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를러깅 처이발상

덤프버전 :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펼치기 · 접기 ]
이론과 분파
기본 이론
마르크스주의 · 카우츠키주의(정통 마르크스주의)
분파
레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 현실사회주의 · 카스트로주의 · 호자주의 · 호찌민 사상 · 주체사상 · 마오주의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 중국특색 사회주의 ·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 볼셰비키-레닌주의 (파블로주의 · 신트로츠키주의(클리프주의) · 제3의 진영 · 포사다스주의)) ·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룩셈부르크주의 · 좌파공산주의 · 무정부 공산주의 · 자율주의) · 서구 마르크스주의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 국민공산주의 · 유럽공산주의
인물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 카를 카우츠키 · 블라디미르 레닌 · 레프 트로츠키 · 미하일 칼리닌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 이오시프 스탈린 · 니키타 흐루쇼프 · 겐나디 주가노프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천두슈 · 리다자오 · 마오쩌둥 · 저우언라이 · 체 게바라 · 피델 카스트로 · 라울 카스트로 · 로자 룩셈부르크·프랑수아 노엘 바뵈프·루이 오귀스트 블랑키·카를 리프크네히트 · 안토니오 그람시 · 호찌민 · 응우옌반린 · 보응우옌잡 · 폴 포트 · 담딘 수흐바타르 · 허를러깅 처이발상 · 고토쿠 슈스이 · 시이 가즈오 · 고이케 아키라 · 키라 요시코 · 야마조에 타쿠 · 아카미네 세이켄 · 박헌영 · 김일성 · 빌헬름 피크 · 발터 울브리히트 · 에리히 호네커 ·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 엔베르 호자 · 헹크 스네이블릿·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 밥 아바키안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이론
공산주의 · 사회주의 · 노동가치론 · 변증법적 유물론 · 마르크스 경제학 · 여성해방론 · 프롤레타리아 독재 · 민주집중제 · 계획경제 · 반자본주의 · 무신론 · 사회주의법 · 인민민주주의 · 사회주의 문화
정당
(공산당)

