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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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하렘.jpg

오스만어: Harem-i hümâyûn

1. 개요
2. 실상
3. 오스만 제국 하렘 여인들의 출신
4. 오스만 제국 하렘의 비빈 및 궁인들의 계급
5. 하렘에 관한 5가지 사실
6. 할렘과의 차이
7. 하렘 습성을 가진 동물
8. 하렘을 소재로 한 작품
9. 여담
10. 함께 보기



1. 개요[편집]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2번, 또는 3번, 또는 4번도 좋으니라. 그러나 그들에게 공평을 베풀어 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손[1]

이 소유할 것이거늘, 그것이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 (쿠란 4:3)[2]


어원은 아랍어에서 금지된 것을 의미하는 '하람(حرم)'이다. 하람은 원래 쿠란 혹은 샤리아에서 금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는 각 가정에서 손님,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여인들의 방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규방 내지는 안방. 전통적으로 아랍, 튀르키예 지역의 전통가옥에는 남성들의 구역인 셀람륵(selamlık)과 여성들의 구역인 하람륵(haramlık)이 존재하는데, 궁전에도 예외가 없었다. 이것이 지금처럼 일부다처제의 상황이나 환경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된 것은 오스만 제국의 하렘 제도가 무지한 유럽인들에게 잘못 인식된 것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 하람도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페르시아에서도 부유층들이 가지고 있었다. 종교 개혁운동으로 나온 마즈다크교는 하람을 반대하여 거꾸로 일처다부제를 주장했고, 부유층 하람을 급습하여 여자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하렘(harem)'은 하람의 튀르키예식 발음으로, 정식 명칭은 위에 명시한 하렘 이 휴마윤(군주의 하렘)이다. 흔히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오스만 제국의 하렘은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그저 생활공간에서 남녀를 격리하던 데서 온 것이다.[3] 그 때문에 술탄의 궁전을 방문한 남성들은 하렘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여성들은 하렘에 들어가서 황후를 비롯한 후궁들을 알현할 수 있었다.[4] 물론, 마찬가지 이유로 외부인 여성이 단독으로 셀람륵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하렘이 물 건너 다른 문화권에 "수많은 미녀들이 단 1명의 남성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격리된 장소"라는 이미지로 잘못 왜곡되면서 유럽남성들은 질투와 선망, 그리고 경멸과 변태적 성욕 등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엄청나게 퇴폐적이고 음탕하기 짝이 없는 하렘의 모습을 멋대로 망상해댔는데 당연히 그렇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하렘이란 존재엔 과장과 허상이 가득 섞여있다. 물론 여러 명의 미녀들과 난교를 하는 술탄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술탄 치고 정상적으로 업무를 본 군주는 어차피 없었다.

보통의 경우 술탄은 자기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여럿이더라도 한 명씩, 정해진 절차를 거쳐 잠자리를 가졌고 애초에 황제의 어머니, 모후인 발리데 술탄이 골라 준 여인과 잠자리를 가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또한 황제가 여성들이 모여 사는 하렘으로 직접 행차해 여인들을 취하는 형태가 아니라 이미 선정된 하렘의 여인을 단장시켜 황제의 침실로 들여보내는 형태였다.

옛날부터 현재까지 서민들보다 상류의 지배계층에서 더욱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피지배계층의 혼인과 번식은 지배자가 설계한 통치의 수단으로써 기능하는 바가 컸고 하렘과 비슷한 특별한 제도는 일종의 최상위 권력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 자신이 독점하는 아름다운 성적 대상의 숫자부와 권력의 지표기 때문이다. 여왕,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부유하고 권력있는 여성들 역시 그와 같았다. 중국의 측천무후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황제도 잘생긴 남자들을 자유롭게 골라 여럿 거느리고 당대 기준 문란한 성생활을 즐길 수도 있었다. 즉, 최고 권력자가 성별만 달라질 뿐 애인이나 등을 많이 거느리는 모습은 인류 역사에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지금도 일부다처제가 합법인 이슬람권에서도 실제 일부다처는 극히 소수의 상위 기득권층 남성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나 다름이 없으며 서민 남성들은 이루기 매우 힘든 일이다. 쿠란에서도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경우를 서술하면서 "이러이러한 특수한 상황이라면 해도 되겠지만, 대신 모든 아내에게 이러저러하게 불편이 없을 정도의 생활수준을 갖춰주고 모두 똑같은 대우를 해 줘야 하며 다른 첩을 들이려면 기존 정실부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누구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 꼬우면? 그냥 하지 마라, 이것도 못하면 걍 자격이 없는 거임."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그 돈많은 사람으로 유명한 맨시티 구단주이자 기름수저 만수르도 마음만 먹으면 수십 명도 넘게 여자를 거느릴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고작 2명이다. 그것도 두바이 왕족 집안에서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한다.

애초에 세계적으로 유목민족의 일부다처제는 형제 등이 사망했을 경우 그 형제의 아내와 자식들을 부족원으로서 그대로 유지하여 재산을 보존하거나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거두어 사회적 약자가 생계수단을 잃어 아사 혹은 살해당하는 것을 막는 복지 목적으로 생겨난 제도이자 문화였으며, 통치자에게 공식적으로 다수의 배우자가 허락되는 것은 정치적 사정이거나 후계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함이니 별 가진 것 없는 일반인 남성과는 인연이 먼 이야기다.

어쨌든 간에, 오스만 제국을 그렇게 욕하면서도 유럽의 군주들을 비롯한 기득권 계층들의 남성들은 미쳐 죽을 정도로 (물론 망상의 산물인 가짜 이미지였지만) 하렘을 부러워했었다. 유럽은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철저한 일부일처제에 노예제는 금지로, 설사 왕에게 애인이 생기더라도 총희, 즉 공식적인 정부 정도가 한계였지 결혼이나 사생아 자녀의 법적 인정은 불가, 사람에 대한 소유권 따윈 없었다. 결국 술자리에서 이야기할 때 단골로 뒷담화처럼 씹을 거리나 되었을 뿐. 그러나 슬쩍 하렘 제도를 모방하는 사례도 생기긴 했다.[5]

그러다가 18세기 유럽 귀부인 메리 워틀리 몬태규(Mary Wortley Montagu, 1689-1762)[6]오스만 제국 여성들의 삶을 전하고 19세기 옐레나 디미트리예비치(Jelena Dimitrijević, 1862~1945)[7] 라는 세르비아 여성이 오스만 제국 황실의 허락을 받아 하렘에서 아예 1년여 동안 살면서 하렘에 사는 여성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적어 유럽으로 와 발행한 책자에서 "하렘은 그리스도교수녀원과 다름없는 곳"이라 하는 등 하렘의 실상이 알려지자, 유럽 남성들은 놀라워했고 그 귀족 여성이 거짓으로 왜곡해 썼을 것이라며 믿지 않으려 드는 남자들도 가득했다.

