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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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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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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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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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洪思翊(こう しよく[1] | Hong Sa-ik


파일:/pds/200907/25/24/c0039224_4a6b08e8ec763.jpg
1941년 소장 시절

출생
1889년 3월 4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
(現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
사망
1946년 9월 26일 (향년 57세)
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2]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14년 5월 28일 ~ 1945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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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父 홍이유, 母 진주 류씨
배우자
조숙원(사별)[1]
이청영(재혼)[2]
가족
형 홍사용[3]
장남 홍국선[4], 차남 홍현선[5]
종교
개신교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최종계급
중장 (일본 제국 육군)
참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1. 개요
2. 생애
2.1. 출신
2.2. 군인의 길
2.3. 초급장교 시절
2.4. 육대 재학
2.5. 육대 졸업 이후
2.5.1. 푸대접?
2.5.2. 유일한 조선인 장성?
2.7. 패전과 전범재판
2.8. 사형 판결
2.9. 사형 집행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
3.1. 동기들과의 약속
4. 여담
4.1. 창씨개명 거부
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
4.3. 탈영병 잡으러 갔더니 투스타가 나왔네?
4.4. 가족의 뒷이야기
4.5.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시절 군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서 유일하게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일본육군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 육군 중장에 올랐으며, 일본제국 패망 후 전범재판소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 생애[편집]



2.1. 출신[편집]


1889년 3월 4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에서 자작농이던 아버지 홍명유(洪命裕, 1851. 11. 12 ~ 1895. 3. 5)와 어머니 진주 류씨(1852. 5. 19 ~ 1924. 12. 29)[3]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6살 되던 해인 1895년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많던 형 홍사용(洪思容, 1871. 9. 10 ~ 1940. 11. 3)의 손에서 컸다. 본래 집안은 문관을 다수 배출한 양반 출신으로 그 가풍은 남아 있었으나 이 시점에는 많이 쇠락한 상태였다. 어릴 때는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열심히 배워 후일에도 사서삼경을 다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형 역시 홍사익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2.2. 군인의 길[편집]


당시 대한제국군 헌병 정위(正尉)로 있던 족숙(族叔) 홍중유(洪中裕, 1880. 9. 14 ~ ?)의 권유로 군인이 되려는 뜻을 품고 상경하여 1904년에 대한제국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이어 1909년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대한제국군의 장교 양성 사무가 일본군으로 넘어갔다. 이에 무관학교 2학년이던 홍사익은 일본 육군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敎;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예과 과정에 해당) 3학년에 편입하여 계속 교육을 받는다.

이때 편입한 인원은 홍사익을 포함한 2학년 15명, 1학년 29명으로 총 44명이었다. 한국인 생도들의 복장 및 교육 과정은 일본인 생도들과 같았으며, 일본인 생도들이 붉은색 표장을 달고 있는데 반해 분홍색 표장을 달고 있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대한제국1910년 8월 29일부로 막을 내리게 되면서 유학중이던 생도 전원은 일본군으로 편입된다. 분홍색 표장은 붉은색으로 바뀌고, 한국학생반은 해체되어 일본인 생도들과 섞여서 교육받게 되었다. 동기생 중 일부는 이때 분을 이기지 못하고 퇴교한다.

1912년 5월에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제국군 규정에 따라 6개월간 사병으로 복무한 뒤 12월에 사관학교(본과 과정에 해당)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견습사관으로 6개월간 복무한 뒤 12월에 정식으로 소위로 임관한다. 졸업 당시의 성적은 전체 중 22등, 유학생 13명 중에는 수석이었다. 유학생 중 차석인 이응준은 전체 성적 26등 혹은 32등이다.


2.3. 초급장교 시절[편집]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 막 참전한 상태였고 동기생들 중 지청천칭다오 공략에, 이응준과 염창섭은 시베리아 출병에 나가는 등 일부 전선에 나갔으나 홍사익은 줄곧 도쿄에서 근무한다. 그것도 자타공인 최고 엘리트 부대라 할 수 있는 1사단 1연대였다. 홍사익은 유년학교 졸업 후 사병복무부터 줄곧 1연대에서만 복무했다.

1919년 6월에는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으로 전보된다. 그리고 1920년 12월에는 육군대학교에 단번에 합격한다. 완전히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 것이다.


2.4. 육대 재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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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홍사익. 매일신보 3면지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 일본 육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홍사익이 일본 육군 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짐작케 해주는 부분이다.

일제강점기 36년간 육대를 졸업한 조선인은 단 4명뿐이었다. 이중 3명은 왕공족으로, 평민은 홍사익 뿐이다.

