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지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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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과정
4. 연표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839년부터 1876년까지 실시된 오스만 제국개혁 정책으로, 은혜 개혁으로도 불린다. 탄지마트는 아랍어로 재구성을 의미한다.


2. 배경[편집]


오스만 제국의 쇠락의 징조는 여러 방면에서 가시화되고 있었다. 1829년에 그리스는 독립을 선언했으며, 1830년에는 알제리가 프랑스에 의해 정복당했다.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은 유럽 열강들을 상대하기 위한 정치/행정적, 기술적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대에 문학적, 문화적 현대화 운동인 나흐다가 퍼지기 시작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탄지마트의 원동력은 단순히 내부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라이벌이자 흑해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소멸을 원하고 있었으나, 대제국의 소멸이 권력의 공백과 유럽 열강들의 분쟁을 야기할 것이라 예측한 프랑스, 영국, 독일 삼국은 오스만 제국을 적당히 유약한 상태로 연명시키고 싶어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에게 현대화 추진을 여러 차례 권장했다.


3. 과정[편집]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1839년 11월 3일에 '장미의 방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탄지마트 개혁을 선포했다. 탄지마트 후반기에 엘리트 관료 출신인 미드하트 파샤(Midhat Paşa)가 주도했으므로, '미드하트 헌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과거 셀림 3세가 추진했다 실패했던 니자므 제디드 개혁과, 마흐무트 2세가 추진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던 서구화 개혁을 계승한다. 이 두 개혁의 대상이었던 행정, 사법, 군제, 토지 부문 전반에서 과거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이 추진되었으며, 개혁의 방향은 서유럽 문화권의 모방이었다.

주된 내용으로는 중앙집권화, 세속화, 의회 권한의 신장, 백성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의 제정, 군대의 징집 방식과 복무 기간의 설정 등이 있었다.

하지만 개혁 추진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은 갈수록 러시아와 국력 차이가 벌어지기만 했고, 크림 전쟁에선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이겼지만 1877년 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수도 코스탄티니예 코앞까지 털렸고 동유럽 영토를 거의 다 내주고 만다. 마침 제정한 헌법으로 인해 파디샤의 권한이 줄어들자 이에 불만을 품은 압뒬하미트 2세1877년 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패배를 구실로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등 전제정치를 부활시키며 개혁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이후 청년 튀르크당이 헌법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해 압뒬하미트 2세를 퇴위시키고 헌법과 의회를 부활시킨 뒤 개혁을 재추진하기는 했지만 극단적인 튀르크 민족주의로 인해 내외적인 반발을 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편에 붙었다 패배하는 바람에 개혁은 결정적으로 실패, 결국 오스만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4. 연표[편집]


1839년
장미 방 칙령
1840년
재정 개혁
1842년
지폐 도입
1850년
상업 법전 개혁
1858년
프랑스 형법을 모방한 유럽식 형법 도입
1868년
유럽식 고등교육 기관 도입과 행정법원 창설
1868년부터 1876년까지
민법 도입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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