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가 된 영웅 (r1판)

편집일시 :




1. 개요
2. 원인
3. 현실 사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된 자신을 보거나."

"You either die a hero, or you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하비 덴트

처음에는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끝내 독재자로 바뀐 사례를 다루는 문서. 독립을 이끌어내거나 다른 독재자를 몰아내거나 국가의 위기를 극복해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집권한 뒤 독재자가 된 사례를 일컫는다. 이러면 이전의 좋던 평가는 사그라들고 독재자의 인상만 남는다.

현실에서는 시민 사회와 제반 체제가 미숙한 상황에서, 초창기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집권한 권력자가 타락하고 폭주하면 견제할 장치나 세력이 없어 일어나곤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신생 독립국의 영웅 대다수가 독재자가 되어버린 것이 좋은 예.

반대로 독재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되지 않은 영웅으로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조지 워싱턴 같은 이도 있다. 모두가 계속 대통령으로 남길 원하고 아예 조지 워싱턴을 황제로 모시자는 의견조차 있을 정도였다. 당시 사람들은 '근대 민주주의 공화국의 국가원수'이자 '대통령'이란 직위는 조지 워싱턴이 최초였기에 이것이 기존의 황제/왕과 같은 군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당장 조지 워싱턴 본인과 그를 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대통령을 임기제 황제 정도로 생각해서 호칭이나 세부적인 예법 등에서는 여전히 '폐하'란 호칭이나 3인칭화[1] 화법을 쓴 사례가 있을 정도. 그럼에도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을 연임 한 번만[2] 하고 깨끗하게 내려옴으로써 현대 민주주의 지도자의 시작이 됐고 이는 타국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2. 원인[편집]


타락하는 원인으로는 몇가지가 있다.

  • 권력에 대한 도취와 집착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권좌에 오른 뒤 그 권력 자체에 취해서 본래의 이상을 잊어버리고 이전의 압제자와 다를 바 없는 자로 변질하는 예가 있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도덕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피흘려 가면서 탈취한 정권인 만큼 어느 정도의 애착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는 민심 달래기+화근 제거하기를 목적으로 전 정권에 대한 숙청이 일어나기 쉬운데, 이 과정에서 '아, 우리도 정권 놓으면 이런 꼴을 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며, 결국 권력을 놓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재로 변질된다. 특히 정권이 안정적으로 수립되기 전의 초창기에는 반대파들을 더더욱 무자비하게 탄압하려는 경향이 있다.

  • 독선과 아집
훌륭한 리더가 있었습니다. 구성원들의 먹거리를 책임졌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자신만이 완벽한 리더라고 생각했고 영원한 리더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그를 독재자라고 불렀습니다.

소사이어티 게임/6화 클로징 나레이션
집권한 뒤에도 여전히 이상의 실현을 꿈꾸지만, 그 실현을 자신만이 이룰 수 있다고 여기고, 반대자 뿐만 아니라 부작용을 지적하거나 혹은 온건책을 주장하면 자신을 방해하는 악으로 치부하는 독선과 아집에 빠져서 결국 독재자가 되는 예가 있다. 이 경우 본인이 청렴하거나 어느 정도 유능하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러한 장점들이 자신의 독선과 아집을 더욱 합리화시키기 때문이다.[3]

  • 환경적인 한계
봉건적 습속에서 자라난 인간의 인습으로 민주주의를 배우고 외국의 민주주의 실천을 듣고 본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로 대체한다 해도, 봉건적 관념과 습속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봉암, <우리의 당면과제>
독재정권이나 식민정권 하에서 이를 전복하고 권력자가 된 경우는 그 자신이 압제 이외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4] 즉 압제 하에서 살다보니 점점 자신도 모르게 "국민들은 억눌러도 된다" 같은 생각이 무의식중에 새겨지게 되면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자신이 겪은 일들을 똑같이 수행하게 되는 경우이다. 또한 굳이 압제가 아니더라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한 직후인 경우 '대통령은 왕의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위의 권력에 대한 도취로도 연결된다.
김일성일제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빨치산을 이끌고 항일게릴라로 활동했고 특히 이 시기에 보천보 전투를 통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았다.[5] 하지만 소련에 의해서 북의 통치자로 내정된 이후에 숙청, 전쟁, 무력도발, 일인숭배, 인권탄압, 장기집권, 사치에 권력세습까지 온갖 만행이란 만행을 다 자행하며 최악의 독재자로 전락했다. 한편 이승만의 경우는 구한말(1875년)에 태어나서 청년 시절을 보내왔기 때문에[6] 당시의 '봉건적 습속'이 남아 있었던 것이 독재의 원인이 되었다 보기도 한다.[7]

