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 라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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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제2대 총리
압둘 라작
عبد الرزاق حسين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unAbdulRazak.jpg

이름
압둘 라작
YAB Tun Abdul Razak bin Hussein
Tun Abdul Razak bin Hussein
عبد الرزاق حسين
출생
1922년 3월 11일
말레이시아 프칸
사망
1976년 1월 14일 (향년 53세)
영국 런던
학력
말라야대학교
약력
말레이시아의 제2대 총리
정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종교
이슬람교


파일:external/raiseyourvoice1957.files.wordpress.com/abdul-razak-hussein.jpg


1. 소개
2. 생애
3. 업적
4. 유산



1. 소개[편집]


툰쿠 압둘 라만과 더불어 말레이시아의 독립 운동을 주도한 국부.

말레이시아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제2대 총리로 지낸 사람이다. 그 이전에 초대 부총리를 지낸 바 있다.


2. 생애[편집]


1922년 3월 11일, 파항프칸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의 장남이었다. 비록 그가 말레이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도네시아계 원주민부기스 혼혈이다. 쿠알라캉사르 말레이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싱가포르로 건너가 래플스 대학교에서도 추가적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당시 말라야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으로 건너가 법학을 전공했고 변호사(Barrister) 자격을 얻었다. 후에 영국 노동당에 입당하여 말레이인 당원들과 함께 일하지만,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서러운 조국의 실정을 알고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독립의 주체로 알려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청년당원으로 입당하였고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파항의 총리대신이 된다.

1955년 말라야 총선거 당시 자신의 지역구인 프칸에서 승리하였고, 이후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년동안 조국해방을 주도할 일원으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보여왔으며 1957년 독립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초대 부총리로 취임한다.

1965년 싱가포르가 축출된 이후 그는 젊은 피 수혈에 열을 올렸고 대대적인 신입을 영입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1970년 툰쿠 압둘 라만 총리가 사임한 후 총리직을 승계했으나, 6년 뒤 영국에서 급서하였다. 향년 54세. 역대 말레이시아의 총리들 중 유일하게 재직 중 사망한 사람이었다.


3. 업적[편집]


오늘날 초대 수상인 툰쿠 압둘 라만과 더불어 말레이시아의 국부로서 추앙받는다.

라작 총리는 5.13 사건으로 국내가 혼란스러워지자, Rukun Negara를 도입했다. 이 Rukun Negara는 쉽게 말하면 국민의례 같은 것이다. 애초에 5.13 사건의 원인은 민족 간의 갈등이었기 때문에, 이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는 "신을 향한 믿음", "헌법 수호" 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말레이인의 사회적 지위가 약하다고 판단해 일명 부미푸트라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는 중국계를 견제하며 말레이계 인들을 사회적으로 더 우대하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말레이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과 된 법이다. 이 법은 국립 대학의 70 ~ 80%는 말레이계를 뽑아야 한다거나, 주택 분양이나 차량구매에서 할인을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으로 말레이계의 경제적 여건은 확연하게 성장했지만, 2018년에는 UN 인종차별철폐협약(ICERD)를 정부가 비준하며 폐지의 수순을 밟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민주행동당(DAP), 인민정의당(PKR) 등 야권으로부터 "독재적",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특히 말레이시아 야권 중 역사가 가장 오래 된 DAP는 라작을 독재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 Rukun Negara 도입 과정에서의 계엄령 선포라던가, 부미푸트라 정책 도입 등에 대한 비판은 야권으로부터 여전하다.

그러나 라작은 사후 말레이시아의 국부로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의 아들 중 하나인 나집 라작은 이러한 라작의 후광을 받아 라작의 지역구를 계승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라작 사후 33년이 지난 2009년 총리에 오르면서 대표적인 부자(父子) 지도자가 되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현대 말레이시아의 비동맹, 중립화 외교정책의 기조를 다진 인물이다. 1970년 비동맹회의와 유엔 총회 및 1971년의 영연방회의에서 동남아의 중립화를 제안하거나, 1974년 동남아시아 국가로서 처음으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다.


4. 유산[편집]



파일:external/static.panoramio.com/53853686.jpg

반다르 툰 라작이 적힌 체라스의 이정표.

오늘날 말레이시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국부로서 지명으로 꼭 들어가곤 한다. 여기를 보면 나무위키에 다 적기에는 손이 아플 정도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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