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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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광무제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기거했던 사가(私家). 흥친왕이 태어났으며, 고종 광무제 또한 태어나고 왕이 되기 전까지 잠저로 지냈던 곳이다. 현재 조선의 대원군궁 중 유일하게 제 모습을 그나마 온전하게 유지하는 곳이다.[2]
2. 상세[편집]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전에도 일부 왕족이나 양반에 의해 알려진 곳이었지만, 1863년(철종 14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다음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황제의 생가(生家)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사적 제257호. 조선시대 천문을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앞의 고개(峴)'라는 뜻으로 '운현(雲峴)'이라 불렸다고 한다.
고종이 태어난 집은 원래 운현궁 안에 있었지만 현재는 운현궁 부지에서 제외되었다. 그 건물은 운현궁의 동북쪽 뒷편의 운니동 114-2번지에 있었는데, 1966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들어섰고, 삼성물산이 2002년부터 2019년까지 모델하우스인 래미안 갤러리를 운영하였으며, 현재는 종로소방서의 임시청사 부지로 사용되고 있다.[3]
운현궁 역시 주인처럼 사연이 많은 곳이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옛 궁들과 마찬가지로 운현궁 역시 규모가 많이 축소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막강했을 때는 그 권세에 비례해서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쓰이는 '운현궁 양관'[4] 을 포함해 현재 운현초등학교와 일본문화원까지 포함하여 굉장히 넓은 지역이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운현궁의 크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크기가 커서 운현궁에는 흥선대원군의 직계 가족 뿐만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큰형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도 살았으며, 천하장안으로 대표되는 종자들이나 그 식솔들까지 살아서 광복 무렵까지도 100여 명이 넘는 대식구가 살았다고 한다.(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 이하응이 그 터를 넓히고 새로 단장하여 주위 담장이 수 리[5]
나 되었고, 네 개의 대문을 설치하여 궁궐처럼 엄숙하게 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주도적 인물인 전봉준도 여기서 2년 정도 식객 생활을 한 적이 있고, 그 외에도 흥선대원군 본인부터 당대의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판소리나 그림 등의 예술 애호가여서 당시의 화가들이나 신재효의 지도를 받은 판소리꾼들, 심지어는 남사당패들까지 운현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시기에 주로 이곳에서 집무를 봐왔으며 서원 철폐, 호포제와 사창제 실시, 경복궁 중건 등의 지휘를 맡다가 후에 한성부 공덕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장남인 이재면(흥친왕)에게 물려주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3일 뒤 서울이 함락되자, 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가 창덕궁 낙선재를 떠나 9.28 서울 수복 시까지 이곳을 피난처로 삼기도 했으며, 이후 1952년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이곳을 숙소로 삼았다.[6]
흥선대원군이 주로 사용했던 아재당,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별당채인 이로당이 있으며 한때 고종과 대원군이 창덕궁과 운현궁을 왕래할 수 있는 경근문과 흥선대원군 전용으로 사용했던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영로당' 이라는 안채도 있었으나 지금은 운현궁에서 떨어져나가 개인 소유의 건물로 바뀌었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알겠지만 운현궁 전각에는 노(老)자 들어간 전각이 많다. 흥선대원군이 뭔가 이 글자에 애착이라도 있었던 모양. 실제로 말년의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호인 '석파(石破)'를 대신해 '노석(老石)'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운현궁 전각 중 노안당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이것은 고종 즉위 전에 사망한 김정희가 직접 쓴 게 아니고,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을 증축할 때 스승의 글씨를 모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주요 전각들과 함께 운현궁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작은 전시관이 있으며, 전각 내부에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생활용품이나 당시 복식을 입은 마네킹들도 있다.
한동안 설날 및 추석 명절 동안에만 무료 입장을 실시하고 있었으나, 2014년 3월 20일부터는 서울특별시 조례 개정으로 모든 날에 무료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월요일(공휴일이 아닌 경우에만)에는 휴관. 대중교통으로는 수도권 전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지척(300~400m 근방)이다.
3. 주요 건축[편집]
3.1. 현재 궁역에 있는 건물[편집]
3.2. 과거 궁역에 있었던 건물[편집]
3.2.1. 양관 영역[편집]
3.2.2. 기타 영역[편집]
3.3. 운현궁 권역외 건물[편집]
4. 운현궁의 역대 주인[편집]
- 4대. 흥영군 이우(興永君 李鍝, 1912 ~ 1945): 의친왕의 차남. 영선군의 양자. '흥영군(興永君)'이란 봉호가 있는데, 사가에서 내린 시호로 정식 칭호는 아니다. 이우는 어릴 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고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사망했기에 운현궁에서 산 기간이 짧았다. 이복 여동생들[16] 이나 친척 여동생들에게는 '운현궁 오라버니'라고 불렸다고도 한다.[17]
- 5대. 이청(李淸, 1936 ~): 이우의 장남. 부친의 사망 당시 식민지 조선에 있었으며 부친 사망에 따라 부친의 공족 칭호를 생전에 받은 바 있다.[18] 이후 운현궁을 서울특별시에 매각했고, 운현궁의 각종 유품들을 서울특별시에 전부 기증했다. 2012년, 현재 본인이 설립한 석파학술연구원에서 법적상 증조부인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
운현궁계 황족들의 묘는 모두 흥선대원군 묘역인 흥원(興園) 내부에 있다. 원래 흥원은 경기도 파주시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1966년에 파주의 묘역 일대가 주한미군 시설로 수용됨에 따라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된 것이 현재에 이른다. 사실 말이 '원(園)'을 썼지 막상 가보면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냥 지체 높은 집안 선산 정도의 규모로, 흥선대원군의 묘[19] 만 온전히 남아 있고 나머지 가족들의 묘는 화장을 해서 이우의 묘가 있던 자리에 납골묘로 따로 모아 놓았다.[20] 왕공족에서 공가의 일환으로 편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왕가 왕공족 참조.