  • 대안과 견제의 부재
온건개혁파들이 혁명[8]을 경계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덮어놓고 정부를 갈아엎으면 십중팔구는 붕괴 후 혼란기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식민정권이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정작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대안이 있더라도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독선과 아집 루트나 독재자가 되는 것. 사실 전장에서의 영웅적 행동으로 훈장을 받는 정도를 넘어서 보통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할만한 정도의 영웅이 나타난다면 십중팔구 이미 세상이 완전히 개판이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세상이라면 당연히 견제를 할만한 세력이 제대로 견제를 할 수 있는 법적 보호가 작동하지 않으니 독재자로 타락하기 쉬울 수밖에 없다. 붕괴 후 혼란기는 이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위에 나온 것처럼 반대파들을 제거하면서 그 견제 세력이 자연스럽게 소멸하므로 더더욱 폭주의 가능성이 커진다.

  • 권력욕의 화신이자 위선자
처음부터 단순히 권력 쟁취를 원한 형태이다. 즉 기존의 외세, 독재자를 물리치고 진정한 독립 지도자나 민주주의 지도자가 되는게 목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 권력만을 원했을 뿐이고 희생적인 모습은 철저한 위장에 지나지 않았던 위선자인 형태이다.

  • 군사적 지도자라는 출신의 한계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육가
혁명으로 독재 정권을 뒤엎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수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이며, 이는 많은 혁명과 쿠데타가 군대 혹은 군사적 집단에서 출발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렇다보니 그 군대 혹은 군사적 집단을 이끄는 군사적 지도자가 자연스럽게 새 정권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군대는 민주적인 논의보다 상명하복을 요구하는 조직이다. 이러한 조직에 장기적으로 몸을 담그고 있다 보면 나라의 지도자가 된 이후의 행정에서도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가 쉽다. 특히 정권 수립 후에는 산더미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차적 정의보다는 효율을 우선시 하게 되므로 독단적인 행정이 진행된다. 왕당파의 복벽과 외세의 간섭이라는 위협에 노출된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벌인 일들을 생각해보자. 게다가 그동안 혁명의 진행에 필요했던 카리스마와 위신은 독재에 이용되기 딱 좋다. 괜히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

  • 무력이라는 방식의 한계
위와는 비슷한 문제로, 혁명은 어찌되었건 대개 무력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는 과정이다. 설령 그 탄압당한 존재가 악이더라도 말이다. 결국 혁명가는 무력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할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며, 당장은 그 대상이 악한 독재자일 수도 있으나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3. 현실 사례[편집]


젊었을 적에는 보천보 전투가 한반도에 과장되게나마 알려지며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처럼 인식될 정도였으나[9], 이후 6.25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동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 한반도를 완전히 반으로 쪼갠 것을 넘어 극악한 학정사이비 종교 수준의 우상화를 자행하며 빈곤한 국민들과 정반대의 초호화 생활을 한 데다가 3대 세습으로 이런 실태가 영원히 유지되게 하며 북한을 2차 대전 이후 한 손에 꼽는 수준의 사상 최악의 독재국가이자 현 시점에서도 세계 최악의 최빈국 중 하나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으로 전락했다.

자유장교단 쿠데타에 참여하여 부패한 이집트의 파루크 왕정을 끝내고 혁명정부를 이끌었으나 대통령 집권기에 야당을 심하게 탄압하고 군부독재의 씨앗을 심었다.

코르시카의 하급 귀족으로 태어나 프랑스 왕국 군인으로 커리어를 쌓고, 프랑스 제1공화국의 제1통령이자 종신통령을 거쳐 스스로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입지전적인 인물. 그러나 약 10여년의 집권기 내내 전 유럽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인 끝에, 결국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일생을 마무리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극도로 갈리는 인물인데, 쉽게 요약하자면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일부 퇴보시켰을지언정 나름대로의 진취적 업적을 남겼고, 혁명가도 혁명의 동조자도 아니었지만 당대 유럽의 반동주의와 복고주의에 맞서 혁명의 유산을 지켜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10] 당대에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나폴레옹을 두고 "저기 절대정신이 간다"고 소리치는가 하면,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초창기 행적에 반해 교향곡을 헌사하려다가 그의 황제 즉위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제목을 바꿔버리기도 했다.[11]

본래는 미얀마의 독립영웅이었으나, 이후 군부 독재자로 전락해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나라를 한동안 세계 최악의 최빈국 중 하나로 만들었다. 참고로 론 놀이 어느 정도로 무능했냐고 하면, 그가 집권할 26년 동안 미얀마는 1인당 GDP가 50$를 넘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다.[12]

캄보디아의 독립영웅이었으나, 론 놀쿠데타에 이어 크메르 루주킬링필드로 캄보디아가 큰 피해를 입는 데에 일조하였다. 내전 뒤에 다시 왕정 복고를 이뤘지만, 끝내 훈 센의 독재와 입헌군주제 체제 하에서의 실권 없는 왕으로 만족해야 했다.

