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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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백제 말기의 백제부흥운동 지도자이자 당나라의 무장. 자는 항원(恒元). 흑치준의 아버지.
백제 서부(西部) 사람으로[4][5] 묘지명에는 흑치상지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묘지명에 따르면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흑치문대(文大)[6] , 할아버지는 흑치덕현(德顯), 아버지는 흑치사차(沙次)이다. 묘지명에는 원래 부여씨로부터 나왔지만 흑치(黑齒)에 봉해져 자손들이 성씨로 삼으면서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7] 좌평을 역임하지 못했으니 최상위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장관급을 배출한 차상위 귀족 집안이라 할 수 있다.
《구당서》나 《신당서》의 흑치상지 열전에는 흑치상지의 키가 7척[8] 이고[9] 묘지명에는 "날래고 용감하면서도 지략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고상하고 기질,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다. 기호, 욕망을 가볍게 여기면서 명예, 가르침을 중하게 여겼고 가슴 속에는 깊은 마음을 가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으며 정감의 폭이 넓어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면서도 신중함, 성실함, 온화함, 선량함을 가졌고 그의 성품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면서도 스승,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다.[10]
이다조[11] 와 왕방익[12] , 정무정[13] 과 함께 배행검의 추천으로 발탁되었다.
2. 생애[편집]
어려서 소학(小學)에서 <춘추좌씨전>, <한서>, <사기> 등을 읽었고[14] 20세도 되지 않아 집안 대대로 맡아온 관행에 따라 달솔(達率)이 되었고[15] 풍달군장(風達郡將)[16] 을 겸하게 되었는데 660년에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소정방은 늙은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자, 태자를 가두고 군사를 풀어 백제인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를 보다 못한 흑치상지는 주위에 있던 10여 명과 함께 숨어있다가 자신의 본부(서부)로 피신해 흩어진 사람들을 모아 임존성[17] 을 지키면서 목책을 쌓고 견고하게 지켰다. 기록에 따르면 1달도 채 되지 않아 임존성에 귀부한 무리가 3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소정방이 공격했지만 이를 상대로 승리해서 20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고 한다.[18]
사타상여와 함께 험한 곳을 점거해 부흥군 지도자 귀실복신에게 호응했지만 663년 귀실복신이 풍왕과 대립하다가 처형되고[19] 풍왕이 불러들인 왜의 구원군마저 백강 전투에서 대패해 풍왕이 고구려로 달아나 부흥군의 거점은 사실상 임존성 하나만 남게 되었다. 흑치상지는 사타상여와 함께 자신의 무리를 인솔하여 항복했고[20] 항복 당시 당나라군의 지휘관 유인궤는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무기와 식량을 주며 임존성을 공략할 것을 명했고 당나라에서 수군을 이끌고 왔던 손인사가 "그들이 무슨 야심이 있을 줄 알고 그들에게 무기에 식량을 대주겠는가? 한 번 배신한 놈들은 믿기가 힘들다."라며 반대하자 유인궤는 "내가 봐서 아는데 그들은 당나라에 대한 충심과 지모가 있어서 믿어주면 공을 세울 것이다. 그러니까 두 번 다시는 배신 못하게 도망칠 곳부터 없애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에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유인궤의 명을 수락해 지수신이 남아있는 임존성의 백제 부흥군을 공격했다.
묘지명에는 이후 664년에 절충도위가 되어 웅진성을 지키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672년에는 충무장군,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가 덧붙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지절, 사반주제군사, 사반주자사[21] 로 옮겼다가 상주국에 임명되었다고 되어있다. 670년 신라와 당 사이에 나당전쟁이 발발했고 흑치상지도 이 때 당나라 치하 웅진도독부의 신하로서 신라군과 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결국 신라의 공세가 강화되어 웅진도독부도 안동도호부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쫓겨나 그 간판만 요동의 건안 옛 성으로 옮기면서 흑치상지도 백제 땅을 떠나야 했다.
