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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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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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예니체리 군단을 재현한 모습

파일:ottomanparade.jpg

코스탄티니예의 갈라타 다리 위를 행진하는 근대 오스만 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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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군에게 포로로 잡힌 1차 대전 시기 오스만 제국군 저격수
존속 기간
1299년~1922년
편성
육군
해군
공군
참전
코소보 전투
바르나 전투
로마-오스만 전쟁
대튀르크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크림 전쟁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역사
2.1. 근대의 오스만 제국군은 과연 쇠퇴했는가?
3. 특징
3.1. 보급
3.2. 상인
4. 편제
5. 군종
5.1. 육군
5.1.1. 보병
5.1.1.3. 근현대 오스만 보병대
5.1.2. 기병
5.1.3. 기타 병과
5.2. 해군
5.3. 공군
6. 전쟁 범죄



1. 개요[편집]


오스만 제국의 군대. 현 튀르키예군의 직접적인 전신이다.


2. 역사[편집]


오스만 제국군의 역사는 크게 5부분으로 나뉜다. 1300년대 초부터 점차 영토를 확장해나가며 1453년에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을 1단계로 치며, 메흐메트 2세가 본격적으로 통치한 1451년부터 지트바토로크 조약이 체결된 1606년까지가 2단계, 이후 1606년부터 술탄이 직접 지나치게 비대해진 예니체리를 강제 해체시켜버린 1826년까지를 3단계, 급격한 군대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1826년부터 1858년까지가 4단계, 그리고 마침내 불안정한 정세로 나날이 국력과 군사력이 동시에 쇠퇴해갔던 1861년[1]부터 1919년에 체결되어 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인정한 무드로스 종전협약까지를 마지막 5단계로 치는 것이다.

오스만 군대 역사의 1단계인 12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건국 바로 직후의 오스만 군대는 주로 유목민들로 이루어진 기병들이었으며, 군장이나 무기도 통일되지 않았기에 정규병이라기보다는 약탈 집단에 조금 더 가까웠다. 이들을 1200년대 후반에 오스만 1세가 하나의 지휘계통 하에 통합하고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점차 체계를 갖춘 병졸들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시기의 오스만 군대는 주로 기병 위주의 군대로, 활이나 투창 등을 사용하였으며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 등을 즐겨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정복한 곳의 토지들을 약탈하거나 아예 땅을 분배받는 형식으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이 약탈이 끝난 것은 오르한 1세가 병사들에게 정식으로 봉급을 주는 것을 시작하고, 대대적으로 서구나 페르시아의 용병들을 고용했을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2] 일반 보병들은 '야야'(yaya)라고 불렀으며, 보조병 성격으로 기타 잡일들도 도맡아 하던 경보병들은 '뮈셀렘'(müsellem)이라고 불렀다. 14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초기 형태의 총을 구비한 총병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피야데 톱추'(piyade topçu)라고 부르는 총보병이 전문화되기 시작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제국들 중 처음으로 총기를 전격적으로 군대에 도입한 국가였다고 한다. 이들이 워낙 총기를 이른 시기에 도입했기에 당대의 오스만 군대는 동시대의 페르시아, 혹은 동로마, 서양의 군대를 압도할 수 있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이나 인도의 무굴 제국 등이 앞다투어 총기를 도입할 정도였다. 이들은 전장에서도 엄청난 실력을 발휘하여 바예지드 1세 재위기에 쇠락해가는 동로마의 군대를 끝장내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정복자' 메흐메트 2세의 시대에는 개종한 무슬림들로 만들어진 예니체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세계의 첫 상비 총보병'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의 메흐메트 2세는 본격적인 군사 개혁을 실시하였고, 이 시기가 오스만 군대의 2단계이다. 술탄은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들과 동로마인들을 모아 만든 데브시르메 제도를 개정하여 본격적인 상비군을 편성하는 등 군대를 편제를 확립하였으며, 군대를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 중앙군을 '카프쿨루', 지방군을 '에얄레트'라고 불렀다. 또한 화기에도 신경을 써서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큰 공헌을 한 대포 '다르다넬스 대포'를 확대 생산하였으며, 이 덕에 오스만 제국은 1800년대까지도 이 대포를 상시 운용하기도 했다. 1465년에는 본격적인 머스킷병들이 등장하였으며, 16세기에는 그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을 사용하여 머스킷 총을 생산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끊임없이 발전된 화기를 군대에 새로이 도입했던 덕분에, 오스만 군대는 몇 백년 간 서구 군대에 비하여 화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며 이 시기 아나톨리아를 여행한 중국 명나라 여행가 자오시젠이 '튀르크의 총기가 유럽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다. 이같은 화력의 우위, 그리고 예니체리 부대의 강력한 조직력과 지휘능력 등이 합쳐지면서 이 시기 오스만 군대는 유럽의 웬만한 군대들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군악대 역시 16세기의 예니체리 부대에서 '메흐테르'라고 이름으로 처음으로 창설된 것이다.