산디니스타 반군을 이끌고 소모사 가문의 독재정권을 끝장낸 혁명가였으나, 권력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부정선거를 동원해 계속하여 집권을 하려는 야욕을 보여 주고 있다.

정의개발당을 이끌고 터키 경제를 부흥시킨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2013 터키 시위를 시민들의 시위를 폭압적으로 진압한 데 이어서 군부의 쿠데타 시도마저 진압하면서 독재자의 반열에 올랐다.

로디지아 백인 정권에 맞서 조국을 해방시켜 넬슨 만델라조차 존경했을 정도의 독립영웅이었다. 그러나 후에 권력을 잡으면서 민간인 학살과 부정부패, 초인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경제 파탄으로 나라를 파탄내며 김정일도 능가한다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최악의 독재자가 되었고, 2017년에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후 2019년에 망명지 싱가포르에서 사망했다.

당시 국민당에 비해 매우 적은 군사를 가지고도 국민당군을 물리쳤다. 부패한 국민당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혁명과 확고한 중국 통일[13]을 이룩했으나, 집권 이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악영향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현재의 중국에서도 '공칠과삼'이라는 의견과 마오쩌둥 집권기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다.

1970년대 아프가니스탄이 대규모 기근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경제난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군부 내의 지지자들과 함께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자히르 샤 아프가니스탄 국왕을 내쫓아 부패한 왕정을 없앴다. 그 뒤 공화국 수립을 선포해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본인이 강압적인 독재자로 변신하여 국내의 불만을 더 키웠다. 끝내 1978년, 군부내 반대 세력들의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대체로 호평은 받는다. 물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나 일부 분리주의자 쿠르드족들에겐 예외.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갈리폴리 전투 등으로 큰 공을 세웠을 뿐더러 전쟁 뒤 열강과 숙적 그리스에게 찢길 뻔한 나라를 지켜냈다. 또 터키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죽기 전까지 권력을 잡았으니 독재자지만 터키 시민들은 그가 사망한지 75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자기 사후 자기 자식들이 자신의 인기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리라 걱정해 자식도 없었다. 현재 근대적 세속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상황에 비춰봤을 때, 어찌 보면 긍정적인 면모가 있다. 터키 사람들에게는 영웅으로 시작해 영웅으로 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터키에서나 터키인 앞에서 독재자라고 하면 영 나쁜 꼴을 볼 가능성이 크다. 단, 터키 정부조차 독재자임은 인정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장기집권에 성공한 데에는 케말이 수립한 세속주의 정권의 지나친 탈종교적 정책에 역으로 염증을 느낀 것이 한 원인이 됐을 정도이기도 하고. 독재의 사전적 뜻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행위로, 아타튀르크도 약 15년 동안 대통령 직에 있었다.[14] 물론 헌법과 민주적 절차에 따라서 선출한다면 대통령을 오래해도 독재자는 아닐 것이지만 당시 터키의 경우 일당제 국가여서 현대에 말하는 민주적 국가라고 보기는 힘든 상황. 또한 독재자의 여부는 뒷날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 인물을 그리워하거나 영웅시한다는 것과는 무관하다. 때로는 히틀러처럼 당시에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형식적으로 받았지만 독재자일 수도 있으니... 애초에 다른 많은 독재자들[15]은 그 당시나 현재에 높은 인기가 있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고, 엄연히 그 나라의 국부로 대접받는 사람도 있으니...[16] 이런 경우에는 가급적 관련 화제는 피하는 것이 좋다.

아랍 혁명 때 리비아 대표 악역으로 대중들이 알고 있지만, 사실 처음 집권 때만 해도 부패한 왕정을 타도한 국민 영웅이었다. 그래봤자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때는 이미 빼도 박도 못하는 악역으로 죽어버렸다.

