915년 8월 독일의 리가만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1916년 독일은 핀란드만 전투에서도 패배하였다. 전쟁기간 동안 발트함대는 기뢰작전과 통상파괴작전을 잘 수행했다.

흑해에서의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적은 오스만 제국 해군이었다. 세바스토폴은 가장 중요한 해군기지였다. 초기에는 안드레이 에베르가르드(Андрей Эбергард)제독의 지휘로 오스만 제국의 통상파괴로 완전히 마비된 상태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봉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르 콜차크(Алекса́ндр Колча́к) 제독이 흑해함대를 지휘하였다. 흑해 전쟁은 1914년 10월에 오스만 제국 해군의 흑해 연안 도시를 포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러시아 제국에서 세바스토폴 기상(Севастопольская побудка)이라고 부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가장 강력한 군함은 독일 순양함 SMS 괴벤, 경순양함SMS 브레슬라우였는데 빌헬름 수숑(Wilhelm Souchon) 제독이 지휘하였다. SMS 괴벤은 여러 번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고, 흑해함대와 조우했을 때는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후퇴하였다. 1915년 말 흑해함대는 흑해의 통제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흑해함대는 캅카스 전역에서 니콜라이 유데니치(Николай Юденич) 장군을 지원하였다. 1916년 초 흑해함대는 육군의 상륙작전 트라페준타 작전을 지원하였다.

1916년 7월 15일 알렉산드르 콜차크는 흑해함대의 주요 전략적 임무를 보스포루스 해협봉쇄와 이동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종굴다크(Zonguldak), 킬림리(Kilimli), 에렐리(Eregli), 코즐루(Kozlu) 항구를 봉쇄하면 석탄 공급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었다. 흑해함대는 1917년 여름까지는 한 척의 군함도 침몰하지 않았으나 1916년 10월 7일에 항구에 기항 중인 드레드노트 임페라트리차 마리야(Императрица Мария)가 취역 후 1년만에 갑작스런 지하실 폭발로 침몰하였다. 폭발의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부 역사가들은 파괴적인 공격으로 인해 침몰, 또다른 역사가는 사고일 수도 있다고 한다. 전함의 화재진압과 구출은 콜차크 제독이 지휘하였다.


2.7. 러시아 제국 함대의 말년[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 제국은 평화협상하여 전선을 이탈했다. 하지만 내부 상황과 외부 상황은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영토의 반환과 독립에 독일군이 독립국에 들어가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은 1917년에 멸망해버렸고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많은 황족들이 잡혀 총살되거나 외국으로 달아났고, 귀족들도 총살되거나 외국으로 도피하였다. 러시아 공화국이라는 임시정부가 건국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았고 소비에트 러시아SFSR과 러시아국 등으로 나뉘었고 백군과 적군으로 나눠 서로 전쟁하는 러시아 내전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내전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협상국동맹국은 적극적인 개입(군사지원)으로 다방면으로 넓은 러시아 영토에 남은 백군을 지원했다. 러시아 내전은 러시아 제국의 해군에게도 재앙과 다름없었고, 간섭군은 태평양, 흑해, 북극해에 상륙, 점령하였으며 러시아 제국 해군은 러시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러시아 제국 해군은 분열되어 러시아국 해군과 소비에트 연방해군, 우크라이나 해군으로 나뉘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형성되었을 때 소비에트 연방 해군은 러시아 제국 해군을 기반으로 형성하였다.

발트함대
발트함대는 손대지 않아서 그나마 온전한 상태였는데 발트해 내전(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на Балтийском море)으로 영국해군과 에스토니아 해군, 러시아국 해군 과 러시아SFSR 발트함대 간의 해전이 터졌다.

흑해함대
러시아국 흑해함대는 1919년 1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창설되었는데 1919년 7월 크림 반도가 함락되고 흑해함대 기지를 세바스토폴로 이전하였다. 이들은 남러시아 정부가 존재할 때까지 명령으로 종속되었고, 외국으로부터 10척 군함을 인계받았으며, 1920년 흑해함대의 전력은 140척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흑해와 아조프해에서 작전을 펼쳤고 적군 소속 군함 격파와 군의 상륙과 수송지원과 화력지원, 군후퇴와 난민을 대피시키는 작전도 하였다. 1924년 흑해함대는 튀니지 비제르테항구에서 주둔하였고, 러시아국 함대는 해산되고 흑해함대는 소비에트 연방 해군 소속이 되었다. 복귀하지 않고 남은 함선들은 스크랩되거나 프랑스에 판매되었다.