  • 영친왕 : 고종의 7번째 아들이자 순종을 이은 마지막 황태자. 일제 당시 호칭은 이왕세자(1910~1926) → 이왕(1926~1945). 중장까지 진급했다. 광복 후 일본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죽었다.
  • 이건 : 고종의 셋째 아들 의친왕의 서장자. 중좌로 종전을 맞았다.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화한다.
  • 이우 :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6살 때 5촌 당숙이자 운현궁의 주인으로 자식이 없었던 영선군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준용이 가지고 있던 공(公) 작위를 물려받았다. 광복 직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사망했고, 당시 계급은 중좌였다.
  • 홍사익

홍사익은 육대 35기로, 당시 경쟁률은 약 10:1이었으며 합격자는 72명이었다. 육대 동기 중에 영친왕이 있었기 때문에 영친왕의 어학우로서 합격이 가능했다는 시각이 있지만, 육대는 실력이 떨어지는 자를 어학우라는 이유만으로 합격시켜 줄 만큼 녹록한 곳은 아니다. 조선인을 합격시켜도 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고는 하나, 결국 통과되었다.

이후 조선인으로 육대에 입학한 사람은 없었으나, 응시한 사람은 최소한 2명 있다. 김정렬은 1944년에 육대에 응시하였으나 전쟁 말기라 워낙 혼란스러워서 합격 발표고 뭐고 없이 그냥 흐지부지 되었다고 회고록에 썼고, 유재흥도 1945년 5월 육대에 응시하고 8월에 있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친일 논란 등을 우려하여 기록을 남기지 않은 다른 육대 응시자가 더 있었을 수도 있다.


2.5. 육대 졸업 이후[편집]


육대를 졸업한 뒤에는 원대인 1연대로 복귀했다가 동 연대 예하 중대장(대위), 참모본부 내국전사관, 1사단 3연대 3대대장(소좌), 육군보병학교 교관, 만주국 군정부 고문관,[4] 관동군 참모부,[5] 다시 육군보병학교 교관,[6] 흥아원 조사관 등을 전전한다. 이중 대대장 재임 시절, 상관이었던 연대장 두 사람이 나가타 테츠잔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1941년 3월에는 드디어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중국 허베이 성에 주둔한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 일대의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7]를 상대로 여러 번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중국 팔로군 제18전총에는 윤세주[8] 등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1941년 12월, 윤세주가 이끄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9]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湖北省) 타이항(太行)산맥의 '후자좡(胡家庄) 전투'와 인근의 '싱타이(邢台)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는데, 여기서 홍사익이 지휘를 했다. 이 전투로 조선의용대 대원인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 대원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10]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이끌던 윤세주는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홍사익이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하다 전사하고 만다. 이 전투는 '일본군 토벌대의 지휘관'과 '무장독립부대의 지휘관' 모두가 조선인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942년에는 여단장에서 다시 만주에 특별히 설치한 기갑전술연구 겸 교육부대인 공주령 학교 부교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2.5.1. 푸대접?[편집]


일본 육군에서는 천황에게 수여받은 연대기를 갖는 연대장을 육군 보직의 꽃이라고 여겼고, 연대장이 아니라도 대좌라면 사단 참모장이나 군사령부 참모, 각급 행정부서의 과장이나 고급과원 등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보통이었으나 홍사익은 그런 보직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사실 만주군에 고문관으로 가는 것이나 조사관으로 가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중요한 보직일 수 있어도 전투지휘관으로서 출세를 원하는 장교들에게 인기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다만, 푸대접 논란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홍사익이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보직들을 주로 맡았으며, 그는 교육총감부 라인이지 군정이나 실전부대를 다루는 육군성이나 참모본부 라인이 아니었기에 푸대접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한 인정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하지만 홍사익의 동기인 안병범 대좌, 유승렬 대좌, 이응준 대좌, 한기수 후배인 김석원 대좌도 전원 연대장을 못해보고 일제 패망 때까지 한직만 돌았기 때문에 어떠한 경향이 있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2.5.2. 유일한 조선인 장성?[편집]


왕족 아닌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장성이 된 경우는 홍사익을 제외하고 7명이 더 있긴 하다. 중장까지 진급한 이병무, 조동윤, 어담 3명과 소장까지 진급한 이희두, 조성근, 왕유식, 김응선 4명이 그들이다. 전원 육군 장군이며, 해군 제독일본해군병학교에서 조선인을 받지 않아 전무하다.

그러나 이들은 전원 대한제국군에서 참령 이상 계급에 있었던 고위 간부였고,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일본군에 편입된 후 동급 일본군 장교로 예우받으면서 계속 진급하여 장군이 되었을 뿐이다. 이들은 "조선군인"이라는 특별 코스로 분류되었으며, 조선인으로서 일본군에서 정식 코스를 다 밟아서 장군이 된 사람은 왕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홍사익이 유일한 것이 맞다.


2.6. 필리핀[편집]


공주령 학교 부교장으로서 기갑전술교리를 연구하다가 1944년 3월에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장으로, 그리고 10월에는 남방총군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 총괄 관리책임자로 발령되었다.[11] 중장으로도 승진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존재한다.

  • 홍사익 장군을 필리핀으로 부른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이 3연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홍사익 장군은 그 밑에서 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그 때부터 야마시타는 홍사익의 능력을 인정하고 사이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진짜 능력에 따라 발탁한 스카우트였을 수 있다.
    • 사실 1944년의 필리핀을 본다면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홍사익 기용은 그 능력을 대단히 신뢰해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야마시타의 전술은 루손에서 최대한 농성하면서 본토나 오키나와로의 미군 진격을 늦추고자 하는 것이고,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맥아더의 군대에 저항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농성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병참감의 업무는 실로 막중한 셈이다.