당대 유럽인들이 품었던 망상을 엿보려면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Grande Odalisque)[8] 같은 그림에서 몽환적이고 에로틱한 이미지들을 찾아 보자.참고1참고 2 - 또한 이후 오리엔트-아시아 국가들의 궁궐에서 여성들이 기거하는 곳은 모두 하렘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생겼다.

동아시아의 후궁의 거처 역시 오스만 제국이 보면 전형적인 하렘이다. 여성들만의 거처와 일을 관장하는 부서가 따로 존재하고, 거세된 내시와 여성관리들이 일하며, 궁궐의 제일 윗 어른으로서 통치자의 어머니와 아내인 대비와 중전이 후궁/궁녀들을 다스리고 왕의 밤일과 후계 생산, 유사시 통치 대리 등을 주관하며 외부인 남성들의 접근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 등은 중국이나 한국의 내명부도 하렘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이러한 궁궐 내명부의 분위기란 환락적, 퇴폐적이기는커녕 엄격한 규율들과 품위 유지, 각 정치세력들의 물밑 암투로 인해 살 떨리고 숨막히는 장소일 뿐이다. 하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주의 하렘의 관습은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주로 튀르크 문화권에서만 발견된다.[9] 오스만 제국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무굴 제국 역시 하렘과 유사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이슬람 율법으로는 배우자는 '정부인만 최대 4명까지' 둘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오스만 제국의 군주는 아예 소속원이 노예 신분인[10] 하렘에서만 여성을 만나고, 이렇게 해서 공식 배우자를 지정하지 않아 법적으로는 평생미혼 상태를 유지하면서 황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이 금기를 피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후계자를 낳은 여성들은 신분이 상승할 수 밖에 없었고[11] 일정한 지위와 권력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이 중 대표적인 예시가 서구권에 살던 평민이다가 납치, 노예로 팔려 하렘에 들어간 후 결국 첫 공식 '황후'까지 된 휴렘 술탄이다.

휴렘 술탄을 황후로 맞아들인 쉴레이만 1세[12] 시대에는[13] 황후도 있고 하렘의 여인들도 있는 이상한 상태로 잠시 변질되었지만, 그때는 술탄에게 함부로 대들었다간 바로 짓밟혀서 대숙청하는 절대권력의 오스만 제국 최전성기였기 때문에[14] 이슬람 율법이고 뭐고 그 누구도 쉴레이만 1세를 막을 수 없었다.[15]

현대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신적 지주 정도 되는 이븐 와하브도 당대 오스만 제국의 퇴폐현상이라고 쓰고 세속화라고 읽는다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실 근대 이전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권 헤게모니를 장악하던 시절에는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던 것보다 율법적으로 풀려있던 시대였다.[16]

2. 실상[편집]


  • 운영
오스만의 하렘은 통치자의 성적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었다. 한 외척이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많은 황손을 만들어서 서로 견제하게 만들고 그 중에 인재를 골라내기 위한 구실이었다. 자녀 양육과 보호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이 매우 막중하기 때문에 하렘에 사는 술탄의 배우자들은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심지어 16세기에는 술탄의 실권이 축소되면서 술탄의 어머니(Valide sultan)나 할머니가 막후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는 경우도 잦았다. 이때는 심지어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데 술탄이 쓰는 내탕금(용돈)이 술탄에게 배정되는 예산보다 몇 배나 많았다.

오스만 제국 하렘 제도에서 권력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는 인물은 발리데 술탄(Valide sultan)으로 파디샤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이며, 그 다음이 파디샤의 아들을 출산한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 그 다음이 파디샤와 동침한 적이 있는 하툰(Hatun)이고 하렘의 여인들을 감독하는 칼파(Kalfa), 제일 밑에 최하위 시녀로 다른 여자들의 시중을 드는 오달륵(Odalık)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위계적인 신분을 갖게 된다. 쉴레이만 대제 이전에 오스만 술탄들에게는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이 없었지만 그가 휴렘 술탄과 결혼한 이후로 역대 파디샤들도 그런 전례가 생겨나서 여기에 황제의 애첩이라는 새로운 지배자가 생겨나게 된다. 또한 하렘에 들어오는 여성들도 상류계급의 귀족이나 공주 급부터 정말 빈천한 출신으로 노예로 팔려온 이까지 천차만별인데다 아예 술탄의 어머니와 딸, 결혼 안 한 자매들까지 함께 있으니 그 신분과 뒷배경의 격차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탄탄한 권력이라는 보호장치를 갖추지 못한 이에겐 술탄의 섣부른 총애, 더구나 임신이나 출산은 당연히 엄청난 견제의 대상이 되는 위험이었다. 술탄이 멋대로 누군가를 사랑했다간 그 상대나 거기서 생긴 아이를 황제의 기존 총비나 다른 세력들이 알아차리고 죽이는 등 온갖 정치적 술수와 모략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술탄 압뒬하미트 1세는 하렘에 사는 뤼흐하라는 여성을 정말로 사랑했다고 한다. 그가 그녀에게 남긴 편지를 봐도 그야말로 닭살 돋는 글귀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도 황후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 대한 사랑을 내색하지 않았다가 그녀가 일찍 죽자 슬픔과 절망 속에 오래가지 못해 그도 죽었다고 한다.

  • 황위 계승에서 탈락한 황자들의 운명
이렇게 힘들게 하렘에서 태어나 겨우 성장하는 데까지 성공한 황자라고 해도 아직 시련이 남아있다. 일부다처제에서는 장자상속 같은 제도를 깔끔히 시행하는 게 매우 힘들고[17], 그렇다고 균분상속을 하자니 재산이 분산되어 가문이 약체화된다. 더 쉽게 예를 들자면, 선대가 기껏 만든 회사나 공장 등이 상속되어 성장하지 못하고 선대의 죽음과 함께 공중분해되어 사라진다는 의미다. 이렇게 된다면 한 가문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어머니가 다른 자식들이 다수 있고 그 중에서 단 한 명만이 제국을 통째 물려받는 후계자가 되는 상황에서, 황자들은 끊임없이 경쟁하고 황위 계승을 위해 전쟁을 벌였으며 승리한 황자는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남은 형제들은 싹 다 몰살시키는 게 관습이 되었다. 더러는 그 아버지가 직접 아들들 일부를 제거해 주기도 했다. 이는 적자상속이라는 튀르크족의 계승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즉 '가장 적합한 아들' 이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18] 술탄이 사망하면 성장과 함께 일찌감치 각 지방에 흩어보내져 있던 황자들이 일제히 올라와 전투를 벌이곤 했다. 메흐메트 2세는 즉위하자마자 자기 형제 19명을 모두 죽였고, 쉴레이만 1세는 셀림 2세를 후계자로 정하는 과정에서 셀림의 이복형제인 무스타파와 동복형제인 바예지드를 처형했다. 나중에 아흐메트 1세는 이게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황위 쟁탈전에서 탈락한 남자 황족들을 죽이지 않고 새장(kafes)이라 불리는 장소에 '봉인'시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새장에 갇힌 황자들은 여자도 만날 수 있고, 방 안에서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지만 자식을 갖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파디샤의 변덕에 의해 언제 죽을지 모를 처지에 있었다. 이러다가 운 좋게 황제가 되더라도 무스타파 1세나 이브라힘처럼 제대로 통치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 복장
파일:external/images.gittigidiyor.com/TOPKAPI-SARAYI-HAREM-DAIRESI-TEBRIK-KARTI__15920520_0.jpg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의 하렘에는 과거에는 이렇게 모델을 세워서 하렘 속의 생활을 묘사했다.

