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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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추존 황제
文宣帝 | 문선제

파일:공자 전신.jpg
출생
기원전 551년[1] 9월 28일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
(現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지닝시 취푸시)
사망
기원전 479년[2] 3월 4일 (향년 71세)
노나라
(現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직업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3], 시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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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문선황제(文宣皇帝)[1]

자(子)

공(孔)

구(丘)

중니(仲尼)
신장
9척 6촌(222cm)[2]
부모
부왕 계성왕 숙량흘(叔梁紇)
모후 안징재(顔徵在)

병관씨(幷官氏)의 여식(女息)
자녀
아들: 공리(孔鯉)
작위
공자/작위

1. 개요
2. 특징
3. 호칭
5. 교육 방식
6. 제자
6.1. 공자의 제자 목록
7. 공자 관련 문헌
8. 평가
8.1. 국내
8.2. 현대 중화권
8.3. 서양의 평가
9. 기타
9.1. 불우한 인생
9.2. 식습관
9.3. 자손 대대로 이어진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
9.5. 후계자
9.6. 공자 한국인설
10. 대중매체에서
10.1. 삼국지 시리즈
10.2. 기타
10.3. 애니메이션 〈공자전〉(1995)
11. 타 문화권에서
12. 기념일
13. 사당
14. 외부 링크
1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공자춘추시대 유학(儒學)자이다. 주나라의 예(禮)와 악(樂)을 정리하여 유학의 기초 경전을 정립하였으며, 이 예악을 바탕으로하는 정치 실현을 목표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실상 유학의 창시자라 볼 수 있다.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려서부터 예(禮)에 밝았다. 30대부터 제자 양성을 시작했고,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5]를 지냈는데 잘 다스렸다. 이에 노나라 정공(定公)의 신임을 얻어 노나라의 세 권세가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업을 맡았으나 끝내 좌절되었고, 그는 실각하였다. 자신의 이상이 노나라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안 공자는 이후 여러 제자를 이끌고 13년 동안 중국 천하를 방랑하며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았지만 이 역시 좌절되었다. 말년에 노나라로 귀국하여 국로(國老)의 대접을 받았으나 역시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제자 양성과 고문헌 정리에 진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2. 특징[편집]


사상적 측면에서는 동아시아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인()' 을 최초로 제시하였다.[7] 인(仁)이란,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인 의미의 '사람다움', 즉,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말한다.

그러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이는 공자(《논어》)의 仁者 愛人('인'은 남을 아끼는 것이다)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식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배려하고 걱정하는 등, 조건없이 남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이 "사람다움"의 본질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배신 속에서 죽었기에 '남을 챙기고 아끼자. 그래서 사람답게 살자.'는 공자의 외침은 당시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크고 작은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되는데,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혀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장(長)이 된다. 이로써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생기게 되니,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어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배운다. 공자는 이러한 상하관계에서의 올바름을 '의'(義)라고 하여, 공정하고 의로운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그 사회가 안정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주변 친한 사람을 챙기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하관계의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순서가 없으면 미숙한 아랫사람이 그 미숙함으로 윗사람을 우습게 보아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친하더라도 거리를 지키게 하고 상하관계에서는 순서를 따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을 '예'(禮)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인(仁)한 사람은 결국 높은 자리로 나아가 의로움(義)을 펼치며, 이러한 인(仁)과 의(義)의 적절한 순서를 지키자는 것이 예(禮)가 되는 셈. 여기서부터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 등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공자는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이러한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았으며, 예악을 따르는 인군(仁君)을 일으켜 주(周)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정치는 인(仁)을 갖추고 예(禮)에 밝은 군자(君子)[8]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뼈대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9][10] 발전시켜온 일련의 사상계(思想界)를 우리는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른다.

오늘날 세간에서는 보통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 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공자는 자신이 무언가의 창시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공자는 다만 스스로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예악(禮樂) 전통을 정리하고 계승했을 따름이며, 자신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 성왕(聖王), 성현(聖賢)의 행적에 깃든 참뜻을 밝혀낸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은 아니다."는 말은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의 사상을 잇는 것이었다. 실제로, 흔히 유교 문화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공자 이전부터 있었거나 혹은 나중에 가서야 형성된 관습들이 많다. 또한, 공가(孔家)라고 부르지 않고, 유가(儒家)라고 부르는 것도 후대의 학자들이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3. 호칭[편집]


이름은 구(丘).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태어났을 때 머리 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꺼져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 했다고 한다. 는 중니(仲尼).

원 성종 11년(대덕大德 11년, 1307년)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높혀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기도 하다. [11]

보통 《논어》에서는 '자왈(子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논어》 이외의 책에서 공자를 지칭할 때는 '부자(夫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이런 까닭은 한자문화권에서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보통 공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간혹 '공부자(孔夫子)'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서구 선교사들은 이 표현을 라틴어로 바꿔서 '콘푸치우스(Confucius)'라고 불렀다.[12] '공부자'의 중국어 발음[13]에다가 남성 명사 주격 단수 어미인 '-us'를 붙인 것. [14]

파일:external/e2d320463b60664d3947604c18f258773207cfa0c84635ad68e8970e92ee66b5.jpg
곡부 공묘 대성전에 걸린 청나라 황제들의 친필 편액
만세사표(萬世師表)[15],
사문재자(斯文在玆)[16], 덕제주재(德齋幬載)[17],
성집대성(聖集大成)[18], 생민미유(生民未有)[19]


4. 생애 및 사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공자/생애 및 사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교육 방식[편집]


공자의 기본 교육은 원래 노래(詩)였다. 시(詩)라는 표현 때문에 그냥 조용히 독서만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리듬을 타면서 노래까지 불렀다.[20] 흔히 유교라고 하면 도식적으로 틀에 박힌 이야기를 듣기 쉽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공자 본인은 그렇게 틀에 박힌 스타일로 교육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시경은 가사만 전해져서 멜로디를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21]

공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라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 예는 그냥 예의범절이 아니라 각종 공식행사의 의례 절차를 배우는 것. 이걸 배우면 당장 외교나 제사 등의 국가행사를 주관할 능력이 생긴다.

  • 악은 음악인데, 이것도 그냥 요즘 실용음악 같은 것 뿐만 아니라 행사 때 연주할 음악을 배우는 것이라서 역시 관료로서의 실질적 교육이 된다. 또한 유교 텍스트에서는 문화 자체를 예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참고할 것.

  • 사와 어는 활쏘기와 수레타기. 즉, 전쟁기술이다. 전차가 퇴화된 후에는 말타기로 바뀌었다. 여기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호신술로서 검술도 비중있게 가르쳤다.

  • 서와 수는 문서 만들기와 회계처리라고 보면 된다. 단순 글짓기와 산수가 아니라, 공무원으로 일할 때 문서를 작성하고 세금이나 국가재정을 계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선비는 단순히 앉아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군인으로 치면 복무신조를 달달 외우고, 장성에 대한 경례곡도 전부 암기하고, 한 명 한 명이 매일 멀가중멀가중 사격연습을 하고, 탱크도 몰 줄 알고, 세법도 배우는 올라운더인 것이다. 유교가 대충 뜬구름 잡는 철학공부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다. 후세에 내려오며 실용적 면보다 통치 이념으로서의 부분이 더 강조되었을 뿐이지. 공자는 정말 당장 관료로서 써 먹을 수 있는 실용 교육도 했던 사람이다.[22]

이 육예를 서, 수 / 예, 악 / 사, 어로 나누어 현대 교육학에서 말하는 지덕체 전인교육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공자의 진짜 업적이라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이라 할 것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기관도 귀족 한정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지배계층에 필수적인 기술과 매너를 폐쇄적으로 가내에서 전승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나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물로 육포 한 다발만 가져온다면 다 가르쳐주었고, 이 이야기는 지금에 이르러선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성어로 굳어졌다. 여기서 육포를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육포는 남에게 주는 예물로는 가장 격이 낮은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스팸이나 참치캔 정도 지위였다. 즉 배우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르치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가 "백성들이 많으면 넉넉하게 해주어야 하고, 넉넉하게 되면 가르쳐주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공자에게 교육이란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꼭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다만 실력이 안 되면 그딴 거 없고(…) 공짜는 아니라는 의미도 숨어 있긴 하다. 이 육포를 촌지로 잘못 해석하는 반(反)유교인이 있지만 상술했듯 육포는 격이 낮아 고급 예물로는 부적절했다. 고로 '최소한의 성의'를 육포라는 것에 대유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결정적으로 논어 향당편을 보면 공자의 음식 취향이 나타나는데 말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공자는 자신이 배움을 좋아함을 자주 강조했다. "나는 태어나면서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구절에서 그 정신이 잘 드러난다.[23] 다만 공자 숭배가 심해지면서 "공자는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며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유학자들이 많아졌고 최술은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에서 이를 강렬히 비판했다.

덕분에 공자를 계승한 유학자들의 특징은 역시 강렬한 현실 참여 의식과 지적 자산에의 갈구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잘난 집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욕을 먹는다. 다른 문화권 지배계급은 공부 압박을 그렇게 심하게 받지 않았다. 공부가 입신양명의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각광받지도 않았고. 당연히 공부를 하려면 돈이 들고 명청대 중국 사족들은 상업이나 소작료 받기 등 공부와 아무 관련 없는 일로 돈을 잘 벌기도 한다. 근데 그렇게 돈이 생기면 일단 자식을 공부시킨다.