당에서는 본적을 경조(京兆) 만년현에 받아 만년현인에 소속되었다. 지극히 공평한 것을 소임으로 삼으면서 사사로움을 잊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고 하며 당고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좌령군장군, 웅진도독부사마로 임명했고, 부양군 개국공 식읍 2천호를 덧붙여 봉해졌으며, 묘지명에는 당 고종이 그의 선함을 칭찬하며 지조(?)와 학식 있는 군자로 대우했다고 하는 등, 당에서의 인망이 높아졌다.
의봉(儀鳳) 2년(677년)에 토번이 당을 공격하자 유인궤의 부장으로써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로서 참전한다. 의봉 3년(678년) 9월 12일에 당의 이경현, 유심례 등이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에게 패하여 유심례가 전사, 이경현은 지금의 칭하이성 시닝(西寧) 부근의 승풍령이라는 고개에서 포위되었는데, 흑치상지가 밤에 결사대[22]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을 습격해 격파, 이경현을 구해낸다(승풍령 전투). 이 공로로 흑치상지는 좌무위장군, 하원군부사로 임명되었다. 조로 2년(680년) 가을 7월에도 하원을 노략질하는 토번의 가르친링을 다시 한 번 물리쳐 유인궤, 이경현의 대사(大使) 보직을 넘겨받게 되었으며, 개요 원년(681년) 여름 5월 21일에는 토번의 논찬파를 양비천에서 격파하고(양비천 전투) 양식, 가축 등을 거두어 돌아갔다. 흑치상지가 하원군에서 지내는 7년 동안 토번에서는 함부로 변경을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또 공을 세워 좌응양위대장군(左鹰揚衛大將軍)[23] 으로 승진한다.
684년[24] 11월 4일에는 강남도대총관이 되어 서경업을 토벌한다.
수공 2년(686년), 돌궐의 골돌록이 하동도(河東道)를 공격하자 흑치상지는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總管)이 되어 양정(兩井)에서 2천 기병을 거느려 돌궐군 3천을 상대로 승리한다.
수공 3년(687년)에 돌궐은 다시 당의 삭주(朔州)를 침공했는데, 흑치상지는 이때 연국공, 식읍 3천호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로서 이다조(李多祚), 왕구언(王九言) 등을 부장으로 거느리고 돌궐과 전투, 황화퇴(黄花堆)에서 돌궐을 크게 쳐부수고 다시 40여 리를 뒤쫓아 돌궐을 사막 쪽으로 몰아내버렸다.
그런데 당시 우감문위중랑장(右監門衛中郞將)이던 찬보벽(爨宝璧)이 조정에 표를 올려 돌궐 잔당을 마저 칠 것을 청했고, 측천무후도 흑치상지에게 다시 항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써 찬보벽과 함께 군을 합쳐 함께 돌궐을 쫓게 했는데, 찬보벽은 공을 탐내어 흑치상지와의 사전 회의도 없이 홀로 진격해 당군 1만 3천 명이 궤멸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흑치상지가 당의 무장으로 복무하면서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패전이었다. 이 패전 책임을 물어 찬보벽은 처형당하고 대장 흑치상지도 심문 받던 도중, 혹리 주흥(周興) 등이 흑치상지가 응양장군 조희절과 짜고 반역했다고 모함하는 바람에 투옥당하고, 689년 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25]
흑치상지가 죽은 뒤 아들 흑치준이 나서서 아버지를 구명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흑치상지는 가까스로 역적의 누명을 벗고, 낙양의 북망산에 묻힐 수 있었다. 참고로 의자왕, 연남생 등 삼국통일전쟁기 인물 중 북망산에 묻힌 사람이 많다.
3. 평가[편집]
鶴唳風聲奔北日 학 울음 바람 소리에 북으로 달아나던 날
任存城主抗唐兵 임존성 성주는 당나라 군사에 항쟁했다네
曹蜍李志生猶死 조여(曹蜍)나 이지(李志) 같은 이는 살아서도 죽은 목숨[26]
福信雖亡擅美名 복신은 비록 망했지만 미명을 독차지했네.