상기한 유럽 남성들의 망상을 이어받은 일부 대중매체에서는 하렘 여인들을 묘사할 때 노출도가 높은 스트립쇼 무희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튀르키예풍인지 아랍풍인지 알 수가 없는 국적불명 의상을 기반으로 상의는 브래지어류만 입고 바지는 살이 비칠 정도로 얇은 바지를 입은 식으로, 마치 (더 심하게는 비키니 하의 정도로 노출된) 현대의 밸리 댄서처럼 노출도가 높은 의상으로 묘사했으나, 당연히 실제로는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하렘 여인들은 전통적으로 소매가 길고 화려한 치마가 몇 겹으로 길고 치렁치렁한 튀르키예풍 드레스를 입었고 머리 장식 등을 착용했지만 탄지마트 이후로는 하렘 여인들도 서구식 의상을 입기 시작했고 돌마바흐체 궁전, 베일레르베이 궁전 등 유럽식 궁전들이 들어서면서 하렘 내부의 인테리어와 하렘 여인들 및 황녀들의 생활 양식들도 서구화된다. 특히 나폴레옹 3세의 황후인 외제니 황후가 1868년 유럽 여성 황족 최초로 하렘을 방문한 이후에는[19] 하렘 여성들 사이에서 서구식 드레스가 크게 유행하면서 서양식 여성 복식이 전통적인 의상들을 대체해 나가게 된다. 특히나 이때 이후 오스만 제국 공주들이나 황족 여성들을 찍은 사진을 보면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찍은 경우가 많아 유럽 각국의 황녀들의 모습과 외형상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해진다. 이는 인종적으로도 뒷받침이 되는데 오스만 제국 시절 가장 인기있던 노예가 밝은 피부와 금발의 유럽 여성이었으며, 이렇게 유입된 유럽 여성들과 결혼한 오스만 귀족 남성도 많았고 이는 오스만의 황제인 파디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즉 파디샤를 비롯한 오스만의 황족, 귀족 급들은 유럽인과의 혼혈을 몇 대씩 반복한 산물들이 되니 혈통적으로 점점 유럽계 백인과 매우 가까워졌다. 이 영향으로 튀르키예 서부로 갈수록 본토 유럽인과 외양으로는 구분이 힘들다고 한다.

  • 생활
하렘의 여인들은 일반적으로 감옥처럼 갇혀사는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지만, 실제 하렘의 여성들은 자주 외출을 나갈 수 있었다. 일단 톱카프 궁전 기준으로 하렘의 입구는 제2중정에, 출구는 제3중정에 위치해 있고, 제3중정은 오직 황제와 그 가족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히잡을 비롯한 가리개를 착용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남성이 출입할 위험도 없고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으므로 낮은 지위의 여인들도 자유롭게 산책하고 활동할 수 있었으며, 흔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여인들을 본 황제가 즉석에서 마음에 든 그녀를 간택하기도 했다. 또한 고위직의 여인들은 자기 사업이나 쇼핑, 자선을 위해 마차를 타고 이스탄불 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고[20] 여성손님에 한해서지만 손님을 하렘 안으로 초대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손님은 꼭 하렘의 격에 맞는 고위 인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앞서 말한 여인들의 사업이나 쇼핑을 위해 만나는 여성 상인들도 있었다. 이들 상인들은 하렘을 출입하면서 오스만 궁정 내의 중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정보원 역할도 하였다.

황제가 사냥을 나가거나 전쟁을 위해 이스탄불을 비울 때는 그가 총애하는 여인들을 데리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21] 또한 하렘 여인들 중 일부는 관리나 사신 등에게 시집보내주기도 했는데 이런 여인들은 신부감으로 선호도가 높았다고 한다. 조선의 궁녀보다는 진로가 다양했던 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술탄이 그만치 신뢰한다는 증표이자 왕실의 사람을 아내로 맞는 것이다. 엿먹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면 술탄의 이름으로 결혼하게 되는 여성이 용모나 행동거지 등이 크게 떨어지는 사람일 리도 없고 하렘에서 거주하면서 아무리 원래는 신분이 낮았던 처지였더라도 고급스러운 의식주를 접해왔고 발리데 술탄이나 하세키 술탄의 시녀로 일했다거나 기본적으로 황제를 대하는 궁중예법 등에는 누구나 통달해 있었기 때문에 부인으로서 교양이 뛰어난 셈이고 하렘 안 권력있는 여성이나 황자들과의 연줄도 될 수 있다. 궁전 입장에서도 황제가 총애할 수 있는 여인의 수는 어차피 한정되어 있으니 지속적으로 필요없는 입을 덜고 권력다툼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 술탄의 취향
술탄이라고 하렘에 가서 놀고 먹기만 했을 거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오히려 무라트 4세와 쉴레이만 대제처럼 사냥이나 학문 등에 취미를 두는 술탄이 더 많았다. 물론 오입질에 몰두한 술탄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 술탄치고 제대로 정치를 하거나 오래 산 사람은 없다. 이슬람교도 기독교 이상으로 몸가짐의 정결함, 신 앞에 떳떳할 도덕성 등을 강조하는 종교인데 더구나 그 모범이 되어야 할 술탄이고 유럽 각국 군주보다 오히려 관리해야 할 영토의 너비나 거느리는 사람이며 상대해야 할 적 등 업무가 많았다. 후기 조선처럼 문만을 중시한 것도 아니어서 애초 술탄 지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들과 직접 전쟁을 수행해야 했으며 다양한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사는 다민족 국가로서 각종 군사적 대립, 무역 등 경제, 종교적 마찰 해결 등 엔간한 다른 세계의 군주들보다 폭 넓은 소양이 요구되었다. 방종과 환락에 빠질 시간적, 정신적 태평함은 가지기 보다 어려운 상황. 또한 상술한 대로 하렘 역시 발리데 술탄이 지휘하고 환관 등이 일하는 고도의 정치적 기관으로서 술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만은 아니었다.
이슬람 문화 특성상 술탄도 낯선 여성이라곤 하렘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입장이어서 그 안에서만 그나마의 취향을 가질 수 있었으며, 통치자의 이성 관계란 언제나 복잡한 정치적 고려가 뒤따르게 된다. 이를 테면 간택된 여성이 한동안 술탄과 잠자리를 함께한 뒤 아이를 가지지 못하면 다시는 술탄과 동침하지 못했다고도 한다. 또한 황자를 낳은 여성은 어느 정도 자란 해당 황자가 지방에 보내질 때 함께 떠나 자기 아들과 살곤 헸다.