  • 당시 일본군의 포로관리 및 지원 분야에 군인, 군속을 불문하고 조선인이 많이 복무하고 있었고 인도네시아 지역 포로수용소에서 이들이 사보타주 내지는 반일 봉기를 벌인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인망이 있는 조선인(홍사익)을 그 관리자의 위치에 올리고자 했다.[12]

  • 홍사익이 만주 지역[13]의 조선인 군 장병 및 민간인의 경애감을 너무 많이 얻고 있어서 혹시나 그를 핵심으로 하여 발생할지 모를 불온한 사태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남쪽으로 보낸 것이다.

소수설로 '패전하면 누군가 포로 학대의 책임을 져야 하니 홍사익을 희생양으로 내세웠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일본의 인사권자 그 누구도 패전을 예상한 적 없고, 전쟁이 끝나고 전범 재판이 벌어져 ABC급 전범들이 처형당한다는 것은 노스트라다무스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자매품으로 포로 학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포로수용소에 조선인 포로 감시원 3400명을 투입했다고도 하는데 역시 무리한 추정. 그냥 일본군이 부족하니 포로수용소의 일본군을 교체해주기 위해 조선인/대만인들을 쓴 것일 뿐이다. 홍사익이 포로수용소 총괄 관리자가 된 것 역시 단순한 인사이동. 그렇다고 식민지 출신 장성을 일선 지휘관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선인 중좌, 대좌가 여럿이지만 대대장이 한계로, 핵심 지휘관인 연대장, 사단장은 주어지지 않았다. 홍사익 장군조차 연대장과 사단장은 못 해봤고, 여단장만 해봤다.


2.7. 패전과 전범재판[편집]


원체 여건이 열악한 루손 산지에서 극심한 식량 부족 상황에서 예하에 거느린 일본군과 아직도 붙잡고 있던 포로에다 같이 피난한 일본 민간인들을 위한 식량까지 마련해야 하는 위치를 맡아 고생하던 중 일본이 패전했으며, 필리핀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포로 학대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살아남은 부관(일본인)이 후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전쟁 종결 직후 아직 미군의 포로가 되기 전, 홍사익 장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중학교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육사 동기와 후배들은 죄다 국군에 들어가서 고관대작이 되었는데 특히 이응준 대좌는 일본군 최선임자로 미군에게 지목되어[14] 국군 창설 작업을 맡았다. 홍사익 역시 살아 있었다면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전범재판을 받고 있을 때는 국내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올려 구명을 요청한 사람들도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있었다.[15] 대표적으로 홍사익의 부인과 아들 부부가 당시 군정장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를 찾아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실 일본군의 포로관리가 막장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반드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전범으로 처벌받는 건 필연적이었다.

관련 링크 - 전봉관의 인생백경, 이규태 에세이

수많은 일본군 출신들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흡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비롯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사들은 홍사익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구명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16]


2.8. 사형 판결[편집]


사형 판결을 받고도 태연하게 돌아와 "갑종합격이다!"[17] 라고 외쳐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이는 일본어로 "갑종합격"과 "교수합격"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같은 데서[18] 나온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인데, 자기 목숨을 가지고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어지간히도 대담했던 모양이다.

처형을 기다리며 갇혀있는 동안에도 목사가 넣어 준 신약성서와 구약의 시편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2.9. 사형 집행[편집]


사형 당일 처형장으로 나가면서 수용소의 담당 감시병인 미군 군사경찰 이반 케이에게 그 성경을 주고[19] 교수대에 올라 자신의 사형 집행에 참여한 입회 목사 대행에게 구약성경의 시편 51편을 읽어 달라고 청했다.[20]

시편 낭송 이후 사형이 집행되었다. 계급장과 서훈 등을 떼어낸 군복을 입은 채로 집행되었으며 유일하게 교수형이 집행된 일본군 군인이다.[21] 그의 시신은 화장돼 미 해군에 의해 비밀리에 바다에 산골되어진다.

예로부터 원통히 죽는 이는 많으니,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리.(昔より冤死せしものあまたあり われもまたこれに加わらんのみ)

끙끙 앓으며 생각해도 푸념만 될 뿐, 패전의 죄로서 포기하는 것이 옳으리.(くよくよと思ってみても愚痴となり 敗戦罪とあきらむがよし)

홍사익의 사세구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편집]


홍사익은 일본군을 떠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일본군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홍사익은 대영제국의 예를 들어 '조선인이 일본을 위해 충실히 봉사한다면, (대영제국아일랜드인처럼)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자기 아들 홍국선에게도 말했다고 한다.[22]

