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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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유현 관아모습.png

영유현 관아와 행궁의 모습
1. 개요
2. 상세
3. 건물
4. 기록 속의 영유행궁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행궁. 평안도 영유현(현재의 평원군)에 위치했다.


2. 상세[편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간 선조가 머무른 행궁이다. 선조는 이곳에서 일본군의 상황을 지켜봤다. 선조가 가장 많이 이용했던 행궁 중 하나로, 의주행궁, 영변행궁, 평양행궁, 개성행궁, 숙천행궁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최전방 지휘부였다. 이곳을 통해 영변행궁으로 이동했고 한성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이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한번 불 타 사라졌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했다.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사라져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3. 건물[편집]


행궁으로 사용했던 건물은 객사인 "청계관(淸溪館)"과 "이화정(梨花亭)"이다. 우물인 "대부정(大夫井)"의 이름은 선조가 머물다가 물맛이 좋다고 해서 지었다.

4. 기록 속의 영유행궁[편집]


선조실록》 37권, 1593년(선조 26년) 4월 27일 신해 2번째기사 - 저물녘에 영유의 행궁으로 돌아오다.

저물녘에 이 영유(永柔)의 행궁(行宮)으로 돌아왔다


선조실록 38권, 선조 26년 5월 3일 병진 2번째기사 - '영유의 행궁으로 돌아오다'

미시(未時)에 상이 영유(永柔)의 행궁(行宮)으로 돌아왔다.


선조실록 64권, 선조 28년 6월 11일 임자 12번째기사 - '정원에 지난 5월에 윤두수가 동궁을 배종하고 올린 차자'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동궁 일기(東宮日記)를 당초 봉하여 들이면 혹은 본 뒤에 도로 내려주거나 혹은 당분간 그대로 두었었다. 오늘 열어보니 한 봉>함 중에 이...가리킨다. 전날 소신이 영유(永柔)의 행궁에서 처음 이 뜻을 개진했는데, 이어서 신씨(申氏)라는 선비가 또한 이런 청을 드리었다는 말

을 듣고는 신이 망령되이 확고한 자신감을 오래도록 갖게 되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수정실록] 25년 7월 1일 무오 12번째기사 - '상이 정시를 베풀어 정종명 등 네 사람을 뽑다'

상이 영유의 행궁(行宮)에서 정시(庭試)를 베풀어 정종명(鄭宗溟) 등 네 사람을 뽑았는데 무사(武士)를 뽑은 데 대한 대거(對擧)였다. 무과(武科)는

영유(永柔)에서 베풀어 7백 명을 뽑았다. 【이배(吏輩)들이 농간을 부려 초방(草榜)에 추가로 써넣기도 하고 거자(擧子)들이 대신 활을 쏘게 하는 경우>도 많았으니, 난잡한 폐단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권, 광해 즉위년 2월 21일 무인 12번째기사 - '소경 대왕의 행장소경 대왕(昭敬大王)의 행장(行狀)은 다음과 같다'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휘(諱)인데...영유(永柔)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였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소장을 올려 머물기를 청하니, 왕이 수>찰(手札)을 내려 답하기를 ‘지금 내가...행궁에 있었는데 하루는 해관(該官)에게 하교하기를 ‘오래도록 여염(閭閻)에 거처할 수 없으니, 즉시 전의 궁

성(宮城) 안에다 간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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