조선도 마찬가지라서 아버지가 고위 관료면 자식이 음서로 관직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음서로 커리어 시작한 사람들도 절대 다수가 공부해서 과거를 다시 본다. 음서는 그냥 호봉이랑 짬밥 좀 쌓으려고 깔아두는 것일 뿐. 게다가 음서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낙하산 인사라는 경멸의 시선이 엄청났기 때문에 음서는 떳떳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렇게 현대 한국, 일본, 중국의 공부열이 설명될 수 있고 나아가 공부에 집착하는 서양의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이 생긴것도 이런 연유라고 할 수 있다.[24] 다만 불교 국가 고려에서는 유교의 교세가 조선만큼 강하지 않았던 데에다 문벌 귀족의 관직 독점 문제가 심각하여 음서 출신도 조선처럼 멸시받지 않아 과거에 목 맬 필요가 없었다.

또한 스스로 전차를 잘 다룬다고 했는데, 전차를 모는 사람은 지휘관이자 전사를 의미한다. 공자의 키는 9척 6촌[25]이 넘는 거구였기 때문에 당연히 육체적 능력이 허당이었을 리가 없다. 덩치도 덩치지만 공자는 목수 일이나, 장의사일, 전차 몰기, 창고지기 등 온갖 궂은 노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심지어 그 자로[26]를 무력으로 제압했다는 얘기도 있다. 위에서 말한 육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제자들에게 군사교육도 했던 사람이다. 춘추시대 때는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없었다. 공자는 본래 무장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고[27], 공자로부터 무예와 군사를 부리는 일을 배운 제자도 있었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첫 관직생활을 했을 때부터 그를 증오하는 자들의 습격으로 여러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공자가 호신술을 제대로 안 익혔으면 후에 노나라로 돌아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원래 춘추시대의 당대의 사(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 계급이었다. 평소에는 정치를 하고 전시에는 전쟁을 하는 것이 사(士)였다. 즉, 공자의 집단은 거의 무장세력이었다. 당대에는 이런 무장세력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것을 제자백가라 부른다.[28] 물론 싸움만 하는 건 아니며 국가를 운영하고 행정업무를 다루기 위해서 학문도 갈고 닦았다.[29] 참고로 고대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재산과 지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무장은 개인돈, 또는 지휘관의 돈으로 구비하던게 근대 이전 이야기여서 덕분에 군대의 의장과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즉 돈 없으면 전쟁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약탈하는 권리 또한 개인의 지위와 재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 때문에 지휘관이나 피 정복민은 그를 막으려면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의 권리가 커져 고대 민주주의 체제로 발전한 것도, 그리스 군대가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 보병부대 위주로 구성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경제력과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6. 제자[편집]


3,000명에 육박하는 제자들을 육성하여[30], 이후 전국시대의 인재풀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수받은 72명의 제자가 있고, 다시 그 중에서도 뛰어난 10명의 제자를 공문십철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사람들이 대륙 곳곳으로 진출해서 상당수의 제자백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자도 공자의 학문을 좀 더 보편주의화시킨 인물이고, 보통 법가로 알려져 있는 상앙은 공자의 제자 자하가 위나라에 세운 학교에서 배출된 인물이고, 한비자나 이사 등은 순자의 제자였다. 그러니까 자공, 자로 등의 주요 인물만 대단한 게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이 이후 전국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공자가 유랑생활 할 때도 공자의 제자들은 수시로 다른 나라로 가서 일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소개로 공자가 초청되기도 했다. 특히 공자가 10여년 동안 유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재벌이었던 자공의 경제적 지원이 컸다. 공자가 마냥 가난했다고만 생각하는 건 착각. 군주나 고위관료들과 교류하려면 최소한의 경제적 수준은 있어야 된다.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도 공자는 집에 마굿간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급 세단 몇 대는 굴렸다는 뜻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확고하게 굳어진 신분제도가 없었다. 물론 노비 같은 게 있기는 한데, 신분적으로 규정된 노비가 아니다. 공자는 가르침을 베푸는데 있어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도 들에서 살던 양아치였다. 공자 본인도 산골에서 태어난 천한 사생아나 다름없었다. 공자는 어릴 때 천하다며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 꽤 오랫동안 아버지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오나라 재상(大宰, 태재)이 공자를 보고 "정말 성인이시다. 다방면으로 재주가 넘치시니."라고 재주가 많음을 비꼬았는데, 이를 들은 공자가 말했다. 그가 나를 잘 아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잔재주가 많을 뿐이다. 군자가 재주가 많아야 할까? 꼭 그렇진 않은 법이다.[31]

6.1. 공자의 제자 목록[편집]


  • 안회 - 논어에서는 공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수제자로 나온다.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일찍이 공자가 '나는 그가 진보하는 것만 보았지 정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32]고 말한 적이 있지만, 공자보다 일찍 죽는다. 안회의 죽음을 들은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喪予, 天喪予!)라고 탄식하며 슬퍼했다.
  • 자로 - 논어에서는 무골(武骨)에다가 성격도 드센 전형적인 호걸형 인물로 나온다.또한 대부의 가신을 지낼 만큼 정치적 능력도 상당했다. 공자에게 면박을 많이 받지만 칭찬도 받고 공자와의 인간적인 관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후에 위(魏)나라 공실의 권력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젓갈로 담겨진다.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한 공자의 행동이 자기 집의 젓갈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것이 공자식인설이라는 루머로 퍼졌다. 안회와 더불어 공자에게 가장 중요한 제자였는데 자로가 죽은 소식을 듣고 안회와 마찬가지로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외쳤으며 자로가 죽은 다음해에 공자도 사망했다.
  • 자공 - 논어에서는 머리가 비상하고 언변에 뛰어나며 장사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먼치킨으로 나온다.굉장한 부자였는데,이 재산으로 공자학단을 경제적으로 후원해 줬다.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때 무려 6년상을 치렀을 만큼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엄청났다.
  • 증자 - 공자에게서 우직하지만 아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나이 차이가 거의 50살이나 나서 공자 사망 당시 20대였기에 공자와 대화하는 내용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고 오히려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다만 논어가 증자계파에서 완성되었다는 설이 주류적일 정도로 논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있는 편이다.
  • 재여(=재아) - 공문십철에 들어갈 정도로 높은 위치이긴 하지만 정작 논어를 보면 비난의 대상으로만 등장한다. 자로는 꾸짖으며 행동을 고치길 원하는 모습이라면 재아는 순전 비난일색이다. 공자에게도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것은 덤. 삼년상을 비효율적이라며 일년상을 주장하면서 공자에게 '재아는 부모에게 3년도 사랑받지 못했구나'라는 뒷담화를 듣거나 재아가 낮잠을 자는 것을 공자가 보고 재아를 '조각할 수 없는 썩은 나무'로 평가한다. 허나 현대에 와서는 재아가 비판받은 내용이 많은 이유가 공자의 예, 형식 강조와 재아의 실용주의 간의 대립으로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 나머지 - 자유, 자하, 자장, 민자건(민손), 염백우, 진항(진자금), 중궁, 염유 등이다.

이 중에서 제일 언급이 많이 되는 제자는 안회, 자로, 자공이며, 이 3명은 공자 제자의 삼대장이라고 할만하다. 안회는 어질고 똑똑하며 지혜롭고, 자로는 힘이 쎄고 장군감이어서 용감하며, 자공은 상인 출신이라 돈이 많아서 공자가 힘들 때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으며 인맥이 넓었다.

그 외: 담대멸명, 복부제, 원헌, 공야장, 남궁괄, 공석애, 안무요, 상구, 고시, 칠조개, 공백료, 사마경, 번수, 유약, 공서적, 무마시 - 여기까지 논어에 기록이 있는 제자들이다.

이하 언급되는 제자들은 논어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일부는 공자가어, 사기 공자세가 등에 짤막하게 일화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공견정, 공량유, 공서여여, 공서잠, 공손룡, 공조구자, 공충, 공하수, 교선, 구정강, 방손, 백건, 보숙승, 상택, 석작촉, 숙중회, 시지상, 신당, 악해, 안고, 안조, 안지복, 안쾌, 안하, 안행, 양사적, 양전, 연급, 염결, 염계, 영기, 원항적, 임부제, 적흑, 정국, 조휼, 좌인영, 진비, 진상, 진염, 진조, 칠조도보, 칠조차, 한보흑, 해용잠, 현성, 후처 등이 있다.