3. 해군성[편집]


러시아 제국의 해군의 최고수뇌부는 1717년 12월 22일 설립된 해군협의회(Адмиралтейств-коллегия)로 알렉산드르 1세의 1802년 각료개혁으로 해군성(Министерство морских сил)를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볼셰비키에 의해 폐지되었다.

해군부의 해군장관위 최고책임관은 황족이 보직되었다. 1855년~1881년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1881년 ~ 1905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임기를 지냈다.

러시아 제국의 해군장관
대수
이름
임기
1
니콜라이 모르디비노프(Николай Мордвинов)
1802년 9월 8일 ~ 12월 28일
2
파벨 치차코프(Павел Чичагов)
1802년 12월 31일 ~ 1811년 11월 28일
3
이반 트래버스(Иван Траверсе)프
1811년 11월 28일 1828년 3월 24일
4
안톤 몰러(Антон Моллер)
1828년 3월 24일 ~ 1836년 2월 5일
5
알렉산드르 멘시코프(Александр Меншиков)
1836년 2월 5일 ~ 1855년 2월 23일
6
페르디난트 브란겔(Фердинанд Врангель)독
1855년 5월 18일 ~ 1857년 7월 27일
7
니콜라이 메틀린(Николай Метлин)
1857년 7월 27일 ~ 1860년 9월 18일
8
니콜라이 크라베(Николай Краббе)
1860년 9월 19일 ~ 1876년 1월 3일
9
스테판 레프솝스키(Степан Лесовский)프
1876년 1월 12일 ~ 1880년 6월 23일
10
알렉세이 페슈로프(Алексей Пещуров)
1880년 6월 23일 ~ 1882년 1월 11일
11
이반 셰스타코프(Иван Шестаков)
1882년 1월 11일 ~ 1888년 11월 21일
12
니콜라이 치카초프(Николай Чихачёв)
1888년 11월 28일 ~ 1896년 7월 13일
13
파벨 티르토프(Павел Тыртов)
1896년 7월 13일 ~ 1903년 3월 4일
14
표트르 아벨란(Фёдор Авелан)핀
1903년 3월 10일 ~ 1905년 6월 29일
15
알렉세이 비릴료프(Алексе́й Бирилёв)
1905년 6월 29일 ~ 1907년 1월 11일
16
이반 디코프(Иван Диков)
1907년 1월 11일 ~ 1909년 1월 8일
17
스테판 보예보스키(Степан Воеводский)
1909년 1월 8일 ~ 1911년 3월 18일
18
이반 그리고로비치(Иван Григорович)
1911년 3월 19일 ~ 1917년 2월 28일
러시아 공화국 해군장관
대수
이름
임기
1
알렉산드르 구치코프(Александр Гучков)
1917년 3월 2일 ~ 4월 30일
2
알렉산드르 케렌스키(Алекса́ндр Ке́ренский)[8]
1917년 5월 5일 ~ 8월 30일
3
드미트리 베르데렙스키(Дмитрий Вердеревский)
1917년 8월 30일 ~ 10월 25일
해군성은 볼셰비키 치하 동안 1917년 10월 25일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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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스 차르국부터 계산시 220년, 80520일이며, 러시아 제국건국부터 멸망까지 195년, 71387일 존재했다. [2] 러시아 제국 배는 아니며 덴마크 배로 당시 러시아 제국 강을 건너 카스피해로 가기 위해 통행권을 얻었다.[3] 잉그리아 지방 옥타 강의 어귀에 위치한 스웨덴의 요새.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스몰니 수도원 건너편에 있었다. 스웨덴어로는 뉘엔스칸(Nyenskans).[4] 이당시에는 핀란드는 물론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의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전역과 라트비아 북부의 리보니아스웨덴 영토였다.[5]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조선소로 유명했으며, 마을의 깃발에 상징처럼 오룔 배가 그려져 있으며, 스테판 라진의 봉기 당시에 조선소가 불탔다고 한다.[6] 프리깃 오룔은 1670년 스텐카 라진에 의해 불탔다는 설과 라진 군대에 점령되어 볼가 강 하구 쿠툼에서 몇 년 동안 있다가 완전히 파손되었다는 설이 있다. 1678년에 문서가 발견되면서 후자가 정설로 간주되고 있다.[7] 핀란드 항코러시아어 발음.[8] 구치코프가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지원했다가 진압당하며 케렌스키가 잠시 육군장관, 해군장관을 겸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