현존 정당
아시아
중국공산당 파일:중국 국기.svg · 일본공산당 파일:일본 국기.svg · 노동자공산당 파일:일본 국기.svg · 노동의 해방을 목표로 노동자당 파일:일본 국기.svg · 조선로동당 파일:북한 국기.svg · 대만 공산당 파일:대만 국기.svg · 베트남 공산당 파일:베트남 국기.svg · 라오 인민혁명당 파일:라오스 국기.svg · 버마 공산당 파일:미얀마 국기.svg· 네팔 공산당(통합 마르크스-레닌주의) 파일:네팔 국기.svg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센터) 파일:네팔 국기.svg · 네팔 공산당(통합 사회주의) 파일:네팔 국기.svg · 인도 공산당 파일:인도 국기.svg · 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 파일:인도 국기.svg · 방글라데시 노동자당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 팔레스타인 인민당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 이스라엘 공산당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 예멘 사회당 파일:예멘 국기.svg · 몽골 인민당 파일:몽골 국기.svg · 카자흐스탄 인민당 파일:카자흐스탄 국기.svg · 캄보디아 인민당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유럽
프랑스 공산당 파일:프랑스 국기.svg · 스페인 공산당 파일:스페인 국기.svg · 포르투갈 공산당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 그리스 공산당 파일:그리스 국기.svg · 튀르키예 노동자당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 노동인민진보당 파일:키프로스 국기.svg · 독일 공산당 파일:독일 국기.svg · 오스트리아 공산당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 벨기에 노동당 파일:벨기에 국기.svg · 스위스 노동당 파일:스위스 국기.svg · 적색당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 보헤미아 모라바 공산당 파일:체코 국기.svg · 몰도바 공화국 공산당 파일:몰도바 국기.svg · 벨라루스 공산당 파일:벨라루스 국기.svg · 러시아 연방 공산당 파일:러시아 국기.svg ·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 파일:러시아 국기.svg · 사회당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 헝가리 사회당 파일:헝가리 국기.svg
아프리카
경제자유투사당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 파일:기니비사우 국기.svg · 모잠비크 해방전선 파일:모잠비크 국기.svg · 상투메 프린시페 해방운동-사회민주당 파일:상투메 프린시페 국기.svg ·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 파일:앙골라 국기.svg ·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파일:앙골라 국기.svg ·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 - 애국전선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 콩고 노동당 파일:콩고 공화국 국기.svg ·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
아메리카
미국 공산당 파일:미국 국기.svg · 미국 혁명공산당 파일:미국 국기.svg · 캐나다 공산당 파일:캐나다 국기.svg · 쿠바 공산당 파일:쿠바 국기.svg · 베네수엘라 공산당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 인민진보당 파일:가이아나 국기.svg · 자유 페루 파일:페루 국기.svg · 브라질 공산당 파일:브라질 국기.svg · 사회주의자유당 파일:브라질 국기.svg · 칠레 공산당 파일:칠레 국기.svg · 에콰도르 공산당 - 붉은 태양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에콰도르 공산당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 우루과이 공산당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볼드체: 여당 또는 연립여당
취소선: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정당
해체된 정당
소련 공산당 · 이탈리아 공산당· 조선공산당 · 남조선로동당 · 세르비아 공산당 · 헝가리 사회노동당 · 폴란드 통일노동당 · 알바니아 노동당 ·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 인도네시아 공산당 · 불가리아 공산당 ·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 말라야 공산당 · 캄푸치아 공산당 · 루마니아 공산당 · 중화민국 공산당 · 영국 공산당 ·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 헝가리 노동자당
국제 조직
코민테른 · 코민포름 · 코메콘 · 바르샤바 조약기구 · 인터내셔널 ·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 각종 공산주의 정당 연합
국가
인민공화국 또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표방하는 국가
· · ·
공산주의 정당이 여당으로 집권 중인 국가
· · · · · · · · · · ·
★: 연립정부의 구성원으로 집권한 국가
붕괴된 국가
· · · · · · · · · · · · · · · · · · · ·
상징·표어
낫과 망치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붉은 별 · 적기
관련 문서
분파 · 역사 · 서기장 · 탈공산주의 ·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파일:레닌_투명.svg 레닌주의 {{{-2

파일:스탈린_투명.png
마르크스-레닌주의 · {{{-2

파일:마오쩌둥 투명.svg
마오쩌둥 사상



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장.svg
몽골 인민공화국 국가원수


[ 펼치기 · 접기 ]
국가대후랄 의장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나반도르진 자담바
펠지딘 겐덴
잠찬긴 담딘수렌
허를러깅 처이발상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로솔린 라간
아난딘 아마르
단스란딜레진 도그솜
곤치긴 붐첸드
국가대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대인민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임시
제9대
임시
임시
수흐바타린 얀즈마
잠스란긴 삼부
차간라민 두게르수렌
소노민 루브산
대인민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대통령
제10대
임시
제11대
제12대
욤자깅 체뎅발
냐민 자그바랄
잠빈 바트몬흐
푼살마긴 오치르바트
몽골 제국 · · 몽강국 · 복드 칸국 · 몽골국



몽골 인민공화국 제5대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허를러깅 처이발상
ᠬᠣᠷᠯᠤ᠎ᠠ ᠶᠢᠨ ᠴᠣᠶᠢᠪᠠᠯᠰᠠᠩ | Хорлоогийн Чойбалсан

파일:Хорлоогийн_Чойбалсан.jpg
이름
몽골 문자: ᠬᠣᠷᠯᠤ᠎ᠠ ᠶᠢᠨ ᠴᠣᠶᠢᠪᠠᠯᠰᠠᠩ
키릴 문자: Хорлоогийн Чойбалсан
로마자: Khorloogiin Choibalsan
출생
1895년 2월 8일
청나라 허를러깅 두가르
사망
1952년 1월 26일 (향년 56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국적
[[몽골 인민 공화국|

몽골 인민 공화국
display: none; display: 몽골 인민 공화국"
행정구
]]

묘지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묘지 알탄 울기
정당
몽골 인민혁명당 (1920년~1952년)
재임 기간
1929년 1월 24일 – 1930년 4월 27일

1. 개요
2. 생애
2.1. 권력을 쥐기까지
2.2. 독재의 시작
2.3. 근대화
2.4. 사망
3. 평가
4. 처이발상이 성씨를 말소시켰다?