사실 이게 자기정당화적 변명이 아니라 진중한 신념이었다 하더라도 굉장한 역사적 오독이란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아일랜드는 역사 내내 엄청난 탄압과 인격적인 모독을 국가적 행사를 통해서까지 받으며 지냈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일부러 영국계와 영국계 종교신앙자들을 몰아서 배치한 북아일랜드 지역을 빼고는 기어이 독립을 성취해서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곳이다. 아일랜드인들이 떳떳하게 숨기지 않고 행동한 것이 영국으로부터 인정받거나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아일랜드 자체가 아예 민족가 언어도 다르고 역사 내내 영국에서 핍박받으며 간섭받은 역사 때문에 민족의식이 더더욱 고취되어서인 것이다. 실제로 철의 여인 대처가 아일랜드 투쟁가들이 단식투쟁을 할 때 정말로 영상실조로 피와 가죽 밖에 안남을 정도의 상태까지 가서 아사를 해버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둬서 엄청난 반감을 얻었고 이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상식밖의 대우 때문에 영국내에서조차 반감으로 인해 대처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질 정도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를 유화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복잡한 정체성과 선택이 드러난다. 사실 당시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3.1운동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며,[23] 1930년대 이후 숨쉬는거 말곤 전부 일본 허가를 받아야 했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선 즉각적인 독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결국 언젠가는 자치령 정도로 시작해서 아주 느긋하게 독립하는 것이 한계라는 게 그나마 독립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이었고,[24][25] 그나마도 꿈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타협주의자들도 나오게 된다.[26]

그러다 보니 구 일본군에 지원입대하는 조선인, 특히 장교로 지원하는 인원 중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강제로 끌려온 병 출신들보다도 민족의식이나 사명감을 더 갖춘 케이스가 생긴다. 대표적인 예가 이종찬이나 채병덕, 김정렬. "우리가 열심히 해서 조선인들의 위치를 끌어올려 독립에 기여하고 언젠가 조선이 독립되면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은 실제 그랬듯이 스스로 독립할 순 없고 일본이 시켜줘야 하는 거니까 지금은 일본과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의식이 있기에 소극적 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일본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조선인 출신 일본군만이 아니라 영국프랑스 식민지 병사들에서도 보여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홍사익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군에 몸담아 아예 한국이란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났던 젊은 장교들과 세대 차이가 있으나 인식 자체는 비슷하게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3.1. 동기들과의 약속[편집]


홍사익과 같은 육군무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혼란에 빠졌다. 비록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대한제국군이 대부분 사라지기는 했으나, 군 조직의 근간은 남아있었고 언젠가 재건되리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사라짐으로써 그 희망 자체가 무너졌고, 분격한 생도 상당수는 전원 일본 육사를 자퇴하고 귀국하자고 나서기도 했다.

이때 유학생들은 토론 끝에 "기왕 들어온 육사이니 중위가 될 때까지만 복무하고, 바로 예편하자"고 약속한다. 동기생들 중 조철호 중위는 이 약속을 지켜 1918년에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곧바로 예편, 조선 오산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다가 3.1운동에 참가하도록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구속되기도 했다. 지청천김경천은 소위 때 일본군 교범을 가지고 탈영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홍사익은 군복무를 계속한다.


3.2. 3.1 운동[편집]


3.1 운동으로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동포들의 움직임을 보고, 아직 일본군에 남아 있던 김광서(1년 선배), 지청천(동기), 이종혁(독립운동가)(1년 후배) 등이 잇달아 탈영하여 독립군에 합류한다. 하지만 홍사익은 여전히 일본군에 남아 있었는데, 훗날 홍사익 본인이 육사 후배인 이형석[27]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걸려서 군인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걸렸는지, 대신 조선인 출신 장교들의 친목모임을 통해 일본군을 탈영한 동료 조선인 장교들이 두고 간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홍사익은 수 년간 이 모임에서 간사(총무)를 맡았다.

일본군 내 조선인의 입지가 약화된다고 해서 탈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모양인데, 이는 후술할 태평양전쟁 시기에 한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경에 일본군에 속한 조선인은 황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말기에 유학한 사관생도 출신 장교 30여 명에 지나지 않아 입지가 약화되고 자시고 할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군에서는 조국을 위해 행동하는 조선인 장교들을 일종의 지사로 보는 분위기가 있어서 몇몇 장교들이 탈영했다고 나머지 잔류파인 조선인 장교들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지청천이 탈영했을 때 동기인 홍사익이나 이응준은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고 1기수 아래 김석원은 예편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잡혀 형을 살고, 심지어 늑막염으로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자신의 동기 이종혁을 자주 찾아보고 돈까지 구해주며 적극적으로 건네주기까지 했는데도 연대장이 "그러다 앞길 막힐 수도 있다"고 가볍게 타이르는 게 전부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으로 일본군에 편입되었다가 일본군을 그만두고 독립투쟁에 나선 이갑이 아직 일본군에 있던 사위 이응준에게 권총을 구해달라고 연락해 이응준이 자신의 권총을 보내주었다가 들켰는데, 이때는 상부에서 단순 도난으로 무마시켜 주었다. 일본군에서 권총은 사비로 알아서 구매하는 개인 재산이었기 때문에 보급품 횡령같은 문제까진 아니었던 덕도 보았겠지만.

이에 대해 큰 뜻을 품은 지사들을 보면 일단 한 수 접고 존중해 주던 메이지 시대의 풍습이 당시 일본 사회에 아직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상급자들이 조선인 장교들의 이런 소소한 군기 문란 행위를 알고도 덮어주지 않았겠냐는 시각도 있다.