3. 오스만 제국 하렘 여인들의 출신[편집]


역대 오스만 제국 군주들의 어머니나 배우자, 후궁 란을 보면 튀르크인의 수보다 유럽(캅카스 포함) 출신들이 많은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하렘 제도와 연관되어 있다.

오스만 황제들의 배우자나 후궁이 된 여인들의 출신을 살펴보면 초창기에는 동로마나 세르비아 등의 공주, 튀르크 베이(족장)의 딸 등 비교적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눈에 띄지만 오스만 제국이 동유럽과 중동을 정복한 중기부터는 유럽 기독교도 출신 노예나 신하들이 헌상한 발칸 반도 영토 출신 그리스인, 슬라브족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22] 이들은 한미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입궁하기 이전의 기록이 부실한 경우가 대다수이며 아예 출신지까지 불명확한 경우도 많다.

배우자나 후궁이 된 사례 이외에도 하렘에 있던 모든 여인들의 경우 체르케스, 조지아, 압하지야캅카스 출신들과 그리스, 왈라키아, 발칸반도, 폴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러시아 등 동유럽 및 남유럽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 외에도 몰타 출신 여성도 있었으며 드물게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출처]

우크라이나 일대 슬라브인 노예 사냥으로 악명높던 크림 칸국이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의 국력도 나중에 가면 약화된 19세기 이후에는 그리스를 비롯한 남동유럽 국가들이 모두 독립하면서 그리스, 슬라브, 알바니아 여성들은 다소 줄어들고 체르케스캅카스 출신들이 주를 이루게 되는데 노예가 아닌 지역 유지, 명문가 출신들이 입궁한 경우가 적지 않다.

4. 오스만 제국 하렘의 비빈 및 궁인들의 계급[편집]



  •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 황자를 출산한 파디샤의 배우자. 동양의 황귀비와 유사하며 최초의 하세키 술탄인 휘렘 술탄은 타국의 황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하세키 술탄 소생의 황자가 황위에 오른 후에는 발리데 술탄이 된다. 18세기부터는 바쉬카든(Başkadın)이라는 칭호가 내려진다.

  • 하툰(Hatun): 후궁에게 붙는 칭호. 유럽레이디와 유사하지만 16세기부터는 하세키 술탄 이외의 후궁에게 내려지는 칭호로 사용된다. 17세기 이후에는 카든에펜디(Kadınefendi)라는 칭호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었다.

  • 카든(Kadın): 아이를 낳은 상급 후궁.

  • 이크발(Ikbal): 파디샤와 정기적으로 동침하는 여성. 파디샤에게 처음으로 총애 받은 여성은 괴즈데(Gözde)라고 불렸다. 하툰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수록 하늠에펜디(hanımefendi)로 대체되어 갔다.

  • 케튀다 카든(Kethüda kadın)[23] / 하지네다르 우스타(Hazinedar Usta): 하렘 시녀들을 총괄하는 수석 시녀장. 조선시대로 비유하자면 제조상궁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환관장은 하지네다르 아아(Hazinedar ağa).

  • 우스타(Usta): 아래의 칼파들을 통솔하는 궁인. 조선시대의 상궁과 어느정도 유사.

  • 칼파(Kalfa): 하렘의 여성들을 관리 감독하는 궁인.

  • 오달륵(Odalık): 하렘의 여인들을 모시는 하위직 여성.

5. 하렘에 관한 5가지 사실[편집]


'불량지식의 창고'라는 책에서는 하렘에 대해서 낱낱이 적어 놓았다. (p145~p148) '불량' 한 지식인 만큼 진실과는 무관.