무바라크를 축출하고 대통령에 올랐으나 파라오법과 이슬람주의 정책으로 대통령에서 다시 쫓겨났고 옥중에서 죽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국제경제, 정치 이론을 다듬고 실질적인 비전을 제시하여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고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17]를 건국하였다. 집권 이후에는 멘셰비키 등 소수파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자제하고 경제정책에서 제법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 등 소련의 초기 기틀을 닦았고, 세계 열국의 식민지들에 대한 해방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이후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체카 등 초법적인 감시·감찰 기구를 창설하여 훗날 폐쇄적이고 경직된 소련 사회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소련 해체의 여파와 보리스 옐친의 실정으로 빈곤과 분리주의에 시달리던 러시아를 떠맡아, 올리가르히를 청산하고 경제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았으며 체첸이나 조지아에서 국익을 수호하는 단호한 대처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집권이 장기화되면서 산업역량 확충에 대한 중장기적인 비전 없이 천연자원 수출로만 연명하던 경제는 한계에 부딪쳤고, 부패는 과거와 별 다를 바 없이 일상화되었다. 게다가 방사능 홍차로 대표되는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 그리고 크림 반도 강제합병처럼 자국의 역량을 상회하는 무리한 팽창주의로 서구와 대립하면서 그나마 있던 평가마저 깎아먹는 중이다. 심지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자국을 제대로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러 전쟁범죄자라는 낙인이 국제적으로 단단히 찍혀버린 상황이다. 파벨 그루지닌, 알렉세이 나발니 등 신세대 정치인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는 중이며, 예브게니 프리고진과 같이 푸틴에게 도전하는 측근들이 생겨나고 있는 터라 푸틴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소련 붕괴 후 혼란기를 수습하고, 경제개혁기간에 망가진 복지정책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범죄를 척결하고, 러시아어를 금지하려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게서 지켜냈지만, 어느새 폭압적인 통치와 각종 부정선거로 29년간 독재를 펼친 독재자가 되어 있었다.

아프리카의 위대한 개혁가 토마 상카라의 혁명을 도운 영웅 중 한 명이었으나, 이후 권력에 눈이 멀어 상카라를 직접 죽이고 최악의 독재자가 되고는 상카라의 정책들을 모조리 뒤엎어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부르키파나소는 현재 아프리카의 최빈국 중 하나가 되었다.

부통령 시절과 대통령 초기시절의 그는 이라크를 안정시킨 영웅적 인물이었다.

남수단 독립에 기여하며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정축재를 일삼고 부족 차별 및 경제적 무능에 이어 남수단 내전을 벌이면서 남수단을 소말리아 이상의 파탄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남미의 조지 워싱턴'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독립 뒤 종신 대통령으로 독재를 펼치다가, 혼란한 정계를 제어하는데 실패해 쓸쓸하게 은퇴했다. 다만 시몬 볼리바르독재자였음에도 부정부패나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인 보복을 삼갔으며, 당대 남아메리카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인종차별에도 반대했다. 당대 그란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의 강력한 통일국가 형성을 바라지 않던 미국유럽 열강들의 공작으로 인해 내분에 시달리던 상황이었으며, 시몬 볼리바르는 자신만이 그러한 내분을 제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연방이 그의 사후 콜롬비아·에콰도르·파나마·베네수엘라 등으로 사분오열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때문에 오늘날 남미 각국에서 볼리바르의 이름은 남아메리카 통합을 꿈꿨던 선구자로서 존경받으며, 볼리비아의 국명에도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이었으나 독립 뒤 내부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교도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종신 독재를 펼쳤다. 다만 수카르노를 몰아내고 집권한 후대 지도자 수하르토의 악명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다.

왕가의 핏줄임에도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라오스의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 체제를 수립했지만, 초대 주석에 오르고 나서 정적에 대한 탄압 등에 행보를 보여 이에 대해 비판을 받는다. 다만 크메르 민족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명목으로 옆 나라 베트남을 침공하고, 불명확한 명분을 내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크메르 루주폴 포트와는 다르게 제 발로 사퇴한 면이 있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비판은 적게 받는 편이다.

기니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노예로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자유민으로서 빈곤하게 사는 것이 낫다."라는 말을 남기며 기니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국가 중 최초의 독립국가로 만든 독립운동가였으나, 집권 후에는 자국민 5만 명을 학살한 폭압정치는 기본이고 프랑스가 독립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파괴한 인프라를 되살린답시고 실시한 사회주의 경제 정책의 실패로 경제까지 악화되며 악명 높은 독재자가 되었다.

억압적인 팔라비 왕조를 대체하여 이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나 세속주의 국가였던 팔라비 왕조보다도 더 억압적인 신정국가를 세워 여성, 세속주의자, 공산주의자를 극도로 탄압했고 무수한 사람들을 처형했고 반대파들에게 백색테러를 했다. 통치는 10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극히 억압적이라 세계 각국의 자유주의자와 인권단체의 비판을 샀고 그의 후계자 하메네이도 신정 국가를 유지한다.