파일:external/i39.photobucket.com/post-467-1158234205.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orloogiyn_Choybalsan.jp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82585e23cdfaf314187858e37b9202d4.jpg
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
인민복 차림
색을 입힌 그의 살아생전 모습


1. 개요[편집]


몽골 인민공화국독재자. 1929년 1월 24일부터 1930년 4월 27일까지 몽골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이어서 1939년 3월 24일부터 1952년 1월 26일 죽을 때까지 몽골의 내각수상을 지냈다.

처이발상은 20세기 담딘 수흐바타르 등과 함께 몽골 독립을 쟁취하고, 이후 공산화를 주도하면서 근대화를 이룬 지도자라는 평가와 집권 기간 전무후무한 티베트 불교 말살 정책과 대량 숙청, 학살을 주도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덕분에 몽골의 스탈린이라고도 불렸다. 실제 둘은 말년을 제외하면 관계가 돈독했었다.

몽골 인명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인해 영어 표기를 직역한 초이발산으로 오역되는 일이 많으며 심지어 한국이름 비슷한 최발산으로 오역되기도 한다.

2. 생애[편집]



2.1. 권력을 쥐기까지[편집]


처이발상은 1895년 동몽골 지역에서 미혼모 어머니(이름은 허를러)의 네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두가르(Дүгар)’[1]였으나 13세 때 티베트 불교 수도승으로 출가하면서 '처이발상’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즉 ‘허를러깅 처이발상’이란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에 법명이 붙여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5년 뒤에 사원에서 도망쳐(이유는 불명) 수도 후레, 현재는 울란바토르라고 불리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다 그를 가엽게 여긴 부랴트인 러시아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이르쿠츠크에서 1914년부터-1918년까지 러시아어 전문학교에서 통역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1914년 러시아로 유학했을 때 러시아 혁명가들과 접촉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쉬수정외몽골 출병을 단행해 몽골의 독립을 취소하자 귀국 후 중국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하는 몽골인민당 초기 멤버로 참여하였다. 1921년 몽골 내에 주둔하던 중국군과 러시아 반혁명 잔당인 운게른 남작의 군대를 수도에서 모두 몰아내고 복드 칸을 복위, 독립 선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게 처이발상은 혁명가 담딘 수흐바타르의 동료로 몽골의 독립 운동에 참여해 몽골 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권력을 잡았다.

파일:external/blog.donga.com/sukhbaatar_and_choibalsan00998-1024x674.jpg
몽골의 독립영웅 담딘 수흐바타르(왼쪽)와 처이발상(오른쪽).

처이발상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고 독립군을 지휘한 2살 위 형님 뻘인 수흐바타르 장군을 스승처럼 따랐다. 그래서인지 수흐바타르도 처이발상을 아꼈고, 1922년 혁명정부의 급격한 풍습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군중반란이 일어나 군무성 부상이었던 처이발상이 처형을 당할 처지였는데 수흐바타르가 그를 보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흐바타르는 만 30살의 나이인 1923년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이후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드 칸 역시 1924년 사망한다.