하렘에 관한 사실 5가지
~하렘에 대해서는 다들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하렘을 갖는 꿈을 꾼 적도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과연 자기 소유의 하렘을 꾸릴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누가 하렘의 식구들을 위해 요리를 할 것인가? 누가 그 많은 인원을 거두어 먹일 것인가? 하렘의 규모가 클수록 책임감도 크다. 하렘에 투자할 생각이라면 잠시 결정을 미루고, 다음에 소개하는 5가지 사실을 읽어보기 바란다.
01 입문서: 알아두어야 할 하렘 몇 군데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남자는 능력이 허락하는 한 부인의 숫자를 늘릴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부인은 보통 4명 안팎이지만 은 무제한으로 둘 수 있으며, 특히 하렘은 몇천 명에 이르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하렘 몇 군데다. 목록의 맨 위에는 BCE 6세기 인도 바나라시의 왕 탐바의 하렘이 있다. 그의 하렘에는 약 16,000명의 여성들이 있었다. 이에 뒤질세라 15세기 술탄 기야 스 웃 딘의 하렘 역시 15,000명 규모를 자랑했다. 그는 후궁들을 수용하기 위해 따로 성벽을 두른 도시를 지어야 했다.
다음으로 1800년대에 시암[24]의 몽쿠트왕은 자체 정부와 오락 시설, 극장을 갖춘 도시를 조성해 9,000명의 여성을 수용했다.[25] 13세기 몽골의 지도자 쿠빌라이 칸은 황후 4명과 약 7,000명에 달하는 을 거느렸다. 2년마다 그는 200명의 들을 퇴출하고 새로 물갈이를 했다. 마지막으로 무굴 제국자한기르 황제는 17세기 초에 6,300명이 넘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하렘을 유지했다. 하지만 자한기르는 취향이 바뀔 때를 대비해 미소년 1,000여 명도 항시 대기시켰다.
02 하렘에도 서열이 있다.
중요한 곳만 겨우 가린 아리따운 여인들이 술탄과의 달콤한 유희를 기다리며 수영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담은 할리우드 영화는 정반대로, 하렘은 사실 엄격한 관리와 훈련 체계를 갖춘 고도로 정교하면서도 복잡한 공동체였다.
또한 하렘의 지휘권은 술탄의 어머니에게 있었다.[26] 그 바로 밑에는 하렘의 감독자와 다수의 여성 관리가 포진해 있었다. 이들 여성 관리는 각자 나이 어린 하렘의 구성원들을 받아 훗날 관리 임무를 담당하게 될 때에 대비해 그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켰다. 서열에서 술탄의 어머니 다음은 술탄의 후계자를 낳은 어머니였다. 그 다음으로 술탄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들이 뒤를 이었는데, 술탄의 총애 정도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 그들의 친척과 기타 관리들이 새로운 하렘 구성원을 모집하는 책임을 맡아 매년 라마단 기간 중 15일에 술탄에게 바쳤다.
03 그래서 환관이 되고 싶다고?
수천 명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백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 틈에서 평생 생활할 수 있다고 하면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거세를 해야 한다. 거세는 되도록 어렸을 때 하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주인 나리의 딸이 결혼할 때 혼수품의 일부로 딸려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 왔으면 입학 시험에 통과한 셈이다. 앞으로 몇년 동안은 착실하게 일하면서 환관 서열에서 위쪽을 차지해야 한다. 드디어 여러분은 술탄의 신임을 얻어 수석 환관에 임명된다. 여러분의 존재 목적은 오로지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데 있다. 저녁마다 주인의 기분을 헤아려 적당한 동침 상대를 골라야 한다. 아울러 동침 상대로 결정된 젊은 여성에게 주인의 변덕과 취향을 일러두는 한편 최음제도 준비해야 한다. 수석 흑인 환관[27]으로서 여러분은 이제 술탄이 가장 신임하는 하인이자 제국에서 서열이 3번째로 높은 관리가 되었다[28]. 여러분은 하렘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으며, 제국의 군대에 명령을 내리고, 술탄과도 독대할 수 있다[29].
수석 백인 환관의 경우에는 관료 체계를 운영하면서 술탄 앞으로 보내오는 청원서, 메시지, 정부 문서를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만 하렘에는 출입할 수 없다. 왜냐고? (남성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흑인 환관[30]과 달리 백인 환관은 아직도 남아 있는 일부[31]를 가지고 술탄에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04 하렘의 내부 장식
하렘은 원래 아랍어로 '여인들의 장소'를 의미한다. 하렘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밀실이다. 밀실은 천국을 본떠 설계되었다. 하렘에 들어오는 여인에게는 저마다 정원과 폭포, 시내가 딸린 호화로운 아파트가 주어졌다. 하렘의 여인들은 각기 다른 문화권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파트는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면서 자기 생활에 만족하도록 꾸며졌다. 어쨌든 이들 여인들은 늘 대기하면서 주인의 뜻하지 않은 방문도 기꺼이 반겨야 했다. 마찬가지로 옷차림도 선정적이고 뇌쇄적이었다. 속살이 살짝 비치는 모슬린이나 비단 옷을 주로 입었지만, 어디까지나 목적은 알몸을 드러내는 데 있었다. 천 자체가 아주 얇아 여러 겹을 두른다고 해도 무게가 28g 정도밖에 나가지 않았다.[32] 여기에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 여인들의 의상은 다이아몬드, , 루비, 진주로 장식되었다. 신발도 보석으로 뒤덮였다. 마지막으로 루비로 마무리 처리를 한 타조 깃털 장식을 머리에 꽂으면 몸단장이 끝났다. 술탄들은 제국의 보물 대부분을, 해바라기처럼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이 여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썼다.
05 하렘의 관리는 철저하게
메흐메트 3세가 오스만 제국 황제에 등극한 것은 1500년대 후반이었다. 그의 어머니 사피예 술탄은 하렘의 지도자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고문 가운데 1명이 되었다. 원래 사피예는 베네치아 귀족의 딸로, 해적에게 잡혀 노예가 되어 술탄에게 팔려온 여인이다.[33][34]
물론 아무리 술탄의 어머니일지라도 국사에 직접 관여하지는 못했지만, 사피예는 술탄의 결정에 때로 직접적이면서 공공연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번은 메흐메트가 이슬람 승려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사피예가 커튼 뒤에 앉아 있다 대놓고 아들의 편을 든 적도 있었다. 사피예의 입김이 너무 세지면서 궁정 대신, 종교 고문, 수석 흑인 내시, 술탄이 총애하는 부인과 들 사이에서 원성의 소리가 드높았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사피예가 하렘의 지도자라는 역할을 넘어 지나치게 월권을 행사한다고 생각했다. 메흐메트는 어머니를 제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한 번은 그녀를 다른 궁으로 내쫓기까지 했다. 1600년 이스탄불에서 발생한 폭동은 사피예가 하렘을 다스리는 동안 필요 경비가 계속 치솟아 제국의 통화가 평가 절상된 데다, 여기에 그녀의 과도한 탐욕이 더해져 일어난 결과였다.

여러모로 조선내명부와도 비견할 수 있다.

6. 할렘과의 차이[편집]


위쪽에도 기입했지만 할렘과 하렘은 다르다. 할렘은 Harlem이나 Haarlem이다. 전자는 미국 뉴욕에 있고, 후자는 네덜란드에 있다. 할렘 지구라고 하면 뉴욕 맨해튼의 할렘이라는 장소, 할렘 게임이라고 하면 네덜란드 할렘에서 2년마다 한번씩 개최되는 국제 야구대회이다. 영어 발음으로 하렘(Harem)은 하렘과 하림(영국식), 헤럼(미국식)이며 할렘(Harlem)은 할럼에 가깝게 발음된다. 둘 다 엑센트는 1음절.

이 두 단어를 햇갈린 탓인지 1999년에 이탈리아와 튀르키예가 합작해서 만든 영화 하렘 수아레(Harem Suare, 이탈리아어로 하렘의 밤이란 뜻)가 한국에 개봉되었을 때 할렘 슈어라는 괴상한 제목으로 나왔다. 일본에서 하렘 소재의 작품이 많이 나오고 'ㄹ'받침이 잘 안 돼 탈락시키는 경향이 있는 만큼(ex. 콜라→코-라) 하렘이 할렘인 줄 착각하는 사례인 듯.


7. 하렘 습성을 가진 동물[편집]


일부 동물들도 하렘이나 일부다처와 비슷한 번식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동물로 물개, 바다코끼리, 사자, 몽골야생말, 겔라다개코원숭이 등이 있다. 보통 수컷 1~2마리가 모계로 이어진 암컷 여러 마리가 이룬 한 그룹 전체와 독점적인 짝짓기를 하며, 이런 시스템에서 어린 새끼 수컷들은 성장하면 엄마이모자매들의 그룹에서 쫒겨나 다른 영역의 수컷과 싸우는 도전자가 되어서 이겨 그 자리를 빼앗아야 번식을 하고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당연히 경쟁에서 승리하는 극소수의 알파 수컷은 대개 크고 강한 우수한 개체로서 암컷을 통해 유전자를 퍼뜨릴 기회를 누리게 되지만, 패배하거나 도전을 포기해 번식에서 탈락한 수컷들은 홀로 황야를 떠도는 외토리 노총각으로 다른 수컷들에게 공격과 추방을 당하고, 더러는 단독사냥이 어려워 굶어죽거나 심하면 싸움에서 입은 부상이 누적되어 죽기도. 또한 짝짓기에 성공한 알파 수컷도 늙어 약해지면 결국 젊고 새로운 피의 수컷에 의해 교체되기 마련. 이런 식으로 유전자 풀의 협소화를 방지한다.