자유장교단 쿠데타에 참여하여 부패한 이집트의 파루크 왕정을 끝내고 혁명정부를 이끌었으나 반대파를 처형하는 등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포르투갈을 대공황에서 구해낸 공로가 있지만 타고난 정치, 경제적 감각과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고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들마저 무력화시키고 종신 독재를 펼쳤다. 동시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폭정에 시달렸던 스페인의 참혹했던 실상에 비하면야 정치, 경제, 외교 모든 면에서 훨씬 안정적이긴 했지만, 국민 문맹 정책·미개발 정책 등에서 드러나듯 국가발전에 대한 의지보다 개인의 정권 유지를 우선시했다는 점에서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힘든 독재자이다.

한때는 말레이시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하여 투쟁하였으나, 권좌에 오른 뒤에는 인종차별 정책을 일삼고 반대파를 탄압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인간은 스스로의 치적을 과장하여 우상화를 처음으로 주도한 장본인이다.

남예멘북예멘으로 분단돼 있던 자국을 하나의 예멘으로 통일시켰으나, 통일 이후 타락하여 본격적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게다가 통일 이전에도 혼란스럽던 나라는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결과적으로 이 인간의 독재로 인하여 현재 예멘은 서아시아에서도 아프가니스탄급의 헬게이트+최빈국으로 더 추락한 상태이다. 그 뒤 아랍의 봄예멘 민주화 운동으로 완전히 물러났지만, 물러난 이후에도 뻑하면 다시 독재자가 되려는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았고, 이후 자국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후티 반군에 의해 살해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스페인 제국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키며 아이티를 독립으로 이끈 사람이며, 재위 초반엔 남 아이티 공화국보다 강력하고, 지지 받는 나름 좋다 할수 있는 국왕이였지만 각종 정책의 실패, 권력에 맞들린 앙리 1세, 탈출하는 국민들 및 정부의 부패가 더욱 심해져서 날날이 두 국가의 국력차이는 심해졌고, 결국 왕국 선포가 10년이 지나고 조금 되던날 국왕은 자살하였다. 그 이후 국왕이 살던 궁은 20년 넘게 버려지다가 1850년대 대지진으로 붕괴된 이후 아무도 재건축을 하지 않았다. 앙리 1세가 민심을 얼마나 버렸는지 알려주는 부분.

스페인 제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카티푸난 등의 반대파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알바니아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에 맞서 싸운 공산 게릴라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권력을 잡으면서 극단적인 쇄국과 종교 탄압 정책, 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문자 그대로 유럽의 김일성으로 전락했다.

브루나이인들에게 있어, 사이푸딘은 한마디로 국민적 영웅이자 브루나이의 국부이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는데, 생전 브루나이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말라야로의 합방을 권유하는 주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조국의 자주적 독립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석유를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고, 그 돈으로 인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온 몸을 다했다. 인민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고 복지에 큰 신경을 썼으며, 오늘날 브루나이가 세계적인 부국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적들의 반란에도 어김없이 즉각 대처하는 등 그의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하지만 1962년 아자하리의 난을 진압한 이후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또한 인민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표현의 자유를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만에 하나 정부에 반대하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즉각 코렁탕 원샷이었다. 그리고 석유를 통한 막대한 부의 이면에는 그가 쌓은 치적들이 문제였는데, 인민들을 먹여살리는 대신 스스로를 신격화했다. 그를 향한 인민들의 충성과 찬양은 사실상 인민의 의무였으며, 이 때문에 윗동네 못지않은 살벌한 분위기를 깔아놓았다. 또한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모스크를 크게 짓는 선이 아니라 내부를 아주 순금으로 치장하는 등 유례없는 사치를 벌였으면서도, 두바이처럼 현대화를 위한 개발에는 관심조차 없어서, 이에 대한 비판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옆동네처럼 인종차별 정책을 강행했는데, 이는 악명높은 옆동네의 부미푸트라 정책보다 한술 더 떠서 종종 문제가 된다. 말레이·이슬람사상을 보존하는 전제로 중국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가했으며, 현재 이들은 국적조차 받을 수 없으며 차이나타운도 금지되어 있다. 기독교와 같은 이른바 적성종교에 대한 탄압도 큰 논란거리인데, 크리스마스를 금지시키고 툭하면 교회를 폐쇄시키는 정책은 각계의 큰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종교법인 샤리아가 도를 넘어서 문제인데, 저게 신앙심을 지키고 범죄척결에나 사용되면 모를까, 개개인의 사생활까지 탄압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청교도 혁명의 주인공. 중상층에서 찰스 1세를 폐위해 민중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청교도 교리에 입각한 지나친 금욕주의적 생활을 강요하는 독재자였으며 사후 다시 왕정복고가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18]