-남효온 <추강집>권3 부여회고(扶餘懷古) 10수 중 아홉 번째
흑치상지는 《삼국사기》에 열전이 실린 백제인 중 한 명이다. 그것도 백제인 중엔 가장 먼저 나온다.[27] 이마저도 중국 기록의 복붙에 불과한 수준이다.
1929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된 흑치상지의 묘지명에서는 "품성이 빼어나고 굳세면서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했으며, 힘으로는 무거운 빗장을 들어올릴 수 있었고 지혜로는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지만 자랑하거나 떠벌리지 않았다."거나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내면서도 어리석은 것처럼 하면서 인격을 수양했으며, 그때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어질면서도 간사하지 않고 위엄을 갖췄지만 다른 사람을 해지지 않고 상벌은 원칙에 따르면서 선을 권하고 악을 말리는 것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오륜의 커다란 본보기를 이루고 삼군의 크나큰 복이 되어 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함부로 어기지 않으면서도 아랫 사람들은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음악, 여색을 곁에 두지 않으면서 평상시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도 않는 등 금욕적이었으며, 경서를 읽는 것을 즐기면서 예의를 중시하고 뛰어난 지략을 품었다."는 등으로 그의 행적을 찬미하고 있다.
구당서나 신당서에도, 자신의 말을 채찍으로 때린 병사를 처벌하자는 부하의 권고에 "내 개인의 말 때문에 관아의 병사를 매질할 수는 없다"며 넘어갔고, 군공으로 포상을 받으면 모두 부하 장교,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자신에게 남기는 것은 별로 없었다는 일화도 적고 있다.
"흑치상지는 (당에) 항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동료였고 한때는 그 지역에서, 당군에 대항해서 싸웠던 그 지역을 함락시키는 데 앞장을 선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 흑치상지의 행동은 부흥군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입니다."
-- 계명대학교 사학과 노중국 교수의 평, KBS 역사추적 '비운의 무장 흑치상지, 그는 배신자인가' 인터뷰 中[28]
다만 흑치상지의 개인적인 능력과는 별개로 그의 행적만큼은 노중국 교수의 평처럼 '배신자'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백제 부흥 운동 당시 흑치상지의 행적을 직접적으로 비유하자면 대한제국의 군인이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본의 작위를 받았다가 마음을 바꿔 의병(또는 독립군)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다시 일본군에 항복해 독립군 소탕에 앞장서서 일본군 장성으로 출세한 격이며, 무엇보다 본인도 한때 백제 부흥군이었으면서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로 그 자신이 처음 부흥운동을 일으킨 곳이었던 임존성을 자기 스스로 당의 지원을 받아 공격해서 함락시킨 것은 뭐라 쉴드를 칠 수도 없는 빼도 박도 못할 배신자+매국노 인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그의 열전이 실린 것에 대해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이에 대해서도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영웅인 귀실복신은 열전을 안 썼으면서 백제 부흥군을 배신하고 진압하기까지 한 흑치상지는 열전을 써 넣었다"며 까기도 했다.[29]
흑치상지를 옹호할 만한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살았던 시대가 너무 막장으로 흘러갔다는 점. 백제 말기 의자왕의 행적은 물론 현대에는 단순한 폭정이 아닌 왕권 강화의 일환이라는 나름 좋은 쪽의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서자 41명을 중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흥수와 성충 같은 옛 신료들의 숙청, 은고부인과 관련된 행적, 부여융에서 부여효로의 태자 교체 등 상당히 급진적이면서도 무리한 왕권 강화를 시도한 것 자체는 대체로 사실로 간주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정치적 혼란은 물론 처음에 백제 땅에서 당의 점령지 처분이나 학살도 만만찮았지만 백제 부흥군 안에서도 정작 부여풍과 도침, 귀실복신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복신이 다시 풍왕에게 죽는 등 거의 막장에 치닫는 부흥군의 내부 분열이 흑치상지의 눈에 아니꼽게 보였을 수도 있고 그것이 백제 부흥운동 자체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30]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흥운동 자체를 비하하고 좌절한 나머지 백제 부흥 자체를 부정하고 그 진압에 나서고 만 흑치상지의 행동은 흑치상지 스스로가 가진 논리의 모순을 보여준다.