메이지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앙 정계에 안착하지 못한 유신지사들은[28] 몰락한 구 막부 사족들과 함께 민간으로 파고들어가 좌익과 극우를 막론하고 근대 일본 비주류 정치세력의 시조가 되었는데, 비록 사회주의, 파시즘 같은 근대 사상의 대두와 함께 방향은 갈라졌지만 메이지 시절만 하더라도 극우 사상가가 정치범으로 쫒기는 좌익 운동가의 가족을 돌보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념을 초월하는 지사 문화의 영향력[29]이 남아 있었고, 지사 문화라는 것도 근본은 동아시아권 모두가 공유하는 성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보니 일본 군인들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았을 때도 어느 정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3.3. 태평양 전쟁[편집]


남방으로 발령받을 당시에 경성부에 들렀을 때 아들 홍국선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몇 차례나 옛 친구인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연락이 있었고, 도쿄에 들렀을 때 매일신보 동경지사에 있던 김을한 기자도 그에게 광복군에 가담하기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이탈로 인한 후폭풍이 일본군에 남아있는 조선인(군인 및 노무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홍사익과 비슷하게 일본군 고관이었던 영친왕 역시, 자신이 광복군에 합류하면 조선에 있는 전 동포가 그 보복의 대상이 되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 사령부에서 병참감으로 근무하였다. 제해권의 상실로 본국으로부터 물자가 조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홍사익은 나름 자력갱생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편, 병참감으로서 홍사익은 포로들에 대한 최고관리책임자 자격이기도 했는데 이는 결국 필리핀 지역에서 자행된 포로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의 책임을 지고 홍사익이 사형 판결을 받는 원인이 된다.


4. 여담[편집]



4.1. 창씨개명 거부[편집]


홍사익은 왕족이 아니면서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유일한 조선인인데 창씨개명조차 하지 않았다. 더불어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안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먼저 유명한 이야기로 새 부대로 보직을 옮기게 되면 전 장병을 앞에 놓고 부임인사를 할 때 "나는 조선인 홍사익이다. 천황 폐하의 명으로 이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0] 게다가 휘하 장병들 중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패전 시까지 그가 조선어를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으며, 패전 후에야 비로소 몇 마디 조선말을 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상용(常用)했으나 일본어 억양은 조선식이어서 듣기만 하면 저 사람이 조선인이구나 하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홍 중장 본인도 "난 원래 조선인이니까"라면서 발음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유카타를 입었으며 아들 홍국선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도 한자일본어로 썼고, 자신의 이름을 "홍사익"이 아니라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 시요꾸(こう しよく)"로 칭했다.[31] 그런데 또 만주에 있을 때는 만주군에 속한 조선인 장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근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부사관들이 설날 인사를 오면 한복을 입고 맞이했다고 한다.

사실 홍사익의 앞선 행적들을 보면 이해하기 크게 곤란한 부분도 아니다. 홍사익은 골수친일파에 전범으로 처형당한 사람이지만, 앞선 다른 문단의 서술에서처럼 조선인으로서의 복잡한 정체성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료나 군인 등의 공무원은 소속 정부에 대한 충성이 곧 직업윤리와도 직결되므로, 일제에 충성하기 싫으면 그냥 때려치고 나오던가, 그렇지 못하고 그 업을 지속하고 싶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규복이나 손영목처럼 "관료로서 종사하되 조선인을 계몽하고 차별에 맞선다"와 같은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영국-아일랜드의 사례를 끌어다오기도 했는데, 홍사익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이는 아들인 홍국선에게 했던 말에서도 드러나는데, (오늘날 우리식으로 쉽게 해석하자면) "우리가 정복당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독립이 쉽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인종차별에 맞서는 느낌 정도였던 것 같다.

김석원의 경우에서 보듯, 일본군에 복무하던 조선인들의 심경이 어느 정도 복잡했던 것도 사실이며, 특히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좋은 군인이었는가"와 "좋은 조선인이었는가"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는 2차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식민제국의 군대에 복무하던 피식민지 군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32] 그러나 일제가 선전했던 내선일체대동아공영권은 위선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독립 역시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이뤄졌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높게 쳐 줘도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사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33] 크게 괘념치 않고 '그냥 이대로 군 생활 열심히 하다가 전역하고 나면 다른 일 해야지'라고만 생각하며 살았던 결과로 역사가 그를 반민족행위자라고 평가하게 됐다는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한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홍사익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일본 당국이 "창씨는 강요가 아니다"라는 홍보를 위해 내버려 두었다는 시각이 강하다.


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편집]


장군으로서 유능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챙기기도 잘 했으므로 일본군 장교 시절에는 부하와 상사를 막론하고 평이 대부분 좋은 편이었다. 여기에다 출신부터가 일반 사병들에게는 대단한 존재였는데, 창씨도 하지 않은 조선인이 초급장교도 아닌[34] 장군이 된다는 것이 당시 일본의 하급장교나 사병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35] 그로 인한 아래와 같은 일화도 존재한다.

하급자 : 조선인 장군이 새로 왔답니다.

상급자 :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선인이 장군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하급자 : 아닙니다. 분명히 조선인이랍니다. 이름이 '고 시요쿠'라고 하던데요.

