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알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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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알제리
Algérie française
الجزائر المستعمرة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150px-Seal_of_the_Government-General_of_Algeria.svg.png
국기
휘장
1830년 7월 5일 ~ 1962년 7월 5일
성립 이전
독립 이후
오스만령 알제리
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위치
알제리
수도
알제
정치체제
공화제
국가원수
프랑스 대통령
정부수반
주지사
통화
알제리 프랑 (1848~1960)
프랑스 프랑 (1960~1962)
언어
프랑스어, 아랍어

1. 개요
2. 지위
3. 역사
3.1. 알제리 점령
3.2. 지배와 개발 및 토착민 차별
3.3. 비시 프랑스 시절
3.4. 독립전쟁
4. 기타
4.1. 일본제국의 식민지들과의 비교



1. 개요[편집]


현대 알제리 지역에 존재한 구 프랑스식민지. 1830년에 성립되어 1962년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 독립으로 해체되었다.

2. 지위[편집]


원주민의 대우는 여타 식민지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알제리만큼은 지배 기간 내내 본토의 일부로 취급하였는데 실제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에 프랑스 본토의 행정구역과 동일한 데파르트망을 설치했고 데파르트망 지사를 파견하여 알제리 지역을 관할했다. 이는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프랑스의 다른 식민지들에서 정부로부터 자치를 위임받은 총독이 실권을 쥐었던 것과 크게 다르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본토로 편입한 이유는 지중해만 건너면 바로 도달할 수 있는 프랑스 본토와 가장 가까운 식민지였던 데다 프랑스 본토와 지리적 환경이 유사하고 각종 자원이 풍부하여 개발 가치가 높은 땅이었을 뿐더러 공식적인 영토가 될 경우 프랑스-알제리 사이의 해역, 즉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길목을 프랑스가 완전히 장악하는 이점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또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삼기 적절하였는데 실제로 프랑스군의 주요 군항과 군수물자 공장들이 위치했으며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 역시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만큼 지정학적 가치가 매우 높았고 또한 유럽과도 가까워 당대 프랑스인들에게도 알제리는 프랑스의 적법한(?) 본토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근시점인 1960년대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프랑스의 집착은 다른 식민지의 독립 과정보다 알제리 전쟁이 훨씬 더 잔인하고 폭압적인 형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의 일부였으므로 알제리의 유권자는 프랑스 국민의회에도 진출할 수 있었지만 당시 프랑스는 시민권자인 프랑스계와 기타 유럽계(피에 누아르), 세파르딤 유대인들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었고 아랍계 알제리인들에게는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레옹 블룸 총리 시절에 연정에 참여했던 공산당사회당의 요구로 알제리 아랍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지배민족의 지위를 잃을 것을 두려워한 피에 누아르들의 극심한 반대에 급진당 의원들이 휘둘리면서 결국 좌초되었고[1] 이전부터 개종을 해야 시민권을 준다는 타협안이 제시되었지만 이에 호응한 아랍계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 본토인 대접받은 사람은 꽤 있었고 이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은데 애니메이션 영화파리의 딜릴리가 대표적이다.

3. 역사[편집]



3.1. 알제리 점령[편집]


알제리 일대는 이슬람화 직후부터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1516년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오스만 치하에서는 명목상의 총독이 있었지만 상당부분 자치적인 형태를 띄었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했을 때는 바르바리 해적들이 지중해에서 대놓고 노략질을 일삼으며 나름 세력을 떨쳤지만,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먹구름이 꼈다.

이를 틈타 서구 열강들은 유럽 본토를 괴롭히던 바르바리 해적을 공격해 쫓아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 왕국의 국왕 샤를 10세는 아예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는 북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당시 오스만 제국의 알자자이르 총독 후세인 이븐 파샤가 자신을 능멸한 프랑스 외교관 피에르 디발(Pierre Deval)의 뺨을 파리채로 때린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후세인 이븐 파샤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이것이 거절당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 왕국은 군대를 보내 알자자이르를 점령했고 후세인 이븐 파샤는 항복했다. 이로서 바르바리 해적은 완전히 토벌되었고 프랑스는 복아프리카 서부 지중해 해안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주요 도시인 '알자자이르'의 프랑스어명 '알제'를 따 '알제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통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제리 정복을 주도한 샤를 10세는 프랑스군의 주력 상당수가 알제리로 가 있는 틈을 타 프랑스 본국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왕 자리에서 쫓겨났다. 새로 등장한 7월 왕정 초반 샤를 10세가 주도한 프랑스령 알제리의 통치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결국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초기에는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출발한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식민 지배 기간 내내 계속되었는데 모로코 왕국, 베르베르인, 투아레그인 등 내륙의 유목민들을 물리치면서 사하라 사막 방면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1936년에 현재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3.2. 지배와 개발 및 토착민 차별[편집]


