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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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평양객사 대동관(일본군에게 점령당시).png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행궁이자 객사인 대동관의 모습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고려시대의 역원이자 조선시대의 행궁 및 객사. 평양부 객사 대동관에 위치했다.[1]


2. 상세[편집]


조선시대고려시대에는 각 지방마다 역원과 객사를 세웠는데, 그 중에서 평양부에 있는 객사의 이름을 대동관이라 했다.

고려시대에는 역원으로 운영되었으며 고려 후기 홍건적의 난 때 불탄 뒤 다시 지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으로 객사를 만들어 세웠다. 대동관은 의주객사 용만관과 성천객사 강선루, 안주객사 안흥관과 더불어 평안도 4대 객사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명나라청나라의 관리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어 평양을 지날 시 이곳에서 묵었기 때문에 객사의 크기도 상당히 컸다. 임진왜란선조가 의주로 피난가던 당시에 여기서 머물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대동관 경내는 꽤 화려했던 듯 하다. 먼저 현재 남아있는 일반 객사에서는 보기 힘든 정원이 존재했다. 또한 객사 크기는, 정청은 정면 4칸에 측면 4칸, 양쪽 익사의 크기는 정면 6칸에 측면 4칸이었다. 조선시대 건물치고는 굉장한 규모이며, 당시 그 정도 크기를 가지고 있던 객사는 전국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2] 그리고 왕권을 상징하는 위패와 영정을 모셨으니 대동관은 평양에서 규모 및 위상이 제일가는 건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3] 저렇게 대동관의 규모가 크고 화려했던 이유는 평양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인 듯 하다. 평양은 역사적인 고도였고, 관서 지방의 가장 큰 도시였기 때문에 저런 큰 규모의 객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까지는 보존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상술했듯 선조가 피난가다가 머물기도 했단 것을 보아 불탄 것은 그 이후인 듯 하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재건했다. 그후 1950년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완파되어 사라졌다. 현재 대동관 자리에는 만수대 분수공원과 평양 학생소년궁전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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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 사람들은 대한제국 시기에 지은 풍경궁과 평양행궁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평양행궁과 풍경궁은 엄연히 다른 행궁이다.[2] 당시 전라도에서는 전주객사 풍패지관, 나주객사 금성관과 같은 객사가 그나마 비슷했고, 경상도에서는 동래객사와 상주객사가 견줄 만 했다. 강원도에서는 강릉객사와 춘천객사가 가장 컸고, 충청도는 청주객사와 공주객사가 규모가 컸다고 전해진다. 함경도의 경우는 함흥객사인 풍패관과 길주객사, 경성객사가 가장 컸다.[3] 평양객사의 경우 조선 초기, 중기에는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다른 왕들의 어진을 모시는 어용전이 같이 위치했다.