상급자 : 흠, 그렇다면 아마도 이왕가의 일족인 황족이겠지. 황실의 외가 쪽 사람일 거야.

하급자 : 아닙니다. 양주라던가, 조선의 시골 출신 평민이랍니다.

상급자 : 허,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로군. 아니 정말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어.[36]


다만, 초급장교 시절 비슷한 계급을 가진 이들에게는 질시를 좀 받기도 했던 듯하다.


4.3. 탈영병 잡으러 갔더니 투스타가 나왔네?[편집]


만주에 있던 홍사익이 새로 필리핀으로 발령을 받고 잠깐 짬을 내어 경기도 경성부 돈암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때마침 자신의 집에는 학병으로 끌려갔던 친척[37] 심모 씨[38]가 탈영하여 찾아와, 홍사익의 장남 홍국선(洪國善, 1919. 8. 6 ~ 1984. 9. 25)의 비호 아래 숨어지내고 있었다.

심씨는 경성에 별다른 지인이 없는 자였고, 심씨가 훈련소에서 부친 편지의 수신자가 모조리 홍국선으로 돼 있으니 일본군 당국에서도 "홍국선이란 놈이 심씨를 숨겨주고 있는가 보다"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홍국선으로서는 자기 집에 숨기자니 들킬 게 뻔하고 하여 이웃집에 부탁해 심씨를 그리로 옮겨둔 참이었다.

아버지 홍사익이 집에 막 도착하여 홍국선과 한 잔 하고 있을 때 헌병 소위 한 사람이 찾아와서 "탈영병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웠고, "무슨 일이냐"며 홍사익이 현관으로 나왔다. 소위는 군복을 입고 나온 홍사익의 계급장을 보고 기겁을 하여 경례를 붙인 후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장남 홍국선이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남긴 증언이다.


4.4. 가족의 뒷이야기[편집]


홍사익이 젊어서, 아니 어려서 결혼한 첫 번째 아내 한양 조씨 조숙원(1887. 4. 7 ~ 1942. 9. 11)[39]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중풍을 앓다가 1943년에 죽었다. 결혼 당시 나이가 홍사익은 14세, 조숙원은 16세였으니 전형적인 조혼이다.

본처와의 사이에 낳은 장남 홍국선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근무했는데, 이승만의 직접 명령으로 사직해야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별다른 압박이 없었는지, 1962년 8월 1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군대에 들어가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고 이 시점에는 한국광업공사 이사로 재직중이었다고 한다. 이후 1984년에 경기도 안성에서 사망했다.

본처 사망 이후 재혼한 두 번째 아내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청영(1908. 11. 18 ~ 1978. 5. 16)[40]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41] 출신으로 일본에서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으로 아무 일자리도 구할 수가 없어서 일본 재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이들의 주선으로 당시 총리대신이던 사토 에이사쿠도 만났다.

사토 에이사쿠는 과거 철도성 관료시절 중국에서 근무하며 홍사익과 알고 지냈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이청영을 환대하며 자신의 사재에서 당시 돈으로 100만엔을 지원해 주었다. 이후 이청영은 일본에서 6년을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청영이 낳은 차남 홍현선(洪顯善, 1944. 3. 9 ~ )[42]은 1962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고 하며, 뒤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청영은 아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1978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일본어 및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이청영, 홍국선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만 이름은 적지 않고 기술하고 조숙원, 홍달선에 대한 부분은 적지 않으면서 홍사익의 아내와 아들이 "압박 때문에 전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자료부족 및 혼동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4.5. 기타[편집]


경기도 안성시 안성시청 뒤편의 남양 홍씨 토홍계 종중 산에 그의 무덤이 있다. 다만 유골은 묻혀있지 않고 유품을 묻은 가묘라고 한다. 비석 전면에는 남양홍공사익 배한양조씨지묘(南陽洪公思翊 配漢陽趙氏之墓), 후면에는 이력이 적혀 있다.# #

여담으로 비석은 세워진 지가 20년 가량 되었는데 바로 건너편에 있는 남파 홍우원의 묘소를 후손들이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같은 남양 홍씨 출신인 홍사익의 묘도 덩달아 보수도 하고 비석도 세운 것이다. 그 전에는 묘소가 하필이면 비봉산 등산로 바로 옆에 있음에도 아예 관리도 안되어 있는데다 심지어 누군가에 의해 묘 일부가 파헤쳐져 있었을 정도로 상태가 매우 안 좋았는데 당시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대체 이 묘지에 묻힌 사람은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후손들이 저리 신경을 안쓸까?' 같은 얘기도 많이 하곤 했다. 2021년 현재도 남파 홍우원의 묘를 후손들이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수풀이 우거진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본문에서 인용된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홍사익 중장의 처형'은 저자가 12년 동안 홍사익의 재판기록과 친지의 인터뷰를 통해 펴낸 책이므로 읽어보는 게 좋다. 홍사익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책이라기보단, 홍사익이 사형된 원인인 전범 혐의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1966년 야스쿠니 신사에 그가 합사되었다.