3단계에 해당하는 1606년부터 1826년까지의 핵심 주제는 기존의 군대였던 예니체리들의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600년대까지만 해도 예니체리는 여전히 제국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으며, 조직력도 강했고 여전히 군의 기강도 어느 정도는 살아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 예니체리들이 권력을 잡고 심지어는 술탄마저도 좌지우지하게 되면서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기 시작했고, 군대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예니체리들은 군대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특권층이 되어 향락에 빠져들었고, 이전의 군사적 규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대의 술탄들도 할 수 있는 선에서 프랑스 장교들을 영입하여 프랑스식 군사 교육을 들여오고, 포병 창설, 보스포루스 해협에 요새를 건설하는 등 군사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이미 근본적인 병폐가 되어버린 예니체리들의 일소 없이는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야심차게 추진한 해군 창설과 새로운 병종 등은 기존의 군대에 제대로 흡수되기는커녕 배척당하는 게 흔했고, 기껏 영입해온 프랑스 장교들은 군조직 내에서 냉대를 받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서구의 근대식 군대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벤치마킹했던 셀림 3세 시기에 유럽식 군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신군이 창설되는 등 조금이나마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소규모의 제대로 훈련된 근대식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대식 군대는 1만 명이 채 되지 못했고, 동시대 유럽 열강들이 몇십만 명에 달하는 근대식 군대를 운용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였다. 게다가 셀림 3세가 그의 개혁정책에 반발한 예니체리들에 의해 1808년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면서 군대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를 교묘한 방법으로 속여 넘기다가 결국 예니체리 철폐를 강행, 성공하였고, 이 시기부터를 오스만 제국군 역사의 4단계로 본다. 한편 먼 남쪽에 있던 이집트 지역에서는 무함마드 알리 파샤 총독이 사실상 제국에 반기를 들고 자치적으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에 급박해진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가 사라진 잔재 위에 대대적인 근대식 군대 창설을 준비하게 된다. 이후 본격적 근대식 군대를 운용했던 1861년부터를 오스만 제국군의 마지막 시기인 5단계로 치며, 이 시기 오스만 군대는 타 유럽 열강들에 비하여도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근대식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주로 발칸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활약하였으며, 프랑스식 군사교육체계를 더욱 효율적인 독일식 군사교육체계로 바꾸기도 했다. 다만 술탄들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국방비를 삭감하고, 고질적인 부정부패 탓에 제대로 된 훈련과 지휘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군사들의 기강이 끝없이 해이한데다 결정적으로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탓에 제국 자체가 붕괴하면서 오스만 제국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2.1. 근대의 오스만 제국군은 과연 쇠퇴했는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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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당시 오스만 제국군 수도방위사령부인 제5군의 주요 장교들의 모습. 첫째 열 우측부터 제국 해군 대령 휘세인 라우프 베이, 제국 말기의 주요 장군이자 훗날 에티오피아 제국군 군사고문이 되는 베히브 파샤, 독일 제국군 군사고문이자 5군 사령관 오토 리만 폰 잔더스 원수.

단도직입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멸망 직전까지도 쇠퇴하지 않았다. 18세기까지 오스만군은 최소 현상유지는 했고 19세기부터는 빠르게 근대화되었다. 문제는 오스만보다 유럽의 진보가 훨씬 더 빨랐다는 것이다. 16세기 초 오스만군은 서유럽 기준으로도 선진적인 군대였고 유럽 최대의 상비군을 운용했다. 기술력 면에서도 16세기 오스만의 화기 수준은 서유럽과 비슷하거나 더 우수했다. 허나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화기 수준이 오스만을 능가하기 시작하며 이는 대부분이 화기로 무장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며 야전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신 장기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3]