우간다민족해방전선(UNLF)에 참가하여 이디 아민을 몰아내고 생지옥이던 우간다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영웅. 그러나 1986년부터 이은 장기집권과 부정선거, 동성애자를 사형에 처하는 세계 최악의 반동성애법 등으로 그 역시 폭압적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된다. 집권 기간은 이디 아민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긴 데다가 온갖 비리와 실정도 많이 저질렀지만 그가 몰아낸 이디 아민의 학정이 세계구급으로 악명을 펼쳤기 때문에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1인당 GDP는 매우 높았지만 빈부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졌고, 양당이 모두 부패하여 서로 돌려먹기를 하며 기득권에게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우고 차베스(당시 중령)는 쿠데타를 일어켰으니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 그 다음에 있던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교체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 자신도 2년 뒤 사면되어 출소되었다. 그리고 정치에 입문, 그 인기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개혁하려고 했다가 반대파의 반대에 부딪히고, 결국 포퓰리즘 독재를 선택하게 되었지만 얼마되지 않아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는 베네수엘라를 온두라스 그 자체로 만들었으며, 그가 남긴 유산은 사후에 문제를 크게 일으켜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를 촉발한 원인이 되었다.

폴란드의 옛 귀족 출신 독립영웅. 러시아 제국령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폴란드 독립군을 이끌고 군공을 세웠음은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독일 제국, 연합국을 뛰어다니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의 독립을 이끌었다. 또한 우크라이나벨로루시의 무주지를 두고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도 조국을 승전으로 이끌며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후 1935년 사망할 때까지 종신 독재를 하였고, 집권기 동안 나치 독일의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폴란드군기계화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적들을 탄압하는 등 여러 실책들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의 사후 불과 4년 만에 폴란드 제2공화국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도 다소 엇갈리곤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문서 참고.

모든 독재자들의 롤모델이자 원조. 독재자라는 단어부터가 로마의 독재관에서 유래하였으며, 사실상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자 전쟁 영웅이었으나, 민중파의 상징적인 위치에 오르면서 원로원과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오랜 정복 활동으로 군권이 집중되면서 공화정에도 위협적인 인물이 되었다. 결국 공화주의자들의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다만 카이사르는 생전에 적극적으로 공화정을 부정하거나 전복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으며, 합법적인 직책을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를 암살한 인물들은 공화정이라는 체제보다는 귀족 공화제의 기득권만을 지키려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때문에 비슷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에나 오늘날에나 평가가 엇갈린다. 자세한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문서 참고.

에티오피아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공산정권의 학정에 저항하여 에리트레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데다가 군인들의 처우와 기강 확립에도 손을 놓지 않은 독립영웅이었으나[19], 얼마 안 가 독재자로 변신하며 자기가 해방한 국민들에게 과장 좀 보태면 북한과 비슷한 수준의 학정을 펼치며 이전의 모든 업적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일제강점기 미국을 거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내며 외교 중심의 독립 운동을 하였으나,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내면서 민간인 학살친위 쿠데타를 통한 장기간의 독재, 우상화를 자행하며 국민들의 반발은 전국적으로 커졌고, 3.15 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어 일어난 4.19 혁명을 통해 자진 하야하게 되었다.

군벌 시대로 분열된 중국을 북벌을 감행하여 통일을 했다. 연합국 수뇌부의 일원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세계와 중국을 일본 제국의 손아귀에서 구했지만, 중화민국 통치시절 내내 독재정치를 펼쳤고, 측근 인사들의 부정부패 척결에 소홀하게 임했다. 그 때문에 중국 공산당에 일격을 받아 섬으로 쫓겨나고 만다. 파란만장한 중국사의 한 축을 담당한 만큼 평가가 좀 복잡한데, 자세한 것은 장제스/평가 참조.

가나의 독립 영웅이자 아프리카 해방 운동의 선도자였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일당 독재와 무소불위의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끝내 1966년 중국 방문 중에 쿠데타로 실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국을 점령한 나치 독일군에 맞서 게릴라 전을 주도하던 공산당 게릴라의 지휘관이었으나 1945년 나치가 패망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불가리아에 공산당 독재 정권이 수립되자 제1대 주석인 디미트로프와 제2대 주석 체르벤코프의 뒤를 이어 독재자가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영웅이었으나, 집권 후 인종차별의 면모를 서서히 드러내더니 결국 5.13 사건 직후 무시무시한 독재자로 돌변했다.