7. 공자 관련 문헌[편집]


공자는 작가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전해져 오는 것을 정리했을 뿐, 스스로 만든 책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시경을 정리하고 주역에 해설을 달고 (계사전), 춘추를 지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이 중에서 분명히 공자의 손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춘추의 경문이며, 나머지는 후대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계사전도 공자가 저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주역은 공자의 영향력이 아주 큰 경전이다.) 이러한 경전들은 대부분 후대에 제국과 같은 거대한 권력체의 후원을 받아 경전화될 때 성립되기 마련이다. 논어도 공자의 책이 아니라, 공자와 그의 제자 또는 관련된 사람들의 언행을,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공자는 이론보다는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인생에 대한 각종 일화와 기록의 일차적 소스로 가장 유명하고 진실성이 가장 높으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것은 당연히 논어. 그렇지만 예기에서도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공자와 관련된 일화를 상당히 많이 확인할 수 있다.(예: 가정맹어호) 그 외에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한나라 시기까지 구전되거나 기록에 남아 있던 각종 일화들을 모아 놓은 공자가어도 중요한 소스. 사마천사기의 '공자세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 한편의 완성된 전기로 만들어 놓은 현전하는 최초의 문헌이며, 당연히 위의 소스들을 이용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제외한 다른 자료들은 단편적이거나 위서이거나(예: 공총자) 실화라기 보다는 우화에 가깝거나(예: 장자) 위의 자료들을 이용한 이차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8. 평가[편집]



8.1. 국내[편집]


유학이 한국 사회에 들어온 이래로, 공자는 맹자와 더불어 공맹으로 불리며 유교사회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집에 들어와선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공자의 취지이다. "면서 한국의 '풍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 안에 이미 공자의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공자의 인(仁)사상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말했던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의 정신과 일치하는 면이 있어 예로부터 한국인의 정서와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고도 볼 수 있다. 삼국유사가 거꾸로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삼국유사를 지은 사람이 불교에 충실했던 일연 스님임을 생각해 볼 때, 홍익인간은 공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사상이 아니라 불교의 자비정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되며, 한국사회에 유교가 잘 정착했던 것은 '한국에 있던 내재적인 정신 문화'와 '외부에서 들어온 공자의 유교문화 - 인(仁)사상'이 일치하는 면이 있어 받아들이기 쉬웠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아무튼 공자의 사상이 들어온 이후 수많은 유학자들이 유교의 가르침을 통해 과거에 등용되어 학문을 펼쳤으니, 한국에서의 그 위상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자의 사상은 현대에도 많은 영향을 끼지고 있다. 유교적 불교, 유교적 기독교, 유교적 자본주의 등으로 변형되어 한국사회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이러한 유교화된 사상들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중 공자의 인(仁)사상은 '친족 중심에서 그 외연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여러 문제를 야기시킨다. 특히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엘리트 사회 구성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는 공자 사상의 고질적인 문제로 제기되어 왔으며, 이런 반감으로 인해서 2000년대 초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와 센세이션한 흥행을 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경(敬)사상 역시, 조선 후기 신분질서를 강화하고자 변질되었던 성리학이 일제강점기, 군사정권때 까지 이어져 나이가 조금이라도 많다면 깍듯이 높임말을 쓰는 상명하복의 예절로 변질되어 버렸다. 하지만 공자는 공자 자신의 나이보다 많거나 비슷한 또래의 제자들이 있었다. 오늘날 같이 한살 차이에도 민감하게 순서를 매겨서 윗사람의 말에 강제적으로 존대말을 요구하는 이러한 문화는 한국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군대문화를 청산하지 못한 변형된 유교문화의 잔재라고 봐야 한다.

현대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공자의 사상 중 일부가 현대 법치주의와 평등주의 사상에 반대되는 부분이 있어서 꾸준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논어》에서 공자가 "오직 여자[33]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겸손하지 않고, 멀리 하면 원망하느니라" 라고 말한 부분과, 《공자가어》의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부분 등은 여자를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했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삼종지도는 어려서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식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데, 삼종에서 종(從)은 '쫓아가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은 시대적 한계가 잘 보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칠거지악은 칠출(七出)이라고 하는데, 남자가 여자를 쫓아낼 수 있는 7가지 경우이다. 근데 이것은,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가지지 아니하는 오불취(五不取)도 있어서, 칠출에서 여자의 나쁜 점을 열거하고 오불취에서 남자의 나쁜 점을 열거하므로, 최근에는 칠거지악에 대해서 잘 언급하지 않는다. 유교의 나쁜 점을 말하는데 있어서, 삼종지도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삼종지도가 그만큼 악랄하다고 볼 수 있는데, 여자를 밥짓는 존재로 보고 집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구속하기 때문이다.[34] 현대의 학자들은 공자는 사람을 그렇게 중시하고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마라'라고 까지 말했는데, '저렇게 여자를 낮추어보고 속박하는 말을 했을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삼종지도처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사람을 가두어두려고 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예(禮)와도 큰 차이가 있다. 사람과 예의를 중시했던 공자가 저런 말을 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여성을 비하하는 부분은 몇구절에만 한정되어 있어서, 최근에는 '후대의 제자들에 의해서 덧붙여진 문장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 까지 삼종지도의 말은 공자의 말로 여겨져 왔으며 또한 이러한 구절들을 가지고 공자의 권위를 이용해서 조선 중기(숙종 이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자유를 구속하고 단지 밥짓는 존재로 여겨왔던, 과거의 미숙함은 반성하고 고쳐져야 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250년 전도 아니고 2500년 전 사람에게 현대의 성평등 개념을 들이미는 것은 어불성설인 데다, 이는 딱히 공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서양 철학의 대부들도 공유하고 있다는 걸 생각할 필요는 있다. 아무래도 국내에서는 유교가부장제와 연관되어 해석되다 보니 유교의 총본산인 공자에게 유독 가혹하게 성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는 하는데, 가부장제는 유교의 산물이 아니며,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은 여성에게 교육과 정치 참여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성차별주의자라는 평가를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든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억울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애초에 유교 자체도 공자가 뿅 하고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정리하여 생겨난 것이다.

물론 아예 부정적인 것만 있는건 아니라,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호학(好學) 사상같은 공부 장려 문화는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다만 이것도 현대판 입시지옥 수능제도의 문제점이나 제사 문화 등의 비합리성 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해서 문제지만. 뭣보다 과거 유교 국가의 현실은 하류층에게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글을 읽고 쓰면서 유학을 공부하는 것은 오로지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법치주의적 문제에서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 있다. 효(孝)와 시스템 중 무엇을 우선하냐는 문제에 있어서,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고장에 마음이 곧고 바른 사람이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이를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우리 고장의 곧은 사람은, 그와 같지 아니합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니, 진실로 곧음이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말한 부분은 우리나라 현행법에도 '효'의 개념으로 일부 반영되어 있어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유교적 전통을 받아들이고 체화시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부분 엄연히 우리의 고유한 .의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효’라는 우리 고유의 전통규범을 수호하기 위하여 비속이 존속을 고소하는 행위의 반윤리성을 억제하고자 이를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 2008헌바56

국내 형사소송법 제224조 및 제235조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이 법률로 인해 자녀는 절대로 자기 또는 배우자의 부모를 고소, 고발할 수 없지만[35] 부모는 자녀를 상대로 자유롭게 고소, 고발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상대로 거짓 고소, 고발해도 자녀는 방어할 수가 없다. 이 법률 때문에 자녀가 부모를 무고죄로 고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위헌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헌법재판소유교적 전통을 이유로 들어 합헌결정을 내렸다.

8.2. 현대 중화권[편집]


중화권에서도 공자는 오랜기간 성인으로 취급받았지만, 청나라 말기 서방 세력의 침입을 받고 근대의 서양식 사고관이 퍼지기 시작하며 유교는 당시 서방에게 청이 뒤쳐지게 된 원흉 취급받게 되는데, 연장선상에서 지식인층으로부터 공자도 격하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전근대성의 상징마냥 까이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였는데, 마오쩌둥식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의 후진성·전근대성의 원인을 역사 속에서 찾았고 이 때 타깃이 된 것이 유교의 수장인 공자였다. 이에 따라 한동안 중국에서는 '공자 지우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조상 숭배가 금지됐고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공자를 깎아내리는 캠페인이 전개됐다.[36]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대혁명 와중에 취푸의 상당수 유적이나 문화재가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파손되는 수모를 겪었다.[37]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지나고 나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성론이 사회전반적으로 확산되자 공자의 위상도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다. 취푸의 유적과 문화재도 복원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면서 일종의 신토불이 사상과도 결합되어 근대 공산주의 이전에도 중국엔 위대한 사상가들이 있었다는 식으로 공자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38]

다만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워낙 강했기에, 중국 내에서는 여전히 공자를 고리타분하거나 전근대의 상징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기도 하고[39], 입으로는 공자를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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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중국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사진 맞은편에 10m 높이의 공자 동상이 세워졌다.
2012년 취임한 시진핑은 2013년 11월 산둥성 취푸에 있는 공자묘를 참배하고 또 공자연구원에서 연설했다. 공산당 창당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시진핑은 2014년 5월 베이징대의 유학자 탕이제 교수를 예방했다. 시진핑이 2014년 9월 공자 탄생 2565주기를 기념하는 회의에 참석해 담화를 발표했다. 2015년 6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주요 부처 공무원들이 중국고전철학 전문가로부터 공자를 비롯한 옛날 학자들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을 의무화 시켰다고 한다. 상공부, 교육부 등 중국 정부의 관료들은 당시 날짜를 정해 돌아가면서 하루에 2시간씩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2500년도 더 된 시절에 공자가 했던 발언 등을 들으며 효도 등 유교 사회에서 강조됐던 덕목을 따를 것을 권고받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진핑이 유교사상 배우기를 강조하는 것은 서구 정치사상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해석했다.