"정말 흑치상지는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하고 그냥 용병으로써 이용만 당하다가 그냥 죽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그렇잖아요. '이러자고 조국을 배신했을까?' 무상한 거예요."
-- 류근 시인의 평. KBS 역사저널 그날 제105화(2016년 1월 3일자 방송분) 고대사 인물열전 '선택' 1편에서
다만 이러한 비판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의 눈으로 나라가 망하는 걸 지켜보고, 부흥군에 가담했다가 변심해서 자신의 옛 동지를 자기 손으로 처단하고, 그 공으로 기껏 장교까지 임용되었다가 역모죄로 몰려 자살했으니. 당은 백제를 점령한 뒤 신라에 할양하지 않고 웅진도독부를 세워 백제 태자였던 부여융을 도독으로 삼아 통치하게 했는데 이것이 당의 괴뢰정권이긴 했으나 백제의 근본적인 멸망 원인이 당과의 단교였던 것으로 봤을 때 이는 당시 부흥운동의 실패 이후 신라에게 합병되지 않고 백제의 존속이라도 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유일한 방안이었다. 하지만 웅진도독부의 설치 목적이 단순히 백제 부흥이나 존속보다는 신라에 대한 견제용으로[32] 의자왕 이전의 독립국로써의 백제라기보다는 당의 일개 기미주로써의 성격이 강했기에, 진정한 의미의 백제 부활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더구나 신라가 나당전쟁을 시작하고 웅진도독부가 다스리던 옛 백제 땅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펼치면서 그런 식으로라도 백제를 존속시키려 했던 희망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다.
백제 부흥은 물 건너 가고 당으로 건너가 토번이나 돌궐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등 무장으로써 어느 정도 정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흑치상지가 섬겼던 군주가 하필이면 숙청 내지 무고를 적극 장려하며 자신의 정치권력에 이용해 먹었던 유명한 측천무후였다. 《신당서》에서는 흑치상지의 죽음을 전후해 숱한 번장들이 죽임을 당하는 기록이 쏟아지는데, 이민족으로써 출세했다 한들 중국에서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는 늘 흑치상지를 따라다녔던 것이다.[33] 전공을 세워 출세한다 해도 흑치상지는 당에서 죽는 순간까지 이방인일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부흥보단 오히려 신라에 편입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라고 하지만, 비교적 포용적이었던 문무왕은 몰라도 이후 왕위를 이어받은 신문왕이 펼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는 개혁과 왕권 강화책 앞에서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순 없었을 것이다. 혹은 장보고처럼 당나라에 있다가 신라로 다시 돌아오는 방식이 있는데, 알다시피 장보고의 경우도 흥덕왕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반란군을 진압하고 서남해안 일대 해적들을 소탕했으나 신무왕의 죽음으로 진골 귀족들과 서남지역 호족들이 결탁하여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대체로 신라 정통론자들의 경우도 장보고와 비교를 하며 흑치상지를 까는 경향이 짙다.
은근히 일제 말의 홍사익 중장에 비유되기도 하는 모양. 홍정선의 중국기행(세계일보 연재)
처세와 행적의 평가와는 별개로 장수로서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탑급이었다. 수당 쟁패기, 동돌궐, 서돌궐, 토욕혼, 토번, 백제에 이르기까지 50년 경력 동안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소정방이 낭패를 본 경험이 2번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흑치상지다.[34] 백제 부흥군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무주 정권의 대표 무장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35]
7세기 후반 당나라의 주 전선이었던 돌궐과 토번, 그리고 서경업의 난 등 굵직한 전쟁마다 이름이 올라가 있다. 특히 가르친링으로 대표되는 각국의 반당파 무장들에게 당나라 장수들이 망신을 당했는데 그 가르친링이 최전성기였던 와중에도 흑치상지가 전선에 부임한 7년 동안은 토번이 설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36]
또한 여러가지 일화를 보면 보급, 경영, 행정에 관한 능력도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백제에 있을 당시 일종의 지방영주 격 가문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소양인 듯 하다.