코트디부아르 독립에 기여한 영웅이지만 무려 33년에 이르는 장기 집권으로 결국 독재자로 변모했다. 중반기까지 그럭저럭 아프리카 나라에서는 제법 안정적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결국 나중에는 말아먹었고 그럼에도 고향인 야무스크로에 대형 건물을 무리하게 지으면서 돈낭비를 해버리다가 천수를 누리고 갔다.

프랑스 원정군을 물리치고 멕시코 제2제정을 무너뜨리는 데 공헌한 성공한 군인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독재자로 바뀌었다. 현지에서 그가 멕시코의 인프라를 구축해서 유능한 인물로는 평가받지만 좋은 사람이라고는 국민들이 생각하지 않는다. 끝내 멕시코 혁명으로 쫓겨남. 현대 멕시코에서는 오히려 이 사람을 몰아낸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영웅으로 추앙하며 현행 페소화에도 사파타의 얼굴이 찍혀서 나온다.

2000년대 초 집권 이후 연간 8%의 경제성장률, 세계 최빈국임에도 의료보험을 널리 적용시켜 위협적인 질병이었던 설사, 폐렴, 말라리아나 영양실조 등에 대해 대비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업적으로 인해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그를 "르완다를 지옥에서 건져낸 인물"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하지만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을 지배하고 있으며, 선거전에 반대파가 살해당하고,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어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대통령들처럼 그저 권력에 집착하는 독재자와 똑같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유럽이나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 "카가메는 충분히 르완다를 발전시켰다. 그러니 이제 탄자니아 줄리어스 니에레레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넬슨 만델라, 나미비아 샘 누조마 전 대통령처럼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물러나는 게 좋지 않겠는가"라고 우려하기도 한다.

쿠바 최초의 비 백인 대통령이자 혁명으로 독재를 엎었지만 그 역시 독재자가 되었고 결국 피델 카스트로에게 축출되었다.

리프 전쟁 당시 스페인 군 최연소 소령 등을 먹고 결혼식에서는 국왕이 주례를 서는 등 전설적인 전쟁영웅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 뒤로는 툭하면 정적들을 탄압한 독재자였다.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는 몰라도 원조 파시스트베니토 무솔리니보다 그 죄질이 더 사악하다고 할 지경이니...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에게 맞써 싸웠으나, 권력을 잡고 독재자에 올랐다. 다만 쿠바 국민들의 지지는 높은 편. 최장 집권기록을 가진 독재자지만 스스로 자리에서 사임하고, 친동생에게 넘긴 정권도 결국 평화롭게 이양했다.

본래는 담딘 수흐바타르와 함께 운게른의 폭정에서 몽골을 구했지만 독재자로 변신했다.

본래는 전쟁영웅이었지만 독재자에 올라 끝내 이집트 혁명으로 몰락했다.

한참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던 시절과 주석직에 집권한 후에 농민, 지주들, 가톨릭 교도들 등 반대파들, 주로 남베트남인을 앞뒤 가리지 않고 학살하기도 하였다. 총책임자로서 전혀 잘못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만, 당시에 호찌민은 너무 늙어서 늘 멍하고 죽은 듯이 잠자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전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고 묻는 게 고작이였는데 베트남엔 곧 죽을 노인에게 부하들의 행동을 말할 정도로 소신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다소 억울한 부분.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본인은 평생을 베트남에 헌신한 독립영웅이자 통일의 기초까지 다져냈으며 공산권 지도자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인품을 가졌으나 공산권 특유의 개인숭배까지 시너지를 이루어 유언이 씹혔을 정도이다.

캄보디아 내전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으나 30년 이상의 독재와 장남 훈 마넷으로의 권력 세습 의혹, 야당에 대한 탄압 발언 등으로 비판을 받는다. 물론 그 이전에 있던 독재자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폴 포트이기에 상대적으로 비판 여론은 적은 편.

민주화 운동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나 현재는 권위주의적 독재자로 전락하였다.