천라이 칭화대 국학연구원 원장이 2015년 7월 중공중앙기율검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유가 문화가 중국 공산당원의 수양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학습에도 초청을 받아 강연했다. 대륙 신유학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중국 정부가 유학을 존중하겠다는 신호로 보는가 하면 전통 사상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중국몽’ 제시를 탈 서구 프레임이 가동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륙 신유학의 대표자 격인 베이징사범대학 천밍 교수는 ‘중국몽’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의 탈피로 설명한다. 반면에 간춘쑹 베이징대 교수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국가와 신유가는 여전히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산당이 유가를 이용하려 한다면 유가는 공산당을 교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만 공자가 복원되는 것은 좋은데 그 과정에서 공자의 이름이 지나치게 상업화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중국 사교육 업계에서 공자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고 공부가주나 공부채도 특산물화되어서 중국 전역에 팔려나가고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였으면 지역 발달을 위한 이해할법도 한 조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취푸 시 당국에서 단순 지역홍보를 넘어 유적지 일부를 호텔로 전용하거나 심지어 공자의 이름을 내건 복권을 발행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돈벌이를 위한 행보를 보이고 빈축을 사고 있다. 이러한 상업화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공자가 중국 최고의 브랜드라는 비아냥 조의 농담이 나올 정도. 다만 이러한 돈벌이가 취푸시 재정이나 공자 가문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자 가문 후손들[40]이 이러한 상업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 돈벌이를 해서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공자 복원은 국가주도로 이루어지는 만큼 공자에 공산당 끼워팔기를 하고 있다. 이게 너무 심해서 미국에서는 2018년에 공자학원이 스파이 혐의로 폐쇄되었을 정도 결국 공자학원은 2020년을 기점으로 전세계적으로 폐쇄 행렬이 줄을 이었다.[41]

중화민국(대만)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국부천대로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인 쿵더청이 직접 제례를 지내고 '중화 문명'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대만에선 당연히 공자에 대한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42] 오히려 대만이 민주화하고 타이완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커지면서 공자에 대한 관심도가 옅어지고 있다.

8.3. 서양의 평가[편집]


로타 폰 팔켄하우젠의 저서인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43]에 따르면, 공자는 주나라 정치인인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이상화하여 주나라의 의례 제도 개혁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공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서주 초기에 (상나라와는 다른 주나라만의) 의례 제도 개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공자는 주공에 의해, 상나라와는 다른 주나라만의 의례 제도가 수립되었다고 보았고, 그때의 의례 제도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제로 고고학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상대의 의례 제도는 주초에 계승되었고, 주초부터 공자 대까지 최소한 두 번 이상 의례 개혁이 있었다. 공자가 회복하고자 했던 의례 제도는 기원전 850년, 즉 서주 말기 이왕 혹은 여왕 대의 일이라는 것. 의례 제도 개혁을 단행했던 이유는 정치적 혼란과 특권 계층의 유지에 있다. 주나라의 왕위는 부자상속이므로 제7대 천자 의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동생이 왕위에 올라 제8대 효왕이 되었다. 후에 의왕의 아들은 효왕의 사망 이후 제9대 이왕으로 즉위했다.

바로 이 시기의 부자 상속의 단절과 회복에 대한 정치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해 의례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상하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특권 계층인 귀족의 수가 많아졌고, 특권을 누리는 귀족의 수가 많아지면 국가의 입장에선 자원이 너무 많은 이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는 손해라는 것이다. 또한, 특권을 상속하기 위한 귀족 내부의 다툼도 심해지게 되니 의례 제도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제사라는 행위는 단순히 조상의 넋을 기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바로 그 조상의 후손이며 조상의 제사를 위해 공동체가 집단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공동체의 내부적 단결과 집단적 기억[44]을 하는 기능이 있다.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기원전 850년 의례 제도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실제로 그 시기에 갑자기 주 문화권 내부에서 의례 제도가 개혁되어 나타난다. 요약하자면, 결국 공자는 주공 대가 아닌 기원전 850년 의례 제도 개혁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그 시기의 의례 제도를 주공 때 의례제도라고 잘못 파악하였다는 것. 이러한 이유는 공자와 공자 이후의 유학자들의 철학적인 공상 때문이다. 주공 시절을 이상화하다 보니 역사상의 사실관계보단 주공, 혹은 주초를 유가적인 이상화 했다는 것.

그 밖에 라이프니츠는 공자의 사상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고, 근대 이후 이름난 소설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그의 최대의 걸작 유리알 유희에 공자의 예악사상을 녹여넣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카스탈리엔은 마치 동양의 한림원같은 느낌을 주며, 대가는 이들의 수장으로서 동양에서 말하는 군자의 풍모와 매우 비슷하다.


9. 기타[편집]



9.1. 불우한 인생[편집]


일단 아버지가 육십 노인에, 어머니는 십대 중후반의 꽃처녀였다. 태어난지 3년도 안 되어 아버지가 사망했고, 공자는 부친묘의 위치마저 장성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생아였다. 무녀의 자식이다보니 평범한 사람과 다른 세상을 접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공자 나이 십대 중후반에 사망했다. 신분이 천해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45] 공자가 경험한 일들은 정말로 다양한데, 장례식을 돕는 일, 종묘의 제사를 돕는 일, 창고를 관리하는 일, 수레를 모는 일 등등 온갖 허드렛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틈틈히 학문을 가까이하여 마지막으로 사학을 설립해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나이 들어 학문이 어느 정도 자리잡자 십 수년을 주유 열국하며 자신을 등용해줄 사람과 인을 구현할 나라를 찾아 떠돌아 다녔으나 온갖 조롱, 비판, 죽을 위기 등등을 거치면서 절망을 반복했고 끝내는 이름 뿐인 국부 하나 얻어 죽기 3, 4년 전에 노나라에 돌아왔다. 정치적 야망은 전부 무너졌다.

그래도 학식이 대단하고 인품이 지극히 높아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는 있었지만, 노나라에 돌아온지 첫해에 아들인 백어가 사망. 그 다음해에 수제자 안회가 이제 꽃을 피워볼려는 참에 사망. 그 다음해에 가장 친한 자로가 살해당해 젓갈이 되어 돌아왔다. 이 3단콤보를 맞은 공자는 노년의 나이에 심적 충격을 너무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세 제자 중의 마지막 한 명인 자공이 돌아오는 걸 보고 사망했다. 결국 살아서 정치적인 야망을 무엇 하나 달성하지 못했고, 자신의 학문의 적통을 이어줄 안회는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사실상 살아서 정치적이나 학문적이나 마땅한 무언가를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치적, 학문적 야망은 죽고나서야 동양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얄궂다면 얄궂은 일일 것이다.

9.2. 식습관[편집]


공자의 생활습관을 설명한 논어 향당편을 보면 미식가로 나온다. 고운 쌀로 만든 밥과 가늘게 썬 를 즐겼고 색깔이 나쁘거나 나쁜 냄새가 나거나 제철 음식이 아니거나 알맞게 익히지 않거나 올바르게 자르지 않으면 음식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음식에 어울리는 장(醬)이 없어도 음식을 먹지 않았고 고기가 많아도 밥보다 많이 먹지는 않았다. 술이나 육포는 집에서 만들지 않고 시장에서 사온 것은 먹지 않았고 생강을 꾸준히 먹었으며 을 마셔도 취해서 흐트러질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9.2.1. 공자식인설[편집]


공자에 대한 낭설 중 인육을 먹었다는 설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을 팔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특히 1990년대에 재미교포 폴 임 박사가 쓴 '책 속의 책'에 나온 공자가 인육을 즐겨 먹었다는 내용으로 인해 이러한 인식이 퍼졌다.[46] 여기에 더해 일본 극우파의 사주를 받는 대만인 어용학자 황문웅이 이런 주장을 더 퍼뜨렸다.

본래 그는 양고기, 사슴고기, 토끼고기 등의 고기로 만든 일종의 젓갈인 해(醢)를 즐겼는데, 이를 중죄인의 시신을 젓갈로 만들어 버리는 당시의 형벌과 연관시켜서 마치 공자가 사람고기로 만든 젓갈을 즐긴다고 왜곡한 것이다. 식인은 사람을 중요시하는 유가의 이념과 몹시 다를 뿐더러 공자는 제자인 자로가 권력 싸움에 휘말려 죽고 그 시체가 해로 만들어지자 그 충격으로 평시 즐겨먹던 평범한 해를 다시는 가까이하지 못했다.

공자의 유학을 계승한 맹자의 서적인 "맹자- 양혜왕 편"을 보면 "옛날에 공자께서는 '처음으로 사람 모양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순장에 쓰이게 한 자는 후손이 없을 것이다.'라 하시며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조차도 귀히 여길 것을 역설하셨습니다."라며 맹자가 양혜왕에게 백성의 목숨을 중히 여길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진짜 순장은 커녕 인명이 희생되지 않는 가짜 순장조차도 혐오한 공자이니만큼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유교를 떠나서, 원래 식인 행위는 현대에 비해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며 인권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었던 고대 중국에서도 분명한 비정상적 행위였다. 물론 전근대시절에는 영양상태나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긴 전쟁이나 기근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종종 나오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나오는 행위였지, 고대인이라고 해서 "먹을 거 없으면 사람 좀 잡아먹을 수 있지"란 식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설령 극단적 상황에서 나온 식인이라도 두고두고 지탄을 받는 행동이었다.[47]

9.3. 자손 대대로 이어진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편집]


부부관계는 본인은 물론 후대에까지 별로 좋지 않았던 듯하다. 공자, 공자의 아들, 공자의 손자인 자사까지 3대가 이혼을 했다는 말이 있는데, 예기의 단궁편의 다음 구절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 백어의 어미가 죽었는데, 1년이 넘어도 여전히 곡을 했다. 선생님이 들으시고 "누가 곡을 하는가?"라고 물으셨다. 문인들이 "리입니다."라고 하니 "에휴. 심하네…."라고 하셨다. 백어가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48]
→ 백어는 공자의 아들을 말하는 것으로, 리(鯉)가 이름이다. 즉, 아들이 엄마가 죽었다고 1년 동안 곡을 하자 그것이 심하다고 언급한 것.