오스만은 이를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고 상비군을 확충하고 더 많은 징집병을 뽑아내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다. 16세기 초 1만 남짓이었던 예니체리는 17세기 말 4만 8천으로, 카피쿨루 기병대는 5천에서 1만 5천으로 증가했다. 또한 동급의 열강인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페르시아와의 장기전에 필요한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티마르 제도를 폐지하고 현지 유력자들에게 징세를 맡기기 시작했다.[4] 이는 오스만이 오스트리아보다 2배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17세기 중반까지는 유효했지만 제도의 격차를 머릿수의 우위로 커버할 수 없게 된 17세기 후반-18세기에 이르러 한계를 드러냈고 장비와 전투력은 그대로인데 규모만 비대해진 예니체리는 정부를 장악하고 술탄마저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예니체리는 서구화 개혁과 과학기술 도입을 결사반대했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 폭력도 불사했다.

병력 규모 면에서도 16-17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육군과 해군을 합해 약 15만의 동원가능한 총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스페인 제국에 필적하는 숫자였다. 스페인 제국의 병력 대부분이 저지대에 묶여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실제 동원가능한 병력은 오스만이 훨씬 더 많았다.[5] 그러나 17세기 후반-18세기에 이르러 서유럽 열강들이 수십만의 상비군[6]을 유지하게 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도 수십만을 쭉쭉 뽑아내는 것이 가능해지자 오스만의 수적 우위는 무색해졌다. 실제로 18세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오스만이 국지적인 수적 우위를 점한 전투는 많았지만 총병력은 항상 열세에 있었다. 8차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서부전선에 병력 대부분을 배치했음에도 오스만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19세기까지 오스만의 다뉴브 방어선이 붕괴되지 않았던 것은 운빨과 정치적 요인[7]도 주효했지만 보급의 어려움과 전염병의 공이 컸다. 당시 다뉴브 일대는 미개간된 습지가 많았는데 이들 지역은 전염병의 온상이었고 말라리아도 창궐했다. 또한 오스만의 핵심 중추인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에서는 10년 주기로 흑사병이 돌았는데 토착민은 전염병에 어느 정도 면역이었지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은 수십만씩 떼지어 죽기 일쑤였다. 당장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크림 전쟁을 보면 러시아군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보다는 전염병으로 입은 피해가 10배는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유럽의 선진문물과 군사기술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17세기부터 있었고[8] 2차 빈 공방전 실패 후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되지만 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장군들의 졸렬한 지휘로 인해 오스만군이 괄목할 성공을 거두면서 거의 백지화되었다. 뜻밖의 성공에 고무되고 자만한 오스만은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고 이는 장래 러시아와의 대결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역설적으로 성공이 몰락의 단초가 된 셈이다.

기강의 해이도 심각한 문제였는데 오스만은 비정규병[9]에게 봉급을 지급하지 않아 병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병들은 전시에나 평시에나 약탈로 생계를 해결했다. 오스만 군대의 악명높은 잔혹성과 야만성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통제되지 않는 비정규병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10] 이브라힘 파샤도 헝가리 영내의 초토화와 부다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을 기록하며 병사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16세기까지 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17세기 이후 유럽의 전쟁이 근대화되고 규율 잡힌 상비군이 대세가 되면서 오스만 군대의 효율성을 극도로 저해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오스만이 서구화 전에도 전근대 비유럽 제국들 중 가장 선진적이고 근대화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 오스만이 유럽의 변방인 러시아에게 맥을 못추고 무너지기 시작한 18세기는 유럽과 비유럽의 운명이 판가름난 분수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제국의 서구화 개혁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할 수 있다. 100여년간 진행된 개혁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기에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군과 러시아군을 상대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으며 뒤이어 일어난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도 그리스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즉, 오스만 제국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튀르키예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결코 적지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의 불행은 결국 유럽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는 것. 하필 옆동네가 당시 타 문명권에 대해 문자 그대로 밸런스 붕괴 수준의 힘을 자랑하던 유럽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3. 특징[편집]



3.1. 보급[편집]