식민 통치를 하면서 알제리 북부 해안지대가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와 유사한 자연환경[2]을 가졌음을 파악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를 제2의 프랑스로 만들어 영구히 지배하겠다는 계획으로 강력한 프랑스화 정책을 추진했다. 알제리 내륙이 건조하고 척박한 것과 다르게 해안지대는 겨울에 춥지도 않으면서 여름에는 지나치게 덥지도 않고 비가 적당히 와서 토질이 비옥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화에 발맞춰 수많은 유럽인[3]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대거 알제리로 이주했는데 식민 통치가 끝날 무렵인 1950년대 말 이들 유럽계 이주민들의 수는 알제리 인구 1000만 중 100만 명 이상이었다. 중세부터 알제리에 거주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잽싸게 프랑스 식민통치의 지지자가 되었다.[4] 알제오랑 등의 알제리의 주요 도시들은 유럽 도시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는데 당시 이주해 온 유럽인들이 이 도시들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검은 발이라는 뜻의 피에 누아르(Pied-Noir)라 불리며 식민 지배 시기 알제리 사회에서의 기득권을 독차지했다.

피에 누아르들은 사막에 물을 끌어올려 개간해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녹림과 밭으로 만들었고 포도 등을 재배해 프랑스에 수출하여 많은 이득을 얻었다. 수출용 제조 공장들도 다수 있었다.

알제리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프랑스 공군, 육군, 해군의 주요 군항과 많은 군수물자 공장들도 알제리에 있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외인부대가 여기서 시작했고 이 최정예 부대의 본거지였다.

물론 현지 토착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은 차별받았다. 현지인들은 유럽계 이주민보다 높은 세금을 내야 했고 알제리의 유럽계 이주민들은 현지인들을 열등하고 나태한 민족으로 보았으며 '쥐새끼'라고 부르면서 공공연히 경멸했다. 프랑스 지배 이전 현지인들은 부족 단위로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프랑스는 현지에서 사유재산권을 확립하면서 공유재산인 부족 재산의 처분에 대해 제약을 가했고 이런저런 구실로(주로 프랑스 통치에 반항했다는 이유) 현지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유럽계 이주민에게 매각했다. 공업에 있어서도 프랑스 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알제리를 산업의 원료가 될 자원의 공급지와 자신들의 공업 상품을 팔아줄 시장으로 두었으며 이를 위해 현지인들이 공업 자본가가 되는 것을 방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맞서기 위해 알제리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했는데 이때 28만 명 정도의 알제리인들이 프랑스군에 징병되어 참전했고 약 8만 명 정도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많은 수의 알제리인들은 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알제리는 많은 인력을 희생하고 물자를 제공했지만 하지만 전후 프랑스 본국은 알제리에 대한 푸대접을 이어갔다.

프랑스 극우 진영과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 일부 우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근대화했다고 주장하지만 프랑스의 인프라 투자는 피에 누아르들이 대거 정착한 식민도시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작 알제리 현지인들은 비옥한 해안가의 옥토들을 빼앗기고 추방당한 뒤 내륙의 척박한 토지를 경작해야 했다. 피에 누아르들의 소득이 계속 증가하던 것과는 반대로 알제리 현지인들의 소득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계속 감소했으며 피에 누아르들에게만 평등 교육이 진행되고 무슬림들을 일부러 학교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등 차별적인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알제리 독립 이후에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엘리트 대우를 받거나 교사를 할 수 있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등 알제리 토착민들이 차별받자 토착민들은 '알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을 각성해 알제리 민족국가, 즉 독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실 프랑스 점령 이전까지는 같은 알제리 지역에 살아도 '알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이 희미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자체적인 국가가 있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알제리 전역을 확고하게 통일한 왕조가 없었다. 15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명목상으로 알제리 전역을 통치했지만 중앙집권적인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고 지역 유력자들을 명목상 태수로 임명해 자치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했다.


3.3. 비시 프랑스 시절[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본국은 나치 독일무력하게 점령당해 비시 프랑스 정부가 들어섰으며 샤를 드골 등의 주전파는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 정부를 세웠다. 프랑스령 알제리는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비시 프랑스를 따랐다.

그러나 1943년에 연합군지중해 전선을 안정시키고 이탈리아를 위협하기 위해 횃불 작전을 벌여 알제리를 공격했고 연합군은 비시 프랑스군 내 일부 자유 프랑스 내통자들의 협력을 얻어 알제리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제리는 자유 프랑스 및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하기 이전까지 자유 프랑스의 거점이 되었다.