  • 자사의 어미가 위나라에서 죽어서, 자사에게 그 소식을 알리자 자사가 사당에서 곡을 했다. 문인이 도착해서 말했다. “서씨의 어미가 죽었는데어째서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합니까?”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면서 그리고는 다른 방에서 곡을 했다.[49]
→ 자사는 공자의 손자로, 백어의 아들이다. 서씨의 어미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백어가 이혼하였고, 이혼한 전처는 서씨와 재혼했다는 의미이다. 즉, 왜 더 이상 이 집 사람이 아닌 엄마 때문에 공씨 사당에서 우느냐고 한 것.

  • 자상의 어미가 죽어도 상을 치르지 않았다. 문인들이 자사에게 물었다. "옛날에 아버님께서는 쫓겨나신 어머니의 상을 치르신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자사가 답했다. "있었지." "헌데 선생님께서는 왜 흰둥이한테는 상을 못 치루게 하십니까?" 자사가 말했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께선 도를 잃으시는 법이 없으셨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도에 견주어 보시고 그 예를 높일만 하면 높이고, 낮출 만하면 낮추셨지.(내 아버지께서는 능히 그리하셨으나) 내가 (도를 잘 헤아리지 못 하는데) 어찌 그처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 생각하기로는) 내 마누라가 흰둥이 엄마지, 내 마누라가 아닌 사람은 흰둥이 엄마가 아닐세!(…) 이리하여 공씨네 집에서는 이혼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자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50]
→ 자상은 공자의 증손자로, 자사의 자식이다. 흰둥이는 자상을 말하는 것. 즉, 자신의 아내가 죽어도 상을 치루지 않자 예전에 이혼한 어머니의 상을 치룬 적이 있는 자사가 왜 자기 자식에겐 그렇게 못 하게 하는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는 것. 돌아오는 대답인 즉슨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도에 견주어 보시고 능히 적절한 예식을 취할 능력이 되셨으나, 나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 마누라가 곧 자상이 엄마지, 내 마누라가 아닌 사람은 자상이 엄마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설화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 하다. 김용옥처럼 부계만을 강조하려고 사실이 아닌 장례에 대한 이야기로서 썼다는 해석도 있다. 여담으로 효자로 유명했던 증자도 아내가 부모가 좋아하는 찐 배를 잘못 쪄서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순자의 주장에 따르면 증자-자사학파의 계승자인 맹자 또한 아내를 쫓아낸 전력이 있다고 한다.『순자荀子』「해폐解蔽[51]」편의 이야기에 나오는데, 애초에 해당 편에서 이 말이 언급된 이유가 맹자를 아니꼽게 여기던 순자가 맹자를 깔 껀덕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유가 이유인 만큼, 카더라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날 맹자가 자기 방에 문 열고 들어갔는데, 마누라가 방 안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이에 기가 찬 맹자가 당장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엄마, 나 이런 무례한 애랑은 못 살겠어요!"라고 외쳤는데, 어머님 하시는 말씀이 "아니, 노크도 안 하고 귀신마냥 들이닥친 네 잘못인데 왜 우리 아가한테 성질이냐? 그리고 평소에 편안하게 쉬지도 못할 거면 방은 왜 만들어 놨겠니? 무례하기는 네가 제일 무례하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 맹자는 근본적인 잘못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고 이후 평생 마누라랑 알콩달콩 잘 살았다고 한다.


공자가 여성을 특별히 나누어 말한 기록이 드문데, 여자와 소인[52]만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 하면 원한을 품는다.[53]라고 말한 적은 있다. 여기서 여자의 의미에 대해 국가를 막론하고 논란이 분분한데, 공자는 이 문장 빼곤 여성을 차별하는 언동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가 시대다보니 그냥 여성 전체를 가리켰단 의견, 특별히 철없는 여성을 찝어 말했단 의견, 딸(女)과 아들(子), 남(女)의 자식(子) 등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54]

9.4. 역대 왕조가 내린 작위[편집]



9.5. 후계자[편집]


맹자는 요-순-탕-문왕-무왕-주공-공자로 이어지는 라인을 자신이 계승했다고 자부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도통론(道統論)이 된다. 공자-증자-자사-맹자까지 라인이 이어지고, 단절되었다가 송나라 때 다시 복구되었다는 식의 설명. 그런데 사실 맹자는 공자의 아티스트적인 측면을 생각해보면 공자의 최대의 이단일 수도 있다. 맹자가 공자의 후계자로 인정된 것도 송나라 때 성리학이 체계화된 이후.[55]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맹자를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왜 그런지는 맹자 문서로 가보면 안다. 사실 공자는 자신의 후계자를 안회로 생각했던 듯하나, 안회는 요절하고 말았다.


9.6. 공자 한국인설[편집]


웃기게도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은 공자를 한국인라고 주장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중국 인터넷에서 떠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많은 중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중국판 비정상회담인 스제칭녠숴에서도 이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다.

러시아 패널: 그래서 공자는 한국인이야 중국인이야?

(일동 당황, 민감한 질문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듯)

(한국인 패널만 어이없게 웃는다.)

한국인 패널 : 난 진짜 이게 어디서 나온 헛소리인지 모르겠어.

99.999999%의 한국인들은 다 공자가 중국인인 걸 알아.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한국인들을 대표해서 명확하게 말할게.

공자는 중국인이야.

(전 패널들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해줘서 고맙다는 듯이 한국인 패널에게 박수 갈채.)

얘기가 나오자마자 타 국적의 패널들은 마치 "방송에서 이런 민감한 얘기 꺼냈다가 싸움나는거 아냐?" 라는 식의 표정을 짓거나, 한국인 패널이 오해를 풀어주고 공자는 중국인이라고 말하자 '큰 결심했다는 듯이' 박수갈채까지 쏟아진다. 더 놀랍게도 해당 방송 후 웨이보나 바이두같은 중국 웹사이트에서 중국 네티즌들도 "이 방송을 계기로 오해가 풀렸다"는 댓글 반응이 많았다. 어디 옛날 방송도 아니고 2018년 방송분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별 일도 아닌데 저리 심각한 분위기가 되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공자가 중국인이라는데 한 치의 이견도 없다.[56] 오히려 대부분의 한국인은 '조선은 공자왈 맹자왈 하다가 망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공자와 유교를 은연 중 싫어하는 편이므로 한국사람이라고 우길 이유조차 없다. 한국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수구적이고 폐쇄적인 유교 문화를 혐오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중인데,[57] 그런 밀레니엄 세대에게 있어서 '유교의 창시자' 격으로 인식되는 공자는 사이비 종교 교주 수준으로 비춰지고 있다. 심지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유명 베스트 셀러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이다. 물론 젊은층이 얼핏 유교를 혐오하는 듯이 보이더라도 실제로 유교의 부정적인 면에서 자유로운가는 의문이 많이 남는 부분이지만 말이다. [58]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오래된 오해지만[59], 한국인들은 공자에게 관심조차 없어서 중국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지금도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공자를 자기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 굉장히 어이없어한다.

2020년을 전후해서는 중국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점점 증가하면서 자기들부터 만물중국설을 주장하고 다니니까 다른 나라도 그런 줄 안다고 까기도 한다. 또한 공자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노나라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 같은 헛소문의 근원은 과거 일본 넷우익들이 공자 한국인설을 퍼뜨린게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에서도 비난받는 환빠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공자 동이족설을 말하여 빌미를 제공하긴 한 부분도 있지만[60], 이는 한국의 일반인들은 모르는 극소수의 비주류 의견이며, 한국 학계 내에서도 인정하지도 않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내용이다. 2000년대 초~중반 시기 이런 한국기원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유행했으며 넷우익들이 번역한 이러한 한국기원설이 일부러 중국으로 재번역되어 흘러갔고 각종 오해의 근원이 되었다. 일본인들의 한국기원설 유포 작전. (그것이 알고싶다 839회) 일본인들의 한국기원설 유포 작전. (일본사이트)

10. 대중매체에서[편집]



10.1. 삼국지 시리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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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14
삼국지 11에서는 고대무장 중 1명으로도 참전(본명인 '공구'로 등장). 특기는 '인정(소속 도시 무장들의 충성도가 떨어지지 않음)'. 능력치는 73/68/84/87/85로 유교의 창시자란 명성엔 걸맞지 않는편. 특히 정치력 부분이 논란이 컸는데, 공자가 행정가로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묘한 부분이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이상으로 삼은 정치를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것도 일정부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력이 문관치고는 꽤 높은 편인데 이는 그가 힘이 좋고 강궁을 능숙하게 쏜다는 고증이 반영되어 있다.

혐오무장은 법가의 신봉자였던 진시황 영정과 비슷하게 합리주의자로 포장되어 있는 조조. 전반적으로 후손을 죽인 것 때문인가? 이런 설정은 조조를 법가라고 의식하는 일본의 성향 때문인 듯도 한데[61], 조조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법가라고 보기 힘들며 당장에 조조 자신부터가 당대의 지식인으로 공자의 말이나 유교 경전을 인용하기도 했었다. 애당초 한나라 이후 유가 사상은 함부로 배척할 수 없는 사상으로 자리잡았다는 걸 생각하면 좀 미묘한 부분.