4. 창작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독재자가 된 영웅/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관련 문서[편집]


[1] 당시 군주들이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던 방식[2] 총 8년[3] 여기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있다.[4] 나름대로는 이전과 달리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시작은 한다. 그런데 주변 환경부터 본인 경험까지 기존 시스템 속에서 오래 살았다보니, 이전 정권과 대비해서 약간 달리 하는 정도밖에 발상을 못한다. 원래라면 죽이는 경우를 고문만 해서 목숨을 살려놓는 정도의 차이. 그리고는 "이전 정권에 비해 난 정말 노력하고 잘해줬는데 왜 그러느냐"라고 말하며 잘해줘도 소용 없다라거나 "이 자리에 앉아보니 이전의 권력자가 이해가 된다. 이런 무식하고 배은망덕한 백성은 힘으로 이끌어야 한다."라는 소리를 한다.[5]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라는 사실을 근거로 일제강점기의 김일성과 해방 이후 등장한 김일성이 다른 사람이라는 가짜설이 있지만, 이미 학계에서는 거짓으로 학정된지 오래다. 대한민국에서도 전공 부풀리기가 아주 많이 있었다고 보는 정도지 김일성의 항일 게릴라 활동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6] 실제로 조선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을사조약(1905년) 기준으로 이승만은 30세였다.[7] 당장 독재와는 연관이 없지만 김일성은 실질적으로 봉건적 습속이 많이 남아 있었다. 가령 당시 북한 정권에서 남존여비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고 남녀평등권 법령을 발표했지만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은 김일성을 잘 받들어 모신 충신으로 규정하거나 남성은 한복을 입으면 봉건으로 보면서도 여성은 한복을 입어도 된다는 식의 이중적인 면모를 많이 보였다.[8] 정확히 말하면 덮어놓고 갈아엎자는 태도.[9] 실제로 김일성 가짜설도 김일성이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저렇게 새파란 젊은이가 전설 속의 김일성 장군일 리가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10] 공화주의민주주의를 원했던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제국과 황제를 선포한 나폴레옹은 결코 혁명정신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혁명의 이면에는 국민주의, 즉 프랑스가 더 이상 귀족들의 국가가 아니라 시민들의 국가라는 의식이 있었고,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그러한 국민국가주의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혁명을 없던 일로 치부하고자 했던 전 유럽의 반동주의에 맞서 10년동안 버텨냈고, 그 와중에 근대적인 성문법과 국민주의 체계를 정비했다. 나폴레옹 개인은 혁명에 미온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당대 프랑스에서 전 유럽의 도전에 맞서 혁명의 불꽃을 지켜낼 만한 군사적 재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그리 흔치는 않았을 것이다.[11] '영웅'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원래 곡의 제목은 보나파르트가 될 예정이었다.[12] 다만 네 윈이 멀쩡했던 미얀마의 경제를 완전히 파탄낸 것은 절대 아니다. 사실 네 윈이 집권하기 전에도 미얀마는 당시 빈곤했던 대한민국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난했던 세계 최악의 최빈국 중 하나였다. 네 윈이 워낙 형편없는 정책을 펼쳐 경제 수준이 계속 뒷걸음질쳤을 뿐이지.[13] 국민당의 북벌 완수는 사실 느슨한 군벌의 연합이었기 때문에 완벽한 통일이라고 보기 힘들다.[14] 터키 헌법상 대통령은 국내를 대표하고 총리가 의회를 담당하게 되어있지만, 아타튀르크 시절에는 대통령이 총리에게 상당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의 임기기간동안 총리는 아타튀르크 사후 터키의 2대 대통령이 되는 이스멧 이뇌뉘와 알리 페트히 오키야르(Ali Fethi Okyar), 마찬가지로 훗날 터키의 5대 대통령이 되는 젤랄 바야르(Celal Bayar)였다. 무엇보다도 1945년, 이뇌뉘 대통령이 복수정당제를 시행하기 전까지 터키의 정치는 공화인민당(Cumhuriyet Halk Partisi) 일당체제였다.[15]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스탈린, 마오쩌둥, 시몬 볼리바르, 줄리어스 니에레레, 피델 카스트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 등등.[16] 크로아티아 출신 스트리머 가브리엘이 이 경우인데,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상당히 존경하는 편이다. 물론 티토가 유고내전 이후 재평가받은 면이 있어서 유고내전 이후 출생자 가비가 존경하는게 이상할 정도는 아니지만.[17] 흔히 파리 코뮌 등을 들어 세계 최초라는 주장을 반박하기도 하지만, 파리 코뮌은 국제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국제법적인 의미에서든 (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는 소련이다.[18] 이후로 왕에 즉위한 찰스 2세는 크롬웰의 무덤을 파해쳐 부관참시해버렸다.[19] 아이러니하게도 현 에리트레아군의 군인 대우는 조선인민군 못지않게 열악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