3.4. 독립전쟁[편집]


그러나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것, 그리고 자유 프랑스가 알제리를 되찾고 나서 알제리에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통치를 이어가면서 알제리인들의 독립 열망에 다시 불이 붙었다. 자유 프랑스군에는 알제리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프랑스를 위해 독일군과 싸웠지만 정작 그들이 알제리에서 본 것은 독립 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탄압받고 학살당하는 동포들이었다.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그리고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등 다른 식민지들은 다 내주더라도 본토로 여겼던 알제리만큼은 내주지 않으려 했다. 알제리 독립 시위대를 탄압한 것을 계기로 독립 열기가 높아지자 프랑스는 독립 대신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는데 알제리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유럽계 피에 누아르와 나머지 알제리 현지인에게 같은 숫자의 의석이 배당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했으며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일단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에 숨죽여 지냈다. 그러나 2차 대전에서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알제리인들이 속속 알제리로 들어오고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북베트남군에 추하게 패배하자 알제리인들은 참전자들을 중심으로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해 8년간 프랑스와 격렬한 알제리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군은 FLN에 대해 군사적으로 내내 우위를 점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알제리인 학살과 탈식민주의 바람 등으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국제 여론은 점점 악화되었는데 특히 튀니지[5]와 아랍 국가들, 소련이 연일 프랑스를 비난하면서 알제리 독립에 힘을 보탰고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프랑스군도 67만 대군 중 9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면서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 억지로 징집되어 싸우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알제리에서 똑같이 전쟁을 치르면서 징병 기피자들만 늘어갔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수에즈 전쟁까지 벌여 결국 1958년에 프랑스 제4공화국이 무너지고 샤를 드골개헌을 통해 신임 프랑스 대통령이 되면서 알제리에 대한 독립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권을 잡은 드골 정부는 알제리에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의 세 가지 제안을 내놓았고 알제리 독립세력은 이에 3번안을 선택하여 1962년 에비앙 협정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

독립 과정과 그 직후 프랑스군에 복무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싸운 알제리인(Harki/아르키)들은 보복으로 학살당하거나 프랑스 본토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은 상당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정착해서 좀도둑이나 막노동일에 종사하며 빈민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피에 누아르들도 보복을 당해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은 아르키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으나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피난오는 과정에서 파산한 사람들이 많기는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알제리에서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는 프랑스 본토로 피난 온 후에 명목상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4. 기타[편집]



4.1. 일본제국의 식민지들과의 비교[편집]


프랑스령 알제리를 차지한 프랑스와 조선을 차지한 일본 제국 간에는 제국주의 국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지만, 관동주대만이라면 몰라도 정작 식민지배를 받아 온 조선알제리간의 공통점은 식민지배 과정이나 식민제국의 처우를 제외하면 전혀 없다. [6]

알제리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이었던 반면[7] 조선은 고유한 주권과 민족성이 존재하는 주권국가였다는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우선적으로 두 지역 모두 식민제국의 본토와 바다를 두고 접하고 있기에 지정학적으로 대륙 진출이 용이하다. 한반도황해와 맞닿아 있고 만주로 진출이 가능하며 알제리 역시 지중해와 맞닿아 사하라 사막 등 아프리카 내륙 진출에 유리하다.

식민제국 본토와 식생이 크게 다르다. 알제리의 경우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프랑스 본토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프랑스 남부와 알제리 북부는 지중해성 기후를 공유한다. 마찬가지로 일본 본토와 한반도 역시 좁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으며 같은 기후대로 분류되기 때문에 한반도, 특히 삼남 지방은 일본 기후와 유사하다. 다만 전반적으로 알제리는 본국 프랑스에 비해 더운 반면 한반도는 일본 본토보다 춥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식민제국 본국의 대우도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여타 식민지와는 달리 본토의 연장선으로 보아 프랑스 본토의 행정망인 데파르트망을 그대로 이식하였다. 일본도 비록 조선을 외지로 취급하였으나 여타 식민지와는 달리 후에 본토의 일부로 만들 작정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1945년 항복 직전에도 조선과 대만 수호를 천황제 유지 다음 2순위 조건으로 내걸었으며 관동대지진 이후에는 조선의 경성 일대로 천도를 고려할 정도였고 프랑스 역시 전쟁까지 치르면서 알제리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또 식민지 상실 이후 히키아게샤피에 누아르라는 다수의 실향민이 발생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그리고 우선 양 지역의 정치체계가 다르다. 상술했듯 프랑스는 알제리를 본토의 연장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데파르트망이라는 고유의 행정망을 적용했지만 일본은 조선 본토화가 구상 단계에 그쳤을 뿐 엄연히 외지로 대우하였고 총독부라는 별도의 행정기관을 통해 본토와 다르게 통치하였으며, 도시 지역에 한해 일본식 행정구역인 정(町)과 정목(丁目)을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존 대한제국의 행정구역 체계를 큰 변경 없이 거의 그대로 유지하였고 단 한 번도 본토와 같은 행정망을 이식한 적이 없다.[8][9]

정복 과정도 꽤 차이가 많은데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을 뜯어낸 반면, 일본은 주권국이었던 조선을 통째로 식민지로 삼았다.