5.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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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의 창씨개명 관련 문단 참고[2] 참의공파(參議公派) 26세 사(思) 수(秀) 항렬.[3] 류원후(柳遠厚)의 딸이다.[4] 여기서 복무중 중좌 진급.[5] 조선인 관계 사무를 보았다.[6] 여기서 복무중 대좌 진급.[7] 제18전총.[8] 김원봉의 오랜 고향 친구.[9] 조선의용 대장 김원봉은 충칭으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류했다. 그에 따라 화북으로 옮긴 조선의용대 다수는 제2인자 자리에 있던 윤세주의 지휘를 받게되었고, 후에 조선의용으로 개칭한다.[10] 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는데, 여기서 그는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김학철은 체포 후 일본교도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전향서를 쓰면 다리를 절단해준다"고 했으나 다리가 썩어가고 있음에도 끝내 거부했다. 그러다가 교도소 의사가 교체된 후 인도적 차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주었다. 그리고 김학철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11] 이후 필리핀이 외부에서 지원을 못 받게 되자 병참 부서가 할 일이 없다고 하여 알아서 먹고 살게 해준다는 뜻으로 '자활감'으로 명칭을 바꾼다.[12] 김정렬이 이런 추측을 했다. 김정렬은 젊을 때 홍사익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13] 남방에 가기 직전에는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함께 만주에 있었다.[14] 만주군 최선임자는 원용덕 중교이고, 중국군에선 조개옥 중교가 선택되어 이들 셋이 합작으로 국군을 만든다. 좌익과 상당수 광복군계는 참여를 거부하였는데, 초기에는 송호성이 광복군계 최선임자로 참여하였으나 이후 얼마 안가 힘을 잃었다.[15] 미군정기 신문사 자료들 면밀히 보면 '홍사익 중장 구명하자!' 이런 기사 제목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46년 2월~4월 사이가 눈에 띄게 많다.[16] 반면에 국군 창군과정의 기틀확립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홍사익 중장의 구명에 힘을 쏟았다는 설도 존재한다(이재전장군 溫故知新). 그러나 이쪽에는 동조하는 증언이 아예 없으며, 링크된 글이 사실상 유일한 주장이다.[17] 일본제국의 징병검사에서 받는 최고등급으로 현대 한국으로 치면 1등급이다. 전시체제 특성상 선망받았다. 한국에서도 1983년까지 갑을병정 등급으로 병역판정검사를 했다.[18] 갑종(甲種), 교수(絞首) 모두 일본식 독음이 'こうしゅ'로 같다.[19] 딱히 친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자신이 곧 사망하면 갖고 있을 사람이 없으니 주었을 따름이다. 이반 케이는 홍사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나중에 만난 일본인에게 이 성경을 주인의 가족에게 보내주라 했다. 이 성경은 뒤에 '제네럴 홍'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단서가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간다.[20] 목사 대행이었던 이 인물은 일본군 포로였다. 성경을 목숨처럼 아끼는 특이한 일본군 포로가 있다는 것을 미군 군목이 알고 자신의 보조로 썼다. 이 포로는 홍사익에게 자기는 목사가 아니라서 해줄 말이 없다고 했는데 이에 홍사익이 그러면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읽어달라고 한 것이다. 이 포로는 훗날 진짜 목사가 되었다.[21] 일본군 군복을 입고 사형을 받은 장성 사형수는 민간인 신분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혼마 마사하루모리 쿠니조, 군인 신분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홍사익 단 3명이다. 다만 홍사익과 모리 구니조는 교수형을, 마사하루는 총살형이 집행되었다.[22] (조선인으로서 당한 멸시를 아들이 호소하자)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해서는 안된다."[23] 3.1운동 직후 일제의 집요한 독립운동 탄압으로 국내의 독립 주도세력이 약화되었는데 동시기 1차대전 특수 등으로 일본의 경제가 발전함과 동시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풀리게 된다. 즉 일제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향상으로 점차 독립 같은 것 생각 안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24] 아일랜드가 기나긴 투쟁 끝에 이런 방법으로 독립한 것처럼 보였던 예가 있어 아주 헛된 꿈도 아니었다.[25]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건 영국-아일랜드 관계사의 디테일을 모르는 외부인의 오독에 불과하다. 가톨릭 해방운동의 대부 대니얼 오코넬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중후반쯤 되면 찰스 스튜어트 파넬을 필두로한 영국 의회 내에서 비폭력 정치적 투쟁으로 인해 1차 세계대전 직전쯤 가면 아일랜드 자치법이 영국 정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만큼 성장하긴 했으나, 가장 결정적으로 1차대전 발발로 인해 아일랜드 자치법 관련 논의 자체가 무산되고, 세계대전과 무관하게 이미 이 시절부터 현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되는 얼스터 친영주의자들 중심으로 적극적인 자치반대운동, 친영 운동 또한 들끓어서 1910년대쯤 되면 점진적 투쟁론은 이미 좌초되고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적 고착 상태를 결정적으로 깨트리고 당시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들 모두 서서히 말라죽는거 아닌가 걱정하던 아일랜드 자치, 독립 의제 자체에 다시 불을 댕긴건 레드먼드 같은 영국 원내 아일랜드 의회당의 점진론적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뿌리깊은 과격 급진 아일랜드 무장 봉기 전통을 부활시킨 1916년 부활절 봉기였다. 