4. 가족관계[편집]
- 증조부 흑치문대(黑齒文大): 생몰년도 미상.
- 조부 흑치현덕(黑齒德顯): 생몰년도 미상.
- 부친 흑치사차(黑齒沙次): 생몰년 미상. 흑치상치의 출생년(630년)을 볼 때, 늦어도 7세기경 초반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 아들 흑치준(676년 ~ 706년)
-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흑치씨: 흑치상지의 둘째 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후일 백제 유민출신인 물부순과 결혼해 4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링크
- 사위 물부순
낙랑군부인 흑치씨가 둘째 딸(中女)인 점을 보면 딸이 3명 이상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 일제강점기의 문인 현진건이 흑치상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명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조선총독부 검열로 중지당한 일이 있다.[37] 소설 흑치상지 연재의 좌절은 현진건을 죽음으로 몬 사건이기도 한데, 검열 이후 상심한 현진건은 폭음을 더욱 가속해 결국 장결핵으로 운명하고 만다.
- 게임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결사계백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병과는 경기병. 능력치는 무력 87, 지력 68, 통솔 92, 민첩 77, 행운 85. 본래 플레이어블로 등장할 예정이었다가 제작진이 한국사 고대무장이 출시되면 능력치 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결국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다. 데이터상의 장수 특성은 연속공격 강화 15%/주위방해로 굉장히 좋지 않았다. 이렇게 나와봤자 안 그래도 경기병계는 장료, 관영, 태사자 등 네임드 장수가 집중된 병종이라 이런 장수를 쓸 이유가 성능면에서는 전혀 없기 때문에 섬멸전이나 경쟁전 등 여러 콘텐츠에서 고인 확정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건 극초창기에 이득규 개발자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고 만약 정식 등장했다면 항우 때 그랬던 것처럼[39] 좋은 전용 특성으로 바뀌어 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실제 나이를 무시하고 무왕 재위 초반 시절부터 등장해 계백, 강달, 임자 등과 동기로 나온다. 때문에 의자왕 재위 시절에도 중견 무장으로 활동하며 648년 전역에서 의직 대신 사령관으로 나와 김유신에게 털리는 굴욕을 당한다.
- 2007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배우 최상훈이 연기했다. 망국의 유민 출신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기에 같은 망국 유민인 대조영을 도와주려 애쓰지만 후에는 측천무후에게 숙청당하면서 최후를 맞았다. 다만, 기록에서는 옥에 갇혀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한 것과는 달리 드라마에서는 다른 번장들과 함께 참형에 처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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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영웅 이야기 편에서도 인상적으로 다루어진 인물인데 영웅인지 배신자인지에 대한 평가가 갈린다고 나오기는 했지만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스스로 부흥군을 칠 때 눈물을 흘리며 미안해하거나 측천무후 때 죽은 것도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는 등 은근히 비운의 영웅 쪽으로 밀어주는 면이 있고 인물상 자체는 고결하게 묘사되었다. 부흥군이 궁지에 몰려 첫 근거지였던 임존성만 남았을 때 지수신과 나눈 것으로 나오는 대화는 이렇다.
지수신: 장군, 끝까지 싸워 백제인의 기개를 보여 줍시다.
흑치상지: 장수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그저 부끄러울 뿐이오. 과연 우리가 버틸 수나 있겠소?
지수신: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계백 장군은 5천의 군사로 5만의 신라군과 싸웠소.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어야지요.
흑치상지: 이 세상에 구차한 목숨이 있겠소? 미물이 살아가는 것도 자연의 섭리이거늘...
지수신: (문을 나서려는 흑치상지에게) 이제 와서 백제를 저버리겠다는 말씀이오, 장군?
흑치상지: 백제인으로 태어나 어찌 이 땅을 부정할 수 있겠소. 우리 집안은 대대로 달솔을 지냈소. 다만 이것이 하늘의 뜻은 아닌지...
지수신: 장군!
흑치상지: 백성과 병사들을 헛된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옳은 길인지 뒷날을 기약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할 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