또 지배 기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프랑스가 바르바리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알제리 정복 사업을 시작한 시점은 1830년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초창기였던 반면 일본은 고작 제국주의 시대의 끝물 시점인 1895년 청일전쟁을 통해 대만을 점령하고,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프랑스는 한 세기 넘게 알제리를 지배했으나 일본의 식민지배는 그나마 가장 긴 대만조차 50년 동안 통치하였다.

독립 경로도 상당히 다르다. 조선은 일제의 2차 대전 패전이라는 외부적 결과가 독립 향방을 좌우했지만 알제리는 격렬한 투쟁으로 프랑스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알제리는 그나마 분단 되는 참사는 면했으나 조선은 후에 미국과 소련에 의해 반토막 났으나 독립 5년 후에 북한의 침공으로 전쟁이 나는 비극이 일어났다. 물론 알제리도 1990년대 초에 내전이 일어나긴 했으나 나라가 분단되거나 국가의 일부가 독립해나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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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배하던 시절은 프랑스 본토에서조차 여성참정권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2] 실제로 알제리의 이웃국가인 튀니지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빈번해지기 전인 2013년 무렵까지도 프랑스인들이 휴가철마다 즐겨찾던 휴양지였다.[3] 많은 수가 프랑스 혈통이었지만 스페인, 몰타 등의 혈통도 있었다.[4] 오늘날 프랑스 유대인의 상당수는 세파르딤 유대인이며 프랑스 세파르딤 유대인의 과반수가 바로 알제리 독립 이후 프랑스로 건너온 알제리 출신이다. 프랑스 유대인은 원래 아슈케나지가 다수였으나 홀로코스트로 인해 수가 크게 줄었다.[5] 이때 튀니지가 독립을 지지한 것 덕분에 지금도 알제리와 튀니지는 이웃나라치고 이례적으로 사이가 좋다.[6] 조선그 이전의 역사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등 어느 정도 민족 정체성을 지닌 국가들이 있었으나, 알제리는 역사적으로 고대 카르타고, 로마 제국,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아 '알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의 일부였다가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은 대만관동주알제리의 역사와 훨씬 비슷하다.[7] 물론 오스만 제국이 그다지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아니었고 거리도 멀었으므로, 오스만 제국의 직접 통치가 강하게 미치기보다는 주로 현지 토착세력이 자치를 하는 지역이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식민제국이라는 근본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8] 프랑스는 알제리를 내지로 간주하여 자국식 지방행정 제도를 도입한 반면, 일본은 조선과 대만을 엄연한 외지로 간주해 본토와는 다른 행정망을 적용하고 예외적으로 일본인이 정착한 도시 지역에 한해서만 극히 제한적으로 일본식 행정구역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일본도 조선에 본토식의 행정체계를 적용하려는 구상까지는 부분적으로 실행되어서 본래 지역 구분에 불과했던 면(面)에 행정기구의 지위를 부여하고 지정면제를 실시해 본토의 시정촌제와 유사한 형태로 지방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일본식 행정망의 전면적인 이식은 식민지배가 끝나는 순간까지 구상조차 되지 않았다. 오히려 본래 외지였던 지역을 종전 직전 내지로 전환한 가라후토의 사례가 알제리와 행정적으로 더욱 유사하다.[9] 덧붙이자면 프랑스령 알제리의 식민지화 과정처럼 청나라의 영토를 뜯어내 식민지로 만든 대만의 경우는 행정구역 설치 과정이나 형태가 조선과는 다소 달랐다. 조선의 경우는 대한제국의 13도 체계를 식민지배가 끝날 때까지 미미한 경계 조정을 제외하고는 수정 없이 그대로 유지했고, 그 하위 행정구역의 경우에도 군의 구획 정리와 부의 성격 및 영역 수정, 면에 행정기구의 지위 부여, 읍(邑)제 실시 정도의 개편만을 실시했다. 그러나 대만의 경우 식민지화 후 기존 청의 행정구역인 3부 11현 4청 1직례주 체계에서 행정구역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제각기 다른 형태로 광역 행정구역의 재편을 반복하다가 1926년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최상위 행정구역을 5주 3청으로 정비하고 주/청-시/군/지청/-가/장/번지로 구성되는 행정구역 체계를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