삼국지ds2에서는 통솔 90이 넘고 무력도 처음부터 70이 넘는다. 그래서 군사,시중,장군이 다 되는 놀라운 사기 능력치. 조조보다 더 사기인 것 같아

삼국지 12에서는 유교의 창시자라고 재평가를 받았는지 능력치가 68/70/92/87로 지력이 대폭 상향되어 A급 책사 정도의 능력치가 되었고,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에도 소질이 있었다는 걸 반영했는지 무력도 쩌리 잡무관보다 높은 70까지 올랐다. 전법은 오리지널에서는 진정. PK에서는 도발.

삼국지 13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다. 특기는 상업 3, 문화 9, 순찰 5, 설파 6, 교섭 8, 언변 8, 인덕 9이며 일기는 없다. 전수특기는 문화이다. 공자가 배우기를 좋아해 다방면의 지식과 예술을 습득하고 제자를 많이 들여 가르쳤으며 그의 사상적 특징이 인(仁)으로 정리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적절한 특기선정. 병과적성은 창병 B에 기병과 궁병이 C이며 중신특성은 화기생재, 전법은 후방지원으로 아군의 사기↑(+10) / 부상병 회복↑(+10).

삼국지 14에서 능력치는 통 70/ 무 66/ 지 85/ 정 87/ 매 97 이다. 개성을 보면 그에 걸맞게 명성이나 학자 그리고 악주를 반영했다. 전법 또한 후방지원용으로 딱이다.

삼국지 인터넷에도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통솔력 89, 무력 80, 지력 99, 정치력 90, 매력 98.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애매하고 외교용으로 사용하기도 애매한 어중간한 위치로 등장한다. 하지만 제갈량, 초선, 장각[62]과 함께 낙뢰를 쓸 수 있는 장수이다. 낙뢰의 발동확률이 거지같아서 그렇지.


10.2. 기타[편집]


  • 네이버 웹툰 덴마의 등장인물인 공자의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 특히나 에서 이름이 밝혀진 후, 등장인물인 지로의 이름에 점 하나만 찍으면 공자의 애제자 자로가 되는 것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전국시대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등장하는데, 고우영 특유의 미소년 캐릭터로 등장시켰다. 일지매, 고우영 초한지의 한신 역을 한 캐릭터가 그 것.

  • 공자가 주인공인 영화도 있다. 쌍권총 쓸 거 같은 공자님이 나오는 2010년 영화로 국내 개봉 제목은 '공자-춘추전국시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근엄한 군자인 공자와 그를 핍박하는 소인배들 구도라 그래서인지 영화 내용이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매우 건전한데, 이 건전성이 지나쳐 정말 '공자님 말씀'이다. 공자의 삶을 따르고 싶은 유학도나 위대한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중국인이라면 모르겠지만, 해외의 관객이 즐겁게 보기엔 어려운 영화다. 오죽했으면 영화 평 중에선 '이 영화보다 논어를 읽는게 더 재밌을듯'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 2015년 드라마 대송전기지조광윤에서 송태조는 국자감에서 무릎꿇고 공자의 제를 올렸다. 신하들이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송태조는 공자는 제왕의 스승인데 어찌 서서 제를 올릴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10.3. 애니메이션 〈공자전〉(1995)[편집]


한국과 대만 일본의 합작으로 제작이 된 애니메이션이 있다.

원작은 대만의 만화가 정문(鄭文)의 "동주영웅전 (東周英雄傳)"을 기반으로 하였고 감독은 데자키 오사무이며 NHK, KBS, PTS 등지에서 방영되었다.

내용은 제자인 자공과 증삼이 스승 공자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되며 전체적으로 여러 에피소드들을 그럭저럭 잘 재연하고 있다.
공자가 주인공 보정인지 나름대로 미중이고 곱게(?) 늙는 편. 공자의 문무겸비의 면모를 부각하려고 했는지 싸움 장면도 몇몇 등장한다. 가령 제나라와 노나라의 회담 때 등장하는 춤꾼들과 광대들은 본래 역사에서는 말로 쫒아냈지만 여기에선 직접 칼싸움을 해서 물리친다. 사실은 칼싸움 정도가 아니라 춤꾼과 광대들 중에 한 사람의 팔을 두부자르듯 자른다. 그런데 정작 자로와의 첫만남 때는 흔히 알려진 '참교육'이 아니라 설교로 감화시키는 모습으로 나온다. 공자의 한국판 성우는 유강진, 자공 역은 장세준.


11. 타 문화권에서[편집]


원나라 무렵에 유입되어 현지화된 중국 이슬람 신도들 중 일부는 공자를 신이 보낸 예언자 중 하나로 본다고 한다. 대충 예수급이랄까.

로코코 시대 무렵, 유럽의 귀족들은 당시 전해졌던 중국의 문물과 문화, 사상들에 동경심을 갖고 이를 부단히 수입하였다. 이를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도 하는데, 특히 여러 계몽주의자들은 심지어 공자의 사상뿐 아니라 노장사상, 유교문화 및 과거 제도 등등이 서구권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프랑스계몽주의 철학자였던 볼테르는 공자를 두고 "공자는 어떠한 종교도 가르치지 않았고 어떤 종교적 기만도 쓰지 않았다. 그가 섬긴 황제에게 아부하지도 않았고 황제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경전 안에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도덕을 보았다. 단 한명의 중국인만이 그를 부정했고, 그는 보편적 저주를 맛보았다."며 공자의 사상에 매우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였고,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였던 크리스티안 볼프 역시 "그는 그리스도가 유럽에서 받는 것과 똑같은 대우를 중국에서 받는다."라며 공자와 그의 사상이 중국에서 갖는 위상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바가 있다.

필리핀 마닐라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공원인 리잘 파크의 한켠에는 중국식 정원인 '차이나 가든(별도 요금 징수)'이 있는데 이곳에도 공자의 동상이 있다.(물론 필리핀 내 화교들이 세운 것일 테지만) #


12. 기념일[편집]


성균관대학교기원이 기원인지라 공자의 탄신일인 매년 9월 28일에 쉰다. 이 날을 공부자탄강일공탄절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춤 추고 노래 연주하고 술 마시는 일종의 공자 생일파티다. 진사식당에서 무료로 밥도 먹을 수 있고, 생일파티 때 공자에게 올린 술도 나누어준다. 종교단체로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문화적 영향력이 있어서인지 정계, 재계에서도 많이 참여하는 편. 팔일무(八佾舞)를 볼 수 있는데, 문무와 무무로 구성되어 있다. 춤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댄스와는 비교 불가. 아주 느리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일하게 공자 생일에 쉬는 학교. 행정실도 연구실도 교수도 모두 쉰다. 이 날 에버랜드에 있는 대학생은 전부 성대생이라는 소문이 있다. 또한 입학식을 자연과학캠퍼스에서, 졸업식을 인문사회캠퍼스에서 거행하는데, 박사 학위 취득자와 졸업생 대표들이 성균관 대성전에서 제사를 지낸다. 대만에서는 공부자탄강일이 스승의 날로 지정되어있다.


13. 사당[편집]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곡부)에 사당이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하는 공묘(孔廟)가 바로 그것. 여기서 廟는 '사당 묘'로 무덤을 뜻하는 묘(墓)와 한자가 다르다. 공자의 무덤은 공묘(孔墓)라고 쓰며, 공묘(孔墓)는 공자와 공자 직계 혈연들이 묻힌 공림(孔林)의 안에 놓여 있다. 중국에서 '수풀 림(林)' 자가 붙은 묘지는 성인(聖人)의 묘지에 붙이는 것으로 한정되는데, 유구한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이 호칭으로 일컬어지는 묘는 공자의 공림과 후한 말의 관우의 '관림(關林)' 외에는 전무하다.

한국에 있는 성균관이나 궐리사(厥里祠)[63]도 공자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3대 공자 사당중 하나인 허베이성(河北省) 청더(承德) 러허원먀오(열하원묘)가 호텔로 개조되었다. 중국인들은 문화유적 훼손이라며 비난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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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 문묘(Văn Miếu, 文廟)내의 모습.
'만세사표萬世師表'를 써넣은 현판이 여기에 보인다.


14. 외부 링크[편집]