결국 아일랜드 독립 또한 결정적인 급진 무력 투쟁이 수반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한일관계에 대입해도 외부적으론 악독한 제국주의를 폈어도 어쨌든 국내 정치에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 국회 의석까지 내줄 자유주의적 입헌정치 전통이 강력했던 영국과 일제를 비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26] 이런 타협주의자들은 영국의 스코틀랜드인을 롤모델로, 일본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한 채, 출신지역 등으로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고 조선출신도 내지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을 제 1 목표로 하게 된다. 이들이 내선일체를 적극 환영한 이유도 이것인데, 그들은 정말로 내선일체가 모든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대우를 해주려는 정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선 출신은커녕 일본 본토인들끼리도 지역, 출신 등으로 차별이 이루어지는 판국이다보니 이는 허황된 꿈이었다. 참고로 이들 타협주의자에 대한 시각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하나'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게 아닌 민족의 동등한 대우를 위한 목적이라서 정상참작은 해줄만 함'의 두 가지인데 대체로 전자의 시각이 강하다. 사실 그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27] 육사 44기로, 홍사익보다 육사 16년 후배이다. 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인 이우와 함께 졸업했다.[28] 토막 전열에 합류한 타이밍도 어정쩡했고 사쓰마, 조슈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이타가키 다이스케 같은 소수를 제외하곤 혁명의 과실도 별로 누리지 못한 도사 번 출신 지사들이 대표적인 예이다.[29] 우리도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라던가 제1공화국 시대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우익으로 분류되는 장택상이 좌파정치인 조봉암의 유가족을 돌봐주었던 일처럼 당대 유명인들 사이에는 이념을 넘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 대한 경애심, 존중 같은 것들이 있었다. [30] 출처 확인이 필요하다.[31] 당시의 담배인 "호우요꾸"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인지 부하들 중에는 "고 시호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32] 당장 양차대전에서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을 도운 인도군만 해도 인도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친영 부역자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건 한국인들의 생각이고, 인도 내에서 양차대전의 인도군을 부역자로 평가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당장 영국의 전몰자 추도일에 인도 대표들이 다른 영연방 대표들과 함께 참석해서 양차대전에서 싸운 인도군 병사들을 기리는 모습을 매년 볼 수 있다.[33] 만약 한국의 독립이 인도의 사례처럼 2차대전에서 일제의 승전 혹은 소모전에 이은 휴전 이후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이뤄졌다면, 이들도 달리 평가받았을 수 있다. 문제는 영프와는 달리 일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승전했어도 식민지를 놔줬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며, 하다못해 다른 식민지들은 해방시키더라도 한반도만큼은 최종 보루로 여겼으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일제가 생산력으로 상대가 안 되는 미국을 친 시점에서 "소모전 끝의 휴전"이란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고, 단기결전으로 이기느냐 실제 역사처럼 질질 끌다 끝내 항복하느냐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들은 몰라도 나름대로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배웠다는 고위 장교나 지식인들이 이런저런 정황을 보면서도 항전 대신 협력을 택했다면 짧은 식견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제시대 자체를 다루는 사회사학계의 동향은 당장 1940년대 중순쯤 되면 교육 못받은 시골 촌부들도 어디 동네 요강, 소나무 껍데기나 긁고 있는 꼬라지 보고 일본은 이 전쟁에서 진다는 걸 감지했던 사람들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는 쪽으로 가고 있다. 어디 경상도 깡촌 농부들도 일본이 질 것 같다는 걸 직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 교육 받거나 사관학교 나온 양반들이 "일본이 그리 일찍 망할 줄 몰랐다"는 식으로 내놓는 변명은 막상 동시대 사람들에게 통하지도 않았을 소리라는 뜻이다.[34] 일본군은 장교 순혈주의가 유독 심한 군대였다. 병이나 부사관이 아무리 전공을 세워도 전시 임관으로 소위가 되는 것조차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본군의 전투기 에이스들조차 대부분이 엄청난 무공을 세우고도 고급 장교는 커녕 대부분이 초급 장교도 진출하지 못했다.[35] 일본인으로 대좌까지 진급하여 연대장만 하고 나와도 사회에서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 큰 어른 대접 받는 군국주의 시기였다. 그런데 2등 국민 취급받던 조선인이 일본 육군 중장이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당시로선 상상도 어려운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36] 출처 :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홍사익 장군>[37] 홍국선의 친구라고도 한다.[38] 1943년부터 시작된 징병령으로 징집된 사람이었다는 말도 있다.[39] 조종수(趙鍾守)의 딸이다.[40] 초명 이보비(李寶妣). 이지송(李之松)의 딸이다.[41]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의 전신이다.[42]경향신문 기사에는 홍달선(洪達善)으로 나와 있지만 서울대학교 졸업명부(총동창회 발간)에는 홍달선은 없고 홍현선이 경제학과에 1962년 입학하여 1966년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문기사에서는 2남 홍현선을 3남 홍달선으로 착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