오스만 제국 관료들은 원정이 있기 전 군대에게 필요한 식량의 양을 계산해야 했다. 그리고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전부 현지에서 구매하거나 현지에 세워둔 창고에서 해결하려 들면 해당 지역의 물가가 심각하게 교란될 수 있었으므로, 관료들은 이전 원정에서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또 새로 구입해야 하거나 보급해야 하는 식량은 얼마나 되는지 분석해서 필요한 식량의 양을 결정해야 했다. 또 다음해의 원정을 위해 그해에 모은 식량을 몽땅 써 버릴 수는 없었으니 잉여분도 충분히 잡아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을 징발한 게 아니라 구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관료들은 식량 운송비는 물론 식량 구입비까지 계산해야 했다. 주둔지나 행군경로 인근의 작황이 좋지 않으면 당연히 구입비가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았다가 남은 식량은 비축되기도 했지만 봄이나 추수기에 구입한 가격으로 다시 해당 지역에 되팔았는데, 대개 원정이 겨울에 끝나다보니 식량 가격이 많이 오른 상황에서 정부가 저가로 식량을 판매하는 것은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3.2. 상인[편집]


오스만 제국군은 보급부대와 함께 다수의 상인들을 데리고 다녔다. 1570년대 크레타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과 외과의들이 동행했고, 1730년의 동방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뿐만 아니라 제화공, 이발사들도 동행했다. 이들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이나 무기, 장비들을 공급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도 챙겨 갔다. 징발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원정이 자신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항상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나온 1730년 원정 시 참가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충분히 지켜지지 않았다고 느끼고 불만을 품고, 결국 이 불만이 폭발해 술탄 아흐메트 3세가 퇴위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기도 한다. 중동에서 상인들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서, 19세기 말~20세기 초에도 이란의 상인들은 영국의 담배전매권을 취소시킨다든지, 헌법을 도입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스만의 상인들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는 있어도 중앙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경제에 적극 개입했지만 상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11]

16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화폐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 바빴는데, 1586년 오스만과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 시 타브리즈의 수비군들은 자신들의 지급받은 화폐의 가치가 이전의 3/5로 떨어지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이 시기 원정을 다룬 역사가 무스타파 알리에 따르면 당시 캅카스 지역에서 밀가루 1옥카(okkas=1.28kg)는 66악체, 빵 1옥카는 알툰(altun)금화 두개, 즉 250악체와 맞먹었는데, 여기 주둔하던 병사들의 급료는 하루 5 악체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 병사들은 당연히 이 지역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군대는 통솔을 잘 따르지 않거나 아예 반란에까지 동참하게 되었고, 예니체리들마저 부업에 나서게 되었다.


4. 편제[편집]




5. 군종[편집]



5.1. 육군[편집]



5.1.1. 보병[편집]



5.1.1.1. 중세: 예니체리[편집]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 보병은 크게 정예군인 예니체리들과 경보병인 '야야(Yaya)'들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이며 실제로도 오스만 군대의 핵심 전력이 바로 예니체리였는데, 술탄 무라트 1세가 이슬람교로 개종한 기독교도 노예들을 모아 처음으로 창설하였다. 참고로 이 시기에는 오직 기독교도 가정 출신의 매우 어린 아이들만을 따로 선별하여 혹독한 훈련을 거쳐 술탄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게 세뇌시켰으며, 나중에는 기독교도 부모들도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다는 것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제 자식들을 예니체리에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예니체리들은 이후 술탄의 친위대나 호위 등의 역할을 맡아 엄청난 효율과 전투력을 보이면서 제국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예니체리들은 술탄을 마치 제 아버지와 같이 여기도록 교육받았으며, 가족들과도 떨어졌기에 자신과 같은 예니체리들을 같은 가족으로 여겼다. 또한 '카프쿨루' 라고 하여 '문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면서 술탄과 가장 가까운 세력집단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예니체리들은 크게 3개의 종류로 분류했는데, 베일릭 예니체리, 세크반 예니체리, 제마아트 예니체리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베일릭 예니체리는 술탄의 직속부대이자 최정예 군대였으며, 유럽 열강 등 주요 적들과 인접했던 발칸 반도의 영토들과 수도를 방비했다. 한편 제마아트 예니체리는 봉급을 받고 싸우는 상비군 집단으로,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의 중요 거점들을 방비했으며 주로 전방의 도시들에 배치되어 있었다. 베일릭 예니체리가 상대적으로 소규모 최정예였다면, 수가 더 많았던 세크반 예니체리들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 주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일릭 예니체리들은 61개의 오르타(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제마아트 예니체리들은 총 101개의 오르타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크반 예니체리들의 역할 역시 제마아트 예니체리들과 동일하였으며, 주로 경보병으로 적을 추격하고 섬멸, 전리품을 챙기는 등의 활동을 했다. 주로 농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상대적인 훈련도는 베일릭 예니체리나 제마아트 예니체리에 비하여 떨어졌다. 총 34개의 오르타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니체리 훈련병들을 따로 '아제미 오을란'이라고 불렀으며, 궁정 경비 등을 맡았으며 34개의 오르타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고로 예니체리들은 편제를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짰으며, 1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를 '뵐뤽바쉬으(Bölükbaşı, 소대(bölük)장(baş)', 1,0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고급 장교를 '바쉬 차우쉬(Baş çavuş,)', 예니체리의 총사령관을 '예니체리 아아스(Yeniçeri Ağası)'라고 불렀다. 그 외에 제일 계급이 낮은 신병은 카라쿨룩추(Karakullukçu), 뵐뤽바쉬으를 비롯한.하급장교들은 우스타(Usta), 예니체리 아아스 다음자리에 위치하는 부사령관은 쿨 카히야스(Kul Kahyası)같은 계급들이 존재랬다.