처이발상은 소련으로 유학, 군사교육을 받았고 귀국 후 몽골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2.2. 독재의 시작[편집]


복드 칸 사망 이후 1924년 공화국이 된 몽골을 보며[2], 1928년, 스탈린과 국방인민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소련의 동쪽 국경에 위치한 몽골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몽골이 소련의 안보를 보위하기 위해 몽골을 철저히 스탈린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928년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사절단은 수흐바타르 사후 몽골의 지도자였던 담바도르지를 재교육을 명분으로 모스크바로 압송하고 토지몰수와 불교사원의 박해 등을 포함하는 공산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지도자로 처이발상을 지목, 11월 28일에 그를 담바도르지의 후계자로 옹립한다. 덕분에 처이발상은 이후 몽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기반이 취약했던 처이발상은 군에서 예편한 후 그를 몽골인민혁명당 총비서로 추대하라는 스탈린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당내의 반대 때문에 몽골인민혁명당 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스탈린은 1934년, 몽골인민혁명당 서기 잠빈 뤽베를 숙청하는데 성공한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처이발상을 모스크바로 소환한다. 스탈린은 몽골 수상 겸 몽골인민혁명당 서기 펠지딘 겐덴에게 처이발상을 부수상에 임명하라고 지시하였다. 겐덴은 이 지시에 불만을 표시했다가 가차없이 1936년에 해임당해 1937년 11월에 처형당한다. 스탈린은 처이발상을 몽골군 원수로 진급시키고 1936년 2월 26일, 몽골 내무상에 임명하였다. 내무상으로 처이발상은 1936~1938년 사이에 대규모 숙청을 자행했다. 이 때문인지 처이발상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추종자로 유명했으며, 정치 행보도 비슷해 "몽골의 스탈린"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가 통치하던 중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37~1939년 행해진 대규모 숙청과 티베트 불교 말살을 들 수 있다.

1936년, 당시까지 몽골의 국교와 같았던 티베트 불교 사원을 없애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거부한 펠치딘 겐덴(Пэлжидийн Гэндэн) 인민위원장 일파를 기습 체포하고, 모스크바로 압송시키면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937년 9월 10일을 기점으로 65명의 고위직을 전격 체포한 이후 18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렇게 1936년부터 39년까지 대숙청(Их Хэлмэгдүүлэлт)을 벌여 겐덴 전 인민위원장과 아난딘 아므르(Анандын Амар) 전 인민위원장 등 정치인과 불교 신자 및 승려들을 처형했다. 혁명 원로까지 무자비하게 잡아들인 이 대숙청에서 당과 정부의 수뇌부 인사 중 25명이 처형되었으며, 군 지휘부 중 187명이, 중앙위원회 위원 51명 중 36명이 처형되었다. 거기에다가 굴라크까지 건설하여 사람을 잡아넣었다. 그야말로 동시대 소련 대숙청의 작은 복제판이였다.

승려의 경우 세 부류로 나뉘어 지식인층은 총살, 비지식인층은 시베리아 수용소, 젊은이들은 재교화 후 귀가시켰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비지식인층의 경우 당장의 교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시베리아 수용소 10~20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혹독한 수용소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이로 인해 총 10만에 달하는 승려들이 입적했다. 또한 대부분의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불상과 조형물은 녹여서 소련의 무기 공장으로 보내졌다. 다만 일부 사원은 군사용으로 쓰여서 파괴되지는 않았다. 처이발상은 한 때 불교 신자였으며 그의 이름은 불교에서 내려준 법명이니 참 웃지못할 일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신학생 출신으로 정교회 때려잡는 데 열심이었으니 이 점도 비슷하다. 췌언하자면 스탈린은 사람들 감시하고 가두고 벌 주는 걸 신학교에서 당하면서 배웠다. 차이점이라면 스탈린은 나중에 정교회 탄압을 멈추고 형식적이나마 정교회에 우호적인 정책으로 돌아섰지만 처이발상은 티베트 불교와의 악연을 죽을 때까지 이어나갔다는 것.