8. 하렘을 소재로 한 작품[편집]


이슬람이나 아랍 문화권이 아닌 경우는 하렘물.

  • 위대한 세기 - 오스만 제국의 10대 황제 쉴레이만 대제와 그의 황후 휘렘 술탄(록셀란)의 일대기를 그린 튀르키예 드라마.
  • 살모사의 눈부심 - 미치광이 황제 이브라힘[35]의 궁정에서 일어난 슬프고도 잔혹한 역사를 그린 튀르키예 소설. 카페스('새장'이라는 뜻으로 왕위를 계승한 왕자 외의 다른 왕자들이 유폐되어 있던 곳)와 하렘의 실상을 충실히 고증했다.
  •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夢の雫 黄金の鳥籠) - 시노하라 치에가 그린 만화. 위대한 세기와 동일하게 휘렘 술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에빌리오스 시리즈 - 베노마니아 공의 광기. 항목 참조.
  • 하렘 수아레(Harem suare) - 1876년부터 1909년까지 제위에 있었던 압뒬하미트 2세 시기의 하렘을 그린 이탈리아 영화. 하렘을 다루는 창작물 중에서는 흔치 않게 오스만 제국 최후반기인 20세기 초반의 하렘을 다루는 것이 특징, 청년 튀르크당에 의해 하렘이 폐쇄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은 하렘 여인들을 위해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여인들은 청년 장교들의 발언에 어이 없어 한다. 그도 그럴게 그 하렘의 여인들은 오스만 제국 밖에서 강제로 하렘으로 팔려온 무연고자들이었으니. 결국 하렘 안에서 겨우 나름 뿌리내리고 생활하던 여인들은 갑작스런 하렘 폐쇄로 또 한번 기존의 삶을 갑작스레 타의로 잃고 집도 절도 아무것도 없는 신세로 길거리를 떠돌게 됐고 압뒬하미트 2세의 아이를 낳은 여주인공 사피예도 이탈리아의 클럽 무용수로 전락한다.
  • 하비비 - 크레이그 톰슨의 만화로, 중간중간에 서술되는 주인공 도돌라의 과거 회상을 제외하면 작중의 배경은 주로 하렘에서 진행된다.
  • 디아블로 2 - 액트 2의 중후반부에 제린의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데, 재수없게도 비전 성역과 연결된 차원관문이 하렘 지하에 열리고 악마들이 쏟아져 나와서 그가 보호하려 했던 창녀들(과 경호원들)을 끔살시킨다. 때문에 플레이어가 내려갔을 때는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 내부가 온통 피와 시체로 가득한 이질적이고 공포스런 던전이 돼 있다. 여담으로 이 던전에서 나오는 BGM에는 산스크리트어 가사가 있다.[36]
  • 하렘생존기 - 카카오 웹툰


9. 여담[편집]


이슬람이 꽤 폐쇄적이어서 별의 별 이야기가 전해지곤 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럽 백인 여자도 납치해서 데리고 산다는 이야기. 이건 도시전설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사실이고 수도 없이 많은 유럽 여성들이 납치당했다. 바르바리 해적 참고[37]

하렘의 위치와 가까운 보스포루스 해협의 경우 문제를 일으킨 하렘 구성원들의 처형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

일본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인 후미히토 친왕도 가쿠슈인대학 시절(1984~1988)에 일종의 하렘을 거느렸다는 소문이 있다. 겉으로는 "1년 후배인 가와시마 키코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다가 캠퍼스 커플이 되어 결혼했다."고 선전되었으나, 사실 그 동아리는 후미히토 친왕의 하렘이라는 것이다. 후미히토 친왕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보면 부하를 시켜서 동아리에 가입하게 만들었고 그녀들 중에서 끝까지 남아 결혼에까지 이른 인물이 가와시마 키코였다는 것이다.

중국서진 황조의 초대 황제인 사마염오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통일을 이루는 데 성공하자, 곧바로 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궁녀들로 구성된 하렘을 세웠는데, 매일마다 하렘 내부를 염소[38]가 끄는 수레를 타고 행차하면 수레를 끄는 염소가 멈추는 곳의 처소에 기거하는 궁녀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해서 황제의 아이를 임신하면 단번에 정식 후궁으로 지위가 승격되었으므로[39], 궁녀들이 일부러 자기 처소 앞에다가 소금물이나 댓잎 같은 염소가 좋아할 만한 것을 뿌려놓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만화나 게임에서는 1명의 남성에 많은 수의 미소녀 캐릭터가 몰려들어 경합을 벌이는 연애 전개를 의미한다. 하렘물 참고.

하렘계 작품의 원조가 우리나라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구운몽 참조. 타입이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의자왕삼천궁녀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 연구에 의하면,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는 승리자인 나당연합군이 의자왕을 모욕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궁녀가 삼천명일 수가 없으며 아마 전투 중 낙상하거나 절망에 빠진 백성들이 투신한 경우가 와전되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그냥 관용구 정도로만 여길 것.[40]

종종 사나이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100가지 일, 남자의 로망 등으로 불리고 있으나 현실에서 하렘을 만들려면 "1. 여자들을 다 먹여살릴 엄청난 경제력 2.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라는 두 조건 모두를 만족해야한다. 조건을 만족하더라도 매우 힘들다. 일부다처제 참고.

여기에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가 일부다처로 해석될수있는 괴논리로 여성신도들을 휘어 잡고 있다보니 하렘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좋지않다.