예니체리들은 초기에는 오직 기독교에서 개종한 노예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으며 완전히 술탄에게 종속된 말그대로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들이 점차 공을 많이 세우면서 제국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권력을 잡으면서 이같은 제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나가게 된다. 게다가 '피정복자들이 제대로 출세할 수 있는' 정말 몇 안되는 방법이기도 했기에 시간이 흐르자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기독교도 가정에서 자식들을 예니체리에 보낼 정도였다. 또한 1500년대 후반에는 개종한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일반적인 무슬림들도 예니체리에 입대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15세기 이후의 예니체리는 아예 토종 무슬림들로만 이루어진 완벽한 이슬람 군대로 변모한다.

참고로 예니체리들이 입고 있던 군복은 오직 예니체리들만을 위해 제작된 특별 군복이었다. 정예군은 황색 상의를 걸치고 다녔으며, 황실 경비대는 붉은색으로 된 로브를 걸쳤고 일반 예니체리들은 그냥 황색과 붉은색을 섞어 놓은 튜닉 비슷한 군복을 입고 다녔다. 한편 군화의 색으로도 계급을 구분할 수 있었는데, 고급 장교들은 붉은색 군화를, 일반 병사들은 검은 군화를 신고 다녔다고 한다. 참고로 예니체리들이 머리에 쓰고 다니는, 수녀처럼 하얀 천을 머리 뒤쪽으로 길게 늘어뜨리니 모양의 독특한 모양의 모자를 '뵈르크'라고 부르며, 전장에서 술탄이 자신의 로브 소매를 잘라준 것을 머리에 묶고 다녔던 일화를 배경으로 인하여 쓰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도 굉장히 독특했는데, 정수리만 남기고 아예 싹 밀어버렸다. 이유는 적이 자신의 머리를 잡고 참수한 후에 머리를 잡기 편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염도 일반 무슬림과는 다르게 콧수염만을 기를 수 있었는데, 이는 예니체리가 근본적으로 오직 술탄에게만 종속된 노예와 같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적 징표였다.[12]


5.1.1.2. 근세: 니자므 제디드 군대[편집]



5.1.1.3. 근현대 오스만 보병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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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오스만-그리스 전쟁 당시 진격하는 오스만 보병대의 모습.


5.1.2. 기병[편집]