그렇게 18,000명의 지식인층 승려가 처형당했으며, 몽골 각지에 있던 746개 사원이 파괴되고 그곳의 모든 승려들이 쫓겨났다. 몽골 티베트 불교의 본산격인 간단 사원도 1938년부터 1944년까지 폐쇄되었다고 한다. 또 수천 명의 반혁명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다수의 부랴트족, 카자흐족들 또한 ’혁명의 원수’라는 이름으로 처형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죽은 사람의 수는 3만~3만 5천 명[3] 정도로 추산되는데, 당시 몽골의 인구가 80~90만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 인구의 4%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몽골인과 튀르크인의 전통 머리모양인 알타이변발이 외몽골 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도 처이발상 정권 때의 일이다. 물론 복드 칸국 시절에도 중화민국, 러시아 제국, 소련으로부터 서구화된 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외몽골인들이 변발을 자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변발이 자취를 감춘 것은 처이발상의 몽골 문화 탄압에 의한 것이었다. 변발을 계속 유지하려 한 외몽골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변발이 잘렸으며, 상술한 부랴트족과 카자흐족 또한 외몽골의 주류 민족인 할하족으로 위장하여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변발을 자르기도 했다. 외몽골 내 어웡키족퉁구스식 변발 또한 이러한 변발 문화 탄압의 예외가 되지 못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엄청난 숙청 때문에 몽골 내부에서 반소 감정이 지나치게 높아지자 처이발상은 대숙청을 집행한 실무진들이 좌경 오류를 범했다고 이들을 역으로 숙청하고 이것이 1938년 8월부터 1939년 초까지 있었던 자신의 소련 외유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라 자신은 몰랐다면서 사과했다. 1940년 1월 3일, 처이발상은 욤자깅 체뎅발과 함께 다시 소련을 방문하였고 스탈린은 처이발상에게 레닌훈장을 수여하였다. 처이발상은 자신과 수흐바타르의 우상숭배를 실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기 시작하였다.

2.3. 근대화[편집]


몽골은 그의 치하에서 상당히 근대화되어 포장도로가 국토 곳곳에 깔리고 통신선이 개통되었고, 광공업이 발전했으며, 의무 교육 도입으로 문맹률도 낮아졌다. 상기했듯 변발같은 구시대 관습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몽골 동부에 위치한 인구 4만여 명 규모의 몽골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바인 투멘(Баян Түмэн)은 그의 이름을 따서 처이발상이라고 개칭되었고 지금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몽골 민족주의자였고, 몽골 인민공화국이 소련에 흡수되는 것을 경계하였다.[4] 또한 내몽골과의 통일도 꿈꿨다.[5]

그런데 몽골 민족주의자임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몽골 문자를 버리고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가 이후 러시아어에서 사용하는 키릴 문자로 갈아치웠다. 중국, 라오스, 북한 등 여타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화 이후에 문자 개혁을 한 예는 있어도 자신의 전통 문자를 폐지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더 특이한 사항.[6] 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데, 우선 몽골 민족주의자나 어학자 입장에선 원수 소리를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옹호론자들은 몽골 전통 문자가 세로쓰기인 데다가 좌서로 읽고,[7] 아랍 문자처럼 어두형, 어중형, 어미형, 단독형으로 나뉘고 정서법도 옛날 그대로라 이걸 현대에 적용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즉 문맹률 증가의 한 원인이라 아예 갈아치웠다는 주장을 한다. 설사 가로쓰기로 바꾼다 해도 전산화가 문제. 그래서인지 현재도 몽골은 키릴 문자를 쓰고 있다.[8][9]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엔 일본 제국의 정복 전쟁에도 굴하지 않고,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할힌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일본에게 선전포고한 뒤에 몽골군에게 만리장성 부분까지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몽골 민족주의자인 그는 몽골이 2차대전에서 소련을 지원해준 대가로 내몽골을 기대하였고 내몽골에서의 부추킴을 통해 내몽골에서도 일시적으로 몽골 인민공화국과의 통합론이 우세해졌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그것을 지지해주지 않자 그는 스탈린에게 점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는 점점 악화되어 나중엔 스탈린의 생일 축하행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2.4. 사망[편집]


1952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는데, 스탈린은 그가 죽자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을 일으켜 처이발상을 치료한 주치의들을 대상으로 암살 혐의를 씌우고 고문한 후 처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이런 처이발상의 병사는 의심많은 스탈린이 자신의 주치의들에게도 의심을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 역시 숙청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얼마 안가 1953년 스탈린도 사망한다.