  • 孔子 - 중국어 위키백과 공자 문서
  • 공자 - 한국어 위키백과 공자 문서


1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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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양공 22년[2] 노애공 16년[3] 공자는 기본적으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지켰으나, 이를 부득이 한 번 어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맹자(孟子)의 말에 따르면, 바로 《춘추》(春秋)를 일으킨 '作' 이었다. 《춘추》는 본래 사서(史書)의 일종인데, 예(禮)에 따르면 사서는 오직 천자(天子)의 명으로만 편찬, 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春秋戰國)의 혼란의 시대상에 천자가 힘을 잃고 도덕이 문란해졌으므로 제대로 된 사서가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공자가 기존의 노(魯)나라 《춘추》를 토대로 하여 유가적 도덕주의를 기준으로 한 포폄서(褒貶書)를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는 《춘추》이다. 역시 맹자에 따르면, 공자는 자신의 《춘추》를 두고서 "나를 알게 하는 것이 《춘추》일 것이요, 나를 허물하는 것도 《춘추》일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맹자》, 〈등문공장구 하〉, 9장, 《주자집주》 기준.)[4] 공자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시경》(時經)의 시를 외거나 다른 사람이 부른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즐겼으나, 공자가 죽기 7일 전 스스로 만들어 부른 노래라는 것이 전한다. "태산이 무너지누나! 대들보가 부러지누나! 철인(哲人)이 시드누나!(泰山壞乎!梁柱摧乎!哲人萎乎! , 《사기》, 〈공자세가〉.)"[5] 중도(中都)는 노나라 수도다. 즉 서울특별시장격이다.[6] Baxter-Sagart의 재구음은 /*niŋ/. 어원상으로는 본래 '심장', '뇌', '마음', '알맹이' 등을 이르는 말이었다. 티베트어로 '마음', '영혼', '정수' 등을 뜻하는 snying과 동계어다.[7] 시(詩) 등 공자 이전의 문헌에서 '인(仁)'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만[6] 그 의미는 맥락상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 '사람다움'이라기 보다는 '남자다움', '사람 구실을 잘 함(유능함, 능력 있음, 다재다능함)', '사람 중의 사람(잘남, 빼어남, 잘생김)'에 가까웠다. 그 어원을 생각하면, (비유적인 의미로) '속빈 강정이 아닌', '알맹이가 있는'의 뜻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인'에 '휴머니즘'을 부여한 것은 공자가 최초이다. 《시경》(詩經)의 <숙우전(叔于田)>, <노령(盧令)> 참고. 하지만 공자도 원래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아서, 관중(管仲)의 업적을 칭찬할 때 이러한 느낌이 강한 '인'을 사용하기도 했다.[8] '군자(君子)' 역시 '인(仁)'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휴머니즘'의 색채가 별로 없던 용어였다. 시(詩) 등에서 쓰인 군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에 가까웠는데, 공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 됨의 필수조건이 바로 '인문 정신'과 '도덕성'을 갖춤, 즉 '인'함이라고 보았다. 공자가 이 같은 '인' 사상을 가진 채로 '군자'라는 용어를 쓰고, 공자가 유명해지며, 공자의 말이 확산되고, 공자의 말에 배어 있는 그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전파되면서, 공자의 '군자'가 종래의 '군자'를 압도함으로써 오늘날의 군자는 '도덕적 지성인'의 의미가 강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의 현상이 맹자의 '대장부(大丈夫)'에서도 보이는데, 다만 백가쟁명(百家爭明) 시대의 맹자의 말의 파급력, 장악력은 공자보다 덜했으며, 그 자신부터가 자신의 '대장부' 보다는 공자의 '군자'를 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맹자의 '대장부'는 종래의 '대장부'를 압도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9] 유가(儒家),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당시의 원시 유교에서부터 묵가(墨家), 도가(道家), 법가(法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등 수많은 타 학파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며(물론 꽤나 비우호적인 교류였지만) '생존'했다. 당연히 타 학파의 사상에서 온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그것을 자기 학파의 논리로 내재화해 오면서 명맥을 유지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맹자(孟子)는 공자의 최고 가치 '인(仁)'에 대항하기 위하여 묵자(墨子)가 내세운 최고 가치 '의(義)'를 오히려 공자식으로 강조해 '인의(仁義)'의 병칭어(竝稱語)를 유가적 개념어로 보편화시켰고, 순자(荀子)는 이에 더해 도가적 수양론(修養論)과 법가적 정체론(政體論), 명가적 명실론(名實論)을 비판적 수용하고 그것을 유가적 예치주의로 귀결시켰다. 중세 유교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性理學,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양명학(梁明學)도 그 당시의 경쟁 사상계(思想界)인 도교(道敎), 불교(佛敎)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성립한 것이었다. 산 속에 박혀서 자기네들끼리 1대 2대 3대 하면서, 순수하게 후계자 머리에서 불현듯 새롭게 튀어나온 사상만 새로 추가되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10] 또한 이는 공자 사상이 역시 주축이 되되, 공자 이외의 옛 성현(聖賢)의 사상도 유가 사상이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요(堯), 순(舜), 우(禹), 탕(湯), 이윤(伊尹),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태공망(太公望), 백이(伯夷) 등은 물론이요, 관중(管仲), 자산(子産), 유하혜(柳下惠), 안영(晏嬰), 섭공자고(葉公子高) 등도(물론 후자의 양반들은 공자보다 격이 떨어진다 여겨졌고, (비판할 땐 또 제대로 비판하긴 했지만) 후대 유가 사상가들이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가란 공자만 일종의 유일신마냥 받드는 종교가 아니었다. 맹자만 해도, 평소에 관중에 대해 심심하면 비판하더니, '하늘이 큰 일을 맡긴 사람'의 예를 꼽을 때 관중을 거론하고, 안영도 관중과 세트로 한 번 비판해놓고 제(齊)나라 선왕(宣王)을 계도할 때는 안영의 말을 인용하는 등 닫히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유하혜도 '조신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유하혜는 성인(聖人) 가운데 온화한 사람이었다.' 하며 이윤, 백이와 같은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또 백이도 '결벽 떠는 게 심했다'며 비판해놓고서, '백이는 성인 가운데 청렴한 사람이었다.'면서 칭찬도 했다.[11] 대성(大成)이라 함은 맹자가 공자를 평가한 말 중 '공자께서는 여러 성현들의 도를 살피시어 학문을 집대성(集大成) (수많은 지식을 한데 모아 변별하고, 그중 특히 선한 것을 골라 완전케 함으로써 그 도를 크게 이룸.)하셨다'에서 따왔다. 지성(至聖)은 '지극한 경지에 이르신 성인(聖人)'을 뜻하고, 문선(文宣)은 '문화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이로써 후대에 왕(王)으로 추존되었다.[12] 서구 선교사들이 붙인 호칭이므로, 고전 라틴어가 아닌 교회 라틴어 독법을 따라 'ci'를 '키'가 아닌 '치'로 읽는 게 더 옳을 듯하다.[13] 현대 중국 보통화로는 'Kǒng Fūzǐ(쿵 푸쯔)'로 읽는다. 라틴어 이름이 붙었을 당시의 중국 발음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14] 맹자도 이런 스타일로 '멘치우스(Mencius)'라 칭한다. 단, 맹자는 '부(夫)' 자가 안 들어간다. 즉 서구권에서 공자와 맹자의 이름은 '공부자우스',' 맹자우스'가 된다. 영어로는 [kənˈfjuːʃəs(컨퓨셔스)\], [mɛnʃiəs(멘시어스)\]로 발음. 이 두 사람이 라틴어식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는 두 명 뿐인 중국인이다. 그외 묵자(墨子)는 'Micius(미치우스)', 노자는 'Laocius(라오치우스)', 손무는 'Suncius(순치우스)'로 칭하기도 하나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15] 만세토록 모범이 될 위대한 스승. 공자를 지칭하는 대표적 수식어 중 하나다. 강희제 어필.[16] 천하의 모든 문화가 여기에 있다. 광서제 어필.[17]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것이 소중한 보석을 옮기는 수레와 같다. 함풍제 어필.[18] 공자가 모은 것으로써 그 도를 크게 이루었다. 가경제 어필.[19] 사람이 난 이래 그와 같은 성인은 없었다. 맹자 <공손추>편. 옹정제 어필.[20] 애초에 글이나 책을 소리내지않고 읽는 묵독은 아직 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음독을 했다.[21] 사실, 이 같은 교육 방식은 고대 사회에서는 흔했고, 지금도 원시적 부족 사회를 살아가는 세계 각지의 소수민족들이 이처럼 음률 중심의 활동을 많이 한다. 당장 아프리카뉴기니 등의 원시 생활을 하는 부족들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노동 등 활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다. 각 잡히거나 엄숙하게 앉아서 묵묵히 집중해서 일을 하는 문화는 문명이 상당히 발전한 시점에서 등장한 것이다.[22] 이 역시 공자가 살았던 시대가 고대 중국 사회였기 때문이다. 동서를 불문하고 문명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각 분야가 나누어지면서 학문과 실용성이 점점 멀어진다. 태고적 인류 문명은 제정일치 사회였고, 사회 활동은 원시종합예술이었다. 따라서 학문 역시 이론과 실무가 세분화되지 않았으며, 분야도 훨씬 단순했다. 이는 서양도 다르지 않아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그저 세상에 대해 탐구하고 사유했을 뿐이지만, 복잡하게 분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온갖 분야에 이름을 날린 것처럼 보이고, 그렇기에 이들이 더욱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처럼 복잡화 전문화만 안 되었을 뿐이지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매우 직관적이고 명료하게 파악하고 이를 정리한 능력은 평범한 사람이 따를 수준이 아니다. 원래 진정한 학문은 살보다는 뼈를, 수사보다는 핵심에 있다.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화이트헤드도 서양의 거의 모든 철학자가 플라톤 영향 하에 있다고 언급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괜히 이들이 성현으로 추존받는 것이 아니다.[23] 논어 술이편에서: 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24] 중국의 현학이 공격받았던 것도 현학이 헛공부만 하고 정치에 힘쓰지 않는다. 학문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고 하는 거고 학문을 익혔으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고 그 밖의 다른 건 학문이 아니다는 논리 때문이었다.