파일:sipahi.jpg

오스만 기병의 경우에는 6가지의 종류로 나누었다.[13] 가장 먼저 실라흐타르(Silahdar)가 있었으며, 이들은 실라흐타르 아아(Silahdar Agha)가 지휘하였으며 술탄을 가장 근거리에서 모시는 최정예 부대였다. 오직 자살 임무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이들만이 가까스로 이 실라흐타르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술탄의 최정예병답게 받는 혜택도 엄청났다. 이때문에 한 예니체리 부대 안에서 실라흐타르 입단자가 나오면 주변의 모든 예니체리들이 그를 질투했을 정도라고 한다. 후대에 가면 점점 권력층으로서의 면모가 강해지면서, 제국의 수상이나 최고위 궁정 관료들이 속한 계급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한편 두 번째 기병 부대가 바로 '시파히(Sipahi)'로, 완전무장을 한 중기병 병종이었으며 사실상 오스만 기병의 중추였다. 이때문에 오스만의 기병 자체를 두고 아예 시파히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규모도 가장 컸다. 이들 중 실력이 좋은 자들은 '카프쿨루 시파히'라고 해서 궁정을 경비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술탄으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아 지방에 영지를 가진 자들을 '티마를루 시파히'라고 따로 불렀으며, 이들 중 발칸 반도에 봉지를 받은 자를 '루멜리아 시파히', 아나톨리아 쪽에 봉지를 받은 이를 '아나톨리아 시파히'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자 봉지의 영향을 받아 루멜리아 시파히의 경우 체인메일이나 투창 등 유럽식 기사와 비슷한 무장을 한 반면, 아나톨리 시파히들은 터키식 검이나 둥근 방패들을 주로 활용하기도 했다. 다만 총기가 대대적으로 활약하면서 갑옷의 중요성이 떨어진 17세기부터는 둘다 갑옷을 입지 않고 천으로 된 옷을 입거나, 갑옷을 일부만 입었다. 이들은 자연스레 예니체리 부대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서로 간에 대립했고, 나중에는 마흐무트 2세가 예니체리들을 학살할 때에 술탄의 편에 서서 예니체리를 상대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대신 군력을 포기하고 대신 술탄이 창설한 신식 군대에 자연스레 편입되는 방식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마지막이 '아큰즈(Akıncı)[14]'가 있는데, 오스만 제국 초기에만 약탈이나 공급을 담당하는 경기병 겸 야전병이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 제국이 안정되고 더이상 약탈보다 안정적 지배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자연스레 시파히에 밀려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5.1.3. 기타 병과[편집]


파일:ottomanartillery.jpg
현재 전통적인 오스만 제국군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주력부대인 예니체리시파히들이지만, 그 외에도 오스만 제국에서는 여러 다양한 종류의 군 부대들을 따로 운영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포병부대인 '톱추(Topçu)'가 있었으며, 이들은 1400년대 경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초기에는 주로 기독교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 코소보 전투나 바그다드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웠으며, 나중에는 아예 따로 부대가 창설되어 운영되기도 했다. 또한 '제베지(Cebeci)'라고 하여 소수의 무기 제작과 관리를 담당하는 부대가 따로 있었는데, 그 수가 다른 부대들에 비하여 극도로 적은 편이어서 1574년 기준으로도 62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시에는 병기와 화포들을 전장까지 안전하게 운송하는 책임이 있었으며, 평화시에는 주로 무기고에서 근무하면서 무기 제작이나 신무기 개발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다. 비슷한 부대로 '훔바라즈(Humbaracı)'가 있었는데, 이들은 특히 화포들을 중심으로 관리하는 부대이다. 16세기에 대대적으로 창설되었으며, 이후 마흐무트 2세가 예니체리들을 쓸어버릴 때에 술탄의 편에서 큰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대포를 끄는 마차를 담당했던 부대인 '톱아바라즈', 다양한 공작활동들을 수행했던 부대인 '라음즈' 등도 있었다.

의무병의 경우, 오스만 제국에서는 크림 전쟁 이후 서구식 의료체계가 오스만에 도입되면서 서구식 의무병력이 양성되었다. 현재 적신월의 상징인 빨간색 초승달 문양은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인도주의 단체인 오스만 적신월 뿐만 아니라 군의 의무병력들도 사용했다. 군의 의무병력들은 남성들이었지만 발칸 전쟁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부터 여성 간호사가 활동하기 시작한다.[15] 1차대전 초창기에는 독일 등 동맹국 간호사들의 활동이 대부분이었지만 추후 자체적인 간호사가 적신월사 소속 등으로 활동하며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도 구호 활동을 펼친다.


5.2. 해군[편집]


해군같은 경우 바르바리 해적들과 결탁해서 운용하기도 하고, 정규해군도 있었다. 물론 둘 다 나중엔 쌍으로 열강들에게 털린다.


5.2.1. 바르바리 해적[편집]


15세기 말에 출현한 바르바리 해적들은 아프리카에 근거지를 둔 채로 유럽을 침탈하고 있었다.[16] 그러던 중 오스만 제국의 후원까지 받게 되어서 서구의 범선 기술을 획득하게 되고 무려 19세기까지 살아 남는데에 성공하나, 단단히 벼르고 있던 미국과 유럽 열강들이 그들과의 전쟁을 치르고, 최악으로 불리던 바르바리 해적은 괴멸하게 된다.