3. 평가[편집]


악행을 많이 저지른 인물이지만 의외라면 의외로 현대 몽골인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갈린다.

독재자가 되기 전엔 러시아 백군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나 중국 군벌을 쫓아낸 건 사실이라 지금의 몽골을 유지시켰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독재자가 된 영웅 루트를 탄 사람인 셈. 진짜 몽골 독립의 주역은 담딘 수흐바타르지만 그 역시 함께 한 동지인 것은 사실이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은 위에서 거론한 대로 몽골의 종교 문화 파괴와 자국민 학살을 들어 비판한다. 특히 샤머니즘이나 티베트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몽골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이들은 한 가지 음모론을 굳게 믿고 있는데 그 음모론이란 바로 처이발상이 몽골 독립 영웅 담딘 수흐바타르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몽골인들 중 처이발상이 담딘 수흐바타르를 독살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다만 처이발상이 진짜로 담딘 수흐바타르를 살해했는지는 불명확하며, 수흐바타르의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으로 인한 병사다.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떠나서, 처이발상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 처이발상이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도 스탈린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시각이다. 실제로 처이발상이 권력을 잡기 전 스탈린에게 미움을 사거나 해서 몽소 관계를 망친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초기 몽골 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은 한 둘이 아니다.

칭기즈 칸을 무시하고, 몽골 문자를 버렸다는 이유로 몽골 민족주의자에게 욕을 먹지만, 정작 자신은 몽골의 소련 편입 반대, 몽골 통일 시도 등 죽을 때까지 몽골 민족주의자였던 것은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당시 국제정세상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나라에 치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몽골의 국체를 어떻게든 보존에 성공했으니 그 점은 몽골 독립주의자 입장에선 평가할 만하다.

이 사람이 죽고 난 후 후임으론 욤자깅 체뎅발이 집권하게 되는데, 이 사람도 독재자긴 했지만 처이발상처럼 학살극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허나 친소 일변도 정책으로 몽골 독립주의자들에겐 더 욕을 먹는다는게 아이러니. 1962년 1월, 그 체뎅발은 처이발상이 지나치게 사람을 죽였다고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였듯이 그를 격하하였다.

4. 처이발상이 성씨를 말소시켰다?[편집]


몽골인들이 과거 성씨를 쓰다가 처이발상이 집권한 이후 전통문화 파괴를 목적으로 폐지 및 금지시켜서 이후 몽골인들이 성씨를 쓰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따지고 보면 내용이 좀 복잡하긴 한데, 몽골에는 성(姓)씨와 유사한 기능도 있지만 명확히 따지면 부족을 뜻하는 오복(Obog)이라는 것이 있으며(성씨로 알려진 보르지긴이 사실 오복의 하나다) 이것의 사용을 공산정권이 계급사회의 잔재라는 이유로 막긴 했지만 그 시기는 허를러깅 처이발상 집권 이전인 1925년이었다.

게다가 이 오복조차 이미 공산당 집권 당시엔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지 않았다. 청나라 시절부터 몽골인들 이름에는 오복을 찾아볼 수 없었다.[10] 즉, 애초에 폐지할 성씨 같은 게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근친혼을 못 막아 막장이 되었다는 소리도 헛소문.

굳이 몽골의 성씨 문제와 관련하여 몽골 인민공화국을 비판할 부분이 있다면 오복을 폐지하면서 정작 오복을 대체할 성씨 개념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하는 게 옳을 것이다. 몽골에서 성씨 폐지 때문에 근친혼을 못 막아 막장이 되었다는 것 자체는 헛소문이지만, 성씨나 그에 준하는 다른 개념[11]이 없는 사회의 경우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사회에 비해 근친혼 방지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12]