1980년대 스포츠서울에 연재하던 <세계의 진기한 성>이라는 기사에선 콩고민주공화국에 존재하던 소왕국인 쿠바 왕국(Kuba kingdom)의 르켕 왕이 정말로 하렘을 이룩한 실화를 쓴 바 있는데, 60년대만 해도 르켕 왕은 800명이나 되는 아내들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로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이런 일은 이제 기록으로만 전해진다고 나왔었다. 르켕 왕은 결사거부했지만 결국 아내들에게 뜻을 밝혔더니 740명이 넘는 아내들이 떠나고 싶다, 즉 이혼하고 싶다고 하여 결국 그렇게 대량 이혼이 이뤄졌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이것을 실제로 이룩한 용자가 나타났다. # 부인 4명에 자녀들이 17명인 대가족이다. 몰몬교 등 일부 종단은 교주 등이 일부다처제를 주장하고 실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2023년 아내를 9명이나 둔 70대 남성이 붙잡혔는데, 죄목은 10대 여성에게 "나와 성관계를 하지 않으면 외계인에게 잡아먹힌다고 협박해서라고. 아내들은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

반대로 한 여자를 두고 여러 남자가 몰려드는 것은 거꾸로 역(逆)자를 써서 역하렘이라고 한다. 여성향 쪽에서는 전통의 대세. 그러나 성적인 관계까지 다수와 맺고 소유하기를 망상하는 남성향 하렘물에 비해 여성향에선 진짜 연애상대 및 결말은 보통 한 명과만 이루어지고 나머지는 들러리로 남는 것이 대부분.