5.2.2. 정규 해군[편집]


육군과 마찬가지로 17세기까지는 유럽 국가들을 복날 개패듯이 팼으나 레판토 해전, 대튀르크 전쟁등을 거치며 점점 역전당하게 된다.[17] 19세기에는 근대적인 함선들을 도입했으나 미친듯이 강해진 러시아 제국 해군에게 어렵게 취역한 근대식 함선들이 격파당해버렸고 영국 해군 심지어 신생국 그리스 해군에도 털리기도 했다.

이후 독일에게 전함을 몇척 구입해보기도 하고, 영국에게서 전함 2척을 구입을 해보려고도 한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근대화가 진행 중이던 19세기 후반에는 당시 전 세계에서 몇 안되던 잠수함 보유국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절 잠수함에 대해서는 해당 부분 참고.


5.3. 공군[편집]


파일:오스만 항공분대 라운델.jpg
파일:오스만 해군 항공분대 라운델.png
오스만 항공분대의 라운델
해군의 일부 항공기에 쓰인 표식

파일:ottomanairforce.jpg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항공기를 보유한 군대를 창설하여 운영한 나라가 바로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들어온건 1909년 11월에 벨기에인 파일럿 바롱 드 카테르(Baron de Catters)가 코스탄티니예에서 시연한 부아생(Voisin)형 비행기로 중량 500kg, 최대 시속 76km로 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후 이를 관람한 오스만 정부는 비행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0년에 유럽으로 항공후보생들을 파견, 조종술과 비행기 관련 기술들을 배워오도록 시켰으나, 재정 부족 등의 이유로 1년 만에 조기귀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대의 창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마흐무트 셰브케트 파샤의 주도 하에 끊임없이 유럽에서 기술을 배워오도록 후보생들을 파견하였으며, 1912년 2월에 10여 명의 학생들이 비행기술 과정을 수료해 온 것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군용 비행기를 몰수있는 조종사와 기술자들을 양성하고자한 새로운 군사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1912년 말에는 15대의 비행기를 운용했다고 했으며, 당시 오스만 정부 측에서는 이런 새로운 부대의 이름을 오스만 항공분대(Osmanlı tayyare bölükleri)라고 붙였고, 이들은 주로 육군과 해군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항공분대가 첫 선을 보인 때는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이 오스만의 폭정에 반발하여 대대적으로 발칸 전쟁을 일으켰을 때였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오스만 항공분대는 비행기 조종과 정비에 미숙했고, 전쟁 도중 상당수의 비행기들을 잃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만 이 전쟁을 계기로 비행사들이 본격적인 경험을 쌓았고, 전쟁 후반부에는 제대로 된 엘리트 조종사들도 등장하면서 발칸 전쟁 이후의 오스만 항공분대는 제대로 된 근대식 항공대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기에는 몇 십여대에 달하는 군용기를 독자적으로 운용하고 있었으며, 특히 독일 제국의 항공대 장교들에게 교육을 받는 등 질적 향상도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결국 오스만 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항공분대는 해체되었고, 전쟁 직후의 오스만 항공분대는 약 80여대의 비행기와 100여 명의 조종사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오스만 항공분대 역시 자연스레 튀르키예군으로 흡수되어 현재 튀르키예 공군의 모태가 되었다. 참고로 오스만 항공분대가 가장 규모가 컸던 시절은 1916년 12월로, 총 90대에 달하는 비행기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오스만 항공분대는 세계 최초의 흑인 파일럿인 아흐메트 알리 첼릭텐(Ahmet Ali Çelikten)을 배출했다.[18]


6. 전쟁 범죄[편집]