이외에도 칭기즈 칸의 후손들을 학살해서 보르지긴 후손이 거의 없다는 말도 보이는데 이것 역시 헛소문이다. 애초에 뭐 때문에 괜한 보르지긴씨를 몰살시키나? 보르지긴 후손들은 현재 멀쩡히 몽골에 살고 있다. 허를러깅 처이발상 정권 때 보르지긴 후손들이 탄압을 당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보르지긴씨 몰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뿐더러 해당 시기에 딱히 보르지긴씨만 탄압을 받은 것도 아니라서(…)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6 10:32:49에 나무위키 허를러깅 처이발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몽골에서는 흔한 이름이다. 한국으로 치면 철수 이미지.[2] 물론 이전에도 형식상일 뿐 칸의 실권은 없었다. 입헌공산군주제?[3] 일부에서는 사망자를 1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 참고로 당대 소련에서는 많아도 200만 명 정도가 죽은 걸로 추산되는데 당시 소련 인구가 2억이었음을 감안하면 비율적으로는 몽골이 더 엄청난 것.[4] 투바가 소련에 흡수된 후, 투바인들이 몽골에 와서 몽골도 같이 소련에 들어가자는 말을 했다가 처이발상에게 뺨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후임자인 체뎅발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처이발상에게 엄청 갈굼 받았다고 한다.[5] 다만 정말로 내몽골과의 통일이 성사되었다면 몽골어의 몽골 문자 표기가 내몽골에서도 명맥이 끊어졌을 것이다.[6] 물론 중앙아시아처럼 소련에 의해 문자를 갈아치운 경우는 존재했지만, 이전에 썼던 아랍 문자도 따지고 보면 외래문자였다. 몰도바는 라틴 문자에서 키릴 문자로 문자를 바꾸었지만 몰도바의 루마니아어는 아주 예전에 키릴 문자를 썼다는 명분이 있었고, 전통 문자를 가졌던 아르메니아조지아는 스탈린 시절에도 자신들의 문자를 전통 문자라는 이유로 잘 썼고 전통적으로 라틴 문자를 사용했던 발트 3국 역시 소련의 지배 기간에도 라틴 문자를 계속 유지했다. 애초에 소련은 소수민족 문자교육을 장려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키릴문자를 쓴다는 실용적 이유로 키릴 문자가 밀어낸 것이다.[7] 세로쓰기 문화가 있던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은 우종서다.[8] 1990년대 민주화 이후 몽골 민족주의자들과 어학자, 역사학자들이 다시 몽골 문자 표기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현실적 어려움 때문인지 호응은 적은 편이다. 그래도 한국에서 한자도 가르치듯이 몽골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는 몽골 전통 문자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한글처럼 표음문자라서 배우기 어려운 것은 아니고 대부분 몽골인들은 몽골 문자도 읽을 줄 안다. 2024년까지 몽골 문자 재도입을 추진하고 있다.[9] 참고로 중국 영토 내에 있는 내몽골 지역에서는 전통 몽골 문자를 사용하며, 몽골식 키릴 문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내몽골과 외몽골의 사이가 안 좋은 것과 별개로 양쪽의 교류 자체는 활발해서 내몽골인들이 일부러 외몽골식 키릴 문자 몽골어를 배우는 경우도 있다. 사실 키릴 알파벳 몇십개는 맘 먹고 외우면 하루이틀에 다 외우고 그 다음은 언어는 같기 때문에 내몽골인도 금방 적응할 수 있다.[10] 오복이 폐지되기 전에 죽은 담딘 수흐바타르도 그냥 이름에 부칭이 전부고 내몽골 출신인 데므치그돈로브도 그 유명한 칭기즈 칸의 직계후손인 황금씨족임에도 앞에 보르지긴을 붙이지 않았다.[11] 아랍식 풀네임에서 본인의 이름 뒤에 아버지, 할어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의 이름 순으로 조상들의 이름들이 붙는 게 대표적이다.[12]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정확히는 유교가 보편화된 이후)에서 유목민 문화권은 정주민 문화권에 비해 근친혼에 관대한 편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 황실 직계 혈통이 단절된 이유들 중 하나로 청나라 황실에서 일어난 근친혼이 제기될 정도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