[25] 이 수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후한 시대의 도량형으로 따지면 2미터가 넘지만… 물론 이 시대에는 키를 정확히 재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느낌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5척이면 매우 작은 키고 8척은 꽤 큰 키, 9척부터는 거인급.[26] 자로는 본래 지독한 폭력배였는데, 공자의 학당에 뛰어들어서 행패를 부리다가 공자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고 나온다. 감화의 방법은 이야기마다 다르지만 공자가 직접 주먹으로 감화(…)시켰다거나 혹은 팽팽하게 맞붙던 도중 공자가 이런 필부의 만용은 부질없으며 진정한 군자의 강함을 가르쳐 주겠다고 설득했다는 내용도 있다.물론 아동용 위인전에서는 이런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그냥 무술을 배운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버텼다고만 나온다.[27] 공자의 선조는 공부가정장공 시절에 송나라의 명장이었다.[28] 이런 제자백가 중 한 갈래인 묵가의 경우 수성(守城) 전문가 집단이기도 했다.[29] 고대 유명한 학자나 종교인들 중에서 무예와 관련된 자들은 상당히 많다. 애초에 전쟁이 흔히 일어나 무슨 일로 죽을지 모르는 시대였고 치안도 지금보다 훨씬 별로라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지켜야 하는 데다 노동의 강도가 높았던 시대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거구에 레슬링을 잘했고,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참전용사로 많은 전투에서 공훈을 세웠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본래 크샤트리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무함마드도 하디자 가문의 대상단을 이끌면서 기본적인 호신술과 군사들을 부리는 능력을 익혔다. 예수의 경우는 젊은 시절에 각지에서 다양한 학문과 기술을 익혔고, 목수와 건설업자로 일했던 몸이라 예수의 성전 정화 당시 채찍을 들고 상판을 다 엎어버리는 등 약하지는 않았다.[30] 다만 최술은 수사고신록에서 이는 후세 사람들이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맹자가 공자의 제자는 70명이라고 한 이야기를 더 신봉한것[31] 논어 자한편에서: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32] 논어 자한편.[33] 여기서는 여자 일반이 아닌 첩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다. 이 경우 뒤의 소인 역시 가정의 하인, 노비 등을 지칭한다고 해석.[34] 실제로 공자가어 삼종지도 관련 문장에 그대로 나온다.[35]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의 경우는 각각 특례법에 따라 예외적으로 직계존속을 고소할 수 있다.[36] 마오는 "린뱌오중국국민당이나 모두 공자를 존경하고, 법가(法家)에 반대하는 무리이다. 법가는 역사를 전진시켰고, 공자는 역사를 후퇴시킨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며 이 둘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 유명한 비공비림(공자와 린뱌오를 비난하자) 열풍이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37] 이 때문에 마지막 연성공쿵더청은 평생 중화인민공화국을 증오해서 후일 대륙에 남았던 친족들이 공부가주를 대접하자 불편한 기색을 보였고 곡부에도 방문하지 않았다.[38] 이는 당시 중공 정부의 입김도 알게 모르게 개입되었는데, 마르크스-레닌 더 나아가면 마오쩌둥식 공산주의 사상이 무너지던 냉전 막바지 시절 중공엔 이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고 그게 공자라는 것. 즉, 왕조 시대를 까는 중공이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 왕조 시대를 지탱하던 국가에 대한 충을 강조하는 유교를 다시 끌어오는 모순된 행보를 보여준 셈이다.[39] 멀리 갈 것 없이 한국만 해도 공자를 성인으로 추대하면서도 한편으론 전근대의 상징인냥 까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제사 문화에 대한 개인/연령대별 시선과도 비슷하다.[40] 물론 대만에 있는 직계 혈통은 아니고 남종계통이거나 방계 혈통이다.[41] 다만 예외적으로 한국은 국내에 중국인 유학생이 많다보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42]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중화민국의 국부격인 쑨원이나 후계자 장제스는 신앙심 깊은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이다.[43] 이 책은 특이하게 문헌 자료를 거의 택하지 않고 고고학 자료에만 의존한다. 이는 문헌에 개입된 '철학적 공상' 내지는 '주대의 이상화'가 실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44] 조상의 후손임과 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후손들간 위계(대종-소종), 자신들이 같은 공동체임을 기억하는 것 등.[45] 강신주는 공자의 모친이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근거로 강간을 했다고 추측했지만 딱히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공자의 모친의 신분에 대해 무녀라고 추측한 인물로 대표적인 학자는 김용옥이며 중국과 대만의 많은 학자들도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46] 참고로 해당 책은 아프리카의 코뿔소는 뿔이 하나 인도의 코뿔소는 뿔이 두 개라는 오류도 범했다.[47] 원래 공자는 주공 단을 가장 존경했는데 이는 주공이 과거 은나라에 있었던 괴이한 풍습을 순화하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괴이한 풍습에는 순장, 식인 등이 있었다. 그러니 공자가 식인을 했다는 말은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48] 伯魚之母死, 期而猶哭。 夫子聞之, 曰, "誰與哭者?" 門人曰, "鯉也。" 夫子曰, "嘻, 其甚也!" 伯魚聞之, 遂除之。[49] 子思之母死於衛, 赴於子思, 子思哭於廟, 門人至, 曰, "庶氏之母死, 何爲哭於孔氏之廟乎?" 子思曰, "吾過矣, 吾過矣。" 遂哭於他室。[50] 子上之母死, 而不喪。 門人問諸子思, 曰, "昔者子之先君子喪出母乎?" 曰, "然。" "子之不使白也喪之, 何也?" 子思曰, "昔者吾先君子無所失道, 道隆則從而隆, 道汚則從而汚。伋則安能? 爲伋也妻者, 是爲白也母, 不爲伋也妻者, 是不爲白也母。" 故孔氏之不喪出母, 自子思始也。[51] 가려진 것은 열어서 밝혀야 함[52] 마부노예를 뜻한다.[53] 논어 양화편 子曰,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近之則不孫, 遠之則怨[54] 뒤의 소인이 마부나 노비를 뜻한다면 여기서의 여자도 그에 준하는 낮은 계급의 집안 여성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채지충 만화에서는 이 대목의 여자를 첩실로 묘사.[55] 송나라 즈음하여 크게 융성한 도교 및 불교 사상, 그들의 세계론, 우주론에 대항하여 유가 사상이 존립하려면 유가 역시 그럴듯한 세계론, 우주론을 내놓았어야 했는데, 기본적으로 유가는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둔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분야에서의 얘깃거리가 적었다. 이때 주돈이가 『주역』과 전통적 오행설에 기반을 둔 『태극도설』을 지어 나름의 유가적 형이상학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유가적으로 정당화하려면 그 내용과 어떻게든 갖다 붙일 수 있는 유가 성현의 말이 필요했다. 그런데 공자는 형이상학적인 말을 아꼈고, 순자는 더 나아가 형이상학을 아예 거부하다시피 했다. 반면 자사나 맹자는 '천명으로서의 성'을 제시하는 등 그 이론에 형이상학적 색채가 있었다. 때문에 『태극도설』을 정당화해주기에 보다 용이한 자사, 맹자의 사상이 정호, 정이, 주자 등 신유학 운동가들을 거치면서 점차 선호되고 유가의 적통시되기에 이른 것이다.[56] 물론 이 중국인이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보냐는 문제는 있다. 알다시피 중국 대륙의 역사는 한족뿐 아니라 온갖 이민족들이 얽히고 설킨 역사라.. 하지만 최소한 공자가 한국사람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확실하다.[57] 일례로 2019년 한국의 서원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자 관련 기사엔 "썩을 유교 문화의 잔재를 뭣하러 기념하냐"는 투의 부정적인 댓글들이 베스트 댓글에 오를 정도. 기사1 기사2 유교 탈레반이라는 신조어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만큼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교의 평가는 극악을 달리고 있다.[58] 유교를 배척하는 듯 하면서도 사실은 유교의 부정적인 면모를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마치 자국 혐오를 하면서 동시에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과 비슷하다. 유교의 부정적인 면모는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와서는 전통적인 모습과 얼굴을 좀 바꿔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사람의 우열, 서열을 나누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사고방식, 승자독식 및 시험, 학벌 만능주의, 군대식 사고방식의 내면화(폐급, 미필 등의 용어를 흔히 사용하는 것도 한 예), 선후배 사이의 군기를 잡는 행동, 자기관리라는 미명하의 외모지상주의 합리화, (젊은) 꼰대기질, 다수자의 공동체에 대한 강박적 집착다수와 다른 사람에 대한 비하와 박해 등으로 어레인지해서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어떤 면에서 노년층 이상으로 젊은층의 심각한 문제점이기도 하다. 오히려 유교의 부정적인 면모는 그대로, 혹은 어레인지해서 강화시키면서도 긍정적인 공동체 의식이나 인간존중 같은 것은 버려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근래에 대중적으로 논해지는 유교에 관련된 담론에는 매우 여러가지 왜곡된 프레임이 개입되어 있어서 제대로 된 담론이라고 보기 힘들다.[59] 적어도 2천년대부터 떠돌던 루머다. 반대로 말하면 한중 수교와 인터넷 발달, 그로 인한 분탕종자들의 활동이 이런 거대한 오해의 시발점이라 할만하다. 이는 대만쪽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마잉주 총통 시절 한국인 유학생이 직접 총통한테 공자 한국인설이 왜케 대만에 퍼져있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억울함까지 호소할 정도였다.[60] 실제 근거 소스가 환빠 성향 학자들의 카더라성 글을 퍼간 해외 네티즌들이 이걸 한국인들의 주류 생각이라고 믿으면서 오해가 커진거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오해가 인터넷의 부정확한 정보에 의해 유통되는 것과도 비슷하다.[61] 특히 일본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조조는 '고리타분한 유가를 부정한 실용적, 법가적 인물' 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재밌게도 실제 조조는 사실 도가에 심취했다는 정황이 짙다.[62] 파워업키트에서만 등장, 시나리오 상에 장수 데이터는 버젓이 들어있으나 184년 시나리오가 포함되지 않은 탓에 등장하지 못하다가 파워업키트에서 가상시나리오에 등장[63] 공자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오산시논산시 노성면 2군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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