오스만 제국 말기 민족주의의 발호로 인해, 튀르크인들은 기존의 종교적인 구별이 아니라 민족적인 구별로 소수민족들을 탄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이러한 탄압의 강도는 매우 악화되기 시작하여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쿠르드인 등 소수민족들에 대한 대량 학살로 발전하였다. 피해자는 자그마치 백 만명 이상이며 이는 독일의 헤레로족, 나마족 학살과 더불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꼽히고 있다. 그 발전 양상은 훗날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거의 판박이다. 오스만 제국군은 이러한 학살을 수행한 주된 행위자로써 그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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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07:46:37에 나무위키 오스만 제국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보통 술탄 압뒬아지즈의 즉위 원년인 1861년을 본격적인 시작으로 본다.[2] 이 용병들은 오스만 장교에게 충성하는 한 이슬람으로 개종할 필요는 없었다.[3] 불신자들의 화기가 오스만의 화기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화력이 강하다는 불평이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오스만 측에서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4] 그런다고 세입이 늘지는 않았고 오히려 지방분권과 지방세력의 할거를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5] 그리고 스페인은 오스만과 전쟁을 벌일때마다 이상하게 운이 없었다. 알제리 원정에서는 격렬한 폭풍으로 수만의 원정군이 손도 쓰지 못하고 증발했고 역시 수만대군이 동원된 제르바 원정에서도 오스만은 폭풍 덕분에 승리를 거저 얻었다. 폭풍과 오스만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대거 노예로 팔렸는데 오스만 노예시장에서 기독교도 노예 가격이 양파와 맞먹을 정도로 폭락했다고 한다.[6] 1700년 기준 프랑스 육군 224,000명, 해군 118,000명, 영국 육군 76,000명, 해군 115,000명, 네덜란드 육군 90,000명, 해군 86,000명이다.[7]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열강들의 간섭[8] 오스만 군사전략가들은 서유럽 화기의 우수한 성능, 높은 화기 보급률, 장교 및 부사관 비율, 체계적인 훈련, 기하학적인 포진, 규율과 질서정연한 일제사격, 선진적인 조병창, 난공불락의 축성기술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원동력인 국가 조직과 제도를 통찰하지는 못했다.[9] 오스만 제국의 국민개병제는 탄지마트 이후인 1846년에 제정된 "제비뽑기법"(Kur'a Kanunu)이 시초였다. 당시에는 19-20세의 모든 청년들을 모아 제비뽑기를 해서 당첨제비를 뽑은 청년들을 5년 복무시키는 법이었는데 군대 가고싶지 않은 사람들은 bedel-i şahsî (몸값)을 내고 면제되거나 대리자를 보낼 수 있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국민개병제는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 5월 12일에 제정된 "Mükellefiyet-i Askeriye Kanun-u Muvakkatı"(의무군인에 대한 특별법)이 시초이다. 이때는 18-45세의 모든 성인남성을 대상으로 했으며 복무기간은 2년이었다. 그 이전에는 예니체리같이 특별한 경우나 시파히같은 세습군인들을 제외하면 모두 비정규 모집병이었다. Başıbozuk(바시으보죽), "머리가 망가진" 즉 정신나간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이들은 전리품과 약탈을 노리고 자원한 대부분 빈민출신이었으며 특히 팔자좀 고쳐보겠다는 발칸출신 기독교인들이나 유목민 출신의 무슬림 빈민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말과 무기, 갑옷까지 자비로 준비해서 참전하는 전문 약탈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간단한 무장으로 그냥 무작정 닥돌하는 역할이었고, Başıbozuk이라는 이름도 그때문에 붙은 별칭이다.[10] 오스만의 비정규병들은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일상적으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참고로 무슬림이고 기독교인이고 가리지 않았다. 포로 학살도 자주 저질렀는데 유럽의 전쟁에서 항복한 군대는 명예롭게 보내주거나 포로로 잡더라도 죽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비정규병들은 약속을 어기고 병사들을 학살한 후 재물을 갈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11] 똑같이 상인들의 힘이 강했던 유럽과의 중요한 차이는 중동에서 상인들은 정부 정책에 관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또한 언제든지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사망한 고위관료들의 재산도 국고에 귀속되었다.[12] 자유민은 콧수염과 턱수염 모두 기를 수 있었다.[13] 다만 크게는 4개로 나누었으며, 나머지 2개는 작은 하위 부대이다.[14] 돌격하는 자(akın eden)이라는 의미이다.[15] 1차 대전 당시 오스만 여성 간호사의 간호복은 간호모가 히잡과 비슷한 모양이었다.#[16] 원래는 스페인, 포르투갈이 주요 샌드백이었지만 점점더 활동범위를 넓혀 나중엔 아이슬란드까지도 진출하며 미국의 상선들을 털어재끼기도 한다. 그것 때문에 미국과 1호로 외교 조약을 체결하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한다.[17] 사실 레판토 해전은 오스만 조정은 별거 아닌 일로 취급하였고 실제로도 그러했으나 대튀르크 전쟁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진다.[18] 오스만 제국의 아프리카 영토 일부, 아라비아 반도 일부 지역에 흑인 거주민들이 있었기에 오스만 제국에도 흑인이 있었으며 수도에도 흑인 노예들, 황실 하렘의 흑인 환관들도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