5. 여담[편집]
1908년(융희 2년) 4월 28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그 무렵 흥선대원군의 양조카(흥완군 이정응의 양자) 완순군 이재완이 자기 집을 고쳐 지으면서 운현궁 건물 30칸과 종정부 석재 전체를 사가서 비판받았다고 한다.
덕성여자대학교의 문장 디자인이 운현궁 양관 외형이다. 덕성여자대학교 종로캠퍼스가 운현궁 양관이기 때문이다. 한때 덕성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들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때 운현궁은 운현궁 양관을 매물로 내놨다. 이에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덕성학원이 1948년 11월 30일에 이를 매입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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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친왕 이래 이우 등 일제 왕공족 운현궁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2] 다른 대원군궁인 도정궁과 누동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도정궁의 건물 몇 채는 제 위치는 아닐지언정 아직도 남아있다.[3] 종로소방서는 1978년 이래로 옛 수송국민학교 교사에 바탕을 두었던 종로구 통합청사의 일부를 사용하여 오다가, 통합 신청사의 건립이 진행되면서 운니동의 임시청사로 이전한 것이다. 종로소방서는 2024년까지 해당 임시청사를 사용할 예정이며, 그 이후에는 수송동의 통합 신청사에 입주할 예정이다.[4] 맨 위 사진에서 기와집이 모여 있는 곳(운현궁) 바로 뒤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이 바로 운현궁 양관이다.도깨비집[5] 그 좁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였다. 물론 정확히 측정한 것은 아니기에 과장일 수 있지만, 그래도 '몇 리'라고 했는데, 최소한 1리(= 400 m)는 당연히 넘었을 것이다.[6] 이 당시 정주영 현대 회장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에 있던 변기와 세면대 등을 활용한 현대식 화장실 등을 운현궁에 여럿 설치했었다고 제14대 대통령 선거 때 발간한 책자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통해 밝혔다. 덧붙여 우리 풍습에는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데 어째서 뒷간을 방 안에 설치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7] 비슷한 사례로 안동 김씨 세도가였던 김홍근의 삼계동정사를 흥성대원군이 차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이자 임금인 고종을 모시고 가서 하룻밤 잠을 잤다. 그리고 나서 김홍근은 임금이 계신 집을 신하가 사용할 수 없다하여 흥선대원군의 차지가 되어 석파정이 되다는 야사가 있다.[8] 그래서 고종이 양관 건립을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9] 사진은 1982년 당시 촬영. 여담으로 뒤에 보이는 중앙문화센터 건물 자리가 고종이 태어났던 집 터이다.[10]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창립자 김영무와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의 아버지이자 이승만 대통령 주치의를 지냈다. 낙원동에서 김승현 내과를 운영하다 1993년 별세.[11] 납채(納采. 남자의 집에서 청혼의 예물을 보냄.), 문명(問名. 여자의 생년월일을 물음.), 납길(納吉. 문명 후 길조를 얻으면 이 것을 여자의 집안에 보냄.), 납폐(納幣. 혼인을 정한 증명으로 예물을 여자의 집안에 보냄.), 청기(請期. 남자의 집안에서 결혼 날짜를 정하여 여자의 집안에 지장의 유무를 물음.), 친영(親迎. 신랑이 직접 신부 집에 가서 아내를 맞이함.)를 말한다. 이 육례를 다 갖춰야 정식으로 결혼한다는 말이었다.[12] 관례(冠禮. 머리에 갓을 써서 어른이 되는 예식.), 혼례(婚禮. 혼인하는 예식.), 상례(喪禮. 상당했을 때 행하는 예식.), 제례(祭禮. 제사를 지내는 예식)를 말한다.[13] 음력 경진년.[14] 개명 전 이름 이재면(李載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15] 개명 전 이름 이준용(李埈鎔)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16] 이우의 생부 의친왕은 탕아 기질답게 여성편력이 화려해서 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자식을 보았다.[17] 오히려 박영효의 서손녀이자 이우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가 운현궁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 해방 후 구황실 재산이 전부 국유화되자 정부의 높으신 분들을 찾아다니며 운현궁은 흥친왕이 대원군 개인의 가계를 이어받아 대대로 내려온 집이므로 직계 황실과는 별개이기 때문에 황실이 아니라 개인의 사저임을 호소해서 결국 운현궁의 개인 사유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물론, 이우가 틈만 나면 운현궁에 머무르려 하고 가족들도 운현궁으로 보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운현궁의 진짜 4대 주인은 바로 이우의 아내 박찬주 여사인 셈. 운현궁이 1992년에 서울시에 매각된 후에는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자택에서 살다가 1995년에 세상을 떠났다.[18] 원래 이청도 일제에 의하여 이우과 함께 히로시마에 강제로 가야했으나 짐까지 다 쌓은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으로 인하여 아내와 자식을 두고 이우 혼자 가게 되었다고 한다.[19] 2018년, 흥원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측에 기증했다.[20] 낙천군, 은신군, 흥친왕, 영선군, 이문용, 이우, 이청의 동생으로 미국 유학 중 사고사한 이종. 납골묘를 마련한 현재 운현궁 사손 이청이 아버지 이우와 동생 이종 사이에 자신의 사후 묘 자리를 마련했다.[21] 출처: 덕성여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