10. 함께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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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류 해석은 이 구절을 전쟁 포로, 하녀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이기 때문. 이런 해석에 충실한 집단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다만 이슬람 율법에서는 결혼관계가 아닌 성관계는 전부 간통으로 간주하고, 그 처벌은 사형이다. 그리고 결혼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녀의 자유의지로 결혼계약서에 서명하고, 남자가 여자에게 신부대를 지불하고, 이를 율법학자나 법정에서 공증받아야만 결혼이 성립하기 때문에 여성노예를 아내로 얻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녀를 자유인으로 풀어주어야 성립된다. 애초에 이슬람법대로라면 성노예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역사적인 사례로 해당 구절을 인용할 때에는 하디스에 따라 포로나 하녀와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이는 반드시 결혼을 전제로 해야 했고, 결혼을 위해서는 그녀를 반드시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만약에 여성 노예가 자진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할 경우에도 그 노예는 무조건 해방되어야 한다. 무슬림을 노예로 부리는 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며, 실제로 오스만 제국 초기 결혼을 하지 않은 군인들이 이런 식으로 피정복지의 여성들을 잡아서 해방 및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결혼한 사례가 많이 보인다. 이후 서술되지만, 사실 하렘 제도는 FM대로 따지면 율법에 완전히 어긋난다.[2] 4장 129절에서는 여자들 사이에서 여자 모두를 공정하게 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한명의 아내에 만족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3]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사대부의 가옥에서 흔히 바깥에 행랑과 사랑채, 안쪽은 안채와 후원을 두어 가족 내에서도 남녀의 주된 생활공간을 자연스레 나누었다. 마나님이 자리하는 안채에 외부인, 특히 외간 남자는 들어설 수도 엿봐서도 안 되는 것도 동일.[4] 이 때문에 황제의 애첩이나 황제의 모후 등과 거래하는 보석상이나 장신구 상인 등은 모조리 여성들이었으며, 오스만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황제 대신 모후나 애첩 등이 정치를 맡게 된 이후에는 오스만의 적국 가운데 하나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 상인들을 연락망으로 삼아 모후나 애첩과 연락하기도 했다.[5] 대표적으로 루이 15세의 하렘인 사슴정원이 있겠는데, 이 일시적 하렘은 루이 15세가 직접 만든 게 아니라 그 총희 마담 드 퐁파두르가 루이 15세와 제대로 된 성관계가 힘들자 선물삼아 만들어준 것이다. 특별한 정원을 꾸미고 자신이 골라 데려온 창부들을 흩어놓아 왕이 정원을 돌아다니다 자유롭게 만나도록 했다고 한다.[6] 영국 대사의 아내로, 22년동안 오스만 제국동유럽에서 지내면서 현지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아 글을 남겼다.[7] 1890년대의 하렘에서 지낸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8] 튀르키예어로 각 방의 시녀를 의미하는 오달륵(Odalık)에서 비롯된 말.[9] 다만, 유대교를 믿었던 하자르 칸국의 칸도 하렘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10] 율법상 양쪽이 모두 자유민이고 자유 의사가 따라야 결혼이 성사된다.[11] 이슬람 문화권은 전반적인 여성의 지위와 권리 자체는 낮을지 몰라도 '어머니'는 대단히 존중했다. 황자에게 그의 어머니는 일생의 조언자이자 받들어 모시는 하렘의 통치자가 되었다.[12] 쉴레이만 1세는 외모마저도 엄친아였다. 인상도 또렷하며 패션 센스마저 특출한 옥골선풍형의 훈남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가 입던 옷들을 살펴보면 기록과 달리 키가 크진 않았다고.[13] 황후를 가리키는 칭호가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이라는 것인데, 쉴레이만 이후에도 이 칭호가 쓰이기는 쓰이되 황제의 유일배우자인 황후가 아니라 황자를 생산한 후궁을 이렇게 불렀으며, 18세기 이후에는 바쉬 카든에펜디(Baş kadınefendi)로 불린다.[14] 실제로 일개 신민은 물론이고 재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들의 생사여탈권은 황제 한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이것은 이후 19세기에 접어들어 입헌군주정으로 개혁될 때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된다.[15] 오스만 황제는 종교수장인 칼리파 또한 겸하고 있었다. 즉 이슬람 율법에 대한 해석이나 법률에 관한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오스만 황제는 칼리파란 직위를 자기를 수식하는 하나의 타이틀 중 하나로 여겼지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다.[16] 종교수장인 칼리파가 세속적으로 사니 국가자체가 세속화되는 건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17] 장자상속이 엄격했던 후기 조선 같은 경우도 있는데 왜? 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조선도 엄연한 일부일처(+다첩)제로서 정식 아내는 오직 한 명이며 그 아내가 낳은 장자만 적법하게 인정된다. 왕실만이 핑계 좋게 본처인 왕비 소생 적자가 없는 경우 서자가 그 자리를 대체 가능한 것뿐이며 이때도 계승권을 획득한 왕자는 왕비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서 법적으로 정실의 자식이 되었다. 왕가 외의 모든 계층에서 장차구분, 적서차별은 갈수록 매우 엄격해져 장자 아닌 차자, 첩 소생의 서자가 본처 소생 장자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었다. 예송논쟁이나 광해군이 이미 세자로 책봉, 업적과 압도적인 나이차 등 모든 왕위계승 조건을 구비하고도 고작 갓난아기인 영창대군의 어머니가 정궁이라는 적서문제 때문에 오래 쌓아온 지위가 다 흔들렸고 결국 본인이 불안해져 벌인 사건들로 폐위에까지 이른 것만 봐도...[18] 비슷하게 청나라 황실도 황제가 여러 황자 중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자를 지명하는 제도가 있었다. 투르크와는 가까운 유목민족의 후예라는 공통성이 있다.[19] 하렘을 방문하고 싶다는 외제니 황후의 요청을 술탄 압뒬아지즈가 승낙했는데 압뒬아지즈의 모후이자 당시 오스만 제국의 태후였던 페르테브니얄 술탄이 감히 외국인이 하렘에 들어오냐며 외제니 황후의 따귀를 때리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긴 했다. 때문에 압뒬하미트 1세는 어머니를 달래면서 외제니 황후한테 어머니의 잘못을 대신 사과했다.[20] 다만 마차 안의 사람들은 바깥을 볼 수 있지만, 마차 밖에서는 안에 누가 탔는지 알 수 없는 구조이다. 이는 하렘의 건축물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기하학적인 창살들로 채워진 창문에서 하렘 안 여성들은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지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21] 이 때문에 젠타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에 패배했을 때는 황제와 같이 있던 하렘 후궁들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22] 그중 예외는 오스만 2세의 사실상의 정실 부인인 아킬레 하늠. 오스만 제국 내 무슬림들 중 황제를 제외하면 최고위직인 셰이휼이슬람(대율법사) 호자자데 에사드 에펜디의 딸이었다. 이렇게 신분이 높은 여인이었기 때문에 하렘에 적응하지 못하고 특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출처] Life After the Harem: Female Palace Slaves, Patronage and the Imperial Ottoman Court, Betül İpşirli Argit저[23] 하툰의 칭호가 붙기도 한다.[24] 태국의 옛 이름[25] 놀라운 것은 몽쿠트왕이 라마 4세 (1804~1868)라는 것. 승려 출신으로 태국에선 명군으로 추앙받는 왕도 이렇다. 게다가 47살에 제위했다. 영화와 연극과 애니까지 나온 '왕과 나'에 등장하는 왕이 바로 몽쿠트 왕이다. 몇십명에 이르는 자식들에게 서양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초빙한 영국인 교사와 만나는 것이 주 내용.[26] 술탄의 어머니는 발리데 술탄(Valide Sultan)이라고 불리며, 그녀가 하렘의 사실상 주인이었다. 하렘의 여인을 들이고 내보내는 권한이 모두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하렘 입구에 바로 자신의 방을 만들어놓기 때문에, 술탄이 하렘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어머니의 방을 거쳐야 했고, 이렇게 되면 인사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영향력이 더 커졌다. 덕분에 하렘의 여인들은 얼굴도 보기 힘든 술탄보다 발리데 술탄에게 더 잘 보여야했다.[27] Kızlarağası. 직역하면 '검은 환관' 이라는 뜻으로, 백인이나 황인도 취임할 수 있었다. 검다는 말은, 거의 대부분 이 자리에 앉는 사람이 아프리카 흑인들이었기 때문에 붙은 것.[28]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고,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세를 누렸던 17~18세기 한정. 덤으로 이 무렵에는 6명이었던 부(副)재상(Vizier)들 가운데 수석도 겸했으며, 서열 첫 번째는 재상, 두 번째는 칼리프도 겸하던 황제 자신을 제외하면 가장 지위가 높은 이슬람 성직자인 셰이크 알 이슬람(셰이휠이슬람)이었다.[29] 오스만 제국에서 황제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재상으로부터 국정을 보고받고 그를 통해 명령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건 문서상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애첩이라거나 환관 등 가까운 인물들이 황제에게 보고를 하는 비공식적인 루트가 많았으며, 흑인 환관이 권세를 누리던 시절에는 환관이 군대에 직접 명령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황제를 움직여 간접적인 명을 내릴 수 있었으며 군사 뿐 아니라 정치 경제는 물론 황제를 갈아치울 수도 있었다. 중국 등 환관제도가 발달한 문화권에서 공통적인 현상. 결국 정치가 고도화되어 통치자 개인의 역량이 한계가 있고 여러 사람과 제도를 거치는 상황에서는 통치자와 가까울수록 권력을 쥐기 쉬운데 잠자리까지 함께 하는 여인과 그 바로 곁의 환관들을 일반 신하 따위가 이길 수 없다.[30] 흑인 환관은 백인 환관과 달리 고환과 음경 모두가 제거되어 버린 상태인 것으로 추정된다.[31] 아마도 고환만 제거했던 듯. 음경은 남아있어 비록 아이는 가질 수 없어도 여인들의 장난감(...)은 될 수 있었던 모양이며, 조선의 내시들도 대부분 고환만 제거했고 아내도 둘 수 있었다. 그 탓인지 동아시아 내시들은 궁녀들, 더러는 왕이나 왕자의 비빈과도 눈이 맞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32] 물론 망상이 섞인 과장이다.[33] 시오노 나나미는 사피예와 그녀의 시어머니 누르 바누를 혼동해서, 자신의 작품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 사피예의 사적을 누르 바누의 이름으로 적어넣는 짓을 저지른 바 있다.[34] 다만 최근 연구 결과로는 베네치아가 아닌 알바니아인이었던 것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35] 참고삼아 적자면, 미치광이는 맞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한다거나 하는 등의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다만 모후와 애첩들에게 휘둘리며 황제 노릇은 제대로 하지 못했고,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으로 중과세를 거둔 탓에 반란이 일어나 폐위당했다.[36] भाग्यदां प्रसन्नवदनां सौभाग्यदां अभयप्रदां मणिगणैर्नानाविधैर्भूषिताम् । सदा शक्तिभिः ॥ सदा शक्तिभिः ॥ शक्तिभि → (발)번역: 내가 연꽃을 들며, 행복한 얼굴을 지니며, 좋은 운과 운명을 주며, 그리고 자세로 두려움을 물리치며, 그리고 많은 보석으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치장되며 항상 힘이 있는 (락쉬미)에게 경배하니라.[37]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프랑스 출신 나크시딜 술탄. 수녀원에 가는 도중에 해적에게 납치되었는데 프랑스황후였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사촌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여겨지며, 조제핀 황후의 사촌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저 위에 언급된 휴렘 술탄도 원래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성이었는데 크림 칸국의 약탈군에게 납치되어 하렘에 넘겨지는 바람에 강제로 술탄의 후궁으로 살게 된 케이스였다.[38] 한자로는 羊인데 중국 고대에는 양과 염소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지만 양은 거의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고문서에서 양이라고 하면 대부분 염소라고 봐야 한다.[39] 조선내명부에서도 이런 식으로 왕의 승은을 입은 사람은 즉각 후궁에 준하는 신분인 승은상궁이 되었다. 문제는 왕이 하룻밤 잠만 자놓고 나몰라라 하는 경우도 좀 있어서... 이를 보다 못한 중전이 그들을 정식 후궁으로 봉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40] 애시당초 백제 정도 규모의 고대 국가에서 왕이 독점하는 궁녀를 삼천 명이나 데리고 있었다면 나당 연합군이 오기 전에 먼저 백성들이 일으킨 내란으로 망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