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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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수원궁궐도.jpg

수원행궁으로 추정되는 〈수원궁궐도〉의 모습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행궁. 현종 시기부터 정조 시기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정확한 위치와 규모와 크기 또한 잘 모른다. 하지만 문헌을 통해서 지금의 현륭원자리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2020년 기준으로 행궁과 관아의 발굴조사를 조금씩 진행한다.


2. 상세[편집]


현종개수실록》 13권, 현종 6년 4월 19일 을해 1번째기사 1665년 청 강희(康熙) 4년. 수원행궁에서 병조 판서 등을 인견하고 진을 칠 곳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수원행궁에 있었다. 병조 판서 홍중보, 어영 대장 유혁연, 총융사 구인기를 인견하고 상이 묻기를,

"앞으로 가다가 어느 곳에 진을 칠 만한가?"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여기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산성(山城)이 있고 산성을 지나면 평야가 나오는데 도로가 조금 넓기는 합니다마는 좌우에 모두 백성의 전답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로 하여금 길에 열을 지어 서게 하되, 곡식을 밟지 않게 하라."

했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어제는 대신들이 하교를 듣고 외작문(外作門) 밖으로 나가 있었는데 대신들이 밖에 나가 있는 것이 미안할 뿐만 아니라 또 병부(兵符)를 지니고 있으니 멀>리 있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늦은 밤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상의할 일이 있을 터이니 그들을 내작문(內作門) 밖에 들어와 있도록 하라."

했다.


- 《경기일보》 '수원고읍성' 기사중 일부 -

현종실록》을 보면 이때부터 수원의 군병이 7천 혹은 8천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 무렵 수원고읍성 안에 왕이 거처할 수 있는 별당을 마련했는데, 시설이 확장돼 숙종시대에는 ‘행궁’으로 승격했다.

이 무렵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읍성이 보수됐을 것이다. 숙종이 노량사장에서 군병을 친열하면서 “수원의 군병은 가장 정예하다”라고 했던 칭찬이나 “수원의 7천 병마는 본래 날래고 사납다”라는 대신의 말은 ‘무향’ 수원의 실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현재 이 기록을 통해서 수원행궁의 위치를 추정해본 결과, 지금의 수원 고읍성 안에 위치한 듯하며, 행궁의 내부에는 외작문과 내작문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숙종 이전부터 수원에 행궁처럼 사용하던 별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수원에 오기 위하여 이곳 수원행궁에 들렀다. 하지만 행궁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는데,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수원부의 읍치를 같이 옮겼고 그 뒤에 이곳에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수원행궁 또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 또한 수원부의 행궁인 수원행궁을 바로 훼철하지는 않았을 듯 하다. 분명한 것은 현륭원을 조성하기 1년 전부터 정조는 행궁의 훼철을 시작했고, 이후로는 새로 지은 화성행궁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1793년(정조 17년)에 현륭원이 들어선 것으로 보아서, 빠르면 1790년(정조 14년)부터 늦어도 1792년(정조 16년) 사이에는 완전히 훼철당한 듯 하다.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 1월 12일 병오 2번째기사 1793년 청 건륭(乾隆) 58년.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꾸고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키다. 군영 폐단의 제거를 하유하다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한 사람을 두어 보좌하게 했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고쳐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켰다. 전교했다.

"왕위에 오른 이후로 재용을 많이 저축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 왔다. 그런데 다행히 황천에 계신 조종(祖宗)의 말없는 도움을 입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좋은 자리를 잡아 영원토록 천억만년 끝없을 큰 운세를 정했으니, 이 땅의 소중함은 실로 주(周)나라의 풍(豊)이나 한(漢)나라의 패(沛)와 같이 융성할 것이다. 오직 이 곳을 잘 수호할 방도를 더욱 애써 치밀하게 하여 체모가 존엄하고 제도가 엄숙하여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나 소자(小子)의 정리로나 예법으로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종묘의 예절을 두고 먼저 백관(百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소중함에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다.

이곳 수원부는 현륭원〉 자리를 마련한 뒤로부터 관방(關防)이 더욱 중하여졌다. 아름다운 이 자연의 요해처에 달마다 꺼내 볼 〈사도 세자의〉 의관(衣冠)들을 길이 봉안하리라. 선대 왕때에 미리 행궁을 세워 먼저 우러르고 의지하는 생각을 붙였고, 영정을 그려 걸어서 혼정 신성의 정성을 대신하니, 어린애처럼 어버이 사모하는 마음이 가슴에 북받쳐 올라 절제할 줄을 모르겠다.

매년 3백 일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손꼽아 기다리고 바라던 것이 오로지 예를 행하는 하룻동안에 있었기에, 이미 배알을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수원부의 경계가 다하는 고갯마루에 거가를 멈추고 우러러 바라보며 머뭇거리노라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디어지곤 했다. 그래서 번번이 수신(守臣)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정성을 다해 수호하라는 뜻으로 거듭거듭 당부했었다. 그러나 그의 직책은 한 고을의 원이요 그의 품계를 물어보면 3품직의 자리이다. 적임자를 얻어 그 일을 맡기는 것이야 벼슬의 높낮이에 관계될 것이 아니겠지만, 조정의 거조란 지위가 높지 아니하면 위엄이 서지 못하는 것이다. 관방에 대해서는 우선 제쳐두고라도 나의 행궁을 정리하는 여러 가지 임무를 어찌 3품의 고을 원에게 맡겨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일은 옛날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남한산성은 단지 방위하는 성의 역할만이 있을 뿐인데도 대신이 사(使)가 되고 유수는 문반의 경재(卿宰)로만 오로지 차임하면서도 방위의 일을 위해서는 무장(武將)이 남한산성에 통의(通擬)되었다. 그런데 더구나 이 곳 이 수원부의 소중함이겠는가.

지금부터는 수원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키어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오직 대신이나 무장으로 특지를 받아 〈유수에 임명하고〉 또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라. 장용영을 설치한 지는 여러 해가 되었으나 장용영 장수의 칭호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은 외사(外使)가 나오기를 기다린 때문이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장용영의 문서들에는 대장이라고 호칭하기를 마치 어영사(御營使)를 어영 대장이라 호칭하는 것처럼 하며,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그 법식을 갖추되 역시 경리영(經理營)의 도제거를 삼공이 예겸하는 것처럼 하고 호위 대장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키라. 그리고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의 군수 물자와 군사들의 식량을 마련하고 조처하는 것에는 모두 경비에 의존하지 않게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재용을 저축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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